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로마서)42.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Hebrew 2023. 5. 31. 21:33

로마서 42번 말씀

 

제목: 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본문:롬 4장 17-25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과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967년에 캘리포니아의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에 죽음 직전의 암 환자가한 명 도착했어요. 그는 여러분도 잘 아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였던 베드 포드 박사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가 76세,그는 지금도 고치기 힘들다는 신장암 말기 환자였어요. 간암 환자였다고들 하는데, 신장암 환자 였답니다. 그런 그가 알코어 재단을 찾은 게 자신이 죽기 전에냉동인간으로 만들어서 2030년까지 보관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질소액에,영하 한 190도 정도의 질소액에 순간적으로 넣어서 냉동을 시켜서 나중에 해동이되면 살아 날 거라는 이런 확신이 있는 거죠. 2030년 때 쯤에는 신장암 정도는 고칠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품고그 때까지 냉동 인간으로 있다가 해동이 되어서 신장암을 고치고 더 살겠다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냉동인간으로 보존이 되어있습니다. 그 재단에. 알코어생명재단은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개발이 되고 늙어 죽는 걸 막아 줄 수 있는 먼미래까지 죽기 전에. 막 죽기 전의 인간이나, 막 사망한 인간을 냉동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일을 하는 그런 재단이예요. 그냥 얼리면은 이 피 라든지 수분이 결정이 되어서 인체 조직을 다 파괴하기 때문에대체 액을 넣고 피는 다 뽑아버려요. 글리세린 같은걸 넣고. 그래서 꽁꽁 얼려 놓는거예요.지금도 아리조나에 그 재단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33명의 냉동인간이 캡슐로 보존 되어 있구요 그 냉종 캡슐을 예약해 놓은 사람이 전 세계에 8개국에서 400명 정도예요. 비용은 전신 냉동보존료가 십 만 달러이구요, 머리만 보존하는 두부냉동 보존료가35000달러, 그리고 그가 살아날 먼 미래까지 연회비로 200불씩 내면 되요.

 

모두 해보시겠어요? 이러한 알코어 재단에 인간냉동 보존 캡슐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실버스타 스텔론의 데몰루션 맨이고, 멜깁슨의 포에버 영이죠. 냉동캡슐에 들어간 인간이 먼 미래에 다시 깨어나서 미래를 사는 그런 영화입니다.저는 알코어 생명재단의 그런 냉동인간 프로잭트나 그런 걸 소재로 만들어지는 영화나 소설등을 대할 때마다 인간들의 이 역사, 이승수호의 집념이 얼마나 악착 같은 것인지를 보게 되는 것같아서 참 씁쓸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자아 챙기기와 역사수호의 열심은 며칠 전에도 적나라하게 폭로가 된바가있습니다. 유럽공동입자물리 연구소에서 일명 오페라 시험에 몰두 중인 세계 11개국의 물리학자들이 중성 미자의 속도가 광속도보다 빠르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어요.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수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입자의 질량은 무한대가 되어야 되고 빛 보다 빨리움직이는 물질의 질량은 실수가 아닌 허수로 나와야 되요.

 

따라서 빛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질량이 있는 물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이며 뿌리입니다. 그런데 질량을 가진 중성미자가 빛 보다 육 십 나노초 빠르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는 건, 물론 , 확실히 지금 정설로 인정이 된 건 아니예요, 그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박살내 버리는 엄청난 이론인거죠. 그것을 포착한 인간이 가장 먼저 무얼 시도하려고 할까요? 그 중성 미자 기사가 나오고 나서 어떤 기사가 거기에 딸려 붙었는지 아세요?‘타임머신’ 입니다.

 

 

빛 보다 빠른 속도를 가진 질량이 있는 물체가 인간들에게 포착이 되었어요. 그럼 이제 인간들은 가장 먼저 ‘타임머신’을 만들 거라는 거죠. 언론에서 중성미자의 이야기를 보도하면서타임머신 운운하며 과거로의 여행, 미래에의 여행이 이제 가능해 질것같다는 추측성 보도를하자 지금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환호를 했다 그래요.타임머신을 타고 먼 미래로 가서자기자신의 질병을 고치고 싶다는 거죠.아니면 과거로 돌아가서 그러한 질병을 유발시킨 원인이 된 것들을 모조리 차단을 해버리겠다는 것이죠. 담배도 끊고 수도 끊고 건강하게 운동하고.

 

이렇게 인간들의 이승, 역사수호의 신념과 자기 육신과 자아 챙기기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합니다.어떻게든 살겠다는 거죠.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 있는 자로존재하는데에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동원하겠다라는 게 인간들의 종교예요. 그래서 모든 종교가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데 열심을 부립니다. 불교는 부처를 버려야 부처가 된다라고 가르치죠. 그건 네가부처를 믿는 게 아니라 네가 부처가 되는 거니까 너는 그마만큼 훌륭하고 능력있는 자야, 네가 신이야. 자존심을부추겨 주는 거예요. 무한 가능성을 부추겨 주는거예요.

 

이슬람교도 인간들의 행함을 가지고 천국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거짓 선동을 해서 사람들을자살폭탄의 자리로 내 몰고 있어요.인간들은 그렇게 자기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거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시 이 역사와 인생챙기기의 향연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라는 게 참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 역사는 실재가 아니예요.실재이며 원형인 건 하늘에 완성되어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미 완료된 창조의 나라예요.

 

그런데 재밌는 건 하나님께서 이 모형으로서의 이 역사를, 이 세상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셨고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섬기라고 하셨어요. 이 세상이 누림의 대상이 아니고 섬김의 대상이아니면 애초에 안 주셨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주시냐구요? 마치 먹어서는 안되는 선악과를 동산 중앙,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심어두시고 먹어 봐! 라고 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섬기고 누리고 건설해 보라고 하셨단 말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모형으로 성전을 주시죠? 모세가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내려와서 성전을 지었단 말예요. 그 성전을 섬기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렇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하셨고, 성전을 섬기게 하셨고, 성전을 의지 하게 하셨어요.

 

그렇게 실컷 섬기게 해놓고는 ‘내가 진짜 이곳에 살것 같니? ‘그럼 왜 만들어놓았 느냐는 말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진짜 그러셨단 말예요. ‘내가 진짜 여기 살것 같니?’그리고 ‘누가 이 성전 문좀 닫아 줄래? ‘ 주셔 놓고.

 

‘너희는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등등 성전을 부정하시는 말씀만 하시다가 결국 AD 70년에 완전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게 다 부숴내시고는 이건 모형이니까 믿지 마, 약올리는 거예요? 줘 놓고, 지으라고 해놓고, 그게 역사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나라를 원형으로 하여 그 식양대로 지으라고 하신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이 세상을 대표하고 있는 개념이란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섬기라고 하셨고 그 세상의 종으로 보내셨단 말예요. 당신의 백성을요. 이 개념이 이해가 가세요?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갖고 노신 건 아닐 거 아닙니가? 갖고 놀아도 할말은 없지만 그런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선악과와 선악과로 대표되는 이 세상과 성전과 율법을 만들어서 주시고는 그걸 건축하고 섬기고 지켜보라고 했을까요? 그리고는 왜 십자가로 그걸 다 부숴버렸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하는 게 그거 잖아요. 율법,성전(우리의 옛 성전) 그리고 세상, 수없이 나오죠? 세상이 못 박혔다, 율법이 못 박혔다, 내가 못 박혔다, 왜 줘 놓고 그걸 십자가로 박살을 내시냐고요?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인간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이 세상이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걸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 혹은 자기 백성 골라내기의 프로젝트로 이해을 해야 된다 그랬어요.

 

섬김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며 그분이 홀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에게 행복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런 나라라는 걸 가슴으로 배워야 하는 교육 현장이 바로이 역사와 인생인 거고 그것을 인식하고 수긍하며 고백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인생은 성공을 목적으로 하면 안되요. 번영과 성숙을 목적으로하면 안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전부 그걸 위해 살고 있잖아요. 예수를 믿으면서도그것만 놓고 기도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는 걸 몸으로 살면서 배워보라고 준건데 그걸 목적삼아 산다니까요.

 

지난 금요일 교사 성경공부때 사진을 찍으시는 집사님께서 지난 주 설교를 요약하여 발표를하시면서 실제와 허상이라는 말을 했어요. 묵시가 실재라면 역사는 허상이라는 거예요.그런데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실제를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실감이 되는 이 현실이라는 허상에 목을 맨다는 거지요. 안 보이니까, 보이면 그럴수가 없는데 안 보이니까 이 허상에 목을 매는 거예요. 묵시는 신본이죠, 그죠? 하나님 중심.역사는? 인본이란 말예요. 인간이 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이 인간의 역사만 감지하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스테리온은 비밀로 가려놓았단 말예요. 그러니까 인본의 세상, 이 역사만 감지할 수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거기에서만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잘 이해하시는 거지요. 피 모 목사님의 책을 쓰시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건경천동지할 일이죠.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그림이던 사진이던 우리가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감상하고 감동하는 것들은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예요. 비발디의 사계가 아무리 사계절을 잘 표현 했다고 해도 그건 허상이지 실재가 아니예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가 사실주의에 입각해서 아무리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그려냈다 해도 그건 실제가 아닙니다.그렇다고 사진이 실제겠어요? 사진도 역시 허상에 불과해요.빛의 각도나 굴절 정도에 따라서 실제와는 다른 허상이 사진에 맺히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우리는 사진을 보고도 감동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사계절이라는 이 현실 속에서는 그 현실로 감동하지 못해요.자,여러분이 지금가을이라는 계절 한 복판에 와 있는데 이걸로 감동하십니까? 그런데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는 눈믈을 흘리는 사람이 있어요.농촌의 일몰이라는 현실은 우리를 감동 시키기는 커녕 진짜 가보면 고단함으로만 인식이 되요.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실재보다는 허상에 더 감동을하고 있는 걸까요?실재를 보고 감동하지 못하고 허상을 보고 감동하는 인간들의 속성은, 그건 속성이예요. 실재를 근사하게 포장하고 위장해내는 인간들의 실력을 입증해내는 것임과동시에 자기가 안 보고 싶은 건 안보겠다는 거예요.

 

실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파악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인간들의 무지와 억지를 증명하는 거예요.하물며 보이지 않는 그 실재의 묵시는 어떻겠어요? 묵시, 그건 아예 보이지가 않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보이지 않는 그 실재를 감지하고 그걸 소망으로 붙들 수 있는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눈에 보이는 이 존재하는 모든 보이는 존재들은 곧 나에게 있어서 거부 할수 없는 진실이잖아요. 그죠?

 

여러분과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것 만큼 진실이 어딨어요? 이건 우리에게 진실로 인식이 된단 말이예요. 그건 만큼 생생한 실존 감각은 없어요. 그래서 모든 존재는 나라는 이 존재의 현실, 즉 내가 존재하고 내가 중심이 된 현실이 존재한다는 그 실존 감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밖에 거하는 모든 인간은 그현실과 역사와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 종노릇 하다가 가게 되는 거란 말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기백성 구별하기의 리트머스 시험지예요.

 

성경은 그걸 걸림돌이라고 표현도 해요.하나님은 허상에 묶여서 허상만을 보는 자가 아니라역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묵시라는 실재를 인식하고 보는 자만 내 백성이다 라고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걸림돌을 계속 던지시는 거예요.좋니? 좋아?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에게 자아와 환경이라는 현실을 부여하세요. 물론 그건 모형이예요. 존재는 그 모형 속에서 열심히 능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 나라를 건설해요. 그들의 눈에는 모형으로서의 인 간과 세상 밖에는 안 보여요. 그러니까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그중 어떤 무리에게 보이지 않는 묵시를 볼수 있는 눈과 귀를 주세요. 그리고 그 묵시가 어떻게 완료되게 되었는지도 알게 하세요.말씀으로,계시로. 그들에게 있어 이 역사와 계시는 발전 시키고 성숙시키고 번영 시켜야 할 것이 아니고, 바로 세워져야 할것이 아니고 부수어지고 죽임당하고 부정당해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기 시작한단 말예요.

 

나부터, 나라는 존재부터.그리고 그 일이 실제의 삶속에서 이제 경험이 되는 거예요, 은혜의왕노릇에 의해.그래서 부수어 지는 거예요. 깨지는 거예요. 그걸 고난이라고 하고 환란이라고해요. 그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부인의 삶이고 십자가 지는 삶이예요.십자가는 여러분이 죽는 거예요.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의 은혜로만 지어지고 운영이 되는 나라라 했어요. 그 창조라는 단어는, 잘 생각해보세요. 그 창조라는 단어는 아무것도 없음이라는호나경 속에서만 그 빛을 발휘하는 단어예요. 뭐가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건 수정이고 보완이지 창조가 아니란 말예요.

 

 

창조라는 단어 자체가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환경을 전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발산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처음 조건이 필연적으로 필요해요. 그 창조의 은혜가 천국에서 계속 부어지는 거거든요. 그 창조의 은혜는 피조된 자가 보고 느끼고 쌓아내어 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측에서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부으시는 피동적 간섭이라는 거예요. 그게 창조의 은혜이며 능력인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래도 난뭔가 조금 있어, 이런 뭔가 조금 있음에 그 자기 가능성과 자기 능력 증명의 삶을 살고 있을 때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넌 죽은 자야라는 그들의 처음자리를 확인시키는 방법으로 그들과 동행한단 말예요.성도는이걸 이해하는 사람이예요.그래야 창조의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까? 사진 한번봐주세요. 의자가 쭉 있구요. 밑에 그림자가 있죠? 자 철제 의자 세개가 놓여 있고 밑에 똑같은 그림자가 이렇게 비추고 있어요. 실제와 그림자,허상입니다. 위에 있는 철제 의자가 실재이고 아래에 있는 허상인 그림자예요. 위에 있는 철제 의자가 실재인 묵시라고 하고 아래의그림자를 역사라고 할때 인간들이 인식할 수 있는 건 아래의 그림자뿐이예요.실재를 그 어떤인간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소경인 인간들은 아래의 그림자인 이 인생과 역사만 인식할 수 있어요.그런데 실재를 볼 수없는 인간들은요 고작 자기들이 볼 수 있는 그림자를 이미지로 인식을 하고 그 만들어진 허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인간들은 정서적 동물입니다. 그래서 먼저 반응하고 그걸 해석을해요. 그래서 웃는 여자는 다 이쁘다고 그러는 거예요. 웃는 여자를 보고 화내는 사람 없어요.웃는 여자를 보고 내가 웃죠? 그럼 내가 왜 웃었지를 즉시 해석하거든요. 그럼 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이뻐서’라고 해석하는 거예요. 자주 웃으세요.의미를 부여해요.

 

마치 실제인 의자에는 감동하지 못하고 그 의자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작품이라고 이름 붙이고’와 멋지다’ 하고 있는 인간들의 무지와 억지 같은 거예요.그렇게 역사라는 허상에 시선이모아지고 집중이 되면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이 그 이미지의 틀 속에 갇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못보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이미지화된 그림자에 열광을 하는 거고 성경은 그걸세상이라고해요.그런데 그림자인 이 인본의 세상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왜? 인본주의니까 휴머니즘이니까, 아주지극히 인간적이고 , 따듯하고 충실하고 성실하고 예의가 있고, 옳아요.그래야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인간들의 자존심이 서는 세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신을 거부한 인간들의 시체 화장놀이예요.자기공백 메꾸기, 자기결핍 채우기.연극인 겁니다, 훌륭한 위장술인 거예요. 반면에 신본의 묵시를 보게 된자들의 올바른 그 허상인식에의한 그 허상깨기와 허상 부수기는,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끌고 가세요. 이게 자기부인이예요. 세상부인 역사부인 자기부인, 다 같은 말이예요. 그 삶은 인본의 세상 사람들이 볼때 인간적이지 못하고, 왜? 신본이기 때문에. 저급하고 방관자적이며 냉소적이며 소극적이 될 수있어요. 왜? 인간의 세상이 허상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굉장히 냉소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인다니까요.

 

 

마땅한 보편적 인간들의 가치와 행위를 가치 없음과 부실과 허망함으로 인식해 내게 되는 그들의 삶속에서 나오는 게 오죽 하겠어요?그래서 이 역사가 객관적으로 그들을 판단할 때 불성실함 더러움, 여전히 추악함 게으름, 이렇게 판단할 수 있어요.역사가 여러분을 볼 때에/심지어 허상은 거짓것을 실재로 느끼게 하는 힘까지 있어요.거짓것을 실재로 느끼게 하는 힘이있어요. 이게 마귀의 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실재는 그걸 비밀로 감추고 있는 거예요.힘을 무스테리온으로 감추고 있어요.그러니까 성도들이 환장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외의 모든 존재들은 이 역사에만 열광하고 집중 하는 거예요. 나에게만 집중하는 거예요.당연히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와 세상의 눈에 가짜처럼 보이게 되는 거고 인본의 역사를 숭배하는 가짜둘이 열심있는 지짜로 둔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짜들 중에 의인이 많고 잘난 이들도 많은 거고 착한 이들이 많은 거예요.진짜 세상이 존경하는 위인들은 기독교 밖에 다 있잖아요?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의 결핍과 공백을 메워내야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들은 여전히 지고 있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어떻하죠?성도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도예요.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운영이 되는 곳이예요.하나님은 그렇게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 계셔야 되고 (제자리에 앉는 게 싸밧스예요 존재가 제 자리에 앉은 것 그걸 안식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존재가 제자리에 있어야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걸 안식이라고 해요),

 

그렇게 하나님은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 계셔야 하고 피조물은 그 창조주의 은혜와 생명력과 복을 받아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찬송하며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예요.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 창조의 능력은 무얼 전제로 부어진다? 창조의 은혜니까, ‘없음’. ‘더스트’ 먼지 위에만 부어지는 거예요.그런데 다 내가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아닌 그들의 능력으로 살게 하는데 거기가 지옥이라는 거예요.그 상태, 그렇게 존재가 제자리에앉아서자기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확인하고 열심히 관계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걸 ‘의’라고한다 그랬죠?

 

그게 의의 나라란 말입니다.그래서 그곳은 각 개체의 개체성이 차압을 당하는 나라라는 거예요, 각 존재의 개체성이 차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각 개체가 개체성을 소유한 채 각자의 능력과 성숙의 정도에 따라 정의도 되고 인정도 되고 판단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닌거예요. 왜?‘없음’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운영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개체성이 인정이 안된단 말예요 거기는요.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곳이기 때문에 각 개체의 능력과가격과 업적이 조건이 되어서 그것으로 순위가 매겨지면 안되요.그러면 각자가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이 되기 떄문에. 이해가 가세요?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 한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하늘의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이주겠다 라고 하고 그 후손을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후손이라고 단수를 쓰는게 바로 한 몸사상의 힌트였던 거예요. 우리는 한 몸이라니까요.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눈깔만 상 받고손가락만 상 받고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구요,한 몸인데. 바울은 그 후손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즉,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지체로서 구원 받는 거란 말예요.이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체라고.

 

그래서 성도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장악 당하여 움직이는 것이지 자기의 개별적 자아의 개체성을 챙겨서 다른 이들과 성숙과 변화의 경재을 하는 이들이 아니란 말예요.그건 역사속 모형 인간들이 하는 짓이예요. 성경은 그걸 죄라고 그런다니까요.그리고 그 죄의삯으로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게 사망이예요. 그게 죽은 거란 말예요. 살겠다고 나선 그게 바로 죽은 거라고요.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의 개별적 자아 챙기기의 장으로 나섰죠? 그전에는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살았단 말예요. 그런데 먹지 말아라는 걸 거역하고 먹으면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었어요. 내가 이제 역사에 기여를 하겠다고 하잖아요.그때에 아담의 시계, 역사의 시계가 그때,딱 출발한 거예요. 그때 역사의 시간이 출발하면 이게 어디로 흘러 가느냐하면 사망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반드시. 그 역사의 시계가 멈추는 곳을 영혼이라고 해요.그래서 거기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거란 말입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에덴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완전한 성인으로 창조 되었어요. 애기로 창조 안되었단 말입니다.

 

자라고 성숙해야 할 아기로 창조된 게 아니예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렇게 영단번에 완료의상태로 창조된 거라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시간에 종속이 되어서 자라고 성숙되고 발전한 게 아니예요. 그러면 죽어요. 그 흐름이 시간이고 그게 사망으로 달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나라 백성의 출생과 존재 양식을 힌트한 건데,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영단번에 완료요 완성으로 출생하는 거지 시간에 의존하여 자라고 성숙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거란 말예요. 이게 역사가 추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의존하며 사는 거 그게 의란말예요. 하나님 만을 의존하며, 그분이 살게 하면 살고 그분이 망하게 하면 망하고 죽게하면죽고 요걸 의라고 한단 말예요. 그리고 그걸 안식이라고 하고 그 상태가 하나님과의 화목의상태예요 그것이. 거기엔 죽음이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의 창조 은혜 속에 있는 곳이 시간이없다는 영원이라는 영역이기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시간이 없으면 죽음이 없는 거란 말예요.시간이라는 건 객관적 실체가 아니예요.우리는 시간을 흐르는 것으로 인식을 하지만 사실은인간이 흐르는 거예요. 인간이 달리는 거란 말입니다. 시간이 뭐예요? 뭐가 시간인데 여러분이 시간이 흐른다고 해요? 뭐가 시간인데 여러분은 시간이 간다고 그러죠?뭐가 시간이냐구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시간이라는 게 흐를 수가 없어요. 반면에 객관적 실체로서의 인간,개체로서의 인간은 흘러요.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은혜 아래에서 자신의 처음자리를 올바로 인식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존재하는 이들은 자기가 달려서 흐르지 않아도 되요.이게 사는 거라니까요. 예수 안이라는 지체의 자리에서 객체로서의 흐름을 기도하거나 생산하지 않는 그들을 성도라고 해요. 그걸 안식이라고 하고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자리예요.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처럼 자신들이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고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변화와 성장과 성숙과발전과 번영을 꾀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람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자마자죽음이 왔고 그가 달린 결과가 930세에 ‘죽음’으로 끝나는 거예요.시간이 그때 시작 되는 거예요. 사망을 향하여 달리는 거예요. 우리가 달리는 거예요. 그런데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늙음이 오고 썩어짐이 오고 종국에는죽으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어요.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역사를 달리는 거예요.그리고 어디로가요?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그래서 여러분은 반드시 죽어야 되요.

 

그러니까 시간이 사람을 후패케하고 썩게 하고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열심히 달려서 늙고 후패하고 썩고 죽는 거예요.성경의 표현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썩어짐의 종노릇을 한다 그러죠? 열심히 노력하여 율법 지켜 썩어지는 거예요. 그게 시간이 가는 거예요. 인간이 달리는 거예요.그렇게 썩어짐의 종노릇 하다 결국 사망으로 떨어지는 거예요.그걸 지옥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라는 모형을 통하여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형성과정과 그곳에서의 삶의 양식을 설명해주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조금 엿볼수 있습니다.

 

창2장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하시죠? 동방에 에덴 동산을 창설한 게 아니라.동방의 에덴에 동산이 잠깐 섰다가 사라진 거예요. 여기서 동방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영원이란 뜻의 케덴이예요. ‘영원’. 에덴이란 단어는 기쁨이죠? 따라서 동방의 에덴이란 영원한 기쁨의 나라를 말하는 거예요.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영원이란 기쁨의 나라는 묵시속에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거예요. 동방의 에덴이예요. 거기에 동산이 잠깐 선거죠.

 

영원한 묵시에 역사가, 동산이 잠깐 서서 그 동산 속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사람이 어떤 역할극을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묵시와 역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인간의 악마적 실체를 고발하고 그들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설명용 교보재로서의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에덴이 아닌 동산에 심겨져 있다는 거예요.주의 깊게보셔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이 역사를 이해 할 수 있어요. 동산에 심겨져 있단 말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영원한 에덴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 장치였단 말이예요. 그래서 동산에그게 등장하는 거예요. 선악과는 인간의 처음 자리 폭로용으로 마련된 하나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은혜인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한 마디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에덴이 아닌 영원한 기쁨의 나라가 아닌 동산에 나와서 심겨져 있는 거예요.뭘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거기서 부터 나오는 거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즉 율법과 예수그리스도가 모형인 세상으로 출동을 하여 영원한 나라를계시해내는 거예요.그래서 세상은 율법으로 계속 흐르고,인간의 가능성으로 계속 흐르고 자기의 실체를 목로 당하며 거기에 예수가 덮는 존재로 이 역사 속에서 지금 뭔가 계속 설명해내고 있는 거란 말예요. 이게 동산이란 말예요.그 그림을 성막으로 그대로 옮겨서 성막의 구조와 한번 오버랩 시켜보세요.

 

성막에는 지성소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 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죽은 흙들에게 무상으로 부어지는 시은좌가 있죠?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존재하고 운영이 되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으로 당신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창조주앞에 피조물은 죽은자의 자리에서 그분의 은혜를 무상으로 받는 모습이예요. 이게 지성소예요. 그리고 그 지성소 밖은성소라고 부르는 곳이죠? 에덴 그리고 동산 그리고 동산 밖,창세기에선 이렇게 에덴과동산과동산 밖으로 이 전체를 세 부분으로 구별했지요? 그래서 하늘을 삼층천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런데 성소도 지성소와 성소와 뜰 이렇게 세부분으로 구별이 된단 말예요. 그러면 성소는 창세기에서의 동산의 역할을 하겠지요? 그러면 거기에 무슨 나무가 심겨져 있어야 될거 아니예요? 성소에 뭐있죠? 떡상,향단,촛대. 출애굽기에 가보면 이 촛대를 어떻게 만들으라고 설명을하는데 나무예요.그죠?

 

 

나무가 지성소가 아닌 생명나무가 지성소가 아닌 성소로, 동산으로 출격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지성소를 설명하는 거예요.거기 있는 떡상이나 향단이나 촛대가 다 예수 입니다. 불기둥구름기둥 만나,예수가 세상으로 출격해오는 거예요.이걸 성육신이라고 해요. 성도는 그걸 알아 먹는 거예요.세상 속에서. 이 모습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현실과 또 한번 오버랩 시켜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인 가나안이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인 가나안의 삶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한 광야 사 십 년이 있고,(광야가 있어요)그리고 애굽이라는 이방 나라가있어요. 성전 뜰에는 이방인도 막 들어오는 거 아시죠?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사는 나라예요. 거기는 자기가 심지 않은 걸 먹고 자기가 건축하지 않은 집에서 사는 곳이예요. 일부러 하나님이 그렇게 설명을 하세요.

 

신6장 10-1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때에 너는 조심하여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그죠? 가나안 나라,가나안 땅, 약속의 나라가 어떤 나라다? 하나님이 다 준비하신, 준비해놓으신 그곳에 가서 그냥 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걸.

 

수24장 13절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보시다시피 하나님나라, 약속의 땅은 그나라 백성들의 손이 조금도 기여되거나 공헌 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그런 은혜의 나라예요. 그런데 잘 보시면 그 은혜의 나라를 설명 하면서 꼭 뭐가 붙죠? 뭐가 붙어요? 다른 신 섬기지 마라. 그게 뭐겠어요? ‘너’, 인간, 인본, 율법. 이게 하나님이 경고하신 우상이예요. 실체, 내가 다 준비해 놓은 곳에 너는 들어가서누리면 되는데 너는 반드시 너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거기에 망치질이라도 한번 하겠다 고 나설 거라는 거예요.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래서 거기에 우상 섬기지 말라가 항상 붙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나라며 완료된 나라인데 인간들이 자꾸 거기에 율법적 행위를 보내서자기들의 자존심도 챙기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우상 섬기기라는 말이예요. 하나님은 그걸 버리라고 하시는 거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자마자 십계명을 주시는데 그 시작이 전부 다른 신, 우상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그래 놓고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쫙 나열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에 뭐죠?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마음을 어떻게 제어해요 우리가?훔치지 말아라가 아니라 탐 내지 말아라예요.

 

안 훔치는 건 할 수 있는데 탐 내는 건 어떻게 어거가 안되잖아요.지키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그게 다른 신 인거예요, 여러분. 애굽은 나를 우상으로 삼아서 나라는 자아의 종으로 사는 이 세상 역사를 모형하는 곳이예요. 그래서 거기서 종살이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에게 갇혀 있는 걸 종살이라 그래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러한 종의 자리에서 건져서하나님만 의존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하나님 의 종으로 만들어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래서 이 역사 속에 당신의 백성들을 던져 넣으시고 애굽의 종으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살라, 살아봐! 라고 하시는 거예요.

 

발전 해봐라, 번영해봐라. 성숙해봐 그러고 율법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세상을 살게 하신다고요. 그렇다면 이 역사를 바라보는 성도의역사 인식이 어떠해야 할까요? 인간이 열심히 달려서 얻어 낼수 있는 건 사망과 썩어짐 밖에 없다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하고 목숨 걸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의에만 매달려야 하는 그 인간 실존을 처절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십자가 은혜, 이거 없으면 죽는구나, 이렇게.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7절에서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이렇게 기술한 겁니다.

 

17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자 그게 뭘믿었는지 설명해줄게 하고 그의 믿은 바를 간단 명료하게 써요, 뭐라고 썼는지 보세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걸 믿었다는 거예요. 성경을 절대 표피적으로 보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 이걸 표피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죽은자도 살려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며 ,없는 데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님이다 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차원, 이것으로 이해를 한단 말예요, 표피적으로 보게 되면. 이건 그런 능력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지금 바울이 구원의 이야기를 하고있단 말이예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없는 걸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으로 그 앞에서 산 자인척 할 수 없는 자, 죽은자만 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는 자니까 열심히 노력해, 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말이예요, 이거는요. 그래서 가장 마지막 두 절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맺어지는거예요.

 

 

24절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살리 신 이를 믿는자니라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살아 나셨느니라

 

24절 보시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거라 그래요.그리고는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 단락을 맺고 있어요.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를 살려 낼 수 있는 방법과 도구로서만 우리에게 주어진게아니라고 그랬죠? 십자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창조 섭리와 존재 양식과삶의 원리를설명하는 거예요. 죽는 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살아나는 거예요.죽는 게 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나라란 말예요.하나님 앞에서 존재인 척 하는 건 절대 살 수없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란 말예요.

 

그래서 반드시 죽어야 되요. 예수는 십자가에서. 예수가 우리를 대표한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그렇게 죽지 않으면 여러분은 산자가 안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단순히 여러분의 죄를 용서한 게 아니란 말예요. 살아 났다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 드려져야 비로소 산 자가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출생의 비밀과 존재양식에 관한 하나의 모형이었어요. 그것이 빌립보서 2장 8절에 자기를 낯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단 말입니다. 이게 구원이예요.

 

죄사함, 구속, 이러니까 자꾸 그냥 수사반장 이런 걸 생각하고 그냥 그걸 무상으로 용서해주는 이정도에서 머물러 있는 거 같아요. 죄사함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너희들이 창조가 되었는지를 내가 설명 해줄게에 죄가 교보재로 등장을 한 거예요.하나님 나라에무슨 죄가 있어요.그건 여러분에게 뭔가 이해시키기 위해서 잠깐 등장 한거란 말입니다. 모형인 역사 속에 인생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역사와 인생을 모두 죽은 것으로 이렇게 폭로하고선언해버린 게 십자가예요.

 

요16장11절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세상 임금은 세상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그가 심판을 받았대요. 그 세상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건 온 세상이 죽은자로 지금심판을 받았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의해서.)

 

갈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정확히 번역하면,십자가를 두고 세상과 성도가 역사와묵시가 서로 너희 죽은거야 이렇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뜻이예요. 정확히 번역하면. 역사는 우리 보고‘죽었어’그리고 우리는 역사 보고 ‘죽었어’라고 하고 있다구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예요. 그런데 바로 위에서 봤더니 십자가가 세상임금을 심판해 버렸네요. 그럼 누가 허상이고누가 실재라는 거예요?

 

묵시가 실재고 세상이 허상이란 뜻이예요. 이건 죽은 거란 뜻이예요, 여기는요. 열심히 살려고 달리는 이게 죽은 거예요.그래서 모든 존재의 끝이 다 죽음이예요.거북이가 아무리 오래살아도 죽어요.학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어요.왜? 역사는 죽는 거예요. 흐르는 건 죽는 거예요.성경을 보면 십자가가 세상을 못박았다 라고도 하고율법을 못 박았다 라고도 하고, 우리육신을 못박았다 라고도 하죠?그러니까 세상과 우리 육신과 율법은 같은 내용이예요.그러면죽어야 할게 뭐라는 거예요? 세상이요, 율법이요, 인본주의입니다. 우리의 육신인거죠. 이건죽어야 될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제일 먼저 난 죽은자가 맞구나.이 세상은 이렇게 열심히 번영하고 산 것처럼보이지만 이게 죽은 거구나를 성도는 제일 먼저 인식을 해야 되는 거예요.그게 자기 처음 자리의 인식이란 말입니다. 여기는혼돈과 공허였었잖아요. 이게 처음 자리라니까요. 그래야 창조의 능력, 빛이 있으라! 했을 때 하나님의 것이 창조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자들에게 은혜로 부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생명력 창조의 능력을 꼭 붙드는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그리로 몰고 가세요.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세요.그래서 예수를 올바로 믿으면 남들에게 존경을 받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 되고 자타가 공인하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들은 잘도 감추고 있는 실수가 폭로 되고 자신의 실체가 공개되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도록 놔두시는 거예요, 죽으라고. 그 어떤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뿐만 아니라 자가자신이 이 역사 속에서 성취해내어서 그토록 자랑스럼게 여기던 모든 전리품들을 다 배설물로여기게 만들어 버리세요.쓰레기 통에 쳐넣어 버리신단 말예요.

 

그러니 안 팎으로 자랑할 게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자여야 하는 성도의 역사 속 죽음이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는자가 산다 하신 것입니다.

 

빌3장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자기에게 유익 된 걸, 모든 걸 다 잃어 버렸대요. 그게 뭐예요? 죽음이예요.역사속 죽음 그게.내가 의지하고 의존했던 모든 게 다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게판명이 됐어요. 이게 뭐예요? 죽음이예요. )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즉었더니 그리스도가 얻어졌어요, 나에게 )그 안에서 발견 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이라는 거예요. 뭐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래야 사는거니까)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이야기를 해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의를 선물해 주시면서 자각하게 한 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게 다 배설물이고 심지어 해 라는 걸 알게 하셨단 말예요. 이게 역사 속 죽음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니까 의지할 거라곤 예수님의 의밖에 없는거예요.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착하게 살기, 역사 바로 세우기, 세상에 기여하기 이게 다 배설물이 되버리니까 그럼 나는 뭘로 인간됨을 챙겨야 돼? 어떻게 살아야 돼?가 되는 거지요.

 

그때 하나님이 예수의 의를 선뜻 내미시는 거지요.그 사람만 그걸 붙들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게 남의 것 탐내고 도둑질하고 이 세상에서 욕심부리고 이게 아니었어요. 우리는 대부분 그걸 사도 바울이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 위에 보세요. 사도 바울이 뭘 버렸는지. 뭘 배설물로 버렸는지 한번 보세요.

 

빌 3장 3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 할 것이 있는 줄로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울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나 진짜 열심히 깨끗하게 살았다 그런거예요, 지금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난 흠 없이 살았어. 그래놓고 바로 밑에서 근데 이게 배설물이래, 하나님이! 그런데 내가 봐도 배설물이야. 왜?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절대 미치지 못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뭣만 의지하기로 했다? 예수의 십자가만 의지하기로 했다, 이게 바울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열심히 산 게나에게, 내 구원의 여정에 해가 되었다 그래요.율법 지킴이 내 구원의 여정에 해가 되었다 그러는 거예요.그래서 배설물이라고 해도 충분한데 이걸 해 라고 굳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사도 바울이. 너를 살리는 게 아니라 너를 죽이는 거라고.

 

 

바울은 예수님을 올바로 만난 후에 그 모든 역사의 짐을 하나하나 내려 놓기 시작한 거예요.그런데 그동안 내 생명으로 여기고 있던 그것들이 하나하나 배설물로 드러날 때, 바울이 어떻게 그 현실을 이인식하겠어요? 역사 속 내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날마다 죽는다’ 그러는 거예요.

 

고전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 너희에게 자랑 할 거 하나 있는데 나 날마다 죽고 있다 그러는 거예요.그게 뭐 자랑이예요?그런데 성도는 거걸 자랑으로 여겨요. 세상이 그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느냐구요? ‘저거 옛날에잘 살았는데, 괜찮게 살았는데 왜 점점 더 저렇게 맹해지냐?’그럴거 아니겠어요? 날마다 죽으니,,,그런데 사도가 그걸 자랑했다니까요.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들한테 뭐라고 욕을 먹었겠어요? 야 너 옛날에 네 가족들 다 버리고 뭐하나 써주면 그것 같고 천리길을 마다 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하나님을 위해 살던 놈 아니냐?그런데 지금 왜 그래? 왜 걸핏하면 감옥에 들어가 있어?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기독교역사는 사도 바울 만한 인간을 아직 못내놓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매일 죽는다 라고 하는 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해야 할걸 이를 악 물고 참아내는그런 종류의 죽음이 아니었어요.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구나 라고 고백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죽음 이었단 말예요.그게 성도에게는 진짜 죽음으로 자각이 되요.

 

바울이 그렇게 자신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게 되자 무어를 알게 되었다 그래요? 고린도 전서15장이 무슨 장이예요?그 유명한 부활장 이잖아요. 내가 날마다 죽는다 그래놓고 바로이어서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부활의 이야기를 해요. 이게 사는거야! 라고 이야기를 해요. 셍떽지 베리가그러죠 산다는 건 날마나 조금씩 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야기를 했겠지만, 성도가 역사를 산다는 건 날마다 역사 속에서 죽는데 그게 날마다 사는 거예요,조금씩. 그걸 부활이라고 그래요.

 

고전 15장35-41 절

 

누가 묻기를 죽은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떠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제가 아니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님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보세요. 이 얘기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하늘을 살 부활이 따로 있고 이 역사 속에서 교육용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임시로 잠깐 살아야 할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새의 몸이 따로 있고 물고기의 몸이 따로 있고 짐승의 몸이 따로 있는 것처럼그렇게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의 육신의 몸은 어떤 용도로 주어졌느냐하면 밀 처럼 심겨져 죽는역할로 주어진 거예요. 봉사하라 희생하라라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제발 거기서 멈추지 말란말예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라면 꼭 봉사하라, 희생하라, 아프리카 가자! 여기서 멈춘다니까요. 그게 뭐가 죽는 거예요? 더 사는 거지 남들이 다 증명 해주는데.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는 그 죽음을 이야기 하는 거란 말예요 여기서는요.그게 밀알이 죽는 거예요.여러분의 육신은 죽기 위해 이땅에 존재하는 거지성숙시키고 번영 시키기는 게 아니란말입니다.그렇게 내가 죽을 때 진짜 내가 소망하는 게 뭐겠어요? 이건 죽어야 할게 맞구나,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는 부활의 몸을 소망 할거 아니예요? 이걸 산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예요. 아니면 다른 종교와 다른 게 뭐가 있냐구요 기독교가? 제발좀 알아먹으란 말예요.

 

사도 바울이 열심히 살았어요.최선을 다해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게다 쓰레기예요. 그때 사도 바울이 진짜 죽는 게 뭐고 진짜 사는 게 뭔지를 알았단 말예요. 고린도전서 15장이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고전 15장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자의 부활도이와 같으니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실재가, 원형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데 우리는 그림자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살아요.그런데 이것을 열심히 살찌웠더니 나중에 하나님이 무얼 알게 해주셨느냐 하면 이게 바로 썩은 것이고,욕된 거고 약한 거고 흙에 속한 거고 육의 몸이다, 그래요. 그럼 뭐예요? 역사는 뭘 증명하는거예요? 이거는 썩어야 되고 죽어야 될 거구나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는 새로운 것을 썩지 아니할 거, 새로운 거 그걸 소망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을 쏟아 붓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예요. 부활이라는 건 새로운 창조를 이야기 하는거예요.

 

새로운 창조 ,고치는 게 아녜요 조금 수정하는게 아니예요.새로운 창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예요.피조라는 게 창조 됐다는 뜻 아닙니까? 고친 거 아니라니까요.성숙시켜 이뤄내는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대고 ‘나는 성화가 너무완전하게 되어서 이제 죄 짓는 게죄 안짓는 거보다 힘들다’고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 말예요.난 그 사람 예수 안 믿었다고 봐요.

 

 

부활신앙은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니고 부활의 몸이 살게 되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믿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부활하신 거예요, 예수님이.그 몸으로 사는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이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몸으로 사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난 거란 말입니다.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역사를 세우려고 하고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하고 나를 성숙시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하는 것이 부활신앙이냐구요.

 

이 육의 세상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거란느 확실한 자각이 있는 그것을 부활 신앙이라고 해요. 그걸 믿는다는 것은 이 역사의 한계를 자각했다는 말이고 그 사람이 눈이 열린거예요. 이 육의 인생의 열매와 그 종국을 알아버렸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는 이율법이 이 역사가 이 자아가 잘 안 죽잖아요.그런데 걱정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동행하며죽여가시는 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예요.나는 왜 이렇게 안죽어? 교만좀 떨지 마세요. 어떻게 내가 날 죽여요?우린 끊임없이 살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하나님이 죽여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옳습니다라고 인정하게 되는 걸 신앙이라고 해요. 본문 18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러한 신앙고백,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을 했는지가 잘 설명이 되어이ㅛ어요.

 

롬4장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내게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우리가 공부한 창세기와 사뭇 내용이 다르죠? 우리가 본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거 아니었잖아요. 사도 바울은 도데체 뭘 근거로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구요.표피적으로 보면 여러분이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한 발짝 더 들어가서 십자가로 풀면 이게 맞는 소리예요. 18절 보면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그러지요? ‘야 어떻게 바랄 수없는 중에 그걸 믿었냐? 야 참 훌륭하다 우리 이걸 본받자’ 여러분 어떻게 바랄 수 없는 중에내가 나의 감정에, 의지에 명령하여 그거를 바라고 믿을 수가 있어요? 그거 할 수있는 분 손 한번 들어주세요. 그걸 가능하다고 지금 그걸 본 받는다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서 ‘바랄 수 없는 중’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르 엘피사’ 는요 ‘파르’가 against예요. 저편, 반대편이란 뜻이거든요. 그리고 ‘엘피사’가 확신, 믿음이란 뜻이예요. 아브라함은 믿음의반대편에 있었다는 뜻이예요. 정확히 번역을 하면. 그런데 어떻게 믿었냐? 4장 19-20 절에 그답이 나와있어요.

 

 

그가 백 세나 되어서 자기 몸이 죽은 것같은 자가 되었음을 알았다고 그러지요?당연히 알아요 본인은 알아요 안단 말예요. 그리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을 알았어요. 분명히 알았어요. 인간측 에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이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죠. 누가봐도 아브라함 측에서의 생산은 불가능이예요. 이게 죽은 거예요.모두가 포기 했어요. 당사자인 아브라함도 포기 했습니다, 즉은 거예요.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 웃은 거 아닙니까?

 

죽었어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죽은 자로 확인이 되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와중에 믿음이 왔다 그러잖아요. 그 상태로 아브라함이 사라와자기를 자각했어요. 우린 이제 죽었어, 안돼,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 어떤 게 하나가 나타났다는 뜻이예요. 그게 뭐예요? ‘믿음’이 나타났다는 뜻이예요. 다 포기했는데 믿음이라는 게 나타나서 이 믿음이라는 게 홀로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만들더라는 거예요. 믿음이, 19절 보세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

 

다 약해져 있었어요. 아브라함도 난 안돼, 사라도 난 안돼. 다 약해져 있었는데, 여기서 믿음이주어란 말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주어 예요. 믿음 홀로 약해지지 않고 거기서 생산해 내더라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믿음’을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다 죽은자로 폭로가되어서 다 포기 했어요. 안돼, 혼돈과 공허예요. 그런데 믿음이 홀로 약해지지 않고 믿음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데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심치 않게 하고 이 ‘믿음’이홀로 견고하세 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더라는 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예요.

 

어때요 여러분?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푸는 것과 우리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푸는 것은 완전히 천국과지옥의 차이가 나요. 그런데 우리는 설렁설렁 대충 넘어 간다니까요. 인간의 기를세워주는 방향으로. 믿음은 아브라함과 별개로 활동을 하면서 아브라함 안에서 일을 해요.아브라함이 사유한 게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변화산 밑에서도 믿음 없는 자들아! 그러는거예요. 믿음이 없어요 그사람들한테는. 사유된 믿음은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하는 믿음이있단 말입니다. 그 믿음이 그들을 끌고 가는 거지 사유해서 귀신 쫓아 내고 자기가 능력으로쓰는게 믿음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렇게 믿음이라는 건 아브라함과 별개로 활동하면서 아브라함 안에서 일을 해요. 그래서 그것을 밖에서 볼때는 아브라함의 것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의 것은 아니란 말이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반대편에 서있을 때 홀로 독야청청 일을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의지하게 만들어 버리는 , 어떻게? 죽여버리는 거예요. 왜 약속을 안믿고 네 몸의 능력과 에너지와힘을 의지 하느냐? 그게 믿음이 하는 일이란 말이예요. 본문 20절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죠? 만일그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할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런데 그 믿음이 일을 하니까 아브라함이 그 믿음 안에서 in faith 예요, 여기에서는. 믿음 안에서 견고해지더라는 거예요.믿음이 견고케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을요. 그러니까아브라함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보세요, 여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아브라함은 죽은 자로 폭로가 되요. 그런데 그 죽은 자위를 하나님의 믿음이 덮어내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믿었다,확신했다 라고 하나님이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거예요. 믿음이 다 하고서는.

 

아브라함은 그렇게 ‘죽음’으로 ‘부활’을 경험한 거예요. 그게 모리아 산에서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졌던 거예요. 아브라함은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자신의 무용함을 깨닫게 되죠? 아무리도울려고 해도 그게 도움이 아니라 자꾸 하나님을 방해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이라면죽이자, 얘를 죽이면 하나님이 어떻게 살려 내시던지 따른 애를 주시던지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게 심장에 칼 꽂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일로 인해 아브라함이죽었더니 후손이 살죠? 이삭이. 그런데 그 후손은? 약속의 후손인 이삭은 누구의 모형? 예수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의 지체로 연합이 되서 살게 되는 이게 역사와 이 묵시의 관계이며 그 내용이란 말예요.이것만 잘 이해하시면 여러분은 어디가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절에가서 스님의 설법을들어도 은혜 받을 수 있어요. 그 어떤 것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니까요.그렇게 성도의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세요?예수의 부확이 여러분의 부활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며 이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반드시 겪어내야 할 게 뭐라구요?

 

십자가 예요. 누명 모함 배신 욕먹음 살해당함, 이게 다 여러분 거란 말예요.하난미이 이걸 말려 주는 게 기독교가 아니라 이리로 밀어넣어 여러분을 아무것도 아님,자랑할 거 없는 자,로몰아 가시는 걸 기독교라 그래요. 금요일 저녁에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으로부터 메일을 한통받았어요.그분은 지난 해부터 저희 교회 설교를 열심히 듣고 계신 분이예요. 지난 수 십 년간한국의 개혁주의 진영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봉사하시던 아주 훌륭한 장로님입니다. 굉장한분이예요. 그러던 차에 제가 쓴 열 권의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그 집단에서 빠져나와서 이제 저희 교회 설교를 틀어놓고 가족이 예배를 드리세요. 교회 갈 데가 없어서. 물론 원래 속해있던 그 사람들에게 무지하게 욕을 먹고 계셨고, 왜? 거기는 건강한 교회라고 이름난 곳이거든요.온갖 모함과 협박에 시달리고 계셨던 분이예요. 원래 세상의 공식으로는 그런 분이 축복받아 잘되고 상대편 사람들이 저주서 받아 아주 뽄대를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얘가 맞다!’ 이렇게? 그런데 하나님이 그분의 일상까지 폭격을 하셨어요.

 

그분이 제게 보낸 메일을 조금만 소개해드릴게요.

 

 

‘이곳은 완연한 가을입니다. 저는 어제 은행에서 경매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업체와 모든 부동산, 집까지요. 그런데 마음은 이렇게 평안 할 수가 없네요. 예수님이 살고 가신 제 인생을알고, 내가 지금 주님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나니까 모든 일들이 아주 작게만 여겨집니다.앞으로 어떻게 이 못난 인생을 이끌어 가실지 남은 날들 얼마나 귀한 은헤와 사랑의 깊은 데까지 인도 하실지,설레고 기쁘기까지 합니다. 믿음으로 서로 세워주고 책망 해주고 모든 것을나누는 아내를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이렇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해도 씩씩학 순종하는아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 무엇보다 목사님을 통해 귀한 복음을 들려주시니 너무 고마워서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너무 행복합니다.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이런 실패가운데 주심을 세상이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좁은 공간으로 이사하면 서재의 책들은 다 버려도성경과 목사님의 열 권의 책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 받은 귀한 사랑 많이 나누겠습니다. 앞으로도 밀려올 아픔과 두려움 잘 달래서 보낼 수 있게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오늘은 집사님과 모처럼 먼산에 다래 따러 가려고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된서머나의 형제들에게도 제가 받은 은혜를 더 넘치게 주시길 빌면서 감사합니다.’

 

눈물 나지 않으세요 여러분? 이 세상 누구보다 예수를 잘 믿어보려고 애쓰셨던 분이고 수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열심을 부렸던 분, 그결과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고인정을 받으시던 분입니다 많은 분들을 가르쳤던 분이예요. 그런데 이게 진짜 복음이 뭔지 깨닫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계신 분입니다. 그동안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당신의 실체가 자각이 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과 애통을 하셨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힘겨운 자기부인의 과정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일상과 역사까지 완전히 폭격을 해버리신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섰던 그 모리아 산 위에 그 장로님을 직접 세워버리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 할까요? ’봐라, 네가 예수를 잘 믿는다구?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겠어? 넌 잘못 간거야!’ 완전히 죽은 거예요, 누구 하나 붙들 게 없어요. 이 세상 힘중에 자기 곁에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 와중에 행복을 이야기 합니다. 자유를 이야기하고 아내와 손잡고 먼 산에 다래 따러 가는 이 여유, 그게 복음이 준 자유입니다.

 

누가 뭐라고 욕하면 어때요? 누가 뭐라고 비아냥 대면 어떠냐구요. 그게 원래 우리의 자리인데.뭐가 그렇게 자존심 상합니까 그것이? 이렇게 하나님이 죽여가시자 이분이 날로 새롭게태어나는 거예요.그걸 행복으로 감지해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진짜 새롭게 태어나고 있구나,어떻게 이 상황에서 내가 기쁨을 이야기 하고 행복을 이야기하지? 나는 진짜 새롭게 태어나고 있구나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당신의 피조물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피조물이 성도예요. 그런데 가짜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자기들이 보암직 하고 먹음직한것을 율법으로 만들어 낸다니까요. 여자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으로 판단 하는 것은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게 새로운 피조물이예요.그런데 보시기에 좋은 게 어떤 상태에서 창조 되었냐구요?

 

아무것도 없었을 때 여러분이 그걸 자각하고 지금 예수, 예수 하고 있냐구요? 한국의 기독교는 이 과정을 생략해 버린 거예요.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겨주기 위해 이 과정을 생략하고 엉뚱한 예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진짜 죽어야 할 죄인임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냐구요?그걸 인생 속에서 지금 살고 계시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예수의 지체로 연합이 되요. 살아서펄펄뛰고 있는 건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예수의 지체로 갖다 붙일 수가 없어요.붙여 놔 봐야 지맘대로 살기 때문에 그러면 교회전체가, 하나님의 교회 전체가 박살 나기 때문에 얘는 못 붙인다니까요. 죽여서 갖다 붙여야되요. 여자가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던 건 선악과, 율법, 역사였어요. 하나님이 그걸 죄라고 했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붙드셔야 되요. 그런데 예수를 붙들려면 나의 개체성이 차압 당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께서 홀로 살아 펄펄 뛰는 암 덩어리를 당신의 지체로 받아들이겠어요?절대 아닙니다.

 

골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너희가 죽었대요. 죽었어요. 죽어야 살기 때문에요. 십자가에서 우릴 죽여 버렸어요.

 

롬 7장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게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열매가 있는데 사망의 열매가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얽매여 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우리가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

 

 

여러분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죽은 분들이예요.그래서 내 안의자존심도 내 것이 아니예요.자존심 상하신다구요? 여러분 아직 안 죽은 거예요.죽은자가 무슨 자존심이 있어요. 죽은자 염할 때 옷 함부로 벗긴다고 벌떡 일어나서 이게 웬일이야 그런사람 보셨어요?자존심 없어요, 죽은자는.세상의 비난이나 평가나 비아냥도 여러분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었어요. 그리고 원래 그 종도가 아니라 우리는 죽어야 할 정도로 더럽고 추악한 인간이었단 말예요. 그정도로 비아냥 거려주는 거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죽었다니까요. 그런 거에 귀 막으세요.대응할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 굳이 자살할 필요도 없어요.이미 죽은 거 뭘 또 죽요? 그냥 사세요.억울합니까? 그냥 세상과 인간이 그렇게 추악하고 더럽다는 것을 그 상황속에서 배우세요. 저는 아주 요즘에 인간의 끝이 어딘가에 이렇게좋은 설교를 하게 하기 위해 인간의 끝이 어딘가를 보여주고 계신데, 오케이, 감사해요. 그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던지 또 그렇게 가겠어요. 그거 배우면 되요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마귀가 이 세상 속에서 발광을 하면서 무얼 하려고 할까요? 타임머신이 생기면 마귀가 어디로 돌아가려고 할까요? 십자가로 돌가겠지요. 절대 거기서 예수님 못죽게 만들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고 하는데, 마귀를 이겼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부순게 뭐예요 예수님이? 율법과 세상과 나 잖아요?그걸 십자가에서 못박았다며? 그럼마귀가 역사 속에서 무얼 다시 건설하려고 할까요? 율법과 세상과 인간의 가치를 다시세우려고 하겠죠?

 

이게 마귀의 일이란 말예요. 그런데 교회가, 보세요 항상 이리로 돌아가요. 개혁이 일어났는데도 또 그리로 돌아가고, 개혁이 일어났는데 또 그리로 돌아가고 항상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인 걸 건설해내는 것이죠.

 

고전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못박히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갈2장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걸 다시 세우면

 

예수님이 헐어 버린 걸 다시 세운 게 마귀예요. 이 세상이란 말예요.그러면, 내가 그걸 전하면나는 죄짓는 거다 그러는 거예요,지금 사도 바울이요. 그런데 오늘날 이게 건강한 거고 건전한 교회라고 이야기 하잖아요.예수가 헐은 걸 다시 세우고 있는게 잘하는 거라고 하잖아요.지금요. 역사 바로 세우고 사회에 참여하고 착한 사람되어서 인간의 자존심 챙기자 이거 아닙니까?

 

아니, 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수요일날 월드비젼에서 와서 자매결연 맺자고 하는데 합시다.그렇게 불쌍한 아이들 단돈 1불이 없어서1초에 뭐 수 십 명이 죽어 간다는데 우리만 배터지게 이렇게 먹으면 되겠어요? 다이어트 걱정하면서? 우리도 돕자니까요.

 

도우면서 그걸 내 자랑으로 챙겨 갖지 말라는 거예요.도우면서, 열심히 살아서 예수 믿으란말예요. 아무것도 안하고 예수 믿지 말고 열심히 살아서 실패하고 ,절망 하며 예수 믿으란 말예요.언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랬어요? 하자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그런 고귀한 일을 하면서도 역시 나의 인기와 명성을 챙기는 나, 이 죽어야 할 나 인정하고 십자가로 가세요.그게 예수 믿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