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49.아직 죄인+그리스도의 죽으심=하나님 사랑의 확증

Hebrew 2023. 5. 31. 21:45
로마서 49번째 말씀


본문 말씀-롬 5장 5-12절.


롬 5장5- 12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아멘.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랭보 등의 악마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블래시, 로당바흐,라포르그 등의 상징파 시인들이 스스로를 데카당이라고 불렀죠?거기에서 기인한 단어가 데카당스라는 단어 입니다.원래 그 단어는 세기말적인 문예사조의 명칭으로 퇴폐주의와 쇠미,쇠락,쇠태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그들은 반 사회,반 도덕성을 모방하고요 인공미나 추악한 것에서 미를 찾는 일에 탐닉했어요. 인간본연의 본능대로 흘러가 보자는 것입니다.다들 연극하지 말고, 너희들도 원래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연극 하지 말고 함께 흘러가 보자 이게 데카당스죠.


이러한 일군의 데카당들은 자기가 속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조는 문학 뿐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어서 하나의 시대정신화가 되어서 보수주의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죠?그렇게 데카당스는 인간본연의 실체를 폭로시켜가며 이미 결정된 그 역사의 지향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인간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기의 쾌락과 행복과 기쁨을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될 것이고 역사는 점점 추악한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쇠락해 갈 것입니다.그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인생과 역사의 과정이며 종국이죠?결국 멸망이잖아요.사망을 향해서 역사는 달려 간단 말입니다.하나님은 이 인생과 역사를 마귀의 손에 붙여서 경륜해 가세요.그러죠? 그래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라는 그런 말도 하잖아요.


그래서 이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피조물들의 결국이 어떠한 파국을 맞게 되는가를 반드시 증명해 내야 되요.그런데 그러한 와중에 인간들의 자정 운동이 펼쳐지죠.인간들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거예요.우리 인간은 소중하고 그 소중한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 역사와 이 공간은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망하도록 놓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도덕운동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사회 정화 운동이 일어나죠?사회를 개혁해서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이 주인공이 된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 인간들의 자정 운동의 목적지예요.그러한 인간측의 노력은 건강한 시민 의식으로 의로운 혁명으로 건전한 개혁으로 포장이 되어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한껏 부추겨 주죠?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의 눈물 겨운 자정운동 또한 데카당스 못지 않게 인간들의 자기 행복 찾기 자기 가치 찾기의 더러운 시도인 거예요.데카당스가 인간들의 노골적인 자기 행복 찾기의 폭로라 한다면, 그냥 내 맘대로 살거야, 그러한 노골적인 자기 행복 찾기의 폭로라고 한다면 그러한 데카당스와 맞서는 인간들의 자정 운동은노골적이지 않은 감추어진, 은밀한 자기 주인공 되기, 그 자기 주인공 되기의 추악한 행보란 말입니다.그 둘의 양상은 모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며 내 가치를 챙기며 이 세상을 움직여 살아 보겠다라는 고런 선악과 따먹은 가짜 하나님 되기들의 다른 가면일 뿐이에요.두 양상이. 대척점에 있는듯 보이지만 결국 주인공은 ‘나’란 말입니다.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기, 인간들의 행복 챙기기,쾌락 챙기기의 다른 가면일 뿐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그러한 인간들의 자정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자들이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깨끗하게 살았고 거의 혁명에 가까운 그러한 삶을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그런 이들이죠.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세리나 창기 같은 죄인들은 뱀 보다도 못한 자로 보였던 거예요.자기들은 열심히 노력을 해서 이만큼의 자정을 이뤄 냈는데 세리나 창기 같은 이들은 자기들의 자정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그런 파렴치한, 불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자로 그들의 눈에 보였단 말입니다.그들은 세리나 창기들이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와 보편적 자존심의 평균점수를 깍아 먹고 있는 자라고 생각을 했어요.그래서 더욱 더 미워한 겁니다.내가 인간인데 왜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과 가치를 깍아 먹느냐는 거예요. 너희 같은 인간들이.


왜 저런 인간들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게 더럽게 오염이 되어야 하느냐고 분개를 했던거죠.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선악구조에 의한 판단에 의해서요.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의 손을 들어주셨어요.창녀 노릇하고 세리 노릇하는 게 잘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데카당스의 흐름 속에 들어있는 그 세리나 창기, 그 대척점에서 자정 운동을 하겠다고 부산을 떠는 그 바리새인들 모두가 다 죽은 흙으로 끝장이 나는 거예요.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았단 말이예요.


그 중에서 누가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느냐가 관건인 것이지 누가 세리와 창기의 자리를 벗어 났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인생의 목적과 내용을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3장 18절 보세요.


전3장 18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이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의 시험장 이래요. 그런데 그 시험이 무엇을 증명하는 시험인고 하니 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게 없으며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헛된 것임을 경험하게 하고 교훈하는 시험이라는 거에요.잘 생각해보세요. 에덴 동산에 짐승은 단 하나 밖에 없었어요.거기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짐승.뱀이죠? 뱀이나 인생이나 똑같은 존재라는 걸 이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배워야 되는 거거든요. 모든 인생은 이 역사라는 그들의 건축물을 세워 가면서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언젠가는 한 번에 사라질 그런 짐승들의 우리, 짐승들의 우리 건설, 그 우리 건설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콧김, 그 하나님의 생기가 은혜로 가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 것이라는 그 사실을 이 역사가 증명해내야 된다는 뜻이예요.그런데 그러한 짐승들이 역사라는 이 짐승우리를 건축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이 세상 사람을 건축자라고 부르죠? 그런데 그 건축자들은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항상 버리는 건축자들이예요.인생의 건축자들은. 그 짐승우리를 건설하면서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신이다! 라고 우기고 있는 게 이 역사의 형국입니다.지금.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너희들은 짐승이다, 뱀 새끼다, 그거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붙들으라고 이 역사를 허락했는데 이 역사는 아냐, 우리는 신이야. 왜 우리가 뱀이야? 이렇게 서로 우기고 있는 거죠,이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 인거예요. 서로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네가 죽은 거야, 아냐, 네가 죽은 거야 이러고.


하나님은 이 땅, 즉 역사를 뱀에게 먹이로 주셨어요.하나님이 흙을 뱀의 먹이로 주시죠? 그게 이 땅이란 말예요.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우리, 뱀의 먹이예요. 그래서 주님은 인생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고 인생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하는 거예요.그 독사의 새끼는 바리새인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 바리새인 안에는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 라니까요.우리도,구원받은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단 말예요.자기의 자존심 챙기기 위해서.독사의 새끼는 나라구요. 내가 뱀 새끼란 말입니다.그래서 인생과 역사는 마귀의 종이고 죄의 종이며 선악구조 속에서 인간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라고 유혹했던 바로 그 뱀의 종인 거예요.이 역사와 인생은. 지금 뱀의 종이란 말예요.


한 마디로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 처럼 살고 싶어하는 뱀이에요.우리 모두가 다 그 삶을 추구한다구요.예수를 믿고서도.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의 인간들의 성숙 경쟁이나 가치 경재은 마치 뱀들이 벌이는 미인대회 경연 같은 거예요.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세요. 산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뱀 수 백 마리가 모여서 가장 착하고 영리하고 예쁜 뱀을 선발하겠다고 미인 선발대회를 하고 있어요.미사 인가요? 미인이 아니라. 사람이 보기에는 모든 뱀이 그냥 뱀이죠?아무리 이뻐도 그냥 뱀이라구요.징그러운 뱀.그런데 뱀들 사이에서는 힘 있는 뱀, 지혜로운 뱀,예쁜 뱀의 구별이 있어요.상상하는 거에요.그래서 그 뱀들은 자기들의 수준에서 가장 멋진 뱀,가치 있는 뱀을 선발하고 있는 거예요.잘 보니까 그 중에서 가장 멋진 뱀으로 뽑힌 자가 근사한 트로피를 들고 왕관을 쓰고 행진을 합니다. 그리고는 마이크 앞에 서서 이 모든 영광을 인간들에게 돌리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죠.그러잖아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빤쓰만 입고 나온 아줌마들이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런 거랑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뱀은, 가장 아름다운 버섯이 독버섯이듯 독사 입니다. 그렇게 뱀 사이에서 가장 착하고 훌륭하다고 선발이 된 뱀은 사람을 안 문다, 맞습니까? 아닙니다.그것도 뱀 입니다.뭅니다. 위험해요.뱀은 아무리 예뻐도 뱀 이예요.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아무리 성숙한 모습을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해도 그는 하나님을 히롭게 하는 뱀 일 뿐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성숙한 뱀도 다 찍어버려야 맞는 거예요.뱀이 자기를 치장하겠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징그럽고 더러울 뿐이죠.우리가 보기에.그러한 와중에 땅꾼들이 그 뱀들의 자기경연 현장에 당도 했어요. 땅꾼들이 일등 한 뱀, 이등 한 뱀, 삼등 한 뱀 구별하면서 잡습니까?그런 건 땅꾼 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관심이 없어요.인생이, 저주 받은 인생이, 저주 받은 흙 속에서 만들어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관심을 못 끕니다, 여러분.땅꾼들은 그냥 보이는 족족 뱀의 대가리를 찍으면서 잡아야 되요.그러 심판이라고 해요.그걸 종말 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뱀들은 그렇게 땅꾼들에게 심판을 당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도데체 나 같이 착하고 예쁜 뱀을 이렇게 자아실현과 자아확장에 애를 쓴 이 뱀을 왜 저렇게 죽이려고 하지? 도데체 저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뱀들이 생각할 거라구요. 그들이 바로 옛 뱀 마귀와 함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될 뱀들인 거예요. 왜 내가 저들에게 심판을 받아야 되지? 우리는 이렇게 경연대회까지 열어 가면서 훌륭한 뱀 되기 위해 애 썼는데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되지? 이게 저주 받아 죽을 뱀인 거예요.그런데 거기에서 건짐을 받는 뱀들이 있어요. 그들은 믿음을 선물 받은 뱀들이예요. 그들이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 뱀 맞습니다.그래서 저는 평생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님의 발 뒤꿈치를 물어서 빨아 먹었습니다. 뱀의 후손, 독사의 새끼는 여인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어 피를 빨게 되어있습니다.예수를 죽이는 삶을 사는 거예요. 평생 자기를 위해서.


나는 뱀이 아니고 신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수시로 끌어내리는 삶을 살았습니다.이게 예수의 뒤꿈치를 무는 거지요.그런데 그러한 뱀을 위해 예수님께서 저주의 놋뱀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그러니까 나 뱀 맞죠?그래서 저는 그 저주의 놋뱀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면목 없지만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이게 구원 받는 뱀인 거예요.예수님과 그 옆에 달렸던 구원 받은 강도가 바로 이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준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민수기의 그 놋뱀 사건을 십가로 풀어주죠? 내가 그 놋뱀이 장대에 달린 것처럼 달릴 것이다.십자가란 말예요. 그러니까 골고다 언억에 십자가가 세 개 서 있었는데 거기에 다 뭐가 달려 있는 거예요?지금. 뱀이 달려 있는 거예요.가운데 예수님, 놋뱀, 양쪽에 진짜 뱀.구원 받은 뱀, 구원 못 받은 뱀.그래서 둘 다 강도이고, 예수님도 그 강도의모습으로. 뱀의 모습으로 똑같이 달린 거란 말예요.


그런데 놋뱀이 되신 예수 옆에 한 뱀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내가 바로 저렇게 죽어야 할 뱀 이었는데 저 분이, 죄도 없는 저 분이 나를 대신해서 뱀이 되어 죽으시는구나. 한쪽 강도가 그렇게 얘기했죠?저는 죄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여기 이렇게 달린 거지만, 나는 뱀 맞지만 저는 뱀 아니다.그런데 뱀인 나처럼 뱀이 되어 죽고 있다 라고 한 게 바로 구원받은 뱀인 거예요.그런데 다른 편 뱀은 내가 왜 뱀이냐?나를 여기서 좀 내려다오.그리고는 뱀이 되어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지 몸 하나도 구원받지 못하는 더러운 뱀,조롱했단 말예요.이게 다른 거예요.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고 인정하게 되요.양쪽에 있는 뱀이 뭐가 좀 성숙한 뱀, 깨끗한 뱀이 아니었다니까요, 똑같은 뱀이었는데 그의 고백이 달랐던 거라구요.


그렇게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고 인정해요.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나는 뱀, 나 죽은 흙,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사는, 땅의 것만 바라보는 뱀 ,이런 인식.올바른 자기 인식이 있단 말입니다.그런데 그러한 자기를 위해 예수님께서 뱀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걸 믿음으로 깨닫는 거란 말예요.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 되는 거예요.이게 오늘 본문의 개괄적 내용이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공식을 쓴거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심=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이게 역사를 풀어내는 유일한 공식이예요. 이게 역사의 목적이라니까요.역사의 실체라구요 이것이.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내는 거지 인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해 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죠.제가 이 본문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성경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 간음한 여인을 누가 데려오는지 아세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데려오죠. 율법이 데리고 오는 거예요.그리고는 예수님께 그 여인을 참소,고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서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고소자로 등장을 하는 거죠.고소자들에 의하면 이년은 ‘뱀’입니다 로 고소를 하는 거죠.성경은 참소하는 자가 ‘뱀’이다, 그래요.마귀, 옛 뱀 이라고 하는 거라구요. 두 뱀이 등장 하는 거예요.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뱀 맞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 ‘뱀’을 구원하기 위해 심판자가 뱀이 되어 버린 그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성전이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그 성전에서의 최후의 심판의 작은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란 말예요.그러니까 두 종류의 뱀이 나오고 그 뱀, 인생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의 아들이(뱀이 되어서 이 땅에 내려오셨잖아요) 그 뱀의 이야기예요, 놋 뱀의 이야기.


구약으로 가면 그 그림과 아주 흡사한 그림이 나오는데 먼저 거기로 갔다가 올게요. 그래야 이해가 쉽습니다.스가랴서 3장 1절 보세요. 스가랴서도 역시 계시록 입니다, 묵시록 이예요.


슥3장1절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기로 여호와께서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 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 한 관을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죠?),여호와의 사자가 곁에 섰더라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뱀의 모습으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서 있어요.그리고 그 더러운 죄인인 여호수아를 참소하는 사단이 그를 대적하며 여호수아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사단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참소하고 있었다는 건 여호수아에 비해서 사단의 옷이 훨씬 깨끗했다는 말이죠?그러니까 더러운 옷을 참소할 수 있는 거니까.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단을 야단치세요.뭐라 그러죠? 이 사람은 내가 방금 불에서 건진 자 아니냐 그래서 그슬린, 그을음이 남아 잇어서 더러운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는 그 더러운 것을 벗기라고 하는데 그 밑에서는 그 더러운 옷을 죄라고 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이런거죠.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성도가 불에서, 환란에서 나오는데 흰옷을 입고 있죠? 그 이야기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환란에서 나왔는데 그가 햐안 옷을 만들어 입고 역사 속에서 올라온 게 아니라 여전히 더러운 옷을 환란을 통과하여 결국 나는 이런 더러운 자가 맞네요 라는 모습으로 올라 왔다는 거예요.그러니까 환란은 여러분들에게 죄를 덜 짓게 하려는 도구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부인의 도구, 나는 이런 죽음 흙, 이런 죄인 맞네요, 라는 자리로 내려 가도록 주어진 게 환란인 거예요. 그게 불 이라구요. 그게 역사란 말예요. 그래서 역사를 계시록이 환란이라고 얘기 한거예요.환란에서 올라온 자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올라왔더니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자가 서 있어요. 쟤 보래요, 저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서 삽니까?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가 역사속에서 환란의 불을 통과하게 하여 저가 저렇게 더러운 모습으로 여기에 왔다, 쟤 봐라, 아무말 못하고 있지 않니? 자지가 죄인인 줄 안단다.지 옷 더러운 거 알아, 아무말도 못하고 있지 않니? 내가 의도한 거라는 거에요. 하나님이요. 내가 지금 건져 냈다는 거예요.당연히 더러워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더니 뭐라 그러냐하면 그 옷 벗겨라! 그래요. 그리고는 하나님이 의의 흰옷을,예복을 입혀 주시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거기서 찬송이 터지는 거예요.할렐루야 찬송이.나는 알아요. 하나님 앞에 도저히 칭찬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걸 내가 안다니까요.역사라는 환란을 통과하여 자기가 부인 되어져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없다라는 걸 안다구요.


그렇게 하나님 자리에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혀 주는 거 그래서 평생, 영원히 찬송하게 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이 모습을 계시록에서 한번 찾아 볼게요.계시록 7장 13절 보세요.


계 7장 13절


장로중의 하나가 응답하며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큰 환란에서, 불에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씻어 그 옷을 희게 하였느니라


보세요. 그들이 흰옷을 입긴 입었는데 어린 양의 피에 씻어서 흰옷을 입은 거래요. 그들이 노력하여 하얀 옷으로 갈아 입은 게 아니예요. 19장으로 가면 더 확실하게 나오죠?


계 19장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흰옷의 이야기를 하면서 혼인 이야기를 해요.)


그 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누가? 하나님이 입게 하시는 거예요. 스가랴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란 말예요. 하나님이 입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락 하시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러냐하면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옳은 행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의의 옷으로 입혀 주는 걸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그래요.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바로 그 옳은 행실이란 말입니다. 스가랴서에서는 그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 옆에 여호와의 사자, 예수가 서 있었죠?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피가 등장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증명하는 거예요.성경, 역사,인간 모두가 다 예수를 증거하는 거예요.그래서 예수로 비롯되었고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께로 돌아간다,라고 그러는 거예요.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니까요.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창조 되었다니까요.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천국< 만약에 그게 여러분의 신앙의 목적이라면 여러분은 신자 아니예요.그게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목적지인 줄 아셨죠?내 구원, 내 천국. 그게 비열하고 야비하고 더러운 진짜 기복주의 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도데체 어떤 게 하나님의 일입니까, 어떤게 성도가 해야 할 올바른 행실입니까 그랬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행실이다, 에르곤 이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그게 일이다.그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행실이다. 예수 믿는 거요.여러분은 예수를 닮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여러분이 예수를 닮는다는 건 우리가 예수를 그냥 스승의 자리, 사람의 자리로 끌어 내리는 거라니까요.잘 이해하셔야 되요.예수를 믿어야 되요. 예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를 본 받겠다 라고 하는 건 예수님은 사람입니다 라고 주장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들 욕할 필요 없어요.그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실은요.


그렇게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에 불과 하며 그 옷을 입고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우리의 의는 최고의 의는 더러운 똥걸레라고 그러잖아요. 이사야가. 그게 우리가 입고 가는 거라니까요 그게. 하나님 앞에.그런데 그걸 찢어발기는 거예요.그게 창세기의 무화과 잎사귀로 만든 치마란 말예요.그걸 찢어발기는 게 역사라니까요.그걸 벗기시고 무상으로 당신의 피로 만든 의의 흰옷을 입혀 주시는 것, 그걸 구원이라고 한다구요. 그래서 짐승의 가죽으로 바꿔 주는 거예요.창세기에서.그걸 구원이라고 하고 그러한 예수님 절대 의존자로서의 성도의 고백이 일어나는 그 현장을 성경이 어린 약의 혼인잔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당신만 의지하겠습니다.저는 당신 안에서, 이브가 아담 안에서 나왔잖아요.당신 안에서 당신의 수고로 창조된 것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없이는 존재도 아닙니다.이걸 창세기에서 혼인이라고 하잖아요.남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연합하여 혼인을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란 말예요. 그걸 혼인잔치라고 한단 말예요. 계시록에서, 흰옷을 입혀주는 그것을.


그렇다면 요한복음 8장의 그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뭐겠어요? 지금 스가랴서 계시록 다 찾아 봤는데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 교회의 혼인잔치 이야기 인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열 두 살 먹은 혼인 적령기의 소녀,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과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공히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였음을 말씀드렸죠? 금식이라는 율법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던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신랑이다!라고 말씀 하셨어요.신랑인 내가 왔는데 너희들은 신랑인 나를 못 알아 보니까 여전히 그렇게 금식, 율법지킴 이런 걸로 그렇게 힘들게 신랑을 기다리고 있구나. 아니야, 신랑은 그렇게 열심을 부려서 차지할 수 있는게 아니라 신랑이 와서 너희들을 택한 거란다.이걸 가르쳐주는 거예요.


거기에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 그 두 이야기는 공히 예수님의 신부 이야기란 말예요.예수님이 의의 흰옷으로 입히는 거. 두 여자 공히, 열 두해 혈루증 앓던 여인은 십 이년 동안 남자를 한 번도 못 만져 봤고, 이 열 두살 먹은 여자애는 열 두살 되기까지 남자와 가까이 있으면 안되요. 열 두살이 되어야 혼인 적령기란 말예요. 그런데 이 둘 다 십 이년 만에 처음 붙든 남자의 손이 예수의 손 이었다니까요. 이게 예수와 이 죄인들의 혼인잔치 이야기란 말예요. 그런데 그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이었느냐 하면 열 두 해 동안 뱀처럼 땅에 피만 쏟던 여자였단 말예요.부정한 여자,심지어 죽어있던 여자! 그 여자를 예수님이 가서, 신랑이 가서 살려 내어 옷을 입히는 거예요.고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역시 부정하고 더러운 여자, 죽은 여자가 등장하고 그 여자들을 율법으로 참소하는 바리새인들이 등장 하잖아요. 그리고 이 여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예수. 심판관인 예수가 등장하는 이야기란 말예요.그것도. 마찬가지예요. 더럽고 추악한 옷을 입은 간음한 죄인이, 여자가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요.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남자는 빼버린 거예요.남자는 어디 갔냐구요? 둘 다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데 남자는 배고 여자만 왔단 말예요.하나님이 뭔가 교회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참소자들은 기세등등하게 그 더러운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지금.뱀이 한 마리가 온 거예요. 저 뱀, 우리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과 가치를 깍아 먹는 저 뱀,저걸 죽여야 되는 거예요.그래야 인간의 보편적 가치과 자존심이 올라 가니까.참소자,요게 진짜 뱀이죠. 참소 하는 자, 항상 뱀은 마귀는 참소하는 자예요.등장 한단 말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땅에 뭔가를 쓰시죠?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역사를 도화지 삼아 땅에 흙에 뭔가를 쓰신 사건은 성경에 딱 세 번 나오죠? 첫 번째 사건이 십계명 돌판에 하나님이 율법을 쓰신 사건, 두 번째가 다니엘서 5 장에 벨사살 왕 폐위사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걸 쓰신 거예요.세 번째가 여기란 말예요.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뭔가를 쓰실 때는 항상 인간들의 죄가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날 때예요.하나님께서 십계명 돌판에 계명을 쓰시자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실체가 폭로되죠?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판에다가 율법 말씀을 쓰시는 거예요. 말씀이 떨어지면 인간이 죄인임이 폭로가 되요.그래서 골수와 관절과 영혼까지 쪼갠다고 하는 거예요.죄인임이 폭로된다는 뜻이예요. 어후, 골수 안에까지 죄가 들었어? 이 이야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율법, 말씀을 쓰시자 그 아래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던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하나님이다 그러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이게 우상섬기는 거예요. 여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뭐죠?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위하여죠? 그러니까 내가 신이 되어서 자기를 위해 살고 있던 뱀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사기치고 있었던 거예요.그런데 하나님이 땅에다가 율법 말씀을 쓰시자 그들의 실체가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나서 삼 천 명이 죽어 버려요.역사의 실체 인생의 실체가 확 폭로되는 거라구요.


다니엘서 5장의 하나님의 친필 사건은 뭐예요? 벨사살 왕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집기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 그 집기들을, 성전을 사용하는 거, 술 담아 먹고 그러죠? 세상 왕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전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그림이라구요.그걸 우상섬김이라 그래요.그렇게 죄가 폭로되자 하나님이 내려와서 쓰시는 거예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너는 죽어야 할 자가 맞구나! 하고 그날 죽습니다.심판이 일어 난거죠.인간의 실체가 역사의 실체가 폭로 되는 거예요.세상에서 왕 되고 싶어하는 실체가 폭로 되고 심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흙에, 땅에 뭔가를 쓰시면, 말씀을 쓰시면, 말씀이 땅에 떨어지면 왜 이 역사가 죄로 폭로되고 심판이 일어날까? 이게 성경에 이미 예고 되어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서로 가보세요.


렘 17장 13절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버림이라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여호와를 떠난 자들, 거부하는 자들 그들은 흙에 기록이 된다 그러죠? 이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기루라는 거예요. 흙에 뭘 쓰면 바람 한 번 불면 쓱 사라지잖아요. 땅에 기록하는 게 다 그런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땅에다가 뭘 기록 한다라는 건 너희들은 이걸 잘 지켜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땅에다가 헛된 건물 쌓는 거다, 헛된 건축 하고 있는 거다를 보여주는 거라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인간들이 땅에다가 자기 이름 새기기에 삶을 역사로 살아내는데 그것 자체가 다 헛 거라는 그런 뜻이예요.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자는 땅에다가 뭘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그걸 밝혀 내는 게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이라니까요.


그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흙에 기록하려고 땅에 기록하려고 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죄인이요, 그게 바로 저주 받을,심판 받을 자들의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흙에 뭔가를 기록하면 죄인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이 역사에 자기들의 이름을 구축하려고 해도 그건 일 순간에 무너질 허망한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렇게 역사를 구축하려고 하는 역사의 건축자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걸 똑바로 알라는 거예요.그래서 건축자들은 생수이신 예수를 울타리 밖으로 자꾸 던지는 이런 비유를 예수님이 자꾸 말씀하신 거예요.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흙에 무얼 쓰시자마자 인간들이 전부 죄인으로 폭로 되죠? 간음한 여인 뿐만이 아니라 그를 참소하는 자들 까지도 죄없는 자가 쳐라! 했더니 다 죄인으로 폭로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뭘 쓰면 그렇게 죄가 폭로 됩니다.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 요한복음 8장 바로 앞에 뭐가 있어요? 7장인데 거기 무슨 얘기가 있냐구요? 초막절 이야기가 그려져 있잖아요.거기에. 거기에서 초막적 율례를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와요. 초막절 율례는 성전에다가 큰 초를 세워 놓고 물을 계속 갖다가 붓는 그 율법, 율례를 행해야 되요.그 때 예수님이 그걸 막아서고 내가 생수니까 나에게 와서 마셔라 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그래놓고 이 이야기가 붙어 있단 말예요.그러니까 생수인 나에게 와라 했는데 아무도 안 왔단 말예요. 그 때 생수를 떠난 자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간음한 여인이 등장 하는 거예요.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보세요, 이걸 한 번 형상화 시켜보자구요. 내가 생수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이 흙에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쓰시는 모습, 이건 생수가 흙과 지금 섞이는 모습이죠? 마치 소경이 눈을 뜰 때 예수님의 침, 생수가 흙에 이겨져 그의 환부에 발라짐으로 그가 낫는 그런 그림인 거예요 .이건 민수기의 말씀을 형상화하여 그려내고 있는 거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간음한 여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런데 어떻게 다뤄요? 티끌, 흙을 물에 섞어서 거기에 두루마리의 말씀을 플어요. 그러니까 생수이신, 말씀이신 예수에 흙이 섞여져서 여자에게 먹여지면 이 여자가 간음한 여자일 땐 붓게 되요.그러니까 그건 흙이 물에 섞이면 반드시 죄인됨이 폭로가 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그렇게 폭로가 되는 것일뿐만아니라 그러한 예수에 의해 죽어야 할 그여자, 간음한 그여자가 살아 올라 오는 거예요. 어떻게? 물이, 생수가 흙에게 주어져 이가 산자가 되고 생수가 흙에, 생기가, 콧김,메시아흐,여호와가 르와흐로, 생기가 되어 그에게 부어지고 이가 살아나고 이 흙이, 저주의 흙이 예수에게로 오는 거예요.그렇게 해서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 환부에 바르자 그게 예수님 거가 되고 마태복음 8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모든 질병을 짋어 지셨다, 가져가셨다고 한단 말예요. 이사야서 53장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그 일이 일어나는 거, 이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오면 재밌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도망가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아이고, 용서해주세요 라고 그 심판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되는데 조놈 앞에서만 사라지면 여전히 나는 뱀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살 수 있어 하고 도망가는 거예요. 인간들은 양심을 가지고도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는 데 쓰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목 매달아 죽은 인간 하나있죠? 유다, 하나님이 그 유다 보고 뭐라 불렀어요? 마귀라고 블렀어요. 마귀는 뭐예요? 옛 뱀.뱀이란 말예요. 뱀들은 자기 양심을 가지고도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영광,가치를 챙기는 데 사용하더라를 보여주는 게 고 뱀, 유다라는 뱀, 여기에 있는 이 간음한 여자 안으로 들어간, 거기서 율법으로 참소하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요게 다 뱀들이란 뜻이예요.


간음한 여자를 참소하려고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이 이거 다 죄인이네~ ?그랬다니까요.데카당스나 자정운동 하는 자들이나 이건 뭐야? 다 죄인이네~.이 얘기란 말예요.거기에서 누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느냐가 관건이라니까요.이게 구원, 어린양의 혼인잔치란 말입니다.그렇게 양심에 가책을 받아 양심으로도 나의 가치를 챙기겠다 라고하는 그들과 반대로 어디로 갈 데가 없는 여자가 거기에 나와요.이 여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간음한 여자,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나 지금 당장 지옥 보내도 아무 할말 없어요 라는 그 여자예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확증된 죄인.이 여자는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가자마자 죽어요.예수님 앞에서 한 발이라도 떠나면 아무나 때려서 죽여도 되요. 율법이었으니까.그러니까 그 여자는 예수님 앞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난 여전히 죄인인데 저들이 죽이면 어떻게 해요? 무서웠단 말입니다.예수님께서 땅에다가 흙에다가 다시 무얼 쓰시죠? 요한복음 8장 8절 보세요.


요8장 8절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 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더라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뭔가를 쓰시자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는 진짜 죄인이 누군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죠. 이건 시내산에서 내려온 첫 번째 돌판에 의해서 이 역사의 죄가 폭로되고, 두 번째 돌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바로 그 형국인 거예요.그래서 ‘다시’ 예요.다시 쓰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첫 번째 돌판에 의해서 죽어야 할 죄인임이 폭로가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죠? 이게 구약 이예요. 아주(,,,,?)하나님이 첫 번째 쓰신 구약, 첫 번째 쓰신 말씀,율법 이라구요. 그런데 두 번째 돌판 사이에 누가 끼어 들어요? 모세가 끼어 들어요.중보자로 끼어 들죠? 어떻게? ‘하나님 나를 죽이세요.나를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우세요’ 그래요. 재밌죠? 땅에, 하나님이 땅에다가 금방 지워질, 인간의 죄를 폭로할 무얼 기록하는데 묵시속에서 완료된 또 다른 책이 등장 하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들이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고 그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열 수 없는 책이예요.예수님이 봉함해서 갖고 있는 책이예요.계시록에 보면. 그 책을 모세가 이야기 한다니까요. 지가 어떻게 알고 그 책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걸 아냐구요? 이미 창세전에 그 책에 자기 이름이 적혀져 있는 걸 알아요. 내 이름을 지워주세요 그런다니까요.차라리. 출애굽기 32장 31절 보세요.


출32장31절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 하시면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수이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흙에 기록한다 라고 했는데 하늘의 묵시 속에 기록된 하늘 백성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나 이런 곳에 이 책이 계속 등장 하는 거예요.생명책이. 이 책은 이미 묵시속에서 완료되어 있는 책이라 인간들이 그 어떤 노력으로도 가감할 수 없어요.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이 땅에 기록된 인간들의 역사와 인간들의 이름은 마지막 순간 다 불살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그 책에 기록된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봉함이 되어 있다 라는 거예요. 그 책은 은혜의 책이고 긍휼의 책이고 창조의 책 이예요. 그래서 인간과 역사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도 그 책의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그리고는 두 번째 돌판이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돌판도 하나님이 쓰신 거고 똑같이 율법이 기록되어 있어요. 역시 이걸로도 인간들은 죽어야 할 자가 맞다 라는 것이 폭로가 되어야 되요.


그런데 그 중간에 중보자, 그 중보자의 은혜로 이미 완료된 어떤 자들이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생명책이. 그러니까 이 두 번째 돌판을 이스라엘이 법궤 안에 넣어놓고 그 돌판을 볼 때마다 뭘 생각해야 되요? 야, 첫 번째 돌판 때, 그 때 우리 아주 식겁했잖냐? 이제 잘 지키자, 응? 그래서 살아야지, 그랬을까요? 여전히 이 사람들은 못 지켜요.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개판치고 살았잖아요. 사사기 공부했잖아요. 우리가. 그럴 능력이 주어진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무얼 기억해야 되냐구요? 아, 여전히 우리는 이 율법 때문에, 하나님이 흙에 쓴 것 때문에 죄인으로 폭로 되어 죽어야 되는 거 맞는데 내가 왜 살아있지? 아 모세가 목숨을 담보로 하여 날 살려 달라 그랬지? 라고 중보자를 기억하는 용도예요. 이게 신약이라구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이니까 우리가 안 지켜도 되는 거 신약은 이제 은혜 받고 성령 받았으니까 다 지켜야 되는 거 그래서 그걸 지킨만큼 상 받는 거 요렇게 이해하고 있다니까요.


아니예요. 신약도 역시 예수를 믿는 거예요. 믿는 데 사용되는 거예요.신약 역시. 하나님이 다시 쓰시면 그 때에 나는 예수 없으면 죽어요 라는 요 사람, 요 사람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이제는 다시는 간음하지 않는 여자가 될께요 해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다시 썼는데 그 여자 하나 살아나는 거예요. 나머지는? 우리 나가서 열심히 연극하면서 착하게 살자 그러고 다 나갔다니까요, 바리새인들이. 그러니까 오늘날 개혁주의가 성경을 어떻게 성경을 보고 있는지 잘 보시란 말예요.한 발 더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 그래야 진짜 십자가가 있는 거라니까요 거기서. 바리새인 처럼 보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지금.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이던 신약이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없으면 우리는 그냥 뱀 새끼로 저주 받아 죽는 게 맞습니다! 이거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믿어 천국 가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결국 모세가 광야에서 죽잖아요. 이스라엘은 그 모세의 시체를 밟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예요.우리가 신약시대에 예수의 십자가 딛고, 내가 길이라고 했으니까, 예수의 죽음 밟고 천국 들어가는 거랑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지 인간들의 열심과 변화와 성숙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장이 아닌 거예요.로마서 11장 32절 보세요.


롬 11장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확증해 내려고 하시는 건 하나님의 긍휼이예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니까요. 인간들의 순종 아니라구요. 그래서 불순종에 가두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역사를 확 펼쳐 본 거예요.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이거 증명하는 거. 그러면 간음한 여자 속에서 그 여자와 함께 용서를 받은 우리 성도들, 우리가 바로 그 여자란 말예요. 성도란 말에요. 그 사람들이.우리 성도들의 자인식이 어때야 되겠어요? 세상의 그 율법의 고소를 받고 자기의 꼴이나 자기의 외모 자기의 행사, 자기의 업적, 성숙의 정도 이런 걸 보면서 아, 난 아닌가봐. 이렇게 절망하거나 낙담 해야 되요? 세상의 참소에 일희일비 해야 맞아요? 요게 내가 맞다면. 아니죠?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혼인잔치에 초대를 해서 의의 옷을 입혀 주고 나를 건지셨단 말예요. 예수님이 뱀이 되셔서. 그래서 나를 신부로 맞아 주셨는데 여전히 세상의 참소에 아, 나 나가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우면 어떡하지?요렇게, 내 됨됨이는 아직 자격이 없는데, 요게 뭐예요? 고걸 죄라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걸 거부하는 걸 뭐라 그래요? 성령훼방 죄라 그러죠?성령훼방 죄가 이거예요. 목사 말 안듣는 게 성령훼방 죄가 아니라. 요한복음 8장 10절 보세요.


요8장 10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야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 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왜 사람들이 다 정죄하지 않고 도망갔죠?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는 건 뭐예요? 나도 죄인이란 뜻이죠? 예수님이 자기를 죄인의 대열에 연합시키세요. 이게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인 거예요.왜? 네 죄를 내가 가지고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데, 내가, 하나님인, 심판관인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고 용서했을 때 그 어떤 다른 이가 너를 정죄하거나 참소할 수 있니? 봐라, 그랬어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 물려 버리신 거예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을 때 그 누구도 너를 참소하지 못해. 사단 할아비가 와도 안된다, 예요. 그런데 네가 지금 여기에서 네 꼴을 보고 세상이 너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렇게 너의 외모와 너의 업적과 성숙의 정도를 갖고 네가 불안해 하고 있다면 넌 죄를 짓는거야.내가 너를 용서 했으니 이제 나가서 십자가 붙들고 자유하라 가 나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라는 말예요. 가서 이제 다시는 간음하지 마, 이게 아니라. 보세요, 여러분이 성화의, Santification의 안경으로 성경을 보면 다 그냥 거기서 머물러요. 예수의 십자가를 못 봐요. 그래 이제 구원 받았으니까 절대 죄 짖지 말아야지.네 근사하게 연극은 가능해요. 얼마든지 세상이, 야, 저거는 더럽고 추한 건데, 라고 평가하는 거 안 할수 있고 끊을 수 있다니까요.그까짖거 뜨레스티아스 3일만 올라가도 끊는 거 그까짖거 왜 못하냐구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몇 가지 끊어 놓고 아, 하나님, 하나님이 의의 옷을 입혀 줬는데 제가 그게 감사해서 또 이렇게 내가 나를 그냥 갈고 닦아 이렇게 자격과 조건을 내가 스스로 조금 만들어 갖고 왔습니다. 요게 죄란 말이예요.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먼저 알고 그걸 하자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고 당연히 그건 지향성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신랑은 자기 빙패물을 보고 신부를 찾아요. 예전에는 얼굴을 서로 보지 못하고 신부와 정혼을 했단 말예요. 그러면 내가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내가 보낸 목걸이를 차고 있는 여자가 내 신부예요. 그러니까 신랑은 그 옷을 찾는다구요. 지난 시간에 공부했잖아요. 아버지 이삭은 알맹이를 찾는 게 아니라 얘가 장자의 옷을 입고 있나 옷의 냄새, 옷의 촉감, 옷으로 장자의 축복을 내려 준단 말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예수라는 옷을 입어야 되는 거지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문제가 아니란 말인 거예요. 그걸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설명해요. 빌립보서 3장 18절


빌 3장 18절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믈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서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뭔지 보세요)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오직 우리의 신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 케 할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것도 잘 보셔야 되요. 십자가의 원수 이야기 하면서 땅엣 것을 바라보는 자, 이 배, 이 흙의 것이 잖아요. 내 배를 신 삼아 사는 자,나를 신 삼아 사는 자.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도 이용하는 자.요게 뱀들이란 말예요. 그런데 이 땅의 것과 대조 되는 게 뭐예요. 위엣 것 예수 그리스도 네요. 그러니까 땅엣 것은 뭐겠어요? 이 저주 받은 흙이 흙 속에서 성취해낸 모든 것, 모든 가치와 업적 전부를 땅엣 것이라 그래요. 유치하게 무슨 재물 명예 요런 거가 아니라 이건 불교에서도 가르치는 거예요. 성경이 그 얘기 하는 게 아니라 땅엣 것, 인간들이, 흙인 인간들이 흙으로 만들어낸,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낸 모든 걸 땅엣 것이라고 해요. 그걸 경고하면서 뭐라 그러냐구요 마지막 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거라는 거예요.변하게 할 건데 왜 역사 속에서 자꾸 흙에다가 뭘 덕지덕지 쌓으려고 하느냐 이런 말이라구요.그러니까 완전히 반대로 보고 있는 거죠?


여러분, 성도는 가시적 현실을, 요 사실을, Fact를 현실로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예요. 성도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묵시, 약속이란 말예요.생각해보세요. 진짜 나가 있는 곳이 현실이지이 꿈, 묵시가 꾸는 악몽에 불과한 여기에, 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내가 겪는 게 현실이겠냐구요? 진짜 영원한 곳에 영원한 존재로 완성 되어 있는 내가 있잖아요.어디에? 하나님 나라에. 그게 내 현실이라니까요.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그걸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현실로 삼아 산다니까요. 그런데 현실도 아닌 이 꿈 속에서 내가 성취해 낸 그것들이 하나님이 상 주는 데에 근거로 작용할 수있어요? 없어요? 참 답답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를 않아 어떻게.


여러분의 현실은 묵시속이 현실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완료하셔서 닫아 놓은 책이란 말이예요. 땅에다가 쓴 책이 아니라.그러면 하나님이 완료하여 닫아 놓은 하나님 혼자 하신, 창조하신 그 책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내가 뭐를 해서 상을 받고 차등있는 존재가 되냐구요? 여전히 인간들의 가치와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는 그런 인간들의 마귀성,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게 차등상급론이라는 거예요. 천국에 가서라도 나는 너와 동급으로 살 수 없다. 그죠? 이게 바리새인들 이었잖아요. 야, 나는 이렇게 열심히 자정의 노력을 하면서 이렇게 살았는데 어떻게 세리나 창기 너 같은 거와 내가 같은 곳에 가니? 네가 거기 천국 간다면 난 안 가! 얘네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상 달라는 사람들이 다 그 얘기 하는 거 아니예요 지금?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그 약속 속에서의 나를 사는 걸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지만 하나님은 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시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당신이 준비해 준 옷만 보는데, 예수만 보는데 내가 그 예수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조금 보태야 되지 않을까요? 이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를 모독 하는 거란 말예요. 십자가의 원수라니까요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9절 보세요.


갈 2장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행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꼬라지를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믿음 안에서 사는 거예요. 맞아, 내 꼴은 이렇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완료해 놓으셨다니까 감사, 찬송,할렐루야 하면서 사는 걸 믿음으로 산다 그래요.)


갈 2장 21절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게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또 나오잖아요 십자가의 원수. 헛되이 죽음,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 내 안의 그리스도, 이 어구 안에서 이미 우리의 이 역사 속 존재, 이름을 차압 당하는 거예요. 부정 당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 내 안의 그리스도. 안팎으로 예순데 나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어디서 챙겨 갖느냐구요?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부정 당하는 거예요. 그게 인생의 목적이예요. 인생의 목적은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증명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증명해 내는 거예요. 개과천선 해라 가 아니라 너희들은 아무리 용을 써도 너희들 힘으로는 개과천선 안된다를 배우라는 거예요. 그래서 개과천선의 노력을 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렇게, 그럼에도 죄인으로 뱀으로, 실체가 폭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를 덮는 하나님의 사랑, 이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경건치 않았을 때에, 연약할 때에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이게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나 열심을 가치로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 때로는 무섭게 매몰차게 그들을 부정해 버려요.열왕기상 19장 보세요.


왕상 19장 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게 무슨 말이예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선지자들 팔 백 오십명을 단칼에 도륙했습니다. 해보니까 자기가 기특한 거예요. 하나님 내 열심이 특심 이었습니다. 자기를 평가하죠? 이런 사람 세상에 있어요? 나 하나 남았어요 그러는 거예요. 이런 열심, 이런 특심 있는 사람 세상에 있어요? 나 하나 남았어요. 누가 한 말이예요 이거? 석가모니가 나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짝 걸어가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 그랬다 그러죠? 구라죠 그건요. 그 말이에요. 하늘과 땅 그 어디에 나 같은 이가 있느냐? 왜, 불교는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 이거예요. 내가 짱이야! 이런 뜻이예요. 내가 신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하나 남았다는 거예요. 나 처럼 열심 있는 사람 나와 보라 그래, 그 때에 하나님이 얘야, 칠 천이나 내가 남긴 자가 있단다 그래요.가서 칠 천명 세어보라는 게 아니라, 칠, 창조의 숫자예요. 묵시의 숫자. 하나님이 창조하여 완료해 놓은 묵시록에 나오는 그 천, 천 년,천 일, 완전 수.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거지 내가 남긴 자가 일을 하는 거지, 네 열심과 특심으로 일 한 게 아니다 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그랬더니 금방 뭐라 그래요? 그럼 죽이세요. 그럴 걸 뭐하려 날 시켰어요? 이게 인간이란 말예요.차라리 날 죽이라고.


이렇게 역사와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확증하기 위해 창조가 된 거고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가 죽었다 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예요. 본문 다시 한 번 보세요.


롬 5장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고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이게 결국 역사가 결론으로 내리고 가야 하는 그 부분인 거예요 이것이. )


롬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내가 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놋뱀이 되어서 그렇게 죽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놨는데 그 분이 이제 살아나서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그 십자가를 설명하시는 이 과정 속에서 네가 조금 실수 한다고 너를 다시 뱀의 자리로 밀어 낼 수 있겠니? 그 이야기예요 10절이.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더욱 구원을 얻을 것아니냐! 로마서 전체의 내용이 이거예요. 예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긍휼만을 자랑한다니까요.그러니까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우리의 실체를 죄인중의 괴수, 경건치 않은 자여전히 연약한 자, 원수된 자, 아직 죄인된 자 이렇게 우리가 우리를 자각하고 있어야 되요. 그리고여러분이 그걸 이 인생속에서 반드시 진심으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요. 그걸 고백하게 하는 게 인생이며 환란이라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불 가운데 건졌더니 죄인으로 올라 오는 거예요.그게 스가랴서 라구요. 그러나 그걸 바꿔 주세요. 이게 혼인잔치구요. 다 하나로 연결 되어 있잖아요.그게 바로 창조의 메카니즘 이예요. 이런 나, 도저히 존재일 수 없는 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그냥 불가능한 뱀인 나,경건하지도 않고 여전히 죄인이고 또 연약하고 원수이고 이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해 내신 거, 그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영광을 확증하는 게 역사 잖아요? 그게 창조의 메카니즘 이예요. 창세기에서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일어나는 거요. 얘네들은 뭐하나 한 게 없어요.특히 인간은. 여섯째 날 얘들을 사용하려고 했으면 첫째 날 만들어서 계속 일을 시켰겠죠.그런데 여섯째 날 만들어서 눈 뜨니까 안식일이예요. 요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묵시 속에서 그렇게 창조가 되는 것이 이게 창조다! 창조죠? 그게 역사 속에서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꿈 처럼 설명이 되는 거예요.영원이 있고 역사가 있고 영원이 또 다시 연결 되는 게 아니라 이게 창조야! 이렇게 창조 되는 거야, 이거를 우리가 꿈 속에서 육신을 입고 고대로 같은 자리에서 결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동시에 존재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림을 하나 보여드릴께요. 제가 지금 애를 쓰고 있어요. 빨리빨리 이해를 시켜야 되기 떄문에. 프로젝터가 별로 안 좋아서 이 부분이 잘 안 보이는데, 요 지점이 뭍이죠, 그죠? 파란 땅이예요. 땅. 요걸 묵시라고 해보자구요. 뭍, 바다 갈려져있어요. 뭍, 묵시예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보세요. 그리고 이걸 역사라고 해보세요. 이거를. 자, 묵시 속에서 하나님에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를 받아 묵시, 계시 같은 말입니다. 이 전체의 내용을 이해를 했습니다. 그게 역사 속에 내려와서 이제 경험을 하는 거예요.요기서 하나님이 확 밀었어요. 이것을 말씀을 통하여 이제 알아요. 이 세계가 있다는 걸. 그런데 이 역사를 살아가면서 ,이 역사가 힘의 원리로 움직이죠? 요렇게 , 마귀의 원리예요. 결국 사망으로 흘러가요. 하나님 처럼 되고 싶어 하는 마귀와 뱀과 인간들의 결국. 이게 흐름이라구요. 역사의 흐름.결국 여기에서 끝남이죠? 여기서. 이게 멸망의 자리고 여기서 떨어지면 사망이예요.그런데 여기에서 그 전체를 본 사람이 경치구경을 하다가 뚝떨어졌어요. 여기에서 이리로 내려가면서 이 사람이 뭐에 관심을 둘까요?


여기에다가 큰 집 지어야지, 여기에다가 멋진 내 명예, 내 이름 이런 거 새겨진 기념비 하나 세워야지, 어 쟤가 왜 나를 이렇게 괴롭혀? 싸워야지, 전쟁해야지 이런 생각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이렇게 흘려 내려가는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할까요? 살려주세요.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이걸 말씀으로 보는 자가 성도라구요.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데 내가 지금 계속 흘러가고 있어요. 자기는 알아요. 자기가 어떻게 뱀 처럼 살고 있는지 자기는 안다니까요. 그게 이리로 지금 흘러 내려가고 있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 안되는데 흘러내려가면서 안되는데, 안되는데 여기에서 다시 올라 가 보려고 애쓰죠? 왜? 이 지점이 묵시, 완료의 지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지향성이라는 게 생긴다구요. 흘러 내려가면서 이리로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열심이 생겨요 반드시. 노력을 하는데 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오는 말씀에 의하면 세상 풍속을 쫒는 자들이예요. 그런데 그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그러죠?


죽은 자들은, 죽은 물고기들은 항상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 몸을 입고 왔다니까요.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서 1미터 올라가면 30 센티 떨어지고 30센티 올라가면 2 미터 떨어지고 이런 경험들을 계속 해요. 그러면서 마음은 계속해서 아닌데,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아야 되는데,,이 지점을 바라 본다구요. 그런데 몸이 계속 이리로 흘러 내려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한 상태에서 올라가며 떨어졌다가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는 걸 성도의 신실함이라고 그러고 하나님의 은혜와 아무 상관없이 야, 인간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데카당스에서 이렇게 퇴락, 이렇게 쇠락해만 갈 수 있니 올라가자, 해서 자정운동 하는 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래서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가 갔다고 해보자구요. 여기에서 이리로는 못 올라가요.여기까지 올라 간 걸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99가지 지킨 거라고 해요. 그런데 야고보가 뭐라 그러느냐 하면 여기에서 하나 지킨 애, 걔나 99점이나 똑같은 애라 그래요. 결국,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아무리 꼭대기에 올라가도 결국 요지점에 오게 되는 거예요. 다. 그런데 성도만 여기에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하나님 내가 뱀 맞네요.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되는 거 맞네요. 요자리에서 고백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떨어지면 죽으니까 하나님 내 손 잡아 주세요.할 때 십자가가 내려오는 거예요.


세상은? 그까짖거 조금 30센티 올라가고 ,,요게 법정, 요게 간디여기에 있는 거예요. 결국, 결국 여기예요. 그런데 뭐 대단히 꼳대기에 와 있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 정도면 되잖아요? 내가 왜 뱀이예요? 그러다가 뚝 떨어져요. 이걸 지옥이라 그래요. 어떻게 더 쉽게 설명을 해드려요?


여러분, 여기에서 이렇게 거슬러서 물살을 거슬러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유토피아를 만들겠다 이걸 불교라 그래요. 혹시 그거 아세요?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존경할만한 훌륭한 사람이 되요. 이 세상의 이치를 자재롭게 보고 모든 소리를 지혜롭게 들어 훌륭한 성자, 보살이 되어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들도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를 한문으로 하면 관세음보살이예요. 보살이라는 게 원래 성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불교는 부처가 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미래의 되고 싶은 나 인거예요. 그래서 관세음보살하면 이 세상에서 훌륭하고 성숙한 깨달음을 얻은 보살이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유익을 끼쳐 내가 다음 생, 혹은 이 브라만으로 합일이 되어 해탈을 하겠다 라는 게 불교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건강한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무얼 가르치느냐 하면 고지점에서 Stop인거예요.


훌륭한 사람이 되자, 인간다운 사람이 되자, 성도 다운 사람을 살자 ! 그리하여 세상에게 영향력도 미치고 예수믿는 사람들은 이 정도다, 라는 걸 한번 보여주자는 거예요. 세상은 예수를 못 알아봐요. 그런데 예수 믿는 자를 어떻게 알아봐요? 무슨 영향을 미치냐구요? 어떤 영향을 미칠 거냐구요? 세상이 예수를 모르는데. 예수 믿는 자의 삶은 예수의 삶이라면서요? 그런데 예수의 삶을 세상이 어떻게 보고 영향을 받는다는 거예요 도데체가? 그러니까 강대상에서는 계속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마하반야 바라밀다, 마하-절대자, 반야-지혜, 깨달음을 얻어 신이 되어 바라밀다- 극락으로 넘어가자. 그거 아닙니까? 관세음보살,마하반야 바라밀다, 관세음보살, 마하반야 바라밀다 그러면은 여기서는 또 목사가 그래요 성불하세요,,이거 잖아요. 아녜요? 똑같잖아요.


자, 보세요.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어디서 그려져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뱀의 이야기, 여자의 이야기요. 선악과 따먹고 네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네가 하나님 처럼 되어라 이게 관세음 보살이잖아요. 그러니까 주기도물을 외워도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사도신경을 외워도 다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제게는 그렇게 들려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외우는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주문이지 뭡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똑같은 지점을 향해서, 고작 인간의 성숙, 변화, 세상을 정화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이게 목적이 되니까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님이 동국대, 불교대학에 가서 뭐라그랬어요? 어차피 불교나 기독교가 추구한느 목적지는 같은 거니까 우리는 형제다, 그래서 기립박수 쳤어요, 중들이 일어나서. 제가 그 원문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는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므로 나는 은퇴하면 종교통합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랬어요.


종교가 어떻게 통합이 되냐구요? 세상, 천하만민에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 얻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이 시대의 종교들은 아니라는 거예요. 관세음보살, 마하반야 바라밀다 로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 종교가 모여서, 원불교 천주교 기독교 감리교 불교 다 모여서 성가대를 만들어요. 한번은 힌두교인이 설교하고 한번은 불교 중이 설법하고 한번은 목사가 나와서, 그런데 똑같애. 성숙하여 깨끗이 잘 살아 좋은 세상 만들자. 그러니까 성탄절에 절에 현수막이 걸리죠. ‘예수님 오심을 축하합니다’ 왜 그 사람들이 축하해야 되요? 예수님 오신 걸. 사 월 초팔일 날 교회가 왜 부처님 오신 걸 감축하나이다를 써야 되냐구요? 연등도 달아줘요 보면. 교회가요. 뭐하는 짓이냐구요.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거예요. 기독교외의 모든 종교가 자력 종교지만 기독교만 타력종교예요. 예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우리는 존재일 수도 없고 살 수 없다라는 걸 깨닫고 예수 ‘믿고’ 가는 거예요. 다음주 에는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