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롬 8 : 7- 11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멘.
제가 한국에 와서 아주 유익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챙겨서 보진 못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합니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1%에 해당하는 극빈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취재를 해서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터리에요.. 눈물 없이 불 수 없는 그런 다큐멘터리입니다..
15년이 넘은 조그만 5인승 승용차 안에서 16살 먹은 장남을 비롯한 여덟 식구가 숙식을 하는 그런 가족도 있었고, 또 사업의 실패로 고 3 수험생인 딸과 두 살짜리 젖 먹이와 함께 영하의 날씨에도 공원 화장실에서 노숙을 하는 그런 40대 가장의 이야기도 봤습니다. 그리고 가난이 싫어서 가출해버린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면서 정신지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빠를 돕는 아홉 살짜리 꼬마 아이 이야기도 봤고. IMF 경제 위기 때 서울역으로 내 몰린 6천 명의 노숙자들이 이야기도 봤습니다. 또 당뇨와 당뇨 합병증인 간경화로 이미 복수가 남산만큼 그렇게 찬 아빠를 위해서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연탄이 다 떨어져가지고, 나무를 해다가 비닐하우스 방을 덥히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모습도 봤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따듯한 밥을 먹이겠다고 구청에서 나누어준 식권을 아이 둘이 자기들이 안 먹고 아빠가 좋아하는 걸 시켜서 그걸 도시락 통에 그대로 싸가지고, 자기들은 찌꺼기만 이렇게 먹고 아빠를 갖다 드리는 그런 그림도 봤습니다.
거기에 소개되는 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처절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였어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 자식들 만큼은 굶기거나 얼어 죽이지 않겠다, 라는 그런 아빠와 엄마의 사랑. 그리고 그러한 사랑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그 감사와 성숙한 자람, 이런 것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어요. 그것들이 그들을 웃게 하더라는 것이죠. 반면에 자기 몸 하나 살아보겠다고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그런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의 모습도 왕왕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 대한 복수심으로 망가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지기도 해요. 대견한 것은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도 열심히 살더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데 전자의 아이들과 후자의 아이들이 내놓는 열심의 질이 달라요.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하고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감사의 열심을 부리는 반면, 후자의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을 부립니다.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그냥 버리고 자기들만의 안위를 위해 살기로 작정을 하면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 어린애들이.. 그런데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그 아이들이 봅니다. 그런데 후자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식들도 초개처럼 버리는 그런 악한 부모의 그림자 안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러한 몸부림 속에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그 하늘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몸을 굴려대야 하는 율법주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쪽은 사랑에 반응하는 열심이고, 다른 한 쪽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 거의 후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에너지와 자원과 능력을 발휘하여 불태워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
보세요. 둘 다 똑같은 상황이에요.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는 부모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감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가정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꽃이 핍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그 가난이 부러울 때가 있더라니 까요.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게 없었으면 저들을 저렇게 묶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세 살짜리 아이가 하루 종일 삶은 달걀 하나 밖에 먹일 수 없는 그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서 배가 고픈데 그 엄마한테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해요. 카메라 감독이 넌지시 물어봐요. 너 진짜 배 안고파? 그러니까 그때 얘기하더라고요. 배고프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 나한테 미안할까 봐 배고프다는 소리를 안 해요. 세 살짜리 여자애가.. 그걸 보면서 그 아이의 양식은 다른 게 아니라 그 엄마의 사랑이구나. 라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삶은 달걀 500개보다 더 그 아이를 배부르게 하는 건 그 엄마의 사랑이구나.홀로 고생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 매주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교 일등의 여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 그 아이를 공부하게 하는 건 무슨 족집게 과외도 아니고, 일대일 개인 과외도 아니고 그 아버지에 대한 감사구나. 이런 거.그런데 부모의 사랑이 빠진, 냉기만 흐르는 가난은 너무나 춥고 어둡더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냉기를 뚫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는 섬뜩한 살기까지 느껴집니다. 복수심 이런 거.
그렇게 보면 기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랑이요 신뢰라는 것이 자명해지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이들의 가정 속에서는 그것이 그들을 묶는 힘이 되고
어떤 가정에서는 살기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우리의 희로애락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표피 안으로 흐르는 사랑과 신뢰가 그것을 결정한다, 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것에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반응하는 아들들과의 그 관계를 가르치기 원하세요. 진짜 너희들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거기에서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발출된다는 걸 알려주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중요한 건 외부적인 현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라는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은 그 한마음,, 그 참 마음에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 모형인 세상 속에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볼 때 이 세상의 보편적 현실은 그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하위 1%의 그 극빈자들의 생활과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하늘의 풍요를 담을 그릇이 못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현실을 눈멀고 귀먹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둡고 황량하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를 해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오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그러는 거 보면 그것으로 꽉 찬 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심지어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요.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인간들의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아무리 번영과 성숙과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풍요가 아니라고 해요.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나 실상은 벌거벗었고 가난한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라는 하나님의 일갈을 보면 이 세상이 부요라고 풍요라고 자랑하는 그건, 사실은 그게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그 안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니까요. 너희들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진짜 행복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걸 알려주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환경이나 상황이나 외적 성취 정도 등에 따라서 발생하는 그런 행복이나 기쁨이나 만족 같은 건 사실 허상이며 안개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어찌 보면 그건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호도하기 위한 미혹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가짜. 마찬가지로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절망이나 좌절이나 고통 등도 사실은 진짜 절망이나 진짜 고통을 호도하기 위한 가짜인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 진짜 안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알아, 그 사랑을 알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하늘의 행복이고 하늘의 기쁨이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나타난 현상계의 그런 상황이나 현실이 아니라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어떤 감정적인 그런 흐름, 이런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진짜 불행, 진짜 고통, 진짜 절망은 그런 가난, 그런 질병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아담들은 육적 환경과 육적 성숙, 육적 실패와 육적 성취가 주는 그런 감정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가치라는 건 세상의 세계관으로 판단되는 외적으로 나타난 성공과 실패, 번영과 퇴보 여하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 속에 내용으로 심어져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그 자기 계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거예요. 그걸로 슬퍼하고 그걸로 기뻐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관심들이 없어요.
생각해보십쇼. 어떤 이들의 가난과 고통, 그러나 그 속에서도 꿈틀대는 사랑과 희망의 그 모습이 당사자들이나 그 삶을 음으로 양으로 저처럼, 이렇게 접하게 된 누군가에게 그 진리의 일면을 교훈해주고 있다면 그 삶이 그저 그냥 가난하고 추레한 삶입니까? 그냥 그렇게 판단하면 되는 거예요? 그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가난은 죄래요.
진짜 가난은 죕니까? 일견 이해가 가요.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까지 이야기할까?? 그러나 그 가난이 진짜 죕니까? 아니, 이 세상은 그 가난을 악으로 규정해요. 그래서 그리로 빠지면 안 되는 것, 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 죄이며 악입니까? 가난은 꼭 어두운 것이어야 하나요?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라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걸까요? 아니, 이 세상의 삶은 찰나라 며요? 영원에 비교하면 찰나라면서요? 그런데 그 찰나의 삶이 비록 그 찰나동안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들려 쓰임을 받는다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거예요?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왜 나야?’ 그런 불만은 있죠?
물론 당사자들은 힘이 들겠지만 이 인생이라는 것이 영원에 비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먼지에 불과했던 어떤 존재의 삶이 하나님의 그 진리 계시의 사용되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그걸 독사라 그래요. 그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어떤 처지에서건 쓰임 받는 것. 그걸. 어떤 이들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결국을 예시하는 그런 역할로 쓰임을 받는다면 우리가 그걸 보고 아니,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해?? 누구는 저렇게 살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살게 하고 우리가 그걸 보고 그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이요? 아닙니다. 이 현상계의 모든 현상과 상황 등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심지어 죄와 악, 가난과 어둠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자체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죄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칩니까? 제발 생각 좀 해보세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며 요? 그럼 세상에 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의가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치느냐고요?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니까요.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럼 생명이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생명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선악의 열매를 먼저 주어, 율법을 주어 그것이 아닌 것이 생명이야, 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율법이라는 걸 통하여, 말씀이라는 걸 통하여 마땅히 배워야 할 게 뭐냐 하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죄 짓지 마!’ 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 죄가 뭔지를 알아야 의를 알고 생명을 아는데 무조건 착하게 살아, 성숙해야 돼, 성화해야 돼, 라고만 가르치면 어떻게 그들이 생명과 의를 아느냐고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과 가르침은, 그것도 건전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 거기에 머물러 있다니까요.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 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거예요. 그 죄가 아니고 그 율법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압니까? 그러면 그건 나에게 가치 있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그게 나와 상관없는 죄가 되어 나는 용서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조건 착해지라 그러고 되지도 않는 거. 지나 먼저 그렇게 살아보라 그래요. 되나?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그렇다 쳐. 자기 마누라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렇다고. 또. 큰일 납니다. ㅎ ㅎ 아니, 그걸 기독교의 목적지 아니에요. 그냥 종교의 목적지라고요. 아담들의 목적이라니까요. 그거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
그것을 진리 안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낼 때 그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 한 거라니까요. 내가 그거 없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알게 됐겠는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진리에 차서를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깨닫는 이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가치 있는 선물이죠? 선지자들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꼭 성전 마당에 가서 설교한 거예요. 선지자들이 딴 데 안 가고. 왜? 이거 아니야. 언제 하나님이 이런 제사드리라고 했니? 그들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율법에도 분명히 거기서 그 제사드리라고 그랬는데 선지자들은 가서 ‘아니야, 하나님이 그 말 한 거 아니야, 사실 하나님의 진의는 그거 아니었단다,’ 라고 얘기 했죠?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 성전으로, 진리로, 그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옛 성전은 그게 죄라니까요. 거기서 안 나오면 죽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갖고 악이라 그래버렸어요. 그걸 찔레요, 가시라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라고 그랬어요. 내 말을 듣고 나오라고.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진리를 거기서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서. 그러니까 마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살려주는 돌, 산돌이 되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멸망시키는 돌이에요. 진짜 그걸 직역을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멸망시키는 돌이 되는 거예요. 그 예수는 곧 성경이라며 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사는 생명의 책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0장.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딴 책 아니고. 몰몬교 이런 거가 아니라 성경이에요. 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그 책들은 성경이라니까요.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66권이 돼요. 책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거 뭐 다 그 얘기네? 단어도 다 그 이야기이고, 아니 심지어 문자 하나가 다 그 복음만, 그 진리만 얘기하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책은 단수이고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서 그러한 세상 속 부유함이 진짜 부유함이 아니라는 것을 안, 그걸 통하여, 자주 장사 루디아나, 마가나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재물이 복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 인양 그것만으로 자기를, 그것에 자기를 의존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 재물은 악입니다. 그것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가난하고 부유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왕이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로 사세요. 제발. 누가 그런 게 가난이래요? 청빈? 무슨 놈의 청빈이요? 이왕이면 능력 되면 잘 벌어서 사세요. 그거는 신앙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진리를 배우셔야 된다고요.
마찬가지로 70년간의 그 포로생활을 통하여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이렇게 죄의 종, 세상의 종, 세상 풍속의 포로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구나, 라고 배우면 그 70년 포로생활이 복이에요. 그러나 아,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돕지 않아? 이건 도대체 뭐야? 왜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이렇게 겪어야 돼? 라고 그걸 그대로 표피적으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게 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의 눈으로 인식하는 그 Fact 속에서 진짜 내용인 진리의 Fact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죄 속에 살다가 죄 속에 죽는 게 되는 거예요. 가난과 부요, 성공과 실패, 잘 나고 못남, 그런 거에 상관없이 이 현상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가면 그게 곧 저주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살다가 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면 그게 복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행동해버리면 그 모든 것이 죄요, 악이 되는 거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어내면 모든 것이 복이요,선물이요, 사랑인 거예요.
성경에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거는 뭐라 그래요? 사랑이라 그럽니다. 믿음이라는 거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내용은 보이는 게 되면 안 되는 거네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믿음이다, 그래요. 하나님은 미쁘시다가 ‘호 떼오스’, ‘호 피스또스’ 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믿음이네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어떤 것 들 속에서 그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는 말은.
그러면 소망은 뭐겠어요? 소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고 바라는 어떤 것, 알지 못하는 어떤 추상적인,형이상학 적인 어떤 것이 아니에요. 소망은. 성경에 나오는 소망은 이 역사 속에 던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그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눈에 보이는 것을 성경이 소망이라 그래요.
다시 한 번,
소망이라는 건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바라는 어떤 것! 그런 추상적인 감정이나 기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동원한 어떤 것을 소망이라 그래요. 제가 나중에 창세기에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드릴 건데 그러니까 여러분 창세기 책하고 요한계시록 책은 반드시 한 다섯 번씩 읽으세요. 그리고 그런 거 읽지도 않고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 말아요.
그거 옛날에 500번도 더 한 거를 만날 질문이 올라오는 게 전부 그거야. 공부를 하고 질문을 하시라니까.
소망이 그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소망이란 단어가 첫 번째 거기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망이 그 소망이 맞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은 창세기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망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모형이잖아.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소망이 진짜 소망이지 그 보이는 것을 너희들이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건 소망 아니라니까, 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롬 8 : 24 절 보세요.
롬 8 : 24-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대요. 소망은 저 미래에 있는 어떤 거라면서요? 아니잖아요. 여기 보니까.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대요. 뭐? 성경, 예수, 성전. 이런 게 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동원한 눈에 보이는 나타난 것이잖아요. 십자가, 마찬가지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얻었어요. 맞아요. 그게 뭔지를 알았으니까. 보이는 소망, 나타난 그것 자체가 소망이 아니잖아. 예수가 소망이 아니고 십자가가 소망 아니잖아. 그 안에 담겨 있던 그 진리가 소망이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자, 보세요. 그걸 소망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호 피스토스’를 내 안에 이제 믿음으로 갖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어떤 것으로 우리는 공부를 하고 배워야 돼요. 예수 성경 십자가 성전, 세상, 인간 이런 것들. 자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보이는 소망이라는 것으로 공부를 하는데, 배우는데 그것에서 아, 이거! 라고 알게 됐어요. 그래! 그거구나, 이 눈에 보이는 그 소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소망이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 그러고 그걸 하나님에게 이게 그거죠? 라고 고백하고 다른 이들에게 흘리면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이 정의들을 똑바로 알고 계시라고요. 아무데나 가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얘기하지 마시고.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성경이.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천지가 있을 동안에 영원히 있어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료되면 믿음 소망은 없어지죠? 사랑만 남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 믿음과 소망으로 이 사랑이 되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다 같은 거잖아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고전 13 : 13-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거?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죄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예수님을 그 모양대로만 인식하고 그분이 이 세상 속에서 일으키신 기적이나 표적, 십자가, 부활 이런 걸 나타난 현상 인식 수준의 내 밖의 것으로 인식해버리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그건 내 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관하게 내 밖에서 행하신 어떤 것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그걸 믿는다, 그래요. 자기가. 그걸 자기가 믿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건 내 밖에 있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그 여러분 밖에서 대상이 되면 여러분을 못 살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십자가 그리고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이 일으키신 표적, 기적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현상 인식 수준으로 보게 되면 그것으로 죄를 짓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하면서 너희들 나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마. 절대 이야기하지 마. 왜?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죽은 자가 살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병 낫기 위해, 부자 되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들 그따위를,,그따위 인식을 복음이라고 누구에게 가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 얘기하지 마. 그건 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있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냥 눈으로 봐버리면 그리고 그걸 와, 하고 놀래버리면.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이렇게 그냥 놀라버리는 수준에서 끝내버리면, 그리고 그걸 믿는다고 그래요. 또.
하나님은 그래요. 얘기하지 마, 얘기하지 마.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잠잠 해지고, 문둥병자가 일어나는 건 다 진리를,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너희들의 그 원래 자리, 처음 자리, 그리고 너희들의 실체 그거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그걸 비로소 존재로 완성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어! 를 보여주는 건데, 그래서 너희들 안에 네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의 실체인 사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그런 거였는데 너희들이 그것까지 모르고 그냥 나타난 것으로 나를 소개하면 그게 죄야.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도 얘기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랬죠? 요나의 표적, 내가 보일 건 요나의 표적밖에 없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배에서 잤겠어요? 요나가 잤으니까. 똑같이 주무시는 거예요. 졸려서 잔 게 아니라.
이게 요나의 표적이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요나처럼 배에서 주무신 거라니까요. 깨웠습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 라고 했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풍랑은 늘 바다는 너희들을 덮치게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어. 라고 하시고 ‘말’을 하시는 거예요. 풍랑아 잠잠해라. 바다야 잠잠해라!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태풍은 항상 어디서 일어나요? 바다에서 일어나요.
왜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할까요? 그리고 왜 구원이라는 것을 낚시라고 그래요? 왜?
사람을 낚는다고 그러죠? 바다에서 뽑아낸다는 뜻이에요. 바다에 사는 존재를 뽑아낸다, 라는 건 죽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거.아니, 고기들이 아 이 바다가 너무 지루해라고 해변에 나와서 일광욕하면 굴비 되는 거예요. 바로. 죽음이라니까요. 그거. 그런데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그 저주의 바다를 딛고 서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이 그걸 딛고 서시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바다를 밟고 오셨다, 걸어 오셨다, 라고 할 때 쓰인 그 단어는 바다를 짓밟다는 단어에요. 진리는 그 저주의 바다를 짓밟아버리는 힘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그냥 성경, 예수, 십자가 이런 걸 그냥 표피적으로만 봐버리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사단, 뱀이 되는 거예요. 뱀의 말, 그러나 그 죄의 모양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로 읽어내어서 내 마음으로 받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 그건 살리는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모양으로 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모양을 그냥 봐버리면 예수가 죄란 뜻이에요. 성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봐버리면 성경이 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을 죽이는 책이 된다고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그 말씀을, 그 살려주는 영을 내 안에 갖게 되면 내가 또 그걸 흘릴 수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려주는 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돼요.
오늘 본문의 얘기가 그거예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얘기가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나 쉬운 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볼게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과학이라는 것에 의해서 밝혀지고 정리가 되어져 가고 있죠? 지금. 우린 그걸 그냥 Fact로 인식하고 동의해버려요. 아, 그거? 자연은 이런 거야? 원리라는 건 이런 거야? 이렇게.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신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죠? 그러한 이 세상을 축약해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뭐예요? 그 호 코스모르를 뭐라고 그런다고 했어요, 성경이? 헬라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읽는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 세상을 그대로 이렇게 축약해 놓은 게 성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성전으로 오셨다 그러네요? 그리고는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 성경이 예수인 나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래요? 그러면 세상, 성전, 성경, 예수는 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네요? 그리고 똑같은 껍데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그대로 인식을 하고 이 세상의 희로애락, 그러한 현상과 환경과 사건에 그냥 묶여버리면 여러분은 그냥 세상의 종으로 사는 거예요. 세상 풍속을 좇는 자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냥 그 자체가 멸망이란 말에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세상을 표피로 보듯 그냥 성경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으로, 표피로 보아서 그걸 그냥 행해버리면 그것이 여러분이 세상에 묶이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예수와 십자가를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그냥 그걸 무조건 믿음의 대상으로 갖고 가버리면 여러분이 거기에 묶이는 거란 말에요. 그것은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된단 말입니다. 그게 죄의 모양이라니까요. 그럼 죄의 모양은 뭐예요? 그 모양 안에 그걸 모르면 그 모양에 갇혀서 거기에 연합되어 그 죄가 된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랬죠? 그 말은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의 죽음으로, 아,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산 존재일 수가 없는 거구나, 하고 거기서 그 십자가로, 그 다나토스의 그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으로 내가 그 다나투스로 갖게 됐을 때,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그게 자기 십자가란 말입니다. 반드시 나에게 있어서 그 자각과 그 인식과 그 경험이 있어야 돼요. 상관없이 무슨 십자가 보혈, 이야기는 다 하는데 막 네 맘대로 막 살아, 괜찮아! 그게 다 한 거야. 이거는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쫓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된다고 말씀하신 건 그렇게 내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되지 않으면 너희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그냥 예수인 ‘내 십자가야’. 그런데 그게 네 십자가가 아니잖아.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 십자가를 예수의 십자가로만 갖고 있으면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요. 넌 나 쫓는 거 아니야. 그게 자기 부인이라니까요. 아, 나는 그렇게 내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자구나, 가, 자기 부인이에요. 그걸 아는 게.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이게 아니라. 부인 돼요? 그게 자기주장이지 자기 부인입니까? 그래서 보이는 세상의 대표, 옛 성전의 대표로 죄의 모양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육을 삭제 당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이라면서요? 예수님이 성경이라며 요? 예수님이 율법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껍질이잖아요? 모형이잖아요. 그럼 내용이 진짜야 라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는 이 모형은 사라져야 되네요? 당연히 그러니까 예수가 죽어야죠. 아, 내가 살아있었으면, 그때 당시에 내가 살아있었으면 예수를 안 죽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을 마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반드시 죽어야 된다니까요. 아니, 안 죽으면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게 예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과 성경과 예수는 절대 껍데기로,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만 안 된다는 강력한 웅변이 십자가였던 거예요.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이 육은 삭제되었다. 봐! 라고 죽여 버린 거예요. 거기서. 거기서 율법이 죽고, 성전이 죽고 예수가 죽었어요. 성경이 죽었다니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이 눈으로 보는 그 포피적인 성경, 그게 율법이잖아요.그게 죽었단 말에요. 거기서. 그래서 이 세상과 인간과 성경의 대표로 오신 주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도륙당한 거예요. 성전도 그 이야기이고 성경도 그 이야기이고 예수도 그 이야기하는 거고 이 세상도 그 이야기에요. 이거 현상계에 나타난 거? 이거 헛 거야. 다 진공이야 사실은. 꾹 눌러보면 은 하나님의 법칙, 말만, 전기력의 법칙만 없어지면 원자는 다 그냥 진공이야. 허공이야,이거 없는 거야. 이거 알고 가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묶이지 마, 그런데 그 ‘여기에’는 나도 들어가 있다고요. 이 뭄뚱아리도. 그러니까 이게 진짜 아니라고요. 이게 진리 아니라니까요. 이거. 그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말씀, 그 복음, 그 하나님, 그 사랑 그게 내 생명이란 말이에요. 진짜 생명.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우리로 묶어버리죠. 구약성경에 보면 자주 나와요.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또 우리라는 말을 잘 쓰죠. 그죠? 고전 중에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이 있는데 뭐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책이에요. 예전에는 제가 그 나와 너를 그것에 근거하여 정의를 해봤었는데 그거는 다분히 인위적인 정의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는 거는요, 문자에서 보면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 보면 우리라는 개념은 나와 너, 우리가 아니에요. ‘나 들’이에요. 다 나, 나, 나, 나가 모이면 그걸 우리라고 그래요. 나의 복수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와서 아, 하나님 나 아니네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야 나는 비로소, 그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산 존재되는 거네요, 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그렇게 함몰되어 들어와 그것과 연합되면 그 고백이 나의 죽음이잖아요. 그죠?
보세요. 선악과를 따 먹고 인간은 항상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아요. 그래서 피곤한 거예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이거는 선한 거야, 악한 거야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상대편에서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탄핵을 해요. 아, 하나님 공평하기 못해요. 그렇게 일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신앙을 가진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하나님 측면에서 나는 너예요. 그죠? 나와 너로 갈리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의 ‘케리투투’예요. 제물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가운데 두고 이렇게 ‘케리투투’, ‘카라트’로 갈라지는 거라고요. 분리에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인간이, 아니네요,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대척점에서 나의 수고와 노력이 그 제물이니까, 이 제물로 말미암아 이렇게 갈라지면 안 되는 거네요, 라고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내가 한쪽에서 바라보게 돼요.사랑은 뭐, 마주보는 게 아니라 한쪽을 바라보는 거라며 요? 하여튼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러는 거예요. 병풍이 항상 열 폭이라고 그랬죠? 그 병풍 뒤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려놓는, 그 병풍의 역할이 그거고, 그 뒤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죽으면 그 뒤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지 않고 들어가면 거기서 뭐, 싸우러 들어가거나 쥐어 터지러 들어가거나 그거지, 죽어야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열 폭은 뭐냐 하면 휘장이 열 폭이었어요. 그래서 병풍을 열 폭으로 만든 거거든요.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묵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나’가 돼요. 그때 그걸 성경이 우리라고 한다니까요.
사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개념을 써요.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애급으로 보내면서 ‘하나님, 내가, 누가 보냈느냐고 너, 물어보면, 너 누가 보냈어? 라고 물어보면 누가 보냈다고 얘기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준 단어가 뭐냐 하면‘나’예요. 영어로는 뭐 I am Who I am 이라고 써 놨지만 그 단어가 그냥 ‘나’라니까요. 그 당시의 문헌들을 다 뒤져 봐도 그 ‘나’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어요. 그 제왕들의 비석 같은 걸 봐도 그냥 ‘이 사람’ 이라고 써요. ‘나’를.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라는 단어를 준 거예요. ‘나’.
그럼 모세가 가서 뭐라 그래요?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나’,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너를 보냈냐? 그럴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내 말을 주면 너는 그 즉시 네 육을 삭제 당하게 되고 네가 내 말이 되는 거야.그게 ‘나’야. 네가 내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게 ‘나’라고요. ‘나’. 하나님 이름이 ‘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나’는 전부 그 ‘나’예요. 예수 ‘나’가 아니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섬기는 수준에서 진일보해서 그 예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 것으로 하여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절대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진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너로 존재하면서 그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리,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부요함 속에서도 이것이 진짜 부요가 아니구나, 하고 그 부요에 대해서도 죽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이런 가난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만 있으면 그게 진짜 풍요네! 라고 그 가난도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가난에 대해서 내가 죽는 거고. 그것이.
그게 현상계를 벗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그걸 평안이라고 한다고요. 여러분의 환경이 변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예배당에 와서 그 환경 얘기만 하고 있다니까, 하나님한테. 그걸 바꿔달라고. 거래도 하고.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휘둘리면 그것이 육의 생각으로 사는 거고. 그것을 오늘 본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해요. 그 원수라는 단어, ‘에크드’라는 단어는 ‘에크드로스’의 여성 형이거든 요. 그러니까 같은 단어에요. 성만 다른데. 그 ‘에크드로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탄이란 단어하고 혼용하던 단어에요. 사탄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거 사단이야. 그게 대적 자야. 육신의 생각? 육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현상계에 머무는 거? 그게 사단이야. 그래요. 그게 사단이야. 하나님의 대적 자야! 라고 하는 거예요. 대적 자면 뭐예요? ‘너’네요? 그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제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거니까 그게 ‘너’잖아요.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저기에다가 두고 열심히 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그들이 뭐예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쵸?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본문 9절과 10절에 나오는 거예요. 답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너희의 몸은 죽은 거다, 그러잖아요. 너희의 몸은 죽은 거야.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거 안 봐,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거를 빛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게 기독교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네 안에 진리, 내 말이 있으면 너희들의 몸은 이제 죽은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 몸으로 뭔가를 자꾸 만들어 내자, 업적을 쌓자,성취하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보는 건 영이래요. 하나님 거니까. 그것만. 난 내 것만 봐, 내 것만 찾아. 그것만 가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내 것이 네 안에 있으면 그 몸은 이제 안 봐. 이게 몸이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을 롤모델 삼아, 그리고 어떤 이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건 그냥 당연히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것 말고 진짜 해야 할 걸 왜 그걸 강조하느라 놓치느냐는 말이에요, 저는.
그러니까 세상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세상과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기록인 그 성경도 그렇고 그 성경의, 그 말씀의 화육으로 오신 예수님도 그렇고 모두 죽어야 하는 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거예요. 대표로. 그래야 세상 안에 담긴, 그 인간 안에 담긴, 물론 성도이지만 또 성경 안에 담긴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그 아가페의 사랑 그 진리만이 남는 우리가 될 수 있단 말에요. 그걸 연합이라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사는 거.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거예요.
마치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아비의 그 훈훈한 사랑에 의해서 그 멋진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어떤 이들처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 나 하루에 달걀 하나만 먹어도 돼. 대신에 나 보육원에만 보내지 마. 그 애에게 양식은 그 어미의 사랑이라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거 배우는 거예요. 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호 코스모스거든요. 온 세상, 뭐예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 그래, 율법적으로 너희들이 완벽하게 됐다고 치자. 사람들이 평가할 때. 그리고 지 목숨을 잃으면 그게 뭔 유익이니? 그랬다고요. 하나님이.
온 천하가 그게 성전이란 단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희들이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치자. 그리고 목숨을 잃으면 뭔 유익이냐?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그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고 그것으로 절망해버리거나, 좌절해버리거나, 고통을 당해버리면 여러분은 힘들게 그 상황을 겪으면서 돼지는 거예요. 아니야, 안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거에 지지는 말라는 말이에요. 이 육신을 갖고 있고 통점이 살아있는 이 몸뚱어리를 내가 입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하겠느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아파요. 그렇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의 그 진리로 그것에 져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고 우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시면서 그래, 이제 조금 남았어. 금방이야. 이 아빠가 너에게 네가 꼭 배워야 할 걸 가르치기 위해서 이 과정을 그냥 통과시키는 거야. 조금만 참으라고 토닥토닥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쫓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잊으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토닥토닥 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토닥토닥. 응? 아가, 조금만 참아. 그거에 그 조그만 아기들도 힘을 얻어서 그럼요, 그 맛없는 거 먹으면서도 다 맛있대. 거짓말인 거 뻔히 알아요. 저는 진짜. 그런데 그 조그만 애들이 그 엄마, 그 아빠 그게 더 소중하니까 다 맛있대. 간장에다가 밥만 비벼주는데 다 맛있대.
하물며 영적인 세계를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성도가 이 현상계의 그 현상들에게 지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힘드시면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저한테 얘기하시라니까요. 드디어 내가 한국에 왔잖아요. 난 이제 기타 들고 미사리도 갈 수 있고,아, 미국에선 안 됐어. 그게. 어디든 가능하다니까. ㅎㅎ 내가 그냥 진짜 어디 가서 라이브 가수로 뛰더라도 내가 그 상황에서 내가 모면하게 해드릴 테니까. 아 그게 우리끼리 서로 가족이라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것으로 혼자 우울증 걸려가지고,,, 그럼 교회가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렇게 그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 그것을 여러분의 부활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로 쓰지 못하면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번영이나 눈에 보이는 행복과 기쁨과 감동들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곳도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것들의 위험성을 올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진짜 아버지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간 나, 그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이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는 나, 그렇게 내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버리면 ‘너’의 자리에서 그 사단 노릇했던 ‘나’가 거기서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 안으로 내가 그 즉시 쫙 빨려 들어가는 거요.
<하나님과 우리>. 우리 편,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 편, 천지 창조주가 우리 편,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너’의 자리에서 자꾸 그분을 사단으로 몰아세우느냐고요.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사단!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영이 네 안에 제대로 들어가면 그 ‘너’가 죽은 거야. 그 몸이, 그 ‘쏘마’가 죽은 거야.그러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영이야. 하나님의 영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1절 보세요.
마 16: 21-
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죽어야 산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이거 꾸짖었단 뜻이에요.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을 때 썼던 그 단어. 예수님을 그렇게 꾸짖었다는 거예요. 네가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그렇게. 꾸짖어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런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거요 왜 자꾸 미련한 소리를 하세요. 그 방법 아니잖아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때 예수님이,)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이 돌이키시매, 가 이렇게 고개를 돌려 돌아서 봤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을 뒤집어엎어라는 뜻이에요. 네 말은 틀렸어! 이런 의미에요. 돌이키시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사단아, 이 마귀 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베드로야, 그게 대적하는 거야. 그게 사단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그 수준 밖에 안 되니 이놈아? 이런 게 아니라. 베드로야, 그걸 사단이라 그래. 이렇게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
-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여기도 나오죠? 육신의 생각,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 나오죠? 그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너희들, 나를 그냥 왕 삼아 어떻게 내가 너희들에게 구원이나 주고 생명이나 주고 그런 존재로 그냥 저 밖에 두고 나를 섬기면 사단 되는 거다. 내 죽음이 네 죽음이 되지 않으면 그건 내 십자가야, 네 십자가 아니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나를 위하여‘ 가 나 때문에 예요. ’나 때문에‘ 가 뭐라 그랬어요? 아까?
그 ‘나’, 내가, 내 몸이 죽고 그러한 내 육신의 생각들, 지금 베드로처럼 이렇게 나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이 육의 어떤 안위와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그 하나님, 이거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렇게 추구하는 그 아담, 그 몸이 죽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으로 함몰된 그 “나 때문에” 네 ‘네페쉬’가 죽으면, 네 ‘푸쉬케’가 죽으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게 사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이 베드로처럼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네 목숨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네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넌 반드시 잃을 거야. 그런 말이에요. 그 ‘나’. 그걸 여러분이 이해를 하셔야 된단 말입니다.
복음은 아주 심플해요. 여러분. 육으로 죽어야 영으로 사는 거예요. 육으로 심어야 영으로 거둡니다.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예요. 행위로 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선악과 패러다임의 인간으로 죽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으로 사는 겁니다. 복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Good News, ‘유앙겔리온‘, 복된 소식이 돼요.
요한복음 6 : 63-
63.살리는 것은 (뭐예요? 영이니, 육 아니에요. 너희들의 행위 아닙니다. 너희들 몸 아닙니다. 살리는 건 영이다. 육은 무익하대요.그러니까 죽여야죠. 그런데 어떻게 죽는다고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서? 영이 네 안에 들어오면 죽는 거래요. 그거는.)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 로고스가, 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야 그러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산 거고 여러분의 몸, 이 육은 이미 하나님 앞에 삭제된 거예요. 그럼 너무 그걸로 하나님 앞에 뭐, 이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거기에 너무 그렇게 묶이지 마세요. 열심히들 하자고요, 그래서 아, 따듯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이런 평가도 우리도 한번 받아보자고요. 만날 뭐 말씀만 공부해갖고 대가리만 큰 교회. 난 이런 소리만 들어갖고. 아, 그렇게 좀 살지 말아요. 제발. 언제 내가 그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욕은 다 내가 먹어 그냥. 그렇게 사시되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열매로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그거는 명심하시고 가라고요.
요한복음 5 : 24-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내 말씀, 내 로고스를 너희들이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그걸 들으면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거예요. 여기서 나 보내신 이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얻었대요. 그리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From 사망, To 생명이 아니라 Through 사망, In 생명이에요. 죽어서 산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게 죽는 거고 그게 사는 거란다. 이런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자는, 제대로 들은 자는)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죠. 그 죽은 자들은 말씀으로만 살아난대요. 말씀으로만. 아들의 말씀. 아들의 음성.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와 아들을 이렇게 대조하죠? 그건 뭐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천사가 아니라 ‘안겔로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전하는 자들 뜻인데, 그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갖고 전하는데 아들이 아닌 자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그 아들, 그 천사를 그렇게 갈라서 설명해주는 거거든요. 마찬가지예요..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그 아들이 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진리가 살리는 거지 무조건 성경 말씀을 뇌까린다고 살아나는 거 아닙니다.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듣는 자는 살아난다. 그랬어요.
계20 : 4-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성도들입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자, 진리에요. 이거는. 한 마디로 바꾸면. 진리로, 복음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목 베임을 받았다는 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사는 , 선악과 패러다임 하의 아담들의 목이 말씀에 의해 잘리더라는 거예요. 그럼 어떤 머리가 가서 붙어야 되겠네요? 예수 그 머리가 가서 붙은 자들. 그러니까 자기의 주체성, 자기의 존재, 스스로 존재됨을 하나님에게 이렇게 차압당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그들이 산 자에요)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리스도로 더불어 에요. 그죠? 그 진리와 더불어, 그 진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 그러죠? 이거 여러분 얘기입니다. 천이라는 것은 충만의 수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율법의 진리로 성취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는 그 기간을 천이라 그래요. 나중에 무슨 뭐 어떤 기간 그 시점부터 천년이라는 그 기간이 있다는 그런 뜻 아니에요. )
자, 그 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네 요?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래요?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래요. 자기의 주체성을 하나님에게 빼앗긴 자들, 몰수당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그 머리가 된 자들이, 그들이 왕이래요. 그런데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에요. 역시. 그렇게 살아나지 못한 자들은? 천년 동안? 무슨 수를 써도 못 살아난다. 에요. 못 살아나더라.
그러니까 이는 첫째 부활이라.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첫째 부활 한 거죠? 살아났어요. 첫째 부활한 거예요.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또 나와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 진리가 있으면 그들이 왕이래요. 그 목이 잘려,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답답하여 그렇게 외치셨던 그 예수님이 머리로 드디어 붙을 어떤 이들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머리니 이들도 왕이네요? 그런데 현실은 이래요. 그러니까 이 현실이 현실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이 현실이 현실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 진리의 현실이 현실이잖아요.
여러분의 현실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라니까요. 그러면 여기에 묶이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묶이는 걸 죄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그 처한 현실, 그 전체는 그냥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허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건 여러분을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진리인 여러분은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변화나 번영이나 발전, 이런 걸로 사람을 부유하다, 가난하다 성숙했다, 그리스도인답다. 악마 같다. 못 됐다. 잘 났네? 이런 평가하면 안 된단 말에요.
적어도 성도는. 아울러 그런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러한 변화나 성숙을 도모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자라는 올바른 자인식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착하고 성숙하고 훌륭한 존재가 된 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성경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머리를 삭제 당해야 돼요. 참수 당해야 돼요. 그래서 말씀을 좌우에 날 선 검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주체가 되어버린 하나님처럼의 자리에 올라가버린 우리의 머리를 자르러 오신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이. 다나토스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머리가 붙어요. 그러면 그들을 ‘머리’라 그래요. 진짜 ‘머리’. 그렇지 않은 자들은? 머리가 되지 않으면 뭐가 돼요? 두 개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꼬리 밖에 없어요.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그러죠? 아랫물이라 그래요. 그 아랫물에서는 이 인간들이 진리, 그 머리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몸, 꼬리를 동력으로 하여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꼬리를 반드시 잘라버려야 되는데, 그래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그 바다에서 낚아 올려야 된다니까요. 그럼 잠시 퍼덕이다가 죽어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살았다! 그래요. 그러니 쉬워요? 이 삶이? 그러니까 말씀은 한 마디로 토닥토닥 이라니까요.
야, 아니잖아. 그게 현실 아니잖아. 내가 지금 의도하는 목적이 있잖아. 그건 모형이잖아. 그걸로 네가 가야 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잖아? 거기서 머물지 마. 본문 말씀도 다 토닥토닥. 죽은 거야. 너희 몸은 죽은 거야. 그런데 왜 거기에 묶여? 네 몸에 장애가 있어? 그건 너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너를 보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준 거야. 네 실수로 너에게 그거 간 거 아니야.
질병? 가난? 마찬가지야. 재물? 그것도 마찬가지야. 토닥토닥.
이사야서 9장 15절 보세요.
9-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요.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 도다.
꼬리가 되세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이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거짓말, 거기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28장 12절 보세요.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그 보고에서 뭐가 내려와요?) 네 땅에 때를 따라 (비가 내린다고 그러죠? 비는 뭐라 그랬어요? 은혜의 말씀. 진리. 보배는 그거예요. 그냥 보배를 이렇게 나눠 주고 있는데 이게 보배인지도 모르고,이 돼지들에게 이거 던지면 안 되는 건데.)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이거 산상수훈에서 배웠죠? 꾸려고 하는 자들에게 거절하지 말라, 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왜? 내가 있잖아요. 거저 받은 보배가.꾸러 온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꿔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13.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라 그러죠?)
-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명확히 나오잖아요. 너, 아랫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야. 위엣 사람으로 만들려면 네 꼬리 잘라야 돼)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이 지켜 행하며 이것이 간직하다, 라는 뜻이에요. 내 명령을 네가 마음으로 간직하면)
14.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좌로나 우는 뭐예요? 선, 악입니다.)
-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건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선, 악의 하나님.)
이와 같으리라
15.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내 말을 네가 모르면 그게 다 저주 되는 거예요.)
16.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과 들은 뭐다? 성경에서? 성전. 네가 있는 이 교회에서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뭐로? 그 말씀으로.)
17.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양식은 그거 진짜 양식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 복, 그 저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 저주는. 냉장고에다가 그거 알고 써 붙이시라고. 복과 저주 이런 거.
그렇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여러분의 목을 참수 당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그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여 위로하는 거예요. 토닥토닥, 이렇게. 사는 거 별거 없어. 그거야, 그거 하고 가는 거야. 예수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리스도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거 배우고 가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꼭 어물전에 가면 죽은 고기가 가치 없고 홀대 받죠. 살아서 펄펄 뛰는 게 비싸요. 우리 애들이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생선을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갖고 어디 가면 어물전 같은 데를 이제 가요. 가락시장 같은 데나 아니면, 부산에도 한번 가봤는데 자갈치.
아, 실망했어요. 난 굉장히 기대하고 갔는데 너무 지저분하더라고요. 제주도의 거기도 가보고, 또 하여튼 많이 가봤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 죽은 고기는 반값이에요.
돌아가신 광어, 반값. 이렇게 써놨더라고. 거기에다가. 그 돌아가신 광어? ㅎㅎ 한참 생각했는데 죽은 거는 반값이에요. 항상.
그게 세상의 가치관이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그렇게 죽어야 이게 진짜 보배야. 그래요. 이게 진짜 생명이야.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평가나 판단이나 이런 거에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세상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쓰레기 취급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래요. 그래 그렇게 죽는 게 맞아. 그런데 그거 아닌 진짜 기쁨, 그거 아닌 진짜 선, 그거 아닌 진짜 안식, 그거 아닌 진짜 행복. 내가 너희들 위해 준비해 놨다. 너희들은 이미 거기 사람이야. 그거 가르쳐 주는 게 우리 신앙생활이에요. 딴 거 없어요. 성경 통해서 우린 그거 하나 배웠으면 오늘부터 찢어발겨도 돼요. 그거는. 뭐 필요 있어요? 성경이. 산천초목이 다 성경인데.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렇게 많이 써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 뭐냐 하면 그거 하나하나 증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매주 똑같은 걸 같이 이렇게 증명해줘야 되니 뭔 팔자냐고요. 이게?
그거 밖에 없어요. 그거 아셨으면 된 거예요. 여러분. 너무 그냥 지적 호기심, 지적 허영심의 충족, 이런 거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들 마세요. 글 쓰는 것들 보면 딱 알아. 어떻게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거 하나 가졌으면 그냥 자유하게 그 진리로 잘 사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는 건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쉬운 건데
그런데 우리 몸이 그 길을 자꾸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자꾸 장애물을 놓습니다.
하나님, 이 속에서도 우리가 배울 게 있으리라 믿습니다.
잘 배우고 하나님의 진리 놓치지 않고 꼭 붙들어
우리 하나님, 토닥토닥 우리 등 두드리면서 오시는 그 길에
그 아버지의 손 꼭 잡고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내디딜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085 토닥토닥 (로마 8.7-11)
※ 이 녹취본은 연님이 오랜기간 손으로 필사한 자료를 지서모 맴버들이 옮겨 적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자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로마서 85번째 로마서 8장 7절에서부터 11절까지 함께 봉독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아멘
제가 한국에 와서 아주 유익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다큐멘타리 동행이라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챙겨서 보진 못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합니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 1%에 해당하는 극빈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취재를 해서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타리에요 눈물 없이 불 수 없는 그런 다큐멘타리입니다 15년이 넘은 조그만 5인승 승용차 안에서 16살 먹은 장남을 비롯한 여덟 식구가 숙식을 하는 그런 가족도 있었고 또 사업의 실패로 고 3 수험생인 딸과 두 살짜리 젖 먹이와 함께 영하의 날씨에도 공원 화장실에서 노숙을 하는 그런 40대 가장의 이야기도 봤습니다 그리고 가난이 싫어서 가출해버린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면서 정신지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빠를 돕는 아홉 살짜리 꼬마 아이 이야기도 봤고 IMF 경제 위기 때 서울역으로 내 몰린 6천 명의 노숙자들의 이야기도 봤습니다 또 당뇨와 당뇨 합병증인 간경화로 이미 복수가 남산만큼 그렇게 찬 아빠를 위해서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연탄이 다 떨어져가지고 나무를 해다가 비닐하우스 방을 덥히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모습도 봤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고 구청에서 나누어준 식권을 아이 둘이 자기들이 안 먹고 아빠가 좋아하는 걸 시켜서 그걸 도시락 통에 그대로 싸 가지고 자기들은 찌꺼기만 이렇게 먹고 아빠를 갖다 드리는 그런 그림도 봤습니다 거기에 소개되는 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처절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였어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 자식들 만큼은 굶기거나 얼어 죽이지 않겠다 라는 그런 아빠와 엄마의 사랑 그리고 그러한 사랑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그 감사와 성숙한 자람 이런 것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어요 그것들이 그들을 웃게 하더라는 것이죠 반면에 자기 몸 하나 살아보겠다고 가족들을 전부 버리고 도망가는 그런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의 모습들도 왕왕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망가져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지기도 해요 대견한 것은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도 열심히 살더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그런데 전자의 아이들과 후자의 아이들이 내놓는 열심의 질이 달라요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하고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감사의 열심을 부리는 반면 후자의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을 부립니다 전자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그냥 버리고 자기들만의 안위를 위해 살기로 작정을 하면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 어린 애들이 그런데 자기들의 부모가 자기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그 아이들이 봅니다 그런데 후자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자식들도 초개처럼 버리는 그런 악한 부모의 그림자 안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그 하늘 자녀들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고 몸을 굴려대야 하는 율법주의 신앙인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쪽은 사랑에 반응하는 열심이고 다른 한 쪽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 거의 후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에너지와 자원과 능력을 발휘하여 불태워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에요 보세요 둘 다 똑같은 상황이에요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는 부모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감사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가정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꽃이 핍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그 가난이 부러울 때가 있더라니까요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게 없었으면 저들을 저렇게 묶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세 살짜리 아이가 하루 종일 삶은 달걀 하나 밖에 먹일 수 없는 그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서 배가 고픈데 그 엄마한테 배 고프다는 말을 안 해요 카메라 감독이 넌지시 물어봐요 너 진짜 배 안고파 그러니까 그 때 얘기하더라고요 배 고프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 나한테 미안할까봐 배 고프다는 소리를 안 해요 세 살짜리 여자 애가 그걸 보면서 그 아이의 양식은 다른 게 아니라 그 엄마의 사랑이구나 라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삶은 달걀 500개보다 더 그 아이를 배부르게 하는 건 그 엄마의 사랑이었구나 라는 거 홀로 고생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 매주말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교 일등의 여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 그 아이를 공부하게 하는 건 무슨 족집게 과외도 아니고 일대일 개인 과외도 아니고 그 아버지에 대한 감사구나 이런 거요
그런데 부모의 사랑이 빠진 냉기만 흐르는 가난은 너무나 춥고 어둡더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냉기를 뚫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는 섬뜩한 살기까지도 느껴져요 복수심 이런 거
그렇게 보면 기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랑이요 신뢰라는 것이 자명해지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이들의 가정 속에서는 그것이 그들을 묶는 힘이 되고 어떤 가정에서는 살기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이 우리의 희로애락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표피 안으로 흐르는 사랑과 신뢰가 그것을 결정한다 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것에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반응하는 아들들과의 그 관계를 가르치기 원하세요
진짜 너희들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거기에서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발출된다는 걸 알려주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외부적인 현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간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라는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은 그 한 마음 ,그 참 마음,에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서 기인한다라는 것을
이 모형인 세상 속에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볼 때 이 세상의 보편적 현실은
그 다큐멘타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하위 1%의 그 극빈자들의 생활과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하늘의 풍요를 담을 그릇이 못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현실을
눈 멀고 귀 먹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둡고 황량하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를 해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오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그러는 거 보면
그것으로 꽉찬 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심지어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들의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아무리 번영과 성숙과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풍요가 아니라 그래요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나 실상은 벌거벗었고 가난한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라는 하나님의 일갈을 보면
이 세상이 부요라고 풍요라고 자랑하는 그건 사실은 그게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그 행복 그 안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니까요
너희들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진짜 행복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걸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환경이나 상황이나 외적 성취정도에 따라서 발생하는 그런 행복이나 기쁨이나 만족 같은 건
사실 허상이며 안개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어찌 보면 그건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호도하기 위한 미혹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가짜, 마찬가지로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절망이나 좌절이나 고통등도
사실은 진짜 절망이나 진짜 고통을 호도하기 위한 가짜인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 진짜 안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알아 그 사랑을 알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하늘의 행복이고 하늘의 기쁨이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나타난 현상계의 그런 상황이나 현실이 아니라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어떤 감정적인 그런 흐름 이런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진짜 불행 진짜 고통 진짜 절망은 그런 가난 그런 질병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아담들은 육적 환경과 육적 성숙 육적 실패와 육적 성취가 주는
그런 감정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가치라는 건
세상의 세계관으로 판단되는 외적으로 나타난 성공과 실패 번영과 퇴보 여하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현상들 속에 내용으로 심어져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그 자기 계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거예요
그걸로 슬퍼하고 그걸로 기뻐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관심들이 없어요
생각해보십쇼 어떤 이들의 가난과 고통 그러나 그 속에서도 꿈틀대는 사랑과 희망의 그 모습이 당사자들이나 그 삶을 음으로 양으로 저처럼 이렇게 접하게 된 누군가에게 그 진리의 일면을 교훈해주고 있다면 그 삶이 그저 그냥 가난하고 추레한 삶입니까
그냥 그렇게 판단하면 되는 거예요 그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가난은 죄래요 진짜 가난은 죕니까
일견 이해가 가요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까지 이야기 할까
그러나 그 가난이 진짜 죕니까 아니 이 세상은 그 가난을 악으로 규정해요 그래서 그리로 빠지면 안 되는 것 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 죄이며 악입니까 가난은 꼭 어두운 것이어야 하나요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라면 그게 진짜 가치없는 걸까요
아니 이 세상의 삶은 찰나라매요
영원에 비교하면 찰나라면서요 그런데 그 찰나의 삶이 비록 그 찰나동안 조금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들려 쓰임을 받는다면 그게 진짜 가치 없는 거예요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왜 나야 그런 불만은 있죠 물론 당사자들은 힘이 들겠지만
이 인생이라는 것이 영원에 비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먼지에 불과했던 어떤 존재의 삶이 하나님의 그 진리 계시의 사용되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그걸 독사라 그래요 그게 영광이에요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어떤 처지에서건 쓰임 받는 것 그걸
어떤 이들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결국을 예시하는 그런 역할로 쓰임을 받는다면
우리가 그걸 보고 아니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 해
누구는 저렇게 살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살게 하고
우리가 그걸 보고 그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것이요 아닙니다
이 현상계의 모든 현상과 상황들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심지어 죄와 악 가난과 어둠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자체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죄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칩니까 제발 생각 좀 해보세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대매요
그러면 세상에 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의가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뭘로 가르치느냐고요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니까요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럼 생명이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생명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선악의 열매를 먼저 주어 율법을 주어 그것이 아닌 것이 생명이야 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율법이라는 걸 통하여 마땅히 배워야 할 게 뭐냐하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죄 짓지 마 라고만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 죄가 뭔지를 알아야 의를 알고 생명을 아는데
무조건 착하게 살아 성숙해야 돼 성화해야 돼 라고만 가르치면
어떻게 그들이 생명과 의를 아냐고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과 가르침은 그것도 건전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 거기 머물러 있다니까요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 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있는 거예요
그 죄가 아니고 그 율법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압니까
그러면 그건 나에게 가치있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그게 나와 상관없는 죄가 되어 나는 용서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조건 착해지라 그러고, 되지도 않는 거 지나 먼저 그렇게 살아보라 그래요 되나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그렇다 쳐 자기 마누라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렇다고 또 큰일 납니다 하하 아니 그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에요 그냥 종교의 목적지예요 아담들의 목적이라니까요 그거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 그것을 진리 안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낼 때 그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한 거라니까요
내가 그거 없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알게 됐겠는가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진리에 차서를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깨닫는 이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가치있는 선물이죠 선지자들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꼭 성전 마당에 가서 설교한 거예요
선지자들이 딴 데 안 가고 왜 이거 아니야, 언제 하나님이 이런 제사 드리라고 그랬니
그들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었다는 얘기예요 그
러니까 율법에도 분명히 거기서 그 제사 드리라고 그랬는데 선지자들은 가서 아니야 하나님이 그 말 한 거 아니야
사실 하나님의 진의는 그거 아니었단다 라고 얘기했죠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 성전으로 진리로 그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옛 성전은 그게 죄라니까요
거기서 안 나오면 죽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갖고 악이라 그래버렸어요. 그걸 찔레요 가시라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라고 그랬어요 내 말을 듣고 나오라고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진리를 거기서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서
그러니까 마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살려주는 돌 산 돌이 되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멸망시키는 돌이에요
진짜 그걸 직역을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멸망시키는 돌이 되는 거예요
그 예수는 곧 성경이라며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사는 생명의 책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0장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딴 책 아니고 몰몬경 이런 거가 아니라 성경이에요 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그 책들은 성경이라니까요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66권이 돼요 책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거 뭐 다 그 얘기네 단어도 다 그 이야기이고
아니 심지어 문자 하나가
다 그 복음만 그 진리만 얘기하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책은 단수이고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서 그러한 세상 속 부유함이 진짜 부유함이 아니다라는 것을 안 그걸 통하여 배운
자주 장사 루디아나 마가나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재물이 복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양 그것만으로 자기를 그것에 자기를 의존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 재물은 악입니다
그것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가난하고 부유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왕이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로 사세요 제발 누가 그런 게 가난이래요 청빈 무슨 놈의 청빈이요 이왕이면 능력 되면 잘 벌어서 사세요 그거는 신앙과 아무 상관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진리를 배우셔야 된다니깐요
마찬가지로 70년간의 그 포로생활을 통하여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이렇게 죄의 종, 세상의 종 ,세상 풍속의 포로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거구나
라고 배우면 그 70년 포로생활이 복이에요 그
러나 아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돕지 않아 이건 도대체 뭐야
왜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이렇게 겪어야 돼 라고 그걸 그대로 표피적으로 받아들여 버리면 그게 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의 눈으로 인식하는 그 Fact 속에서
진짜 내용인 진리의 Fact 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죄 속에 살다가 죄 속에 죽는 게 되는 거예요
가난과 부요 성공과 실패 잘 나고 못남 그런 거에 상관없이
이 현상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가면 그게 곧 저주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살다가 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면 그게 복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행동해버리면 그 모든 것이 죄요 악이 되는 거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어내면 모든 것이 복이요 선물이요 사랑인 거예요
성경에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거는 뭐라 그래요 사랑이라 그럽니다
믿음이라는 거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그 내용은 보이는 게 되면 안 되는 거네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믿음이다 그래요 하나님은 미쁘시다가 호 떼오스 호 피스또스 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믿음이네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어떤 것들 속에서 그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는 말은
그러면 소망은 뭐겠어요
소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고 바라는 어떤 것 알지 못하는 어떤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이 아니에요 소망은 성경에 나오는 소망은
이 역사 속에 던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그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눈에 보이는 것을 성경이 소망이라 그래요
다시 한 번 소망이라는 건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바라는 어떤 것 그런 추상적인 감정이나 기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동원한 어떤 것을 소망이라 그래요
제가 나중에 창세기에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 드릴 건데 그러니까 여러분 창세기 책하고 요한계시록 책은 반드시 한 다섯 번씩 읽으세요 그리고 그런 거 읽지도 않고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 말아요 그거 옛날에 500번도 더 한 거를 만날 질문이 그냥 올라오는 게 전부 그거야 공부를 하고 질문을 하시라니까 소망이 그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소망이란 단어가 첫 번째 거기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망이 그 소망이 맞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은 창세기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소망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모형이잖아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소망이 진짜 소망이지 그 보이는 것을 니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면 그건 소망 아니라니까 라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4절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대요 소망은 저 미래에 있는 어떤 거라면서요 아니잖아요
여기 보니까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대요
뭐 성경 예수 성전 이런 게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동원한 눈에 보이는 나타난 것이잖아요 십자가 마찬가지죠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얻었어요 맞아요 그게 뭔지를 알았으니까 보이는 소망
그러나 그 나타난 그것 자체가 소망이 아니잖아 ,예수가 소망이 아니고, 십자가가 소망 아니잖아
그 안에 담겨 있던 그 진리가 소망이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자 보세요 그걸 소망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호 피스토스를
내 안에 이제 믿음으로 갖기 위해, 하나님이 동원한 어떤 것으로 우리는 공부를 하고 배워야 돼요
예수 성경 십자가 성전 세상 인간 이런 것들
자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보이는 소망이라는 것으로 공부를 하는데 ,배우는데
그것에서 아 이거 라고 알게 됐어요. 그래 그거구나
이 눈에 보이는 그 소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소망이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 그러고
그걸 하나님에게 이게 그거죠 라고 고백하고
다른 이들에게 흘리면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이 정의들을 똑바로 알고 계시라고요
아무데나 가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얘기 하지 마시고 그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성경이
그래서믿음 소망 사랑은 이 천지가 있을 동안에 영원히 있어야 돼요 그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료되면 믿음 소망은 없어지죠 사랑만 남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 믿음과 소망으로 이 사랑으로 ,이 사랑이 되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다 같은 거잖아요
고전 13 :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거요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죄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 모양대로만 인식하고 그분이 이 세상 속에서 일으키신 기적이나 표적 십자가 부활 이런 걸
나타난 현상 인식 수준의 내 밖의 것으로 인식해버리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그건 내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관하게 내 밖에서 행하신 어떤 것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그걸 믿는다 그래요 자기가 그걸 자기가 믿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건 내 밖에 있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그 여러분 밖에서 대상이 되면 여러분을 못 살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십자가 그리고 그 분이 하신 일 그 분이 일으키신 표적 기적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현상 인식 수준에 삶 수준으로 보게 되면 그것으로 죄를 짓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하면서
니들 나가서 절대 이야기하지 마 절대 이야기하지 마
왜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죽은 자가 살기 위해 구원 받기 위해 병 낫기 위해 부자 되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니들 그 따위를 그 따위 인식을 복음이라고 누구에게 가서 함부로 얘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 얘기하지 마 그건 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있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냥 눈으로 봐버리면 그리고 그걸 와 하고 놀래버리면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이렇게 그냥 놀래버리는 수준에서 끝내버리면 그리고 그걸 믿는다고 그래요
또 하나님은 그래요 얘기하지 마 그런거 얘기하지 마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잠잠해지고 문둥병자가 일어나는 건
다 진리를,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너희들의 그 원래 자리 처음 자리, 그리고 너희들의 실체.. 그거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그걸 비로소 존재로 완성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능력 밖에 없어.. 를 보여주는 건데
그래서 너희들 안에 니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의 실체인 사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그런 거였는데
너희들이 그것까지 모르고 그냥 나타난 것으로 나를 소개하면 그게 죄야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도 얘기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랬죠
요나의 표적 내가 보일 건 요나의 표적밖에 없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배에서 잤겠어요
요나가 잤으니까 똑같이 주무시는 거예요 졸려서 잔 게 아니라
이게 요나의 표적이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요나처럼 배에서 주무신 거라니까요
깨웠습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 라고 했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풍랑은 늘 바다는 너희들을 덮치게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어 라고 하시고 말을 하시는 거예요
풍랑아 잠잠해라 바다야 잠잠해라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태풍은 항상 어디서 일어나요 바다에서 일어나요
왜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할까요
그리고 왜 구원이라는 것을 낚시라고 그래요
왜 사람을 낚는다고 그러죠 바다에서 뽑아낸다는 뜻이에요 바다에
사는 존재를 뽑아낸다 라는 건 죽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거 아니 고기들이 아 이 바다가 너무 지루해 라고
해변에 나와서 일광욕 하면 굴비 되는 거예요 바로 죽음이라니까요 그건
그런데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그 저주의 바다를 딛고 서는 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이 그걸 딛고 서시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바다를 밟고 오셨다 걸어 오셨다 라고 할 때 쓰인 그 단어는
바다를 짓밟다라는 단어에요
진리는 그 저주의 바다를 짓밟아버리는 힘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그냥 성경 예수 십자가 이런 걸
그냥 표피적으로만 봐 버리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사단 뱀이 되는 거예요 뱀의 말
그러나 그 죄의 모양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로 읽어내어서 내 마음으로 받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 그건 살리는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모양으로 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모양을 그냥 봐버리면 예수가 죄란 뜻이에요
그게 성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봐 버리면 성경이 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을 죽이는 책이 된다고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그 말씀을 그 살려주는 영을 내 안에 갖게 되면 내가 또 그걸 흘릴 수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려주는 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돼요
오늘 본문의 얘기가 그거예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얘기가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나 쉬운 얘기는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과학이라는 것에 의해서 밝혀지고 정리가 되어져 가고 있죠
지금 우린 그걸 그냥 Fact로 인식하고 동의해 버려요
아 그거 자연은 이런 거야 원리라는 건 이런 거야
이렇게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신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죠
그러한 이 세상을 이렇게 축약해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뭐예요
그 호 코스모스를 뭐라고 그런다고 했어요 성경이 헬라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읽는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이 세상을 그대로 이렇게 축약해 놓은 게 성전이에요 그
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성전으로 오셨다 그러네요 그리고는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 성경이 예수인 나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래요 그러면
세상 성전 성경 예수는 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네요
그리고 똑같은 껍데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그대로 인식을 하고
이 세상의 희로애락 그러한 현상과 환경과 사건에 그냥 묶여버리면
여러분은 그냥 세상의 종으로 사는 거예요
세상풍속을 좇는 자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냥 그 자체가 멸망이란 말에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세상을 표피로 보듯 그냥
성경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으로 표피로 보아서 그걸 그냥 행해 버리면
그것이 여러분이 세상에 묶이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예수와 십자가를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그냥 그걸 무조건 믿음의 대상으로 갖고 가 버리면
여러분이 거기에 묶이는 거란 말예요 그것은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된단 말입니다
그게 죄의 모양이라니까요 그럼 죄의 모양은 뭐예요
그 모양 안에 그걸 모르면 그 모양에 갇혀서 거기에 연합되어 그 죄가 된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랬죠
그 말은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의 죽음으로
아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산 존재일 수가 없는 거구나 하고 거기서 그 십자가로
그 다나토스의 그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으로 내가 그 다나토스로 갖게 됐을 때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그게 자기 십자가란 말입니다
반드시 나에게 있어서 그 자각과 그 인식과 그 경험이 있어야 돼요
상관없이 무슨 십자가 보혈 이야기는 다 하는데 막 니 맘대로 막 살아 괜찮아 그게 다 한 거야 이거는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쫓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된다라고 말씀하신 건
그렇게 내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되지 않으면
너희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그냥 예수인 내 십자가야
그런데 그게 네 십자가가 아니잖아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 십자가를 예수의 십자가로만 갖고 있으면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요 넌 나 쫓는 거 아니야 그게 자기 부인이라니까요
아 나는 그렇게 내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자구나 가 자기 부인이에요
그걸 아는 게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이게 아니라 부인 돼요 게 자기주장이지 자기 부인입니까
그래서 보이는 세상의 대표
옛 성전의 대표로 죄의 모양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육을 삭제 당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경이라면서요 예수님이 성전이라면서요 예수님이 율법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껍질이잖아요 모형이잖아요
그럼 내용을 내용이 진짜야 라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는 이 모형은 사라져야 되네요 당연히
그러니까 예수가 죽어야죠
아.내가 살아있었으면 그때 당시에 내가 살아있었으면 예수를 안 죽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을 마귀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반드시 죽어야 된다니까요 아니 안 죽으면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게 예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과 성경과 예수는
절대 껍데기로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강력한 웅변이 십자가였던 거예요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이 육은 삭제된다 봐.. 라고 죽여 버린 거예요 거기서
거기서 율법이 죽고 성전이 죽고 예수가 죽었어요
성경이 죽었다니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이 눈으로 보는 그 표피적인 성경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게 죽었단 말예요
거기서 그래서 이 세상과 인간과 성경의 대표로 오신
주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도륙당한 거예요
성전도 그 이야기이고 성경도 그 이야기이고 예수도 그 이야기 하는 거고 이 세상도 그 이야기에요
이거 현상계에 나타난 거 이거 헛 거야 다 진공이야 사실은
꾹 눌러보면은 하나님의 법칙 말만 전기력의 법칙만 없어지면 원자는 다 그냥 진공이야 허공이야
이거 없는 거야 이거 알고 가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묶이지 마 그런데 그 여기에는 나도 들어가 있다니깐요 이 뭄뚱아리도
그러니까 이게 진짜 아니라고요 이게 진리 아니라니까요 이거
그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말씀 그 복음 그 하나님 그 사랑 그게 내 생명이란 말이에요
진짜 생명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우리 로 묶어버리죠
구약성경에 보면 자주 나와요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또 우리라는 말을 잘 쓰죠 그죠 뭐 고전 중에 마틴 부버의 나와 너 라는 책이 있는데 그 뭐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책이에요 예전에는 제가 그 나와 너를 그것에 근거하여 이렇게 정의를 해 봤었는데 그거는 다분히 인위적인 정의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는 거는요 문자에서 보면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 보면 우리라는 개념은 나와 너 우리가 아니에요
나 들이에요 다 나 나 나 나 나가 모이면 그걸 우리라고 그래요 나의 복수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와서
아 하나님 나 아니네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야 나는 비로소 그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산 존재되는 거네요 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와
그것과 연합되면 그 고백이 나의 죽음이잖아요 그죠
보세요 선악과를 따 먹고 인간은 항상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아요 그래서 피곤한 거예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이거는 선한 거야 악한 거야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상대편에서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탄핵을 해요
아 하나님 공평하지 못해 그렇게 일 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신앙을 가진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하나님 측면에서 나는 너 예요 그죠
나와 너로 갈리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의 케리투투예요
제물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가운데 두고 이렇게 케리투투 카라트로 갈라지는 진단 말입니다
분리에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인간이
아니네요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대척점에서
나의 수고와 노력이 그 제물이니까 이 제물로 말미암아 이렇게 갈라지면 안 되는 거네요 라고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내가 한 쪽에서 바라보게 돼요
사랑은 뭐 이렇게 서로 마주보는 게 아니라 한 쪽을 바라보는 거라매요 하여튼
뭐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러는 거예요 병풍이 항상 열 폭이라고 그랬죠
그 병풍 뒤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려놓는 그 병풍의 역할이 그거고
그 뒤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죽으면 그 뒤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지 않고 들어가면 거기서 뭐 싸우러 들어가거나 아니면 쥐어 터지러 들어가거나 이거지
죽어야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열 폭은 뭐냐 하면 휘장이 열 폭이었어요
그래서 병풍을 열 폭으로 만든 거거든요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묵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나가 돼요
그 때 그걸 성경이 우리 라고 한다니까요
사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개념을 써요 그들은요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면서 하나님 내가 누가 보냈냐고 너 물어보면
너 누가 보냈어 라고 물어보면 누가 보냈다고 얘기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준 단어가 뭐냐 하면 나예요 영어로는 뭐 I am Who I am 이라고 써 놨지만
그 단어가 그냥 나라니까요
그 당시의 문헌들을 다 뒤져 봐도 그 나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어요 그
제왕들의 비석같은 걸 봐도 그냥 이 사람이라고 써요 나를
그런데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라는 단어를 준 거예요 나
그럼 모세가 가서 뭐라 그래요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나
그러면 사람들이 니가 너를 보냈냐 그럴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하면
내가 너에게 내 말을 주면 너는 그 즉시 니육을 삭제 당하게 되고
니가 내 말이 되는 거야 그게 나야
니가 내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게 나라고요. 나..
하나님 이름이 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전부 그 나예요 .예수, 나 가 아니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섬기는 수준에서 진일보해서
그 예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 것으로 하여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절대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진 우리 가 되는 거예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너 로 존재하면서 그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리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부요함 속에서도 이것이 진짜 부요가 아니구나 하고 그 부요에 대해서 죽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이런 가난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만 있으면 그게 진짜 풍요네 라고
그 가난도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가난에 대해서 내가 죽는 거고
그것이 그게 현상계를 벗어나는 거라니까요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그걸 평안이라고 한다고요
여러분의 환경이 변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예배당에 와서 그 환경 얘기만 하고 있다니까 하나님한테 그걸 바꿔달라고 거래도 하고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휘둘리면 그것이 육의 생각으로 사는 거고
그것을 오늘 본문이 뭐라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그래요
그 원수라는 단어 에크드라라는 단어는 에크드로스의 여성 형이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단어에요 성만 다른데
그 에크드로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탄이란 단어하고 혼용하던 단어예요 사탄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거 사단이야 그게 대적자야
육신의 생각 ,육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현상계에 머무는 거, 그게 사단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게 사단이야 하나님의 대적자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대적자면 뭐예요 너네요 그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제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거니까 그게 너잖아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저기에다가 두고 열심히 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그들이 뭐예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쵸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본문 9절과 10절에 나오는 거예요 답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너희의 몸은 죽은 거다 그러잖아요
너희의 몸은 죽은 거야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거 안 봐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거를 빛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게 기독교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네 안에 진리 내 말이 있으면 너희들의 몸은 이제 죽은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 몸으로 뭔가를 자꾸 만들어 내자 업적을 쌓자 성취하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보는 건 영이래요
하나님 거니까 그것만.. 난 내 것만 봐 내 것만 찾아 그것만 가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내 께 네 안에 있으면, 그 몸은 이제 안 봐, 이게 몸이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을 롤 모델 삼아 그리고 어떤 이의 롤 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건 그냥 당연히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것 말고 진짜 해야 할 걸 왜 그걸 강조하느라 놓치느냐는 말이에요 저는요
자 그러니까 세상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그 세상과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기록인 그 성경도 그렇고, 그 성경의 그 말씀의 화육으로 오신 예수도, 그렇고 모두 죽어야 하는 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거예요 대표로
그래야 세상 안에 담긴, 그 인간 안에 담긴, 물론 성도이지만 또 성경 안에 담긴,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그 아가페의 사랑 그 진리만이 남는.. 우리 가 될 수 있단 말에요 다 그걸 연합이라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사는 거예요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거예요
마치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아비의 그 훈훈한 사랑에 의해서 그 멋진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어떤 이들처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 나 하루에 달걀 하나만 먹어도 돼 대신에 나 보육원에만 보내지 마
그에게 양식은 그 어미의 사랑이라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거 배우는 거예요
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호 코스모스거든요
온 세상 뭐예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
그래 율법적으로 니들이 완벽하게 됐다고 치자 사람들이 평가할 때 ,그리고 지 목숨을 잃으면 그게 뭔 유익이니 그랬다고요 하나님이 온 천하가 그게 성전이란 단어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희들이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치자 그리고 목숨을 잃으면 뭔 유익이냐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그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고
그것으로 절망해버리거나 좌절해버리거나 고통을 당해버리면
여러분은 힘들게 그 상황을 겪으면서 죄짓는 거예요
아니야 안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거에 지지는 말라는 말이에요
이 육신을 갖고 있고 통점이 살아있는 이 몸뚱아리를 내가 입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하겠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아파요
그렇지만 여러분의 마음 속의 그 진리로 ,그것에 져 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끌어 안으시고
우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시면서 그래 이제 조금 남았어 금방이야
이 아빠가 너에게 니가 꼭 배워야 할 걸 가르치기 위해서
이 과정을 그냥 통과시키는 거야 조금만 참아라 고
토닥토닥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시며 쫓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잊으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토닥토닥 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토닥토닥 응 아가 조금만 참아 그거에
그 조그만 애기들도 힘을 얻어서 그럼요 그 맛없는 거 먹으면서도 다 맛있대 거짓말인 거 뻔히 알아요 저는요 진짜
그런데 그 조그만 애들이 그 엄마 그 아빠 그게 더 소중하니까 다 맛있대 간장에다가 밥만 비벼주는데 다 맛있대
하물며 영적인 세계를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성도가 이 현상계의 그런 현상들에게 지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힘드시면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저한테 얘기하시라니까요
드디어 내가 한국에 왔잖아요 난 이제 기타들고 미사리도 갈 수 있고 아 미국에선 안 됐어 그게 어디든 가능하다니까
내가 그냥 진짜 어디 가서 라이브 가수로 뛰더라도
내가 그 상황에서 내가 모면하게 해드릴 테니까
아 그게 우리끼리 서로 가족이라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것으로 혼자 우울증 걸려가지고 그럼 교회가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렇게 그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그것을 여러분의 부활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로 쓰지 못하면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번영이나 눈에 보이는 행복과 기쁨과 감동등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곳도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것들의 위험성을 올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진짜 아버지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간 나
그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이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는 나
그렇게 내가 진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버리면
너의 자리에서 그 사단 노릇했던 나가 거기서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 안으로 내가 그 즉시 쫙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우리 편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 편
천지 창조주가 우리 편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너의 자리에서 자꾸 그분을 사단으로 몰아 세우냐고요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사단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영이 네 안에 제대로 들어가면 그 너가 죽은 거야
그 몸이 그 소마가 죽은 거야 그러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영이야 ,하나님의 영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1절 보세요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죽어야 산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이거 꾸짖었단 뜻이에요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을 때 썼던 그 단어 예수님을 그렇게 꾸짖었다는 거예요
네가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그렇게 꾸짖어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런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거요 왜 자꾸 미련한 소리를 하세요 그 방법 아니잖아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 때 예수님이 돌이키시매 이 돌이키시매가 이렇게 고개를 돌려 돌아서 봤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을 뒤집어 엎어 라는 뜻이에요
네 말은 틀렸어 이런 의미에요 돌이키시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이 마귀 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베드로야 그게 대적하는 거야 그게 사단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그 수준 밖에 안 되니 이 놈아 이런 게 아니라
베드로야 그걸 사단이라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걸 사단이라 그래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도 나오죠 육신의 생각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 나오죠 ,그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너희들 나를 그냥 왕 삼아 어떻게 내가 너희들에게 구원이나 주고 생명이나 주고
그런 존재로 그냥 저 밖에 두고 나를 섬기면 사단 되는 거다
내 죽음이 니 죽음이 되지 않으면 그건 내 십자가야 니 십자가 아니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나를 위하여가 나 때문에 예요
나 때문에가 뭐라 그랬어요 아까 그 나 내가 내 몸이 죽고 그러한 내 육신의 생각들
지금 베드로처럼 이렇게 나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이 육의 어떤 안위와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그 하나님 이거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렇게 추구하는 그 아담 그 몸이 죽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으로 함몰된 그 나 때문에
니 네페쉬가 죽으면 네 푸쉬케가 죽으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래는 거예요 그게 사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이 베드로처럼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니 목숨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니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넌 반드시 잃을 거야 그런 말이에요
그 나 그걸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된단 말입니다
복음은 아주 심플해요
여러분 육으로 죽어야 영으로 살아요
육으로 심어야 영으로 거둡니다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예요
행위로 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선악과 패러다임하의 인간으로 죽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으로 사는 겁니다
그 복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야 비로소 Good News 유앙겔리온 복된 소식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 63절 보세요
살리는 것은 뭐예요 영이니
육 아니에요 너희들 행위 아닙니다 너희들 몸 아닙니다
살리는 건 영이다 육은 무익하대요 그러니까 죽여야죠 그런데 어떻게 죽는다고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서 영이 니 안에 들어오면 죽는 거래요
그거는 너희에게 이른 말이 내 로고스가 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야 그러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산 거고 여러분의 몸 이 육은 이미 하나님 앞에 삭제된 거예요
그럼 너무 그걸로 하나님 앞에
뭐 이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거기에 너무 그렇게 묶이지 마세요 열심히들 하자고요
그래서 아 따뜻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이런 평가도 우리도 한번 받아보자고요
만날 뭐 말씀만 공부해갖고 대가리만 큰 교회 난 이런 소리만 들어갖고 아 그렇게 좀 살지 말아요 제발 언제 내가 그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욕은 다 내가 먹어 그냥 그렇게 사시되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열매로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거 그거는 명심하시고 가라고요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내 말씀 내 로고스를 니들이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그걸 들으면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거예요
여기서 나 보내신 이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대요
그리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From 사망 To 생명이 아니라
Through 사망 In 생명 이에요 죽어서 산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게 죽는 거고 그게 사는 거란다 이런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자는 제대로 들은 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죠 그 죽은 자들은 말씀으로만 살아난대요 말씀으로 아들의 말씀 아들의 음성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와 아들을 이렇게 대조하죠
그건 뭐 그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천사가 아니라 유앙 저 앙겔로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전하는 자들이란 뜻인데
그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갖고 전하는데 아들이 아닌 자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그 아들 그 천사를 그렇게 갈라서 설명해 주는 거거든요
마찬가지에요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그 아들이 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진리가 살리는 거지
무조건 성경말씀을 뇌까린다고 살아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계시록 20장 4절 보세요
듣는 자는 살아난다 그랬어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성도들입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자 진리에요 이거는 한 마디로 바꾸면
진리로 복음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목 베임을 받았다는 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사는 선악과 페러다임 하의 아담들의 목이
말씀에 의해 잘리더라는 거예요
그럼 어떤 머리가 가서 붙어야 되겠네요 예수 그 머리가 가서 붙은 자들
그러니까 자기의 주체성
자기의 존재
스스로 존재됨을
하나님에게 이렇게 차압당한 자들
이라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그들이 산 자예요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그리스도로 더불어에요 그죠 그 진리와 더불어 그 진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들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그러죠 그 이거 여러분 얘기입니다
천이라는 것은 충만의 수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율법의 진리로 성취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는 그 기간을 천이라
그래요 나중에 무슨 뭐 어떤 기간 그 시점부터 천년이라는 그 기간이 있다는 그런 뜻 아니에요
자 그 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네요
그런데 그들은 어떤 자들이래요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래요
자기의 주체성을 하나님에게 빼앗긴 자들이에요 몰수당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그 머리가 된 자들이 그들이 왕이래요
그런데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네크로스예요
역시 그렇게 살아나지 못한 자들은 천년 동안 무슨 수를 써도 못 살아난다 예요 못 살아나더라 그러죠
그러니까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첫째 부활 한 거죠 살아났어요 첫째 부활한 거예요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또 나와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한대요
그 진리가 있으면 그들이 왕이래요
그 목이 잘려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답답하여 그렇게 외치셨던 그 예수님이
머리로 드디어 붙을 어떤 이들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머리니 이들도 왕이네요
그런데 현실은 이래요 그러니까 이 현실이 현실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이 현실이 현실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 진리의 현실이 현실이잖아요
여러분의 현실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라니까요
그러면 여기에 묶이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묶이는 걸 죄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그 처한 현실 그 전체는
그냥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허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건 여러분을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진리인 여러분을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변화나 번영이나 발전 이런 걸로 사람을 부유하다 가난하다 성숙했다
그리스도인답다 악마 같다 못 됐다 잘 났네 이런 평가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적어도 성도는
아울러 그런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되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러한 변화나 성숙을 도모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자라는 올바른 자인식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착하고 성숙하고 훌륭한 존재가 된 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성경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머리를 삭제 당해야 돼요 참수 당해야 돼요
그래서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주체가 되어버린 하나님처럼의 자리에 올라가 버린
우리의 머리를 자르러 오시는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이 다나토스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머리가 붙어요
그러면 그들을 머리라 그래요 진짜 머리 그렇지 않은 자들은 머리가 되지 않으면 뭐가 돼요 두 개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꼬리 밖에 없어요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그러죠 아랫물이라 그래요
그 아랫물에서는 이 인간들이 진리 그 머리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몸 꼬리를 동력으로 하여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꼬리를 반드시 잘라 버려야 되는데
그래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그 바다에서 낚아 올려야 된다니까요 그럼 잠시 퍼덕이다가 죽어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살았다 그래요
그러니 쉬워요 이 삶이 그러니까 말씀은 한 마디로 토닥토닥 이라니까요 야 아니잖아
그게 현실 아니잖아 내가 지금 의도하는 목적이 있잖아 그건 모형이잖아
그걸로 니가 가야 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잖아
거기서 넘어지지 마 토닥토닥 오늘 말씀도 다 토닥토닥이에요
그 죽은 거야 니네 몸은 죽은 거야 그런데 왜 거기에 묶여
니 몸에 장애가 있어 그건 너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너를 보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준 거야
니 실수로 그거 너에게 간 거 아니야 질병 가난 마찬가지야 재물 그것도 마찬가지야 토닥토닥
이사야서 9장 15절 보세요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꼬리가 되세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이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거짓말 거기에 속지 말라라고 합니다
신명기 28장 12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그 보고에서 뭐가 내려와요 때를 따라 비가 내린다고 그러죠
비는 뭐라 그랬어요 은혜의 말씀 진리
보배는 그거예요 그냥 보배를 이렇게 나눠 주고 있는데 이게 보배인지도 모르고
이 돼지들에게 이거 던지면 안 되는 건데
니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이거 산상수훈에서 배웠죠 꾸려고 하는 자들에게 거절하지 말라 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왜 내가 있잖아요 거저 받은 보배가 꾸러 온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꿔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게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라
그러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명확히 나오잖아요
너 아랫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야 위엣 사람으로 만들려면 니 꼬리 잘라야 돼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이 지켜 행하며 이것이 간직하다 라는 뜻이에요
니 명령을 내 명령을 네가 마음으로 간직하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좌로나 우는 뭐예요 선 악입니다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건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선 악의 하나님
니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마음으로 갖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내 말을 니가 모르면 그게 다 저주되는 거예요
니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성읍과 들은 뭐다 성경에서 성전 니가 있는 이 교회에서 저주 받는다는 거예요 뭐로 그 말씀으로
또 니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니 양식은 그거 진짜 양식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 복 그 저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 저주는 냉장고에다가 그거 알고 써 붙이시라고 복과 저주 이런 거
자 그렇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여러분의 목을 참수 당해셔야 돼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그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여 위로하는 거예요
토닥토닥 이렇게 사는 거 별 거 없어
그거야 그거 하고 가는 거야
예수를 니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리스도를 니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거 배우고 가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꼭 어물전에 가면 죽은 고기가 가치 없고 홀대 받죠 살아서 펄펄 뛰는 게 비싸요 그죠 우리 애들이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생선을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갖고 어디 가면 이렇게 어물전 같은 데를 이제 가요 가락시장 같은 데나 아니면 저 부산에도 거 한번 가 봤는데 자갈치 아 실망했어요 난 굉장히 기대하고 갔는데 너무 지저분하더라고요 저 제주도의 그 거기도 가보고 또 하여튼 많이 가 봤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은 죽은 고기는 반값이에요 돌아가신 광어 반값 이렇게 써놨더라고 거기다가 그 돌아가신거 한참 생각했는데 죽은 거는 반값이에요 항상 그게 세상의 가치관이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그렇게 죽어야 이게 진짜 보배야 그래요 이게 진짜 생명이야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평가나 판단이나 이런 거에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세상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쓰레기 취급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래요 그래 그렇게 죽는게 맞아
그런데 그거 아닌 진짜 기쁨 그거 아닌 진짜 선 그거 아닌 진짜 안식 그거 아닌 진짜 행복
내가 너희들 위해 준비해 놨다
너희들은 이미 거기 사람이야 그거 가르쳐 주는 게 우리 신앙생활이에요 딴 거 없어요
성경을 통해서 우린 그거 하나 배웠으면 오늘부터 저 찢어 발겨도 돼요 그거갖고 뭐 필요 있어요 성경이 산천초목이 다 성경인데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렇게 많이 써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 뭐냐 하면 그거 하나하나 증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매주 똑같은 걸 같이 이렇게 증명해 줘야 되니 뭔 팔자냐고요 이게 그거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거 아셨으면 된 거예요 여러분 너무 그냥 지적 호기심 지적 허영심의 충족 이런 걸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들 마세요 내가 글 쓰는 것들 보면 딱 알아 어떻게 이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거 하나 가졌으면 그냥 자유하게 그 진리로 잘 사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는 건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쉬운 건데
그런데 우리 몸이 그 길을 자꾸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자꾸 장애물을 놓습니다
하나님 이 속에서도 우리가 배울 게 있으리라 믿습니다
잘 배우고 하나님의 진리 놓치지 않고 꼭 붙들어
우리 하나님 토닥토닥 우리 등 두드리면서 오시는 그 길에
그 아버지의 손 꼭 잡고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내딛을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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