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5번 말씀
제목:진리를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제사를 드려라
본문: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 공관복음서가 공히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웃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항상 그게 연결이 되어있어요. 세례요한의 죽음은 오병이어의 사건의 훨씬 전의 일인데 공관복음서가 공히 그 두 사건을 일부러 그 전에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오병이어의 사건 그 앞에 놓는다는 말이예요. 한번 더 기록한다는 말입니다. 그건 주목할만한 것이죠. 뿐만아니라 요한복음도 오병이어의 사건 바로 앞에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붙여 놓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이 진리이신 예수를 증거한 사람이었다 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오병이어 사건의 앞에 기록하고 있어요.이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세례요한의 그 삶, 그 삶과 죽음이 예수를 증거한 삶이었다는 거고, 그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이니까,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과 연관이 있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겠죠?
그럼 한번 보자구요.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죽었습니까?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헤로디아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제수씨를 뺏어버린 거지요. 그런데 더 웃긴 건 그 헤로디아가 원래 헤롯 삼형제의 가장 맏형인 헤롯 아리스토 불르스의 딸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였던 겁니다. 그 조카를 삼촌 둘이 번갈아 가면서 아내를 삼았던 거예요. 이게 세상 왕들의 실체다 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 즉 세상에서 왕 되고 싶어하는 자들의 속성과 본질이 이런 거라는 거예요. 자기의 욕망과 욕심에
따라 움직이면서 자기가 갖고 싶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 하는 게 역사속 아담들의 속성이예요. 그런것들을 끌어 모아야 나가 구축되기 때문에 그래요.
원래 나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나가 되는 거거든요. 그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 어떤거라도 끌어모아서 나를 구축해야 되는게 역사속 아담들의 실존이잖아요. 오스카 와일드의 샬로메라는 희곡을 보면 헤롯 안티파스는 살로메에게까지 연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 오스카 와일드가 유대 역사서를 바탕으로 그 희곡을 썼다고 하니까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일 겁니다. 그러한 지저분한 관계 속에서 헤로디아와 샬로메가 (모녀예요) 광야에서 진리의 말씀을 설파하던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제사장집 맏아들입니다. 괜찮은 사람이예요 원래요. 그 제사장집 맏아들인 세례요한에게 마음이 갔었다 그래요. 물론 희곡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 제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지금 인용하고 있는 거예요.
역시 세상 왕들의 자기욕망에의 헌신,투신의 모습이죠? 헤로디아와 살로메도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그들의 호의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자꾸 들추어내니까 결국 세례요한을 죽여서라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내더라 라는 게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샬로메의 줄거리예요. 그래서 나중에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갖다주니까 샬로메가 모가지를 들고 그 입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그 희록은 끝이 난단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성경은 정확하게 그러한 세상 왕들의 욕심과 욕망, 죄된 속성을 고발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 왕들의, 그 왕실의 속성과 본질이 무언가를 폭로해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한 세상 왕들의 하나님처럼 되기 놀이에 찬물을 끼얹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세례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했죠?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존재했던 게 세례요한이니까.
말씀이 와서 그 세상 왕들 앞에 서니까 세상 왕들이 죄인으로 폭로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들을 책망했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자존심을 열심히 챙기면서 자신들의 자격과 조건을 열심히 쌓아서 행복과 구원에 도달해보겠다고 하는 이 세상 아담군상들에게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유턴하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뿌리를 찍듯 다 죽을 거라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 그게 메나노이아!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라는 세례요한의 말이었단 말예요. 너희회개하지 않으면, 돌아서지 않으면 인본주의 율법주의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다 죽는다! 이게 ‘말씀’이었단 말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한 마디로 ‘예수 믿어라’ 였어요. 자기자신을 열심히 구축 하고 쌓아서 자기를 믿으려고 했던 세상에게 아니, 그건 믿지 말고 예수 믿어야 돼 라고 이야기 한 게 ‘말씀’이었단 말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 였단 말예요. 하나님의 ‘소리’.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나에대해 증거했다 라고 이야기 한 거고 예수믿어라! 나에대해 증거했다, 라고 이야기 한 거고 바로 고 밑에서 성경이 나에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라고 말씀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성경을 이야기 한 거고 그 성경이 바로 예수 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말씀으로, 성경으로 왔다가 간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으로, 말씀으로 와서 살다간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됐어요? 참수예요. 세상 왕에게 그냥 죽는 거예요. 잡혀 죽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의 회개의 외침과 분봉왕 해롯의 이야기가 항상 맞물려 기록이 되어 있는 게 바로 그 이유에서 입니다. 분봉왕 헤롯은 항상, 세상왕 헤롯은 항상 말씀을 죽이게 되어있어요. 누가복음 3장 16절 보세요.
눅 3: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나니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죠)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은 불에 태우시리라 또 기타 여러가지고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말씀이 그 앞에 서니까, 왕 앞에 서니까 책망, 그를 드러내어 폭로해버리는 거예요.) 이 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아무튼 이런 게 바로 말씀, 소리의 역할로 세상 앞에선 세례요한의 모습이었어요. 역할이었단 말예요. 그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세상 왕에게 그 말씀이 맞아 죽는 걸 그려내고 있는 거죠. 자기의 육적 모습을 챙기기 위해서, 육적자아, 육의 자기가치 수호를 챙기기 위해 진짜생명인 말씀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자기를 찾아간 소리를 죽여버리는 거예요. 이게 역사의 실체란 말입니다. 이게 세상이란 말예요. 이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 아니 여전히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인거죠.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우리의 부끄러움과 우리의 어두움을 가리기 위해 오늘도 예수를 죽이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예수를 죽였어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말씀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욕망 앞에서 부정되고 무시 당하고 조롱당할 때 예수가 죽는 거예요. 말씀으로 오신 예수가.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 자체가 예수를 죽이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가치 없음과 불가능함과 부정함을 계속해서 폭로시켜 드러내는 거예요. 왜? 그걸 수호하고 붙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예수가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를 죽여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이러는 거예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이 얘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세상 왕의 왕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빈들, 즉 광야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애굽의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이 광야에서 이렇게 풀어지는 것처럼 애굽의 왕실에서 살던, 모세 안에서 애굽의 왕자로 살고 싶어 하던 이 존재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현실이 무엇인지 광야에서 그려내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헤롯 왕의 왕실의 이야기가 광야에서 설명되는 거란 말예요. 이걸 잘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그건 엄밀히 말해서 둘 다 헤롯왕의 왕실의 이야기와 이 광야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서 둘 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란 말예요. 전자가 육적 아담의 본질을 폭로해 내는 그림이라면, 우리가 지금 그렇잖아요. 구원받기 전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도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요. 그리고 그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남들에게 폭로만 되지 않는다면. 들키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자가 우리란 말예요. 그래서 일차적으로 헤롯왕의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또 광야에서 일어나는 그 오병이어의 사건 또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그러니까 전자가 육적 아담의 본질을 폭로해내는 그림이라면 이 후자는, 광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복음의 현실, 이걸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그 광야는 (에레모스) 광야는, 세례요한이 이 헤롯왕, 왕실에 의해 이 세상의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참수당한 세례요한이 살던, 말씀, 소리를 외치던 곳이 광야였잖아요. 그렇지요? 이 왕실의 이야기를 한 다음에 거기에서 잡혀 죽인 세례요한이 말을 외치던 광야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란 말예요. 왕에 의해 참수 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려져있는 거예요. 자 그 에레모스, 광야에. 세례요한이 섰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세요. 세례요한이 모형하고 있던 원형인 예수가 그 광야에 서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오병이어의 그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42장 12절 보세요.
마14:12---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광야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쫓아 간지라
여기에서 배가 고파서오병이어가 나오고 그걸로 많이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 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란 말예요. 세례요한의 죽음과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항상 이렇게 붙어 있단 말예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복음을 말씀을 외치던 그 광야에 서서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이 너무 똑같죠 그죠? 외치고 있는 거란 말예요. 세례요한이 왕궁에서 떡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아 사는 자들의 역사 속 행태예요. 말씀을 죽여버린다구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 중 어떤 이들을, 우리는 모두 왕궁에서 왕 되고 싶어하는 아담의 후손들이잖아요. 선악과 입에문 자들 다 왕 되고 싶어하잖아요. 선악과 왜 먹었어요? 하나님 처럼 되기 위해. 왕 되기 위해 먹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역사 속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헤롯 왕궁의 왕실에서 왕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란 말예요. 다~~. 그게 일차적으로 우리 욕망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자들을 지금 광야로 빈들로 끌어내는 거예요. 애굽의 그 많은 존재들 중에 약속 안에 있던 어떤 자들만 광야로 끌어내는 거랑 똑같은 그림인 거예요.
예수님이 광야로, 빈들로 끌어내는 그림이예요, 지금. 왕실에서. 끌어내어, 끌어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그들을 광야로 끌어내어 세례요한 왕에게 잡혀 죽은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말을 외치다가, 말씀으로 살다가 세상에게 잡혀 죽었잖아요? 그 광야에 있는 그들을, 그들의 삶을 사용하여, 도구로 사용하여 뭔가 말씀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지금요. 너희도 분명히 세상에게 맞아 죽어 참수 당해 죽을텐데 내가 너희들을 광야로 끌어내어, 새럐요한이 광야에서 말을 하다가 죽었잖아요. 세상 왕에게 말을 하다가. 말이 되어 살다가 죽었단 말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어서 살다가 죽은것처럼 나도 너희들의 삶속에서 그걸 그려낼텐데 그게 어떤 삶인지 보자는 말예요.
세례요한은 아주 극단적인 예가 되어서 참수되어 죽었지만 그 참수되어 죽는 게 어떠한 식으로 죽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오병이어의 사건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광야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떤 수확물도 얻어낼 수 없는 그런 곳이죠.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정착을 할 수 없는 데니까. 이게 바로 세상왕 되기 놀이에 심취해있는 인생들의 실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왕 들이 자기들이 왕이 되어, 주체가 되어서 역사를 사용하여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발전시키고 번영시키고 있는데 결국은 빈들이라는 거예요, 헛 거라는 거예요. 그게요. 아무것도 없는 거라는 거예요. 성도는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만 광야에 나와서 배가 고픈 거예요.
역사는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해 놓고 그걸 먹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기실, 그 실체를 확 벗겨보니까 다 굶어 죽고 있는 거예요. 뭐에? 말씀에 굶어죽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그 상태로 헛것을 건축하고 있는게 여기서 폭로가 되는 거란 말예요.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래요. 너희들이 이 역사 속에서 광야,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기를 헤롯의 왕궁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사실 광야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하잖아요. 너희들이 광야 속에서 너희들이 전부 합심하여 새상해낸 걸 다 갖고 와 봐! 말씀하셔요. 다 갖고 와 봐! 그래서 남자만 오천 명인데 어린 아이, 노인네, 여자 다 합치면 수만명이예요 그게.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는 걸 전부 모아서 예수님 앞에 딱 갖고 왔는데 보리떡 다섯개하고 물고기 두 마리 예요. 보리떡 다섯개 하고 물고기 두 마리.
제가 수요일 날 산상수훈에서 세상의 빛을 설명하면서 다섯과, 둘과, 하나에 대해서 설명해 드린 적 있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에서 설명해드렸습니다. 모세 오경과 그것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동안에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으로 두 계명으로 줄어들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완료가 되어 영생, 믿음, 구원으로 주어진 게 한 달란트. 마찬가지예요. 다섯 개, 두 개. 오병이어가 그들에게서 나왔어요. 다 모았더니 그거 두 개. 그런데 보리떡은 뭐라 그랬어요? 간음한 여자, 부정한 자들이 제사를 지낼 때 하나님 제가 이 부정한 떡입니다. 이거 짐승의 먹이였잖아요. 제가 짐승의 먹이만도 못한 그런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게 보리떡이었어요. 돌에 맞아죽어야할 자들이 내놓던 그런 제물이란 말예요.
인간들이 열심히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안에서 뭔가를 해갖고 예수님이 빈들에서 내 놓아봐 그랬더니 보리떡 다섯 개, ‘이어’, 물고기는 뭐라 그랬어요. 란태생,알을 낳다, 증대, 다산을 의미하는 거라 그랬죠? 그래서 그 알로 낳은 것은 히브리사람들은 전부다 다 부정한 것으로 여겼단 말예요. 그래서 알에서 낳은 모든 건 다 부정한 거라 그랬어요. 그런데 포유류도 역시 알에서 낳은 거예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알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알이, 양수가 터져서 나오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알에서 낳는 모든 부정한 것은 다시 한번 닭이 알을 품어 부활을 시키는 것처럼 거듭 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들을 날개, 닭 날개 아래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난 너희를 구원하러 왔는데 왜 안오냐는 거예요. 이 란태생들아, 이 물고기들아~. 그러니까 지금 물고기, 보리떡 이건 다 부정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는 뭔가 하겠다고 해서 갖고 왔는데 그게 오병이어 부정한 거에요. 그런데 그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 남기고 두 달란트 남겼죠 누가? 착하고 충성된 종, 예수가 남긴 거예요. 성취한 거란 말예요. 그런데 인간이 그걸, 역사가 그걸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게 뭐예요? 오병이어가 되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 예수님께 드렸단 말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먹여버렸어요. 에스겔서 4장 12절로 가보면 보리떡이 어떠한,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것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겔4:12—너는 그것을 보리떡 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어다
(보리떡을 어디에 구워먹으라고 해요? 사람똥에다가. 이게 부정한 사람들이 행해야할 법이었어요. 사람똥에 보리떡 구워먹으라는 것.나는 똥같은 존재라는 거, 보리떡같은 존재라는 거.)
겔 4:13--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어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하나님은 하두 세상과 간음하여 사는 이스라엘이 보기가 민망하여 바벨로에 포로로 보냈더니 거기서도 정신 못차리고 사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보리떡을 똥에다 구워먹을 놈들아! 그랬더니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겔4:14—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율법 잘 지켰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율법을 갖고 들이대는 거죠. 이 똥에다가 보리떡 구워먹을 놈아 그랬더니 아니예요, 왜 나를 그렇게 부르세요? 왜 나를 그렇게 취급하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겔4:15--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 하기를 허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찌라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똥은, 짐승의 똥은 사람의 똥보다 더 부정한 것이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서 ‘야 ,이 똥에다가 보리떡 구워 먹을 놈들아!’ 그랬더니 ‘나는 율법을 잘 지켰는데 왜 나를 그렇게 취급하세요? ‘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에이 소똥에 보리떡 구워먹을 놈들아 ! ‘ 그래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뭐라 그러는 거예요? 예잇, 이
똥덩어리들아, 그러시는 거예요. 너희들 율법 잘 지켰다고 나한테 뭘 자꾸 갖고 오는데 그게 다 똥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역사와 인생이 열심히 구축하고 있는 건 인분, 쇠똥이예요. 똥은 영양분이 빠져나간, 모양은 있는데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헛것이라는 뜻이예요. 헛것! 그 오병이어를 그 광야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턱하니 내놓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 이거면 돼요? 라고. 이게 역사의 실체예요. 그걸로는 못먹어요. 다 죽는 거예요.
역사는 자기들이 생산해낸 걸 의지하여 절대 살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그대로 부풀려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먹여버려요. 그 부정한 오병이어를 먹여버려요. 여러분 이게 심판이예요. 자기가 싼 걸 자기가 처먹는 게 심판이예요. 그건 사라질 거, 멸망할 거거든요. 그걸 먹여서 같이 멸망시켜버리는 게 심판이예요. 여러분 오병이어를 단순히,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보잘것 없는 거라도 내놓으면 하나님이 크게 튀겨주니까 바쳐라, 이건 코메디도 아니예요. 농담도 아니예요 이거는. 그 이야기 하는 거 아니예요. 무시무시한 얘깁니다. 이거, 너희들이 내놓은 거 이거, 이걸로는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 요기를 할 수 없다, 그래놓고 그걸 그대로 먹여버리는 건 너희는 이것 먹고 다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다 죽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가 그들이 먹어야 할 그 보리떡, 똥에 구운 보리떡, 부정한 란태생의 물고기 그걸 다 먹어버리고 ‘보리떡’과 ‘물고기’ 가 되셔서 죽으시고 그 오병이어, 율법, 모세오경과 두 가지로 줄어든 그 율법, 그걸 성취하셔서 그들에게 성령으로 먹힌 거예요. 이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게 성취되어 우리안에 들어오면 그게 우리에게로 넘어오잖아요.둘은 예수님이 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완료하셨지만 그 하나가 우리에게 넘어오면 육을 가진 우리는 이게 감당이 안돼요.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고 있는데 나 혼자 이 예수 이야기를 하려니까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그러나 하나님이 못감추게 한다는 거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므로, 말 아래 두어봐라 하나님이 홀랑 벗겨버리지. 그게 세상의 빛이다, 예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반드시 너희는 세상에게 빛으로 들키게 하여 죽이게 만들겠다. 꺼버리게 만들겠다는 거요,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가 세상에 의해 꺼진 것처럼. 이거 무서운 말이란 말입니다. 말라기에서 그걸 어떻게 얘기하는지 보세요.말라기 2장 3절
말2: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의 절기의 희생의 똥을 (율법, 절기의 희생의 똥 이게 율법과 제사죠? )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다
이게 오병이어를 먹여버리는 거, 그럼 어떻게 돼요?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받으리라’ 이거예요. 그런데 예수가 그 똥을 먹는 거예요. 저는 그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그거를 읽으면서 초대교부 오리겐의 책을 찾아서 읽게 됐는데 그 오리겐이 그 다섯 남편, 사마리아 여인의 그 다섯 남편을 모세오경 율법으로 풀더라구요. 그 밑의 설명은 전혀 제가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달란트의 비유를 다시 풀어 본거예요. 다섯 남편이, 사마리아 여자가 이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고 나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쓴 게 다섯 남편을 취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나의 안전과 나의 유익을 의해 율법을 택해요. 선악과를 반드시 물게 되어있다니까요.그런데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거 네 신랑 아니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 걔네들이랑 혼인신고 안했잖아, 이런 말이 아니라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말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은 율법주의 아래의 모든 아담들은 반드시 모세오경, 율법을 붙들어요. 내 신랑으로. 그런데 율법이 신랑이 될 수 없어요. 예수가, 은혜가 신랑이 돼야 된단 말예요.
그 은혜의 신랑이 왔어요. 와갖고 너는 그 다섯 남편으로는 절대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신랑인데 나도 아직 십자가 안졌어요. 그래서 나도, 그 하나도, 지금 있는 하나도, 나도 네 신랑은 아직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죽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달란트를 성취해야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고 그 때 진짜 ‘하나’가 오는 거예요. 아들이 오는 거예요, 신랑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오는 거예요, 믿음이 오는 거예요, 구원이 오는 거예요, 영생이 오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남편, 지금 있는 이 하나, 두 계명을 완료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이 하나, 그 하나가 결국 죽어야 네가 사는 거지 네 다섯 남편, 한 남편 아무것도 네 남편 아니야, 라고 하는 건 그 여인의 존재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의 열심과 추구 자체를 다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럼 넌 뭐라는 거예요. 넌 죄인이다 ! 예요. 그러니까 너는 은혜를 받아야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튀어나가서 뭐라 그러냐 하면 저 남자가 ‘내가 죄인’인 걸 말해줬다, 라는 거예요.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라고 내 죄를 폭로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늘의 성도는 이 역사라는 세상에 내려와서 자기의 유익과 보람과 쾌락과 명성만을 위해 존재를 구축해가는 세상왕들과는 반대로 그 삶이 바로 저주받을 아담들의 삶이며 회개 해야할 삶임을 삶으로 중거해야 하는 그런 소리로서의 삶, 말씀으로서의 삶을 광야에서 살게 돼있다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참수되는 거예요. 세상에 의해. 우리가 내놓을 수있는 건 부정한 보리떡과 물고기 뿐입니다. 우리는 이거 먹고 그냥 멸망받아 그 저주의, 희생과 절기의 똥 먹고 함께 제해버림을 당하는 자가 맞는데 예수께서 그걸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성령, 생기, 르와흐, 생기, 콧김을 주셔서 우리를 생령으로 만들어 내신 게 구원입니다 를 증명해내는 거예요. 이게 참수되는 거예요. 내가, 자아가 죽는 거니까. 부정되는 거니까. 은혜로만 존재하는 자가 납니다 를 증명해내는 게. 그래서 세례요한도 나는 쇠하고 그가 흥하는 거예요. 나는 죽고 그의 능력과 그의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게 광야의 말씀의 삶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 안에 들어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예수를 그려내는 거예요.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안 죽어도 그냥 괜찮을만큼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를 증명하는 게 여러분의 인생이 아니라 나는 그 예수가 없었으면, 그 오병이어, 똥에 구운 보리떡과 물고기 먹고 그냥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그거 다 가져가시고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뭐라그래요? 내가 떡이다! 그러잖아요. ‘ 내가 떡이다 !’. 너희들이 지금 먹은 거 그걸로는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떡이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이 그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 내가 떡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먹이통에 오는 거예요.
이 짐승들, 보리떡 먹고 다 죽어야 되는 짐승들의 먹이 성령으로 그들에게 먹여주기 위해 오신 거예요. 그래서 구유에 오신 거예요. 짐승의 구유에.
따라서 우리는 이 광야 인생을 살면서 나를 포함한 세상의 불가능함과 부정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폭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이 바로 자기 전 존재와 역사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이 역사를 부정한다 라는 건 이 역사의 한 부속품인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참수란 말예요 그게. 머리가 짤리고 예수라는 머리가 척 붙는 거예요. 요기에. 그럼 그 때부터는 내가 아니예요. 개별적 자아인 내가 아니란 말예요. 교회의 실체가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것’으로 심판 안 받는 거예요. 꼭 이런 얘기하면 그냥 막살아야지, 꼭 마귀새끼들이 꼭 그런다니까요. 아니, 예수가 머리가 되서 내 삶을 사는데 어떻게 막살아야지 이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잊으시면 안돼요. 헤롯의 왕관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 우리 밖에 존재하는 저주 받을 어떤 무리가 아닌 거예요. ‘ 나’ 란 말예요 그게.
나, 내 안에 그 하나님 처럼의 욕구가 바로 헤롯 왕가 이므로 그것을 생명의 말씀이 죽여내는 거 이게 신앙생활이예요. 그래서 헤롯 왕가의 이야기와 광야의 이야기가 우리 삶에 동시에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 인생과 역사 내내 더러운 보리떡과 물고기 똥을 쏟아내고 예수님이 계속 해서 그 부정한 것들을 먹어치우시고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우리를 먹여내시는 거예요. 어떻게? 말씀으로.
그러니까 이렇게 성경안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지 않는 모든 성경 해석은 우리를 또다시 율법으로 끌고 가게 되어있어요. 성경이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 되는 게 아니라 저주의 율법으로 이끄는 소경된 몽학 선생이 되버리는 거예요. 제가 몇 주전에 시몬 베드로와 장사하는 배, 다시스의 배가 장사하는 배 라고 했죠? 그 단어의 뜻이. 그 다시스의 배를 소재로 해서 인본주의적 신앙생활의 열매가 어떻게 맺히게 되는지에 관해서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그 조각난 그물, 그 조각난 그물이 조각난 말씀이라 그랬죠? 그 조각난 말씀은 예수라는, 말씀 전체가 예수로 결론이 나야되는데 이게 아니라 명령과 규례,율법 이런 걸로 보는 게 조각난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규례가 그렇게 많은 거에요. 조각,조각,조각.
이 전체가 예수인데 . 그 조각난 그물로는 뭐밖에 못잡는다? 풍요와 다산과 증대. 자기 자존심을 자기 가치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랑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이 아담들만 건져 올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말씀이 떨어지는데 이게 어플리케이션, 적용, 율법과 규례, 규범으로만 떨어지게 되면 그렇게 물고기들만 걸리는 거예요. 물고기가 한 번 걸리면 얼마나 많이 걸리는지 아시요? 그러니까 대형교회들은 한번 의심해봐야 되는 거예요. 란태생, 물고기가 알을 얼마나 많이 낳아요. 물고기만 걸리는 거예요. 조각난 그물에. 그래서 그 장사하는 배, 그게 구약에서는 성전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성경에는 두 배가 나오는데 하나는 말씀을 전하러 가는 배, 하나는 장사하는 배. 그런데 거의 장사하는 배를 탄다는 말예요. 요나도 장사하는 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단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은 이 말씀이라는 배, 이게 성전이예요. 성경에서는 배를 또 성전과 대조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성, 성전이란 말예요. 성전, 옛 성전, 다시스, 장사하는 배, 예성전.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너희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구나 그러는 거예요. 옛 성전과 말씀을 전하는 참 성전, 말씀이신 예수가 참 성전이니까. 이 두 배가 등장한단 말예요. 그런데 이 장사하는 배, 조각난 그물만 갖고 있는, 율법과 규례와 규범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 곡해하는 그들의 배는 물고기만 그냥 잡고 결국엔 어떻게 된다 그래요? 바다에 빠진다 그러잖아요. 거기에서 배가 물에 잠겼다는 건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만선으로 오면서 배가 철렁철렁 왔다는 게 아니라 빠져서 갈아 앉았다는 거예요. 다 날라갔다는 뜻이예요. 다 날라가 버렸어요. 그게 역사의 종국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그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그들에게 얘, 너희들이 여태까지 이 광야에서 맺은 열매 갖고 와봐 그랬더니 그 몇 만명이 오병이어, 율법만 갖고 온 거예요. 율법의 행위만 갖고 왔어요. 그렇게 시몬의 배, 시몬이란 말은 시므온, 기근, 기갈, 광야,사막 이런 뜻이라 그랬어요. 아직 반석, 베드로가 안되는 거예요. 반석, 베드로가 되면 거기서 말씀, 생수가 터져 나오야 되는데 아직 시므온이예요. 여러분 서신서에서 베드로를 시몬, 시몬 베드로 이렇게 부르는 거 봤어요? 없어요. 그에게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그는 베드로예요. 반석이요. 그때부터 말씀을 터트리는 사람이란 말예요. 그런데 아직 시몬 베드로란 말예요. 그가 배를 다 뺏기고, 배가 폭삭 주저 앉았어요. 갈아 앉았단 말예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누가복음 5장 8절 보세요.
눅5:8 –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역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니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배가 갈아 앉아 버렸는데 그들이 배를 육지에 댔대요. 육지가 뭐예요. 흙이예요, 땅이예요. 그들의 옛 성전이 땅에게 붙어 버리고 이제 그들은 새 성전인 예수에 의해 머리에 띠 띄우고 끌려가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냥 표피적으로만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일으키신 기적 앞에서 야,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 이분이 하나님인가봐, 이러고 하나님을 알아보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이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런 그림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지가 죄인인 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이분이 하나님이라는 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나중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이라 고백 했을 때도, 그건 하나님이 잠깐 알게 해주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몰랐단 말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뭘 보더니 깜짝 놀라고 무서워서 그 무릎 아래 엎드렸다 그래요. 그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거를 원어로 보면 무릎이란 단어는 있어도 아래라는 단어는 없어요. 오히려, 프로스, 무릎을 향하여, 굴복하다가 아니라 뚝떨어지다 라고 했어요. 뚝떨어지다. 생각해보세요. 무릎이 어떻게 엎드려야 무릎이 엎드리는 거예요? 무릎 아래도 아니고 무릎에, 무릎을 향하여 엎으렸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무릎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고니’ 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베리트’ 예요. 성경이,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건 이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 히브리어를 잊어 버렸기때문에 헬라어로 기록한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원래 이 의미가 잘 해석이 안되면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가서 다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고니’ 무릎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베리트, 이 베리트 가 명산데 이게 동사형일 때는 바라크에요. 바라크가 뭔지 아시죠? 복! 복이 되다, 진리를 말하다, 복이 되다, 바라크예요 복. 그 복을 향해 몸을 던지다, 몸을 떨어트리다, 이런 뜻이예요. 지금 그림은 시몬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배,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잖아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이 말씀이 떨어진 그 배, 말씀이 떨어졌는데 이 말씀이 도데체 뭘 의미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말씀이 떨어져서 그 말씀이 어떤 것을 이루어냈는데 표적으로 보여줬는데 물고기가 쪼개진 그물에 엄청 잡히고 배가 갈아 앉아 버린 거예요. 빠져버린 거예요. 그걸 보고 이가 와서 무릎에 자기 몸을 던져버린 거예요.
자,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는 말이예요. 제가 지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조금 더 깊게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태까지 저나, 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가 성경을 얼마나 불성실하게 표피적으로 보고 있었는지가 너무 선명하게 보여져요.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다시 쓸려고 해요. 그 전에 썼던 책들.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다 다시 쓸거예요. 진짜로. 설교 다시 할거예요. 죄송해요, 진짜로. 그게 그건 줄 몰랐어요. 그런데 정말 성경은요 예수 이외에는 일점일획도 할애하지 않아요. 시몬 베드로, 즉 여전히 시몬이예요. 기근, 기갈, 사막, 광야. 이 시몬 베드로인 상태인 그 베드로가 이를 보고, 라고 하는데 거기서 쓴 단어가 ‘에이돈’ 예요. 헬라어에는요 ‘보다 ’ 라는 단어가 ‘호라오’,’에이돈’ 두 가지가 있는데 ‘호라오’는 어떤 본질까지를 읽어내는 걸 ‘호라오’ 라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뭘 ‘보다’ 했을 때 ‘호라오’를 쓰는데 에이돈란 단어는 표피, 나타난 현상,외향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에이돈’에서 나온 단어, 이게 명사형으로 바뀌면 ‘에이도론’ 이 되는데 이게 아이돌, 우상이예요. 이게.
그러니까 표피적으로, 왜곡되어 껍데기만 보는 것, 이 시몬에게 말씀이 떨어졌는데, 말씀이 떨어졌는데 이 시몬이 그 말씀을 알아먹을 리가 없어요. 그 말씀이 어떤걸 이뤄냈어요. 이뤄냈는데 이 시몬이 그걸 보고, 표피적인 것을 보고 깜짝놀라 예수께 와갖고 몸을 던졌어요. 어디에다 던졌다고 그랬어요? 무릎, 베리트,바라크에 몸을 던졌는데 그 바라크가 뭐라 그랬어요? 복 ! 그리고 ‘진리를 말하다’ 인데 오해된 진리를 이야기 한느 거예요. 거기에다가 그 ‘복’ 에다가 자기를 던지더라는 거예요. 왜? 기적이 일어났거든요. 사람은 자기상태가 자기보다 더 큰 존재라고 느낄때 그리고 자기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일을 해냈을 때 일차적으로 두려움을 느끼죠? 거기서 엎드려지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이 이야기를 성경이 굳이 여기에다가 기록했느냐하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예배당에서 이 일이 똑같이 일어나요.
시몬 베드로가 그 무릎에 엎드려서 복, 바라크에 엎드려서, 외향에 엎드려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그랬어요. 그 사람이 진짜 자기가 죄인인 줄 알았다 몰랐다?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자기보다큰 자 앞에서 나는 당신보다 작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라는 거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직 시몬인 이상.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안다 그러고,죄가 뭔지를 안다 그러고 , 그리고 뭘 봤다 그러고, 말씀을 이해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는 그 앞에 엎드려요. ‘샤하, 프로스코네, 카라’ 이게 다 그 엎드리다 라는 단어 거든요. 이게 무슨 말로도 쓰이냐하면 예배하다 라고도 쓰여요. ‘프로스코네오’가 예배잖아요. ‘샤하’ 예배란 말예요. 그냥 표피적으로 어떤걸 경험하고 감정적으로 뭘 느껴서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고 엎드릴 수 있고, 굴복할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얼마든지 자기를 죄인으로 고백할 수 있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본질은 모르는 거예요. 성경은 거기까지 경고합니다.신명기 4장 19절 보세요.
신 4:19—또 두렵건데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하노라
이게 구푸리다, 샤사, 카라예요. 얼마든지 인간들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앞에 예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신명기 5장 7절 보세요.
신5:7—나 외에는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신 5: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신 5: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마찬가지예요. ‘샤하, 카라’ 예요.
신명기 8장 19절,
신8:19—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쫓아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하리라
여기에도 ‘샤하, 카라’.
인간들을 이렇게 우상에게도 얼마든지 절 할 수 있어요. 우상이라고 그러니까 뭐 다른 종교의 형상들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하나님이라는 우상. 어떠한 때에 하나님이 우상이 되느냐하면 그 하나님이 단순히 큰 분, 그리고 내 앞에 어떤 기적적인 것을 이루어 내신 분,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까불다가는 큰 코 다칠 그런 존재 그러니가 어쩔수 없이 그냥 거기에 항복해야 하는 요 순종, 요 예배는 우상섬김이예요. 그걸 굴종이라고 하는데 그 굴종은 만약에 내가 그 상대보다 힘이 더 강해지는 일이 생겨나면 언제든지 그를 밟을 수 있는 걸 굴종이라 해요. 그걸 하나님이 난 그것 저주해!
지금 시몬의 이 이야기는 저주 받을 이야기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지금 시므온이 부름을 받는 장면인데 벌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어떻게 해요? 십자가 앞에서도 하나님의 눈믈을 쏟게 한 존재인데… 우리는 너무 사람 위주로 성경을 보니까 아무나 다 위인을 만들어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택받은 아담들의 인생에 개입을 하셔서 그들의 삶을 부수어 버리는 거예요. 누가복음 5장 10절 보세요.
눅5:10—예수께서 시몬에게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이제 예수님이 너 인제 나에게 붙들렸다,이제 나랑 가자, 어디? 천국에 가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뺏기는 거예요. 인생을 차압당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여기에서 예수님이 시몬에게, 다시 시몬이예요, 시몬 베드로도 아니고 시몬. 사막, 말씀이 없는, 기근, 기갈의 시몬에게 내가 이제, 너는 지금 이 모양이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사람을 취하게 하리라. ‘조그레요’ 라는 단어는 살아 있는 걸 살리기 위해 생포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걸 산 채로 생포하는 것. 그러니까 살아있는, 산 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낚아 올리게, 살리기 위해 낚아 올리는 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어떻게? 말씀을 담아서. 반석, 베드로로 만들어서. 그러니까 난 앞으로 그렇게 만들거야 라는 건 지금 베드로가 고기 잡고 뭐 여러가지 일 한거는 다 꽝이란 얘기 잖아요. 내가 앞으로 널 이렇게 만들어낼 거야 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조각난 말씀으로 자아 확장과 자아 실현, 자아 증대의 욕망으로만 살아가는 부정한 물고기들을 건지는 거, 그건 복음전파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전도라고 하지 않는다구요. 전부 나, 나, 나! 내 복, 내 구원, 내 천국, 내 문제 해결, 내 질병 치유, 이런 사람만 붙드는 거예요. 모르죠 여기도 조각난 그물로 지금 물고기들만 걸려 있는지 모르겠는데 , 그 상태는 아니다, 라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게 란태생들의 특징이거든요.
베드로는 이제 자기가 진짜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인지를 삶속에서 증명하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야 돼요. 왜 자기가 보리떡이며 물고기인지, 성경이 말하는 똥인지를 폭로당하는 삶을 살게 돼요. 그래서 교회의 기초, 이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그랬으니까 교회의 대표라고 보시면 돼요. 그가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의 쪽팔리는 장면에는 항상 들어가요. 맨 마지막에 가장 부끄러운 일을 하죠? 예수님을 욕하면서 저주하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요. 똥임을. 얘가 똥이네요 이거를 성경이 드러내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베드로가 뭐 대단한 일 한 거를 적어놓은 거 있어요? 밥 먹다가 도망가다가 바울한테 욕먹어, 고넬료 집에 가라 그랬더니 안 가다가 하나님한테 욕먹어,부인 할거야 그랬더니 안 부인 한다고 그러다가 또 망신당해,죄다 그런 것뿐이예요. 성경은 교회가 , 베드로가 무얼 했다는 거에 관심이 없어요. 그가 얼마나, 자기가 보리 떡이고 물고기인지, 똥인지를 드러냈는가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그를 어떻게 하나님이 베드로, 반석으로 만들어 냈는가에 관심이 있다니까요. 베드로를 고넬료 집에 보낸 거? 여러분, 고넬료가 무슨 그가 경건하고 그 기도를 열심히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건줄 아세요? 그러면 꼭 베드로가 가야돼요 거기에? 베드로 자체가 저런 이방인들은 구원 받으면 안되는데 라는 이 똥같은 율법의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넬료라는 사람을 들어서 베드로를 가르친 거예요. 고넬료에게 영생을, 성령을 주러 간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고넬료에게 가기 전에 하나님이 보자기에다가 이것저것내려보내 갖고 보게 하고 가르친 다음에 보낸 거예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아, 그런거군요, 라고 안 거지, 고넬료가 득을 본 게 아니예요. 고넬료를 통하여 베드로가 뭔가를 배운 거란 말예요. 이 똥이, 이 물고기가 , 이 보리떡이, 이 시몬이.
그렇게 성도는 이 역사와 인생동안에 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로만 완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절하게 체험하고 교훈 받는 삶을 살아야 되는거지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나라 건축에 동참하는 훌륭한 자가 되는 걸 목적으로 삼으면 안돼요. 그러한 시몬 베드로의 오해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게 바로 고 밑에 문둥병자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붙어 있는 거예요. 갑자기 왜 문둥병자가 나타나는 거예요? 누가복음 5장 12절 보세요.
눅 5:12-15---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님 앞에 갑자기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나타나죠? 이게 시몬 베드로의 그 이야기에 붙어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메프라’는 문둥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부정한’, 모든 부정한 것을 총칭하는 단어예요. 그런데 문둥병자도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냥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이 그냥 문둥병자라고 한 거예요. 문둥병자 라고 번역하자고요 그냥. 부정한 자. 그러니까 온 몸에 문둥병이 들렸다 라는 건 부정으로 가득찬, 이런 뜻이예요. 꽉찬, 부정으로 꽉찬, 죄인. 선악과 입에 문 죄인.그가 예수앞에 나타난 거예요. 에수 앞에 나타났어요. 부정함을 가득찬 죄인이 예수를 ‘보았다’ 그래요. 여기도 ‘에이돈’ 이예요. 표피적으로만 본거죠. 어덯게? 어덯게 봤어요? 내 부정함을, 내 문둥병을 , 내 죄를 없애실 수 있는 분.
어 그거 잘 본 거 아닌가? 혹시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내’ 부정함을, ‘내’ 죄를, ‘내 ‘ 문둥병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분. 메시아를 이렇게 인식하는 사람, 주인공은 역시 ‘나’예요. 이걸 잘 분별하셔야 돼요. 예수님은 나의 죄, 나의 부정함,나의 문둥병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그냥 문둥병자, 부정으로 가득찬 자, 똥, 흙, 그 존재로 전혀 살 존재가 못되었다, 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분이 나의 죄를 사해주러 오신 분, 인식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거예요. 여러분. 계속 한번 들어보세요.그 부정으로 가득찬 사람이 주님을 보고 간청해요. 여기서 간청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프레이’ 간구했다는 뜻이예요. 기도했어요. 자, 성도가 하는 건 다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시몬 베드로도 이 문둥병 환자도.기도했어요. 뭐? ‘내’ 죄, 부정함 없애 달라고. 왜? 나는 이런 것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주인공은 누구? ‘나’란 말예요.
제가 왜 이걸 강조하는지 제발 잘 새겨들으세요.’ 내 죄를 없애주세요’, 에 주체가 ‘나’면 그것도 죄예요. 그랬더니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셨다 그래요. 여기서 ‘엑테이노’, 손을 뻗다, 그리고 케일, 손, 이 단어가 다 여성 단수예요. 만약에 손을 뻗으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손이 예수님의 손이었으면 그게 남성 단수로 씌여져요. 그래서 여성 단수라는 건 손을 뻗게 한 분은 예수님이예요. 주체예요. 주어인데, 자기의 손을 뻗은 존재는 문둥병 환자예요. 문둥병 환자가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거든.그러니까 여성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야 맞죠 당연히.여러분 죄인의 죄, 부정함이 없어지게 될 떄 제물에게 죄인이 안수를 하지 제물이 누워있다가 죄인이 오면 이렇게 안수하는 거 보셨어요? 양이, 염소가 누워있다가 곧 잡혀 죽어야 할 제물이, 죄인에게 안수하는 거 보셨냐구요? 아니예요. 죄인이 자기 죄를 제물에게 안수하여 전가하는 거예요. 이 방식이 맞는 거예요. 그리고 제물이 죽는 거예요. 부정함을 다 먹어버리고. 똥, 오병이어를 먹어버리고 죽어버리는 거예요.제물이. 그러니까 개역성경이 이건 잘못오역 해눃은 거예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 그렇고 혈루병 앓던 여인도 예수님에게 먼저 손을 대어, 원어로 보면 손을 대어 그 부정함을 빨리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이거를 오해해서 오늘날 말씀들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사역자라는 사람들이 연말연시만 되면 안수하는 거예요. 사람들 주 세워놓고. 가족단위로 안수해요. 왜? 성경에 이렇게 손을 이렇게 대어서 뭘 고쳤다 라는 게 나오니까. 천만의 말씀, 그건요 지금 목사의 죄를 교인들에게 마구 이렇게 전가시키고 있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거꾸로 알고 있는 거예요. 여성이란 말예요. 아무튼 부정으로 가득찬 죄인의 손이 예수님의 손에 맞닿았다 그래요. 맞닿게 되자 이 문둥병, 나병이 예수님께 쭉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부정함이 예수님께 쭉빨려 들어가요. 그리고는 이 사람이 나았어요, 그런데 기뻤어요, 나았어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물고기가 잡힌 거예요.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와 똑같은 얘기인 거예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말씀이신 그 분이 뭔가를 행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어요. 부정함이 사라졌어요. 나병이 없어졌다니까요. 기뻐뛰겠죠? 여기에 보면 프로서폰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문둥병 환자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 ‘프로서폰’ 자기의 나병, 자기의 죄예요.예수가 아니었어요. 이걸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야 된다라는 이거, 여기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래서 ‘프로서폰’ 거이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낫긴 났는데 도데체 어떠한 방식으로 이게 낫게 된건지, 그리고 자기가 갖고 있던 그 나병, 그 부정함이 얼마나 무섭고 엄청난 것이 었는지는 모르는 거예요.모르고 나은 것에대해서만 찬양하는 거예요.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예수 앞에 예배 안 드렸겠어요? 찬송 안 했겠습니까? 기도 안 했겠습니까? 뭐라도 있으면 사례라고 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런 식으로 하는 헌금, 순종, 헌신, 순교, 예배는 다 아니다!! 네가 주인공이 되어서 너에게 뭘 해준 그게 기뻐서 여전히 네가 주인공이면서 하나님께 뭘 한다고 하는 건 그건 우상, 역시 너에게 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게 기뻐서 하는 거니까. 그건 가짜 엎드림, 가짜 순종, 가짜 샤하, 가짜 프로스폰 이예요, 가짜 예배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그랬는지 보세요. 너무너무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이. 죄가 사해졌어.부정함이 사라졌어. 그래서 나가서 전도하고 싶어요. 야, 내가 이렇게 깨끗해졌어.사해졌어.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네가 가졌던 게 뭔데? 몰라요. 그런데 일단 ‘내’가 나았어요.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전도하고 싶어요. 예수님이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14절—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 이 경계하시되, ‘파랑겔로’는 신탁하다 예요. 신의 말씀으로 던지다. 그러니까 복음이 떨어지는 거예요 지금요. 파랑겔로, 신탁하다)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게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이 파랑겔로는 듣는자의 책임과 의무를 포함하는 얘기예요.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이걸 의역을 하면 이래요. 너에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또 어떤 것도, 하나도 이야기 하지 말라,라는 뜻이예요. 하나도 이야기 하지 말라,아무에게도. No body, Nothing 이런 뜻이예요. 예수님이. 하나도 이야기 하지 말라, 그게 복음이다!. 이런 뜻이예요. 예수께서 파랑겔로, 신의 말씀으로 말씀 하셨어요. 신의 말씀은 복음이예요. 복음을 말씀하셨는데 뭐라 그러느냐하면 네가 본 거를 네 이해의 수준에서 누구에게건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아라, 이게 복음이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바로 위에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곡해 해서, 말씀을 곡해 해서 엉뚱한 예배와 순종의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그리고 엉터리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했단 말예요. 그걸 염두에 두고 이 치유된 문둥병자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된단 말예요.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푸로서폰,문둥병, 나병, 자기의 죄,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걸 용서해주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그분의 능력과 그리고 내가 가진 죄의 깊이와 더러움과 본질을 모른 거에요. 그러니까 기쁘기만 한 거예요. 지금. 이러면 안된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수준과 과정을 통과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 그런데 끝까지 이렇게 가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그랬더니 부정함이 떠나가버렸어요. 그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겠어어요? ‘나’ 라는 주체, 주인공의 죄를 없애주기 위해서 오신 능력자, 조력자, 메시아, 그리스도, 이렇게. 여전히 나를 가운데 두고 하나님은 아웃싸이더로 배치를 해놓은 거죠. 그대로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함부로 단기선교 이런데 가면 안돼요. 가서 뭐 전하고 왔냐구요 그동안에? 열심히 애들 밥이나 해주고 왔지, 뭐하고 왔어요? 애들 닦아 주고 놀아주고 그걸 선교라 그래요? 그냥 구제라고 해요. 착한 일, 착한 일,좋은 이름으로 착한 일.
선교는 가서 예수가 전해져야 돼요. 말씀이 전해져야 되고. 예수님께서 그 상태에서 네가 무슨 말을 하던 그건 복음이 아니다 라고 지금 말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하지 마라, 그럼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바로 뒤에 ‘알라’, 그러나! 라는 단어가 있어요. 그리고 다음분장으로 이어져요. 이거는 하면 안되지만 해야 하는 게 있어 그래서 ‘알라’예요, 그러나 란 말. 해야 하는 게 있어, 반드시. 뭐라 그래요?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제사 지내라는 거죠 이거? 이게 말이 돼요? 말을 하려고 그랬는데, 복음을 전하려고 했더니 야야, 그거 하지마, 하지마, 하지 말고 가서 제사 지내. 그런거죠. 이해가 가셨어요 이거?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제사 지내 가서, 그 말이잖아요 이게요? 이게 정확히 정리를 하면, 가서 모세가 정리해 놓은 그 율법대로, 여기 예물, 제물이란 단어 없어요.’아우투스’ ‘너 자신’이란 말은 있어요. 너 자신으로 네 구속됨을 Show 보여라,보여.
다시 한번요. ‘너 자신’으로, 말을 하지마, 말을 하지 말고 ‘너 자신’으로, 모세가 정리해 놓은 울법대로 네 구속함을 Show, 보여라! 무슨 말이냐 하면 넌 아직 복음이 뭔지 모르니까, 이 구원이 뭔지 모르니까 내가 네 삶을 갖고, 그의 인생을 차압하는 거예요. 시몬의 인생을 차압한 것처럼, 차압해서 Show, 보이겠다는 거예요. 뭐를? 너 자신을 갖고 구속함, 정결함이 무엇인지를 모세가 정리해 놓은 그 규례, 율법대로 차례차례 보이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레위기에 가보면 털깍고, 옷 벗기고 완전히 그냥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레위기14장으로 가보세요. 6절.
레14:6—문둥병에서 정결케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거할 것이요
계속 7이 나오죠? 이거는 창조의 수, 안식의 수,완료의 수예요 완전수. 새를 잡아서 피를 7번 뿌리고 그리고 한 새, 죽은 새의 피를 산 새에게 뿌려 새를, 얘는 살려주고,,뭐 이런 것들을 계속 해야 돼요.계속 뭔가가 죽어 나가고 어떤 것이 살아나는 거예요.그리고 7일 동안 광야에 나가야 돼요. 병이 나은 문둥병자가.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어린양의 피로 정결케 되어 구원받은 자가 광야 40년을 살아야 돼요. 이게 7이예요. 7일 동안 밖에 있어야 돼, 진 밖에 있어야 돼.광야에 있어야 돼요. 뭐하느냐하면, 9절,
레14:9—7일 만에 그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전부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 껍데기의 하여튼 ‘너’라고 인식이 될만한 건 다 깍아버리고 벗겨버려요. 깨끗이 빨아 버리는 거예요.그리고 10절,
레14:10—제 팔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수양 둘과 일년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가루 에바 십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어린 양과 기름, 성령, 예수와 성령이 등장하는데 팔일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러니까 지금 모세가 이렇게 차례대로 정리해 놓은 게 뭐냐면 칠일과 팔일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놓고 있죠? 7이 뭐라 그랬어요? 창조의 수, 안식은 이렇게 완료되는거야를 보여주는 게 창세기의 첫째 날부터 일곱 째날 안식일 까지 일이었잖아요. 이게 묵시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그 모습이란 말예요. 7! 그런데 이게 역사속으로 내려오면 인간은 이 7에다가 하나님이 완성하신 완료에다가 항상 자기들의 행위와 율법을 보태려고 하죠? 그래서 이 7을 똥으로 범벆 시켜 놓는다니까요. 하나님의 것을. 율법이 내려오면, 예수라는 율법이 내려오면 예수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걸 똥, 율법으로 받아서 이걸 완전히 죽여버리고 뭉게 버리는 게 인간인 것처럼 . 안식, 칠, 하나님의 일이, 뜻이 이 땅에 내려오면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에게는 반드시 이거는 우리가 기여해서 완료해야하는 어떤 것으로, 오병이어, 율법, 똥으로 만들어버린 다는 거예요.
거기에 언약이 가입해야돼죠. 언약이 뭐예요? 에베소서 1장 4절,어린 양의 피로 아들의 피로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언약.그래서 역사 속에서 이 ‘칠’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이 ‘칠’을 인간들이 똥으로 만들어 놓아서 이 똥이 되어 예수가 죽고 이게 예수의 죽음, 피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팔일 째 살아나서 이제 이게 예수에 의해 완료됐다는 걸 알겠어? 라고 팔일, 안식후 첫 날, 구일, 십일은 없어요 성경에. 팔일이예요. 이 영원한 팔일이 어떻게 완료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게 칠일, 팔일 이란 말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팔일,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안식을 여기에서 경험하는 거란 말예요.
아 , 예수에 의해서 어린 양에 의해서 이 안식, 칠은 완료되는 거구나, 그런데 우리가 자꾸 그걸 똥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예수가 죽어서 팔일 째 뭐예요? 어린 양과 성령, 기름을 증거물로 내놓으면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는 완료된거야라고 보이는 게 이 문둥병자 이야기란 말예요. 자, 이 이야기를 문둥병자 네 삶을 통하여 내가 SHOW보이겠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진리를 말할 수 없거든 제사나 잘 지내라’. 왜?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서 이 어린 양이 죽어 너희들은 산 자가 된거다, 부정함이 날아간거다 라는 것을 반드시 우리의 삶으로 그 제사를 증거하고 설명할 것이기 때문에. 이건 제 말이 아니예요.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래요? 너희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잖아요.
그 제사가 어린 양의 삶이 여러분 안에 나타난다니까요. 그래서 그 광야에 세례요한이 참수되어 죽은 거고, 그 광야에 오병이어 를 먹은 그 사람들이 아, 우리가 내놓는 거는 다 똥이구나 이걸 폭로당하는 거고, 이 광야에 여러분이 저는 죄인중의 괴수 맞습니다 라는 이 고백을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라니까요. 다른 거 없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내겠다고 했어요. 반드시.
보세요, 그 위에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너 말씀을 한참 곡해해도 너무 곡해한다.’에이돈’ 표피적으로만 보고 너 나에게 헛된 예배를 하고 있는데 아니, 내가 이제 말씀을 네 안에 넣어서 허리에 띠 띄우고, 야, 네 배 놓아 이제, 놔, 놓고, 다시시의 배 놓고 나 쫓아와! 흙에다가 묻어, 그리고 나 쫓아와 그리고는 내가 너를 ‘조그래오’ 사람을 낚는, 살려내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고 말씀하신 거랑 똑같은 거예요. 문둥병자야, 너 지금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정결케 됐는지 너는 아직 모르네 ~ 그런데 내가 네 삶속에서 말씀을 반드시 설명해 낼거야. 이 뜻이예요. 그래서 SHOW예요. 보일거야, ‘알라’ 그러나 반드시 내가 보일거야. 그러니까 복음이 이해가 안가면 여러분의 삶을 한번 잘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제물된 그 삶을 그대로 살고 있을 거예요. 성도가 맞다면. 그리고 그 삶을 토대로, 그 제사를 토대로 성경을 한번 다시 보세요. 성경안의 모든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로 다시 보일 거예요.그게 예수의 이야기란 말예요.
말하지 마! 쉬운 말로 신앙간증 하지마! 이거예요. 간증하지마! 뭘 간증해? 병 낫고, 잘 되고, 자식이 옛날엔 이랬는데 헌신했더니 이렇게 잘되고,,, 그게 뭔데요? 예수님이 지금 그러잖아요. 간증하지 마! 자, 그렇게 예수님께서 너 가서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내가 네 삶속에서 말씀을 그려낼 거니까그거 복음 아냐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놈이 가자마자 간증했네요. 보세요. 누가복음 5장 15절
눅5: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말한 거예요 가서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눅 5:15—허다한 무리가 ( 물고기들이 또 꼬이죠? 말을 했는데 조각난 그물이예요 이게요. 이해도 못하고 가서 말을 해버린 거예요. 그랬더니 그 말이 뭐라 그래요? ‘소문’이 나요, ‘아쿠오’’ 에코’예요 이게요. 에코는 뭐예요? 공명, 헛소리!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복음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에코로 전해지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에코를 듣고 또 개떼 처럼 모여요 모이기는 또. 모이는데 뭐를 위해 모여요? 병 고침을 얻기 위한 물고기들만 모이더라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해요? 아이 그래, 어차피 잘 데리고 왔다, 모아 놓고 그냥 복음 전하면 되지 뭐. 이랬어요? 도망가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모아오지 말라는 거예요. 누가복음 5장 16절 보세요.
눅 5: 16 –예수는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라
도망가는 거에요. 왜? 그들은 란태생들이거든요. 물고기들이거든요.보리떡들이거든요. 떡이 좋아 예수 찾는 아담들이거든요. 예수님이 도망 가세요.
여러분, 우리는 너무 쉽게 죄를 이야기 하고 너무 쉽게 영생을 이야기 하고, 너무 쉽게 예배 헌신 순종을 들먹여요. 너무 쉽게 감동하고 너무 쉽게 확신을 해요. 여러분 정말 죄가 뭔지 아세요? 여러분 안에 그게 여전히 붙어 있단 말예요. 예수님이 그거 해결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지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자인지를 진짜 아시냐구요? 예배가 뭔지 아세요? 찬송이 뭔지 아시냐구.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못내리고 뭔가에 홀린듯 예배하고 찬송하고 순종한다 그러고 헌신하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성경은 그걸 이렇게 무섭게 경고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셔야 되고, 나에게 천국을 허락하셔야 하며, 나에게 상을 준비하고 계셔야 하는 이런 분이다, 라고,
그 예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맞을까요? 성도는 내가 예수의 죽음에 의해 내 죄가 사해졌다 라는 걸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생명은 예수의 죽음으로 밖에는 주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를 고백하는 사람들이예요. 이 고백을 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계속 예수의 철장에 맞아 죽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의 원수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죄인이예요. ‘노기조마이’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뿐이예요. 여전히 우리는 오병이어,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와 외모로 똥에 구운 보리떡과 란태생의 부정한 물고기만 내 놓고 있어요. 아니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그 삶속에서 반드시 예수라는 열매, 예수라는 약속의 후손을 낳게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즘 나 가수. ‘나는 가수다’ 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여러가지 신조어들이 생겼죠? 나는 꼼수다, 나 꼼수, 나도 가수다, 나름 가수다? 저도 단어 하나 만들었어요. ‘나는 죄수다’, 줄여서 ‘나 죄수’. 그걸 심장에 새기세요.’ 나 죄수’. 나 꼼수 , 나 가수 이런 거 다 잊어버리고 ‘나 죄수’, 이거 좀 잊지 마세요 제발. 그런데 도데체 우리가 뭐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삼아 주시냐구요? 이 면목 없음의 자리, 처음자리로 더 밀려 내려가시라구요.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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