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그리스도의 고난(Ⅲ)
상처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롬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앞의 두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왜 필요하며 하나님은 왜 막아주시지 않는가? 그리고 고난을 피할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결론은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하는 자로,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시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이요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그런 가르침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너무 다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쓰이는 요술 방망이가 아닌 것입니다.
<고전4:7~16>
7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8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위 구절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며 부요하며 왕 노릇하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죽이려고 미말에 두신 자들처럼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썩어지는 밀알로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해서 “봐라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성공하게 되지, 그러므로 예수 믿어!” 이렇게 자신을 증명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증명해서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받은 시험이 뭡니까?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멋있게 돌로 떡을 만들어 봐”, “네 신성을 한 번 보여 봐” 입니다. 자기가 능력이 많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맞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그렇게 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멋지게 성전에서 뛰어 내려봐, 그럼 천사들이 수종들 거야” 예수님은 안 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것을 보여주십니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약속과 영광은 내세적인 것이지 현세에서 받을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선지자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영혼들의 구원 사역에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 우리의 거룩을 이루어 가면서 아울러 그 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최초로 그 구원의 도구로 살다 가신 예수, 먼저 그 제사장의 삶, 선지자의 삶을 살다 가신 그 예수가 사신 그 삶을 우리도 동일하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러한 예수님의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복음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거나 가짜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입 다물어 버리면, 그리고 세상에게 “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겠어.” 하고 꼭꼭 숨어 버리면 고난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결코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예수를 잘못 믿는 사람들은 뭔가 고난과 고통과 시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음을 성경에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사랑하십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경륜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천국 입성을 향해 끌고 가십니다. 전 세계가 아니 이 우주가 전부 그리스도인들의 장성한 분량으로의 성장을 위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의 실정이나 정치가들의 부패 등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백성, 의인 열 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경륜해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침 삼킬 여유도 안 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며 그들의 거룩을 챙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난이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고통과 고난과 시험이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인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러한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통해 받는 ‘상처’는 무엇입니까? 또 그 ‘상처의 치유’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상처 치유를 위해 ‘내적치유’다 뭐다 하는 말을 하는데, 정말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물론 psychologically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스리고 다독거리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그런 상처는 우리의 삶에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는데 지인들의 학대나 무관심으로, 또 내가 예기치 않았던 사건 등으로 나의 삶에 덤으로 얹혀 진 짐으로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계하시는 성도의 삶에 우연(偶然)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언제 계획 된 것입니까? 창세 전에 계획되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천국에 이르는 길까지 누구의 손에 붙들려서 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의 거룩에 해가 되는 것은 당연히 막으시겠지요? 그리고 그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데 필요한 것은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우리의 선을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아는 사람이면 우리가 상처로 괴로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는 상처의 정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If only, “만일 과거에 그 일만 없었다면”, “만일 미래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C. S. Lewis가 쓴 『스쿠르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고참 마귀 스크루 테이프가 웜우드에게 인간들을 현재에 눈을 두지 못하게 과거와 미래로 붙들어 두라고 충고를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청했을 때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와병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일부러 나흘 뒤에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If only”, 바로 그게 인간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게 상처에 대한 해결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정확한 복음을 알게 되면 상처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화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분명 고통이요 고난이며 시험입니다. 거기에다 믿었던 예수님이 늑장부려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서운함과 미움이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고통과 고난과 시험은 예수님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입고 자란 어떤 흑인 소년이 수차례 감옥에 드나들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스스로 자격지심에 어떤 자리에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고 그는 그처럼 어리석고 못난 자신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격했으며, 그의 과거와 현재를 주관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어린 시절 가난과 학대와 투옥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쓰임을 받는 자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만큼 상처가 많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게조차 따돌림을 받은 듯한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음에도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넣으셨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몽을 해주고 술 맡은 관원 장으로부터 나가게 되면 자신을 구해 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배신을 당합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이 석방되어 나가서는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나를 팔지만 않았으면”,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이렇게 감옥에 넣지만 않았으면”, “술 맡은 관원장이 나를 잊지 않고 꺼내 주기만 했으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 요셉의 삶을 형통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어사전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삼으시기 위해 그를 감옥에도 넣으시고 섭섭한 일을 당하게도 하시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하시는 그 모든 일이 ‘만사형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만사형통을 정말 원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사형통은 소원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만사형통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도됨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의 전 생애의 모든 사건들과 상황들을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의 그 배려와 손길을 만사형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일 그 때 그런 일만 없었으면” 하고 자꾸 과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정말 용기 없는 행동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런 과거와 그 고통에 집착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어떤 필요들이 충족됩니까? 대개 책임전가, 변명, 현재의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 이런 것들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의 상처에 집착함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아주 나약하고 비겁한 짓입니다.
“내 성격이 이렇게 난폭한 것은 과거에 아버지한테 많이 맞아서 그래”, “내가 이렇게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과거에 너무 못 먹고 자라서 그래”, “내가 바람을 피운 것은 우리 부모의 무절제한 생활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늘 우울한 것은 행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야.” 이런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 과연 올바른 치료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그 모든 것들은 다 죄 속에서 태어난 우리 죄인들의 죄성 때문이지 과거의 어떤 상황과 처지와 사건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건들에 자신의 죄성에서 기인한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씌우려고 합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과거에 집착함으로 은근히 거기에서 자기 도피를 하며 현실 도피에 필요한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의적으로 과거의 상처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 않기도 합니다.
심리학(psychology)에서 어떻게 그 상처를 다루는지 아세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적치유 집회 같은 곳에 한 번씩 가본 분들은 아시지요? 먼저 그들은 분노나 열등감, 우울함, 거절감 등이 있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게 합니다. “나는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나는 늘 우울하다.”, “난 늘 거절감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행복하고 강한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러한 증상들을 감추곤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나를 그렇게 만든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과거에 분노를 일으키게 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 나를 열등감에 젖게 할 만한 환경이 있었는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 만한 인물이 있었는가? 그리고는 세 번째로 지금 나의 것처럼 되어 있는 그러한 증상들은 과거의 그런 인물, 그런 사건 때문이었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그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에 책임전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지요. 참 비겁한 방법입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상처로 인한 증상들이 해결될까요?
그런 류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귀신론을 가르치는 어떤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병이나 어려움들이 다 귀신의 탓이라고 돌립니다. 그래서 감기귀신, 치질귀신, 섭섭귀신 모두 귀신 탓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닥친 것이지 귀신들이 우리에게 없던 것을 억지로 만들어서 던져놓은 것이 아닙니다.
책임전가로 그런 상처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결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예수, 복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가 그런 인간임을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이 자기 삶의 왕이 되어 사는 인간들의 삶은 그렇게 우울하고, 불행하고, 파괴적이며, 슬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느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모두 다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과거의 어떤 인물 때문이 아니라 원래 우리는 그런 악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시켜 주셔서 이렇게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 칭해 주시고 자녀다운 삶에 대해서 알려 주셨으므로,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이제 공급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분노를 일으킬 수 없으며, 더 이상 우울하지 않으며, 더 이상 거절감 같은 것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야함을 확인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목숨 걸어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확인 이외에 우리가 상처라는 것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를 상처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예수님보다 고난과 고통과 배신과 거절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모든 것을 다 극복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거절감이 되시고, 우리의 눈물이 되시고, 우리의 불행이 되시고, 우리의 배신감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몽땅 태워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떠난 자로서의 거절감, 배신감, 슬픔, 눈물, 분노 등에서 해방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아울러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 속에서 추측하지도 마십시오. 사람들의 걱정의 90%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관한 것이랍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왜 삽니까? 현재를 사십시오. 현재의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는 어떤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며,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오늘 하루를 그냥 성도로서 열심히 살면 됩니다. 왜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를 치료자로 삼아 그 분에게 달려가 고침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간혹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저 남자하고 결혼을 안 하고 아무개랑 결혼했다면 지금 떵떵거리며 행복하게 사모님 대접받고 잘 살았을 텐데”, “내가 저 여자랑 결혼 안 하고 그 때 그 여자랑 결혼했더라면 지금 말 잘 듣는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뭐 이런 꿈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여러분 꿈 깨세요. 그건 그야말로 꿈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가장 적합한 짝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무지갯빛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삼 개월이면 정이 드는 것이고 아무리 훌륭하고 예뻐 보이는 사람도 삼 개월이면 싫증이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두 남의 떡이 커 보이니까 그런 배부른 꿈을 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도 주님을 모르면 똑같이 불만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훌륭한 의사였습니다. 어느 날 정신과 닥터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았습니다. 마침 친구가 어떤 환자를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목사님이 친구 닥터에게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물었답니다. 그 친구 왈(曰), “몹시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며칠 앞두고 도망을 가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려서 그 충격으로 저렇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옆 병실에 같은 증상의 또 다른 남자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바로 저 남자가 옆방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와 도망쳐서 결혼한 남자라네, 그런데 그 여자가 하도 바가지를 긁고 못살게 굴어서 저렇게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네.” 하더랍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떠나버린 여자를 못 잊어서 우울증에 걸리고, 그 옆방에 그 떠나간 여자에게 괴롭힘을 받아 우울증에 걸린 남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고침을 받기 전에는 늘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흡혈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막연한 기대나 후회로 자신의 상처를 키우지 마세요.
“과거에 그 일만 없었더라면, 과거에 그 일만 성공했더라면”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장미 빛 꿈들을 가지고 오히려 자신을 더 괴롭히는, 그러한 꿈에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과거에 그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더 험한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과거에 그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우리는 허랑방탕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만일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이라고 원망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너희가 믿으면”이라는 대전환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그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금요일을 취하셔서 가장 밝은 부활의 날인 주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그 어두운 과거의 상처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자신의 가치를 아주 낮게 취급하여 자의식을 저하시킨다는 심리학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혹시 그런 사람들 있습니까? 우리의 진짜 부모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부르시며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걸 모른다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독생자를 주고 바꾸실 정도로 우리를 가치있게 취급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습니까? 그럼 그 상실된 자존감에서 지금 즉시 일어나야지요. 우리 진짜 부모님은 우리를 목숨 바쳐 사랑하시니까요.
혹시 커다란 배신을 당해 씻지 못할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어 분노로 아파하는 분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돌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인간들을 향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며 이미 그 분 안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 자가 된 자들입니다. 그 예수님보다 더 큰 배신을 당한 사람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분노와 배신감 속에서 용서와 사랑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사용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셨고, 그 본보기로 하늘의 왕이신 예수의 삶,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상처로 간직하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용서한 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다 예수 안에서 풀려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공부해야 하고 예수를 배워야 하고 예수를 추구해야 합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것, 그것만이 상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적치유나 심리학 치료를 받아본 사람들은 MBTI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Kartherine Briggs 와 Isabel Briggs Myers가 칼융의 심리 유형론을 근거로 보다 쉽고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지표’를 말합니다. 이 MBTI에 근거해서 누구는 J의 성향이 강하다. 누구는 P의 성향이 강하다. 누구는 II 내성적이다. 누구는 E 외향적이다. 이런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해서 치료에 앞서 행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 자기 파악이나 성격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분노를 다스려 줄 수 있을까요? 정말 그 지식이 우리의 상처를 경감시켜줍니까? 그렇게 타인과 심리적 선호의 차이가 있음을 아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가 됩니까? “그는 원래 어질기 좋아하고 욱하는 성질이 있고 내성적이라 나에게 그렇게 대했구나?” 그걸 아는 것으로 정말 우리의 상처가 치유될까요? 아니면 남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저 사람은 INFP라 저런 거야, 그러므로 내가 이해해야지.” 이게 되던가요?
교회에서 어찌 세상 심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심리학을 이용해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세미나를 하고 다닙니까? 그건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 상담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고 목사는 예수로 말미암은 완전한 회복만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뭐 먹고 살라고 목사가 거기까지 손을 댑니까? 그리고 목사들이 그렇게 시간이 많습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한테 유식한 거 티내고 싶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얻고 싶은 것들 해결해 줍네 하면서 비위 맞춰주고, 그러면서 분명히 그런 얄팍한 방법으로는 치유되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불쌍한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적치유 한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온전히 치유된 사람을 못 봤습니다. 자신들에게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방법으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고요? 천만의 말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만이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망발도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치유되는 것이 있고 내적치유로, 심리학으로 치유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고 우기지도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상처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고통이나 고난 그로 말미암아 생긴 상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 즉,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방법밖에는 우리가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열심히 성경 읽고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시선을 내세로 돌려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는 만큼 이 땅에서의 힘들었던 것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보 같은 논리가 한국 교계를 강타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조상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참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 LA에서도 어떤 큰 교회 목사가, 그것도 장로교 목사라는 사람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부 미쳐 버린 것 같아요. 거기에 목사들이 수백 명씩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 목사들의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메릴린 히키라는 이 무당 같은 여자가 쓴 무식한 책이 한국 교계를 강타했었습니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는 한국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권위자 이모 목사의 스승인 크래프트 교수라는 사람이 강의를 하면 그 강의실이 한국 목사들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그 설교할 구절을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로 먼저 찾아서 읽어보고 거기에 쓰인 단어들의 시제나 격 같은 것을 연구하고 또 그 단어들의 용례를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고 그 구절을 그 책에서 어떤 부분에 있으며 성경 전체에서는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찾아내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의 진의를 밝히는 것을 exegesis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끌어다 쓰는 것을 우리는 eisegesis라고 하지요.
많은 분들이 exegesis를 잘해서 제대로 잘 가르치고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엉뚱한 성경 구절들을 끌어다가 설교를 만들어 내는 eisegesis의 경우를 왕왕 봅니다.
메릴린 히키가 쓴 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든가 자타가 공인하는 치유의 대가 이모 목사의 책 같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후자의 경우들입니다. 성경은 많이들 읽은 것 같은데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구절을 끌어다 쓰고 있기는 한데 전체 문맥에서 이해한 구절이 아니라 그 몇 문장만 떼어서 그럴듯하게 짜 맞추고 있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구절이 출애굽기 20장의 제 2계명 뒤에 붙은 말씀입니다.
<출20:5-6>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아비의 죄가 삼사 대까지 자식들에게 내려가게 되고 아비가 하나님께 순종한 자들은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성경 해석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데도 우리 조상의 저주가 정말로 후손들의 피를 타고 계속 내려오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조상의 저주를 끊어 버리지 않으면 예수를 믿고도 계속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정말 기독교의 교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무당들이 즐겨 쓰는 상술입니다. 무당들이 고액의 굿을 주선하기 위해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하는 말을 예배당에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못 끊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호세아서는 찢어버려야 합니다. 로루하마라 한 그곳에서, 로암미라 한 그곳에서,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라,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은 없애 버려야 합니다. 조상의 저주가 후손에게도 계속 타고 내려온다면, 그래서 그 저주를 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은 헛된 약속 아닙니까? 이렇게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너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될 것이라는 호세아서는 찢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렘31:27-30>
27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28내가 전에 그들을 뽑아내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재앙에 빠뜨리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감시를 늦추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29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30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 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녀의 이가 시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요. 우리의 조상에게 내린 저주가 우리를 동일하게 붙들고 있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복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000이라는 숫자를 써서 그 은혜의 풍성함이 얼마나 크신 것인가를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수하면 얼른 떠 오른 것이 1,000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제일 큰돈은 백만 원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당시 고대인들은 1,000이라는 숫자를 가장 크고 풍성한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썼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3, 4대까지 흐른 다는 것은 1,000이라고 표현된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인지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그런 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그 후손에서 솔로몬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옵니까? 저주는 3, 4대까지 흐른다면서요?
그리고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정말 천 때까지 다 복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던가요? 아니잖아요? 여러분 주변에 진짜 천대나 계속해서 복 받은 가정이 있으세요? 사무엘의 1대 아들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아버지의 믿음을 유산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안 믿고 평생 죄만 짓다가 죽은 부모의 자녀는 정말 예수 믿을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를 끊어내지 않으면 뭔가 모자란 그리스도인으로 치는 것입니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도둑 집안에서 도둑이 많이 나오는 것은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때로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보고 자란 것이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책임 전가 시키지 마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질병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면, 병을 앓다간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분노해서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고 제발 핑계대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모두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계속되어지는 질병과 어려움을 맞닥뜨리면서 더 이상 눈물과 아픔과 상처가 없는 천국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뭔가 부족하기에 아직 남겨 놓은 저주가 아니란 말입니다.
치유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치사한 것이 책임전가입니다. 자기가 감당해 내야 할 것을 왜 다른 사람과, 조상과, 다른 사건과, 상황으로 책임을 돌려버립니까? 그것도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죄의 본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그 사람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죄,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과 고통과 시험이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할 길을 함께 주십니다. 피할 길이란 그 문제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그 시험에 낙방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케 하지 않을 수 있는 순종의 길이 피할 길이라 했습니다. 그 피할 길로 인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패배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교를 각오하고 순종하는 길이 피할 길이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의 상황이나 겉모습만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닥쳐온 고난과 고통과 시험은 반드시 우리의 거룩의 완성에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상처다 저주다 하여 괴로워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교훈으로 삼아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생에 보내주신 사람막대기 인생 채찍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모든 과거의 어려움들을 내 삶에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로 싸잡아 원망하지 말고 꼭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가계에 흐르는 저주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식한 무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타락한 인간들에게 쏟아진 저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때가 찬 경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다 해결되었고 우리는 이제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 고난이, 고통이 찾아 올 때 그것을 거룩을 향한 성숙의 계기로, 화(禍)를 복(福)으로 선용할 수 있는 진짜 실력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구절 몇 구절을 찾아서 함께 읽고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이야기는 마치겠습니다.
<롬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골2:13-15>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고후5:17>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9>
19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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