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외식이란 무엇인가?
<막7:6-9>
6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본장의 주제는 성경에 나오는 외식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을 한군데만 더 찾아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18:3-5>
3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 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유다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로부터 군대와 하속들을 제공받아 예수님을 파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대단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희랍의 문명에 영향을 받아 퇴색되어 가는 그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로마에게서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제일 크게 욕을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열심을 부리는 바리새인들을 왜 독사의 새끼라 하셨으며, 그렇게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그들은 진짜 메시아가 오셨는데 왜 못 박아 죽였을까요?
우리는 이 바리새인들에 대해 공부해 보면서 그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조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리새인 하면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외식’입니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외식’
외식이 뭔가요? 밖에 나가서 밥 사먹는 게 외식입니까?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외식은 그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 한다면, 집에서 더 자고 싶은데 참고 학교에 가는 것도 겉과 속이 다른 것이므로 외식입니다.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외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외식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성실하다’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꾹 참고 미소로 친구를 대하는 것을 외식이라 하지 않고 ‘인내’라 합니다. 마음속에 욕정이 불일 듯 일어나는 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참아내는 것을 우리는 외식이라 하지 않고 ‘경건의 연습’이라 합니다. 이처럼 외식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외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외식을 얼마나 미워하셨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본인의 입으로 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셨으며,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참지 못하시고 분노를 발하셨던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유독 이 외식에 대해서만은 불같은 노여움을 퍼부으셨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독사의 새끼라는 욕까지 그들에게 퍼부으셨습니다.
<마23:33>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스라엘 민족에게 뱀이란 동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설명 안 해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바로 그 저주의 욕인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잔인한 욕을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외식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화를 내셨을까요? 성경에서 차근차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11:42-44>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더러 평토장한 무덤(무덤 같지 않게 평평하게 포장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은 모르지만, 실제로는 썩은 시체냄새와 썩은 물이 넘쳐 나는 무덤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경건한 종교행위를 잘 하고 신앙적인 명령들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 본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4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곧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그들은 사람 앞에 박수 받기 위하여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칭찬 받기 위하여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어떤 악당들은 아주 자유롭게 술집을 드나들며 부어라 마셔라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의 참뜻은 눈에 보이는 선한 행위가 꼭 구원의 표지는 아니라는 말이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선한 행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충분히 자기 자랑의 목적을 위해 할 수 있기에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해봅시다. 죄라는 것을 형태나 모양이 아니라 경향으로 이해를 해보세요. 죄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스스로 자존심도 지키고 하려는 경향입니다. 그게 죄의 시작이고 죄의 본질 아닙니까? 선해 보이는 종교행위도 그러한 죄의 경향에서 출발했다면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자기 의’라 합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선해 보여도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 티켓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 더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6:1-2, 5-6>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무엇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사람에게 받는 칭찬과 하나님께 받는 칭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는 종교행위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예로 듭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 종교행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는 종교행위와 하나님께 보이는 종교행위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행위를 ‘외식’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속 2절을 보겠습니다.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누구를 도와 줄 때에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떠벌리면서 도와주는 것을 외식하는 자라 합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분명 마음속에서 울리는 “불쌍한 자를 돕는 것이 좋은 일이다.”라는 음성을 따라 구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보여 칭찬을 받기 위한 의도로 구제가 행해졌다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심지어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장로는 장로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갔다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왜 한 번도 안 빠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장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로가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욕할까봐 한 번도 못 빠지겠더라고 대답했습니다. 참 불쌍했습니다. 그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기를 또 다른 율법으로 묶어놓은 경우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 새벽기도에 얼마나 이를 갈면서 나왔겠습니까? 좀 자유로워집시오. 그런 사람들이 가끔 목사가 새벽기도 못나온 날이면 목사가 새벽기도 빼 먹는다고 꼭 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그런 기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외식은 하지 말거라.”
그리고 교회마다 이마에 “난 기도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일도 잘 풀리고,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가정도 평안하고, 자기의 기도를 받아야 병도 낫는다는 그런 사람들 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다음 장에서 기도에 관해 공부하겠습니다만 아주 협의(狹義)의 의미에서 기도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청인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왜 기도하겠습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될 일을.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을 설득해서 응답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목적도 계획도 없는 우유부단한 할아버지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자기의 기도는 무슨 응답 보장 기도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면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 주부터 공부할 내용 중에 맛보기로 조금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산 아래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소년의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아들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類)가 나가지 않는다는 말씀하시고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혹자는 “봐라, 기도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귀신 쫓는데 열을 올리곤 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을 때 정말 기도를 한 번도 안 했겠습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실수한 것일까요? 주님은 지금 어떤 기도와 금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진짜 기도이고 진짜 금식일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자기들을 예수님 다음 계급 정도로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로 인해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달라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입니다. 기도는 “나는 무익한 종이며 하나님만이 만유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모두 허공에 날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나를 자랑하겠다는 시도는 그야말로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던 제자들에게 ‘기도와 금식’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저는 절대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옵소서.”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기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기도한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잖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자기가 기도해줘서 응답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혹 창세기의 이 구절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 이하에 야곱이 임종시에 요셉에게 하는 축복의 내용이 있습니다. 축복은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창49:22-26>
22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25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이렇게 야곱이 요셉에게 복을 비는 데, 하나님을 부르는데 “너의 하나님” 혹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여기서 네 아비란 야곱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네 아비의 축복이, 네 아비의 기도가 내 부여조 (내 조상들)의 기도 보다 낫다고 합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하면 형편없는 잔꾀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신앙의 승리자들의 기도 보다 자기의 기도가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야곱이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속이고 속는 사기 인생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그런 자기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분명 자기가 은혜를 얻어 구원을 얻은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니까요. 야곱은 지금 자기 생각에 자기 같은 걸 그 죄에서 꺼내 주시고 자기 같은 인간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면 그 분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분이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도가 부여조의 기도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용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의사에게 가서 티눈을 고쳤고, 한 사람은 불치의 백혈병을 고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의사의 용한 진가를 더 잘 경험한 사람입니까? 중병을 고친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야곱은 티눈 정도를 고친 다른 부여조에 비해 백혈병을 고친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뵈었던 하나님보다 야곱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훨씬 더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능력과 기다려 주심에 있어서 더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항복에 있어서 야곱은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야곱의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고, 내 기도가 우리 아버지 이삭의 기도보다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도보다 더 낫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난 우리 아버지 이삭보다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훨씬 못나고 추한 인간이었기에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보다 더 깊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지 누구의 기도가 더 잘 먹히고 누구의 기도가 약발이 덜하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처지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남에게 “난 기도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랑을 하고 “내 기도 받아야 응답이 잘 된다.”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인간이며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보다 먼저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 신분이라는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감격적인 지성소에서의 대면인 것인데 그걸 마치 자기만의 특권인양 자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세 번째로 언급하는 종교행위가 바로 금식입니다.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6:16>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면서도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금식 기도원에 가보면 어떤 사람이 자랑삼아 “난 3일 굶었어.”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비웃는 듯 “겨우! 난 일주일이야.” 합니다. 그러면 피골이 상접한 어떤 사람이 담요를 걷고 일어서면서 “가소롭군, 난 40일” 이렇게 자랑을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금식이 뭡니까?
밥을 굶어서 하나님을 협박하여 응답을 받아내는 것이 금식입니까? 그것은 ‘자해’(自害)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삼고 있는 “먹을 것”을 끊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나의 이 문제는 나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 만을 구합니다.”라는 것이 금식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밥 많이 먹고 힘내서 이루어 내야지 왜 밥을 굶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난 지금까지 이 땅에서의 나의 양식으로 여겨왔던 그런 것에 눈 두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만을 나의 양식으로 삼겠다.”는 고백이 금식인 것입니다.
아울러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못난 자신, 범죄 한 자신을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회개는 언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겼을 때 자신의 죄가 보이게 되고 그 때 할 수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즉 금식은 하나님을 알게 된 자가 “난 하나님을 내 최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나는 먹는 즐거움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라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담아 하는 행위가 금식입니다. 그리하여 그 금식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 그것이 금식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사58:4-7>
4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5"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의 의미를 알고 성경이 말하는 금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의 것들을 힘으로 삼아 사는 삶을 포기한 사람이므로 자신의 것을 비워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하면서 “난 일주일 금식했는데, 넌 한 끼도 못 굶냐? 믿음 없는 자 같으니라구.”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금식이므로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라고 종교행위를 해놓고 외식을 한 자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힘껏 종교행위를 하는 자들, 그들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자기 자랑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고쳤는데 왜 주님 날 모른다 하십니까?” 하고 주님께 따지는 자들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뭐라 하신다고요? “이 외식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어디로? 지옥으로. 오늘 본문의 언어로 바꾸면 “이 독사의 새끼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외식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23장에 이렇게 정리해 주십니다.
<마23:1-7>
1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보고 말만하고 행치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런가요? 바리새인들은 목숨 걸고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행치 않았다니요? 그것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행위와 율법 준수는 행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행했는가?”가 아닌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번지르르한 종교행위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뭡니까?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이 랍비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행한 것은 모두 외식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이, 자기를 증명하고 자랑하여 스스로 자신의 왕 됨을 나타내려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며 겸손하게 그 분의 뜻을 좇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란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자들이,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자로 바뀌게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자랑을 위해 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 보여도 모두 외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식을 하는 자들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킵니다. 자기들의 깨끗함을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나쁜 일을 저지릅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남의 잘못이 많이 드러나야 자기가 높아질 것 아닙니까?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얹어 먹어야 자기의 행복이 더 고소하죠? 남의 죄를 들춰내고 지적해서 고명으로 얹어야 자기의 의가 더욱 맛있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7:1-5>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남을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난 새벽 기도해, 난 헌금 많이 해, 난 선교 갔다 왔어, 난 성경 많이 읽어, 그런데 넌 왜 안 해?” 이러한 질책들은 다분히 외식의 냄새가 짙습니다. 그렇게 외식을 일삼으며 남을 질책하는 자들은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지렁이 앞에서 손톱에 메니큐어 칠하면서 “넌 왜 손톱 없어?”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고 성경이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법칙입니다. 율법은 하늘의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켜봄으로써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자기들 생색내기 용으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손 마른 자가 예수님에 의해 건짐을 받았을 때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색이 안 나고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못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미국에 와서 처음에 전도사로 일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여전도사가 전자피아노를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에게도 말씀드리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진짜 비밀로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전도사가 저를 얼마나 미워하던지, 결국 며칠 안 돼서 자기가 다 말하고 다니더군요. 아직 하나님께 항복하지 못한 인간들은 생색이 안 나면 못 참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이 유다와 함께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을 잡으러 오는데 횃불이 등장합니다. 성경이 왜 그런 그림을 그릴까요?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든 횃불이 생색이 안 나기 때문에 주님을 잡아 죽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 태양 때문에 내 횃불이 빛이 안나”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예수님 살해 동기입니다.
“저 태양만 없으면 내 횃불이 훨씬 밝아 보일 텐데.” 여러분도 혹시 이런 자기 자랑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질투가 나세요? 아니면 벤치마킹을 해서 배우고 싶다는 의욕이 일어나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전자라면 여러분도 빛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빛을 바래게 하면 가차 없이 예수님을 살해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다 ‘외식’인 것입니다. 내 생색을 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 그것을 성경은 외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여러분은 지금 외식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하십니까?
'◈김성수 목사 >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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