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57 예수의 표상인 아담

Hebrew 2023. 6. 1. 09:32

로마서 57번 말씀

로마서 5장 12- 15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이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니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에서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구절에 당도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 3장 앞부분이 로마서에서 가장 어렵고 난해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부분이 로마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핵심적이면서도 난해한 구정인 거 같아요. 왜냐하면,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요 창세기서부터 시작해서 4 복음서를 거쳐서 요한계시록까지 분명한 구조파악이 선행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적 분류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의 정의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지 않으면 결코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요 원죄 문제나 창조의 이야기, 마귀의 실체, 율법의 문제, 그리스도 예수로 완료되는 구원의 이야기 등등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 모두가 들어있어요.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거든요.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절대 이 구절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그 전체를 아우르는 개괄적 기초, 개괄적 설명을 해드리고 다음 주부터 구체적 내용 설명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되는데 오늘부터 설명하는 건 다 숙지하셔야 돼요. 굉장히 중요해요, 그만큼.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면요. 말미암아란 단어가 많이 나오죠. 말미암아. 그 안에는 헬라어 ‘디아’라는 전치사를 번역한 단어인데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 말미암아, 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 라는 단어 뒤에 나오는 단어들이 전부 소유격이에요. 헬라어 문법상 전치사 ‘디아’ 다음에 역격이나 대격이 오면 또 나 바이의 의미로 해석되지만, 소유격이 오면요. 방법과 수단, 도구의 의미를 가져요. 그러니까 ‘디아’ 라는 전치사 다음에 소유격이 오게 되면 그 소유격의 단어들이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주체에 의해 사용되는 피동적 개체, 방법, 수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디아라는 전치사 다음에 소유격으로 오는 단어들이 한 사람, 아담입니다. 아담이 사람이란 뜻이거든요. 한 사람, 죄, 범죄, 많은 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이게 디아 다음에 전부 소유격으로 붙어 있어요. 역격이나 대격이 아니라. 그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법적 장치인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세상에 들여온 아담이나 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지배하게 된 죄나 그걸 해결하러 오신 또 다른 한 사람, 인자, 그 사람의 그 아들이란 뜻이거든요. 그 인자 예수 그리스도나 모두 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뜻이에요. 예수까지도. 역사 속 예수. 그리스도 말고요. 예수까지도.

그걸 성경에서 표, 혹은 표상, 혹은 형상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중요한 건 그 목록 안에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건데요. 아담이나 역사적 예수도 하나님에 의해 설명용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된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신성을 한 번도 안 쓴 거예요. 못 쓴 거예요. 도구요 방법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 말은 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이나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사건이나 모두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작정 속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의미인 거예요. 왜냐하면, 뭔가가 설명되는 도구로 사용됐다 라는 건 이미 완료된 어떤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계획이 먼저 세워지고, 실체가 먼저 완료되고 그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배우들이 선정된 그런 형국인 거예요. 그래서 ‘디아’ 다음에 소유격들이 다 붙어 있는 거예요. 이건 방법이요, 도구요, 수단이라는 것이죠. 설명용 도구라는 것이죠. 그죠?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이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는 내용이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도대체, 어떻게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둔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을 표상하는 분인지 이해가 잘 안 가죠? 개혁 신학자들은 그것을 그냥 예수가 성도들을 대표하여 십자가를 진 것처럼 아담도 인류의 대표로 죄를 지은, 그 대표성의 유사, 정도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그건 좀 가난한 이해죠? 그 표상이란 단어는 그러한 유사, 정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에요.

각기 다른 인물이 정확히 같은 일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게 표상이에요. 서둘러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담에게서 그림자로 보였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확하게 완성이 되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표상이에요. 아담이 저지른 죄를 무작정 예수님이 와서 해결해 준 게 아니란 말에요. 둘은 유사성을 갖고 있고 같은 역할을 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첫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레쉬트’, ‘베레쉬트’ 예요. 이 베레쉬트’ 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시간의 시작, 혹은 어떤 장소의 처음, 머리, 이런 뜻이거든요. 성경은 원래 현대 히브리 문법이 생겨나기 이전에 그 히브리 알파벳이 가진 그 히브리 원 의로 조합된 단어들로 기록이 된 거예요.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이해 못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을 하나 하나 이렇게 파자해보는 것도 중요해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지금의 현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원 시나이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고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현대 히브리어로만은 그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할 수가 없단 말에요. 그 ‘베레쉬트’라는 단어를 파자해보면요, 자음, 베이트, 두 번째 단어거든요. ‘베이트’, 이게 성전이란 뜻이에요. 집, 성전, ‘레쉬’ 는 머리, 시작, ‘알렢’, 하나님, 사람, 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쉰’, 이건 되새김, 분석, 이거거든요. 그리고 ‘요드’, 수요일에 말씀드렸죠? 점, 편 손, ‘타우’ 완성의 표, 이런 뜻이고. 이게 합성어예요. ‘베레쉬트’ 예요.

즉 ‘베레쉬트’ 라는 건 성전의 시작, 성전의 머리, 성전의 실체인 하나님을 잘 분석하고 설명하므로 해서 시간 안의 존재들에게 넘겨주다, 가 ‘베레쉬트’ 예요. 그러니까 시작, 시간의 시작, 시간이라는 것, 역사라는 것 자체가 묵시를 잘 분석하고 설명하여 유한의 존재들에게 선을 펴 넘겨 주는 것,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베레쉬트’ 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성경이. 성경뿐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설명하는 거다, 라는 뜻이에요. 뭔가를, 완료된 뭔가를 유한의 존재들에게 잘 이해시켜 손을 펴 넘겨주는 것, 복음을 전한다, 할 때 그 단어를 쓰죠? 넘겨주는 것, 이게 역사이며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그냥 소리 내어 읽어서 ‘베레쉬트’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은 한마디로 하늘의 그 영원과 하늘의 참 성전,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그 표, 모형으로서의 한시적 현상계, 라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라는 한 단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란 말에요. 쉽게 말해 성경의 첫 단어는 내가 지금부터 현상계의 것들로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라는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모세가 십계명을 무슨 글자로 받았겠어요? 애굽어로 받았죠. 그 사람들이 히브리어 다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성전 짓고 뭐한 거 전부 애굽 것들로 지은 거예요. 이 현상계의 것들로 내가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가 베레쉬트’ 에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는 바로 하늘을,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란 말입니다. 이 ‘베레쉬트’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바꾸면 ‘엔아르케’ , 이게 요한복음의 첫 단어예요. 이것도 태초에, 라고 개역 성경에 번역을 해놨는데. 그 ‘엔아르케’라는 헬라어의 첫 단어, ‘엔’ 이라는 전치사는 그 히브리어 불분리 접두전치사, ‘베’를 그대로 가져와서 헬라어로 옮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좀 전에 ‘벧’ 이라는 히브리어 두 번째 단어가 성전, 집, 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랬죠? 고대 히브리어로 넘어가면 그래요. 그리고 아르케, 시작,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레시트에요, 시작. 그런데 그 레시트의 어원이 로쉬, 머리란 말에요. 머리. 그러니까 베읻 이라는 성전 안에 머리가 놓인 모습,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걸 내가 설명해줄게, 그래서 ‘엔아르케’로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베레쉬트, 똑같은 의미란 말에요.

그 성전 안에 머리가 놓인 것, 이게 뭐예요? 교회죠. 참 성전 안에 머리이신 예수가 놓인 것, 그리스도가 들어온 걸 ‘교회’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내가 머리 둘 곳 없다 고 한 건 맞는 소리죠, 그죠? 십자가 이후에 성전이 되어 예수를 담을 수 있는 교회가 창조되니까 십자가 이전에는 머리 둘 곳이 있으면 안돼요. 그건 단순히 예수님이 난 의지할 곳이 없다, 나는 집도 절도 없다, 이런 의미로 쓴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구약 성경의 첫 단어인 히브리어 베레쉬트를 그대로 옮겨다가 헬라어로 표기 한 것이 엔아르케고 그 둘의 의미를 종합해볼 때 성경 전체와 이 역사는 무한의 하나님께서 유한의 피조물에 묵시를 설명해주시는, 그 참 성전 안에 그리스도, 이 성령이죠, 그리스도,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나로 연합이 되는 묵시 속 교회, 이게 하나님 나라이고 이게 성전이며 이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니까.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이게 어떻게 하늘에 완료 됐는지 이 애굽의 것, 세상의 현상으로 내가 설명해 볼게,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참 성전이 되는 그 묵시 속 교회의 실체를 설명하는 설명서가 성경이고 이 역사 또한 그 말씀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요, 한시적 무대에 불과하다는 걸 그 단어들이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이나 하와 나 뱀이나 죄나, 선악과나 생명나무, 이 역사 속 예수 등은 모두 그 베레쉬트, 묵시를 현상계의 것으로 설명하여 넘겨주는, 베레쉬트 하기 위한 도구요 방법이요 수단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아’라는 전치사 뒤에 그 모든 단어를 소유격으로 갖다가 붙여 놓은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을 천재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모두 실체가 아니라 모형들이라는 거예요. 역사 속 예수, 마리아의 아들 예수까지도. 하늘의 것, 실체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것, 모형의 불가능함과 한계가 증명되고 증거가 돼야 해요. 설명한 다음에 이거는 아니다, 실체가 아니다, 를 증명하려면 요게 소멸하여야 한단 말이어요. 그래서 모형은 다 죽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도 죽은 거예요. 그래야 실체가 설명되고 그 실체의 가치가 입증돼요. 그래서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이 다 죽어요. 다 죽는 거예요. 모형이니까. 역사 속의 모든 것이 다 죽어요. 다 사라진단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 예수도 죽고, 죄도 죽고, 율법도 죽고, 요런 단어들이 성경에 나오는 거예요. 다 죽는 거예요. 모형이기 때문에.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만 남는다는 거예요. 아가페, 은혜, 영광, 하나님만 남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성경이란 말에요. 후자를 위해서 전자가 수단과 방법과 도구로 사용되어 그 설명을 다 마친 후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 어려운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대하는 그 패러다임의 전화만 되어 있으면 절대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께 제가 노파심에서 한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는 측면에서 이 설교는, 말씀을 대언 하는 게 설교잖아요. 설교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돼요. 그렇죠?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택한 자들, 너희와 저희로 나눈단 말에요.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의 택한 자들, 너희에게만 그 비밀을 열어 두었다 그러죠? 저희에게는 허락이 안 됐다, 그래요. 못 알아듣는다는 거죠.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면서도 말씀 전해! 복음 전해! 그래 놓고 귀, 막아라. 그런 거거든요. 열어서 설득시켜 그러지 않았어요. 막아라! 그랬다니까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귀가 먹는 거예요. 왜?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귀를 막아라 . 그런 거예요. 열어라,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못 알아들어야 해요. 하나님의 백성만 알아들어야 해요. 그런데 오늘날 인기 있는 설교라는 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건 보편, 인간 보편이 다 수긍하고, 추구하는 선한 사람 되기, 도덕과 윤리의 준수, 사회에 좋은 영향력 미치는 사람 되기, 착한 일 많이 하기, 성도다운 사람 되기, 마음 다스리기, 등등. 모든 설교가 이 적용으로 끝나잖아요? 그런 좋은 것, 보편적 인간들이 합의한 좋은 것에 대한 거죠? 그게 인기 있는 설교예요. 그리고 건강한 설교라고 하잖아요. 그런 설교는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한 편 듣고 나면 결연한 결심도 하게 되고 의지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감동 받아 눈물도 흘려요. 누가 누가 이렇게 이렇게 살았대요, 그러면. 그런데 그런 설교를 절에 가서 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 이야기만 쏙 빼고 똑같은 내용을 절에 가서 하면? 똑같이 감동 받습니다. 똑같이 눈물 흘리고.

성경은 그걸 설교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절에 가서 설교 했는데, 불교대학원에 가서 설교 했는데 스님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은 못 알아듣는다, 그러는데 중들은 알아듣고 일어나서 기립박수 치면 누가 맞는 거냐고요? 여러분이 복음 전한다, 간증한다, 라고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한테 얘기했을 때 그들이 감동 받으면 여러분이 가짜인 거예요. 못 알아들어야 해요. 그래서 어려운 게 맞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작금의 기독교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되어서 그 종교들이 동일하게 추구하는 어떤 동일한 것, 그런 걸 가르치고 행하려고 하는 그냥 잡교가 된 거죠.

설교는 묵시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하고, 십자가와 은혜와 피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돼요. 그래야 세상이 못 알아들어요. 그래야 중들이 못 알아듣는다니까요. 절에 가서 예수, 십자가, 피, 은혜 이런 거 이야기해 보세요. 어떻게 그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칩니까? 그렇게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는 예수 이야기, 하나님 아들 이야기, 은혜 이야기, 그 안에 말씀이 들어 있는 자, 아들 받은 자, 그들만 이해해요. 제가 지금 한국말로 이야기하는데 여러분이 이해하죠? 그건 여러분 안에 한국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설교해보세요. 할 수도 없지만. 못 알아듣죠? 여러분 안에 그 말이 없어서 그래요. 마찬가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아들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요. 그런데 그게 없으니까. 말씀이 내 안에 없으니까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어렵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중들이 하는 설법 같은 거 마음을 잘 다스리고, 평상심을 유지하고, 중용의 도를 닦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그럼 다 알아들어요. 설교 아니니까.

그렇게 이 아들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설교가 떨어지면 어렵고 지루하고 생경하죠. 그런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외칠 거예요. 세상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줘. 어떻게 살아야 가치와 보람을 챙길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향기가 되어 이 세상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며 사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조금이라도 환란을 피해서 살 수 있는지 그런 말을 좀 해줘. 속으로 그런다고요. 중들도 할 수 있는 거. 가까운 절에 가세요. 거기 가면 옛날 고전 같은 거 예로 들어서 더 깊이 훌륭하게 설법해 주니까 가까운 절에 가시라니까요. 그런 말 들으시려면. 설교는 보이지 않은 묵시, 보이지 않는 무한의 하나님을 설명하여 ‘베레쉬트’, 넘겨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또 이웃에게 넘겨주는 거. 삶으로 입으로.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의 정의. 그러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말씀을 받은 자인가 고민해보시라고요. 그럼 이제 전부 알아듣는 척 하겠지. 이제?

아무튼, 이 역사와 시간과 공간은 전부 하늘의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수단이요, 표예요. 그래서 그 모형의 역할을 마치면 장렬히 산화해줘야 해요. 그래야 원형의 가치가 증명돼고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모형 비행기가 비행기를 설명할 수 있지만, 비행기를 대신할 수 없어요. 그거 타고 태평양 못 건너간단 말입니다. 모형 비행기는 진짜 비행기를 설명한 후 그 진짜 비행기 앞에서 쇠해져야 해요. 원형이 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효함과 불가능함을 폭로 당해야 진짜 비행기의 가치가 입증된단 말에요. 그래서 예수도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그러면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건 목적을 갖고 계신다, 는 뜻이죠? 목적도 없이 마구 장난치는 건 아닐 거 아녜요. 그런데 그 목적이 뭐라 그래요. 성경이? 역사의 목적지. 멸망.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아니라 멸망이라니까요. 역사를 축약하면 여러분의 인생, 그게 끝인 거예요. 목적지가. 멸망. 그래서 다 죽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7절 보세요.

벧후 3 :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곳이라

그죠?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잠깐 보존해두는 게 역사이며 인생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죽는 순간 심판인 거예요. 심판의 날이에요. 그때가. 영원에 들어가면 차서나 기다림이 없으니까. 바로 심판이에요. 무덤 속에서 기다리고 이런 거 없어요. 계시록 6장 14절.

계 6 : 14—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며

보세요. 이 역사와 우주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실체가 오게 되면 옛 하늘과 옛 땅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올라간다 그래요. 떠나간다 그래요. 형상화 시켜 그려보세요. 역사가 멸망으로 끝날 때 이게 종이 축 말리는 것처럼 말려 올라간다는 건 묵시 속으로 이 역사가 함몰되는 거죠? 그러면 이 묵시를 쭉 펼친 게 뭐란 뜻이에요? 역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는 묵시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말려 올라가서 묵시에 함몰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우발적일 수가 없어요. 왜? 묵시를 쭉 펼친 거니까. 완료된 어떤 걸 펼친 거니까. 그래야 다시 말려 올라간단 말이어요. 그러니까 우발적인 게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요. 모든 게 계획 속에서 진행되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자, 이 역사가 창조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보자고요. 에베소서 1장 4절 보세요.

엡 1 : 4—곧 창세 전에 이 역사와 인생 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미 창세 전에 우리라는 무리가 있어요. 정해진 무리가 있단 말에요. 우리.)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언제? 창세 전에. ‘베레쉬트’ , ‘엔아르케’.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라는 건 너라는 대상이 삭제된 거예요. 나, 나, 나, 나 가 모여야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 ‘우리’ 안에 ‘너’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각자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나라는 주체를 차압당해요. 그래야 ‘우리’가 돼요. 그걸 일체라 그러고 연합이라고 그러거든요. 그죠? 자, ‘우리’가 있어요. 그 ‘우리’를 예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과거완료예요. 만드셨다, 그래요. 아들이 됐어요. 언제? 베레쉬트 이전에. 아들이 됐어요.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분의 피로 구속함을 입어 아들들이 되었다. 그래요. 이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런데 창세 전에, 베레쉬트 이전에 이 일이 일어났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야기이겠느냐고요. 이게? 지금 역사 속에서 일어난 그건 모형이란 얘기예요, 그러니까. 묵시 속에 이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 전체에 기록된 복음의 이야기와 에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이 모든 역사의 내용이 이미 하늘에서 완료되어있는 거란 말이잖아요. 그래야 ‘베레쉬트’가 되죠. 설명을 해주죠. 완료돼있는 게 있어야.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린 양이 창세 전에 이미 죽었다, 그러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죽은 게 실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설명용일 뿐이지 창세 전에 이미 죽었다, 그래요. 계시록 13장8절 보세요.

계 13: 8 –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 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 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더라

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란 어구가 헬라어로 보면 ‘투 아렌니오 투 에스파피메누 아포카타 볼레스 커스므’. 직역하면 세상에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책. 세상이 생기기 전에 도대체 어린 양이 어떻게 죽느냐는 말에요. 십자가는 이미 묵시 속에 먼저 섰다, 이런 말이잖아요. 이거요? 어떤 방법으로 섰을까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에베소서 1장에서. 묵시 속에서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걸까요? 그리고 묵시 속에 성자는, 어린 양은 육신을 입고 역사에 내려오기 전이기 때문에 영이란 말에요. 하나님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피가 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죽습니까? 하나님이 영인데 무슨 피를 흘리느냐고요, 창세 전에. 어디서? 그리고 거기에 이미 창세 전에 죄라는 개념이 나와요. 역사가 생기기도 전에, 아담이 태어나기도 전에 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어린 양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 죄는 뭐냐는 말이에요. 도대체? 피조물이 생기기도 전에 하늘에 있었던 그 죄라는 개념은 뭐길래 어린 양이 거기서 십자가를 이미지고 죽었다고 하느냐고요. ‘베레쉬트’ 이전에.

우리가 죄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죄가 시작된 거고 발출된 거라고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베레쉬트’, ‘엔아르케’ 이전에 죄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어린 양이 죽었대요. 십자가를 졌대요. 하나, 하나 한 번 풀어 보자고요.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왔다. 그래요. 그건 원죄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임과 동시에 대표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자주 쓰이는 구절이죠? 개혁신학은 거기에서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전가된 거다, 이렇게 주장해요. 그래서 우리가 원죄, Original Sin을 가진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에요. 그 교리에 의하면 죄는 아담에 의해서 창조된 것처럼 보이죠?

어찌 됐던 거기서 시작됐으면 그가 창조자예요. 피조물은 죄도 창조 못 해요.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죄라는 건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아담을 도구로, 한사람 아담을 도구로 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래요. 어디에 있다가 들어온 거란 말에요. 시작됐다고 하지 않는단 말에요. 어디에 있다가 들어왔다 그런단 말에요. 아담이 도구가 돼서, 어떠한 사건을 저지르므로 해서 이미 있었던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준비된 그것이 슬그머니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건 이미 의도가 되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아담을 도구로, ’ 디 엔노스 안트로푸’,라고 기록을 한 거예요. 그냥 아담은 통로였을 뿐이에요. 누군가가 죄를 집어넣어야 되는데 통로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이 도구로, 통로로 사용된 거예요. 그냥 아담만 죽일 놈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담은 그냥 통로로 사용된 거예요. 그러니까 바꾸어 말해서 그들, 피조물이 죄를 창조해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뭔가 설명하시기 위해 준비해 둔 어떤 개념이에 요. 죄라는 건. 하나님은 아담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의도적으로 죄를 세상에 풀어버린 거예요. 왜요? 바로 다음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사망의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죄가 들어왔다, 그래요. 오늘 본문이, 보세요. 12 절 다시 보세요.

롬5 : 12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역시 디아,예요, 죄도 도구예요, 지금)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이르다, ‘디엘코마이’는 삼투, 확 빨려 들어와 뚫고 지나간 거, 죽은 거예요. 죽여버린 거예요. 사망이. 모든 존재를. 그런 뜻이에요. 그걸 위해, 죽은 자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죄와 아담을 도구로 사용했다, 가 12절이에요. 그럼 왜 죽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세요. 왜 죽여야 돼요? 그럼 금방 이런 질문을 할 거예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공부한 분들은, 그럼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인가요? 유아적 질문이에요. 여러분 죄라는 건 하나님, 창조주에게 해당이 안 되는 말이예요.

창조주가 뜻을 두고 행하는 건 모든 게 선이에요. 그걸 인간이 선악과 따 먹고 자기들의 선악 구조,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에 의해, 요건 죈데, 요건 아닌데 이렇게 하나님까지도 판단하는 게 이 세상이에요. 지금. 누가 그걸 죄라 그랬느냐고요. 아니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왜 씻어야 돼요? 더러워서? 더러우면 안 돼요? 그런데 그걸 누가 더럽다고 그랬습니까? 그리고 모든 인류는 왜 물로 씻어요? 그거를.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결정돼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선악 구조로 하나님을, 죄라는 것을 판단하기 시작하면요, 사무엘에게 너, 가서 거짓말해, 라고 하신 하나님은 죄인이예요. 너희,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기까지 다 죽여, 교살이에요. 살인교사. 죄인이예요, 하나님은. 라합에게, 너 나라 팔아, 죄인이죠. 역적이죠, 그건. 하나님이 다 시킨 거 아녜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죄와 관계없는 분이라고 해요. 점도 없고 흠도 없다, 그래요. 하나님이 하시는 건 모두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에요. 따라서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 조장했다, 이건 죄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자들의 질문이에요. 뭐가 죈데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 그래요. 그들의 머릿속에는 죄가 고작해야 도둑질, 간음, 살인, 험담. 이딴 거.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 이딴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무 착해서 죄와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게 선이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을 도구로 해서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신 하나님의 처사는 죄의 조성이 아니라 선이란 말입니다. 죄라는 건 피조물에만 해당하는 개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모든 사유와 행위가 다 죄에요.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난 거니까. 그게 죄란 말에요. 그래서 선악과 먹지 마, 라고 했을 때 그걸 어긴 걸 죄라고 하는 거지 그까짖 거 먹은 게 뭐 그렇게 대단히 하나님에게 손해가 돼서 그걸 갖다가 죽이기까지 하겠느냐고요.

그게 죄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뭔가 창세 전 언약, 묵시 속에서 일어난 그것, 이미 일어난 그것,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베레쉬트’, ‘엔 아르케’ 하기 위해 아담을 도구로 하여 세상을 죄 속에, 하나님이 가두어 버린 거예요. 제 말이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3장 29절 보세요.

갈 3 : 29--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표준새번역으로 보세요.

갈 3: 29--그러나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려고

인간들을 모두 죽은 자로 만들어서 믿음으로만 산다, 이걸 가르쳐 주기 위해 모든 자를 사망 안에 가둬버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래서 죄가 필요했다는 거예요. 아담이 필요했던 거예요, 도구로.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이나 뱀의 출현 등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가장 보기 쉬운 동산 중앙에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어 심어 놓은 거예요. 먹으라고. 그 좋은 생명나무는? 어디에다가 감춰 두었는지 일언반구 얘기도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열매가 맺혀있다는 말조차 없어요.

선악과는 열매가 맺혀있어요, 이미. 생명나무에는 실과라는 단어가 없다니까요. 왜? 그리스도가 실과이니까. 에덴에서 그게 맺혀있으면 안 돼는 거예요. 그래야 완전한 하나님이죠. 자기가 추측도 못 하고 예측도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걸 서둘러 막는 분이 완전한 하나님입니까? 그건 하나님을 불완전한, 미완료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걸 전지 전능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건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의해 착착 진행되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건 단순히, 하나님도 예측하지 못했던 죄가 세상에 들어와 버려서 그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서 그 죄를 없이 하려고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죄를 없애버린 그런 신파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전부 Passion of Christ 이딴 거나 보고 그냥 줄줄 울고, 다 신파로 봐서 그래요. 복음을 신파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예수님보다 더 아프게 죽은 사람 더 많아요. 이 세상에. 그게 그렇게 슬프고 애통한 일이냐고요. 어린 양은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했고 그 피에 의해 아들들이 묵시 속에 완료되어있어요.

자, 그렇다면 묵시 속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아들들이 완성되었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요? 성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영원이에요. 시간 속도 아니dp요. 영원,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무슨 일을 벌이신 거예요. 성자 하나님이 교회의 머리, 아들들의 맏형이 되셨죠? 아들들의 맏형이 되셨어요. 어디에서? 묵시 속에서요. 그런데 그 맏형의 동생들은 신이 아니에요. 피조물들이에요. 그래서 그 아들들이 신과 함께 나라를 이루어 신처럼 살기 위해서는 (거기가 묵시 속 영원이니까) 신과 피조물의 연합이 필요하죠? 그래야 같이 동거가 가능하단 말에요.

신과 피조물은 동거할 수 없어요. 돌격하여 신축해 죽여야 하는 거예요. 그게 거룩의 개념이란 말입니다. 동거가 안된단 말에요. 못 들어가는 거예요, 지성소에. 그런데 성자가 아들들의 맏형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교회라 그런단 말에요. 성경이. 그러면 이 둘이, 무한과 유한이 함께 공존하고 동거하기 위해선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해요? 유한 쪽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죠? 그렇잖아요, 없음인데 뭘 해요, 얘들이요. 피조물이. 그러면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돼 들어와야,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하셔야 이 피조물, 없음이 무한인 신과 공존하고 동거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는 말에요.

그런데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해 들어가면 잃어버리는 게 있어요. 무소 부재와 편재가 안 된단 말에요. 이게 신의 죽음입니다. 이게 성자의 피란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 성자가 육신을 입고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모형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묵시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들, 성전이 되어있다, 는 뜻이에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자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아들들의 맏이로 무소 부재와 편재를 상실한 육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신 거예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의 불가능한 처음 자리. 없음의 자리,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죄예요.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밖의 모든 건 다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은 것이, 죽음이라는 게 뭣 때문에 온다? 죄 때문에 온다 그러죠?

그러니까 생명 밖의 모든 건 죽은 거라는 건 그게 죄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외의 모든 게 악이면 죄예요. 그런데 그 죄를, 그 죽음, 없음을 생명으로 해결하기 위해 성자가 유한 안으로 관입돼 들어가 성령으로 그들과 연합되는 거, 이게 하나님 나라, 교회의 탄생이기 때문에 성자가 피를 흘렸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의 수준으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로 인해 없음에 불과한 먼지들이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있음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아들을, 빛을, 성령을 품은 새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 무한의 창조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아담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그 첫 번째 아담이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는 통로 역할을 하므로 해서 묵시의 설명이 시작되는 거예요. 다 죽은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이 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부르는지 한번 생각해보시라고요. 아담은 죄인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표상이기도 하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잘 알아야 성경 전체가 일관성 있게 이해가 가게 돼요. 아담은 하나님께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는 데에 도구로 쓰인 사람이죠? 아담이 없으면 여자는 없어요. 왜? 아담의 갈비뼈가 꼭 필요하거든요. 여자, 교회가 탄생하는 데에 어떤 남자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다고 그래놓고 그걸 단수로 ‘사람’, 그러니까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건 둘이 객체로, 따로 존재하면 안 돼요.

그래서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사람의 내용이다,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하나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 보세요.

고 후 4 : 4—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미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죠?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가서 교회가 탄생했잖아요. 여자, 그죠? 그리고 이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사람이라고 한단 말에요. 이거를.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지금 하나가 되어있을 때 그걸 그리스도, 그래요. 그게 구원이거든요. 그 이야기를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형상, 이라고 해놓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어 여자, 신부와 연합한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아직 교회의 머리가 아니죠? 연합이 안됐을 때 여자가 밖에서 홀로 객체로 존재하며 우리도 하나님처럼 돼야지, 하며 선악과 처먹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게 죄, 사망의 세상이란 말에요. 그래서 십자가 이전의 남편, 남자를 여자가 죽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남편을 죽여버렸다니까요. 아직 머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려와서 성자와 교회를 성령 안, 이라는 새 성전으로 이렇게 묶어 버린단 말에요. 그래서 성령 안, 그리스도 안, 이런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온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성령에 의해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이렇게 연합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걸 누가 모형 한다고요? 아담이 모형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거예요. 단순히 대표의 원리를, 대표원리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요. 아담 자체가 어떻게 묵시 속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도구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면, 예수님은 아담처럼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맞죠?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명을 해드린 거예요. 율법의 완전, 이걸 설명하면서.

자, 그러니까 그 여자가 탄생할 때 남자가 잠이 들어요. 잠이라는 건 항상 죽음을 메라포 한다 그랬습니다. 아담이, 여자, 신랑이 남자가 여자의 탄생을 위해 자기의 존재성을 차압당하는 거예요. 성자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리는 것, 피를 흘리는 거, 이게 죽음이란 말에요. 그래야 아들들이 생겨요. 그래야 성자의 신부들, 연합의 개념에서 신부라고 하는 거예요. 신부들, 아들들이 생긴다는 말에요. 그래야, 피를 흘려야. 그래서 아담이 잠드는 거예요. 그리고 아담의 옆구리가 뚫리고 아담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가 하나 적출되는 거예요. 남자의 완전한 죽음이라는 의미예요. 그거는. 거기에서 여자가 생겨나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과 연합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 속으로 관입해 들어가서 그들의 머리로 연합해 버리는 그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게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개념이에요. 이해가 안 가면 여러 번 들으세요, 여러분. 그것이 창세기 2장부터 선악과, 죄, 뱀, 아담, 하와 이런 걸 소재로 하여 설명하는 거예요. ‘베레쉬트’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맏아들로 창조된 남자인 아담이 여자라는 존재의 불가능함에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는 거예요. 하와에 의해 엉뚱한 아담이 무트 타무트의 자리로 내려 가게 되는 그 그림인 거예요. 교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가 십자가로 가게 되는 그 그림인 거예요. 그게 하늘에서, 묵시 속에서 없음의, 더스트, 아파르에 불과한 우리, 이걸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성자가,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돼 내려간 사건. 같은 얘기예요. 디모데 전서 2장 13절 보세요.

딤 전 2 : 13—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

여자, 일부러 여기서 여자라는 단어를 써요. 여자, 여자 때문에 남자가 죄인 중의 괴수 자리에, 뱀의 자리에 올라가 버리는 거예요. 여자가 뱀과 연합했는데 남자가 뱀이 되어 죽는 거예요. 보세요, 죄는 여자가 지었는데 성경에 보면 전부 죄는 아담이 지었다고 그래요. 여자가 먼저 지었는데. 왜 그래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자 하나님의 유한으로의 관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자가 뒤집어써 버리는 거예요. 아담이, 남자가 뒤집어써 버리는 거예요. 남편들한테 잘하세요. 아들이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없음의 자리가 어디예요? 사망이에요. 그래서 죽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 없음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였다니까요. 아파르. 먼지의 자리.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 없음을 아들의 그 일부, 갈비뼈로 이렇게 흡수하는 것, 이걸 거꾸로 그려 놓은 거예요. 여자의 탄생으로.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을 갈비뼈로 흡수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이게 묵시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에요. 

여자가 예수 밖에 존재할 땐 항상 뱀과 연합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남자를 공격해요. 왜? 이 밖에서 혼자, 홀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려고 하는 자체가 창조주를 무시하는 거예요. 그게 창조주 살해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뱀이 여자와 연합하는 거예요. 뱀이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 여자와 연합하여 여자가 뱀 되는 거예요. 사실은. 뱀이 여자인 거고 여자가 뱀인 거예요.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그런데 뱀과 방불한 그 여자를, 뱀이며 마귀인 그 여자를 성자의 피가, 성자의 심장으로 끌어당겨서 성자와 연합하는 것. 그게 아담이 잠들고 옆구리가 뚫리고 갈비뼈가 빠지고 교회, 여자가 창조되고 하는 그 그림이 거꾸로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그렇게 해서 너희는 창조된 거야. 그러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함몰된 자를 성도라 하는 거고, 예수 밖에서도 홀로 독립된 존재로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의 가능성과 힘과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이들이 뱀인 거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 안에 그 예수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수는 개뿔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강대상에서는 어떻게든 요것들 그냥 사용해서 내 힘으로 사용해 버리려고 그냥 헌신 강요하고, 헌금 강요하고, 봉사 강요하고 여기서는 또 그렇게 해야 잘하는 건 줄 알고 서로서로 그냥, 악어와 악어새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무슨 신앙생활을 하고 무슨 예수를 믿고 있느냐고요. 교회가?

그렇다면, 그 죄의 원흉이라고 하는 그 뱀은 결국 성자 밖에서 서로 독립적인 관계로 살고자 하는 모든 피조물의 상태를 총합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죠? 그게 마귀예요. 우리 안에도 그게 있단 말에요. 지금. 뱀이 하와를 뭐라고 미혹했어요? ‘야, 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만 살려고 해? 네 손발 움직여서 네 머리를 써, 저거 먹으면 지혜롭게 된다니까, 그리고 움직여,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니까. 요게 뱀이잖아요. 왜 네가 남자 안에서 갈비뼈로,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의존적 존재로만 살아야 하니? 너 혼자 나가서 개체로서 네가 주체가 되어 한 번 살아 봐, 가 뱀이었잖아요. 팔다리 움직여, 머리 써, 그거. 여자가 거기에 넘어갔단 말에요. 그게 선악과란 말입니다. 피조물의 독립선언. 그렇게 그런데 얘가 생명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걸 죄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빨리 도덕과 사회윤리 그런 개념에서, 그런 정의에서 벗어나시란 말에요. 성경을 보시려면. 그게 죽음이라고요. 생명이신 예수 밖으로 떨어져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자체가 죄고, 죽음이잖아요. 그게. 그래서 그걸 하마르티아, 죄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여자와 뱀의 연합. 그러니까 마귀니, 귀신이니 뭐 이딴 소리 좀 하지 마시고 내 안에 들어있는 마귀 성을 보란 말에요. 아니 그 귀신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억울하죠. 자기들이 다 잘 못해놓고 전부 귀신한테, 감기도 귀신, 교만도 귀신, 험담도 귀신 자기들이 다 해놓고 귀신한테 전부 전가시키고.

하나님께서 그 뱀과 연합 되어서 남자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독립을 선언한 여자를 다시 남자의 심장으로 끌어당겨서 연합시키는 걸 구원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뱀과 연합된 여자가 팔다리를 움직이고 머리를 움직이면서 열심히 달리려고 하는, 신랑 밖에서 달리려고 하는 그 여자가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새 창조의 현장인 거죠? 그거를 혼인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야 남편에게 복종하라, 라고 하는 거예요. 고것만 똑 떼서 성경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고, 그럼 자기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라는데 그건 안 하면서 복종하라고. 에베소서 5장 31절.

엡 5 : 31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이거 창세기에 나오는 얘기예요, 여자가 창조될 때에 그게 무슨 얘기라고요?)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독립을 외치면서 ‘난 당신의 갈비뼈로 내 존재성을 차압당한 채로 살기 싫어요.’ 하며 뛰쳐나갔던 그 선악과 입에 문 여자를 다시 남자 안으로 끌어들여서 아들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게 구원이라고요. 그럼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해요? 그들의 모든 행사가 헛것이며 무가치한 것임을 폭로하고 그 팔다리와 머리, 그 오체를 무력화시켜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뱀을 저주할 때 어떻게 저주하는지 보세요. 뱀과 여자가 연합된 상태에서 여자를 구원해내겠다고 하는 건 이 뱀에 불과한 마귀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해내겠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뱀에게 내린 저주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해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흙이 흙이 아닌척하는 게 죄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 그래야 내가 창조주가 되기 때문에 너는 내 백성이 되는 거야’ 이건 저주가 아니란 말에요. 마찬가지예요. 뱀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창세기 3장 14절.

창 3 :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 축과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만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에게만 목매달지 말고 네 손발을 움직여서 네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라. 그랬죠? 이게 뱀의 자인식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너 이제 뒷발로, 네 발로가 아니라 배로 기어 다녀, 그랬어요. 저주하시면서. 뭐했다는 거예요, 거기서. 뱀의 팔다리가 절단되었다는 뜻이에요. 그전에는 서서 걸어 다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게 축복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내 손발 움직여서 내 머리 써서 내 주체를 챙기려고 하는 게 뱀, 마귀란 말에요. 그게 여자란 말에요. 그런데 넌 이제 내가 팔다리 똑 잘라버릴 테니까 배로 기어 다녀, 머리는? 그 밑에 나오잖아요. 네 대가리도 부숴버릴거야. 15절. 그러면 오 체가 다 박살이나는 거죠? 요게 십자가예요. 머리에 가시 면류관까지 그래서 놋뱀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를.

이게 우리의 인생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이 쉽겠습니까? 오 체가 절단되고 대가리가 박살이 나는, 대가리 표준어입니다, 여러분. 대가리가 박살이 나는 그 삶이 우리의 삶이라니까요. 그래야 구원이 임해요. 오체가 못 박혀야.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덴에서 뱀의 사지 절단 식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죠. 골로새서 3장 10절.

골 3 : 10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지식에까지. 팔다리는 물론이고 지식에까지. 대가리까지 부수어져서 이런 뜻이라고요. 그러면 성경이 창세기부터 일관성이 있게 이어지죠. 그죠? 그러면 이 아담이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어떤 면에서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했는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제가 설명해 드리고 마칠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신부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선악과 따 막고 뱀과 한편이 된 여자를 찾으러 온 거죠? 내 밖으로 나간 여자를,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끌어당기기 위해, 이게 혼인이니까. 호세아서 2장 19절 보세요.

호 2 : 19 –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 측에서 우리를 찾아와 고멜과 같은. 창녀와 같은 우리를 찾아와 너는 내 갈비뼈야, 나가서 네가 네 주체, 너를 위해 살게 되면 너는 이 꼴, 걸레 되는 거야. 보여주는 게 호세아서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없음인 그녀에게 가서 장가들겠다고 찾아 오는 게 구원이에요. 그게 묵시 속에서 일어났단 말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뭐예요? 그런데 너희가 뭘 했다고, 그리고 내 앞에서 뭘 한다고 그러는 거야? 이거 가르치는 게 ‘베레쉬트’ 에요. ‘엔아르케’라니까요. 그게. 그럼 장가들겠다는 말은 뭐예요? 하나로 연합하겠다는 말이. 팔다리 잘라내고 대가리 부수겠다는 뜻이잖아요. 왜? 그렇게 해서 움직인 게 뱀에게 넘어가 선악과 먹은 거니까. 내가 너에게 혼인, 곧 장가들겠다는 말은 뭐예요? 잘라버리겠다는 뜻이란 말에요.

장기가 혼자 제 발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그건요. 이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해요, 걔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러니까 그걸 자르는 거예요. 머리까지 박살을 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그가, 신랑이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랑이 잠들고 옆구리가 뚫리고, 항상 출생의 자리에는 물과 피가 쏟아지죠? 여자들 아기 낳을 때 물과 피가 쏟아지듯이. 양수가 터지잖아요. 예수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진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 자, 예수의 표상인 거예요. 표 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그 나쁜 놈,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 도구로 뭔가를 설명한 사람이에요, 그분도. 그래서 그냥 아담이에요. 그 일이 보편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일어난다. 그래서 이름을 굳이 아담, 사람이라고 지은 거예요. 사람, 아담이에요. 사람.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맞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담의 죽음 자리가 뭐라 그랬죠? 없음의 자리, 죄의 자리라고 그랬잖아요. 사망의 자리가 죄의 자리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죄 아래 오셔서 죄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거예요. 로마서 8장 3절 보세요.

롬 8 :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그러니까 죄를, 너 죄 있다,고 선고해버렸다는 거예요. 너 죄 있어. 이렇게. 선고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 전에 예수님은 죄인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히브리서 말대로 죄 없는 죄인이에요. 왜? 하나님이 죄인으로 정했으면 죄인이에요. 억지로 편들려고 ‘죄인 아니에요, 죄인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성경이 죄인이라 그랬으면 그냥 죄인이에요. 그러나 죄 없는 죄인이에요. 왜?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 건 죄가 아닌데 하나님이 뭘 시켰느냐 하면 ‘너 죄인 해!’ 라고 시켰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걸 순응했기 때문에 ‘죄인’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고 그분 안에 그리스도, 말씀을 갖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는 거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악의 구조로 판단하는 그런 것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사야 서에 보면 예수님이 질고를 졌다. 그러고, 마태복음에 보면 그분이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셨다. 그래요. 그래서 허구한 날 아팠어요. 병 걸린 제물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못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너 죄인 해!’ 그랬을 때 죄인 하는 게 순종인 거예요. 그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예요.

예수가 그걸 했단 말에요. 하나님이 묵시 속에서 완료해 놓은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서 너희 애굽의 종 해!. 애굽에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이 보내버렸잖아요. 그래놓고 애굽의 종 해, 죄인 해, 그러면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묵시 속에서 다 용서해 놓은, 생명으로 창조해 놓은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인정 안 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나 죄인 아냐! 이걸 증명하기 위해 신앙생활 전부를 소진하잖아요. 그거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를, 아담을 그렇게 쓰셨듯이, 우리를 사용하여, 사람, 아담을 사용하여, 예수님도 마지막 아담, 사람, 인자, 그 사람의 아들, 사람을 사용하여 묵시를 베레쉬트 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걸 설명하기보다는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 거, 이게 종교란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으세요.

그렇게 죽어야 할, 죄 아래에 있는 육신을 갖고 그 안에 말씀, 성령, 그리스도를 담고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 죽고 껍데기가 소멸한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완성해 놓은 새 몸을 그리스도, 성령과 연합한 상태로 살려냈잖아요. 하나님이. 그 상태로 살아나는 게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말에요. 예수 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그게 예수님에게 표로 나타났기 때문에 맏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걸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이 맏아들인 거고.

성경에는 둘째, 셋째 이런 말 안 해요. 다 맏아들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내 장자, 내 장자. 다 그 맏아들의 삶을 살아야 해요. 방법으로 도구로 살아야 돼요. ‘디아’. 예수님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율법에 맞아 죽어 순종하시므로 하나님 사랑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여주므로 ‘베레쉬트’ 했죠?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 줬어요.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분이 완성했다는 거예요. 다섯 달란트, 율법. 두 달란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충성 되고 착한 종이 완료하고 우리에게 하나, 한 달란트를 넘겨 준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삶 속에서도 반드시 삶이 일어나야 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랬죠? 내가 네 자손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애굽으로 보낼 거다, 430년 동안 보낼 거야. 그리고 거기서 어린 양의 피로 건져낼 거야. 무얼 설명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낸 거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6절, 마지막이에요.

갈 3 :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 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를 애굽으로 보내요. 그러니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인 우리. 성령과 함께 연합하여 아들이 된 자들을 그리스도라고 해요. 그리스도인 우리를 애굽에, 세상에 보내어 죄 아래, 불순종에 가두어 놓고 그 아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뭔가 설명하기 위해 이 역사는 지금 설명서로 존재하는 거란 말에요. 여기서 뭐 대단한 거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뭐 행복한 가정, 좋은 교회, 훌륭한 사회, 나라, 다 헛거예요. 훌륭한 나? 천만의 말씀. 하늘의 것이 진짜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형은 반드시 소멸 되어야 한다 그랬죠? 천상의 교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교회, 그게 진짜 교회네요.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잖아요. 거룩한 공회와. 이게 거룩한 교회, 묵시 속에 교회가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죠?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 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돼야 해요? 깨져야 해요. 그런데 왜 또 사람들이 이렇게 오는 거야 도대체? 깨져야 한다니까요. 박살 나야. 마찬가지로 거기에 있는 나가 진짜 나예요. 오늘 이 땅의 내가 깨져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율법에 맞아 죽으심으로 뱀들의 팔다리와 대가리를 절단해 버리고 성령, 콧김, 생기, 그 호흡, 같은 단어예요. 르와흐. 푸뉴마, 그걸 받아서 살아났다니까요. 새 몸으로. 지식에까지 새로운 몸으로. 우리의 삶 속에 그게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처절한 고난으로 점철되는 거예요. 한 번에 뚝 자르면 좋겠는데 이게 말을 잘 듣지도 않아. 칼도. 그러니까 그냥 자른데 또 자르고 자른데 또 자르고. 또 남았다고 또 자르고. 한 번에 다 안 잘려요. 아이,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 난 뱀 아닌데? 그러지 마세요. 적어도 나는 천국 소망은 있다. 부활 소망은 있다. 아, 난 하나님 나라 가고 싶어요. 솔직히 얘기해 보자고요. 왜 가고 싶어요? 살기 어려워서 가고 싶죠?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으세요, 여기서 사는 게 힘들어서 가고 싶으세요? 사는 게 힘들어서 가고 싶다면 내가 편하자고 가고 싶다는 거죠? 그걸 죄라 그래요. 그걸 천국 소망이라 그래요? 자기 편하자고 자살하는 걸 순교라 그럽니까? 예수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 어딨어요?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는 자살해도. 우리가 뱀이지 뭐예요 그럼요? 팔다리 붙은 뱀. 그러니까 잘라내야 하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요. 그걸 자기 부인이라 그러고 그걸 십자가라 그래요. 오늘 강도가 좀 셌는데. 사람들이 오니까 또 쫓아내려고 저 인간이. 마음을 먹었나? 할 수 없어요. 알아듣는 분만 남으시면 돼요. 여러분의 인생은 사지 절단, 아니, 오 체 절단의 삶으로 점철될 거예요. 그걸 겪으면서 하나님 더 확실히 잘라주세요. 하고 고백하는 게 진짜 성도예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