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로마서(32)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I)

Hebrew 2023. 5. 31. 20:38

로마서(32)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I)

 

(롬2:6-11)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

 

2005년 봄, 일본의 한 전자회사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반 고흐와 피카소의 작품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던 사람들이 세계적인 경매 회사인 크리스티와 소더비였습니다. 양쪽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면서 서로 그 그림들을 가져가려 경쟁을 벌였습니다. 골머리를 앓던 일본의 전자회사는 두 경매회사의 대표를 불러서 가위바위보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결과는 크리스티의 승리였습니다. 크리스티가 가위를 냈고 소더비가 보를 냈기 때문입니다.

가위바위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깔끔한 승부 방법으로 인정을 받는 게임입니다. 가위바위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게임에서 발견되는 인간들의 심리가 제 관심을 끌 뿐입니다.

얼마 전에 영국의 과학 대중지인 ‘뉴 사이언티스트’지에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가위바위보 사건이 예화가 된 가위바위보 필승전략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뉴 사이언티스트지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을 바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상대가 바위를 낼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이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보를 먼저 내더라는 것입니다. 실제 실험결과 첫 번째 게임에서 보를 낸 사람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 필승 전략은 가위를 먼저 내는 것이라는 그런 기사였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들의 동물적 본능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 가위와 바위와 보는 각각이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위는 보자기를 자를 수 있는 반면 바위에 의해 깨지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위는 가위를 깰 수 있는 힘은 있지만 보자기가 감싸버리면 지는 것입니다. 보자기는 그렇게 바위는 감쌀 수 있지만 가위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렇게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으로 서로 물고 물리는 용호상박의 관계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 바위가 가장 강한 것으로 각인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위는 보자기로 감싸면 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바위보다는 보자기가 더 센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위를 가장 강한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깨고 부수어서 승리하는 것에는 아주 익숙해있지만 감싸서 승리를 하는 것에는 동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감싸 안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서 지는 것으로 취급을 받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승리는 항상 감싸 안음으로 비롯되는 승리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항상 성령의 덮으심으로 완성이 되도록 성경에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동거하게 될 우리 자신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성도를 덮어서 완성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보자기는 그 안의 바위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부수어 내는 승리의 보자기입니다. 그래서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하면 보자기와 바위의 세기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바위에 비해 보자기는 약해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묵시 속에서는 보자기가 바위를 덮어 부수어내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은혜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성 쌓기, 대 쌓기의 시도와 추구는 성령의 보자기에 의해 수시로 덮여서 부수어지고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의 장막, 하늘의 보자기로 덮여진 하늘의 성전이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 성전의 이야기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 없음이 덮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곳에서는 그 어떤 피조물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도 은혜의 보자기에 싸여, 다 삭제가 되고 부정이 되는 곳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의 백성이 홀로 존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붙어 있는, 개별성과 개체성을 박탈당하고 차압당한, 집합적 존재로서의 교회만 존재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자랑도 있을 수 없고 차등도 있을 수 없으며 차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차등 상급 론이 웬 말입니까? 거룩한 하나님 나라, 성전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 우리가 공부한 부분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인간들의 성전 짓기, 당 짓기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노와 분의 대상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을 다시 보세요.

(롬2:8)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바울은 당을 짓는 것을,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후 거기에는 하나님의 노와 분이 부어지게 된다는 무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 짓기의 실체와 내용이 어떠한 것이기에 성경이 그것을 대표적인 죄로 지목을 하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로 가서 인간들의 당 짓기가 함의 하고 있는 추악함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11:3~9)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경고하고 있는 인간들의 당 짓기는,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 인간들의 외모(행위)를 들이대는, 인간들의 세상 속 성전 짓기라 했습니다. 그래서 당 짓기에 대해 경고를 한 사도 바울이 그 단락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로 끝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세상 속 성전 짓기, 당 짓기의 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지금 읽은 바벨탑과 바벨성 건설의 이야기입니다.

 

4절을 보시면 인간들이 왜 바벨론을 건설하는지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중 마지막 것은 제가 이미 했고 오늘은 앞의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우리의 힘으로 하늘에 닿자’입니다. 그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와 똑같은 것이지요?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자’ 그것이 다시 바벨론 건설 현장에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로 가면 그러한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의 실체가 기실 어떠한 것이었는지가 잘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사14:4,12-15)

4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 하였는고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창세기의 바벨성과 바벨론이 70인 역으로 가면 같은 단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 바벨성의 왕은 누구겠습니까? 마귀? 그 바벨성을 누가 짓고 있어요? 인간들이 연합하여 짓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당 짓기에서 항상 자신을 왕으로 두는 악마적 본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왕은 ‘나’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천사 장 루시퍼에게 하신 말씀이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하신 말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뭐라고 일갈을 하십니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겠다고? 넌 이제 음부 맨 밑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이게 하나님의 일갈이었습니다.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처럼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노와 분으로 깨버리실 죄의 본질 중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쟁취하겠다는 추구와 시도로 점철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요즘 명강사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명지대 김정운 교수의 책들을 다 구입을 해서 읽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총 다섯 권의 책이 출간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의 핵심 주제는 한 마디로 ‘행복해지자’였습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행복해 지자는 것이 김정운 교수의 주장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의 책은 하나같이 로버트 슐러나 조엘 오스틴의 긍정적 사고, 긍정의 힘을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예화로 곁들여 한국식 긍정의 힘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이 지금 한국 서점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그분은 하루에도 40-50 건의 강의 요청을 받는 명강사로 날리고 계십니다. 인간들은 그만큼 행복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 비결을 가르쳐 준다는데 누가 마다해요? 회당 수 백 만원에서 수 천 만원의 강사료를 지불하고서라도 들어야지요.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행복전도사라는 분도 삼성 경제연구소가 뽑은 최고의 강사였다는 걸 아세요? 인간들은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그런 교회가 실제로 크게 성장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그러한 식으로 touch나 perspective taking이나 정서 공유의 노력 등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방법론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가짜 행복이 진짜 행복인양 위장을 해서 진짜 행복을 교묘히 가리는 형국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마약을 하지요?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순간에는 그걸 행복으로 감지를 하기 때문에 그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 그게 정말 행복인가요? 그건 진짜 행복을 부수는 악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종류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운 교수나 행복 전도사나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겁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으로 존재가 채워질 때 비로소 성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행복의 하늘을 향해 벽돌과 역청을 쌓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기특한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바벨성 건설의 에피소드가 어디에 이어져 있는 것입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왜 하필 이 바벨탑 사건이 노아의 홍수 사건 바로 뒤에 붙어있는 것일까요?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무례하고 패역한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 후에 인간들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탑을 하늘까지 쌓아서 홍수를 면하자는 방법론적 해석에 머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 당 짓기의 첫 번째 패역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 하나님처럼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시도였다면 그 두 번째는 ‘이름을 내고’입니다. 다시 창세기 11장 4절을 보겠습니다.

(창11:4)

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들의 당 짓기 안에는 인간들의 자기 이름 내기라는 죄 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높여서 자기를 지켜내는 성이요 망대로 삼으려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의 명성은 곧 그 사람의 가치로 환산이 되기 때문에 이름이 높아질수록 그 이름이 자신을 지켜주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하게 반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잠18:10)

10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사람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삭제되고 부정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절대 자신을 보호하는 성전이나 망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는 것이 성도의 본무이지 자신의 이름을 내어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본무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서 견고한 망대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strong tower’입니다. 정확하게 바벨탑과 대조가 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낼 바벨탑이 ‘strong tower’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strong tower’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시편 118편을 보겠습니다.

(시118:25~26)

25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 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26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 하였도다

복 있는 자는 누구의 이름으로 와야 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와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시지요? 예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삭제 당한 채 오셨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에 의해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삭제 당하고 다른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2:17)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 말은 인간으로서의 명성과 인기는 전부 부정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공로와 행위를 내어 놓아 자신의 명성을 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 그 이름을 삭제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 속 행위를 근거로 어떤 상도 마련해두고 계시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건 이사야서에서도 이미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62:1~2)

1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열방이 네 공의를, 열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그들에게 새 이름을 주실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하늘 백성으로의 회복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 유명해 지는 쪽으로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쪽으로 지향되는 것입니다.

(계22:4)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성도의 이마에 누구의 이름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약속은 ‘네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창대한 이름으로 바꿔 주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창12:2)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이렇게 성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자신의 존재성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의 은혜라는 보자기 밑에서 다시 살아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론 건설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위해 하늘로 향하던 바벨론의 실체를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지 보세요.

(계17:3-5)

3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하더라

5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바벨론의 특징이 뭡니까? 온 몸에 세상의 이름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이름을 위해 열심히 바벨론의 삶을 살고 있지 않나요?

다니엘서로 가면 그 자기 이름 내기 좋아하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바벨론 왕은 항상 ‘나’라는 것을.

(단4:29~30)

29열 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새

30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바벨성, 즉 바벨론의 왕인 느부갓네살이 그 도성을 자랑합니다. 그 바벨론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세웠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바벨탑 쌓기 현장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이었잖아요? 그리고 그건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그때 바벨론 왕이 어떻게 됩니까? 광야로 쫓겨나서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뜯어먹게 되는 벌을 받습니다.

(단4:33)

33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32절을 보면 왜 바벨론 왕이 그러한 벌을 받게 되는지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단4:32)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이유가 뭡니까? 7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이름과 명성을 삭제 당하고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네가 뭘 지었다고?’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건설, 역사 속 성전 건설, 죄인들의 당 짓기가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당하는 것이 성도들의 인생인 것이며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깨닫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4절로 가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어떤 고백을 하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단4:34)

34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 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어때요? 바벨론 건설의 주역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다가 7년간 광야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경험을 합니다. 바벨론의 왕이었던 자가 짐승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도 나오지요?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해요? ‘내가 짐승입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전3:18)

다니엘서 5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왕을 짐승으로 밀어 내리셨던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단5:20~21)

20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광야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에 자기 자신은 스스로의 이름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짐승에 불과한 자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데에 소용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이라는 첫 번째 이름을 하나님에게 빼앗기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받게 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성을 박탈당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름을 빼앗기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 이름을 수여 하셨습니다.

(빌2:7~9)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의 왕이신 예수가 이름을 빼앗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새 이름의 수여 이전에 반드시 선행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라는 육적 존재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야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내 이름이 부수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되는 죽음의 행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사야서에서 바벨론을 뭐라 불렀지요? 계명성이라 불렀지요? 그 계명성은 새벽별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자신이 계명성이라고 우기는 타락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아냥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진짜 새벽별이 누구인지가 드러납니다.

(계22:16)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 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누가 진짜 계명성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바벨론 왕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부정당하고 삭제 당하는 과정을 통과하며 결국에는 그 이름 전체를 예수님에게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맞는 것입니다.

(계2:3)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보세요. 성도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못 살도록 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만 살도록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차압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뭐 대단한 일을 하는 자로 성숙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영광이 돋보이게 되고 찬송 받게 되는 것이니까요.

(행15:16~17)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사43:7)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보시다시피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성도의 실존인 것입니다.

 

다시 바벨탑 건설의 현장으로 갑니다.

(창11:1-2)

1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시날 평지지요? 그 시날 평지라고 번역이 된 단어 ‘비크아’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에스겔서 37장입니다.

(겔37:1~3)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사건의 초입입니다. 죽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들이 쌓여있는 골짜기, 그 단어가 ‘비크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바벨성을 열심히 쌓고 있는 그 곳은 기실 죽은 뼈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뼈들이 자기들 스스로 하늘에 도달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어 보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이라는 이 역사의 현장인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른 뼈들을 보여주시면서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기에서 에스겔은 인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른 뼈들은, 절대로 스스로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그런 먼지들임을 강조하여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자에게 대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건 말씀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의, 인자의 새 창조가 시작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겔37:4)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마른 뼈들 위로 말씀이 떨어집니다. 다른 말로 새 창조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는 항상 무엇으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라 했지요? 여기에도 역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로, 죽음 위로 덮으시는 성령이 등장합니다.

(겔37:5)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여기에서 ‘생기’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하나님의 신, 성령’과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이 죽은 먼지 위를 덮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죽음의 현장이 산 자의 모임, 군대로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의 탄생 현장인 사도행전 2장을 떠 올려 보세요. 거기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죽은 뼈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뼈들 위로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하시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흩어짐이 현실이 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흩으심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 교회가 완성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 됨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걸 바벨탑 건설 현장과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 사건과 연결 시켜 보세요. 시날 평지, 시날 골짜기에 죽은 자들이 흩어짐을 면하겠다고, 하나 되어 당을 지어서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바벨론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흩어 버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자체가 죽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들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 모든 시도와 추구들이 다 죽은 것이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걸 살려 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당 짓기가 파해져야 합니다. 인간들의 당 짓기가 파해지려면 성령이 그들을 덮어서 그들을 흩어 버려야 하지요? 그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실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당 짓기를 흩어 버리셨더니 하나님의 성전이 하나로 완성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들의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모여 있는 상태가 사망인 것이거든요.

쉽게 말해 인간들의 이름이 부수어진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연합이 된 교회가 탄생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뼈, 먼지들은 스스로 힘을 규합할 수도 없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죽은 뼈들이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여 행복에, 하늘에 도달하려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들을 덮으셔서 그들의 그러한 시도들을,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를 부수심으로, 그들을 은혜의 장막 아래로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새 창조이며, 그게 구원인 것입니다. 그건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미 예언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렘8:1-2)

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2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복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이게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던 이스라엘의 실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죽은 뼈에 불과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기에 의해 살림을 받지 못하면 도저히 스스로 살아날 힘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 생기가 하나님의 은혜, 성령이란 말입니다.

(신32:39)

39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신,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영광과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이 역사와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파하시고 은혜로 덮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창조해 내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가 구체적 그림으로 나타난 곳이 한 곳 더 있는데 그곳이 창세기 30장입니다.

(창30:14~16)

14맥추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 하였더라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그 이스라엘이 바로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야곱이 교회를 낳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야곱의 정실자식이 태어나게 되는지를 잘 보세요. 이 안에 인류의 역사 전체가 들어가 있습니다.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이는 라헬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20년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피로 라헬이 야곱의 신부가 되는 그런 그림입니다. 레아는 라헬의 언니이고 먼저 야곱의 신부가 되기는 하지만 야곱의 정실부인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레아는 라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선택된 구약의 이스라엘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무줄기에서 떨어지고 라헬이 접붙임을 받게 되는 그런 순서인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과 하갈, 그리고 사라의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먼저 아들을 낳습니다. 하갈이 먼저 신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마엘을 아들로 쳐 주지 않으십니다. 그걸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갈4:22~29)

22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아브라함의 진짜 아내에게서는 약속, 즉 은혜에 의해서 이삭이 나오는데 가짜 아내인 하갈에게서는 육의 생식 작용에 의한 육신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걸 바울이 두 언약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자기들의 사유 자원으로 생산해 낸 것은 옛 언약, 즉 율법주의라고 하고, 완전히 무력한 죽은 뼈의 상태에서 오직 은혜로 후손을 생산하게 된 사라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산된 후손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합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창세기 30장에서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30장으로 가시면 그때가 언제라고 합니까? 맥추 때라고 하지요? 맥추절은 다른 말로 오순절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에 일어날 사건이 지금 그림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첫 번째 부인인 레아는 라헬이라는 진짜 신부가 오기 전에 진짜 신부의 중요함을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레아는 하갈처럼 육신의 힘으로 자식을 잘 낳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태가 닫혀서 자식을 못 낳습니다.

어느 날 레아의 아들이 합환채(두다임)라는 것을 어머니 레아에게 선물을 해 줍니다. 합환채는 임신 촉진제라고도 하고 정력제라고도 하는데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임신을 하는 데에 아주 긴요하게 쓰이는 어떤 것입니다. 라헬이 오랫동안 자신의 태가 닫혀 있음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그 합환채를 보게 된 것입니다. 라헬은 후손을 갖기 위해 합환채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레아는 그런 합환채가 없어도 자기의 힘으로 자식을 잘 낳던 여자입니다. 그녀에게는 합환채가 별로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라헬은 레아에게서 그 합환채를 삽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기묘합니다. 신랑을 주고 합환채를 삽니다.

그건 하나의 모형입니다. 신랑을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고 합환채로 후손을 만드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아에게 빼앗긴 신랑은 십자가 지시기 전의 예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직접 설교를 하셨는데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후손이 생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예수는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잡혀 죽습니다. 라헬이 남편을 레아에게 빼앗기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합환채가 들려 있습니다. 그녀는 그 합환채로 말미암아 자손을 생산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합환채는 십자가 지고 율법주의에 맞아 죽으신 예수 대신에 내려오신 하늘의 성령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추 때에 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이가 요셉입니다.

(창30:22~24)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3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그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리지요? 왜 그랬습니까? 요셉이 형제들의 죄를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이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똑같이 설명을 해 줍니다.

(갈4:29)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보세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옛 언약 하의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과 힘을 여전히 의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 은혜로 난 자 들을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합환채에 의해 은혜로 태어난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이유였던 것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는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열심히 착하게 잘 살아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겨 갖겠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은혜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절대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의 열심으로 성취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 같으세요? 미워하지요. 자신들은 지금 열심히 종교행위도 하고 선행도 하여 자기들의 마른 뼈를 가리고 있는데, 덮으심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이들이 그들의 열심을 자꾸 벗겨내서 마른 뼈를 들추어 내 버리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은혜의 아들인 요셉에게만 장자의 옷인 채색 옷을 입히지요? 그게 바로 은혜의 옷, 어린양 예수의 피로 씻은 세마포 옷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합환채에 의해 탄생한 은혜의 후손이라는 의미입니다. 옛 언약 하의 형제들이 보기에 새 언약 하의 요셉은 자기들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입혀준 채색 옷 하나밖에 없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옛 언약 하의 형제들이 새 언약 하의 요셉의 채색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립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여기는 인본주의자들의 행태인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그의 자격이나 됨됨이에 의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언약에 의해 장자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거저 장자권을 취득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열심히 사냥을 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 했던 에서가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도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합환채가 있는 들로 나가자고 했던 것입니다.(아7;13) 술람미는 합환채로 출산을 하게 될 어린양의 신부, 교회를 모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과 하나님의 은혜의 성전 건설이 마지막으로 대결을 펼치는 장소로 성경에 등장하는 곳이 아마겟돈입니다.

(계16:14~16)

14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기에 보시면 마귀들이 자꾸 세력들을 모으지요? 그 단어가 몇 번씩 반복이 되어 나옵니다. 인간들을 포함한 마귀의 세력들의 당 짓기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로 모여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마귀 세력들의 당 짓기 현장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옷을 입고 부끄러움을 가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덮으심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끼리 모여서 아무리 세력을 구축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걸 다 부수어 내시고야 마실 것이니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입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마겟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히브리어 ‘할마게돌’, 즉 므깃도의 산이라는 어구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그 므깃도는 ‘군대를 소집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가다드’에서 나온 단어로 그 단어가 ‘아마겟돈’이 된 것입니다. 그 므깃도의 산에서 인간들의 바벨성 쌓기가 완전히 파해지고 하나님의 승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므깃도 산은 스가랴서 12장에 나오는 곳입니다.

(슥12:10~11)

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죽어 있는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거기가 므깃도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그 므깃도 ‘골짜기’라는 단어가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 ‘평지’와 같은 단어이고, 에스겔서의 마른 뼈 ‘골짜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의 자율성 발휘의 현장, 바벨론 건설의 현장에 성령으로 침투하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 용서를 구하는 영, 즉 성령을 부으셔서(생기) 그들의 마음속에서 ‘내가 예수 죽인 자 맞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격발해 내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의 어느 날 한 번 일어날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속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며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승리하실수록 우리의 이름이 빼앗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바벨론 건설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생기로 부어지는 성령의 정체를 예레미야가 이렇게 밝혀 줍니다.

(애4:20)

20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여기에서 콧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수면 위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신, 죽은 흙 속으로 들어간 생기, 마른 뼈 속으로 들어간 생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콧김, 우리의 생명이 누구라고 하십니까? 기름 부으신 자라고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꼭 붙들고 믿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바위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은혜의 보자기가 덮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부수어 내셔야 합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행체계나 지식 체계 등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자존심을 챙기려하고, 인간들의 주체성이나 존재성을 챙기려 하는 그 자체가 인간들의 당 짓기, 바벨론 건설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착한 일만 행하다가 자기의 그러한 의로운 삶으로 아버지까지 탄핵을 하는 장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돼지우리 속의 돼지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들 대접해 주시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평생 찬송 하며 사는 탕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당 짓기가 왜 하나님의 노와 분을 부르는 것이며, 왜 그것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인지 잘 아시겠지요? 마지막으로 말라기 1장의 말씀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말1:4-5)

4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이게 우리의 역사이며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쌓고 하나님은 계속 부수어 내시며 결국에는 성령의 보자기로 덮어 우리를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부수어지는 여러분의 인생, 이름을 빼앗기는 여러분의 인생, 그것이 하나님의 복임을 잊지 마시고 잘 견뎌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