무천년설, 삼위일체
김성수 목사님의 무천년설 1.
성경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적 언약의 성취를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고, 가시적인 새 몸으로서의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 둘은 사실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가시적인 둘째 부활에 참여할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첫째 부활의 삶으로
그 둘째 부활의 필연적 도래를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연관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할 부분이 바로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지상적 삶에 관한 부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의 완료된 교회와 지상의 가시적 교회를 넘나들면서 천상의 완료된 교회가 이 지상에서 어떠한 삶을 통과하게 되는지에 관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그 중에서 계시록 20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계20:4~6)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여기에서의
이 ‘천년’이라는 단어가 전 천년설과 후 천년설, 무 천년설이라는 각기 다른 종말론의 해석을 낳게 된 단초입니다.
여기에서의 천년은 단순히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함과 완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등장합니다.
그 숫자는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수인 10이 세 번 곱해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통치의 수 10과 하나님의 수인 3이 결부됩니다.
계시록 17장의 열 뿔과 열 왕 등이 왕적 통치를 가리키는 10이라는 숫자의 용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용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제가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내 말을 잘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천이라는 정확한 숫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의 완전함과 완료성을 보여주신 것이라 했지요?
지금 계시록 20장의 진술은 바로 그 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성도도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언제 시작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성도의 왕 노릇이 시행이 되는 그 천년이 언제 시작되는 지 잘 보세요.
(계5:9-10)
9.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둠의 나라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들이 그때부터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의 ‘피로 사고’, ‘하나님께 드리시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왕 노릇 하는’ 것은 동사의 시제 상,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그 천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천년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기간이 아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생’의 ‘상태’를 ‘천년’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들이 사망의 올무에 갇혀 버린 상태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몇 년을 살았습니까?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할 때 보았지요? 창세기 5장은 죽음의 족보였습니다.
모두 ‘죽었더라’로 끝이 나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 900살 이상을 산단 말입니다.
그 중에 천 살 넘게 산 사람이 있었나요?
므두셀라가 31년만 더 살았어도 천 살을 산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천 살 이전에 다 죽이신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가리키는 천년이라는 ‘상태’, 즉 영생을 살게 될 성도와 대조되는, 육신으로서의 인간들의 수명의 한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이라는 영생의 상태를 살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살고 계시지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영생의 상태인 ‘천년’을 살고 계신 거란 말입니다.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에서
‘목 베임을 받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도끼’라는 뜻을 지닌 ‘펠레퀴스’에서
파생한 동사 ‘펠레키조G3990πελεκίζω’의 완료 수동태 분사입니다.
- 베어내다,즉 머리를 자르다 목을 베다.
반면에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에서 ‘살아서’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것은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될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영 단번에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해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는 마치 도끼로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핍박과 고난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겪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 번에 살아나게 된 자들의 왕 노릇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왕이 아니라 왕 노릇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이신 분에게 붙어서 그 왕이 가신 길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묵시 속에서의 왕들의 역사 속에서의 왕 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셨지요?
따라서 성도의 왕 노릇 또한 세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역사 속에서의 천년, 즉 영생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삶이 반드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6:9~11)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잘 보시면 여기에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냐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 증거는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겠지요.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레위기 4장 7절의 말씀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레4: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안 향단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의 피가 번제 단 아래에 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번제 단 아래에 피를 뿌린 자들이라는 말인데 성경은 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죽임 당함’이라는 단어가 바로 앞 장에서 똑같이 나옵니다.
(계5:6)
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똑같이 나오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은 어린 양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바로 그 왕의 죽음이 그대로 성도들에게서 실재 화되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죽임 당함을 왕 노릇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을 하게 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난 삶, 즉 영생을 살게 되고, 그 삶이 천년의 삶이며, 그 천년의 삶은 성도들의 죽임 당함으로 점철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죽이는 이가 누구냐인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 세상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임 당함의 실행 주체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감안 할 때,
그 예수님의 죽임 당함을 실재 화하여 살게 되는 성도의 죽임 당함은 하나님에 의한 죽임 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천년을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죽이시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왕 노릇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영생을 사는 일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게 복음입니다.
http://cafe.daum.net/smyrnacafe/GTsy/446
김성수 목사님의 삼위일체
<고 김목사님 요한복음 강해에서 가져옮>
75.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승천 뒤에 이루어질 성령 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와 내용에 관해 심도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위해 ‘내가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으로 성취가 되고,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승계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 2의 자아(alter ego)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사역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다른 자아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면에서의 다른 자아는 아닙니다. 잘못 오해하면 (alter ego)를 양태론 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건 이단입니다. 저는 지금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제 2의 자아(alter ego)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주님께서 ‘그 날에는(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울러 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요? 따라서 우리 안에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고 그 삼위의 하나님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14장 1절부터 전개되고 있는 ‘처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 처소의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를 하고 계세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 안에 우리가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오늘은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주까지 연결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가 다소 어정쩡하게 끝나는 것 같아도 조금 참으시고 다음 주 설교까지 연결해서 잘 들으셔야 합니다. 제가 이번 주와 다음 주 설교 원고를 잘 정리를 해서 나누어 드릴 테니까 집에서 열심히 읽어 두세요.
오늘 설교의 내용은 강해의 성격을 띤 신학 강의가 될 것 같네요. 조금 딱딱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과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반드시 숙지해 두어야 할 부분이므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신 분들은 앞으로 삼위일체라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강림은 우리를 사랑한 자로 만들어 내셨고, 계명을 다 지킨 자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구속의 사건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죽으시기까지 지켜내시고는 그 계명지킴의 사건을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를 목숨 걸고 사랑하셔서 그 사랑 또한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본문에 나왔던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을 하신 후 그 분의 십자가 지심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계명을 다 지키셨고 그 계명 지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발로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신 자신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키지도 못할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이 된 성도의 구속 사건이 성령의 ‘더 큰일’사역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로, 공짜로, 아니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지고 적용이 되어졌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그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중보에 의해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시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요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런데 15장과 16장에서는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16:7)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정확하게 누가 보내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성령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임과 동시에 하나님 아들의 사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 그리고 서방교회의 분열이 여기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동방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했고, 서방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에게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에게서도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결론은 서방 교회가 옳았지요.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아들의 영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입니다.
(롬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보세요. 바울이 한 문장 안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부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을 아예 아들의 영이라 부릅니다.
(갈4:6)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이시기도 하면서 아들이 보내시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분명 요한복음 14장16절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시는데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하십니다.
(마28:20)
20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까?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의 해결책으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인 것입니다.
제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오늘 조금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는 단어입니다.
그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교부 터툴리안입니다. 터툴리안은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며 교부였습니다. 그 분이 ‘파락세아스를 반대하여(against paraxeas)’라는 책에서 삼위 하나님의 한 본질과 세 위격을 처음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그 이론은 후에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사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조금 문제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한 본체(substantia)와 세 인격(persona)’으로 표현을 했는데 당시에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는 개체성을 가진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 때 이 ‘페르소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영화감독의 사상이나 인격, 의도 등을 연기로 잘 표현해 주는 특별한 배우를 그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지요? 그렇게 이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습니다.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을 다시 번역하면 ‘한 본체(substantia)와 세 역할(persona)’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양태론(modalism)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정확하게 양태론은 아니지만 양태론 적 그림자가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지요?
그 터툴리안의 부족한 삼위일체론을 어거스틴이 이어받아 발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도 삼위 하나님 각자의 개체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의 일신론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심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르는데 그는 한 인간 안에 있는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억, 지성, 의지는 한 인간의 어떤 측면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세 인격체로서의 개체성을 가진 인격적 개체로서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이론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도 양태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대의 존 칼빈은 세 인격의 인격적 개체성을 강조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독자적 개체성을 확실하게 부각을 시킨 삼위일체론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칼빈은 아타나시우스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로 연결되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깊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터툴리안 식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대가들에 의해 전승이 되어졌습니다. 그 중 칼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페르소나’는 계몽시대 이후의 개체성이 들어 있는 의미의 인격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person)와 세 존재양태(seinsweise)’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칼 라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 라너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person)와 세 본체의 양태(subsistenzweise)’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을 한 것에 유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 가지 양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역시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인 것입니다.
혹시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양태론(modalism)’이 뭔지는 다 아시지요?
3세기의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일신론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세 가지 역할을 하신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한 인격이신데 세 가면(프로소폰)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구약 때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예수님 안에서는 성자 예수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의 모습으로 옷만 갈아입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경륜적 삼위일체론(the economical doctrine of the trinity)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라는 본체가 빛과 열의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물이 얼음으로, 수증기로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모양만 바꾸어 세상에 역사를 하신다는 그런 주장입니다. 그건 이단으로 규정이 된 이론입니다.
만일 그들의 이론이 맞다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행위는 모두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래 한 인격인데 누가 누구한테 기도를 합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도 쇼에 불과한 것이고요, 뿐만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 되지요?
만일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과 15장 16장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됩니다. 또 다른 보혜사도 같은 보혜사가 되고, 누가 누구를 보내는 것도 전부 가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지요. 누구와 누구 사이를 중보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들렸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예수님의 복화술이 되는 것이고, 스데반이 본 하나님 옆에 서 계신 예수도 착시일 뿐입니다.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의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에 매여 일신론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전부 이 양태론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삼위일체론은 어떠한 것인가?
제가 보기에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가장 잘 정리를 해 놓은 신조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인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사도신경과 거의 흡사하지요?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는데 여기보시면 하나님은 ‘하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사도신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전부 동일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개별적 본체로서의 하나님으로 봅니다.
이 신조가 만들어진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가르쳤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원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가 되긴 했지만 그는 피조물에 불과한 성부보다 조금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시간 가운데서는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존재 했었지만 영원 속에서는 성자가 없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인격적 개체라는 것이 무너지면 우리의 구원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이단들의 주장을 일축하는 신조가 바로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였던 것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 니케아 신조와 385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놓은 신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대항하던 교부들과 학자들이 신조를 통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그러나 인격적이며 개체적인 본체로서의 하나님임을 강력하게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다른 본체를 가지신 한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삼위일체론입니다.
그 세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 열등하거나, 종속적일 수없는,(사역적 측면에서는 종속이론을 적용할 수 있음)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터툴리안이나 오리겐도 성자의 성부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때때로 드러내곤 합니다.(Bavink, 개혁주의 신론)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각 위 사이에는 종속적인 면이 전혀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이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열렸던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이 되는데, 현대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이나 칼 바르트나 칼 라너의 삼위일체 도식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희의의 삼위일체 도식이 성경적으로 정확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ousia)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입니다. 여기에서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는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개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일신론으로서의 한 인격이 아니라 세분의 개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본질(우시아)입니다.
여기에서 한 본질(우시아)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을 지니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신성은 항상 합의가 되어 있으며, 분리될 수 없고, 나누어 질 수 없고, 독자적일 수 없고 각자의 영역을 개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온)을 가지신 세 본체라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히브리서 1장에 나옵니다.
(히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본체의 형상이라 하지요? 여기서 쓰인 본체가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개별적이며 인격적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이며 인격적 개체라는 것입니다. 그 독립적 개체인 ‘휘포스타시스’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본체의 형상’이라는 어구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본질(우시아)이며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신조인 것입니다.
아직 섣불리 결론을 추론하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그렇게 세 본체이면서 하나의 본질이라는 개념을 아주 훌륭한 한 단어로 요약하여 잘 표현한 사람이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통재(相互通在)’와 ‘함께하심’으로 하나 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세 분 하나님의 하나 됨을 가리키는 단어로 상호통재(相互通在)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가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그 단어가 정확하게 오늘 본문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어절의 축약입니다. 서로 침투하여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끊어낼 수도 없고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고 추구하며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 단어의 원래의 뜻은 ‘윤무(輪舞)’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윤무는 무대에서 세 명의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으로 둥그렇게 서서 빙빙 돌며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무용수들은 분명 완전한 객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여럿은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들어 냅니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며 춤을 추어야 하는 윤무의 현장에서 어느 누군가가 손을 놓아 버리고 혼자 독무를 한다면 그 윤무는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혼자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페리코레시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들어내시는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홀로, 충분한 능력과 완전한 힘을 소유하고 계신 분들이 서로 독립적일 수 없고, 개별적일 수 없도록 계획과 의지와 추구와 뜻에서 필연적으로 하나인 상태, 그것이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삼위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 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 중 그 누구도 다른 분을 영원의 측면에서 앞에 있지 않고, 위엄의 측면에서도 앞서 나가 있지 않으며, 능력의 측면에 있어서도 위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 개의 횃불이 있는데 그 각자의 횃불이 하나의 빛을 내고 있는 상태가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빠지면 그건 더 이상 ‘페리코레시스’가 아닙니다. 하나가 빠진 상태에서 세 개의 횃불에서 나오는 그런 빛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은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하나’라는 개념이 제한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하나님, 세 인격체라는 표현을 쓸 때 ‘하나’와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둘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게 되면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수학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괴상한 모순의 결과가 초래됩니다.
삼위일체론에서 ‘하나’가 지칭하는 것은 하나님은 목적이 다를 수 없고, 독자적 계획이 있을 수 없으며, 신성과 능력과 엄위의 본질에 있어서 똑같다는 의미에서 ‘전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셋’은 각자 인격적 개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분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나누어지거나 분리되거나 다를 수없는 하나의 신성을 가진 삼 위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지 ‘일신론’적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는 근원으로서의 신성을 가진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 자체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 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체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과 같은 이단적 일신론에 빠질 위험이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그건 ‘3 Gods’ 혹은 ‘3 gods’를 말하는 삼신론 아닌가?
그렇게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이단이라 정죄된 삼신론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간단히 말씀드리면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체의 인격적 개체성을 언급했다고 해서 삼신론이 맞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세 ‘인격,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Not three Gods)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 글에서 그레고리는 ‘우리는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세 개의 횃불에서 하나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하나의 본질과 세 휘포스타시스’의 형국이기 때문에 결코 그 하나의 불기둥을 세 개의 불기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하나의 거룩과 같은 하나의 동일한 신성과,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신의 삶과 역사만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신 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신론은 세 개의 독자적인 신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세 신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삼신론의 신관입니다.
이런 삼신론의 신관과 삼위일체론을 헛갈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서로 분리되실 수 없고, 함께 거하시고, 서로 안에 거하시고(mutual indwelling), 함께 일하시기 때문에 결단코 ‘세 하나님들’의 삼신론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신적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고, 아들이 그 속에 함께 일하지 않는 경우는 상상할 수도 없고 성령과 관계없이 아들이 행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레고리의 말입니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줄기의 흐름과 같기 때문에, 서로 다른 셋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반면에 삼신론에는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의 교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의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을 형성하는 상호통재의 교리가 삼신론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 신 들, 혹은 세 하나님들에 대한 교리는 삼위일체 신학이 아닌 것입니다.
삼신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오류는 삼신론은 세 신 들의 독자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신 중 그 어떤 신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존재, 곧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그 어떤 신도 절대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몰락하고, 때로는 갇히고 때로는 죽기도 합니다. 도교에 나오는 천신, 지신, 수신 역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 신 들은 모두 자신의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신론으로 이해하게 되면 세 분 모두 신이시지만 그 어떤 분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게 됩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신성의 폄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 모두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모두,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이십니다. 아버지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이 상호통재(mutual indwelling) 상태에 있고,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신성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의 신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규정하는 이론이지만, 삼신론은 결국 세 신 들의 신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니고 고대 교회의 신학적 사변도 아닙니다. 고대교회가 유대교의 일신론과 결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성령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교회가 삼신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고 성자와 성부가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성자와 성령의 경우에도 해당이 됩니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체계화한 이론이고 그 핵심에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의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페리코레시스의 교리는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 등의 성경의 기자들의 가르침의 자연스러운 신학적 체계화였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통재적 삶을 통해 한 하나님이시고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를 이룩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초월과 내주를 이루시며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하시는 지를 부연하고 그 삼위일체 속으로 초대받은 교회에게 쏟아 부어진 은혜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http://cafe.naver.com/jesuskfc/13094
요한복음75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II)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삼위일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한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숙지해 두어야 할 아주 중요한 헬라어 단어가 있었지요? ‘페리코레시스’ ‘상호통재, 상호점유’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윤무(輪舞)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상호 침투하여 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상호통재의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 한 인격이 되어 버린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기체적인 영적 연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나 베뢰아 같은 곳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양태론 적 ‘페리코레시스’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도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합니다. 삼위는 서로 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페리코레시스’는 비판받아 마땅한 아주 부족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그는 이렇게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하는데 다분히 양태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부족한 페리코레시스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보충 설명을 해 드리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페리코레시스의 형태로 오실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비교신론 적 분석을 통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삼위 하나님은 각각의 ‘휘포스타시스’를 가지신 개별적인 인격적 독립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분의 개별적 인격체는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하나의 뜻과 동일한 본질과 동일한 목적을 가진 영적 유기체로서 ‘하나’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삼신론자 들의 주장처럼, 세 분 하나님이 전부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일을 하느라 충돌이 생기거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그런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휘포스타시스)입니다.
그 상호통재의 개념을 성경 구절 몇 개를 찾아서 읽어봄으로 해서 조금 더 선명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성경은 그러한 유기체적 영적 연합으로서의 상호통재 적 표현을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하여 쓰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롬12:5)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지방교회나 베뢰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우리 성도는 모두 ‘한 몸’ 즉 ‘페리코레시스’적 존재로서 한 장소, 한 인격 안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말 서로 한 인격이 되어서 한 장소 안에 상호통재하고 있나요? 아니지요? 우리는 각자의 독립적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나 한 믿음 안에서, 한 목적지를 바라보며, 한 뜻으로 유기적 영적 연합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하나, 한 몸’이라 부른단 말입니다.
(갈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니라
역시 그렇지요? 성경은 성도들을 ‘하나’라 부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경이 마치 우리 성도가 서로 안에 한 인격으로 상호통재 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는 그런 구절도 있습니다.
(빌1:30)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바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하는데 그들이 자기 안에서 보고 들었다는 말을 합니다. 마치 주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주님 안에 계시면서 당신들의 일을 하신 것과 방불한 그런 표현이지요? 그러나 그 표현은 정말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기 안에 들어와 한 인격을 이루고 자기와 함께 보고 들었다는 말이 아니지요?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사도 바울이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 안에서 유기체적 영적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좀 가세요?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가 무슨 뜻인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에게 상호통재 하게 된다는 그 말은 무슨 말이 되는 것입니까? 언젠가 우리 성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고, 우리 성도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며, 우리 성도의 본질이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하게 바뀌어 완성되는 날이 온다는 그런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도와 하나님의 상호통재가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자기들이 도달해야 할 상호통재의 완성지점, 즉 우리 안의 더러운 죄의 오염을 다 비워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꿈과 뜻과 야망과 습관과 집착과 중독을 끊어내고, 비워내어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능력에 연합되어지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요15:10)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분의 말을 듣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 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호통재는 자기주장과 자아숭배에 빠져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던 자가 상대방을 사랑하여 그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 상대방의 뜻에 나의 뜻을 기쁘게 합일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그렇게 하나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방식으로, 즉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의 방식으로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가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킨 자가 된 자들을 성령께서 오셔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그들을 율례를 지키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구속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분 안에 있게 되고 그 분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이 가시적 역사 속에서 반드시 무엇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쉬운 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전가 받아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사랑한 자가 되었으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고, 주님을 사랑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고,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몸 속 어디에 좌정하고 계실까? 심장일까? 간일까? 콩팥일까?’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2,000년 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예수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뜻과 성품과 인격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이고 결국 우리를 당신의 존재와 합일한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예수 안에 거하라는 권고의 말씀과 함께 믿음을 동행시키는 것입니다.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고후13:5)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갈3:2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렇게 성도와 하나님과의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는 믿음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하나님은 편재(omnipresence)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든 계시는 그 분이 어디에는 안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이 하나님과 성도의 상호통재를 이야기 하는가? 바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마귀의 뜻과 목적에 합류하여 그리로 달려가게 됩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를 가리켜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라고 합니다.
(고전6:15~17)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마귀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마귀와 한 인격이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지요? 마귀의 뜻과 생각과 성품을 좇는 자들을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상호통재의 개념인 것입니다. 각자가 독립적 인격체로 존재하되 하나의 뜻과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성품을 완벽하게 한가지로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삼위일체의 개념이 조금 더 확실하게 잡히시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리겐의 종속설 또한 거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동등한 인격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존재론 적으로 종속이 되는 그런 관계라면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단지 예수님의 피조 사실만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의 견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견해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각자가 독립적 인격체(휘포스타시스)이시면서 헤어지거나, 충돌하거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그런 하나이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 보세요.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agent)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누차 강조합니다.(요3:17) 그렇게 보냄 받은 사자인 아들은 자기의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그의 뜻을 좇았으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사자인 아들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는 분으로서, 아버지에게 위임받은 권세로 아버지의 일들인 생명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대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냄 받은 아들의 말씀에서,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아들의 뜻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며 아들의 치유행위에서 아버지의 구원 행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시의 제 1원칙은 계시자(the revealer)는 계시되는 자(the revealed)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원숭이가 설령 동물학 적으로 사람과 99% 같다고 해도, 다른 1% 때문에 사람을 계시할 수 없습니다. 즉 그 약간의 다름 때문에 온전한 계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만이 사람을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본질이어야 하는 것이고 종속적 차이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분명 계시자와 계시되는 자의 구분이 있으므로 둘은 완전히 다른 독립적 인격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고스란히 계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이적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막강한 치유의 힘 또는 생명주는 힘을 그대로 계시해 낸 것입니다. 계시된 자와 계시 되는 자는 이렇게 존재론적으로 같습니다.
(ontological unity)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같아야 합니다.(functional unity) 즉 계시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 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아들의 치유 행위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구원 행위의 대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능적으로 같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subordination)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물론 오리겐 등이 주장한 우열에 있어서의 종속, 존재론 적인 종속이 아닙니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이라는 것은 우열의 개념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인 의지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아버지의 행위를 체험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아들이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합치시킬 때만 아들의 뜻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기에 아들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서의 종속(subordination)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어구와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라는 상호 모순이 되는 듯한 말씀을 화해시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고대의 아리우스 이단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라는 어구만을 들어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피조된 피조물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본질적, 존재론 적으로 같을 뿐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같아야 합니다. 그 의지에 있어서 같다는 것을, 아들이 아버지 의지에 완전히 합치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든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을 한다’는 등의 종속 또는 순종의 언어가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지 본질적,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전능자가 아니라면 그 분은 우리를 결핍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신도 모자란 분이 모자람 속에 있는 누군가를 구원합니까? 따라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상호통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러분이 공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같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한 그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구원사건은 우리의 밖에서 우리의 참여 없이 객관적이며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그 객관적, 역사적 구원사건을 오늘 우리에게 실제로,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오늘 나에게 계시되게 하시고 그 구원이 실제로 내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 내용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 역시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자신의 가르침이 아닌 자신을 보내신 아들과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십니다. 역시 상호통재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요14:26,15:26, 16:14)
성령 하나님은 아들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이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가르침은 원래 아버지의 가르침이므로, 결국 성령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은 아들 안에 일어난 역사적 또는 객관적 계시를 오늘 우리에게 실존적으로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계시자(the revealer)는 계시되는 자(the revealed)와 같다는 것을 확인 했지요?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가 그렇게 같은 것처럼 아들과 성령 하나님,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도 그것은 적용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초월과 내재, 그 어느 것 하나도 배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초월에 계시고 성자 하나님이 그 성부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역사적으로 계시를 하신 것이며, 성령하나님은 그 예수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객관적 계시를 모든 시대에 실존적 계시로 적용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은 각각 독립적 인격, ‘휘포스타시스’이시며 각각 초월과 내재 속에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뜻과 한 마음으로 하나의 일을 완성해 가시는 한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초월과 내재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심으로 성취해 내셔야 하는가? 제가 지금부터 비교신론 적 관점에서 그 부분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힘들어도 잘 들어두세요.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삼위일체 신론의 소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다른 고등 종교들의 신론과 비교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범신론(Pantheism)입니다. 인도 계열의 종교들, 즉 힌두교와 개혁 힌두교라 볼 수 있는 불교의 신론입니다. 범신론은 신의 내재만 천명하고 초월은 천명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온 우주를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우주보다 큰 우주 밖에 있는 초월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더 부연하면, 범신론은 일원론(monism)으로서 온 우주의 본질(Brahman)이 신이라 보고, 이 신 또는 본질이 바로 인간이 육감으로 인식하는 세계에 다양하게 투영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 용어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합니다. 브라만이라는 본질이 다양한 현상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브라만이라는 본질이 다양하게 투영되어서 사람, 소, 산, 나무, 물, 건물, 전기 등 모든 현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들은 신의 그림자인 것이며 그 현상들은 본질이 아니고 환상(illusion)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범신론은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렇게 그리스 철학과 인도철학은 그 기본 구조에서 유사합니다. 둘 다 아리안 족속의 언어와 사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 또한 산스크리트어와 헬라어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인도철학과 인도 종교의 범신론은 보통 수레바퀴로 표현하는 세계관을 낳습니다. 수레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돌지 않는데, 이것을 우주의 본질이라 봅니다. 그 수레바퀴의 축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레바퀴의 바깥은 돌고 도는 것인데, 이것을 신의 투영으로 일어나는 현상(환상)의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변화의 세계, 시간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현상 세계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고(四苦)가 있고, 다시 이것이 반복하는 윤회(輪回)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에서는 영겁의 윤회를 끊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은 자아가, 변화가 있는 시간성의 현상(환상)세계에서, 변화가 없는 영원의 본질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사고(四苦)와 영겁의 윤회(輪回)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열반,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자아가 현상 세계를 벗어나 우주의 본질인 신과 합일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의 그 신의 투영 상태를 종식함으로써 시간과 변화의 세계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쉬운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수레바퀴의 바깥 쪽 바퀴 부분이 모두 수레바퀴의 기하학적 축으로 몰입을 하여 변화가 없는, 사고와 윤회가 없는 영원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열반을 무아(無我), 몰아(沒我), 입적(入寂) 등으로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과 구원론에서 중요한 문제는, ‘누가 그리고 어떻게 그 열반을 가능케 하는가?’입니다. 이 종교체계는 기본적으로 신의 초월을 부인하는, 즉 나 또는 우주 밖에 존재하는 우주보다 큰 분으로 존재하는 신을 부인하는, 범신론적 체계이므로 나 자신을 도와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구원은 나 자신이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범신론의 구원관을 자력구원론이라 합니다.
그 범신론의 구원의 수단은 깨달음, 즉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봅니다. 그래서 힌두교 최고 경전은 지식이란 뜻을 가진 ‘베다’(Veda)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이란, 현상 세계가 모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의 환상으로서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현상 세계에 어떤 가치가 없음을 알고 그 세계 모든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말하자면 그것들과 연(緣)을 끊음으로써, 이 환상 세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마치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을 영원과 연속선상에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 선하게 살아보겠다는 분투가 있는 것입니다.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범신론과 기독교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차이인 것입니다.
그렇게 범신론은 영혼이 지식을 통하여 이 현상, 시간 세계를 탈피하여 이데아, 영원세계로 귀환한다는 플라톤철학과 아주 유사한 구원론입니다. 영지주의 구원관 또한 그와 흡사합니다. 이러한 종교의 자력 구원론 체계는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여서, 신이 범신론적으로 설정되어도 사실 인간에게 아무 소용없는 신입니다. 신이 밖에서 나보다 큰 힘을 가지고 나를 도우러 오는 신이 아닙니다. 오로지 내가 나를 구원해야만 합니다. 이런 종교의 자력 구원론 체계에서 근본 문제는, ‘이 환상 세계의 한 개체인 내가 어떻게 스스로 지식을 얻어 이 환상 세계를 탈피할 수 있는가?’입니다. 다른 말로 나의 유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내 고난들을 내가 유한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반면에 범신론에 정반대되는 신론을 이신론(Deism)이라 합니다. 이슬람교 신론이 대표적입니다. 이신론은 신의 초월을 너무 강조해서 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범신론은 신의 초월을 부인하고, 이신론은 신의 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신론의 신은 너무 거룩하고 위대해서 피조 세계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신론을 가리켜 부재(不在)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신론은 초월자 신이 이 세상을 정교하게 만들고는 그것에 이치와 섭리를 넣어서 세상이 스스로 굴러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을 낳습니다. 그래서 이신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할 때 정해 놓은 이치대로 굴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론을 가진 종교의 신봉자들은 보통 완전한 숙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말끝마다 ‘인샬라(알라의 뜻대로)’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 또한 완전한 초월 속에 앉아 인간 세상에 전혀 관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신론적 구원관에서도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자선을 많이 베풂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신론 종교도 범신론 종교와 마찬가지로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력 구원론인 것입니다. 범신론은 신의 초월을 부인하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없고 반면에 이신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초월자 신을 설정하기는 하나 그 신의 내재를 부인해서,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러 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둘 다 우리 구원에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인 것입니다. 결국 그 둘은 모두 인본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결국 자력 구원론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들은 모두 지식과 선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봅니다. 지식과 선행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조금씩 종교의 색깔이 달라질 뿐입니다.
현대 세속주의 적 인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식을 쌓고 그것을 기술로 응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잘 도야하여 선행을 도모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정말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까? 현대 인본주의 문명이 과연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나요? 아닙니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삶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확대하는 변증법적인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고난들을 인간이 스스로 지닌 유한한 자원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아주 위험한 신론이 현대 신학계를 강타하고 있는데 신학에서는 그것을 과정신론이라 부릅니다. 과정신학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세계관이 미국 현대신학의 흐름의 형성에 또 다른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의 철학에 토대를 둔 신학이 바로 과정신학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영국 태생인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로서 현대과학과 조화를 이루는 영이상학을 정립하는데 자신의 만년을 보낸 사람입니다. 과정철학으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생성(becoming)과 관계(relation)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양극적인(dipolar)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초적(primordial)본성과 결과적(consequent)본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전자로서의 하나님은 현실성의 근거로서, 어떤 현실에도 제한되지 않는 그런 본성임에 반하여 후자로서의 하나님은 창조적 전진의 결과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에 관계하며, 세계는 하나님에게 반응을 합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적인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하나님과 세계가 창조적인 전진에 서로 참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트숀은 만유재신론(Panan the ism)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오그덴이라는 신학자는 그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더욱 더 발전시켜 자아의 기본범주는 존재나 실체가 아닌 과정 또는 창조적 생성이라 규정하며 하나님을 실체가 아닌 창조적인 생성의 한 예, 그리고 사회적이며 시간적인 실재로서 규정을 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불변적이며 무시간적이고 비관계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불변적이거나 무시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계속적으로 자기 창조의 과정 속에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요 성장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적이지 못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 하에서 인간을 불가항력 적으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역사와 세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전적으로 구원합니까?
이러한 신론들은 절대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신론들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전적 타락, 완전한 무력함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핍 속에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결핍과는 무관한 초월의 존재가 밖으로부터 와서 그의 삶에 개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인간에게 참 구원이 있으려면, 초월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자 동시에 인간에게 와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초월하며 동시에 내재하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초월자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우리의 죽음 문제를 우리의 제한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도 그걸 어떻게 해결해 보려 발버둥치는 처절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다른 한편 초월자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혼자 하늘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을 것이고 우리도 우리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려는 불가능한 일을 헛되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의존적으로 자라가고 변해가는 그런 하나님은 전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 놓인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월자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시며 그 분을 완벽하게 계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사건으로 구체화 시키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그러한 역사적 객관적 예수님의 사역을 각 시대와 택한 백성들에게 실제화 하여 적용을 시키신 것이고요.
이렇게 하나님은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분으로서, 초월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내재하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 그의 구원을 덕 입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은 기독교 핵심 진리요 그 반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도, 구원도, 은혜도 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은 모든 기독교 교리의 궁극적인 정박 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그 삼위일체의 상호통재, 페리코레시스 속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셔서 우리와 함께 화려한 윤무를 추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아직 인본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하나님을 종 부리듯 부리시겠습니까? 은혜의 물줄기는 은혜의 수원지인 하나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 비로소 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아져서 그 분의 뜻이 아닌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려 할 때 은혜의 수원지가 우리보다 낮아지게 됩니다. 그 때에는 물이 위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우리를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가 전능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가 되신 그 연합의 비밀이 우리에게도 깨달아져서 우리가 우리의 꿈과 야망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낮아지려 할 때 그 때 비로소 삼위 하나님과 성도들의 윤무는 화려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더 낮아집시다. 더 비워냅시다.
-김성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