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45.느낌과 약속, 무엇이 진리인가.

Hebrew 2023. 5. 31. 21:37

로마서 45번 말씀

느낌과 약속, 무엇이 진실인가?

본문: 롬 5장 1-4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위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 아멘.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리어왕의 명대사를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폭풍아 쳐라 나의 뺨을 찢어라 사납게 몰아쳐라 비야 폭포가 되고 용솟음쳐 쏟아져라. 생각 같이 빠른 유황의 불이여 참나무를 뽀개는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이여 내 희 머리털을 태워라. 두껍고 둥그런 이 지구를 쳐서 납작하게 만들라. 인간 창조의 모태를 부수고 배은 망덕한 놈을 만드는 모든 씨를 당장에 없애라. 번개 불아 뿜어 올라라 천둥아 마음껏 으르렁 대라 . 비야 바람아 천둥아 너희는 내 딸이 아니지 너희를 비난하지는 않으련다. 너희에게 준 것이 없으니 내게 복종할 의무가 없다. 네 마음껏 무섭게 쳐라 . 너희의 노예요 약하고 멸시받은 이늙은 나는 여기 이렇게 서있으련다. 그러나 너희가 악독한 두 딸년의 편이 되어서 이렇게 늙고도 흰머리를 목표로 하늘에 싸움을 일으키다니 너희는 비굴한 사자로구나. 오 ! 이것은 너무 심하다. 신들이 우리 인간을 대하는 것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파리를 대하는 것과 같다. 신들은 우리 인간을 반 장난 기분으로 죽여버린다.

리어왕, 연극으로도 보셨을 거고 또 책으로도 읽어보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두 딸에게 배신을 당하고 막내딸 마져 잃은 리어왕이 결국 막내딸의 죽음앞에서 분노로 절명하죠. 울화가 치밀어서 죽습니다. 절명하기 전에 황야를 헤메며 외친 광란의 독백 중 한 대목이예요. 리어왕의 대사는 전부 이런 식이예요.희곡 리어왕의 대사는 사람을 잘못 본 자신에 대한 자책과 딸들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의 배신, 모든 물질을 몰수당하고 가난과 질병에 던져진 짐승같은 리어왕이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신게게까지 항변하며 처절하게 부르짖는 통한의 부르짖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희곡을 비극이라 부르지요. 세익스피어 4대 비극중에 하나이니까. 그런데 잘 읽어보면요, 그렇게 모든 걸 잃은, 심지어 이성마저도 잃은 리어왕이 오히려 진실에 눈을 뜨고 자연과 동화가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인생의 실체를 깨닫고요 사람들의 악마성을 깨우치며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의 사정을 안타까움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요.그리고 그의 사정이 그렇게 회복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비극이라고 그러지요.

세상적 관점으로는 그의 이야기가 비극이 맞습니다만 기독교인인 저의 관점으로는 아무런 문제 없이 호의 호식하다가 거대한 비계덩어리로 죽는 리어왕 보다 그렇게 배신과 모함과 권모술수로 고통을 받다가 진실에 눈을 뜨게 된 리어왕이 훨씬 나아보여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기독교인인 우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저는 그런 이유로 리어왕을 비극이라 분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 그렇게 가고 있거든요. 그럼 다 우리 인생은 비극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아담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상정해 놓은 판단 기준에 의해서 희극과 비극을 나누려 해요. 도데체 어떻게 사는 게 비극이고 어떻게 사는 게 희극입니까? 인생과 묵시와 신에 대한 진지한 깨달음도 없이 아무런 힘든 일도 겪지 않고 살면 희극인 인생이고 질고를 겪고 풍파를 지나면서 질병을 앓는 그런 삶은, 그것으로 인한 깨달음이나 성찰의 정도등에 상관 없이 무조건 비극인가요?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너희에게 닥치는 불같은 시험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라 라는 이런 언약을 , 언질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은 다 비극이냐구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걸 통과 해야되는데 그럼 우리의 삶은 다 비극 이냐는 말이예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성도의 삶에는 평화가 있다 그래요. 에이레네, 우리가 여러번 공부한 거예요. 에배소서 때부터 공부한 거죠? 평화가 있다, 화평이 있다. 그리고 그 평화와 완전히 상반이 되는 환란을 바로 밑에서 이야기 해요. 뭐가 진짜라는 거예요? 평화가 우리 거예요, 환란이 우리 거예요? 이 둘은 화해가 안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1절에서 평화를 이야기 하고 3절에서 환란을 이야기 한단 말예요. 환란에 촛점이 더 가 있어요. 사도는 4장 말미까지에서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는 로마서의 대주제를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설명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와 믿음이 어떻게 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되는지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설명을 해주죠? 그리고는 5장으로 넘어와서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평화가 있다’라고 선포를 해버리는 거예요.본문 1절을 다시 보세요.

롬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이게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야, 예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너희들의 됨됨이나 너희들의 어떤 인격적 성숙, 이런 걸 갖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설명한 거 처럼 우리는 분명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그 어떤 경험이나 느낌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믿으라라는 거예요. 이 구절을 원어에 맞게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그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므로 우리는, 프로스쿠네에서 ‘프로스’라는 전치사가 나와요.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소유하고 있다, 예요. 청(?)형도 아니고 명령형도 아니고 서술형이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갖고 있다라는 뜻이예요. ‘화평해야 돼’가 아니예요. 노력해서 화평을 이루라가 아니라 화평을 이미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예요. 사도가 왜 갑자기 화평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에베소서 2장 14절로 가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러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갖고 있다라는 건 뭘 갖고 있다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가 서 있다, 중보자로 서 있다라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지금 화평의 그 이야기를 하면서 3절부터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환란을 이야기를 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이 환란의 이야기를 납득 시키기 위해 그럼에도 너희에게는 화평이 있는 거니까 환란을 느끼고 거기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이 화평을 잊지 말라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란 화평을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 버리시거나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시거나 우리의 실수에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우리의 소망을 더욱더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제화 하여,경험케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환란을 허락 하시는 거니까, 그래서 환란이 인내 연단 소망으로 가는 거란 말이예요.그러니까 그러한 환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의하여 화평을 잊지 말고 그 십자가에 의지하여 그 예수를 즐거워 하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사건이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조건등에 대한 그런 감정이나 느낌을 현실로 갖고 있고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잖아요? 내 이 실존 감각,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거보다 더 강한 진리가 어딨어요? 나에게 인식되는.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이것만이 진리이며 현실인줄 안다는 뜻이예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예요. 그 말은 우리가 바라는 천국,우리가 지금은 보지 못하는 천국, 그 천국의 증거와 실상으로 믿음이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 하나님 나라가 뭐냐하면요 통치,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마음대로 끌고 가는 걸 통치라고 하잖아요. 그게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게 믿음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은 자신의 뜻과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의 그 삶을 격발하고 생산해내는 역할을 하는 거지 그 믿음을 능력으로 사유하여, 변화산 아래에서 예수님이 ‘너희들 믿음 없다’라고 이야기 해버리잖아요?그들이, 제자들이 그 믿음을 능력으로 사유하여 뭘 하려고 하니까 그걸 안되게 만들어 버렸단 말예요.하나님이. 그리고는 ‘너희들은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은 능력으로 사유하여 어떤 것을 이루고 도모하도록 주어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들은 현재의 상황이나 사건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갖고 자신의 현실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일희일비 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약속,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진리로 받아들이며 살아야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면 실지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우리교회에도. 제가 보기에 야, 저런 상태로 어떻게 저렇게 살지? 그런데 심지어 웃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살지?그런데 믿음이 살게 만들더라는 거예요.예를 들어 볼게요. 지금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입니다. 백 년 후의 버락 오바마는 뭘까요? 무덤 안의 시체입니다.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 의 부자입니다. 백 년 뒤에 빌 게이츠는 뭘까요? 무덤 안의 시체입니다. 리비아의 철권 통치를 휘두르던 카다피,며칠 전까지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이었는데 지금 시체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내고 있는 이 역사속 역할은 백 년도 지속될 수 없는 아주 한시적인 거예요. 여러분의 역할은.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이 역할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역사속에서 여러분이 인생이라는 옷을 입고 지금 맡고 있는 그 역할은 이제 잠시 후면 끝나는 거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느낌이나 감동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우리가 아무리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내일 우리의 시간이 어떠한 감정으로 채워질지 아무도 몰라요.오늘 우리가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느낌이죠, 감정이죠?내일 우리의 시간이 어떠한 감정으로 채워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이나 느낌은 한시적이며 유동적인 거예요. 그래서 진리가 아닙니다.똑바로 들으세요. 그래서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의 이 몸뚱아리도 진리가 아니라구요.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성도의 현실이 있어요.그리도 성도의 느낌이 있다니까요.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평화예요.그게 하나님의 아들이예요.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거란 말예요.그래서 그걸 내가 나를 규정하는 대상으로 삼을 때, 너라는 개체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미친 놈처럼 정말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자기 최면 하라는 말이 아니란 말예요, 그거는요. 그래놓고, 그렇게 열심히 연극하고 쑈 해놓고 거봐 나는 이렇게 성화가 되서 이 상황에서도 기쁘단다? 미친놈이예요, 그건요.어떻게 그게 기쁩니까?

믿음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그 묵시의 현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능력이예요. 물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능력입니다.성도는 그 믿음을 통하여 현실 위로 부양을 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역할이란 말입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은 반드시 현실위로 부양을 해야되요. 보세요. 세상을 향한 환란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평화를 이갸기 하잖아요. 이 둘은 화해가 안되는 거예요.그러니까 여러분의 느낌을 갖고 절대 여러분을 판단하거나, 절대 여러분의 외모 , what is seen, 보여지는 것을 갖고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려고 하면 안되는 거예요.성도는요.

그래서 사도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다. 단 그 평화는 하나님을 향한 평화다라고 전제를 해놓고 환란의 이야기를 펴쳐내고 있는 거예요.사도는 성도가 누리는 평화를 세상에서 느끼고 누릴 수 있는 평화라고 하지 않아요.하나님을 향한 평화라고 정확하게 이야기 한단 말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똑같은 말이예요. 에이레네,평화를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다.이게 성도가 가진 평화예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평화를 누릴 수가 없어요.다른 건 다 가짜예요. 여러분이 얼마만큼 성숙하고 변화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마만큼이면 됐어요?이제 하나님과 나 사이이는 이제 이렇게 평화가 이뤄진 거 맞죠? 나 착하게 살았으니까’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게요. 그 평화의 실체는 예수라는 것입니다.오직 예수.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지속적으로 평안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평화, 에이레네 라는 개념은 연합이라는 개념이예요. 돌아서서 부등켜 안다,가 에이레네 거든요.연합의 개념이란 말예요.그리고 그 연합이 바로 영원한 안식이라구요. 그런 개념을 히브리 사람들이 갖고 있단 말입니다. 그걸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줄 수 있냐구요? 나라는 존재와 연합이 되어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다 한시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해드린 것처럼 인간은 원래 자아라는 걸 챙기거나 규정해 낼 수 없는 ‘무’였습니다. 그죠? 흙, 무, 아파르.먼지 였단 말예요. 그러니까 먼지는 나를 규정할 수가 없어요.내가 누구인지를. ‘무’니까. 없음이니까. 그래서 반드시 그 존재 밖의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나를 구축하고 규정할 수 밖에 없어요. 이걸 의존적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고 하지요? 신학자들이. 그러니까 인간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의해서만 나를 규정해야 된다는 뜻이예요,그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뜻이. 부모와의 그 관계 속에서 자식이라는 나가 생겨나고.물질의 소유 정도에 따라 부자라는 나, 가난한 자라는 나가 규정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러한 역사속 관계는 영원히 지속 될수가 없잖아요. 대상이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에.그 대상이 한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건 영원한 나가 될 수 없단 말이예요.그걸 죽음이라 그래요.그렇게 나를 규정한 한시적인 게 사라지면 내가 죽는 거란 말입니다.그게 내 생명이니까. 그림 하나 보여주세요.예전에 제가 보여드린 건데, 보세요. 원래 하나님이 나에게 붙어야 그게 진짜 나란 말예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나.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이게 역사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떠난 상태에서 저런 것들이 덕지 덕지 붙어서 나를 규정하고 있는데 저기 붙어 있는 것들이 다 뭐예요? 한시적인 거죠. 저게 떠나갈 때마다 우린 죽고 싶잖아요. 그게 내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그런데 우리는 저게 내 생명이고 나 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어요.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래서 마치 저 대상들이 사라지면 내 생명들을 잃는 것처럼 아프게 되는 거예요. 그 대상이 나를 규정하고 있고 나에게 머물러 있는 그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고 감지를 해요.저게 나에게 있을 때 이게 평화라고 감지를 한단 말예요.그런데 저게 사라졌을 때 평화가 깨진다고 우리는 감지를 하죠?느끼죠 그렇게? 저게 사라졌을 때 평화가 깨졌다라고 하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저건 다 언진가는 사라질 것임으로 평화는 역사 속에서 지속 될 수가 없는 거란 말예요.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는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평화란 말예요.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가 되었을 때, 그 현실은 절대 변개되거나 깨질 수 없단 말예요.그것이 진짜 평화고 진짜 안식이기 때문에요.

세상 사람들에게서 받는 여러분의 평가, 저 사람은 참 착해, 참 성실해,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야, 이런 평가. 이것도 한시적이예요.절대 그런것도 여러분의 평화에 근거가 안되는 거란 말입니다.그런데 우리는 그걸 성화라고 이름 붙여서그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뤄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은 평화라는 단어와 안식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써요.평화가 이루어지면 그때 비로소 쉬는 거거든요.그런데 저런 것들이 나일때에는 저걸 유지하기 위해 쉴수가 없어요.두번째 그림 보여주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걸 내 망므에서 끊어 내버리고 , 그게 역사속에서 우리 삶속에 일어나는 일이예요, 끊어 내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갖다 붙여 버리는 거예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음안에서 붙여버리는 이것이 우리 역사속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만 믿게 만드는 거예요.예수만 믿게 만든다는 건 그 이외에 내가 나로 규정하고 있던 것들을 다 못믿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그래서 여러분이 배신도 당하는 거고 재산도 잃어보기도 하는 거고 건강도 잃어보는 거예요.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불행도 겪어 보고. 이런걸 겪는 게 인생이지 그런 거를 신앙을 통하여 쌓거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게 신앙생활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진짜 평화와 진짜 안식이 우리에게 약속이 되어 있고 이미 완료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역사속 현실, 그게 뭐예요? 이게 하나하나 끊어져 나가는 것, ‘환란’이라고. 그래서 환란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진짜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걸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해요.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 역사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성취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살아요. 그리고는 자신들의 업적과 성취, 그 성취물을 통해서 잠깐잠깐 평화와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돈이 주는 위력으로 평화를 맛보기도 하고 자식을 비롯한 가족들의 출세를 통하여 평화를 맛보기도 해요.그리고 다른 이들의 나에대한 평가를 가지고도 안식과 평화를 맛 봐요.지긋지긋하게 가난해도 야 저 사람 신앙 좋아, 저 사람 참 착해, 이 칭찬으로 사람은 백년을 버틸 수 있어요. 이슬만 먹고도, 참이슬 말고. 그리고 그 평화를 오래 지속 시키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을 하여 그 평화를 맛보게 해주었던 대상들을 계속 끌어 모으는 거예요. 못쉬는 거예요, 그래서.그리고 그 대상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러한 한시적 평화의 거짓됨과 무용함을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들이 평화의 대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그 마음속에서 제거 해 나가세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이역사 속에서 아담인 ‘나’가 구축해 놓은 그 육적 ‘나’를 붕괴해 나가시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없어지면서 내가 붕괴 되요.그래서 결국 ‘나는 누구지?’ 리어왕에도 똑같은 대사가 나오는데.그래서 이것을 어떤 시인이 살짝 제목으로 갖다 썼더라구요. ‘나는 누구지?’ 누가 내가 누구인지를 좀 말해줘.내가 누구야? 이 자리까지 몰로 가는 거예요. 내가 다 붕괴되고 여기에서 의미를 찾고 있던 나인데 이것에 의미들을 자꾸 하나님께서 퇴색 시켜가니까 그럼 나는 누구지 이 질문을 반드시 하게 되어있어요. 이건 여자들이 갱년기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성도가 하는 질문이라니까요. 내가 누구지 ? 나는 왜 살아? 도데체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드시고 그 공허한 의미부재의 자리에 하나님을 끼워 넣어요.복음이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요. 의미를 추구한다는 건 이유와 목적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 이유와 목적에서 가치와 보람을 찾는 거예요.그게 의미를 추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에 다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여러분들이요. 그죠? 그래서 의미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 거지요.그건 모두 그렇게 가치있는 일과 보람있는 일을 하며 사는 가치있는 나를 구축하기 위한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노력이예요. 아담들은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가치있는 나로 평가를 받을 때 평화와 안식과 행복을 느껴요. 호텔에 갔을 때 벨보이가 와서 차문을 확 열어주면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데 저 구석에 네 맘대로 아무데나 갖다 대 이러면( 조그만 차를 타고 갔을 때 그러거든요)불화와 울화가 치밀죠.

보세요. 세상이 나를 가치있게 평가해주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느껴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업적이 영원한 게 아니라는 게 문제인거예요.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개입하셔서 바로 그러한 의미추구의 위기를 살게 하세요.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도데체 난 왜 사는 거지? 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 일차적으로 이걸 고백하게 됩니다.도데체 난 왜 사는거지? 그 의미 위기의 자리에 복음이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그게 믿음의 역할 인거예요. 믿음은 그렇게 의미 없고 가치 없어 보이는 인생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 하늘에 완성된 하나님의 작품, 하나님의 나라가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선 이 반드시 세상에서 내가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는 이것이 가치 없다라는 걸 깨닫게 하는 과정이 있어요.

그래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하나님을 향한 평화 에이레네를 이야기 하고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라는 그 소망의 이야기를 하고 그 소망의 이야기를 성도의 역사속 환란의 이야기로 끌고 가는지 잘 아시겠지요? 뭐가 현실이냐는 거예요.성도들아, 독자들아, 교회들아 뭐가 현실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된 너희의 현실을 진짜 믿는다면 그 의의 선물 앞에서 어떤 현실이 너희의 평화를 깰수 있겠냐? 그런 뜻이예요.저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계세요?아니면 리어왕에 버금가는 환란의 삶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리어왕이 그러죠. 우리가 이 세상에 울고 나오는 이유는 이 바보들로 가득찬 세상에 나온게 너무 슬퍼서 우는 거래요. 그게. 애기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건. 세익스피어도 참 살기 싫었었나봐요. 이 바보들로 우글거리는 세상에 나온 게 너무 슬퍼서 우리는 울어야 되는 거라는 그런 역사 인식, 올바른 역사 인식이 환란을 통한 리어왕에게서 나온 거예요. 이게 왜 비극이냐는 말예요.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알고 소망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그게 진짜 비극입니까? 그 영원한 나라를 위해 이 모형인 역사속에서 내가 좀 소모되고 조롱 받고 사람들에게 폄하되는 게 그렇게 비극입니까? 여러분은 어떠 십니까? 이 바보들로 가득찬, 아니 마귀들로 가득찬 이 세상 속에서 정말 평화로울 수 있냐구요. 힘드시죠? 사람들 안의 그 마귀성을 볼때 마다 섬뜩섬뜩 놀라지 않으세요? 어떻게 사람이 이러지? 그런데 그게 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교묘하게 그걸 감추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 보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게 나라구요. 바퀴벌레, 뱀,지네, 생쥐, 지렁이, 그리고 사람.이 중에 제일 더럽고 무서운 게 뭐예요?밤에 만났을때 제일 무서운 거? 사람이죠?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거. 그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나를 규정해가면서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이 어떻게 평화롭기만 하겠어요? 우리에게도. 그런데 성경이 너희에게는 평화가 있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지금 이자리에도 오늘 목 매달을까, 내일 목 매달을까 이런 고통속에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어요.그리고 제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요. 그런데 성경은 평화가 있다 그래요. 오늘 목 매달을까 내일 목 매달을까 이건 내 감정과 느낌이예요.내가 현실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그런데 성경에는 너는 평화로운 자이고 안식하는 자라 그래요. 이 둘중에 어떤 게 진리이다? 내 느낌과 감정이 진리예요? 하나님 말씀이 진리예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가 진리다를 붙들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환란과 평화가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거 외모 이것이 그 어떤 것도 분별해낼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되는 거예요. 성도는.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가면 참 깜짝 놀랄거예요. 저사람만큼은 여기 오면 안될 거 같은데 왜 저 사람이 여기 와있지? 그게 자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서 그럴거라니까요.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와있어? 깜짝깜짝 놀랄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예요. 어떻게 여러분의 묵시속의 현실을 이 세상에서 감지를 해냅니까? 그리고 판단을 하냐구요? 저 사람은 성숙한 사람, 이 사람은 지옥 갈 사람.우린 다 그러고 있잖아요 지금. 느낌과 감정은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로 판단을 한다니까요. 외모를 갖고.

말씀이 진리란 말입니다. 약속이 진리인 거예요 여러분.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약속이 진리인 거란 말입니다. 예수가 진리예요. 그 예수가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들 됨 그게 진리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진리야. I am the truth! 그진리.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가짜 진리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그 진리. I am the truth, I am the way! 그랬다니까요. 너희들이 이야기 하는 그 수많은 그길 아니고 진짜 길. 하늘에 이르는 진짜 길. 천로 역정. 예수란 말입니다, 그게. 그래서 오늘 본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 한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것도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되요.

성도는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걸 곡해해서 슬프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마치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연극을 하기도 하는 거예요. 자식이 아프카니스탄 전쟁터에 나가서 사지가 찢겨져서 죽었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웃는 엄마의 사진이 기독교 신문에 났습니다. 여러분 그분이 존경스럽던가요? 제눈에는 마귀 할멈처럼 보였어요. 아이가 전쟁터에 나가서 사지가 찢겨서 돌아왔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기뻐하는 게 이게 사람이냐구요. 진짜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게 가능해지나요? 근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런 연극들을 한다니까요. 내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울지 말래요. 그리고 잔치를 벌여요. 그거 진짜 죽기를 바란 사람이예요, 그 사람은요. 신앙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조거 언제 죽나 그래야 돈 열심히 그냥 혼자 자유롭게 쓸텐데..그러다가 진짜 죽으니까 좋아서, 어떻게 사랑하는 남편,아버지가 죽었는데 잔치를 벌이냐구요? 순 쑈들 하고 앉았는거예요.

사업이 쫄닥 망해서 당장 먹고 살게 없는데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거둬가신 분도 하나님이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이런 너스레를 떨어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내일 굶어 죽는데? 암에 걸려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하나님으로 행복해요?그거 덜 아파서 그래요. 여러분 솔직해지세요.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신앙있음을 연출 해내고 위장해 낼 수 있는 그런 작자들이예요.도데체 어떤 인간이 환란속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어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건 아직 환란다운 환란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예요. 진짜 상상도 못한 환란과 고통이 와보세요. 어디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거둬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이딴 소리가 어디서 나와요? 악 소리밖에 안나오는 건데. 절대 인간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환란과 시험과 고통 앞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실력을 사유할 수 없어요.

한국에서 지금 암으로 투병 중이신 김춘(?) 권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번에. 목사님 단 한순간만이라도 고통이 좀 멈춰주면 살 거 같은데 단 한순간도 침 삼킬 동안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대요. 대장암과 유방암 거기다 신장까지 다 망가져 갖고 이제 그냥 고통 속에서만 살고 계신 거예요. 그 연로하신 분이, 오죽하면 저한테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이 안 놓아 주신다고 , 한순간만 고통이 좀 멈추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게 소원이예요. 만일 제게 이런 고통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너무나 당연히 난 그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죽었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진짜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이 안 왔을 때는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는 실력이 있을 줄 알았다는 거예요.자기한테요. 그런데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치자 평화고 즐거움이고 안식이고 모든 게 다 달아나 버리더라는 거지요.너무 아프니까요. 세상 전체가 빙글빙글 돌아간대요, 고통속에서. 그랬더니 그 육체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잊어지더라는 거예요. 너무 아프니까. 그러면서 저한테 뭐라 그러시느냐면 ‘아, 하나님은 끝까지 이렇게 제 뼈속에 있는 죄까지 나도 몰랐던 것까지 끝까지 다 펼쳐서 저에게 인식시켜 내고 데려가시는군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사님 그러니까 제 안에서 나오는 것중에 죄가 아닌 게 어디있겠어요? 나는 예수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한 사람이 맞아요’

이게 성도가 해야할 마지막 고백인 거예요. 환란중에 그 고통속에 즐거워 하는 게 아니라. 그 환란과 고통 그게 너희들에게 느낌과 감정으로 감지가 된다 할지라도 약속 되어있는 예수 , 그 즐거움 ,화평, 평화의 실체는 어디 가지 않고 변개 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여기에서 즐거운 척, 기쁜 척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여러분 아프면 아버지께 아프다고 말을 하세요. 먹을 게 없으면 아버지한테 달라고 이야기를 하시라니까요. 속으로는 줬으면 하고 꽁 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뭐, 죽기 밖에 더하겠어? 그 죽음이 뭔데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 하시느냐구요. 진짜 그 죽음이라는 게 한번 가까이 와보세요. 여러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아직 살만하니까 그런거지.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세요. 아버지께서 내 소유를 털어내려 하실 때 괜 찮은 척하지 말고 아버지 나 그것마저 없으면 저는 정말 살수가 없을 것 같아요 라고 아버지한테 매달리시라니까요.

아니 그게 기복신앙 아닙니까? 기복신앙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종교생활의 목적을 내 유익이라고 정해놓고 그리로 달려가는 걸 기복이라고 그러지 내 아버지에게 내가 필요한 걸 달라는 게 왜 기복이냐구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다윗 보세요. 하나님이 죽인다고 그랬는데 네 아들 죽인다고 그랬는데 금식하면서 살려 달라고 기도 했다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죽어라고 기도했는데 아버지가 결국 안들어 줬을 때, 아 역시 아버지는 내 뜻대로 내 인생과 역사를 운행해 나가시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선한 뜻대로 역사와 인생을 운행해 가시는 거구나 이건 나에게 필요 없던 거구나라고 진짜 포기가 되는 거지. 근사하게 속으로는 너무 갖고 싶고 너무 낫고 싶은데 위장을 해내느라고 나는 괜찮아요, 나는 즐거워요. 이러다가 진짜 아버지가 안주면 아버지를 죽는 날까지 원망하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거 안하는 걸 성화라고 그런다까요. 아픔 속에서도 즐거운 척 하는 걸 성화라고 그래요. 다 쑈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성숙입니까? 여러분 자식이 다리가 다쳤어요.이제 썩어 들어가는데 아빠 아퍼요. 약 발라주세요. 그때 아빠는 고쳐주면서 기뻐하는 거예요. 그런데 장롱 속에 들어가서 울음을 참으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이거 얘기하면은 잘못된 거라고 그랬어. 다리는 썩어가는데 그러고 있으면 여러분 속이 편하시겠냐구요.그런데 왜 우리는 그걸 성화라고 하냐구요?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기가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infant 라는 단어가 나온 거예요. 천국은 이 어린아기 같지 않으면 못들어 간다라고 하는 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기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역사와 인생이 우리는 어떤 존재였으며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었는가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그게 복음을 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똥 오줌 못가리는 우리의 처음 자리,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 마음대로 각기 제길로 가는 그러한 우리의 처음 자리, 선악과 따먹은 길 잃은 양의 그러한 현실을 살아야 되요. 여러분은요.그리고 그러한 나의 불가능함과 연약함을 은혜와 긍휼로 감싸시는 아버지의 수고와 노력을 믿음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예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죽음을 앞둔 어떤 성도가 천국 문 앞에서 자신의 태어나면서 부터 자라남 그리고 지금 까지의 그 모든 인생과 역사 이것을 찍어둔 아버지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그게 믿음이예요) 아. 난 이렇게 태어난 거고,( 난 원래 없음이었잖아요)그런데 아버지와 엄마에 의해서 이렇게 창조된 거예요.이렇게 아버지의 희생과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거구나 .아버지가 요때 젖 물려줘서 내가 굶어 죽지 않고 산 거고 ,아버지가 요때 닦아줘서 내가 이렇게 똥 독 올라 죽지 않은 거구나. 이런 거를 여러분의 삶으로 , 비디오로 보는 거예요. 아버지가 누구며 나는 누구였는지를 비디오로 보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러지,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로 자라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제발 알아먹으시란 말예요.

자라지도 않은 인간들이 꼭 자라야 된다고 그런다구요.이미 하늘 보좌에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성도가 인생과 역사라는 그 비디오 테이프를 삶으로 살아내면서 아, 이래서 우리는 스스로 존재 일수도 없는 거고,( 애기가 어떻게 스스로 존재를 해요 어떻게 삶을 영위합니까)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구나를 보는 거예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아기에게 은혜의 젖을 물리고 더럽고 추악한 배설물을 손수 다 닦고 치워 주시며 수시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자는 자신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로 덮으시며 아비의 노릇을 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고 경험하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인 거예요.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용서를 경험하는 거예요. 매순간 용서를 받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우리는 살수 없다라는 이걸 경험하는 거예요.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해드릴 수가 없어요.왜? 내가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마귀가 된다라는 걸 너무 잘알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죽는 날까지 나는 십자가와 예수 은혜 이야기 외에는 해드릴 수가 없어요.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다른 이야기 해주는 곳으로 가라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자신의 성장 과정을 찍어놓은 비디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그나마 이렇게 사람답게 자라고 성장한 게 모두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에 의한 거였구나 그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는 그거, 그걸 느끼잖아요? 여러분 결혼 할때 그런 비디오 엄마 아빠가 찍어서 주지 않아요? 그런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는 부모님을 찬양하게 되고 결혼식 전날 펑펑 울어서 눈이 그냥 이렇게 부어서 결혼식에 오고 그러잖아요. 밤새 술먹어서 그런게 아니구.

어느 누가 낳을 때부터 이렇게 훌륭한 성인이 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있었네! 이렇게 자신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역사와 인생을 살면서, 매일 똥이나 싸고 오줌이나 싸면서 허구헌날 자기 쾌락이나 쫒아서 가출이나 일삼는 탕자처럼 죽은 흙으로서의 자신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한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 점점 하늘의 백성으로 확인이 되어지는 그 삶을 경험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진짜 아버지와 진짜 내 집을 소망하게 되는 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인간의 수고와 열심이 만들어 낸 이 모형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해 놓은 하나님 나라에 이미 살고 계신 분들이고 이 인본의 모형 세계를 살아가면서 그 신본의 원형 나라를 소망으로 기다리는 분들인 거예요.

요한 복음 10장 1절 보세요.

요 10장 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며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이거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이 목자가 어린 양으로 나와요)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 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나는 예수예요,은혜 십자가 보다 먼저온 게 뭐예요. 율법)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구약에 절도와 강도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거짓 선지자, 그들이 뭘 얘기 했다구요? 평안하다, 평안하다 율법을 이야기 했단 말예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의 문, 예수님이 이 문을 도데체 어디에 있는 문을 인용하여 문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요? 성전문이죠 당연히. 에스겔서에 가면 성전을 척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성전의 문이 나와요.여러개가 있는데 동쪽에서 부터 출입구가뚫립니다. 여러분, 아담도 그랬고 가인도 그랬고 이스라엘도 그랬고 저주 받아 저주의 땅으로 쫓겨나는 이들이 간 쪽이 동쪽이죠? 동쪽에서 지성소가 있는 서쪽으로 들어오는 그 모습을 성전이 그리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문이 동쪽에서부터 서

쪽으로 진행 되어지면 진행 되어질 수록 4척씩 좁아져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그 문을 갖고 이야기 한 거예요.여기서도 바로 그문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양의 문이라고. 그 성전문은 제물인 양이 들어오는 문이거든요. 그런데 그 제물인 양은 왜 들어오는 거예요? 죽으러 들어오는 거예요. 인간이 나는 살았어요 하고 선악과 따먹고 아담 처럼 살던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를 만나러 들어오는 건 내가 죽는 거예요. 이 육적자아가. 그래서 문이 좁아진다라고 하는 거예요. 좁은 문인거란 말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지성소 앞에는 문도 없어지고 휘장으로 딱 막혀있어요. 진입불가! 그 문이신 예수가 휘장인데 자기의 몸을 찢어 좁은 문, 양의 문이 바로 나라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마지막에 자기의 몸으로 그 문을 막고 자기의 몸을 찢어, 히브리 사람들이 그 목동들도요 양들을 우리에 넣고 자기가 문에서 자지요?목자가 문이예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문이 되신 예수가 찢겨 하나님과 양들이 대면하게 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보고 너희들은 문밖으로 나와야 된다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는데. 같은 문이거든요. 영문 밖이 뭐예요? 성전문 밖이예요.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그러죠? 그러면서 뭐라그러냐면 예수님이 그문 밖으로 나갔다 그래요. 그게 바로 역사속 성전,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성전문 밖이라는 거예요. 이런거죠. 문이 하나 있는데 예수라는 문이예요. 세상 속에서 보면 성도들이 이 율법주의, 유대주의라는 바리새인들이 이 율법주의, 유대주의 였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이 성전으로 온 거잖아요. 예루살렘에. 이문 밖으로 튀어나가 버리는 거예요. 영문 밖이죠? 이것이. 이게 십자가예요. 묵시에서 보면은 이들이 율법주의, 유대주의 밖으로 튀어 나와 예수라는 문으로 들어오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하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여러분은 인본주의, 율법주의 밖으로 나가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옛 성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예수님이 자기 양들을 문밖으로 불러내시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거란 말예요. 재밌는 건 그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건 지금 목자가 자기양이 누군지를 다 안다는 이야기고 이미 하늘에서 이름 붙여져 이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이야기예요. 목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자기가 하늘에서 알고 있는 이름까지 알고 있는 그들이 있는 거예요. 내 이름 아시죠, 여러분 찬양은 잘 부르잖아요. 그 이야기가 이 이야기예요. 목자가 내려와서 양들을 불러 내는데 이름을 부른단 말입니다. 양들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 아니라 목자가 부르는 이름을 알아듣고 나오는 거예요. 무슨 이름? 예수라는 이름. 계시록에 가면 그 양들이 전부 어린양이 이끄는 대로 쫓아가는 그 양들이 전부, 14장에 가면 이마에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잖아요. 그 이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로 구원받는 거지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착한 척,성숙한 척하여 나를 구축해낸 그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히브리서 10장으로 가보세요.

히 10장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십자가에서 이게 찢어지죠? 이게 문이예요. 그 다음 그림 한번 보여주세요. 동쪽에서, 쫒겨난 자리예요. 저게 역사예요. 서쪽이 지성소란 말예요. 약속의 나라예요. 그래서 가나안을 굳이 요단강 동편으로 가서 서쪽으로 들어가게 만드시는 거예요. 들어갈수록 문이 좁아져요.죽은 거예요. 자아가 해체되는 거예요. 까여가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결국 십자가 앞에서 죽고 예수가 덮어버리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걸 성전이 그대로 그리고 있다니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절대로 여러분의 이름을 내기 위해 세상의 칭찬을 받는 자로 살 수 없어요.세상은 여러분을 미워한다 그랬어요. 여러분이 거짓말 안하고 착하게 살고 이웃을 섬기며 여러분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면 세상이 여러분 칭찬해요.왜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요? 저런 착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니 이게 복이 아니고 뭐냐? 세상이 칭찬해 준다니까요. 그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예요. 그거 하면서도 성도는 왜 욕을 먹느냐면 그거 아무리 해봐야 이거 갖고 천국에 올라 가는 거 아니고 예수 믿어야 됩니다 이말 때문에 욕을 먹는 거예요. 우리 서머나 교회는 그 앞의 전자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이걸 확고히 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전자는 지향성으로 나오게 되요. 그렇다고 공식화 되고 고착화된 어떤 그런 모양이 반드시 그렇게 단계단계마다 있다는 건 아니고 지향성으로 나오지만 실패도 하고 송공도 때로는 하면서 예수를 믿는데 이게 사용되는 거지 예수를 믿는 증거로 이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계시록 14장 보세요.

계 14장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리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 가는 자며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 어린양이 불러 내면 어린양이 이끄는대로 따라 가는데 죽음의 자리로 따라가요.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그러니까 이 신랑이 아는 거예요. 자기가 준 빙패물을 갖고 있는 신부들이 있거든요. 내 이름,내 이름,내 이름. 그들만 불러내는 거예요.그들이 정말 뭐에 홀린듯 그 음성을 듣고 따라 가는 거예요.그래서 몇 명 없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죠? 몇 명 없는 거예요. 그 말하기 전에 뭐라 그러세요? 세상에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들이 교회에 많을 것이다 그러시죠. 많을 것이다와 Few라는 단어 이게 지금 대조되고 있는데 그럼, Few와 많음,Few는 거의 없음이죠? 많은은 뭐예요 그러니까? 대부분이란 뜻이죠. 여러분이 알아서 새겨 들으세요. 아버지가 예수라는 믿음을 심어 놓은 이들만 현실 속에서 묵시를 보게 되는 거고 그들만 골라서 아버지 나라로 다시 끌어 올리는 거예요. 그들만 듣고 그들만 봅니다. 요한 복음 6장 39절 보세요.

요6장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늘 그를 내가 마지막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 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 오느니라

아버지가 찍어서 보내는 사람만 와요. 자기 노력 자기 행위로는 아무도 못 와요. 그러니까 하늘의 창조가 이 역사속에서 펼쳐지게 되면( 그게 구원이잖아요?) 그래서 구원에 과거 시제, 현재, 시제 미래 시제가 나오는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한다는 뜻에서 현재 시제가 아니라 구원이, 이게 역사 속에서 설명 된다는 뜻에서 현재 시제인 거예요. 그렇게 구원이 역사 속에서 펼쳐지면, 현재 시제로 펼쳐지면 당연히 구별이 일어나겠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아, 주 예수가 아니면 안되는구나를 드러내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묵시 속에 완료된 우리)땅에 있는 것이나,(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모든 인간들) 땅 속에 있는 자들, 뭐예요? 지옥에 있는 자들, 이 모든 게 다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됐는데 주가 진짜 메시아이며 그분이 창조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게 다 자기 역할을 한다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역할을 하는 그들,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 복음이 뚝 떨어지면 하나님이 이름을 이마에 새겨 놓은 자들이 구별되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몇 명 안되지만 구별되어 나오면서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새창조의 모습이란 말예요. 

그래서 창세기의 첫 째 날에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그러면서 창조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거란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고 성경이 시작되죠? 그 말씀은 곧 이제 역사의 시작이란 말이예요. 태초에 라는 말, 레시트 라는 말이 시간의 시작이란 뜻이니까, 그죠? 역사가 시작된다 라는 거예요. 시간의 시작이라는 건 제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흘러 가는 거죠? 이 흐름 속에서는 반드시 존재의 썩어짐이 열매로 맺히게 되요. 흐르니까. 그러니까 시간의 시작, 태초에 라는 단어 자체가 끝을 이미 예고 하고 있는 거예요. 썩어져서 멸망 하는 거니까.시간의 시작이니까요. 시간이 없어야 영원이란 말예요. 영원한 현재. 그게 영원히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이 흐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썩어지고 결국 멸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 역사라는 것 자체가 ‘태초에’로 시작이 되어 ‘멸망’으로 끝난다는 걸 그 태초에라는 단어 하나가 벌써 이야기 해주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작 되어 멸망할 그게 잠시 존재하면서 모형으로 무얼 설명해주겠어요? 그러면서 창조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 보면 하나님의 묵시속 창조가 무언지를 설명하는 거 아니겠어요? 역사가, 시간이, 우리 인생이. 그걸 설명하는 거란 말이예요. 역사 속에서 무얼 묵시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완료되어 있는 이걸 설명해내는 거란 말예요, 여기는요. 그러니까 이름을 가진 자가 내려와서 그 이름을 부르니까 아 내이름 거기서 이거 였지 하고 올라가는 거.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언제 붙여졌겠냐구요? 창세전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건 하나님의 새창조가 묵시속에서 어떻게 완성이 되어있는지를 이 역사 속에서 보여 주시겠다라는 하나님의 포효 인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시간과 천지, 공간을 창조하셨다.뭐하러? 무얼 설명하기 위해서. 한시적인 공간 안에서. 그리고는 창조가 일어났는데 그 창조가 분리의 형식으로 일어나지요?어둠과 빛이 갈라져요.궁창위와 아래가 궁창으로 갈라지죠? 물과 뭍이 갈라져요.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첫째 날의 그 빛만 남은 세상이 나오고 둘째날에 하늘과 땅,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이 연합된, 어린양과 교회, 아담들이 혼인하는 연합의 장면이 나오죠 또? 이게 둘째날이 성취되는 거예요. 다시는 바다도 있지 않겠고 라는 물론 상징적인 것이지만 저주의 바다, 그 바다가 사라진 뭍만 남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 세 날은 언약을 담고 있는 거예요. 약속을 담고 있는 거예요. 요 약속대로 내가 이루는데 그 세 개 다가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단 말예요. 빛이신 예수,세례받아 쪼개지는 예수,저주의 바다가 되어 빠져 죽으시는 예수.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채워지고 안식으로 결론이 지어지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에 이어지는 내용이예요. 전체 역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거고, 묵시속에 완료 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창조의 엄청난 계획이 1장 1절에서 2장 3절안에 다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섯 째 날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가 되는데 보세요. 창세기 1장에서 아담이라는 말이 나와요 안 나와요? 신약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첫째 아담, 첫째 아담, 죽일 아담, 아담안에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에서는 아담이라는 단어가 안 나와요. 남자와 여자하고 그걸 합하여 그냥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창세기 1장에서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2장부터는 안 나오는 단어예요)이라고 이야기 하죠. 그런데 고린도서에 가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그러죠? 그러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이예요 그죠?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랬으니까. 그리고 창세기 1장에는 사람의 재료가 안 나오죠?흙이라는 단어가 안 나와요. 그대신에 어떻게 만들어져요? 가라사대, 말씀으로 창조되는 어떤 사람이 있는 거예요. 두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예요. 지금 성경이 무얼 설명하고 있는지 한 번 보시란 말예요.묵시속에서 말씀 만으로 창조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안에 예수화 되어 한 지체로 창조가 되는 하나님나라의 묵시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1장은 안식으로 끝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안식이 인간들의 죄로 깨질 수 있어요 없어요? 그게 무슨 하나님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복음으로 가면 우리 아버지가 지금도 일하신다 그러시잖아요.그래서 나도 일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건 지금 역사가 창세기 첫 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증거란 말예요.그것이요. 하나님의 안식은 깨질 수가 없어요. 묵시속에서 완료 되는 거예요. 그게 깨지면 그분은 하나님 아닌 거예요. 그걸 영원이라고 그래요.그걸 묵시라고 한다고요.거기에서 이미 완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채워져 있단 말에요.여섯 째 날까지. 그리고는 이걸 이제 역사 속에서 대략 설명하는 게 2장 4절 부터 잖아요. 그래서 거기부터 에덴 동산이 나오죠. 1장에는 에덴 동산이 안 나와요. 흙이 나오고 선악과와 생명 나무가 드디어 등장 하는 거예요. 1장에는 안 나오는 거예요. 1장에서는 인간들이 타락할 수 있다라는 말씀도 안 하세요.너는 다스리고 정복 할거야 왕이야!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이게 완료 되어있는 우리의 현실인 거예요.안식속에, 평화 속에 들어가 있는 거고. 2장 4절부터 동방의 에덴 이라는 곳에 동산이 창조가 되어, 모형으로서의 역사가 창조가 되어 거기서 부터 선악과 율법과 생명나무, 예수라는 이 두 개를 가지고 역사가 아담이 되어 내려와 두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 생명나무 붙드는 거고 땅 아래에 속한 자들이 선악과 끝까지 붙들고서 율법 지키겠다고 하다가 지옥 가는 거란 말이예요. 이게 성경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하나님 앨로힘이지만 2장 4절부터는 여호와예요. 출애굽기 6장 6절 이하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설명해주죠? 뭐라 그래요? 구원자 하나님, 예수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까지 바뀌는 거예요. 그걸 요한복음이, 창세기 1장의 완료 되어 있는 새창조의 현실을 요한복음이 또 그대로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태초에로 시작하는 거예요. 똑같은 단어예요. 그리고 빛이 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어두움에 빛이 오는데 그들이 못알아 보더라라고 분리를 일으켜내는 거예요. 그리고는 세례를 받으시는 거예요. 둘째 날에요. 쪼개 지는 거예요. 물이 쪼개 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로 이게 하나로 합쳐지는 거예요. 그리고 어린양, 메시아라는 단어가 나오고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제자들이 하룻 밤을 같이 보내는 거예요. 예수와 연합이 되는 거, 셋째 날에 연합 되는 거. 넷째 날 다섯째 날 열 두 제자가 아무 자격과 조건 없이 하나님이 부르니까, 마태야 와라! 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일곱 째 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예수의 피로 완료되는 이야기, 이 새창조가 창세기 1장에서 이미 그려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먼저 읽고 창세기를 읽는 게 맞는 거예요. 그게 게알더스 보스가 한 이야기예요. 종말이 창조를 앞서는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번만 뚫리면 성경전체가 율법과 도덕과 윤리에서 예수로 바뀌어요. 여러분은 나지니쉬 식으로 성경을 보시면 안되요.간디 식으로 성경 보시면 안되요.예수로 보셔야죠.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은 성경 전체의 프롤로그인 동시에 에필로그 예요. 그것만 다 알면 여러분에게 성경 전체가 쉽게 풀려요. 왜 요한복음 1장에서 주님을 말씀이라고 하겠어요? 그 말씀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해내는 게 새 창조니까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말씀이 사람을 창조해내는 거예요.그걸 사도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육에 속한 사람은 흙에서 낳았다 그러죠?영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서 낳은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은 거, 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그게 말씀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삶의 이야기를 개괄적으로 한 거고, 그 다음부터 역사 속에서 2장 4절부터 흙에서 낳은 이들이 어떻게 율법과 선악과와 생명 나무 사이에서 좌충우돌 하면서 이 생명 나무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찬송을 하게 되는가 요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이야기예요. 다른 이야기 없어요.

어디서 어줍지 않은 조직신학 책 몇권 읽고 와 가지고 이건 이거구 저건 저거구 ,,신학이 예수를 죽여요. 율법이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고린도전서 15장 44절 보세요.

고전 15장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는지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이 뭐예요? 아담이 어디에서 제일 먼저 나와요? 2장 4절 이하에서 제일 먼저 나와요.그게 첫 사람 아담이예요.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창세기 1장의 ‘사람’이예요.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그리스도인’.

고전 15장 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에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한르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교회 입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역사 속에서 입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이제 입게 되는 거예요. 이걸 벗어 내면서.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예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창조가 되는 거고 그게 바로 안식인 것이며 평화인데 거기에 피조물들의 뜻과 힘이 가입이 되면 어떻게 말쳐지게 되는가를 창세기 2장 4절부터 첫 번째 아담이 등장하여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에덴 동산도 창세기 2장에 처음 나온다고 그랬어요.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 ‘사람’즉, 하늘 백성들의 창조 이야기 속에 에덴 동산이 등장 하지 않는 걸 여러분이 주의 깊게 보셔야 되는 거예요.그렇게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분리를 경험하면서 야, 어

떻게 내가 그걸, 그 빛을 알아 보게 되었지?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 되요. 그렇게 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하늘의 존재로 낳을 수 있는 하늘의 백성의 탄생 방식과 존재양식이 계시되는 장이지 그들의 자격과 조건 갖추기의 경연장이 아닙니다.

만일 이 역사가 아담들의 자격과 조건 갖추기인 것이라면, 아니 좀 더 좁혀서 구원 받은 자들의 성숙과 변화의 경연장이라면, 이게 성화라며요?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이 되지요.내가 나는 제일 잘 알잖아요? 정말 자신 있으세요? 하나님 앞에서? 경연장인 게 맞다면 그럼 무섭죠? 당연히. 오늘 본문은 분명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실체이신 예수가 계시므로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이미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가 그러한 화평, 연합,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 관계로 완료가 되어있다면 우리가 조금 실수를 한다고 해도 조금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그 아버지를 두려워 해선 안되는 거예요.무서워 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걸 자유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두렵고 떨리므로 구원을 이루라는 다른 말이에요.그건 경외라는 말이예요. 우리가 자격과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그런 인본주의와 율법주의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핵이죠? 모든 종교는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으로부터 출발되는 거니까.그래서 모든 종교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왜 신에게 자식까지 바치죠? 무서워서 그래요. 왜 엄마들이 기도하기 전에,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기 전에 목욕하죠? 그거 안하면 안 받아주나요? 무서워서 그래요. 왜 그렇게 신에게 많은 돈을 갖다 바치죠? 무서워서 그래요.그리고 그 무서움과 함께 나에대해서 관심이 집중 되어 있어서 그래요.나에대해 관심이 집중되지 않으면 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던 왜 무섭냐구요? 나에대해서 관심이 집중 되어있고 그리고 그 신은 내가 뭐를 해주는 것에 따라 반대 급부로 나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저주를 주기도 한다는 요 사고방식이 신을 무섭게 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일어났다라는 건 하나님은 일단 나에대한 관심, 이 ‘나’를 죽여버리기 때문에 내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뭘 어떻게 한들 무슨 상관이냐구요?나는 오늘이라도 지옥에 가도 아무 상관없는 그런 놈입니다. 내가 I am the worst,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진짜 아는 이가 그 보다 더 밑바닥이 어딨냐구요? 근데 왜 무섭냐구. 그래서 그걸 죽여 가는 거고 하나님은 너의 어떤 됨됨이나 성숙의 정도, 너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너를 택한 게 아니다라는 걸 십자가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무서운 거예요. 그게 자유예요.

그런데 고작 기독교의 목적지를 이 세상에서의 변화와 성숙,도덕과 윤리준수, 착한 일 그런 거에만 두는 건 기독교를 오해한 거예요. 울산에 계신 어떤 권사님이 전화하셨는데 그분은 불교인이었어요. 수십년 간.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다구요.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당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절에서 듣던 설법과 똑같더래요, 내용이.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인격을 도모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내 내세의 유익을 받자가 불교의 가르침이잖아요?그런데 예배당에 왔는데 더 저급한 수준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분이 한참 고민하셨대요.절로 다시 돌아갈까? 거긴 그래도 굉장히 유명한 그런 스님들이 아주 고급한 언어로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는데 여기는 맨날 신문에서 읽은 얘기,자기 간증 뭐 이런 것들을 섞어서 결국은 어프리케이션으로 끝내는 ,,,그럼 뭐하고 내가 여기 와 있냐는 거예요.그 권사님 이야기가.

그러다가 십자가를 만났어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거기서 나와야 되는거지! 그래서 내가 예수 믿어야 되는거지.그때 알았다는 거예요.그런데 왜 이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데 왜 이 행위를 갖고 자꾸 시비를 거냐구요? 누가 이거 하지 말라 그래요? 하세요. 열심히 하시라구요.그 대신에 내가 할 이야기는, 목사로서 강대상에서 할 이야기는 예수와 십자가 밖에 없어서 그 이야기 밖에 안 하는 거라구요. 살라니까! 왜 목사가 이야기 하면 살고 얘기 안하면 안 살거냐구요?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에게 부담으로 오셔서 여러분만을 위해서 사는 그 쾌락의 삶, 이기적인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신다니까요. 그러면 스트러글 하면서 노력하세요. 피 흘리기 까지. 그러나 예수와 십자가를 먼저 하시라는 말예요.그러기 위해선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될 거 아니예요?내가. 위장하는 거 그래서 멈추라는 거예요. 스탑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진리에만 복종하는 거예요.진리는 변함이 없어야 되요.그래서 진리는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도덕, 윤리, 인간들의 선, 인간들의 의, 어느것도 절대적인 건 없어요.

장유유서, 윤리죠?도덕이죠? 도덕이 개인의 인격을 조성하는 거라면 그게 보편적 사회적으로 요구될 때 그걸 윤리라고 해요. 장유유서 윤리 도덕 맞아요? 어른을 공경해야죠. 애가요~어린 사람이. 그러면 여러분 직장 상사가 여러분 보다 나이 어릴 때 여러분 막 하대합니까?그러면 거기서 윤리가 실종된거죠? 임금이 12살이야, 70살짜리 영의정이 임금한테 밥 먹었니? 이럴 수 있어요? 그러면 장유유서와 군신유의 사군의충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거죠?이거 다 윤리 잖아요. 이렇게 제한적이고 유동적인 윤리가 이게 기독교의 목적지다라는 게 여러분 자존심 상하지 않으세요?그러니까 윤리라는 건 인간들이 인간됨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 낸 열심히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신의 원리를 쫓아 그 신 앞에 복종하는 걸 도덕과 윤리라는 걸 근사하게 위장하여, 아니예요? 힘 앞에 복종하지 여러분이 무슨 인격 앞에 복종합니까?열심히 예의 지키세요. 특히 목사한테도 예의 좀 지켜주세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도덕관념을 갖고 살아야죠.그리고 이 세상속에서 자기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차압 당해가는 성도의 삶속에서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우대가 나와요. 지향성으로 나와요. 늘 지속적이진 않지만. 누가 그런 거 안해도 된다 그랬어요? 그건 당연히 우리 마음 속에서 그래야지 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것 마저도 어기고 사는 거 그건 진짜 짐승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짐승 같은 삶도 살잖아요. 성도는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죄인이라는 걸, I am the worst 라는 걸 고백하고 가는 거예요. 그럼 I am the worst 가 상이라는 걸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없어요? Worst 가 상을 달라 그래요? 누구한테? 거짓말 한거죠?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 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고 가셨는데 그 성령이, 보증이신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이 보증이란 단어가 딱 한 번 나와요. 70인역을 보면. 어디서 나오는지 아세요? 유다가 며느리와 통간하고, 창년에게 찾아 가서 유다가 유다라는 것을 증거로 내놓은 게 있죠? 세 가지.요 증거가 보증이예요.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보증으로 와 있다는 건 ‘너 창녀랑 잔 놈이지? ‘이걸 폭로해 내는 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지 여러분을 도와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가 포기 되어지고 부인되어지다 보면 그 안에서 향기가 나오게 되고 사람들이 봤을 때 성숙했다 라고 하는 거예요.그거예요. 그거 열심히 하자니까요.왜 안해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해주신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없고 감사함도 없고 그냥 자기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해서 자격을 갖출까,,,

저는 오늘날 개혁주의 성화론을 그측면에서 공격을 하는 거예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왜 나빠요 그게요? 사람답게 살자는 게 그러나 예수 없이 그렇게 가게 되다보면 우리는 등불을 들긴 들었는데 뭘 하기는 하는데 신랑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되는 거예요. 신랑에게 관심이 있었으면 혹시 이분이 늦게 오실지도 모르겠다 라는 배려가 있게 되잖아요.그들이 기름을 준비하는 거예요.그러나 행위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다 잤으니까. 그러나 신랑에게 관심없이 들러리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그들은 그 일과 상관없이 제거 되는 거예요. 그 불은 절대로 그 사랑,신랑에 대한 사랑이 없는 그 불은 반드시 꺼지게 되어있는 거예요. 역사속에서 아무리 활활탄다 할지라도. 신랑이 문 걸어 잠그면 꺼지는 거예요, 그건요.

예수님이 그 비유를 어디에다 붙이셨는지 아세요? 거짓 선지자 적 그리스도를 조심하라에 붙이신 비유예요. 그럼 거짓 선지자 적 그리스도들이 뭐 가르친다는 거예요? ’야 그 신랑에 대한 관심 그런 거 뭐 필요해? 너희들이 할일이나 잘해.들러리 역할이나 잘해.사람답게 살어! 성도답게 살어!’ 이것만 가르치는 거예요.이게 바리새인들 이었다니까요.그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꾸 교회의 본무,교회의 할일을 그런 도덕과 윤리 측면에서 조립하고 정립하려고 하지 마세요.

초대교회가 구제에 힘썼고 그들은 모든 걸 다 내어놓고 헌금을 했다.그 사람들은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곧 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걸 본 사람들이예요. 여러분들 앞에서 에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곧 온다’그랬다고 쳐봐요. 여러분의 재산이 필요있어요? 주님이 곧 온다는데?그래서 낸 거예요. 나라도내지요 그러면 , 뭐 필요해요? 예수님이 곧 온다는데, 올라가신 그분이 그 모습 그대로 곧 온다는데.그러면은 이거 갖고 여기에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배터지게 먹게나 해주자, 왜 안냅니까? 그런데 1년이 가도 안 와, 2 년이 가도 안 와, 3년이 가도 안 와. 그것 찾아서 다 나갔다니까요. 초대교회가 도데체 몇 년을 존속했냐구요? 그게 교회의 모범이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부수면 안되는 거예요.

헌금이라는 게 뭡니까? 나를 위해 헌금으로 드려지신 거 아니예요 예수님이? 그 예수가 감사해서 내 안에 있는 그 예수를 내놓는 게 헌금이잖아요. 그러면 헌금을 내놓을 때 그리고 그게 쓰여지는 데데는 항상 예수와 은혜가 보여져야 되는데 그렇게 유무상통하는 초대교회에서도 헬라파 과부 유대파 과부 차별이 일어났고 편 만들기가, 그 헌금을 하는데요 편 만들기가 일어나고 이 사람들도 원래 자기들은 못 먹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럼 조금 주면 어때? 왜 우리는 조금 주냐고 은혜를 곡해하는 거예요. 그때 사도들이 야, 교회의 본무 이거 아니구나, 야 집사들아 너희들이 이거 하고 사도들, 우리는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자.교회의 본무로 돌아가자, 이게 사도행전의 이야기지 구제와 봉사 열심히 하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감동 주시면 기도, 봉사, 섬김 열심히 하세요. 그런 거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들이 지난번에 월드 비젼에서 와서 그것좀 해달라는데 왜 그렇게 몇 명 안넣으셨어요?하기 싫죠? 그런데 그런 얘기는 듣고 싶죠?그게 인간들의 마귀성입니다.지는 개뿔이나 하는 거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꾸 인간들의 자존심만 부추겨 나가는 거예요.예수를 믿으세요. 예수의 은혜와 십자가를 붙드시란 말입니다.그게 여러분이 살 길이예요.여러분의 현실은 what is seen ,외모는 절대 여러분의 현실이 아니예요.말씀이 여러분의 현실입니다.묵시가 여러분의 현실입니다.여러분에게는 평화가 있는 거예요.여러분은 안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자유하십쇼.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