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Q&A

예수? 성령?

Hebrew 2023. 3. 24. 22:11

안녕하세요...

모두들 잘 계신가요?

목사님께 직접 멜을 보내려하다가 이곳에서 쓴 글이 혹 다른이에게도 은혜가 되지 않을까 하여 용기를 내 봅니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는데 왜 육신을 입고 오셔야 했냐면 간단히 말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성령을 주러 오셨다고 얘기합니다..

마3:11에 요한이 예수님이 성령침례를 주실 거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한번도 침례를 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을 주사 우리 속에 보혜사로 오시기 위해서 성육신 하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게 아니라고...

도대체 예수님은 왜 오신겁니까...ㅜ.ㅜ

 

 

그리고 여기선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늘 항상 십자가의 피를 부인하는데... 죄인이란 얘기도 늘 선악과로만 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유월절과 십자가를 저를 같은 것으로 보는데...

여기선 유월절의 피로 인한 구원은 맞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은 없고, 단지 죄사함만 있다고 하네요...

즉 구약에서는 죄사함이 구원이지만, 신약에서는 구원 받으면 죄사함은 저절로 받는게 된다고...

구원은 의인이 되면 되는데 의인은 성령이 내 안에 실체로 들어오시면 된다고...

근거로 구약의 유월절인 성찬식을 보면 구약은 피를 바르고 떡을 먹는데 신약에 와서는 

(눅22:17-22) 잔-떡-잔의 순서랍니다. 그런데 뒤에 잔은 앞의 잔을 무효라는 강조의 의미이기 때문에 신약은 떡이 먼저고 잔이 나중이랍니다.

즉 떡을 먹는 다는 의미는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의미로 피, 즉 죄사함은 나중이랍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놀라움 반 미칠지경 반 입니다....ㅡ.ㅡ

구약은 신약(예수)의 그림자가 아닌가요? 

십자가는 죄사함과 구원이요, 세례는 부활과 구원을 의미하는게 아닌가요?

 

 

이곳에서는 영이 실체로 나타난 모습은 부활이 증명한다고 합니다...

맞죠...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으니까...

그런데 그 부활의 모습이 다른 모습(막16:12)이라고 합니다...

이는 믿는 사람은 그로 하여금 영의 실체로 성령을 받게 함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눅24:30-31에서 같은 모습이었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알아봤을 거라고...

전 솔직히 부활 후의 모습에 대해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의 모습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요?

 

물어볼 것이 너무 많은데 태평스럽게 신랑은 '고만 자'라고 하네요...

제가 기초가 없어 이렇게 흔들리나 봅니다...

점점점 바보가 되어가는지...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저의 짐을 좀 덜고 갑니다...

 

답글

장하여 자매님 질문해 주셔서 저에게 큰 숙제를 안겨준 것 같은 부담(?)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해야 될 것 같네요.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에 질의하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빠른 답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또한 참으로 어려운(?) 교회에 본의 아니게 다니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날씨가 더워서 저도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으로 살다보니 의문을 가진 것에 대하여 제대로 답변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의껏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영자매님의 질문은 3가지로 제가 파악하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오신 목적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구원과 죄 사함에 대한 문제이며, 셋째는 예수님의 부활체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그 교회에서는 성령을 주러 오셨다고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하영자매님은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오셨고,
그 언약 성취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일하심이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창조의 상태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부패된 상태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하시는 것인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으로만 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고 요한계시록에서
그 백성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계 21:22-23, 22:1-5).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으로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본다면 두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먼저는 예수님과 성령을 철저히 분리시켜서 전혀 다른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심은 철두철미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온전히 완성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7에서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령님과 예수님을 분리하여 전혀 다른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요한복음 14:13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6절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예수님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분을 보내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오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령님을 이 땅의 자기 백성들에게 내주(來住)하시도록 하시겠다는 것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독자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만 사역하시게 되는 것입니다(요 14:26, 15:26, 16:13-15).
이처럼 성령님의 사역은 철저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고,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본질적으로 드러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 사도의 고백을 다시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참고 고전 1:22-24, 2:1-2, 갈 6: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성령의 오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고 더 강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꾸 약화시키고
무력화시켜서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성령의 세례(침례) 안에 적당하게 희석시키려는 마귀의 궤계가 확실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목적으로 보게 되면 신앙의 목적도 성령 세례를 향해 있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 결국 교회의 세례를 강조하게 되지 않을까요?
세례가 목적이 된다면 교인들을 자연스럽게 교회로 끌어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십자가를 무시하고 우리의 노력과 신앙적 공로를 구원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무시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지 않아도 상관이 없게 되겠지요.
자신이 죽지 않는 십자가라면 우리는 마음껏 우리의 노력과 신앙적 행위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구원과 죄 사함에 관한 문제로 파악하였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다르게 본다는 발상 자체가 벌써 성경이 하나의 언약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리시켜놓고 보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약과 신약으로 분리시켜 놓아야 구약과 신약의 일직선상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불일치하고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미리 적당하게 얼버무릴 수 있는 미봉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구약은 유월절 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미리 언약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유월절 피라는 것을 통해 설명하셨던 것이지요.

죄사함과 구원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고 또한 구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때 죄 사함과 구원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두 가지 면으로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17-22의 말씀에서 잔-떡-잔의 순서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첫 번째 잔은 유월절 성취의 잔입니다.
더 이상 유월절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의 잔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잔을 주시기 전과 후에 동일한 말씀으로 강조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고 하셨고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이 땅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포도주잔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떡은 예수님의 몸(살)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은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입니다(눅 22:19-20). 이런 점에서 성도가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자신을 포함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다는 뜻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참고 롬 6:3-4).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님과 더불어 연합되어 심판 받는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살았다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란 어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이요, 재생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십자가 죽음 자체가 죄가 없는 분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는 대속의 죽음이었기에
부활이라는 것도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사건입니다.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에 부활은 대속의 죽음을 극복한 부활, 즉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본다 못알아본다, 혹은 부활체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또는 부활체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닐 수 있는 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논쟁해야 할 사안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으로 물질적인 것에 한정시켜서 논쟁하고 연구해야 할 대목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가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계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어 죄사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고전 15:20-23).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하영자매님의 글을 함께 읽고 고민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에 따른 일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자기 행위와 노력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귀중한 진리로 믿지 못하도록 하며, 십자가를 중요하지 않는 것이나 진리가 아닌 것으로 중화시키는 마귀의 노력은 성경을 가지고 도전해 온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하영자매님의 글로 인하여 막무가내로 놀고 있는 저로 하여금 공부시키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