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무서운 현실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모르는 것이다. 죄를 모르면 죄와 선을 구별할 수 없고 죄를 선으로 착각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알고 행하는 선한 일들이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를 멸시하고 주의 원수로 행하는 죄로 심판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죄를 모르는 것은 분명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이 참된 현실인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될 자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 참된 현실은 자기를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의 존재를 하나님의 사랑이 하루하루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된 현실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현실을 마음에 두고 성경에 감정이입을 한다.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죄의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현실성과 맞는 듯한 성경에 감정을 이입해서 위로와 힘을 준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한 예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씀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나를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는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부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양이다. 여호와와 양의 관계에 있는 그들에게 목자가 되신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당연하게 의심 없이 양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에 풍족해지는 자기 현실성을 가지고 성경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섬겨온 자신들이 양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그들이 여호와에 의해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양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양 아닌 자가 자기를 목자의 양으로 착각한 것이고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 교회가 사로잡혀 있는 자기 착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죄를 알지 못하므로 나타난 결과다.
우리를 과연 목자의 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자와 양의 관계는 순종으로 드러난다. 양에게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종이 아니라 목자가 이끌어 가는 모든 길에 잠잠히 따르는 것이 진짜 양이다. 그런데 양으로 자처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순종은 없다. 언제나 자기 현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를 목자로 부르는 우리에게 순종은 절대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현실을 위한 길을 가는 것이 제 길로 가는 것이며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이 목자로 부르는 하나님은 나의 길로 인도하고 나의 길에서 부족함이 없는 풍족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그릇 행하는 죄로 말한다. 그런데 죄를 모르기에 각자 자기의 길에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하며 부족함이 없는 현실을 위해 행하는 것을 믿음으로 잘못 착각하는 것이다.
참된 양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의 양 되심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는 말씀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제 길, 즉 자기 영광을 위한 현실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현실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신다.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현실에는 멸시받아 버림 받음이 있고, 간고를 많이 겪고,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는 것이 있다. 이것이 양의 현실인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걸러진 현실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거짓 양일 뿐 참된 양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현실을 부족함이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씀은 없다. 목자는 양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한다(시 23:3). 부족함이 없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도 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자기 이름을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위한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 거짓된 양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성도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살아온 기존의 인생은 부인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새로운 인생으로 인도받는다. 날마다 말씀 앞에 서서 기존의 자기 것이 부인되고 주의 이름을 위한 도구로 새롭게 창조되는 자가 성도다.
목자에게는 사랑이 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으로 양에게 함께 하고 인도하시기에 목자와 사랑의 관계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목자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는 의의 길 또한 우리가 스스로 가지 못한다. 우리는 의의 길을 알지 못할뿐더러 목자의 이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위한 제 길을 가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양으로서 푸른 풀밭이 무엇이고 쉴만한 물가가 어디인지를 아는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감정 이입해서 내 몸을 위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상상하는 헛된 환상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의의 길로도 갈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주께서 함께 하심이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가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자신이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짓된 죄의 존재임을 알게 된 성도에게 해당한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존재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아는 자가 성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만으로 내 것을 구할 필요가 없는 부족함이 없는 세계에 머문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