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29번 말씀
제목 :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본문 : 마 5: 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라는 건 그대로 되라는 거거든요. 그 온전하심까지 열심히 달려서 하는데 까지 해봐라, 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거를. 자, 이게 우리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인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사랑의 단계로 넘어왔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님께서 지금까지 설명한 그 율법 전체를 그 아가페, ‘하나’로 사랑으로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보내주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아가페의 사랑은 그거예요. 진리를, 사랑으로 깨달아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는 걸 사랑한다, 라 그래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율법 전체를 살인 간음 거짓증거 이렇게 축약을 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사실 율법은 전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살인하지 마. 뭐라 그랬죠? 도륙하지 마. 니들이 익숙한 희생제사 반복해서 드리지 마. 그런 말이라고 했죠? 그리고 간음하지 마. 진리가 아닌 율법을 니 남편으로 삼아 간음하지 마, 행위의 아들 낳지 마, 그런 말이라 그랬죠?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곡해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지 마, 그게 거짓증거야, 거짓맹세야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랬잖아요? 아, 마치 율법이 그런 법,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요구사항 이런 것인 냥 그렇게 알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 그건 사망을 전하는 것이다, 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그들의 생래적 성향인 두 마음으로 그 율법을 거꾸로 듣고 거꾸로 말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거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주님이 그런 아담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제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줬으니까 거짓말 하지 말고 이제 그 진의를 흘려주라, 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제자들이 알아먹었어요? 하나도 이해 못했어요. 그리스도가 오면 그렇게 될 거야, 라는 이제 그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마음으로 가져 아버지의 마음이 되는 것. 그렇게 내가 아버지의 처소,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고 그거를 히브리어로 그냥 읽으면 아브, 아바, 아버지에요. 그게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되는 거죠.그 아버지의 사랑을 진리로 갖게 되면. 그 마음으로 내 마음이 되는 거예요. 그 진리. 그걸 그 마음으로 가난한, ‘푸토쿠스’ 그거 없으면 죽는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거. 그게 이웃사랑이다, 라는 거예요. 그게 이제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럼 진리가 되는 거예요,그렇게. 흘려줄 수 있으면 은. 오늘 분문은 그 네 번째 상태를 온전이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뭔지 알기나해요? 우리가? 몰라요. 너희수준에서 내가 이렇게 되면 온전이 라고 해줄게, 라는 말이에요. 어떻게 온전해요? 우리가? 한 절, 한 절 한번 제가 설명을 해드릴 게요. 43절을 보시면 ‘이웃’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원수’ 라는 단어가 나오죠? 우리가 선악의 두 마음으로 이런 구절들을 얼핏 보게 되면 얼른 우리는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과 미워해서는 안 되는 원수를 찾아서 확 사랑해버릴라고 그러죠? 그리고 미워하면 절대 안 되지 라고 이렇게 절치부심, 절치부심은 아니죠. 결단한단 말에요. 그죠? 이런 구절을 읽으면 은 그래, 누구를 사랑해야 되는 거지? 내 이웃이 누군 거지? 금방 고민하게 되잖아요? 율법사가 똑같은 고민 했었잖아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해. 그랬더니 누가 내 이웃인지 가르쳐주세요. 내가 가서 확 사랑해버릴 게요. 그랬잖아요. 우리가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다 들으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일차적으로 선한 이웃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나에요, ‘나’. 그 이웃은. 자,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율법박사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율법박사죠.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눅 10: 25-28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거는 도끼마조가 아니에요, 페이라조에요, 실패하게 만들기 위해 하는 시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부터 잘못됐죠? 영생을 무엇을 해서 얻는다고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게 율법사에요. 율법주의에요. 이것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래 니가 율법박사니까 내가 물어볼게.)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돼 있냐? 그랬어요.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자, 이게 주님이 지금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사랑해! 그러잖아요. 그죠? 그랬더니 뭐라 그래요?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시니 예 저 그거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그래, 그럼 가서 해, 그러면 살 거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율법의 완성이라고 오늘 분명히 얘기해요. 사랑해. 그러면 그게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넷의 마지막이 완성되어 이제 그렇게 되는 거야. 성취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도 그런다고요. 사랑해! 그럼 가서 찾아서 사랑하라는 거예요? 주님의 이 대답은 두 가지를 함께 내포하는 거예요. 하나는 니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그 사랑을 정말 할 수 있는지 가서 해 봐! 라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율법이 이야기하는 ‘진짜 사랑’이 뭔지 알고 그 사랑을 하면 넌 살아, 라는 말이에요. 니가 사랑이라고 하는 그거는 가서 한 번 해봐, 되는지. 그러나 그 사랑이, 내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율법, 계명을 통하여 이야기하는 그 사랑이 뭔지 알고 그거 가서 하면 살아, 라는 말이에요. 근데 어줍지 않게 그 율법사가 니가 갖고 있는 그 사랑의 개념으로 가서 사랑해, 라는 그 말로 듣고 그걸 덜컥 잡아버렸어요. 그리고는 내가 가서 할게요, 그랬단 말에요. 할게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가르쳐만 주세요. 그걸 뭐라 그래요? 그게 살인이고 간음이고 거짓증거라니까요. 그렇게 확 잡아버리면. 율법으로 잡아버리면.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던지신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물은 그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물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너는 강도만난 자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왜? 율법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 진리를 전해주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그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없는 자는 뭐예요? 강도만난 자에요. 거반 죽은 자. 할 수 없는 자. 그래서 거반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 너는 그거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니가 그거 없으니까 선한 이웃으로부터 그거 받아야 된다, 라는 거예요. 먼저. 니가 먼저 그걸 받아야 내가 말하는 그 사랑 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계명, 율법이 말하는 그 사랑 하려면 니가 먼저 선한 이웃으로 온, 이방인으로 이 땅에 오는 어떤 이로부터 그 사랑을 먼저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이니까, 그분은. 거기 분이니까요. 그 율법사에게 시급했던 건 강도만난 자에 불과한 자기의 실체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선한 이웃으로 자기를 찾아온 그 진리의 사자, 그걸 전하러 온 분을 사자라 그러죠? 안겔로스, 천사라고 번역하지만. 그 사자로부터 그 아가페의 사랑을 듬뿍 받아 그 헐어진 마음, 그 강도당해 피폐해진 마음을 그 마음으로 채우고 그걸 흘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느냐 하면 이렇게 끝나요. 눅10장 36-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니다 (‘카리스; 은혜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보세요. 지금 너는 그렇게 강도만난 자로써 선한이웃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아야 돼.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 그게 니 마음이 되었으면 그 사랑을 가지고 그 선한이웃처럼 그렇게 전해주라, 라는 거예요. 그렇게 전해주라, 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그 사랑을 가졌잖아요?그러니까 우리가 그 선한이웃의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진리를 가진 이는. 그렇게 전해주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도와줘라, 는 이런 말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가페를 그 마음으로 딱 접하게 됐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굴까요? 이게 부사로 쓰였거든요. 가장 가까운 이웃. ‘나’에요, ‘나’. 내가 진리를 접하자마자 내가 자각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나’ 라니까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나 말고 누구에게 먼저 신경을 쓰냐고요? 가장 가까운 이웃, 그 단어에요. 이게. 그 이웃을 먼저 사랑해라, 라는 거예요. 무슨 말일까요? ‘그 이웃을 먼저 사랑해라’. 그 진리가 아, 이거야? 라고 알게 되면 이제는 그게 뭔지 알았으니까 그 가까운 이웃인 너에게 그 진리를 계속 들려주라는 얘기에요. 그게 사랑이라면서요? 내가 진리를 접하고 가장 처음 만난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에게, 나를 사랑하라, 라는 게 뭐예요? 그 이웃을 사랑하라? 그에게 그 진리를 계속 들려주라는 얘기에요. ‘나’ 에게. 그게 이웃을 사랑해라, 에요. 우리가 진리를 처음 접하면 그게 너무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태풍이 왔는데 이렇게 와서 앉아있는 거 아네요? 여기? 너무 궁금하죠? 자꾸 들려주고 싶잖아요? 여기에. 그게 사랑하는 거예요. 육적인 여러분을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진리에 입문을 한 ‘나’, 이제 그것 없이는 못살겠는 그 ‘나’에게 계속 그 사랑을 흘려주라는 거예요.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일차적으로 거기에 목말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푸토코스하게 된다니까요. 심령이 가난해져요. 자꾸 듣고 싶어. 그거 없으면 못 살 거 같아. 그죠? 아니, 생각해보세요. 진리를 아는 여러분. 그게 없다면 이 세상을, 허깨비에 불과한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기를? 오늘도 하루 종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이 원고를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 이렇게 쓰고 앉아있으면서 내가 이거 아니면 뭐라고 이 허깨비 같은 세상을 사나? 아무리 사람들이 뭐 부러워하고 좋은 거, 그것도 다 그냥 헛거고 그렇잖아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 어떤 법칙으로 확 묶어두니까 이렇게 존재가 되어 보이는 거지 그냥 다 허깨비거든요? 아무리 멋진 것도 그냥 다 헛것이고 그럼 여기를 왜 살아야 돼? 거기다가 그냥 어떤 놈은 협박편지까지 써가지고 뭐 너와 너의 가족, 니네 교인까지 몸조심해라! 막 이렇게. 그런 거 뭐 한 두 번 받았어야 겁이 나지. 아까 오면서도 아, 비 오는데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곳에 가서 또 뭘 해야 되나? 심란한 마음으로 왔더니 세아가 여기다가 ‘최고’ 라고 딱 붙여줬어요. ‘목사님 최고’, 붙여줘가지고 겨우 진정이 됐는데. ㅎㅎㅎㅎㅎ. 정말 이 세상은 진리가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노량진에 오면서 오늘 집사람이 그러더구만요. 여기만 오면 골치가 아프대. 왜? 다 학원에 일등, 일등, 우리가 최고다! 써있으니까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를 공부하나? 이렇게 쭉 봤더니 진리와 아무상관 없는 것들. 다! 그거를 그렇게 머리 터지게 공부하면서 그러니까 다 헛수고들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 (진리에) 그렇게 목말라하게 돼 있어요. 푸토코스가 된다니까요. 가난한 자가 된단 말에요.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흘려주어서 나를 사랑해주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접하기 이전의 나, 율법에 묶여서 그 열심, 율법적 수고가 다인 줄 알았던 그 ‘나’, 그 나가 나에게 어떻게 느껴져야 돼요? 그전에는 그게 참 기특하고 보람 있고 잘 하는 건줄 알았잖아요? 근데 진리를 접하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네? 그러면 그게 어떻게 나에게 여겨져야 돼요? 미워져야지요.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줘요. 선한 거라고요. 그런데 우린 두 마음으로 그걸 곡해해서 그거를 그냥 율법으로 붙들어서 그걸로 행위의 열매를 계속 낳는다고요. 근데 그게 잘하는 건줄 알았어요. 사도바울도 그래요. 내가 열심을 부렸다. 난 거기에 대해선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열심을 부렸고 잘하는 건줄 알았단 말이죠. 근데 보니까 그게 전부 살인이고 간음이고 거짓증거였네? 그러면 진리를 안 나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에요? 알기전의 나라니까요. 그러면 그게 미워져야 아이구 이건 미운 놈이네? 그럼 이 미운 놈에게 어떻게 해야 그가 살아날 수 있어요? 사랑을 흘려줘야 살죠. 그거에요. 원수는 미워하고 ‘나’ 이웃은 사랑해야 하는 게 구약의 율법이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 얘기한 거였다, 라는 말을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원수, 그 이웃을 내, 항상 우리는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나를 늘 제외시킨다니까요. 아니, 여러분과 관계없는 말씀은 여러분 거 아니라니까요. 다 여러분의 이야기여야 하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그 다음 절에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아쿠오’, 들었지? 율법이 그거잖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할 게. 그 원수도 사랑해. 그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 주일날 배웠잖아요. 그렇게 내가 율법을 갖고 행위의 죄를 낳았어요.행위의 자식들을 낳았어. 근데 그건 당연한 거라 그랬죠?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걸로 생명을 낳아버리면 내가 하나님이라니까요. 근데 나는 피조물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꽉 쥐면 그냥 먼지도 아닌 피조물. 그 먼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하늘의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 어두운 것 이런 것들로 하늘을 설명하신단 말에요.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거란 말에요. 있어야 되는 거예요. 당연히. 그러면 성도라는 존재, 진리가 되는 그 존재에게 있어서 ‘그 아래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열매를 낳은 그 원수가 꼭 나쁜 거겠냐고요? 아니죠? 거기를 거쳐서 우리는 진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 그것도 사랑해야 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사랑스러운 게 되면 죄까지도 그렇다면 그 원수 짓을 한 그것 까지도 나의 선에 선용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서 죄가 뭐예요? 삭제되는 거예요. 그걸 용서라고 한단 말에요. 물론 진리가 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그냥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사망이고 멸망이에요. 네크로스의 사망. 죽음이라니까요 그게. 그게 멸망이라고요. 근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걸 디딤돌로 딛고 생명으로 간자. 진리로 간 자들에게 있어서 그거는 반드시 있어야 될, 거쳐야 할 것이란 말에요. 그래서 그거 사랑해,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얘기할게 그것도 나쁜 거 아냐. 니들이 진리가 됐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라는 말이 있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 몇 번을 해줘야 돼. 이런 말이 아니에요, 사실은.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공, 완성이라는 게 우리 목표지점이에요. 완성, 성공. 그러면 성공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은 전부 뭐예요? 실패에요, 그게요. 그렇잖아요? 이게 목표지점이라니까요. 근데 20%달성, 30%달성, 40%달성, 이게 기특한 게 아니라 99%달성이어도 실패에요, 이거는. 완성이 성공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실패를 거치지 않고 완성이 오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실패를 거쳐서 과정으로 딛고 성공에, 완성에 이르는 것이, 그것이 정석이라면 이 실패가 왜 나빠요? 자, 발차기를, 돌려차기를 연습하는 사람이 있어요. 삼천 번을 찼더니 그 때 비로소 완성이 돼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 완성된 돌려차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 2999번까지의 그 사람의 발차기는 뭐예요? 다 실패에요. 실패라니까. 아니, 2000번 찰 때하고 1000번 찰 때 하고 100번 찰 때하고 물론 성숙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완성의, 진리의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다 실패라니까요, 그게. 그렇다고 이 과정이 가치 없는 거예요? 근데 보세요. 완성이 된 자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즉시 삭제됩니다. 왜? 나는 이제 그거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완성지점에 올라간 이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삭제되지만 내 자랑이 돼요. 얘깃거리가 된다고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담을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계속 그러는 거예요. 그게 자랑이거든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진리가 된 사람들은요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 즉시 삭제된다고요. 근데 그 아래에서 머무르고 아니, 이게 다 아냐? 이게 완성 아냐? 그러고 어줍지 않은 돌려차기 하면은 펭귄 발차기 하는 거라고요. 심형래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 되는 거예요. 근데 완성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에게는 그것 자체가 다 가치가 있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내가 얘기할게. 그 원수? 거기에 머문다면 당연히 미워해야지. 네가. 그렇지? 진리에 입문했는데 그 전의 그거, 너, 그게 너에게 그렇게 보이면 안 되지. 당연히 그건 원수잖아. 하나님이 하라는 거 반대로 다 했으니까. 하나님의 원수잖아. 그러나 그건 미워해야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여 네가 진리가 되었다면 그것도 사랑해야지. 하나님이 준 거니까. 그 말 하는 거죠. 원수 같은 인간 이 악 물고 사랑하는 척 해보라는 그런 말 아니에요. 아니 하나님이 그런 거 요구 하시겠냐고요? 우리한테. 그러니까 이 구절을 자기에게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도 인간적인 그 에로스의 사랑을 주라는 말로 들어서 이를 악 물고 벼름의 사랑을 결단해선 안 되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주세요. 어차피 인간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다 불쌍한 존재 아닙니까? 진리가 된 사람들이 참아야지 어떡하겠어요? 그러죠? 모든 게 이렇게 우스워 보이지 않아요? 우습다기보다는 좀, 아 왜 그때 거기에 그렇게 집착을 했던가? 뭐 이렇게? 진리가 된 사람들이 참아줘야죠. 자, 그 말은 율법 안에 담긴 아가페의 사랑을 잘 깨달아서 그것으로 이웃들을 섬기라는 거예요. 자기 안에 진리로, 그 진리를 흘려낼 수 있는 또 다른 선한이웃들을 만들어내라는 거예요.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진짜 이웃사랑.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십니다. ‘율로게오 호 카타라오마이 쑤 칼로스 포이에오 호 미쎄오 쑤’ 이 전체가 한글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어요. 왜 빠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몽땅 빠져있고 한글개역 성경에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라고만 기록돼 있어요. 심지어 그 문장 안에서도 ‘에페레아조쑤‘라는 어구가 빠져있어요. ‘너희를 거짓으로 모욕하고’ 이 어구도 빠져있어요. 개역성경에 빠져있는 부분을 다 넣어서 다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아마 개역성경을 번역할 때 그 때 이제 원어성경도 참조를 했지만 킹 제임스 버전을 갖고 번역들을 했거든요. 중국어 성경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킹 제임스에서 빠진 건 다 빠져있어요. 킹 제임스가 영국왕 제임스가 번역하라고 해서 번역한 거거든요. 그런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그것만이 진짜 성경이라고 우기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도 몇 사람이 찾아와서 저한테 요즘은 하나님이 영어를 당신의 말로 선택했다고 어디 그런 말이 있냐고 그랬더니 그렇대요, 무조건. 그래서 킹 제임스 버전만 읽어야 된다고 헷소리하고 앉았어요. 다 빠져있어요, 거기에도요. 그거 끼워서 제가 번역을 하면 이렇게 돼요. 너희에게, 카타라오마이, 주문 같은 걸 주는 자. 주문이 뭐예요? 성경구절을 앞뒤 문맥 다 빼고 뚝 떼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렇게 성구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는 사람들 있죠? 그리고는 자기가 필요할 때 갖다 써먹는 거? 그걸 주문이라고 그래요. 난 그래서 성구카드 갖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너무 한심해.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걸 죽어라고 외우고 있어. 그거 외워서 하나님이 시험본대요? 천국 앞에서?ㅎㅎ. 그런 카타라오마이, 주문을 주는 자에게 선한 말로 주고, 란 말에요. 하나님의 진짜 말로 주고 너희를 몹시 미워하게 ‘미쎄오’가 하나님이 미워하게 만드는 자, 왜? 엉뚱한 말을 갖게 만들어서 미워하게, 미쎄오, 미워하게 만드는 자를 ‘칼로쓰’ 선이 되게 ‘호이에오’ 선이 되게 하고 거짓으로 협박하고 ‘에피레아조, 이게 너 그렇게 하면 지옥 가. 너 그렇게 하면 천국갈 수 있어. 그거 꼭 해야 돼. 요렇게 분리하여 협박하는 걸 에페레아조라 그래요. 그렇게 협박하는 자. 그리고 잘못된 선생의 교훈으로 데일로, 디오코가 데일로스와 디아코노스를 합성한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데일로스가 믿지 않는, 어두운 이런 말이고 디아코노스가 집사, 목사 여러 가지고 이제 번역할 수 있죠? 그런 자들, 그 믿지 않는 사실은 믿지 않는 그런 어두운 자들의 그 교훈, 그거를 너희에게 주어, 그게 핍박이라 그래요. 곡식을 딱 철판 위에 놓고 요철 같은 거로 밀어버리는 거. 핍박이에요, 그게. 진짜 엉뚱한 말로 여러분에게 주는 거, 그걸 핍박이라 그래요. 너 교회가면 죽어, 그리고 막 시어머니가 꼬집고 이게 핍박 아니라니까요. 진짜 핍박은 엉뚱한 말을 주어 가지고 그것으로 헛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그걸 핍박이라 그래요. 그렇게 핍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프로슈코마이, 흘려주어라.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즘 제 생각엔 그래요. 그냥 멍하니 개역성경만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열심히 읽어갖고는 절대 진리에 도달 못해요. 프로슈코마이를 기도라고 번역했지만 그 프로슈코마이가 뭐냐면 깨달은 것을 전해주다, 그리고 어디어디를 향하여 원하다, 이런 말이에요.프로슈코마이가. 그러니까 기도라는 게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원하는 게 있죠? 일차적으로. 그래서 우리 안에서, 우리는 기도를 뭘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서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먼저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있죠? 우리를 향해서 그 뜻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흘려주는 거예요. 너희는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 이거. 그러면 우리가 그걸 받아서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도 그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기도에요. 프로슈코마이. 그러니까 내가 그걸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면 기도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기가 막히게 제자들이 다 받아 적었죠? 산속에 들어가서 심지어 자고 있었는데도 그걸 또 다 받아 적었네? 어떻게 적었을까요? 기도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단 말에요. 혼자 하나님께 중얼중얼 거린 게 아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으로 흘려주어서 그들의 모든 걸 선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웃사랑이라면 우리가 함부로 어떤 이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그들에게 그거 흘려주면 그들이 그 과정을 거쳐서 진리로 올 수 있잖아요? 우리는 그 결과를 모른다니까요. 그들이 현재 가는 그 길이 잘못 된 것이다, 라는 것을 지적해줄 순 있지만 그러니까 넌 죽어라, 가 아니에요, 이건 안 된단 말에요. 그들이 언젠가 진리로 완성이 되었을 때 그들의 과거의 그 원수의 행적도 모조리 삭제되어 버린단 말에요. 그게 구원의 공식이란 말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45절을 이렇게 이으신단 말에요.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 말은 저기 어디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에요. 복수에요. 신약성경에서 우라노스가 복수로 쓰이고 거기에 관사가 붙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그 하늘들 안에 아버지. 그게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죠. 그 아버지의 아들. 그 진리의 말씀이 낳은 나. 나예요. 내가 아들이잖아요. ‘그 하늘들’이라고 복수가 되면 금방 처소적 개념이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너희 안에, 하늘에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라고 할 때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겠다는 얘기지 저기에 올라가서 지금 열심히 맨션을 건축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불리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으로 죽을 때는 딱 한 번 ‘하나님’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 이외에는 전부 아버지라고 불러요. 하나님이라고 안 부른다니까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진리로 깨달아져서 내 안에 이렇게 마음으로 되면 그걸 ‘아바 아버지’라 그래요. 아버지. 그러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진짜 아버지를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죠?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가서 장사지내고 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지내게 하라, 그러죠. 너 지금 나를 쫓아와서 진리를 받아야 니 아버지가 살아. 산 아버지 만나는 거야. 근데 그 아버지, 죽은 자의 아버지는 니가 만약이 나를 지금 쫓지 않고 거기에 가서, 장사가 뭐예요? 율법이에요, 규례란 말에요. 그걸 한다면 너는 니 아버지 장사지내게 되는 거야. 살아있는 아버지 못 만나, 라는 말이에요. 무슨 인륜을 저버리라는 말이 아니란 말에요. 예수님이 매정하게. 성경은 전부 메시지가 있다니까요. 내 안에 그 아버지, 그거 만나려면 나 쫓아와서 내가 가진 진리를 네가 넘겨받아야지, 이런 말이에요. 거기 가서 율법 행해서 진짜 네 아버지 초상 치를 거야? 그럼 네 아버지 죽어! 진리라 안 되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가서 장사지내라 그래. 자, 그렇게 아버지를 간직한 그 사람이 또 아버지, 진리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다른 이에게 그 아버지를 전해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걸 진리의 흐름이라 그래요.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온전하다, 고 여겨주는 거예요.무슨 뭐 성품도 그냥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다 변하고 누가 그냥 툭 쳐도 그냥 히히 웃고 그렇게 무골호인 되는 이런 온전함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는 진리의 나라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주신 온전의 상태에요, 그것이.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내가 저희 안에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 그러면 그 아버지가 저희 안에 있는 거죠?) 저희로 (어떻게 된대요? 저희로 온전함이 이루어진대요., 자 예수님이 가진 그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온전함이다, 그래요. 성품이 바뀌고 행실이 바뀌고 이게 아니라 ‘그 상태’, 그것이 온전함이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진리를 충만하게 담았죠? 그래서 내가 진리다! 그러잖아요. 내가 길이고. 내가 방법이요 내가 내용이다. 진리다. 그게 생명이야. 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잖아요. 그 내가 진리다, 그래요. 그럼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를 그 안에 진리를 하나님이 부었다면 사랑한 거잖아요. 근데 그 진리를 갖고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 거다, 그 말이에요.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여기서 지키리라, 란 말은 Keep이에요. 그거를 잘 행위로 내놓다가 아니라 그걸 마음으로 Keep 하다. 이런 뜻이에요. 나의 계명을 마음으로 간직하리라, 란 말이에요.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세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에게 준다, 그랬어요. 그럼 지금 이분도 보혜사로 와 있는 거죠? 근데 또 다른 보혜사에요. 이거는 ‘다른’ 보혜사. 다른 종류의. 차원이 다른 보혜사가 올 거라는 거예요. 근데 누구래요? 17절에?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말이에요, 영은 말이다, 그랬으니까. 진짜 생명으로 인제 온다는 거예요) -세상은 능해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분이 뚫고 들어오는 어떤 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세상은 못 담으니까. 아무도 안 받는데, 그래서 뚫고 들어오는, 침노해 들어온단 말에요. 말이, 진리가)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누가? ‘내가’! 그러면 또 다른 보혜사가 누구라는 거예요? 난데 내가 지금 이 상태로는 너희 안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십자가 지고 언약이 약속으로, 실체로 서면 진리가 되어 내가 영으로 너희 안에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내 말이 그 때는 이해가 갈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진리를 받게 되면 삭제되는 거라니까요. 보혜사를 보낸다고 그러고 내가 갈게, 라고 한단 말에요. 내가. ‘다른 보혜사’로 오겠다는 거예요. 이건 아니고 ‘다른’ 걸로)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나는 누구? 예수에요, 십자가 이전의 예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올 또 다른 나를 볼 거라는 거예요. 너희는 볼 거라는 거예요. 세상은 못 보죠. 당연히 이제 끝이에요.)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게 연합이에요. 진리로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내가 나를, 지금은 이 육의 담겨 있는 이 진리를 너희는 못 알아보니까 내가 들어가서 그거, 나를, 내가 담고 온 그걸 나타낼게 그러는 거예요)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역시 Keep이에요. 나의 계명을 그렇게 마음으로 Keep 하고 있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거봐 예수를 사랑해야지. 그게 아니라, ‘나로 사랑한다’에요. ‘나를’이 아니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그렇게 Keep하고 그리스도를, 진리를 이렇게 Keep 하게 되면, 마음으로 Keep 하게 되면 그분과 내가 연합되는 거죠? 그분과 내가 연합된 나가 세 번째 성전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로, 그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네 이웃, 가장 가까운 이웃, 너 사랑하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나로, 그렇게 진리가 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계속 흘려준단 말에요. 사랑을 받는 거예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리스도가 진리로 내 안에서 계속 밝혀준다는 거예요. 그것을 진리로. 그게 사랑이에요. 그러면 그는 그 나타나신 주님이신 그 진리를 이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겠죠? 그걸 뭐라 그래요? ‘독사’ 가 뭐라 그랬죠? 여러분, 영광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그것을 이 피조물의 수준으로 보이게 주면, 그렇게 하나님의 것이 나타날 때 그걸 독사라 그래요. 영광이라 그래요. 그렇게 우리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 그 하나님이 진리로 나타나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 그러니까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발광체가 먼저 자기를 나타내야 영광이라고 해요, 그게. 그러면 그걸 반사체가 받아서, 마치 해의 빛을 받아 달이 반사하여 해가 있어요,를 보여주는 것처럼. 이거는 달의 빛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반사체에서 나오는 걸 내가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거란 말에요. 요 8: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니라 영광은 누가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돌리는 거예요. 함부로 무슨 영광의 박수 이런 말 하지도 마세요, 좀.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진리로 와계셔야 되는 거예요. 그걸 성령 받았다, 그래요. 거품 물고 쓰러지고 벌벌 떠는 게 성령 받은 게 아니라 그렇게 진리로 내 마음에 말씀이 깨달아질 때 아, 내 안에 영, 말, 깨끗한 말이, 푸뉴마가 진짜 와 있는 거구나? 그래서 그걸 성령 받았다, 그래요. 그것이 점점점점 내 안에서 이렇게 충만하게 깨달아질 때 그걸 성령충만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스도가 진리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세요. 그러면 우리 안에 그 아버지의 사랑이 진리로 흐르게 되는 거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흘려낼 수 있는 우리 성도는 또 다른 아비가 되어 아들들을 또 낳는 거예요. 그것이.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연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 그렇게 원수, 그거 미워하고 그러지마. 옛날에 니들이 어떻게 산거, 어떻게 실패한 거 어떻게 절망한 거 그거 하나님이 하나도 카운트 안 해. 그러니까 그것도 사랑해.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은 네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마땅히 대해야지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니가 악하게 보인다, 니 눈에 악하게 보이는 그들에게도 그 사랑을 흘려줘.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거죠? 일차적인 원수는 나. 이 온 세상이 율법 속에 갇혀서 하나님의 원수로 살고 있잖아요. 그들에게 말씀을 흘려주는 게 원수를 사랑하는 거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이유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 안의 아들이야, 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 가리지 않고 비추어서 당신이 택한 것들을 위의 것으로 완성하니까. 라고 해요. 이 ‘아나텔로’ 가 ‘아나’, 위에 ‘텔로스’ 가 완성이거든요. 그걸 빛을 비추다, 라고 했는데 해라는 건 항상 하나님의 말씀, 발광체, 하나님을 이야기해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 공의의 말씀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세상이 그렇게 구분해놓은, 야, 이 세상에 선인이 어딨니? 근데 내가 얘기할게. 니들이 이야기하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하나님이 비추어서 반드시 위의 것으로 만들어내. 그러니까 원수 사랑해! 그러는 거죠. 흘려 줘, 라고. 비는? 불의한 자, 의로운 자 가리지 않고 내린단다. 비가 뭐라 그랬어요? 신명기 31장에서 찾아봤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랬죠?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니들이 구분해놓은 그 어떤 구분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내리는 거야. 근데 이 세상에 의인이 어딨어? 아이, 굳이 니들이 이야기하는 그 의인, 그리고 불의 그렇게 너희들이 이야기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니들이 판단한 그 어느 위에도 그 비는 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원수 사랑해. 이웃 사랑해. 그런 말이에요. 그 빛은 반드시 위의 것으로 완성시켜내는 힘이 있는 거니까. 사 60:19-20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여도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여호와가 뭐라 그랬어요? 파자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라고 했죠? 하나님의 말씀, 계시되는 말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남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당연하죠.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이지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돼요? 영광이 되리니) 20 다시는 네 해가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그 빛에 의해 네 슬픔의 날이 마쳐지는 거예요. 그게 말씀이에요. 진리의 말씀.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공의의 말씀이 떠올라)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외양간은 성전을 의미하는데 거기에서 팍 튀어져 나와 가지고 살아나는 소가 되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이걸 갖다가 또 어떤 한의원 선전에 쓰던데 치료하는 광선이, ㅎㅎㅎ. 레이저를 주로 쓰는 한의원이라. ㅎㅎㅎㅎ. 그러니까 그 외계인들이 혹시 침공을 해온 다할지라도 한국여자들은 절대 그 공격에 당하지 않을 거예요. 하도 레이저랑 친해서. 걸핏하면 레이저 맞으러 가잖아요? 외계인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 왜 쟤네들은 쏴도 안 죽어? ㅎㅎㅎ. 당연하지 병원마다 그 레이저가,,,. 자 그렇게 의인과 선인 불의한 자, 의로운 자, 이거는 우리의 구분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 보세요, 해나 비는 전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거죠? 내리사랑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영광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려. 기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해야 돼.사랑도 하나님이 먼저 흘려줘야 돼. 근데 오늘 날 교회는 어때요? 우리가 자꾸 뭔가를 이렇게 올려드려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님도 내가 먼저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먼저 섬겨드려야 되는 거로 생각하고 내가 먼저 뭔가 기도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응? 통성 기도할 때 한번 들어보세요. 난, 저 얘기를 저렇게 계속 반복해서 하고 싶을까?그래서 내가 기도가 안 돼. 그거 들려서. 난 다 들려요, 그게.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왜냐면 내가 뭔가 자꾸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서. 기도를 어떻게 해서든지 이렇게 올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라니까요.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곳이라니까요. 그리고 그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 제가 도대체 뭔데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아니, 그렇게 요구할 권리도 없는 그런, 이런 나 같은 이 죄인 중의 괴수를 하나님이 왜 섬겨주세요? 이게 찬송이며 영광이란 말에요.이게 교회여야 되는데 오면은 그냥 뭘 하려고들 그냥 눈이 벌개가지고 이러고, 교회에 오면. 왜냐면 불안하거든요. 내 안에 진리가 없으니까. 뭐라고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는 분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사랑을 올려드릴 수 는 없는 거겠죠? 왜냐면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주님이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 5: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상이니?)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 (하느니라)하느냐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한다, 에요) 무슨 말이겠어요? 이게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면 그건 상 없어. 그러니까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해줘야 그게 하늘에서 상급으로 쌓인단다. 이런 말로 이해하고 있잖아요? 이거를? 그래서 상 받을라고 그냥 억지로 사랑하는 거 아네요? 죽이고 싶은데 그냥 상 받을라고 가서 그냥 사랑하는 척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이겠어요? 이게? 상 받을라면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고 와! 그 말이겠냐고요, 이게? 여기보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걸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깨달아 가르쳐요. 사랑을 흘리는 거죠? 저는 사랑을 하는 거예요. 근데 제대로 다 알아듣지도 못한 어떤 사람이 저한테 와서 고대로 그걸 흘려주면? 모양새가 우습죠? 그런 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사랑을 흘려줘야 되는 거야. 그게 하나님 나란데 니들이 그 사랑을 위로 흘려보낸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되니? 그 사랑을 받으라는 거예요. 흘려 받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상이 도대체 뭐 길래 이런 말을 할까요?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엑수시아, 권, 복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을 때 그 간직하는 그 능력, 이게 엑수시아죠? 두나미스는 그걸 전해줄 수 있는 권이고, 그 엑수시아, 그거를 다 쓰지, 가 아니라 그거를 남용하지 않는 것 이게 내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게 왜 상이에요? 당연하죠. 내 안에 원래 없던 거잖아요? 나는 피조물이라고. 내가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그 하늘의 진리를 하나님이 나에게 흘려줬네요? 그래서 그게 내 마음이 되었어요. 내 맘에 새겨졌어요, 그 진리가. 그래서 난 이제 흘려줄 수 있는 자가 됐죠? 그게 크리스토스에요. 그리스도들.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 기름을 받아 이 기름을 다른 이에게 발라줄 수 있는, 흘려줄 수 있는 자가 됐다면, 그리고 그걸 하나님께 올바로 받아서 남용하지 않고 잘못 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자가 됐다면 이거보다 더 큰 상이 어딨어요? 나한테? 내가 뭔데 그걸 그 예수가 하신 그 일을 내가 하냐고요?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동참을 하냐고요? 그게 내 상이야, 라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내 상이면 그렇게 내게 주신 걸 이렇게 흘려줘야 그게 내 상이죠? 내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잖아요? 아들을 낳는 아비의 역할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거를 하라고 우리에게 사랑을 흘려줬더니 그걸로 열심히 그냥 하나님만 열심히 여기서 두들기면서 예수님 찬양! 요러고 있네? 그러면 그게 무슨 상이냐? 그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상이냐? 너한테는 아직 그 예수 안 죽었네? 그러니까 예수님 찬양! 그러고 있는 거 아냐? 그걸 흘려줘야지. 그게 무슨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급, 상급 그러지 마세요. 이게 여러분의 상이라는 그 인식이 없으면 여러분은 엉뚱한 상 지금 바라게 된다니까요. 하나님한테.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에요. 성교시간이 상급 얘기하는 사람? 백프로 거짓선지잡니다. 우리가 우리 수준에서 원하는 그런 상급 거기에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백프로 거짓선지자에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허깨비 같은 세상에서 고지꼭대기에 올라가갖고 성공해라! 그건 백이십 프로. 백이십 프로 용이에요. 용. ㅎㅎㅎ ㅂ읍자도 모르는 거예요, 복음의 비읍자도. 자, 그러면서 세리는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그래요. 갑자기 왜 세리가 나오죠?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서 세리라는 이야기를 해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세리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첫 번째 강화로 하신 겁니다. 유일무이해요. 다락방 강화는 그냥 완료고. 산상수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걸 못 알아듣지? 이 산상수훈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적 표적 말 비유 던져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것만 이해하면 나머지부분은 몰라도 돼요. 지금 여기서 세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뜬금없이 세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세리, 그 때 산위에서 얘기했던 그 세리가 이거였어, 라고 세리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거예요. 여기서 세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텔로네스, 텔로네스. 여기서 조금 아까 우리가 해를 비추다에서 그 ‘비추다’가 텔로스라고 그랬죠? 완성하다, 예? 결국, 완성 이런 말이 텔로스라고 그랬잖아요? 그 텔로스라는 단어하고 오네오마이, 이게 값 주고 사다, 구입하다, 라는 말이에요. 요 두 단어의 합성어거든요. 세리가. 그러니까 세리는 완성, 그 안식을 값 주고 산자란 말에요. 완성을 어떻게 값 주고 사요? 그래서 세리에요. 그게 죄인이에요. 원래 세리라는 직업은 세금을 징수하는 자에요. 그들은 자기들의 조국이 로마의 압제 하에서 벗어날 가망성이 없다, 라고 낙심하고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지중해 등지에 그런 휴양지에 가서 편안하게 살자고 로마의 주구(走狗)가 된 자들이 세리였어요.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 욕망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세리의 직으로 뛰어들었다고요. 어차피 가망 없는 나라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튀자. 좋은데 가서 살자. 그게 세리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예요. 무조건 가서 걷는 만큼 자기에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유대 안에서의 세리는 그냥 죄인이었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그러면 그냥 ‘세리’ 이었다니까요. 율법과도 무관하게 살아. 욕심 부리면서 살아. 지들도 알았고 다른 이들도 저거 죄인 저거, 그랬단 말에요. 그게 세리에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안식을 행위, 율법지킴, 제사라는 걸 지불하고 살려고 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은 다른 종류의 안식이지만 자기들의 돈으로 그걸 살려고 했던 자들이죠? 둘은 같은 자들이에요. 요 율법주의를 부수기 위해 하나님이 세리를 끌어다 쓰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세리’를 부르시고 진짜 세리인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죠? 그 말은 니들이 진짜 세리야,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세리가 나오는 데는 바리새인이 같이 등장해요. 항상, 주님이 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그래요. 아니,거기서는 바리새인이 아예 삭제돼요. 의로운 자는 저 세리다! 저 세리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자기의 성전으로 내려가는 자야, 라고 이야기 해요.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 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나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님 세리라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뭐예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죠? 거기에 이제 대표로 바리새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왜? 이걸로 내 안식 사는 거죠? 지금요?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해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어딜 가나 자기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는 자에요. 이게 우리가 되어야 된다, 라는 거예요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 말이 그 말이에요, ‘저 보다’ 이런 비교급 같은 말이 없어요. 여기엔.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 성전으로 내려갔다. 바리새인은 나오지도 않아요. 끝이에요, 그게 저 놈은 아냐, 저게 진짜 세리다, 저게 진짜 세리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자기를 높이는 자잖아요. 그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자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이 뭐라 그랬어요? 어, 내가 원수였네? 그러면 그 이웃 사랑해라고 그랬잖아요. 말씀을 줘야죠? 어, 내가 원수였네? 세리가 지금 그러잖아요?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원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사랑하려면? 말씀을 줘야죠. 두 번째 세리 얘기. 눅 15:1-2 모든 세리 (즉 죄인들이, 에요. 모든 세리 즉 죄인들이)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모든 세리가 다 왔겠어요? 무슨 세리가 단합대회해요? ㅎㅎ. 죄인, 상징하는 거예요. 모든 세리 즉 죄인들이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말씀을 들으러 온 걸 예수님이 그들과 음식을 나누었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들에게 먹을 걸 줬다, 라는 거예요. 진리를 줬다, 라는 거예요. 사랑을 줬다, 라는 거예요. 물론 다 상징이에요. 내가 가난한 자라는 거, 푸토코스라는 걸 알게 됐어요. 세리거든. 난 죄인이에요. 죄인 중의 괴수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살아나려면? 푸토코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그거 찾으러 가야죠? 그래서 세리, 즉 죄인이 말씀 들으러 가는데 바리새인들은? 걔네들은 그거 주면 안 돼. 그거 먹을 자격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거 바리새인들이에요.근데 오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뭐라 그래요? 의인 선인이 어딨어? 하나님의 말씀, 비 해는 빛은 선 악 구분 없이 그 위에 내리는 거야.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바리새인은 그거 동의할 수 없어요. 라는 그 사람들로 나온다니까요. 여기서. 그러면 이 세리의 이야기가 어디서 완성되는지 보세요. 세리 장에서 완성되겠죠? 삭개오이야기로 가보세요. 눅 19:1-2, 5-6, 8-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삭개오, 완성을 얻다 순결하다 깨끗하다, 에요. 삭개오란 이름 자체가)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세리가 이제 완성된 거예요.)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 네 성전에 들어갈게. 자, 그리스도, 진리가 그 육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영접이에요, 그게 ) 삭개오가 서서 (이스테미, 티데미의 코스모스로 뭘 깨달아 아! 이게 진리에요? 라고 하면 이스테미라고 그랬죠? 위로 서는 거예요. 그게 스타오로스 십자가를 낳는 단어라고 그랬잖아요? 세리가 일부러 성경이 그런 단어를 쓰는 거예요. 이스테미! 서서. 이제 섰어요, 그게. 죄인이 위로 섰다니까요. 언약 안에서 선거죠.)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절반이라는 이 단어는 헤미쉰데 이게 하마라는 단어에서 나온건데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딱 반이 아니라 내 소유, 그가 부자라 그랬죠? 근데 어떤 부자냐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니 소유 다 팔아 줘라, 했을 때 못 준 부자가 아니라 자기 소유를 다른 이들에게 그 같은 것으로 줄 수 있는 진짜 부자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내 소유를 같은 것으로 푸토코스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그래요. 이 세리장이. 그래놓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 토색 이라는 게 엉뚱한 말로 준 적이 있으면. 쉬코판테오 거든요. 쉬코판테오. 이게 쉬콘이 무화과이고 판테오가 드러내다, 에요. 그러니까 무화과로 드러내다, 가 뭐냐면 무화과는 항상 율법의 모형이죠? 열매도 아닌 게 열매인척 하는 거? 내가 율법으로 잘못 전한 적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가지고 이제 내 안에 들어왔어요. 주님이. 그러니까) 사배나 갚겠습니다 네 배가 아니라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 에요 넷이 뭐라 그랬어요? 하늘의 셋이 땅에서 완성된 게 넷이란 말에요. 그래서 겉옷도 넷으로 넘겨주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것도 보세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 마태. 유대인에게 쓴 책이죠? 간음하지 마 – 마가. 니들 율법에 빠지면 안 돼. 그 다음에 거짓증거 하지 마 – 거짓증거를 안 하면 어떻게 돼요? 내 것을 모두 드러내 주는 거. 가감 없이. 이거를 헬라어로 친구라 그래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하신 그분이 내가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다 알려주지 않겠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복음이 어떻게 시작해요? 데오 빌로. 하나님의 친구. 내가 다 밝혀줄게라는 뜻이에요. 그것보세요, 살인, 간음, 거짓증거. 마태, 마가 누가. 사랑? 요한. 이게 넷이라니까요. 그 이야기가 사 복음서에 그대로 나오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똑같이 그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사람이 썼다고 하겠냐고요? 이 책을? 자, 그렇게 시코판테오, 토색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이젠 내가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 이게 세리장이에요. 이렇게 세리가 완성된 거라니까요. 근데 어디서 시작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 진리를 주니까 넘겨주는 자가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뭐래요? 세리는 이같이 안 해. 얘기하는 거예요. 사랑을 흘려준 자를 섬긴다고 너스레떨지 않아. 이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래서 세리는 이같이 안 해.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세리일까? 이건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리와 세, 세금으로 진리를 설명하셨기 때문에 그걸 그냥 갖다가 쓰시는 거예요. 민 31:40 사람이 일만 육천 명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리운 자가 삼십 이명이니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 중에 사람이 있네요? 암 5:11-13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제사장들, 레위인들)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세를 받는 자들은 제사장들, 레위인들이었어요.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기 전에는 세금을 항상, 신정국가였으니까. 성전에서 받았단 말에요.)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 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말씀 안 주는 거예요. 말씀이 없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엉뚱한 세받는 거죠. 그러니까 세는요 성전을 이루고 성전을 완성하는 거예요. 그 세금을 받아서 성전을 유지했단 말에요. 그 성전 지을 때도 그 세 받아서 성전 지었잖아요? 반 세겔. 그게 성전 지을 때 받았던 성전세란 말에요. 그리고 그 다음부턴 안 내도 되는 건데 이 사람들이 성전은 바로 우리들의 힘이 모아져서 지어지는 거다, 그걸 붙들기 위해서 계속 지들이 내 거예요, 그냥요, 성전 세는요. 그래 레위인들이 그걸 받았단 말이죠. 성전 세를. 반 세겔씩. 그런데 그 세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걸 여러분이 주의 깊게 보셔야 돼요. 하나님의 성전은 에베소서가 그러잖아요. 너희들이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그러죠? 그러니까 진짜 성전에서 요구하는 성전 세는 사람이에요. 성도란 말에요. 근데 그거를 세금, 성전 제라는 것으로 모형 화하여 뭔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하나님의 성전은 성전의 세로 드려지는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완성이 되는데 그게 에베소서의 논리에요. 그 세를 받는 자들이 엉뚱한 세를 받아버리면 성전이 더럽혀지고 완성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가 엉뚱한 것들이 가버리면 그 성전이 흠이 있는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표면적, 구약의 표면적 성전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어요? 레위인들이죠? 레위인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레위인이 성전을 이루는 성전 세의 역할도 한 거고 그 성전 세를 거두는 세리의 역할도 한 거예요. 레위인이. 그리고 그 레위인은 곧 우리잖아요? 하나님께 드려진 자. 그렇죠? 그래서 그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연합, 덮음, 휘장 다 성막을 덮던 이름들이죠.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성전이에요. 그들이 거두어간 성전 세가 반 세겔이었어요. 그러니까 레위사람들이 바로 반 세겔인 거고, 성전 세였던 거고 그 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던 거예요. 그 성전 세의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이렇게 나오죠? 마 19: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 (누구? 제사장, 레위인) 베드로에게 나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안 내도 되는 건데 베드로가 지레 겁먹고 낸다, 그러는 거예요. 주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니?(진짜 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 물어보는 거예요, 네가 대답하고 왔잖아?) -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여기서 관세와 정세, 이거는, 텔로스는 아까 뭐라 그랬어요? 완성! 결국. 그리고 캔서스는? 인구조사에요. 그러니까 물론 인구조사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하는 거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관세와 정세 이러는 우리를 오해하게 만드는 번역이란 말이죠. 자, 세상의 임금은 어떤 완성품들로 인구조사를 하니? 어떤 완성품들을 세로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니? 그러는 거예요.)- 자기 아들 에게냐? 타인 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 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자,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성전을 구성하고 이루는 세금이죠? 그들이 레위인들 이었잖아요. 아들들을 대신하는 자들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 유대인들이 걷었던 그 성전 세 안 내도 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세상 임금들이나 그 세 받아서 아들들이 아닌 자는 율법의 행위만 내놓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거 받아서 성전 이룰 거란 말이죠. 그러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세금이고 자기들이 세리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거 안 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 우리가 저희로 오해치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그림 하나 보여줄게 그러는 거예요.)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서 (갈로리죠?)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서 입어 (먼저 첫 째로 잡히는, 먼저 첫 째로 올라오는 자에요. 중성이 아니라 남성 단수에요. 단수. 바다에, 바다가 이 세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다에 낚시를 던져서 가장 첫 번째로 올라오는 그 자의 입을 열어 은전을 찾아라. 은전은 구약에서 항상 속전입니다. 입을 열어, 어디에서 나와요? 입에서 나와요. 용서를 할 수 있는 속전이 입에서 나와요. 입을 열어 은전을 빼내고 ‘아이로’, 그 자를 제거하라! 그래요. 개역성경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원문엔 그래요. 첫 번째 낚시를 던져 걸려오는 그 자의 입을 열어 속전을 빼낸 다음에 그 자를 제거하라! 그리고 그거를 반 세겔인데 한 세겔이잖아요. 너와 나의 속전으로 줘라, 그래요. 세금으로 줘라, 그래요. 연합입니다. 첫 번째 걸린 자가 누구에요? 예수죠. 제거되는 자. 속전을 내어놓고 제거되는 자가 예수잖아요. 그 속전을 내어놓고 제거 되는 그자. 그러나 그에게서 속전이 나에게 왔어요. 그 속전이 뭐예요? 말씀, 진리, 그리스도! 그러나 한 세겔이네. 연합. 이게 성전이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세리의 이야기란 말에요. 너와 나를 위해 줘라! 그게 진짜 레위에요. 연합 덮음 휘장. 그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는, 제자 중에 세리가 하나 있었죠? 마태. 마태 이름은 누구? 레위. 이걸 어떻게 사람이 썼다고 하겠냐고요? 눅 5: 27 –32 그 후에 나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왜 일부러 레위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세관이라는 건 세금을 걷는 곳이니까 옛 성전이에요.) 나를 좇으라 하시니 (모든 것을 다 팔아, 이런 말이에요. 다 팔아. 진리를 만나면 행위를 다 팔게 돼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기 때문에) - 다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진짜 마태가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금방 또 가갖고 어디 숨겨둔 배 찾아와갖고 낚시질 하러 가잖아요. 그물 던지러. 그런 것들을 사용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나 이 말이 뭐라 그랬어요? 죄인을 다른 마음으로 다르게 보게 만들기 위해 왔다, 라는 거예요. 정확히 직역하면. 이게 죄인으로 보이냐? 내가 보기엔 아닌데. 얘가 진짜 레위인인데. 얘가 진짜 성전 세로 인구조사 될 자인데. 니들 눈에는 죄인으로만 보여?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거예요. 산상수훈은 아니다, 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해라, 흘려주라는 거예요. 그런 걸로 사람들 판단하지 말고. 그러면 보세요. 내 안에 그 한 세겔이 들어와 있으면 내 입을 벌려 이제 다른 이에게 그거 또 넘겨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인구조사에 합당한 자가 되어 성전으로 지어져 갈 거 아닙니까?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리는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라고 했을 때 세리는 하늘의 성전 세를 거두는 진리의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거두어들이는 거예요, 세금을. 이렇게 하나, 하나. 그래서 성전을 만들어가는 거죠. 무엇으로? 한 세겔로. 주님이 남겨주신 진리라는 한 세겔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걸 온전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부터 자신 있게 아, 난 온전해. 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무리 와이프가 옆에서 성질이 그 모양인데 네가 온전하냐? 그래도, 그래도 온전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온전이에요. 딴 거 요구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섬기려고 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있었던 진리를 마음으로 담아서, Keep 해서 가난한 자들, 푸토코스 그 필요한 자들에게 흘려주는 거 이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온전한 자의 삶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오늘날은 전부 그걸 섬기는 데에, 왜냐면 내 안에 진리가 없어.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전부 그냥 어떻게 하면 잘 섬기는가. 어떻게 하면 율법의 행위를 잘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근사한 가짜 성전을 구축할까? 수천억씩 들여서. 이런 거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꾸 섬기라고 얘기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래야 뭘 자꾸 내놓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데에 선동당하지 마세요. 돈 없으면 밥부터 사먹어요. 헌금하지 말고. 왜 밥 굶어가며 헌금하고 그래요? 그거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거?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배를 신문지에 싸갖고 우리에게 줬더니 보내는 못 알아보니까 버려버리고 신문지를 벽에다가 걸어놓고서 그걸 섬기고 있네? 예수가 그걸 담았던 그릇이란 말에요. 보배는 ‘그 진리’ 라니까요. 그리스도의 말. 성령, 그거! 그게 보배지. 여러분이 행위로 섬기는 그게 그건 가치 있는 게 아니란 말에요. 아니 근데 이게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세요? 근데 왜 우리 가족들까지 뭐 조심하라고, 왜 그러는 거예요? 난 도대체 이해가 안 가. 내가 뭐라 그랬다고? 아니, 헌금하지 말고 밥부터 사먹으라는 얘기, 나쁜 말인가요? 그게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쁠까? 여러분이 예수와 십자가를 그 내용을 진리로 여러분 안에 이해하고 깨닫고 있지 못하면 그건 신문지조각에 불과한 거예요. 그거 갖고 자랑하지 마세요. 무슨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 그게 나랑 상관이 있어야 십자가지. 그것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온전인 거예요. 진리가 온전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걸 내 안에 갖고 있으면 내가 온전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온전’이 그 하나님의 그 온전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그 온전의 그 모양을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하시면 돼요. 이것이 되면 여러분은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 마지막 걸 채워서 온전한 성전 사각형이 되는 거예요. 재밌죠? ㅎㅎ. 재밌다고 해야지 뭐 여기서. ㅎㅎ.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거 말고 그냥 세상을 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기쁘게 행복하게 사람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이야기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 거 잘하는 분들 소개해드릴 게요, 제가. 그리로 가시면 돼요. 저는 이 이야기 이외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요렇게 연구하고 원고를 쓰고 또 설교를 하고 하다보면 모든 게 그렇게 하나이기 때문에 저는 그 하나님이 두려워서 다른 이야기 못해요. 여러분도 제발 그 하나 속으로 들어가 그 하나를 여러분 마음으로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흘려주시는 것이고 아무 자격 없는 나에게 흘러들어온 그 사랑 그것처럼 나도 값없이 다른 이들에게 흘려줄 수 있어야, 내 선악의 판단으로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지 않고 흘려줄 수 있어야 나는 아들입니다. 아버지, 그 온전 그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도 그 진리와 그 사랑을 열심히 흘려주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하여 나도 자유롭고 기쁘고 행복한 그러한 성도의 삶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김성수 목사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기도는 누구의 것인가? (0) | 2023.05.20 |
---|---|
30.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0) | 2023.05.20 |
28. 오리, 십리, 구하는 자, 꾸는 자 (0) | 2023.05.20 |
27. 겉옷을 잃은 대 제사장의 죽음 (마5:40) (0) | 2023.05.18 |
26. 속옷을 달라고 하는 변태들에게 주라 하신 것 (0) | 2023.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