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영대 목사 (주성교회)

12. 창세기 2:4-6 하늘과 땅의 내력-첫 번째 톨레도트

Hebrew 2023. 4. 17. 21:14

창세기 2:4-6

하늘과 땅의 내력

- 첫 번째 톨레도트 -

 

 

창세기 1:1-2:3 본문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다 기록하였는데 왜 2:4 이하에서 또 창조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였을까? 이 문제로 인해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저마다의 이론과 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다양하게 설명한다. 1장에서는 ‘엘로힘’만 나왔는데 2장 이하에서는 ‘여호와’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모세가 여러 문서를 편집하여 짜깁기하였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일관되지 않는 주장과 함께 1장과 2장 이하의 창조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으로 인해 1장의 창조는 처음 창조였고 그 창조가 실패하여 다시 2장 이후의 창조를 하셨다는 이론부터 시작하여 서로 모순 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적절한 합리성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이런 논란들이 있는 이유는 장, 절을 구분해 놓은 것으로 인하여 오는 혼란이라고 보인다. 즉 창세기 2:4에서 ‘톨레도트’로 구분된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톨레도트의 구분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서도 톨레도트가 앞의 본문을 정리한 것이냐 아니면 그다음 본문들로 전개되는 이후의 내용을 의미하는 톨레도트인가 하는 것에도 서로 다른 이론을 낸다. 예컨대 공동번역을 보면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라고 번역하여 톨레도트로 1:1-2:3의 내용을 마무리하는 용도로 표현하였다.

 

우선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창세기 1:1-2:3은 시적(詩的) 형식의 표현이고 2:4 이하는 서술 형식의 이야기체이다. 1:1-2:3에서 주어는 ‘엘로힘’이지만 2:4 이하는 ‘여호와(야훼) 엘로힘’이 주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성경이 본래 의도하고 있는 언약의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본문을 찬찬히 풀어보면 그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4절)라고 말씀한다. “내력”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톨레도트’이다. 우리 성경에 “내력, 족보, 계보”로 번역되는데 이미 첫 강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도트를 통해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새로운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즉 족보, 계보를 통해 아들을 낳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여 진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란 표현이 처음 나온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전까지는 여호와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2-3)

 

 

아브라함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히, ‘엘 샤다이’)으로 나타내셨다(창 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전에도 그렇게 나타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일차독자들은 이제 모세를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출애굽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저 ‘엘’ 또는 ‘엘로힘’으로 나타내셨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이 본문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히, ‘엘’)은 친히 창조하신 우주 전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엄의 하나님이시다. 즉 인간이 이 땅에서 또 역사 속에서 감히 감지할 수 없는 저 하늘에서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1-2:3까지의 기록에서 엘로힘 하나님으로 기록함으로 창조의 전체적인 윤곽 또는 기본적인 기초를 세우시고 그것을 큰 그림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 나타내신 의미는 무엇일까?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3-15)

 

 

우리 성경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한마디로 ‘나는 나다’라는 말씀이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세에게 창조하신 하나님(엘로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을 이루심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다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출 6:4-8)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5절)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쉽게 이해되도록 직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게 하시지 않으셨다. 들판(광야)에는 초목(떨기나무)이 아직 없었고 들판(광야)에는 풀이 싹트지 않았다. 땅을 섬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우리 성경에 “들”과 “밭”으로 다르게 번역하였지만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 ‘사데’로 쓰고 있다).

그러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도 많이 혼란스러워하는데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면 1장에서 창조한 식물들은 어떻게 자랄 수 있었을까를 고민하면서 믿음으로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즉 성경에서 “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살펴보자.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 32:1-2)

 

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시 78:23-24)

 

 

성경은 비를 말씀에 비유하고 하늘의 양식이라고 한다(사 55:10-11). 그래서 “이른 비, 늦은 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를 상징한다(신 11:14, 렘 5:24, 욜 2:23).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직 말씀의 은혜를 내리시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땅을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땅을 갈다’라는 것은 단순히 땅을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아바드’라는 말인데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예배하다’라는 뜻이 있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민수기 8:19에서 레위인을 세워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아바드)” 하였다고 기록하고, 출애굽기 3:12에서는 “백성을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아바드)”라고 번역하였다. ‘아바드’란 말은 섬기고 예배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는데, 즉 1:28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온전히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내리지 않은 땅은 광야의 상태임을 묘사해주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으로 이 땅을 성전으로 만들어 섬길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 온전한 사람이 이 땅에 오셔서 섬김을 이루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6절)라고 말씀하였는데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안개”란 히브리어로 ‘에드’라는 단어인데 ‘안개, 수증기, 물’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에서 욥기서와 신약에서 야고보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26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27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욥 36:26-27)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성경에서 “안개”는 하나님과 대조하여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없이할 것임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땅에서 안개가 올라왔다는 것은 아직 이 땅이 사람이 다스리고 왕권이 행사되지 않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땅을 섬기는 말씀의 은혜가 임하도록 하실 일을 계획하시고 일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계신다.

 

그것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하나님의 영이 품고 계신 이유이다. 때문에 1:27에서 남자인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었다. 즉 씨 가진 남자가 온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섬길 때에만 여자는 그 남자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로 완성되는 일곱의 안식이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것이 말씀의 은혜가 아니라 말씀의 은혜는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찾아오셔야 되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에 대한 말씀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는 언약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아르케)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알레데스)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요 8:25-27)

 

(202208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