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48.Why Me Lord 롬 5: 3-5

Hebrew 2023. 5. 31. 21:43


로마서 48번 말씀


본문: 롬 5: 3-5


다만 이 뿐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아멘.


여러분은 주일 학교 시절에 어떤 노래를 제일 많이 불르셨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기억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주일 학교때 제일 많이 불렀던 거. 나는 구원 열차, 또? 그거 모르세요?나는 주의 군병?나는 진군하는 보병이나, 포 쏘는 포병이니 말타는 기병이나 저기 가는 (공군병대?)도 나는 주의 군대, 이러면서 또 율동까지 이거 하면서 유년 주일학교를 다 보냈잖아요?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항상 마음 속에 뭔지 모를 전의가 불타지 않았습니까?나는 주의 군병. 싸워야 된다는 거지요?분명 어떤 대적이 나를 공격해 올 거고 나는 그 대적과 피튀기는 전투를 해야 한다는 그런 각오가 가슴에 새겨졌어요.그리고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나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결연하나 불안한 의지도 생겼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중심에는 항상 나는 선한 편이라는 전제가 있는 거죠.그런데 자라면서 저는 그 대적의 정체가 너무 모호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말로는 마귀, 사탄,죄 등이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이라고 하면서 그게 도데체 뭔지 몰랐어요.


그래서 고작 할 수 있었던 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거, 무례하지 않게 사는 거, 법규를 잘 지키는 거, 착한 일 하기 싫어도 마음 추스려서 열심히 해보는 거, 이런 것들을 열심히 하면서 저의 전투일지를 써 내려 갔던 거 같애요.그러면 성경이 말하는대로 세상이 그런 나를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기뻐 할거고 그로 말미암아 튼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거라는그런 유아적 기대가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의 군병들의 본 새가 열 기대했던 거와 달랐어요. 한 번 볼까요?히브리서 11장 32절.


히11장 32절


어떤 이들은 더 좋은 구원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거 읽으면 전부 유관순 누나 생각 나죠? 그렇게 사는 게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미루어 추측 하잖아요.정말 세상을 그렇게 악바리 처럼 이 악물고 이기는 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김 일까요 여러분? 그것이 승리 일까요?그런 악바리들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게 행복하세요? 지금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이들이 도데체 한 게 뭔지 한 번 찾아보세요.이들이 한 게 뭐예요?뭘 했다고 그러든가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들이.그냥 희롱과 결박과 악형과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으면서 유리하다가 죽은 거예요.뭐를 이겼다 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죽은 거예요.한 마디로 세상에게 맞아 죽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주셨단 말예요.


‘네가 바로 주의 군병이다’라고.그러니까 성도의 세상 속 승리는 세상에서 외롭게 고립되고 희롱 당하다가 결국 맞아 죽는 거예요.그렇다면 성도가 죽의 군병이 되어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라는 거예요?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란 뜻이예요.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야단 치실 때 가장 흔하게 쓰던 호칭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거였어요.독이 오르면 목이 곧아지는 짐승이, 대표적인 짐승이 뭡니까?뱀입니다. 그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에게 수시로 뱀새끼야! 이렇게 욕했다는 거예요.목이 곧은 백성, 이 뱀새끼야! 이러게 욕을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리고는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 백성의 독 오른 목을 꺽어 버린 게 광야 였어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을 쫒겠다는 제자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나를 쫒으라 고 하신 거예요.멍에가 뭡니까?멍에는 소의 목에다가 걸어서 소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장치예요. 목을 장악하고 제어하는 장치.히브리 사람들의 결혼 풍습중에 신랑이 신부에게 반드시 줘야 하는 빙패물이 있어요.그것이 열 드라크마로 만든 목걸이 입니다.그걸 잃어버리면 신부는 언제든지 소박 맞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 드라크마를 잃어 버린 아줌마가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거예요. 그거 큰 돈 아니거든요.그런데 그거 잊어버리면 안되요.그건 그 목걸이 안에는 신부는 평생 신랑에게 순종해야 한다라는 약속이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그게 히브리 사람들의 연합관이에요.신부의 목이 꺽여야 신랑과의 연합이 가능해진다라는 히브리 식의 연합관, 이게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의 연합관인 거예요 그게.


이렇게 이 역사를 살아가는 하늘의 성도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의존되고 복종되는 자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처음 자리로 가는 거죠.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선악과 따 먹은 뱀이 죽는 거고, 그러니까 뱀을 딴데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내 안에 넣어서 보내신다니까요 하나님이.그 상태가 하나님 절대 의존의 상태인 거예요. 내 안에 있는 뱀이 죽는 것이.그렇게 내 머리를 휘어 감고 있는 그 띠,예수님이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말씀 하시죠?그 하나님의 목걸이가 내 목을 부러뜨리는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는 게 신앙생활이란 말예요.뱀이 뭐예요? 뱀의 내용이? 메세지가 뭐냐구요? 선악과 먹고 하나님을 절대 순종하여 바보처럼 살지 마! 가 뱀이 잖아요. 그걸 꺽어 버리는 거라니까요.완전히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만들어 버리는 거.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성도의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축약하여 환란이라고 하는 거라 그랬죠?환란이요. 그러면 잘 생각해 보자구요.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에도 목이 곧은 백성으로 불렸으니까,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목이 곧은 백성, 뱀이 맞아요 우리는요. 지금 뱀 처럼 산다니까요.뭘 어딜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냐구요? 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뱀이란 말예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뱀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셔야 옳아요?여러분 지나가다 뱀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손에 삽이 들려 있어요.뱀이 나타났어요. 어떻게 합니까? 찍죠?바로.


군대에서 참호 같은 거 팔 때, 산 속에 올라가서 파다보면 숲에서 땅속에서 뱀들이 그렇게 많이 나와요.그러면 여기저기서 야삽으로 그 뱀 대가리 찍는 소리가 퍽퍽 나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려갈 때 보면은 여기저기 목아지 짤린 뱀들이 널려 있어요.그거 가치 있게 여기나요 여러분은?뱀탕 좋아하는 사람이나 모아다가 끓여 먹지 징그러워서 발로 툭툭 차서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 버린 다구요.이게 여러분과 저의 실존인 거예요.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취급해도 우리는 아무 할말 없는 존재라니까요. 그게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인식을 올바르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상 주세요, 할 수 있어요?생각을 해보시란 말예요.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며?뱀 중에도 최고 악한 뱀이라며요 내가?그런데 그 뱀들이 뭐 잘난 거 해놓고 이걸로 상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냐구요?우리는 그렇게 목이 곧은 백성이예요.이 세상에서도.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와 동행 하시면서 결국 그 목을 흐물흐물하게 꺽어 놓고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붓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다른 거 없단 말입니다.


그 뱀들이 뭐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예요.그냥 길거리에 너브러진 목 잘린 뱀, 그게 나라고 생각하세요.그게 무슨 자격조건을 갖출 수 있냐구요? 거기에 하나님이 생명력을 부어서 차조해 내는 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바울이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을 합니다.로마서 5장 8절 보세요. 


롬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제 죽으셨어요? 우리가 뭔가 자격을 갖추었을 때?아니예요. 구원은 언제 일어났는가? 우리가 뱀이었을 때 일어난 거예요.


롬 5장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여기서 한 술 더 뜨죠?) ,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구원 받았죠? 그러면 구원 받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성자가 되요? 아니죠. 그런데 우리가 그 꼴을 보면서 불안 해 하잖아요.그 때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냐 하면 너희들이 뱀 새끼였을 때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너희를 구원해 냈는데 지금 그 분이 살아나셨고 너희들도 지금 구원된 상태다 그런데 그의 살으심이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자꾸 너희들 꼬라지를 보고서 자꾸 실망해? 이런 뜻이예요 이거는요. 아니, 뱀 새끼였을 때도 구원해 냈는데 이제 살려 놨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뭐 좀 실수 한다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다시 지옥에 넣겠니?다시 뱀 만들겠니? 이 소리란 말예요. 그러니까 인본주의나 율법주의는 이 구절을 절대 해석하지 못해요. 이해 할 수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지난 주에 창세기의 첫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분리라는 형식을 통하여 성도의 환란의 필연성에 대해서 공부했어요.그 분리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약속으로 오롯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가 확실하게 봤습니다.창세기의 첫 세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추상 같은 언약이 확실하게 들어있었고, 두 번째 세 날에는 하늘의 왕들과 땅의 왕들 같의 전투가 암시되어있었죠? 그러니까 하늘의 영역, 땅의 영역에다가 전부 왕을 세운단 말이예요.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묵시가 이미 있었고 역사가 그 후에 오는 게 아니라 이건 동시에 가는 거라니까요.그래서 제가 꿈이라는 이야기를 해 드린 거예요.그러니까 이 창세기 1장이 묵시 속의 창조를 모형함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를 복선으로 깔고 있는 거란 말예요.그러나 결국에는 하늘의 영역이 땅의 영역을 장악하여 안식으로 종결 되는 거예요.고 안에 예수라는 약속이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그 창세기 1장이.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땅의 왕들이 하늘의 왕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이게 십자가 였잖아요. 그리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예요.역사 전체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흘러 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역 창조라고 이야기 했잖아요.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는 게 맞는거죠?하늘의 왕이 땅의 권세 잡은 자에게 맞아 죽는게 십자가였으니까.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서요?하늘의 왕이란 말예요. 여러분이 바로 세상 왕들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이 세상에서. 그게 맞는 거란 말입니다.그렇게 하늘의 왕이 땅의 왕에게 맞아 죽는, 그런 분리의 그림을 명확하게 그려준 곳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예요.그리고 아벨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탄생되는 하나님의 라인, 하나님의 후손 셋의 이야기에서 확실하게 드러난 거라 그랬죠? 그게 바로 지난 주까지 공부한 부분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에서 또 분리를 보여줘요.아벨을 때려 죽인 가인의 후손들과 죽은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탄생 시킨 셋의 후손들의 분리.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농업,과학,기술,예술 심지어 미모까지, 제일 이쁜 여자가 그 후손들에서 나왔어요.이게 다 세상이 힘으로 간직하는 거예요.이쁜 여자들은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죠 남자에게, 얼굴로.그게 힘이예요, 폭력이라고.남자들이 꼼짝을 못하죠 거기에서.그럼 안 이쁜 건? 그건 흉기고.하여튼 다 무기야 여자는 그냥. 이 세상의 주관자들로 가인의 후예들이 서요.그리고 세상에서 뛰어난 이름을 내면서 살아가죠. 그리고 가인의 악도 그 후손 때에 가서는 77배로 늘어나요.죄의 확산성과 점진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당연합니다. 멸망으로 가는 역사의 악은, 우리는 직선적 역사관을 갖고 있어요.시간이 시작 됐으면 끝나는 거란 말예요.그런데 끝이 어디예요? 멸망이니까 가면 갈수록 죄와 악이 더욱 더 확산되고 점진 된단 말예요.그죠? 그래서 옛날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파렴치한 일들을 요즘은 그냥 막 하고 드라마에도 그냥 막 나오죠?점점 확산 되는 거예요.점진 된단 말예요.


그런데 셋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요? 지리멸렬한 모습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서 살아요.창세기 4장 24절 보세요.


창 4장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 일찐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 이리로다 하였더라.악의 확산성.점진성.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시매, (이 씨, 제라가 후손이예요 이거를 사도 바울이 후손은 한 사람 그리스도다 그랬다구요. 그러니까 셋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거예요.) 셋도 그 아들을 낳고 (예수가 어떤 이들을 낳아요. 교회를 낳죠 예수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에노스예요.에노스가 뭘 불렀다 그래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죠?여호와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의 이름이예요.그게 여호와, 엘로힘과 다른 이름이라 그랬죠?




자, 성도, 예수에 의해서 탄생된 성도는 반드시 예수의 이름, 구원자이신 예수의 이름만 부르게 되어 있더라는 거예요.가인의 후예들은 이 땅에서 과학, 문명,농업,미모 모든 걸 장악하면서 자기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열심히 달리는데 셋의 후손들, 그 씨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예수의 이름만 부르더라는 거예요.그들은 그 어떤 외모도 구축해 낼 수 없고 그 어떤 세상의 가치와 힘도 쌓아 낼 수가 없는 거예요.그러니까 예수의 이름만 부르는 거예요.여호와의 이름만. 그렇게 에노스, 셋의 씨의 후손들이 예수의 이름만 부르게 도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그들이 부정되고 부인되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되죠?그게 셋의 후손들의 죽음이란 말예요.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셋의 후손들을 가인들의 후손들이 만든 문명에서 아웃사이더로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낫을 하나 벼르러 가더라도 그들은 가인의 동네에 가서 구걸을 해야 됐어요.당시에. 로마서 10장 13절 보세요.


롬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거 아니예요.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말과 갈등이 생기잖아요?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 받는 거 아니다 라고 했느데 여기는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다 구원 받는다고 그러잖아요.그 말이 아니란 말예요.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 그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에노스 처럼 그들이 구원 받은 자다 라는 뜻이예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이게 조건이 되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구원 받는 자는 반드시 주의 이름만 부르게 되어있다는 뜻이예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거기에 믿음이 가입한 거죠. 그러니까 믿음이 들어가서 구원을 받게 되는 자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구원자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를 중단하게 되는 거죠.이사야서 64장 6절 보세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지


사 64장 6절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니( 더러운 똥걸레)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게 이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실존이예요.그런데 거기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만들어 내는 게 구원이란 말예요.이건 다 소멸이거든요.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게 뭐냐구요?하나님 내 힘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낼 수가 없네요. 이게 육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이 죽음. 이리로 몰려 가는 걸 성도라고 해요.그렇게 셋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늘 소망으로 살아가는데 거기에서 또 분리가 일어나죠?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와 하나님의 은혜 밖의 세상, 이렇게 또 분리가 일어나요.세상은 홍수가 임하여 다 쓸어 버릴 때까지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의를 전파하는 노아를, 베드로가 그러죠? 의를 전파했다,누구의 의 겠어요?우리가 로마서에서 공부하는 하나님의 그 의, 너희들 저 방주 안으로 다 들어가야지 안그러면 다 죽는다, 그때 사람들이 뭐라 그랬겠어요? 왜 죽어 우리 이렇게 착하게 살고 있는. 노아는 계속해서 아니,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안돼!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살아. 이게 의를 전파하는 거예요.


오늘 날도 똑같애요.이 율법주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예수 믿어야 된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산다 라고 복음을 이야기 하면 아냐 우리 잘 살고 있어.그 의를 전파하는 노아를 세상이 조롱 했습니다.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노아의 세상적 수고를 감해 준 것도 아니예요.노아는 배를 지으면서도 자기 식구들의 먹거리를 스스로 준비 해야 됐어요.하나님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트려 안 줬어요.그리고 그 홍수 기간 동안에 그 배속에 들어있는 모든 짐승들이 먹어야 할실량 까지 다 준비해야 됐어요.백 이십년 걸린 그래서.그 노아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이 되는지 보세요.노아는 지금 세상과 비교했을 때 세상으로부터 맞아 죽는 모습인 거예요.뭐하나 이 세상적 가치관으로 밨을 때 내 놓을 만한 일을 한 게 없어요 노아는.창세기6장 6절 보십쇼.


창6장 6절




사람이 ,


(자, 또 사람에서 시작이 되요.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로 갈리죠? 여기도)


사람이 땅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여자가 나오는 거예요. 여자가 이제 분리되어 나오는 거예요. 아담안에 하와가 들어가 있을 때, 연합된 상태가 사람이었는데 그게 적출이 되어 여자로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죄가 설명되기 시작했잖아요?마찬가지예요. )


사람에게서 딸들이 나오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 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남자와 여자가 갈리고 나서 여자에 의해 남자가 죄인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때 하나님이 떠났죠?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지고 있어요.하나님의 신이 또 떠나는 거예요. )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 께서 사람의 죄악이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츅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세상은 끝난 거예요.성경은 여기서 끝나도 되요.그래서 끝이다! 끝나도 되는데,보세요, 이렇게 멸망 받아 마땅한 그 안에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들어있다,빠져 있다? 들어 있는 거예요. 원래는요.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아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합작품, 이게 노아란 말예요 원래.


하나님이 다 죽인다 그랬단 말에요. 그 제한적, 어떤 무리만 죽인다 가 아니라 다 죽인다. 그건 뭐냐면 이 전 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합작품으로 꽉 차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 중에 노아도 있는데 그 중에 노아는 은혜를 입은 노아인 거예요.다 죽어야 되는데 그 노아에게는 은혜가 임했다는 거예요.그게 여러분과 저 인거예요.다 죽어야 되는데.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이 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안에 남자와 여자가 공존한 상태로 이 땅에 내려와서 여기서 우리가 네피림, 유명한 자, 용사를 낳는 거죠. 이게 인간들의 추구죠,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추구.되고 싶은 나 잖아요. 이것들이 다. 세상에서 용사 되고 싶고 유명한 자 되고 싶고 큰 자, 거인 되고 싶잖아요.누구든지 지켜줄 수 있는 힘 센 자.네피림이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이 땅에 나와서 낳는 것이 다 그건 거예요.우리가 낳는 게 지금 그거 잖아요.예수 믿는데도 우리는 그것만 낳고 있잖아요 지금요. 그러면 그 상태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뭐냐구요? 은혜 밖에 없는 거예요.그게 노아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구원 받았느냐 하면 자기가 뭘 해서가 아니예요.방주 안으로 들어가서 예요.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 믿은 거예요. 노아가.믿음으로 노아는,,그러잖아요.그 믿음의 실체는 예수란 말예요.그러니까 노아가 예수를 믿은 거라니까요.우리 보다는 덜 선명한 그림으로 믿었지만 모아가 믿은 거예요. 예수를.


그렇게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여러분 여기에서요 히브리 원어로 봤을 때 이 한글 개역성경과 확연히 다른 게 뭐냐하면 여기 한글 개역성경으로 보면 그 땅에 네피림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해서 네피림을 낳은 것처럼 이렇게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히브리 원어로 보면 그게 아니라 그 땅에, 그 무렵 네피림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그러니까 히브리 원어로 보면 네피림과 사람의 딸들이 동격이예요.그러니까 네피림, 사람의 딸들,이 세상에서 거인 되고자 하는 자와 하나님의 아들이 결혼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하늘의 장자들인 우리가 선악과 입에 물로 이 세상에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와서 뭘 배우느냐하면 방주 아니었으면 죽었구나를 배우고 가는 게 이 세상인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힘도 과시하고 다 하는데 우리는 그 예수를 믿어서 뭔가를 하는 자로만 살게 되요.그리고는 결국은 그 대로 그냥 쏙 들어가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죽는 거예요 그게.




방주 안으로 들어가서 무니 딱 닫히면 우리는 세상에서 죽는 거예요.세상은 그러겠지 저런 바보들,결국 죽었네.그런데 우리가 사는 거라구요.사드락과 메삿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곁에 있는 군인들도 확 태워버린 그 풀무불 안으로 쑥 들어 갔어요.세상에서 봤을 땐 죽었네, 했는데 죽었더니 예수가 그 안에 있었어요.네 명이 그 안에서 걸어다녔어요. 그러면 그들은 풀무불 안에서 밖을 보면서 뭐라 그랬겠어요? 쟤네 죽었는데 그랬을 거 아닙니까?이게 방주와 똑같은 그림 인거예요.스테반을 돌로 치면서 요놈 죽었네 그랬는데 스테반은 하늘과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돌에 맞으면서 쟤네 죽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3절이예요.서로를 향하여 쟤네 즉었네 이렇게 했다그래요.


그런데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보면은 우리가 죽는 게 맞아요. 우린 역사 속에서 계속 그렇게 죽는 거예요.베드러 전서 3장 20절 보세요.


벧전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8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여기 20절에 보면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그런 어구가 나오지요? 이건 물로 부터 구원을 받았다가 아니라 바이, 디아라는 전치사는 물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예요.물이 뭔데, 세상을 다 죽여버린 게 물이었잖아요.그런데 그게 뭔데 물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 하느냐는 말이예요?그 밑에 나오잖아요. 물은,, 이렇게 나오잖아요.뭘래요? 물이. 세례래요.그런데 그 세례가 뭔데? 물이 뭔데 도데체 물에 의해 우리가 살아나냐구요?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마가복음 10장 38절,


막 10장 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이 세례가 뭐예요? 십자가!그러니까 물이 방주를 때려 죽이고 방주 안에 들어있는 내가 사는 거예요.그래서 물에 의해 내가 살았다라고 하는 거예요.그런데 그 물은 뭐냐하면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는 게 아니예요.여러분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게 만들고 훌륭하게 성숙 시키는 게 물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선한 양심,토브! 이게 뭐예요? 원래 창조시의 우리의 마음, 하나님 절대의존의 마음, 선한 양심이 하나님만 찾아가게 하는 거 이게 물이란 말예요.이게 세례란 말입니다.이게 노아의 방주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찾아가게 하는, 찾아가는 그 삶이 이 세상 속에서 가치 있어 보이겠냐구요? 다들 로르 볼인가 뭔지 거기에서 촛불 들고 지금 싸인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신경 쓰지 맙시다, 이런 게 가치 있어 보여요? 그 사람들이 정의의 편인 것같고 우리는 굉장히 행동 없는 양심, 불성실한 사람 같이 안 보여요? 그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들이 목 잘린 뱀이라는 자기의 현실을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어떤 소수의 사람들을 울타리에다 넣어 놓고 그들을 공격하고 매도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 같지 않아,를 증명하고 싶은 거지요.


이렇게 우리는 그 예수의 세례, 물에 의해 살아난 거예요. 거저 살아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도 그 세례 받는다 그래요.그럼 그 물이 무얼 제하는 거예요?우리에게서 이 육체의 더러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고 나를 높이며 살려고 하는 그 우상성, 이걸 제하는 거예요. 우리에게서.평생 우리 모가지 꺽는다는 뜻이예요.물이, 세례가.마가복음 10장 39절 보세요.


막10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우리도 그 물에 빠져 죽게 되요.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다는 뜻이예요.예수님의 십자가를 뭐라 그랬어요 지난 주에? 오체가 하나님에 의해 장악 되는 거. 머리까지, 가시관 씌워서. 그게 세례예요.그게 십자가 예요. 그런 노아 에게서 또 분리가 일어 납니다.셈과 함으로 갈라지죠? 함은 선악과 따먹은 뱀의 역할 이예요.셈은 그저 황송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자로 등장해요.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율법으로 판단해 버리죠? 우리 아버지 벌거벗었네 ! 이 한 마디로 함은 저주의 대명사가 된 거예요. 이게 도데체 뭐가 그렇게 잘못 된말이예요? 벗은 사람보고 벗었다고 그러는데.그 말 속에는 벌거벗은 것은 악이고 그 악을 우리 아버지가 행했으므로 아버지는 악하다 라는 이 선악구조 속에서의 함의 판단이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웃은 거예요. 비웃음, 우리 아버지 벗었네. 이게 선악구조 속에서의 선악 판단인 것입니다. 요걸 죄라 그래요.반면에 셈은 부끄러움이고 뭐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그냥 뒤로 가서 덮어버려요.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즉, 저주의 홍수에서 그들이 살아난 건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덮으심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셈이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이 세상 속에서 함 같은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까, 셈 같은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까? 당연히 함 같은 사람이 존경을 받아요. 자기들의 악과 죄를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서 그것들을 척결하는 데 힘을 쏟고 인간들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해 놓은 공평하고 행복한 세상을 이루겠다고 하죠? 이게 오늘 날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하는 일 아니예요 이게.그러니까 세상은 그들을 존경해요.일간지 까지도 그들을 존경해 주지요.그들 편을 들어 줍니다. 이게 건강한 교회라고.왜냐면 그들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 해도 우리를 칭찬할 수가 없어요.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해 버리셨단 말입니다.이걸 똑바로 보세요.


함의 후손들은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때 함의 아들 누구?가나안,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어요.자, 분리가 일어났어요.셈의 후예들은 애굽의 노예로 가 있어요.가나안, 함의 후예들은 가나안 땅에서 그냥 잘 먹고 잘 살아요.힘도 더 세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서 그 문명을 부러워했을만큼 어마어마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구요.세상에서 져요 셈의 후예들이.그리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노예로 보내버려요.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 할아버지한테 네 자식들은 전부 노예로 만들어 버릴 거야 그래요, 뭘 하지도 않았는데 .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죠?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내려온 거예요.세상의 종으로,애굽의 종으로.아무것도 안했는데 창세전에 아들과 아버지가 언약을 하시더니 (에베소서 1장)우리를 이땅에 불순종의 아들들로, 불순종의, 죄의 아들들로 내려 보냈다니까요. 그리고는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신 거예요.


성경은 셈에게서도 분리를 끌어내죠. 아브라함과 바벨론, 바벨론은 갈대아 예요.갈대아 사람, 전 세계의 힘의 원리속에 있는 그런 세상 사람들을 의미 하고 아브라함, 둘로 또 분리가 일어나죠.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라 그랬어요.갈대아는. 4천 년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 그랬죠? 진짜로 로마에서 3천 년전에 쓰던 수세식 화장실을 제가 비행기 안에서 한 번 봤거든요. 다큐맨트리 프로그램을.오늘날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더 쾌적해 오히려.3천 년전 로마에 있던 아파트에 그 수세식 화장실과 상수도 시설이 오늘날의 아파트의 수세식 화장실과 상수도 시설하고 별반 다를 게 없더라니까요.그러니까 진화론이니 이런 건 다 개소리예요.오히려 더 퇴보한 것도 많아요.그런데 거기에서 끄집어 내서 어디로 보냈어요? 광야로 보내 버려요.분리가 일어났는데 거기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을 광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텐트만 치게 했어요.장막 생활을 하게 했다구요.나그네로 살게 했어요.


누가 승리자 처럼 보여요?당연히 바벨론이 승리자 처럼 보이죠.그래서 요한계시록에도 보면은 바벨론이 항상 화려해요.두 증인은 늘 두들겨 맞다가 죽어요.그럼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어떻게 묘사하는 지 한번 가볼게요. 히브리서 11장 8절.


히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그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이삭고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천막만 치고 살았다니까요.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거기서 고대광실 훌륭한 집 짓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예요?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믿음으로. 누구까지? 이삭과 야곱까지.하나님을 뭐라고 불러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우리 전체 모든 성도를 다 이렇게 만든다는 뜻이예요.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렇게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이 역사라는 땅에 기둥 하나도 못 박는 삶을 살았어요.여러분 한 번 곰곰히 생각 해보세요.이스라엘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이라는 그들의 조상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어요. 너희 후손들을 애굽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이랬어요.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나님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쓰신 거예요.이스라엘은 그냥 태어나 보니까 애굽이예요. 그들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예요. 나고 보니까 애굽이야. 나 보니까 세상에 와 있네 내가. 그런데 이 세상에 온 이상 세상 처럼 살아야 되요.이 율법 아래에 와서 죄 아래에 와서 죄인으로 살아요 우리가요. 나면서부터.엄마가 어떻게 되던 말던 지 배고프면 무조건 젖 빨아 먹고 심지어 그거 부족하면 아버지 발가락도 빨아 먹고. 이게 인간이라구요.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요.나면서 부터 죄인이예요.엄마,아버지의 체면? 이런 거 없어요.갖고 싶은 거 있으면 무조건 누워버려요.이게 애기들 이예요. 누가 애기들이 착하다고그래요?애기 보는 게 오죽하면 베이비 시팅 이겠어요? 깔고 앉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핍박을 던져요. 그래놓고 또 분리를 시키세요.그렇게 보내 놓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모세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냅니다.그리고는 가나안 앞에서 모세를 죽여버림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모세의 죽음, 중보자의 죽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를 또 설명해 내시는 거예요.그런데 왜 애굽에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헤메다가 그 사십년은 우리가 알다시피 이 역사죠 그죠? 우리의 인생.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거니까.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가나안에서도 광야에서와 똑같이 장막 생활을 하게 한단 말예요.아브라함이 그 대표거든요.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계속 장막 생활을 해요.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광야에서와 똑같은 생활을 해요.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뭐가 변한 게 없어요.그럼 약속의 땅은 뭐냐구요?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 왔어요.나 보니까 애굽이예요. 세상이예요.그런데 하나님이 복음을 던지셔서 구원을 받았어요. 출애굽 했다구요.그런데 광야를 살아요.여전히 죄인의 모습을 들켜요.폭로 된다구요.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왔다며요?약속의 땅에 왔다며?어디서 그걸 경험해요?우리 교회 로고 앞에 하나님의 작은 세상,서머나교회? 말도 안되는 소리.하나님 나라, 교회.교회에 들어와도 여러분은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뜻이예요.모형이예요. 모형.역시 교회 안에서도 그런데 그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세포가 나 잖아요.내 아네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예요.


내 안에서 일차적으로 역사와 교회가 축약이 되어 경험 되어지게 되어있어요. 내 안에서.내 안에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니까요. 그런데 동시에 사람의 딸에 의해 늘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 처해요. 이 경험을 계속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나는 목 잘린 뱀 맞아요. 죄인중의 괴수 맞아요. 이 고백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구요.우리는. 그래서 그래야 거기에서 예수의 십자가만 영광 받을 수 있어요.막살아도 된다는 그런 뜻 아니예요. 세상이, 그 삶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 삶이 계속해서 대적들에게 당하는 삶이예요.내 안의 대적에게도 늘 당하고 세상의 대적들에게도 늘 당해요. 내 안의 대적들에게 당하여 기가 빠지고 힘이 빠지니까 이 빠진 모습을 세상이 조롱한다구요.이렇게 양수겹장으로.계속해서 환란에 던져지게 되는 거라구요. 그게 아브라함의 인생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게 됐다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는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라는 걸 알게 된거죠.그러게 이 땅을 떠돌이로, 나그네로 사는 이들이 그들 위로 진짜 장막이 내려와서, 그 말은 다른 말로 진짜 장막,하늘의 장막, 하늘의 성막이죠?하늘의 성전, 하늘의 처소로 덮힌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나그네로 장막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이예요.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그렇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발붙일 곳 없는 그러한 자기의 실존을 반드시 자각하게 된다는 뜻이예요.여러분은 다른 사람들 보다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거예요. 이민 한번 왔잖아요 이렇게.나그네, 얼마나 서러워요.이해가 더 쉽죠? 나그네 이야기가.계시록 7장 14절 보세요. 


계7장 14절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자,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예요. 그러니까 세상이 환란이고 거기에서 하늘로 올라 오는 걸 환란에서 나온다 그래요. 그러니까 세상 전체를 환란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런데 그들이 어린 양의 피, 그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게 하얀 옷 이예요. 세마포 예요. 예수의 십자가 그 피를 믿지 않는 자는여기에 해당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며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게 하나님 나라 현실이예요.그런데 이 장막이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단어가 똑같은 단어예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위에 장막으로 치시매 이런 뜻이 거든요. 예수가 장막 인거예요.그 예수라는 장막,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처소 거기가 예수 안이란 말이에요. In Christ,그리스도 안.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장말에 의해 덮힌 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환란을 통과하며 장막 생활을 하더라 이게 그 이야기인 거예요.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셍상에게 계속 해서 맞아 죽고 조롱 당하는 거예요.핍박 당하는 거예요.모함 당하는 거예요.그렇게 계속 해서 가는 거예요. 저것들 진짜 나그네네, 진짜 외국인이네 이렇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여지게끔.


고대시대 때 장막 생활을 한다라는 건 목숨 내놓고 사는 거예요.당시에는 부족국가 시대였기 떄문에 이웃이나 부족이 그들의 힘이 었어요.그게 내 울타리였는데 거기에서 나와서 텐트를 치고 사는 건 아무나 죽여서 땅에 묻어도 괜찮았어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신다니까요.그렇게 이 땅에서 장막치고 사는 나그네로 살게 되는 성도들만 나그네로 오신, 장막이신 그 분을 알아 보게 되는 거예요.성경은 여러분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그래서 그들만 나그네로 오신 예수를 알아 보고 영접하는 거예요.예수를 영접하는 자만 살아요. 예수님이 진짜 나그네 였어요.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러죠?머리 둘 곳도 없는 진짜 나그네 였어요.그런데 그 분이 영생의 주인이고 영생의 실체예요.이 육의 체면이나 가치를 올려 주는 그런 도움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영생, 신적 생명, 하늘의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라구요.그런데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느냐 하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그런 분으로 오셨어요.강도 보세요. 자기와 함께 죽어가고 있어요. 세상 것을 뭘 줄 수 잇어요 그 사람이?같은 강도예요.같은 나그네 라니까요. 그런데 이 나그네가 성령이 임하니까 이 나그네를 알아 보는 거예요.그리고는 그가 가진 진짜 귀한 거 생명, 그거 나 주세요.나그네를 나그네만 알아 볼 수 있어요. 내가 진짜 강도 맞아요, 이 사람만 그 나그네를 영접할 수 있는 거예요.마태복음 7장 12절 보세요. 


마7장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바로 요 말이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내가 대접 받기 위해서는 남을 똑같이 그렇게 대접해주면 그 사람이 대접해 줄 것이다가 아니라,,진짜 그렇던가요?이 말은 율법과 선지자가 대접이다 라는 내용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결이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서 연결되는 거예요.


5장17절로 가보세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똑같은 말이 나오죠? 율법과 선지자, 대접하는 게 율법과 선지자다 그래놓고 여기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하여 왔다 그러잖아요.그럼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왔다라고 쭉 나오고 내가 남에게 대접 받기 위해 내가 먼저 대접한 게 율법과 선지자다.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가지 행동 강령들이 나와요.그럼 뭐예요. 내가 이걸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 그래 놓고 이게 율법과 선지자다 그랬으면 그 안에 있는 걸 다 누가 했다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이 해 놨다는 뜻이예요.




그러면 요 안에 있는 모든 걸 이룬 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대접이잖아요, 그죠?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대접 받기 위해내가 너희를 먼저 대접했다, 이게 성경이다.율법과 선지자는 성경전체를 가리키는 거니까.요게 성경이다, 요게 십자가란 뜻이죠 그죠?그럼 이게 무슨 말이겠냐는 말이예요.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대접하셨죠?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죠?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 거잖아요.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똑같은 대접을 받기 위해 내가 먼저 너희를 대접했다, 이게 성경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로 이렇게 대접을 해주셨으면 그 대접을 너희도 똑같이 나에게 해야 된다 라는 건 뭐예요? 너희도 죽이겠다는 뜻이예요.


내가 너희를 십자가로 대접한 것 처럼 십자로 대접 받겠다는 뜻이란 말예요 그게.그런데 십자가로 대접 받겠다는 뜻이 뭐냐하면, 아, 나는 아니네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예수만 믿어야 되겠네요. 이게 십자란 말이예요.그러니까 내가 예수를 대접하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공로를 꽉 믿고 그 분만 의지 하는 거예요.산상수훈은 전부가 그 이야기라니까요.그러니까 그 예수님 옆의 그 강도도 그걸 알아 먹었던 거예요.아, 저분이 저렇게 죽어야 내가 사는 거구나.지난 주에 우리가 공부한 향유병을 꺤 그 여인과 똑같이.나는 이렇게 죽어 마땅한데 저분이 저렇게 죽어서 내가 사는 거구나.그러니 나는 저분을 믿어야지.믿으면 어떻게 돼요? 십자가에 달려야죠 같이.요 안에 성경전체가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고 옆의 강도가 나라니까요.내가 뱀이란 말예요.그 십자가를 예수가 지신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하늘의 장막을 바라며 땅의 장막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내용이 하례 사건 바로 뒤에 붙어 있는 거예요.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요? 뭘 했다구? 아무것도 한 거 없어요.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요.그래놓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선포가 되지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하는데,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하는데 아브라함이 당연히 거기를 지나가야 되요. 왜? 약자니까 아브라함이. 고대 근동의 언약의 방법은 항상 속국의 왕이 그 자리로 지나가게 돼 있단 말예요. 그런데 그자리에 하나님이 지나갔지요.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는 또다른 하나님이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 성자 예수 하나님이 그 자리에 혼자 지나가시면서 언약의, 아브라함의 대표로 서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교회의 대표니까. 우리의 대표로 서시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아들을 쪼개어 너희를 내 나라의 상속자로 만들겠다가 창세기 15장 이란 말예요.은혜의 언약. 그런데 16장에서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걸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이 율법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아니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만을 의지해요. 우리도 뭔가를 해야지요.손 빼 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그리고는 뭘 한 거죠. 그게 이스마엘이다 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이 이야기 한단 말예요. 그리고 17장에서 하나님이 13년만에 나타나셔서 이제 완전히, 비아그라도 안될만큼 마른 막대기로 만들어 놓고 오신 거죠. 오셔서 하려면 완전하게 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그러시죠? ‘하려면 완전하게 해’. 하나 갖다 놓고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라고 우기지 말고 하려면 완전하게 해.어떻게 해요? 이젠 진짜 마른 막대기인데.그래놓고는 하나님이 할례를 행하라고 해요.할례는 뭐예요? 예수님께서 할례, 쪼개짐을 당하시고 그걸 나에게 전가 시켜준 걸 흔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란 말이죠.그게 할례란 말에요. 아, 우리는 예수, 그 예수의 쪼개짐, 십자가 공로에 의해 구원 받는 거구나, 할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구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네? 그 사람이 나그네로 오는 하나님을 영접한다 가 18장이예요. 그 나그네들 안에 하나님이 계셨다니까요.그런데 나그네를 열접했어요. 어떻게? 믿음으로.나온다구요. 히브리서 13장에 나오지요.믿음으로 어떤이는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 중에 천사가 있더라.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예요.믿음으로란 말이예요.믿음이 들어가니까 예 맞습니다.나는 아닙니다.그러니 하나님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신 이사야서 53장의 그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 분이 내 구세주가 맞습니다 하고 영접한 거예요.18장. 그리고 19장에서 소담과 고모라는 어떻게 해요?야. 하나님이고 뭐고 내 보내라. 내 쾌락 내 행복, 내 가치를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이들이 율법주의 인거예요.왜 제가 소돔과 고모라를 율법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한단 말예요.신명기 10장 보세요.


신 10장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라




이건 단순히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잘 대접해서 섬셔라 그러면 복 줄게 이 말이 아니예요.이게 바로 성도에게 요구되는 너희들 진짜 예수 믿어! 이 말이예요. 히브리서 13장 2절 보세요.


히13장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요거 예요. 요 말이예요. 이게 아브라함의 얘기 거든요.그런데 예레미야 23장으로 가면


렘23장 14절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서,


(예루살렘 선지자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던 선생들이예요 그죠? 예루살렘,선지자니까 울법주의의 총화, 예루살렘 )


선지자들에게서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 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돔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뭐를?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의 행사를 다 소돔과 고모라라고 이야기 한다구요.


이어서 15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쑥울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선지자들이 너희들 막 살아라 함부로 그냥 도덕 윤리 그런 거 무시하고 막 살아라 이런 말 안했어요.떡바로 살아 율법 잘지키고 제사 잘 지내야 돼, 이런 이야기 했다구요 그런데 결국 그게 자기들을 위한 거였어요. 인간들을 위한 거 성경은 그걸 간음이라 그래요. 그걸 우상성이라 그래요.그걸 소돔과 고모라라 그래요.신약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계시록 11장 8절 보세요.


계 11장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저희 시체는 두 증인, 교회의 시체예요. 큰 성은 바벨론, 갈대아)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어디예요 예루살렘, 애굽 소돔과 고모라 다 똑같은 거란 말이예요. 뭐예요? 누가 예수를 죽였냐구요? 율법주의가 죽인 거예요.유대주의가 죽였단 말입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돼? 왜 인간의 자존심은 이렇게 묵사발이 되어야 돼? 이런 놈들이 예수를 죽인 거예요.그게 소돔과 고모라예요. 그들은 절대로 나그네를 이용하려고 하지 절대 영접하지 않아요.그러한 나그네 대접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정확하게 또 이야기 해주시죠? 마태복음 25장으로 가면 소자로 온, 나그네로 오신 예수를 대접한 무리 그리고 대접하지 않은 무리가 양과 염소로 등장합니다.그리고는 거기 대접이라는 개념이 등장 합니다.그런데 재밌는 건 양들은 하나님 내가 언제 했죠?언제 예수님을 대접했어요?라고 자기가 한 걸 기억을 못하고 염소들은 나 했어요 라고 자기를 주장해요.자기의 행위를 주장한다구요.


자, 이 이야기가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연결이 되는 거거든요.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한 게 무슨 이야기인지 한 번 잘 보시란 말예요.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서둘러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일이 예수님에게 한 일이니까 지나가다가 소자,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돼 이렇게 도덕과 윤리로 해석을 한다구요.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나가다가 거지 하나를 집으로 데려다가 열심히 씻기고 밥을 먹였더니 나중에 그 분이 예수님으로 변하더라 이런 간증을 진짜 하고 다니는 어떤 의사 권사 있죠?이 이야기를 그렇게 곡해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성경을 그냥 그렇게만 봐요.


여러분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 추운데 밖에서 홈리스로 오줌 질질 싸면서 그렇게 덜덜 떨고 있는 분이 맞아요? 도데체 하나님을 더 얼마나 모독 할 겁니까 우리가.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그 분을 얼마나 더 모독을 할 수있겠느냐구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예요.우리 같은 목 잘린 뱀을 시험하기 위해 어떻게든 상 줄려고 이 추운 겨울에 불쌍한 거지로 덜덜덜덜 떨고 거적대기 쓰고 있어야 하는 그분이 하나님이라구요?역시 나죠? 내가 대장이예요.그 사람은. 잘 보세요.마태복음 25장 34절


마 24장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보세요.내 오른 편에 있는 양들아 창세로 부터 너희들에게 주기로 준비된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러죠?그럼 뭐예요? 그들은 이미 창세때 부터 이 나라를 상속 받기로 결정되어 내려온 사람이란 뜻이예요.창세로 부터, 받아라 그래요. 그런데 그들이 이땅에 내려와서 무어를 하느냐 하면)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떼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




자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심판대 앞에 가서 예수님으로 부터 바로 이 말을 들을 거예요.그 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지 제가 가르쳐 드릴 거란 말예요.지금. 한 적 없죠? 예수님 본 적도 없는데 뭘 대접을 해요 우리가?한 적 없잖아요. 당연히 한 적 없는데요,,,양들이 그 대답 한 거예요.’ 한 적 없는데 본 적도 없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이 했다고 그러는지 한 번 보시란 말이예요. 여러분 이게 지금 다 누구 거예요 원래?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되고 벌거벗고 병들고 옥에 갇혀 있는 게 누구예요 원래가? 예수님이예요? 나죠?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하늘의 떡이니 나를 먹어라 그래요. 주린 자들아 나를 먹어라, 요한복음 7장에서 내가 생수니 내게 와서 마셔라,마태복음 7장에서는 뭐라 그래요?내가 너희들의 질병을 짊어졌다 그러죠?선악과 따먹고 벌거벗고 숨은 게 누구예요?나란 말예요. 그리고 그렇게 이 땅에 내려와서 이 지옥, 땅에 갇혀 있는 자가 나 잖아요.이건 다 내 거란 말예요.그 내 거를 예수님이 오셔서 주리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을 짊어지고 지옥에 내려 가서 Desented into hell 지옥을 경험하며 나를 건진 거 이건 예수가 나를 먼저 대접한 내용이잖아요.


예수님이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고 목 말라하셨고 아 내가 시장한데 왜 무화과 나무가 말랐지, 배고파 하시고 예수님이 대접하신 거예요 먼저. 그 상태로 놔두면 죽을까봐 예수님이 우리를 대접하신 내용이란 말예요 이거는요. 이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요건 다 사망의 증상들이란 말예요.그런데 예수가 먼저 그 날 대접을 했단 말예요.나는 믿음으로 그걸 믿어요.그러면 자, 이 십자가를 우리가 진짜 이해하고 믿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이 대접해 주지 않았으면 그렇게 목 말라서, 병들어서 그렇게 배 고파서 옥에 갇혀서 죽을 뻔한 존재인데 예수님이 내 걸 다 가져가시고 나를 대접해 주셔서 나를 살려 낸 거네요.내가 목 잘린 뱀 맞네요.하나님에게 아무 유익이 안되는 존재네요 라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내 주위에 예수를 그렇게 주로 고백하는데 조금 성숙하지 못하고 조금 실수 하고 아니,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복에서 먼 사람처럼 가난하고 병들고 이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대접하겠느냐구요?


너는 왜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부리지 못하고 성식하지 못했으니까, 죄 문제가 해결이 안됐으니까 그냥 벌 받는거야 아냐? 이렇게 얘기를 하겠느냐구요 우리가?당신이나 나나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대접해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냥 목 잘린 뱀이예요.죽은 흙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를 살려 주셨으니, 아니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미 화목된 상태에서 우리를 왜 죽이시겠어요? 그 은혜, 십자가 더 붙듭시다! 이게 소자를 대접하는 거예요.그 소자를 대접한다는 것 자체가, 진심으로 대접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나에게 행한 것을 믿는다는 이야기이므로 네가 나를 대접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양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한 게 없어요.하나님이 다 했다고 그러는데 그거 예수님이 한 거 잖아요 날 위해서?그런데 왜 나한테 했다 그래요?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맞아 내가 널 위해 해 준거야 그런데 너는 그걸 믿고 있잖아.내가 널 위해 그일을 해주지 않았으면 너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잖아. 그래서 너는 함부로 그런 소자들, 약한 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잖아. 왜 예수 믿고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아직도 왜 그런 거 못 끊었느냐고 함부로 안 그러잖아? 그래서 바로 그 소자에게 행한 게 나를 믿어준 것이므로 나에게 행한 거라고 하는 거란다.심판대 앞에가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이제는. 솔직히 얘기하세요. 나 안 했는데.


그런데 염소들은? 그들은 말씀을 도덕과 윤리로 그래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다 를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죠.그들이 뭘 하겠어요? 지나가다가 약한 사람들만 보면 혹시 저거 예수님 아냐? 진심에서 우러나와서가 아니라 불안한 거예요.그들은 그 일을 하고 반드시 기록을 하게 되어 있어요.심장에다가.하기 싫은 거 억지로 했기 때문에 잊어 버릴 수가 없어요.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들이 진짜 예수님을 만났겠어요? 예수님의 병 고쳐줬겠어요?예수님에게 먹을 물을 드렸겠냐구요 이들이?예수님은 그렇게 막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예요. 그런데 뭘 근거로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 하느냐구요? 아니, 성경에서 소자하나에게 한 거는 예수예게 한 거라며요? 이 말씀을 붙들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했는데 왜 안 했다고 그래요? 그런다구요.세상적으로 봤을 때 염소들이 멋있어요 양들이 멋있어요?염소들은 뭔가 한다니까요.그래놓고 말씀을 거기에다가 대입해서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했는데 왜 안 했다고 그러냐고 우기게 되는 거예요.이게 염소 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뭘 하고도 역시 자기를 위해 한 거잖아요.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거예요.그들이 하나님을 대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해 먹더라는 얘기 예요. 하나님 내놔 내가 상관 할테니까 이런다니까요.그게 율법주의의 실체예요.그런데 전부 거꾸로들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이사야서 53장 보세요.거기에 양 이야기가 나와요.예수님이 요 이야기를 갖고 양의 비유를 만드신 거예요.




사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질병이요)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기이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당하여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직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그가 우리를 대접하여 우리가 이렇게 된거다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고백을 하는 지 보세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다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내가 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각기 제 길로 간 그 양이 맞는데 하나님이 위에 있는 내용으로 나를 대접하셔서 내가 산 겁니다 라고 고백하는 게 양이예요. 그러니까 내가 그 양 맞아요~가 양이예요. 내가 그 제단에서 죽어야 할 그 양 맞아요, 그가 양이예요. 내가 왜 죽어야 돼? 이게 염소, 나는 다 했는데 왜 죽어야 돼? 이게 염소예요.잘 배우셔야 되요 여러분.그렇게 자신이 자기의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전적인 행함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이들은 절대 다른 이들을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 없어요.그게 소자를 대접하는 겁니다.영접하는 겁니다.열심히 종교행위를 해낸 염소들과 예수님의 행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언제 했어요? 예수님이 했죠. 이런 양들, 세상 속에서는 염소들이 멋져 보여요. 그렇지만 구원은 양들에게 임하는 거예요.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복음인 거예요.


그렇게 아브라함의 얘기가 끝나고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분리가 또 일어나요.이삭은 이스마엘에게 항상 희롱을 당하는 존재, 당하는 거예요.율법에게 은혜가 이삭은 은혜의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의 아들이잖아요.율법에게 은혜가 맞아 죽는 거예요.그렇게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당하다가 결국엔 모리아 산에서 칼에 맞아 죽는 역할, 예수의 역할로 그 인생을 마감하는 거예요.그러한 이삭에게서 또 분리가 일어나죠? 야곱과 에서예요.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등장하는 거예요.이스라엘이 야곱의 다른 이름이니까.우리의 이야기예요. 점점점점 명확해지죠?점진성이예요 성경이.야곱의 열 두 아들, 그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이 되서 나오는 거.이스라엘과 에서의 이야기가 이제 펼쳐지는 거예요.이게 구약 전체예요.이렇게 해서 끝까지 갈 수도 있지만 시간관계상 구약은 제가 여기서 멈출 겁니다.


뱀의 후손의 라인인 에서가 여인의 후손의 라인의 야곱을 죽이려고 하죠.강한 자로 나와요. 더 부자예요. 야곱은 그에게 맞아 죽을까봐 늘 덜덜덜덜 떠는 자예요.이스라엘. 그리고 사는 것도 에서는 남자 답고 정의 감이 투철하고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데 야곱은 늘 비겁하고 야비하고 연약해 빠진 자로 나와요.우리 모습이예요. 이게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고.오죽하면 야곱이 자기의 인생 전체를 한 마디로 축약해보라 그러니까 바로왕 앞에서, 세상의 왕 앞에서 초라한 한 노인이 나그네 인생길 험악한 삶, 이렇게 자기의 인생을 꼭 짜서 이야기를 해줘요.이스라엘의 삶이예요, 이게.세상, 바로 앞에서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 사는 게 성도의 인생임을 보여주는 거예요.그게 이스라엘의 삶이니까요.


하나님은 이 광야 인생길에서 늘 에서를 승리자로 만들어요.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은혜를 입어 겨우 입에 풀칠 하는 자로 사는 것처럼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예요.이스라엘이 이제 출애굽을 해서 광야에 나와서 적들을 만났는데 하나님이 오히려 그들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신명기 보세요, 2장 4절


신2장 4절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이스라엘, 야곱에게 에서의 땅을 지나가는데 밟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고 뭐 먹고 싶으면 사서 먹으라,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인생길 가다보니까 세상의 주인, 광야의 주인이 에서예요. 저거 뺏을까요? 그랬더니 건드리지도 말래, 그건 너희들한테 준 거 아니라는 거예요.왜? 이 땅의 기업은 성도들에게 한 평도 주어지지 않았어요.그건 걔들한테 주라는 거예요.나중에 그거 갖고 같이 망하게. 너희들은 사 먹더라도 돈 주고 사먹으래요.그들한테 이게 성도의 역사속 인생이라니까요.그러니까 여러분은 세상에게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러니까 고지론은 정확하게 성경의 반대 방향으로 가르치는 거예요.학생들 선동해서 마귀새끼로 만드는 거예요 그건.심지어 모압의 땅 암몬의 땅,이게 다 롯의 딸들이 근친상간해서 낳은 그 민족들인데 그들도 건드리지 말래.그리고 그냥 주야장창 텐트 쳐,그럼 치고 걷어, 그럼 걷고 나그네로 가라는 거예요. 그들은 떵떵 거리면서 이 땅에 뿌리 박고 사는데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다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늘 그들의 삶을 동경해요.쳐다보지도 말라 그랬는데 그걸 동경해요.어떻게 알아요? 하나님이 그래요.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도 너희들은 단 한순간도 내 앞에서 죄인이 아닌 적이 없었어라고 하세요.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실 그 삶을 동경한다는 뜻이예요.안그래요? 내 눈은 하늘에 있어요 그러면서 가면서 로또 두장씩 꼭 사는 사람도 있대요.하늘에서 그 로또 필요해요? 신명기 9장 6절 보세요.


신9장 6절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아니, 가나안 땅 바로 앞에서도 목이 곧은 백성이래요.뱀 새끼야 그러는 거예요.)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을 나오던 날로 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항상, 단 한순간도 여호와의 말을 순종한 적이 없는 게 우리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로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진 거예요.이걸 구원이라 그래요. 우리가 공부한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도 다 쫓아 내지 않죠? 사사기 책좀 열심히 공부하세요.그 사람들도 가갖고 가나안 사람들을 또 남겨 놔요.그 때 하나님이 뭐라 그러는지 한번 보세요.사사기 2장 20절


삿 2장 20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 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 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신명기 8장의 그 시험의 내용과 똑같은 시험이 나와요.신명기 8장에서는 광야에서 내가 너희를 왜 광야를 돌리는 줄 알아?내 말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에서는? 역시 마찬가지예요.왜 내가 가나안을 놔두는지 알아?너희들이 내 도를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보려고 결론은? 안 지켰다죠 그죠?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고 광야에서도 마찬가지 예요. 거기에서 위는 무얼 붙들게 되요?십자가만 붙들게 되요. 누가? 성도만, 성도만.세상 사람들과 여러분이 뭘 대단하게 다른 사람을 살 거라고 기대하지도 마세요.근사하게 위장은 할 수 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그러나 예수를 붙드는 그 손에 힘은 점점 들어가게 되요.그게 성도의 삶이예요.그게 예수 믿는 성도란 말입니다.


여러분 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단 말예요.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계속 되는 분리를 경험 하면서 육의 죽음, 육의 쪼개짐, 환란을 겪게 되는 거예요.세상에게 맞아 죽어요.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만 믿는 자로 완성 되는 거예요.이 모든 분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쪼개짐으로 다 받아 내시죠?신약이 열리면서 진짜 쪼개지는 형국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의 그 분리 체험이 예수의 십자가 체휼임을 이해하면서 넉넉히 이기는 거예요.십자가에서 진짜 그렇게 쪼개졌구나, 그러니까 나도 쪼개져야 되는게 맞는 거구나.이렇게 넉넉히 이기게 되는 거예요.




그걸 안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마찬가지에요. 유대주의가 그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세요. 사도행전 23장 11절


행 23장 11절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이게 뭐예요? 사단의 회죠? 서머나 교회에서 나오는 사단의 회, 유대주의, 율법주의)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에 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라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뭘했어요?도데체. 제사와 율법을 꼭 붙들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 믿어야 된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전했어요.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한 번 읽어 보세요. 뭐 대단한 게 있나?사도 바울의 설교를 읽어 보세요. 설교를. 편지 말고 설교를.거기에 착하게 살아라, 뭐해라 뭐해라 이런 거 있어요?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안 적혀 있어요.너무 심플한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죽이려고 달려 들어야 맞아요?내가 고놈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어떤 놈들 처럼,,그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세상으로 부터 이 취급을 받게 되어있어요.여러분이 십자가를 진짜 삶으로 살아내고 입으로 전하면 여러분도 이 일을 반드시 겪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땐 잠시 피하는 거예요. 그렇게 세상은 자기들의 존재성과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위해가 가면 참지를 못해요. 죽여 버려야 되요.그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폄하하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앨려고 하는 거에요.그런데 그 전쟁이 내 속에서 먼저 일어난단 말이예요.그런데 슬픈 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안에서도 수시로 여자가 남자를 이겨버려요.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과정을 통과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절감하게 되고 그 앞에서 두 손 번쩍 들고 항복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다가 열 두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지요?왜 그 이야기가 그 사이에 끼어 들어가 있을까요 여러분? 그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이가 몇 살이예요?열 두 살이예요. 그리고 그 여인은 열 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습니다. 열 두 살은 유대인들이 합법적으로 결혼 할 수 있는 나이예요. 혼인 적령기예요. 그런데 죽어 있는 시체예요.신부가. 그 신부가 어떻게 신랑을 만나느냐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거든요. 왜? 그 위에 보면 예수님이 혼인 집 이야기와 신랑 이야기를 하신다고요, 바로 위에서. 보세요.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은 피가 흐르는 동안은 계속 부정한 여자 예요. 죄인이란 말예요. 그런데 열 두 해를 피를 흘렸어요. 시체 예요. 죽은 거예요. 부정한 여인 이예요. 그 어떤 남자도 그 여인에게 손을 못 대게 되어있어요. 생과부로 사는 거죠.


그 여자가 십 이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를 잡는 거예요.그게 예수 예요.그런데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래요. 구원은 뭐예요? 어린 양과 혼인 잔치가 성립 되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이 여자가 뭘 했다구요? 그냥 열 두 해 동안 죄만 지은 거예요. 부정한 여자 였어요.그런데 신랑으로 예수를 맞아 들이게 된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이 이 여자의 부정함을 가져가고 , 율법이 그렇잖아요. 부정한 여인을 만지면 그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거거든요.예수님이 부정한 자가 되고 이 여자가 구원을 받아 신부가 되는 거예요.그리고는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요.




십 이년 이제 결혼 하는 거예요.구원의 완료 지점을 보여주는 거예요.예수님과 이제 결혼을 하는 여자가, 이제 처음으로 혼인을 하는 여자인데 죽어 있는 거예요.뭐가 잘 나서 예수님과 혼인을 하는 게 아니라 죽어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이 여자 아이가 십 이년 동안 살아서 이 지점에 와서 예수와 혼인을 하는 이게 얘가 뭘 열심히 잘 해 와서거 아니라 이 여자 아이는 열 두 해 혈루병 앓던 그 여인 처럼 십 이년 동안 죽어 있던 거야.그런데 내가 붙들어 살리는 거란다. 이게 구원이다,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야이로, 열 두살 먹은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그리고 바로 그 위에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고 죄이들과 식사를 하시는 이야기가 붙어 있는데, 식사를 하는데 유대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율법 지키느라 금식 하는데 당신들은 왜 먹냐?예수님이 뭐가 그러냐 하면. 야, 신랑이 왔는데 혼인집에서 금식하는 바보들이 있니?여기 신랑이 왔잖아.그런데 여전히 율법 갖고 그렇게 무겁게 애곡하며 힘들어 하고 있어? 배고프지? 힘들지? 신랑이 왔잖아.그러면 신랑과 함께 잔치 벌여야지.혼인잔체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율법을 지킨다고, 그것도 일년에 대속죄일에 한 번 금식하라 그랬더니 일주일에 두 번씩 굶으면서 그걸 어떻게 너희들의 의로 붙들고 신랑이 왔는데도 이 고생을 하고 있어?


그러면서 무슨 비유를 이야기 해주느냐 하면, 야, 낡은 옷에다가 새 천, 생 베를 붙이면 이게 성할리가 있냐? 그리고 가죽부대, 낡은 부대에다가 새포도주 넣으면 이게 터지지.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낡아서 못쓰는 옷에다가 생 베 붙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에 낡은 옷이란 뜻은 합성수지가 없었던 때에는 빨고빨면은 더 이상 늘거나 줄지 않는 상태가 되는 옷을 낡은 옷이라 그래요.이게 정형화 되고 고정화 된 율법주의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왔는데도 금식하면서 이거 안 하면은 우리 죽어! 이런 거. 여기에 새 언약, 은혜의 언약 예수가 생 베로 붙어 버리면 얘네들은 이걸 수용을 못 한다는 거예요.이게 너희들이라는 거예요.가죽부태?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지만 나중에는 고정된다구요.거기에 새 포도주 넣으면은 발효가 되서 터진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이 낡은 부대, 구약을 갖고 있는 한 신약으로 온 나를 절대 못 받아들인다는 뜻이예요. 내가 신약이라는 거예요.그러니까 그 구약, 낡은 것 버리고 새 것을 먹으라는 거예요.그래놓고 이 말씀을 하시면서 야이로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그러니까 신랑의 이야기가 맞는 거지요. 여러분은 그렇게 신부 되는 거예요.목 잘린 뱀들이라니까요.지금도 여전히 피 철철 흘리는 부정한 자들이예요, 우리는요.그런데 예수 께서 다가와 손 내밀어 끌어 올리는 거에요.그걸 믿고 거기에 감사하는 자가 어떻게 막 삽니까?제발 그런 식으로 시비걸지 마세요.예수 믿자니까 왜 막 살자그래요?선문답도 아니고 뭐냐구요?예수를 모른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그렇게, 나는 그렇게 부정한 자요 죽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기까지 여러분의 목은 계속 부수어 지는 거예요.그래서 환란인 거예요,여러분 인생이. 그러니까 그냥 살아있으면 되요. 가만히 살아 있다 보면 그 신랑이 와서 여러분의 손 확 끌어 올리는 날이 여러분에게도 옵니다.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