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성 경 <딤후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저는 개혁신학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개혁신학, reformed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혁의 국어사전적 개념은 원래 있던 것으로부터 돌출되어 떨어져 나와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 추구하고 새로운 것 만들어 내는 것이 개혁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reformed라는 것은 변질되어진 것에서 원래의 본줄기로 돌아가는 것을 reformed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변질되지 않고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만 카톨릭이 원 가지에서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며 바로잡은 것이 reformed, 즉 개혁입니다. 그래서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입니다. 그 중 우리는 성경이 정말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대에 인정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혹자는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지 체험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와 이 세상 모든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바로 이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제한적 이성의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두 가지 방법으로 하십니다. 그 하나가 인간과 자연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해서 보여 지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입니다. 성경에도 곳곳에 그 일반계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19:1>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롬1:20>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두 번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직접 설명하시는 것이 특별계시입니다. 그 특별계시 중 성경에 대해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1,500년 동안 쓰인 책입니다. BC 1500년경의 모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해 쓰인 성경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방대한 분량으로 기록된 책이 성경입니다. 구약이 현재의 39권으로 확정된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BC 397년 카르타고회의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성경이 탄생한 것은 AD 400년경이 됩니다. 그리고 원래 성경은 장절이 없이 기록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처럼 소제목도 물론 없었습니다. 주후 1551년 비로소 독자들이 찾기 쉽고 읽기 쉽도록 장과 절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장과 절은 비전문가에 의해서 나누어졌기 때문에 어떤 것은 오히려 장절이 구분되어 있어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때로는 장절 구분 없이 죽 읽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쓰인 책이며 절대무오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즉 축자영감설을 우리는 지지합니다. 한자 한자가 모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 기록되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유수한 많은 신학교들이 이미 자유주의 신학에 점령되었고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자들을 조소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신화나 설화쯤으로 취급하고 부활은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신학교에 다니던 선배 하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는데 담당교수가 코웃음을 치더랍니다. 그 교수님 왈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믿는 바보가 있나?” 하더랍니다. 그런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번듯한 교회의 목회를 하고 있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의 행동 지침서에 불과하며 수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는 가치 없는 책에 불과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노자의 도덕경이나 석가모니의 불경, 어쩌면 초등학교 도덕책과 동류쯤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다 완성된 성경이 어디서 뚝 떨어졌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것이 1,500년이나 걸렸고 각기 다른 40여명의 저자가 기록을 했으며 신구약이 오늘날의 성경으로 확정된 것도 4세기라고 하니 성경에 대한 신비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위치가 그렇게 하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분의 저자에 의해 한권의 책으로 쓰였으며 그 성경은 어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결론으로 성경은 단 한 가지 주제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좀 더 거시적(巨視的)으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그 주제로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쓰여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성경 해석에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조직신학적 관점이고 두 번째가 성경 신학적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유기(有機)적 통일성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 육십 육권은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세대별로 다른 구원의 방법을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닌 ‘하나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아래 한 권으로 통일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될 때 손바닥에 침을 놓아 고치는 수지침을 아십니까? 어떻게 머리가 아픈데 손바닥에 침을 놓습니까? 그런데도 낫습니다. 그것이 유기성입니다. 우리 몸은 전체가 그처럼 하나로 통해있는 것입니다. 발톱이 빠졌다고 발만 아픈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성경도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갖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찌르면 요한 계시록으로 혈맥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기적 통일성 하에 신에 관한 개념과 내용을 정리한 것이 조직신학의 ‘신론’이고, 인간 구원에 관한 내용과 개념을 정리한 것이 ‘구원론’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정리한 것이 ‘인간론’입니다. 이렇게 조직신학은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존재할 수 있는 신학입니다. 성경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신학도 성경 전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간과 역사를 고려하여 성경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노아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으며 어떻게 아브라함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고 어떻게 출애굽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다윗의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밝히 계시가 되고 있는가, 이렇게 시간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대 주제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밝히 계시가 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성경신학이라 합니다. 그리고 성경만이 직선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직선적 역사관이란 순환적(循環的) 역사관과 비교해서 이 땅의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역사관을 말합니다. 반면에 동양사상이나 뉴에이지 사상 등에서 주장되는 순환적 역사관은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존재했으며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다는 역사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조물을 가리켜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연(自然)은 하나님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실 때 말씀한 내용입니다. <출3:14> 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을 거대한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신이며 그것을 깨닫는 자들이 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양사상이며, 불교이며, 힌두교이며, 뉴에이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압니다. 사람들이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만이 ‘스스로 계신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에 의해 시간과 물질과 공간이 창조된 것이고 이 역사는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게 직선적 역사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역사의 종말이 있음을 인지하고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순환의 논리에 의해 또 다시 윤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음이라는 종말과 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직선적 역사관에 의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성 있게 성도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를 조금 미시적(微視的)으로 분해해보면 은혜, 사랑, 예수 그리스도, 구속사, 언약, 하나님의 주권 등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일관성 있게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구속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요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으로 이어지는 책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신다는 명확한 그림인 하나님의 주권만이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을 요한 계시록의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택하셨으며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가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타락, 심판, 구원, 천국잔치의 순서로 일관성 있게 은혜라는 주제를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인간이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점진적 계시의 형식으로 써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때 가나안에 입성함으로 한 차례 그 주제 설명이 초보적으로 끝나고, 사사기에서 또 타락하여 사무엘하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함으로 한차례 또 끝나고, 열왕기에서 또 타락을 보여주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에서 성전을 완성하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으로 역시 한차례 또 끝나며, 욥기,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에서 그 지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를 설명하고 아가서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들과의 천국에서의 사랑을 묘사하며 또 한 번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에서 또 다시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며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 또 성전을 완성하여 천국 잔치를 다시 보여주고, 말라기에서 ‘봐라 너희들 힘으로는 안 되지?’ 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며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셔서 지금까지 그림자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의 드라마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에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4장까지를 마쳤습니다. 거기까지 내용이 바로 예수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 하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배경이 절대 너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인간적인 면에서 전혀 불가능한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그녀가 구원을 받음으로 구원은 이렇게 인간 쪽에서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란 것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 자기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38년 된 병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히 설명해 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풍성한 하늘의 떡에 관해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성령에 의해 어떻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 사도행전이고 그것을 교리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로마서이며 고린도서부터 유다서까지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으로 신약의 시내 산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단원의 계시록으로 마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두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맞는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눅24:25-27>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에게 선지자의 글들, 즉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에 관한 것,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성경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수에 관해서만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에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숨어 있을까요? <요8:56>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적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상을 섬기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는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죄인을 하나님의 벗으로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아들을 죽여 원수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예표하는 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요12:41> 41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히11:24-26>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비록 그림자처럼 주어지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도 여러 인물과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신약에 와서 그 실체가 오심으로 드디어 명쾌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히1:1-2>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 선지자들의 수많은 예언과 여러 인물들의 발자취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품으로 계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마지막 계시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이 좋아하는 예언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서도 예언에 관심 있는 분들 많으시지요? 저는 LA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하와이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예언 받고 오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어떤 예언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예언하는 자들에게 광분합니까? LA의 큰 교회에서도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 사람 한 명 불러다가 수백 미터씩 줄서서 예언 받으려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이 땅에서 자기의 길흉화복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자신의 성품이나 처한 상황이나 환경 등을 간혹 알아맞히면 놀라서 뒤로 자빠집니다. 그는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신접한 점쟁이일 것입니다. 일찍이 주역을 심도 있게 공부한 저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언이 정 듣고 싶으시면 복채(卜債) 들고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사주(四柱) 팔자(八字) 잘 짚어서 정확하게 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일부러 관심 두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 땅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지나면 우리에게 오게 될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고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이 적혀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온통 이 땅에서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어찌 그가 하늘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안식’ 그 외에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신가요? 성경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런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성경에 기록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다 성경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쓰신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이외에 직접 말씀을 하신다면 지금도 성경은 계속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다는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에서도 담임 목사님께서 예배 시간에 종종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신장이 안 좋은 성도들의 병을 지금 고쳐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등등의 예언을 하곤 했습니다. 그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그 말씀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도 손색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계시라면서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라고 자신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 말고도 이 세상에 여전히 내려오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성경은 절대적 계시가 되지 못합니다. 수많은 계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제한된 이성의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미 완성되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책에다가 무엇을 보태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직접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계22:18-19>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 중에 사도 요한이 가장 마지막에 쓴 성경입니다. 18절에 있는 ‘외에’라는 전치사는 헬라어로 ‘epi’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먼저 선행한 것들 위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구절의 진의는 “이 구절 앞에 기록된 모든 성경 66권 위에”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성경에다가 뭔가 더 보태면 너희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위에다가 ‘내가복음’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은 이미 완성되었고 하늘나라에 대한 계시는 이 한권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못하시는 분은 어서 근처의 달마사로 가 주세요.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목사인 저도 아직 10%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매일 매일 새벽 세시 반이면 일어나서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꼬박 성경만 연구하고 성경만 읽습니다. 그런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있기에 또 다른 계시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까?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공인된 이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다 알지 못하면서 그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말하는 자의 속임수인지, 아니면 마귀의 속삭임인지 확인도 안 된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됩니다. 정 다른 계시가 듣고 싶거든 이 책이나 다 숙지하고 찾아다니세요. 여러분이 고통과 환난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그리고 행복한 앞날을 맞고 싶거든 그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지 말고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도의 무기로 주셨습니다. <엡6:11>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너무 잘 아는 구절이니까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전신갑주에서 유일한 공격무기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검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검을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유일하게 성경만을 무기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직 완성도 안 된 무기를 주시면서 마귀의 궤계에 대적하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에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정확히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고 벨직 고백서등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국의회가 선정한 존 오웬을 비롯한 151명의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4년여 간에 걸쳐 완성해 놓은 장로교 교리집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절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히1:1) 자기의 교회에 자신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 두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 같은 이유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 어떻습니까? 명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계시를 받는다는 이들은 도대체 뭡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 없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다른데서 찾지 마십시오. 혹 영성이 깊어 보이는 어떤 이들이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길”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거든 얼른 좋은 정신병원을 소개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정신 분열 증상을 다분히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몇 번이나 읽으셨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무오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이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특별계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십시오. 어떻게 키울 수 있습니까? 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
'◈김성수 목사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장 선 교 <마28:18-20> (0) | 2022.11.08 |
---|---|
제6장 헌 금 <막12:41-44> (0) | 2022.11.08 |
제4장 세 례 <요3:1-21> (0) | 2022.11.07 |
제3장 신령과 진리의 예배 <요4:20-24> (0) | 2022.11.07 |
제2장 인간과 죄 (Ⅱ) (0) | 2022.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