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주기도문(Ⅲ)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9-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앞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으로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완성된 그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완성되어지고 성숙되어지도록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분투 속에서 경주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본장에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부분 나머지 thou petition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같은 맥락에서 추적을 해볼 수 있는 것이므로 오늘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thy kingdom come’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kingdom, 왕국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 통치에 순종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왕국인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난중일기라는 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잘 아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통영에 가면 아직 이순신 장군이 그 시를 읊던 제승당 자리가 있습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남해 앞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수루에서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이순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적막한 달밤에 바다를 가로질러 한줄기 피리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서 이순신은 애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시입니다. 그 장군의 애를 끊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알려진 바대로 그 고통스러운 한 밤의 고민은 전쟁으로 인한 근심이었겠습니까? 난중일기를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잊을 수 있는 분주함을, 제공한 전쟁을 이순신은 즐겼습니다. 난중일기를 앞뒤로 잘 읽어보면 한산 섬에서 그의 애를 끊게 한 것은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답함의 소산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매월당 김시습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미친 듯이 옛 사람에게 물어본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그렇게 자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이렇게 나의 선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야 하는지, 도대체 이 인생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다가 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처절하게 하다가 간 우리 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혈기 왕성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그들도 곧 진리를 깨닫고 천국에 갔을 텐데, 그렇게 예수가 전해지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그들이 지옥에 갔다면 그것은 unfair한 일이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한 번씩 안 해 보았습니까? 그러면 조금 일찍 예수가 전해 졌다면 정말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놓치실 수 있는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 받을 당신의 백성들을 이미 정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이순신도 강증산도 김시습도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루소 같은 사람은 진리를 찾아 헤매며 성경을 일백 독(讀)을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을 뿐입니다. 그에게 예수가 전해졌고 그 예수에 관한 완벽한 정보가 담겨 있는 성경을 백 번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왜 예수를 믿을 수 없는지에 관해 책을 썼던 것입니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시 그 유명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조지 휫필드의 친구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당시 전 세계의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 설교자가 그토록 자주 찾아와 개인적으로 복음을 설명했는데도 그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이름을 부른 이들 외에는 절대 예수를 알 수도 없고 예수를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지옥에 안 가도 될 뻔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게을러서 복음을 못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에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제 대답이 좀 의외입니까? 지옥에 가고 싶어서 지옥엘 가다니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싫어서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데서 출발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이신 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로 새롭게 살려내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인간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차라리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할지언정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무조건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절대 가기 싫어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자기가 원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입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고 민주주의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통치하시고 거기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공간적이며 물질적인 곳으로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천국은 이 지긋지긋한 죄 덩어리인 우리의 육체가 지금처럼 죄에 대한 욕구를 토해내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얻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곳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읽으십니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다른 주제를 대라면 어떤 것들을 대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언약(言約), 사랑, 구속사(救贖史), 하나님의 주권(主權), 은혜 등 여러 가지로 성경의 주제를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거시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주제를 대라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주제로 삼고 있는 책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저는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길에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라고 말하기에 그렇게 주제를 잡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풍성한 곳이며 이 땅에서도 그러한 수직적, 수평적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그 나라 백성다운 삶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할 수 도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당신의 언약을 따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언약(言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의 주제라고 말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안에 부제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삼요소가 뭡니까? 국민, 주권, 영토입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지요? 주권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주권을 잃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광복을 맞았을 때 일제히 신문들이 조선이 주권을 찾았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국가 삼요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그렇다면 주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통치권이 있느냐가 주권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이끕니다. 그러나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주권에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 요소가 있습니다. 법을 세우고 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그 법을 어겼을 때 재판을 해서 상벌을 가하는 그런 것이 주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가장 행복하도록 지어진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을 떠나서 스스로 자기들 인생의 통치자가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한 데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들이 배태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즐겁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에 의해 건설된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이 협조해서 만든 나라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없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마태복음 첫 장에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요, 다윗에서 바벨론 유수까지 14대요, 바벨론 유수에서 예수님까지 14대라고 적혀있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그렇게 14라는 숫자로 족보를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4는 7이 두 개인 숫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 7이 여섯 개인 족보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족보의 마지막이십니다. 여섯 번째 세대의 마지막이시며 일곱 번째 세대의 시작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안식의 숫자 7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세대가 와야 하는데 그 세대는 예수님을 시작으로 성령으로 난 자들이 그 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족보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하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아래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곳은 ‘아노덴’, 위로부터 난 자들, 거듭난 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우리가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임해야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거듭난 자들로서 그렇게 하늘로부터 임한 그 하늘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에 속한 하늘나라 백성들이 소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속된 것에만 목을 매고 있다면 그 같은 코미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얼마나 누리고 있느냐로 우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는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느냐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가 기준은 그렇게 우리의 학식이나 재산이나 지위로 평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므로 얼마나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가로 평가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왕국이 이 세상에 있으면 우리의 진가는 이 세상 것들로 나타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왕국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열매는 하늘나라의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얼마 있다가 다 내려놓고 부수고 올라가야 할 이 땅의 업적과 재물에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자기가 하나님 왕국의 백성인지 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그 하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어서 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무리 되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기의 소원성취나 만사형통의 기적이나 바라는 것으로 기독교를 정의하고 있다면 그런 웃지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막1:15>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된 ‘엥기조’는 마태복음에도 동일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마26:46>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여기서도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팔 유다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에서 ‘엥기조’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는 의미로 ‘가까이 왔다.’는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가 어디에 어떻게 와 있다는 말입니까? <눅17:20-21>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2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재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나라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읽다가 문득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과거시제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aorist, 즉 부정과거 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정과거는 과거의 1회적인 specific하고 demanding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부정과거가 imperative, 명령형으로 쓰이면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인 eschatological meaning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에는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고, 반드시 임할 것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뜻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왕국을 이해할 때도 역시 already, not yet의 교리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 나라 백성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것을 주기도문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살아야 하는,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환난과 고난이 옵니까? 오른 뺨을 한 대 맞으면 그 모욕감이 없어질 때까지 상대방을 패주는 게 이 땅의 원리입니다. 이 땅의 삶의 원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 이외에는 이 땅에서 누가 우수한지 가려낼 수 없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리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로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충돌이 생기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기에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면으로, 세상은 육적인 면으로, 다른 차원 다른 원리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에 우리는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성도의 고난, 환난, 고통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망이 이 세상에서의 체면에 있으면 어떻게 뺨을 맞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서 두들겨 패줘야 합니다. 자기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의 이치입니다. 힘의 원리로 사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만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소망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까짓 체면쯤 구겨져도 괜찮다.”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 천국의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동참한 자는 환난과 인내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술, 담배, 도박, 마약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심심해서 입니다. 그 마음속에 뻥 뚫려있는 공허를 메울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 심심함을 잊기 위해서. 그러나 예수의 은혜와 천국의 소망으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술, 담배, 도박이 필요 없습니다. 은혜에 취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에 취해서 왜 도박하는 자리에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술보다 도박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그런 것으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마약 중독자가 유일하게 마약의 유혹을 잊을 수 있을 때가 도박을 할 때라고 합니다. 인간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돈 앞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된다는 반증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힘인 하나님을 우리 안에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취하면 다른 것이 우습게 보입니다. 그처럼 하늘의 소망으로 사는 자들은 이 땅의 체면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로서 대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저의 대학 동기나 후배들 중에 일찍 사시나 행시에 합격해서 검사, 판사, 변호사가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작은 이민 교회 목사입니다. 대학시절에 얼마나 큰 야망을 갖고 있었는지 친구들이 저만큼은 뭘 해도 한 자리 할 사람으로 다들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 때의 가치 기준이 여전히 저를 다스리고 있다면 저는 지금 배 아파서 절대 잠 편히 못잡니다. 대학시절 저보다 못했던 친구들이 저보다 더 큰 힘을 누리고 그 힘으로 행세하고 있는 꼴을 어떻게 봅니까? 그러나 지금의 저는 절대 그 친구들 앞에서 기 안 죽습니다. 부럽지도 않습니다. 왜요?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요즘에는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저에게 고민을 상담해 옵니다. 천국백성은 그렇게 당당합니다. <계1:9>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위의 본문을 보세요. 예수의 나라, 예수의 환난, 예수의 참음은 equation입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에 동참한 자는 이 땅에서 환난에 처하게 되고,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을 함께 하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지금 환난을 당하지만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보았으므로 참아라.” 여러분 그러나 그 나라는,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속히 올 것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과 방언과 나라가 아니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인정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며 그 나라의 도래를 확인하고 확신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맥락을 같이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살펴본 것처럼 이미 이루어졌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그 뜻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실 텐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C. S. Lewis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종류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너희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방치해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저주하시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자기를 마음대로 살게 놔두는 것입니다. <롬1:24>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1:28-32>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간혹 어느 순간 그 자식을 포기 할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학교 안가고 매일 오락실이나 가고 놀러나 다니는 자식을 처음에는 야단도 치고 매를 대기도 하다가, 하다하다 정 안되면 나중에 나오는 소리가 “네 마음대로 해,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큰일 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의 설교 때 소리 지른다고 뒤에서 소곤대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너무 과격하게 닦달을 한다고 불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에게 목자의 권고는 양약입니다. 목회자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저음으로 깔리면서 농담처럼 유머스럽게 “인생이 다 그런 거지요 뭐, 착하게 잘 먹고 잘살다 가세요, 그리고 목사 월급이나 밀리지 말고 잘 주세요.” 그러면 교회는 끝장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못 살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치면 목자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모두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못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애가 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맘대로 살아, 네가 원하는 것 다 이루면서 살아!” 그렇게 놔두신다면 죄인이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죄만 짓다가 모두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Thy will be done(Your will be done”이지 “My will be done”이 아닙니다. 그 좋은 본보기를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이 잔이 내게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요? “그 잔을 내게서 멀리하옵소서.”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요? “너의 뜻을 접고 나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라, 나의 왕국을 이루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삶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십자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생명까지도 내려놓고 기쁘게 그 뜻에 따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의 것을 영위하고 누리는 데 있지 이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애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우리 믿음의 승리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나님 한 분만 붙들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놓는 최종 순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잡기 위해 내려놓는 것을 신자의 죽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매일 매일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 우리의 목숨을 놓아야 할 때 아쉬움 없이 기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116:15> 15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우리가 정말 천국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 곳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곳이 더 좋습니까? 이곳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을 다 놓고 기쁘게 갈 수 있을 만큼 그 하나님 나라를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반드시 임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도 이미 이루어졌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그 나라를, 그 뜻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세상의 공격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자들이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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