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신윤식 목사(은석교회)/말라기

(7강) 선지자 엘리야

Hebrew 2023. 6. 22. 15:33

<본문>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설교>

 

이스라엘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의 주의 이름을 더럽히고, 멸시하고, 괴롭히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는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분명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으며 멸시하고 괴롭히고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신앙세계와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신앙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앙세계가 같았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인정을 하시든, 아니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길을 갔을 뿐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현실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 자기 신앙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앙 세계 안에서 스스로 의를 쌓으며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구축한 단단한 종교의 틀 안에 갇혀서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말씀 안에서 항상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지금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어버린다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자기 신앙에 대해 의심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항상 자기 욕망을 따라 살려고 힘쓰는 본성을 가진 것이 인간임을 생각한다면, 신앙조차도 내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을 소질이 다분한 인간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신앙의 길에 대해 살피고 점검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여호와의 날에 경고합니다. 1절을 보면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용광로 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용광로 불처럼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날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용광로의 불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러한 날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의로도 견딜 수 없기에 누구든 자신이 쌓은 공로를 내세운다면 여호와의 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1절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용광로의 불 앞에서 지푸라기는 말 그대로 근처에만 가도 태워져 버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여호와의 날에 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인간의 공로와 의를 높이는 자를 말합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굴복하지 않는 교만이고 악에 해당됩니다. 이 같은 자들은 지푸라기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용광로의 불같은 날에 건짐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믿고 소망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언약을 믿고 소망할 자는 자신의 의와 공로로는 여호와의 날에 건짐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와 공로를 내세우면 살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복을 누리려고 했던 것에 대해 회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이 언약의 의미를 알고 언약을 믿고 소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언약을 믿고 소망하는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고 이들은 심판의 날에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놀게 될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5절)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를 보내서 하시는 일은 6절의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겠다는 엘리야는 세례 요한을 뜻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외친 말은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단지 죄를 개듣고 용서를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 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여호와의 날에 건짐 받을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것은, 아버지께만 모든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긍휼이 있고 자비가 있습니다. 우리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따라 사망에서 건지시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있습니다. 신자는 이 같은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에 모든 희망을 두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왕상 19:18절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의 왕은 아주 악했던 아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 의해서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 호렙산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고 엘리야는 “이스라엘 지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들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은 자 칠천 명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들 남은 자 칠천 명이 누구인가가 세례 요한이 옴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는 주의 능력으로 그 마음이 아버지께로 돌이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아버지께로 돌이킴을 받았다는 것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은총에 모든 소망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공로와 의를 내세운다면 그는 마음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이지 아버지께로 돌이킨 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아버지의 무조건 적인 은총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믿는 것이 아버지의 백성으로써 아버지를 믿는 것이 되고 십자가의 의를 믿는다는 증거는 자기의 의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따로 있으되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아예 의가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참된 의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높이고 감사할 뿐,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는 아예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 있으니 자기의 의를 가치 있게 여기고 자랑했던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아버지께 두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삶의 중심에 계심으로써 하늘의 의와 은총을 누리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음이 큰 복임을 아시고 은총 아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신자의 길만을 마음에 두시고 그 길을 가기를 소원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