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2번 말씀
본문 롬 5: 8-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계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제가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이 사진은 한국불교조계종 조계사 앞에 걸린 성탄축하 현수막이예요. 아래 사진 한번 보여주세요. 이 사진은 서울 구룡사, 지금 굉장히 크게 부흥해서 수만명의 . 천막 하나에서 시작해서 수 만명의 신도를 거느린 구룡사의 주지 스님이 천주교 포이동 교회 주임 신부님을 찾아 가서 성탄축하 선물로 란을 선물하고 있는 그런 사진입니다. 제가 이 사진을 설명하는 신문기사 일부를 발췌 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구룡사 정 우 스님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정 우 스님은 부처와 예수 마호멧드께서 세상에 오신 의미와 정신은 모두가 같을텐데 그를 따르는 분들이 서로의 아집과 편견떄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같다 며 세 분이 한 시대에 존재하셨더라도 결코 다투거나미워하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박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몸소 실현 하시기 위해서였고 전쟁보다는 공존이 우리들의 화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화답했다. 두 성직자는 내년에는 절과 성당에서 부처님과 예수님말씀을 서로 나누도록 하자고 약속 했다. 절과 성당에 축복처럼 서설이 내렸다.
어떠세요? 마음이 훈훈해 지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게 모든 인류가 보다 나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나요? 예수님과 마호멧드가 석가모니가 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 그들의 말대로 그 세 분은 서로를 사랑하며 공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을까요? 그 세 분이? 만일 그렇다면 절의 주지 스님과 성당의 주임 신부가 이렇게 악술르 하며 포옹을 하는 게 맞죠.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보다 나은 인간상 구축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을 지옥에서 건져 올리기 위하여 오신 거예요. 석가모니와 마호멧드가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을 거예요. 회개하라!!
예수는 인류를 교훈하고 양육해서 보다 훌륭한 인류로 성숙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을 품어 안고 죽으러 오신 분이예요. 우리 기독교가 예수만을 구원의 길로 붙들고 있는 건 정 우 스님의 말 처럼 우리의 아집과 편견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길 이외에는 인간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걸 믿음으로 알고 있기 떄문인거 예요. 본문 10절을 보세요.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아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지금의 현실도 역시 하나님의 원수예요.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 그 하나님만을 왕으로 주로, 삼아 살지 않는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그래서 반역가, 나라의 반역자만 달아내는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린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자신만을 위하여 살 때가 얼마나 많아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러니까 지금도 원수예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죽고 있는 거가 맞는 거예요. 그걸 묵시 속에서 십자가로 완료해 놓으셨다라고 하는 것이지 지금 우리는 그 십자가로 인해서 성자로 변한 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면서 나떄문에 예수가 죽은 게 맞구나를 배우고교훈 받고 있는 거라니까요.
그러한 올바른 자인식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롯하고 선명하게 이해 되어지잖아요. 아,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가 선 것이구나. 내가 예수의 원수, 죄인중의 괴수라는 자각이 없으면 그 십자가는 곧 잊혀진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원수로 성도를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여전히 그냥 살도록 놔두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플뿐이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육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러한 나를 위해 예수가 그 국가의 반역자들만 진다는 십자가를 진 것이구나 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게 되는 것, 이걸 내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내 십자가였구나를 올바로 고백하는 거, 그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 지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불교가 바라보는 예수와 기독교가 바라보는 예수가 같은 예수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와 석가와 마호멧드가 같은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왔다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습니까? 마호멧드가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해 죽임을 당했나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만이 하나님의 원수들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예요. 그래서 성경이 예수만 주요,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으로 가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를 던지신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보세요. 이건 불교인들도 다 외우는 거예요.
요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열심히 보다 나은 인간상을 구축하는 자마다가 아니라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상의 모양으로 와 있는, 여기서 이 세상을 사랑했다 라고 하니까 보편구원론자들, 유니버셜리즘을 지지하는 자들이 거봐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다 구원하실거야, 존 스타트까지 마지막에 지옥은 없어! 이러고 갔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 멸망 받아 마땅한 이 세상에 세상의 모습, 선악과 입에 문 자로 온 세상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는 세상이 항상 둘로 나누어져 있다니까요. 그렇게 멸망받아 죽울 세상, 거기서 구원받을 세상.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했을 때 그건 성도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온 세상, 마귀의 죄까지 짊어지고 간 게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그죠? 이 세상에, 세상의 모양으로 내려와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래요. 왜요? 그 독생자를 믿는 자만 구원하시려고. 그 독생자를 감동시키는 자, 기쁘게 하는 자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독생자를 믿는 자, 독생자 아니었으면 난 큰일날 뻔했네! 가 독생자를 믿는 거예요. 그게 의존이거든요. 믿는다라는 건 trust, Believe가 아니라 Faithful이라구요.
그건 원래 하나님 거라니까요. 그 독생자를 믿는 자만 구원하려고 , 그건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그 행위나 가능성, 세상의 가치등을 믿는 자리, 의존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자들로 지어져 가게 된다는 뜻이예요. 그렇게 믿어주면 구원할게 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서 이미 완료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내려와서 예수님만 의존하고 , 예수님만 붙드는 십자가만 의지하는 자로 지향되어 간다는 거예요. 그들의 삶이. 그들만이 멸망의 자리에서 건져 올려지게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신을 신 삼아 살던 당신 백성들의 오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그게 믿음이니까, 창조주 앞에 그 피조물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 오셨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예요. 그래서 그를 믿는 자만 구원하겠다.이 말의 진의가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믿는 자만, 그러니까 예수님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그 자아를 차압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지 그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이렇게 함양시켜서 ‘혼자서도 잘해요’ 의 이 자긍심 있는 인간들로 성숙시키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이 정우 스님과 이 신부님은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 거기에서 이 처럼이 받는 내용이 바로 그 앞에 나오죠? 볼까요? 요한복음 3장 14절 15절.
요3: 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누구처럼? 뱀 처럼, 놋뱀처럼)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뭐를? 저를 ‘믿는’ 자마다. 뱀을 믿는 자? 놋뱀이 장대에 달려 있는데 그걸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대요,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자기 아들을 뱀처럼 장대에 매달라 죽일만큼 사랑하셨다,가 이처럼 사랑하셨다 예요. 그런데 그 뱀이 어떤 뱀이냐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매단 뱀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을 만나게 된 사건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 불뱀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뱀들입니다. 하나님이 뱀을 보냈어요. 에덴동산에서 그 뱀을 누가 보냈는지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허락, 그 울타리 밖에서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나 존재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불뱀을 이스라엘,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서 물게 하시고 그 물린자들에게 놋뱀을 보게 하심으로 살려 내는 게 구원인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야기인 거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까불뱀에 물리게 한 건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들만 놋뱀을 보게 되어있어요. 멀쩡한 자들이 놋뱀을 왜 봅니까? 불뱀에 물린 자들만 놋뱀을 보게 되어있어요. 그걸 하나님이 하신다니까요.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불뱀에 물린 자라는 자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불뱀에 물리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나 그 장대에 달린 놋뱀이 아무 가치가 없어요. 그렇다면 놋뱀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그 성도, 놋뱀이 매달린 장대가 십자가니까, 예수님이 내가 그렇게 달린다라고 했잖아요. 십자가를 이야기 하시면서, 그러니까 그 놋뱀이 달린 십자가, 예수가 달린, 놋뱀이 되어서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야 된다라는 결론이 도출이 되죠? 반드시. 안 그러면 놋뱀 못쳐다봐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만 구원 받으니까. 그러니까 불뱀에 물린 자만 구원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불뱀에 물린 자들이 어떤 일을 했냐구요. 하나님을 오히려 종 취급하면서 왜 우리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냐구 모세와 하나님을 같이 원망했단 말예요. 자기가 더 높은 거죠? 이게 이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냐구? 에덴 동산에서 그 뱀이 아담과 하와를 부추긴 내용아니예요 이게. 네가 하나님처럼 되라가. 그러니까 결국 불뱀에 물린 자들은 어떤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뱀인 거예요. 그러니까 에덴 동산에서의 그 뱀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의 피조물, 존재의 안에 들어있는 그 악마성, 이게 이게 바로 뱀인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그 뱀이 바로 우리라니까요. 나란 말이예요.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면서 하나님 처럼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끌어내 오자마자 첫 번째 명령으로 준 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바보예요?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이 없다는 걸 하나님이 모르냐구요? 안다니까요 !! 그런데 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그래요? 첫 번째 명령으로.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 자신을 신 삼아 살려고 하는 그 것, 그게 바로 사망이다, 를 알려 주는 거예요. 절대 안된다는 거예요.너희들이 신 삼아 사는 것, 나를 종으로 부리며 너희들이 신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것 내가 반드시 꺽어 버리겠다라는 거예요. 그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었단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뱀인 자기들의 그 정체성으로 하여금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자리로 내닫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풀어 그들을 물게 하는 게 성도의 삶이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그거를 막아주는 게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살아나는 자는 반드시 불뱀에 물려야 돼요. 살아나는 자는.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야 돼요. 물리면 어떻게 된다? 민수기예서? 살려주세요! 내가 뱀이예요, 맞아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게 되어있단 말이예요. 불뱀에 물린 자들의 입에서만.
여러분, 그렇다면 불뱀에게 물리자마자, 아, 나는 이게 죽었네, 큰일 났네, 누가 나 살려주지 않으면 큰일 났네, 맹독을 가진 광야의 불뱀에게 물리면 즉사거든요. 나는 이제 죽었네! 이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뭐예요? 이 역사 속에서, 성도에게? 말씀! 성도에게 말씀이 떨어지면 성도는 곧, 어,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 할말 없는 자네, 라는 자신의 죄인됨을 폭로 당하죠? 왜 말씀이 불뱀이라고 해요? 말씀은 누구? 예수.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자마자 세상이 악으로 마귀로 폭로됐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바로 그런 뱀의 역할을 하신 다음에 그 뱀이 되셔서 죽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앞 뒤 다 잘라먹고 밖에 나가서 예수님이 뱀이래, 그럼 튼일 나는 거예요. 로마서 3장 20절 보세요.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말씀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요일1: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 죄인 아니예요, 라는 자들은 그 속에 말씀이 없는 거라 그러죠? 말씀이 들어가면 어떻게 된다? 나 죄인 맞아요,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불뱀의 역할을 하는 게 뭐예요? 말씀이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에 바로 그 말씀의 기근을 설명하면서 요 이야기를 해드린 거예요 여러분에게. 그렇다면 이 놋뱀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뭘까요? 왜 장대 위에다가 놋뱀을 달라고 하셨을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냥 그 불뱀하나 잡아다가 매달면 안되요? 왜 굳이 놋뱀을 달아요? 성경에 보면 할상 놋, 놋이 주석이예요.놋, 주석은 심판을 상징하잖아요.그래서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손이나 발이 항상 놋이나 주석이예요. 심판의 주란 뜻이예요. 그런데 이 놋은 구부러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항상 놋으로 어떤 조형물을 만들려면 불과 망치가 필요해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횃불과 망치가 등장했다는 거 잊지 마세요. 불과 망치로 심판을 당하는 거예요. 먼저. 뱀으로 심판을 당하는 거예요. 예수가. 그래서 심판 받은 예수, 심판 받은 뱀이 되어 예수님이 장대에 달리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 받을 뱀, 놋 뱀에 물린 건 난데 예수가 심판 받아 죽어서 달렸다니까요.그런데 내가 살았어요. 그걸 바라보면서 저게 내 모습인데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성도예요.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고백을 하냐구요? 아니면 십자가 붙들고 이거 도와주세요, 저거 도와주세요.여기에 혈안되어 있습니까? 십자가는 그런, 여러분에게 이 세상의 문제들 해결하고 여러분의 앞날을 일취월장 승승장구로 풀어주는 능력으로 준 게 아니예요. 기도원에 가보면 온통 저 십자가 끝이라도 붙들고 기도하겠다고 전부 그냥 여기에 모여 가지고 말이죠, 그 끝이라도 여렇게 잡으려고. 뭐하는 짓이예요 그게? 다 자기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그죠? 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바로 나 였습니다. 저 놋뱀이 바로 나 였습니다 라는 그 고백을 하는데 그걸 왜 굳이 만져야 되냐구요? 이런 엉터리 기독교,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십자가마저도 사용하려고 하는 이 엉터리 기독교. 그 십자가를 부적처럼 차에다도 매달고 목걸이로도 달고 다니고 왜? 부적이지 뭐예요? 사고 나지 말라고 달고 다니는 거 아니예요? 그거 보고 누구 예수 믿으라고 달아놓은 거예요? 그거 달아 놓으면은 웬지 안심이 되죠? 걸리적거려서 더 사고 나요 여러분.
놋뱀은 불과 망치로 심판을 받은 뱀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예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세요. 그런데 이 세상이 온통 어두움이어서 빛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봐요.그게 요한복음의 네러티브란 말이예요. 성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성도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못 알아봐요. 일차적 말씀의 기근.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주림을 , 그 기근을 의에 주리고 목마르으로 뒤집어 내는 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예요. 말씀이 성도 안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을 성도가 포착하거나 해석 하는 게 아니예요. 말씀이 성도 안으로 들어가서 좌우에 양날 선 검으로 그의 죄인됨을 폭로해 내는 거란 말예요. 말씀이 성도를 죄인으로 해석해 내는 거예요. 그 때 성도는 자신의 실체를 서서히 보게 되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서 이미 불뱀에 물려 사망으로 종결이 나게 되어 있는 모든 인류의 현실, 에덴 동산에서 무트 타무트, 죽고 죽으리라,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나님이 사망 선고 내렸단 말예요. 그게 뱀에게 물린 거라니까요. 불뱀에게 물린 거란 말예요. 이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죄 없고 흠 없는 제물의 가죽 밖에 없어요. 의의 흰 옷, 예수의 흰 옷 밖에 없다니까요. 이걸 믿는 게 기독교란 말예요. 보다 나은 인간 세상을 만들어 내고 구축해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멋있죠? 그걸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 사람들 벌떼처럼 모여요. 왜? 내가 뭔가 하고 있다라는 이런 자부심이 생기기 떄문에 그래요. 그거 아니다 라고 하니까 있는 사람들도 다 떠나가는 거예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니까요. 내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아담 안에서 불뱀에 물린 자다, 라는 이 자각을 갖게 하는 게 말씀이예요. 그리고 그들이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하고 예수가 놋뱀이 되어 달린 십자가 그것만 바라보게 되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구요. 그렇게 놋뱀에 물린 자, 내가 불뱀입니다, 라는 자각이 있는 자들이 어떤 부르짖음을 토해내는지 민수기로 한번 가볼게요. 민수기 21장7절.
민21:7 –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여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다오, 가 이 말이예요. 정확하게 이 말이예요. 이 뱀들을 나에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내가 뱀이네! 그러는 거예요. 내가 뱀이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좀 건져줘, 그러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세요. 민수기 21장 8절.
민21:8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만 놋뱀을 쳐다 본즉 살더라
여러분 이게 십자가예요. 이게 기독교이고 이게 구원이예요. 놋뱀에게 열심히 기름칠 한 자? 아니예요. 그 앞으로 열심히 기어가서 그거 붙든 자? 아니예요. 바라보는 자. 그걸 믿음이라고 해요. 맞아요 ! 맞아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입니다.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그렇게 모든 인간은 이미 에덴 동산에서 불뱀에 물린 상태예요, 아니 뱀으로 이 역사 속에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들에게 말씀이 임해요. 그런데 그 말씀이 자기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부정해 버리고 죄인으로 폭로해내는 말씀이예요. 선악과 입에 문 불뱀들은 절대로 그 앞에서 복종하지 않아요.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하고 사회와 국가의 정화에 힘을 기울이고 인간의 인격함양에 열을 올리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 입에 문 뱀들의 모습이예요. 그렇게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말씀을 때려죽이는 거예요. 자신들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수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죽이는 하나님 살해범, 하나님의 원수로 남게 되는 거예요.그걸 사망이라고 그래요. 그게 멸망이예요.
그런데 말씀에 의해 공격을 당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이예요. 말씀이 물어버려요. 안 놔요, 말씀이 물고 안 놔요. 그냥 세상이 가는 그 길을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이 말씀이 물로 안 놓는 거예요. 불뱀처럼 물고 안 놓는다니까요. 그리고 결국에는 너는 죽었어!!이걸 자각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살려주세요, 라는 이 단말마의 비명을 반드시 토해내게 만들어요. 말씀이 물어서. 그들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당해요. 그들은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산해 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완전한 요구에 부응이 안 된다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제가 뱀 맞습니다, 이 사망의 몸 죽어야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길이 있다면 저를 좀 생각해주세요. 이게 성도의 마지막 고백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거예요? 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했어? 이걸 진짜로 아는 사람은? 아,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죽인대~. 이거란 말예요. 그러면 그 말씀으로 이 세상에, 불뱀이 되어서 왼 예수가 이 세상 내려오셨다 라는 게 진짜 이렇게 기쁘기만 한겁니까? 절의 중들까지 축하할 일이냐구요, 이게? 세상을 죽이러 오신 분이고 심판하러 오신 분인데. 중과 신부가 서로 란을 선물하면서 행복하죠? 이래야 맞냐구요? 왜 크리스마스 때 전세계에서 술이 가장 많이 팔여야 돼요? 뭘 축하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도데체가? 선악과 입에 문 불뱀으로서의 자기자아의 실체를 직시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산 자일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는 자기의 처음자리를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의 인생이예요. 따라서 ‘이처럼 사랑’ 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아 실현, 자아 확장, 승승장구, 일취월장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상실 자아 해체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거예요. 그거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정말 그게 기쁘기만 하세요?
결과가 묵시 속에 완료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하긴 하지만 여러분 그걸로 아파요. 이차적으로 먼저 고통스러워야 된다니까요. 그게 놋뱀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의 실존인 거예요. 그 삶을 그대로 살아낸 사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어요.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나님에게 맞아 죽었어요. 결국에는. 그래놓고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니네요, 이 고백을 한 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똑같은 고백을 해야 맞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 17절 보세요.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창세기에서는 독자, 외아들인데 히브리서에서는 모노게네스, 독생자예요. 요한복음 3장 16절의 그 독생자와 같은 단어예요. 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모노스,기노마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이해가 되죠?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죽인 게 십자가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생자를 드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는 말예요? 여기서도 그냥 독자, 외아들이라고 써야지 왜 성경에 두 번밖에 안 나온 단어가 여기에 쓰였냐구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교회의 대표가 교회를 품어 안고 하나님께 예수를 드린 거라니까요. 자기가 낳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육적 생산물을 드린 게 아니라 모노게네스, 예수, 하나님을 드렸어요. 하나님에게 . 그러면 그게 무슨 이야기냐 말예요? 도데체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중보자의 모형임과 동시에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에서 나오죠? 동시에 모든 성도들의 조상, 즉 믿음의 조상이기도 해요.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거예요. 이삭도 마찬가지구요. 그럼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역사 속 십자가 삶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먼저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려서 당신의 언약 후손들을 창조해내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와 창조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죠. 그거는 쉬워요. 그죠? 아들의 심장에 카을 꽂아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내는 십자가가 일차적으로 그 안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단 말예요.
아브라함의 헌신을 설명하는 게 아니예요 그거는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살해사건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후손, 즉 약속의 후손이 살아나는 그런 그림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노게네스, 독생자를 드렸다 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이렇게 아울러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오해를 할 수 있단 말예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어린양의 죽음으로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신 이삭은 마땅히 죽어야 돼요.에덴 동산에서 보세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데 살아난단 말예요. 이삭도 마찬가지예요.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죽여!’ 그랬는데 살아난단 말예요.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 십자가를 설명하는 게 성경이란 말예요. 히브리서 11장 18절 보세요.
히11:18- ( 히브리서가 이삭이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
(여기 비유컨데 라는 말이 파라볼래, 비유, 상징 이런 뜻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을 대신 죽이고 이삭이 살아난 것, 이게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 예요. 그래서 엔 파라볼래, 예요. 이건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라는 이런 말이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라고 해요. 헬라어 원문에 보면은. 그 어구는 직역을 하면 죽은자 안에서 도로 가져온 것, 이런 뜻이예요. 죽은자 안에서 도로 가져온 것, 그러면 모리아 산에서 죽은자는 누구예요? 딱 하나 죽었어요. 아브라함 안 죽었고, 이삭 안 죽었고, 하나님이 준비한 여호와이레 의 어린양 하나 죽었어요. 그러면 그 죽은자 안에서 이삭이 살아났다, 도로 받았다라는 건? 그 어린양이 누구를 상징하는 거라 그러죠? 예수 그리스도 이삭은 예수 ㅇ나에서 도로 받은 거, 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이삭의 육적 몸은 죽은 거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이 몸뚱아리가 죽고 숨이 멎는 이런 거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예요. 성도의 죽음은. 이삭이 거기서 살아난 건 이삭의 육은 죽은 거예요. 어떻게? 어린양, 엔, 어린양 안에서 그가 살아났다 라고 한단 말예요, 성경이. 죽은자 안에서 도로 찾았다. 그러면 그 어린양 안에서만 살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얘는 살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 얘는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이삭은요. 그리고 그 어린양 안에서 산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설명하는 거였다 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란 말예요.
다시 한 번요. 어떤 존재가 예수 안에서 살아난다라는 건 그 예수 밖에서는 그가 어떤 용을 써도 절대 살 수 없다는 뜻이란 말예요. 아브라함의 헌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그 육적 헌신이 죽는 거예요 거기서. 사실은요. 모리아 산 위에서. 그리고 이삭이 하나님이 당신이 준비한 제물, 하나님의 제사로 . 예수로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로 이삭이 살아나는 거예요. 왜?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18절.
히11:18 – 저에게 이미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자손, 이게 교회죠? 교회를 약속 하셨는데 그 교회가 이삭으로 말미암는대요. 이게 히브리서의 네러티브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의 머리,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니까 아브라함도 이삭 아래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삭이 살아난 방법으로 아브라함이 살아나는 거죠?아브라함이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냐구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죽음으로 아브라함이 사는 거예요. 그 이삭의 죽음이 약속의 후손인 예수,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후손은 단 하나, 제라는 예수 그리스도다. 요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모형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살아난 거고 고 이삭 안에 아브라함이 들어있었으니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 교회가 거기서 살아난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렇게 어린양 안에서 살아나려면 아브라함의 평생과 이삭의 헌신과 모든 게 다 거기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만 살아나는 거예요.예수의 십자가가 오롯이 드러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모리아 산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은 시험이라는 단어로 축약을 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러죠? 요 싷머이 제가 지난 시간에 설명해드린 예수님이 받은 시험, 페이라죠와 똑같은 시험이예요. 고 예수의 시험, 예수가 받은 시험이 뭐예요?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를 입증하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라고 하는 이런 것을 절대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낸 시험이었어요. 그게 예수가 받은 시험이거든요. 그 시험을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 시험이 요렇게 통과된 거다. 그래서 페이라죠인 거예요. 자기증명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여러분 근데 이 이 시험이 우리에게 떨어져 보세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있어요?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으로 술 한잔 먹고 그냥 홧김에 이런 거 말고 진짜 그게 아주 변함 없이 영원히 그러한 마음이 여러분안에서 지속될 수 있냐구요? 천만의 말씀이예요. 나를 위해 하나님을 죽이면 죽였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못 죽이는 존재예요. 우리는 이 패리라죠, 이 시험에서 항상 탈락 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가슴에 못 꽂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거기서 꽂아버렸으면 큰일날 뻔했어요. 인간은 안되는 거예요 그렇게.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의 심장에 꽂은 거예요.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걸 할 수 있다라고 독려해주지 않고 격려해주지 않느냐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사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의 아들 살해사건, 그 하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잡으라고 한 건 결국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거예요. 이게 진찌 네 아들이냐? 아니면 내 아들이냐? 물으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변화되고… 그래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었어요, 그게 여러분이 생산해 낸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겁니까? 이거 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내 꺼’였을 때는 절대 거기에 칼 못 꽂아요. 하나님 겁니다 라는 이 고백이 있어야 그거 끊어낼 수 있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아브라함은 마른 장작이었어요. 생식 능력 제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어요. 비웃었다구요.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약속 하셨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것이예요. 계시록에 보면 여자가 교회가 철장을 든 아이를 낳죠? 예수를 낳는 거예요.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오셨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그 아들을보내주신 거라니까요. 자격이 있다면 내가 낳은 거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준 거기 떄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 그냥 온 거예요. 우리의 자격과 됨됨이와 상관 없이. 그러니까 나의 구원도 내것 아니고, 나의 됨됨이나 성숙도 내거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는 그 죄,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의 쾌락만을 위해서 사는 그 죄 때문에 아들을 죽였다는 이 인식이 내 안에 오롯하게 새겨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려하는 지향성이 생기는 거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게 성도의 삶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걸 이해하시라는 거지~~ 어떻게 우리가 막 사냐구요?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우리는 자기가 생산 해 놓은 자아라는 건축물을 자기의 생산물로 자랑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구원까지도 자신의 열심과 노력의 산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말씀으로 오셔서 불뱀으로 확 물어버리는거예요. 진짜 너희들이 그럴 자격 있어? 불뱀에 물렸을 때 우리는 어! 내가 뱀이네~?, 뱀에게 속은 하와가 아니라 내가 뱀이네~ , 이렇게 올바로고백하는 거예요. 그들이 놋뱀이 달린 장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좀 생각해주세요. 이 고백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시험으로 개입하셔서 그 인생의 갖가지 이삭들을 전부 그렇게 끊어내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하나님 바라기’ 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과연 나에게 이 역사 속, 내 인생 속에서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이걸 계산 하면 사실 성탄절이 기쁘지 않아요. 그러니까 술 먹고 그냥 취해서 에이 X, 이러는 거예요. 다들 기쁘다 그러는데 난 하나도 안 기뻐. 그죠? 다 망했잖아요. 지금 여기 . 그걸로, 예수님의 오심이 고작 그딴 거 겠냐구요. 아니란 말예요. 오히려 그런 걸 그렇게 끊어 내고 놋뱀으로 달린 예수만 바라보라고 예수님이 오신 거기 때문에 그걸 아는 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짜 찬송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이들이 모여 준비한 성가대의 찬송을 ㅎㅎ 곧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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