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4)
4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 부분이 시편 51편 4절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입니다. 물론 70인 역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시51:4)
4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여기에서 시편 51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다윗의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잠자리를 하여 임신을 시키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교살한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듣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듣고 쓴 시편이 51편입니다. 그 시편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하 12장의 몇 구절을 읽고 가겠습니다.
(삼하12:10~13)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바로 이때에 다윗이 쓴 시가 시편 51편인 것입니다. 사실 고대시대에는 왕이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이 흠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단이 그렇게까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도 못 알아들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단을 통하여 자기에게 떨어진 저주가 너무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이 속으로 ‘이건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내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경건하게 산 삶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흠은 이스라엘의 왕의 신분을 감안해서라도 눈 좀 감아주시면 안되나?’하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하나님만이 의로우십니다.’ 내 생각은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내 이성이나 내 논리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를 떠나 무조건 옳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그 시편 51편 4절의 내용이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인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옳고 의로우며 순전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에 초점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한 오늘 본문 4절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판단을 받으실 때에 항상 주께서 이기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라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건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바꾸어 인용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용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우슬초와 꺾으신 뼈, 즉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을 의지하게 하셨던 것처럼, 율법과 할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폭로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이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모두 그 안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느냐? 차라리 미리 말려 주시던가, 아니면 미리 경고를 해 주시던가 하시지 왜 불의와 죄를 저지르게 해 놓고 그 때에서야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덮으시는가?’ 그런 질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옳고 하나님의 방법이 늘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 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이런 질문이 들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참되심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사람의 불의와 죄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불의와 죄를 심판하실 수 있는가?’ 그게 본문 5절과 7절입니다.
(롬3:5,7)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게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억지인 것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괄호로 묶어서 분명하게 표기를 합니다. 자기 의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의와 죄로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그러니까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라는 결론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막 살아도 되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자체로 시작과 끝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로이드존스나 싱클레어 퍼거슨 같은 사람들이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라는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설교자는 복음을 모르는 설교자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체험한 이들은 삶 속에서 그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논리로는 그 은혜의 복음에 동의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지만 삶 속에서는 아주 처절한 고민과 고뇌를 통과하며 예수의 삶의 궤적을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래 막 살고 싶어 했던 자들이 자기의 체면과 가치와 위상에만 관심을 둔 종교놀이에 빠져서 근사하게 선행과 열심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이야기하면 ‘이게 웬 떡이냐’하면서 방종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 위상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방종한 삶을 살면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그 불안함을 유발시킨 방종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를 시키게 되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를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은 자기들이 개판으로 살아놓고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 성을 설교한 교사나 설교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왜 경건한 삶 살기’에 대해 강조를 하지 않느냐고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주변에서 ‘왜 우리 교회에서는 십자가만 이야기 하고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가치 없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볼 멘 소리를 하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던가요? 정말 여러분이 본받을 만한 경건한 삶을 멋지게 살고 있던가요? 마치 담배가 너무 좋아서 담배를 못 끊은 사람이 여전히 담배를 즐기면서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며 ‘당신이 담배를 끊는 것이 선이라고 말을 해 주지 않아서 내가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 아니냐? 내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는 건 자기들이 개판으로 살아놓고 왜 나에게 똑바로 살라고 안 가르치냐고 항의를 한다니까요. 그건 원래 그렇게 살기 싫었던 사람들의 자기변명인 것입니다.
성령이 살게 한 이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성령이 이끄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가 아닌 아담들의 열매,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열심히 만들어 입던 자들은 원래 하기 싫던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즉시 방종의 삶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엉뚱한 사람들에게 전가해 버린단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가르쳐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들이 심판받고 정죄 받게 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8절입니다.
(롬3:8)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김성수 목사 로마서 35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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