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모세언약(3)
14강에 이어서 왜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복을 받지도 못하고
의롭다 함을 받지도 못하는지 계속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사도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기록된바 즉 율법에 기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7:26절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율법적인 행함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면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10-11절입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한가지라도 어기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간음과 살인만 말하지만 앞서 본대로 613가지를 다 지키다가 한가지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다 어긴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갈라디아서 3:13-14절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소떼 양떼가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소떼 양떼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바로 왕에게 주었을 때에
그 댓가로 받은 것일 뿐입니다.
창세기 12:16절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바로왕은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복이며
이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3:16절 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영원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신명기 21:23절의 말씀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율법을 어려서부터 줄줄 외우다시피 배우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그 저주 받은 죽음이 자신의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로 인하여 성령이 임한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저주를
대신 받았음을 알고 믿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믿게 되는 사람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며 모세가 말하고자 한 궁극적인 복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다음에 모세 언약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 왜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통하여 죄 아래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그런 자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여 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새 언약시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의 선물보다는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더 챙기고 싶은 죄인의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을 부추기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복이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에서 조차 이런 복을 말을 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이 언급하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복이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의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록펠러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많은 경우 록펠러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해도 자식들이 복을 못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 땅에 록펠러의 어머니보다 더 정성 바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세계적인 부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대에 받지 못하면 자식 대에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받는다고 합니다.
천국마저 세상의 가치관으로 바꾸어버리는 모습입니다.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찬양내용입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출애굽 시킨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처소를 삼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처소란 지금은 성도가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처소를 만드시고 그 처소가 만들어지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처소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그 관계 속에 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한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24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과연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처소로 삼으신 자의 일차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아들이 있으면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빼앗기지 아니할 영원한 복입니다.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 > 언약을 따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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