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7번 말씀
본문: 롬 5장 3절-5절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번 주에도 준비한 걸 다 끝내지 못할 것 같구요 다음 주 까지 계속해서 환란,인내,연단,소망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제가 참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이라는 팝 가수가 자기의 신앙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던 Why me, Why me Lord란 노래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이러합니다. ‘주님이시어, 왜 저를 구원해 주신거죠? 제가 아는 행복을 즐길만한 어떤 일을 내가 한 적이 있는지요? 말해주세요. 주님. 내가 당신이 보여준 친절에 보답하거나 당신을 사랑할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지 말이예요. 주님 도와주세요.모든 걸 낭비했어요.내 자신을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나를 도와주세요.이제 당신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 나를 도와주세요.주님, 내 영혼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답니다. 당신으로부터 받아 온 모든 것들을 제가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님께서 생각하신다면 절 시험해 보세요.아니요, 저는 당신께 받은 것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하나 있다면 아마도 내가 당신의 은혜를 입은 후 내가 걸어왔던 길을 끝내고 이제 당신에게 이끌려 당신에게로 가고 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밖에 없을 것같아요.주님 도와주세요.나는 내 평생 모든 걸 낭비했어요. 내 자신을 내가 잘알고 있으니 나를 도와주세요.이제 당신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 나를 도와주세요. 주님, 내 영혼은 당신 손에 달려 있답니다.
이 노래를 부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미 육군 장성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주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평탄하게 자라서 옥스포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전투기 조종사로 군복무를 하다가 공군대위로 전역을 했습니다.그 후에 가수와 작곡가, 배우로 큰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죠.빌보드 컨추리 차트 1위를 하기도 했구요. 우리가 잘 아는 바브라 스트라이젠드와 스타 탄생이라는 영화에서 열연을 해서 골든 글로브 남우 주연상까지 거머쥐기도 했습니다.수 많은 스타 여배우들과 염문을 뿔리기도 했고 그 중의 하나라 제니스 조플린이죠? 엄청난 재산을 모은 재력가였어요.우리가 보기에 그는 자기가 하고싶은 걸 모두 하면서 너무나 평탄하게 산 사람처럼 보여요. 우리가 하고 싶은 건 다해봤잖아요.그런 그가 기타를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Why me lord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자기는 한번도 주님을 위해 산 적이 없고 주를 위해 무언가를 해본 적도 없어요.가끔씩 그에게서 나왔던 선한 일도 결국은 자기의 만족과 명성과 평판을 위한 거였지 결코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리고 이 세상 쾌락과 명예를 쫓아서 모든 걸 낭비했어요.허비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있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그런데 왜 나를 구원해주셨냐는 겁니다. Why me lord? 자신은 자신의 인생의 경험과 하나님의 은혜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해낼 수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그 어떤 부귀와 명예도 , 그 어떤 열심으로도 자신이 구원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절절이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 주님께 그 은혜에 대한 어떤 보답도 할 수가 없는 불가능한 상태라는 걸 고백하는 거예요.
이렇게 은혜를 입었으면 뭔가 갚을 게 있어야 되는데 내 안을 돌아 보니까 하나님께 갚을 게 없는 거예요.자기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예수님의 은혜로 자신이 스스로의 꿈과 야망을 쫓아 달리는 삶에서 돌이켜져서 , 돌이켜서가 아니라 돌이켜져서 예수님께 끌려 가고 있는 모습 뿐이라는 거예요.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거는.결국 자기의 열심이 아닌,하나님의 열심만이 자신이 구원 받은 자임을 보여줄 수 있는 전부라는 거예요.그의 고백이 너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너무 나약해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이 자리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예요.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자리에요. 에베소서 1장의 그 찬송, 하나님은 우리를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 창조했다 그러잖아요?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자리.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들에게 바로 이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그 찬송의 자리에 앉히고 싶으셔서 이 역사와 인생을 창조해내신 거예요.여러번 반복하여 말씀 드리지만 ,이 역사와 인생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당신의 아들들에게 경험하고 체휼하게 하시기 위한 한시적 모댈 하우스를 지은 거지 하나님 자녀들의 능력 발휘의 경연장이 아닌 거예요. 누가누가 잘하나가 아니란 말입니다.그래서 제가 지난 주에 이 역사와 인생을 꿈에 비유를 했던 거예요.묵시가 꾸는 꿈.묵시를 설명하는 꿈.꿈은 그 역할을 다하고 나면 사라져야 할겁니다.
따라서 이 역사와 인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차압당하는 악몽이어야 맞는 거예요.왜? 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로 살려면 창조라는 단어 자체가 없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단어니까 내가 없음으로 밀려 내려가는 경험을 하는 게 이 역사란 말예요. 그래서 악몽일 수 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만 찬송받으시기 위해서는 나가 부인되고 부정되어야 되요. 아니, 삭제되야 되요. 나라는 자신의 주체성이.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증거하고 찬송케 하기 위해서는 나가 그 창조주 앞에서 반드시 티끌, 아다마 아파르로 폭로되어야 되요.드러나야 된단 말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필사적인 자기지킴과 자기탐닉 나르시즘이라 그러죠?자기지킴과 자기탐닉을 본능으로 갖고 태어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게 하늘의 것이 아닌데 본능으로 심어서 보내요. 그게 선악과란 말입니다.그렇게 자기지킴과 자기탐닉을 본능으로 갖고 태어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오감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 본능적 자기지킴과 자기탐닉을 폭격당하는 삶을 살게 된단 말예요.그것이 바로 새창조의 현실이고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그것이 역창조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도의 역사살이가 환란으로 감지가 되는 거라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살이는 환란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 시킬 수 있는 거란 말예요.
이러한 성도의 역사속 환란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쪼개짐으로 미리 예표가 되어있어요. 이 쪼개짐, 분리라는 단어를 잘 기억해 두세요.이게 성도가 겪는 환란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환란, 병이 생기고, 집안이 망하고 자식새끼에게 문제가 생기고, 이거는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성도 아닌 자도 같이 겪는 거예요.성도가 겪는 환란은 고작 그게 아니라니까요.셩도가 겪는 환란은 다른 거라니까요.성경에서 성도에게 약속된 그 환란은 다른 거예요. 그 환란을 제가 지난 주 , 이번 주, 다음 주 까지 설명해 드리겠다는 거예요.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건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인과 연합되었죠?세례는 곧 연합이란 말예요. 그것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건 우리가 예수의 삶에 연합이 된다라는 말이예요.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은 우리 성도는 예수가 사신 삶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게 되요.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삶을 십자가 지는 삶, 자기부인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창세기 15장에서의 그 제물의 쪼개짐에서 먼저 힌트가 되어졌던 거죠?그 제물의 쪼개짐이 하나님의 자해사건 이예요.십자가 사건이란 말예요. 그 쪼개짐, 이게 할례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고 했지요?이게 바로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환란이란 말예요.그게 우리의 삶속에서 그대로 일어나게 된단 말입니다.그게 환란이예요. 제가 오늘 그걸 설명해 드리려고 해요.
어떤 유명한 신학자의 지지도 못받을 만한 그런 이야기이지만 왜? 아무도 이렇게 성경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들어보시고,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성경을 보셔야 되는거지 여기서 제 설교만 듣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 아닙니다.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여기서 성경으로 인도를 하는 사람이지 여러분의 신앙생활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예요.그러니까 여러분이 집에 가셔서 성경을 상고 하고 묵상하면서 진짜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은 게 맞는 것인가 여러분이 한번 보란 말예요.그래서 우리도 한번 역사를 만들어 보자니까요.왜 어떤 신학자도 주장하지 않은 걸 당신 혼자 이야기 하는가? 그 사람들은 그러면 다 누가 얘기 한것만 얘기 한거예요?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성도의 쪼개짐의 삶 환란의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미 천지 창조 때부터 분리와 쪼개짐의 개념을 도입하여 암시를 해요.요즘은 제가 성경을 펴기만 하면 십자가와 예수님이 이렇게 튀어나오는 거 같아서 함부로 성경을 못 펴겠어요. 그래서 성경을 펴면 이걸 언제 다 가르쳐주나 이게 다 걱정이 될 정도로. 잘 들어보세요. 안식으로 완성이 되는 묵시속 첫 창조가 설명이 되고 있는 창세기 1장에 찝찝하게 없음의 영역의 것들 있죠?어두움,궁창아래,바다 이런 게 남아 있는 분리의 모습으로 창조가 설명이 되고 있어요. 이게 창세기 첫 장이라구요.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시는데 그 시작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며 물이예요.혼돈과 공허가 뭐라 그랬어요? 그릇, 스트럭쳐도 없고, Emptiness 내용도 없는 거니까 없음이란 말이예요. 없음,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저주와 심판의 상태가 없음의 상태예요.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그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저주와 심판의 상태,없음의 상태란 말예요.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가라사대!로 떨어지는 거예요. 창세기 1장입니다. 말씀이 떨어져요. 말씀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예요. 창조주 예수.잠언으로 연결해보면 그 지혜이신 창조주 예수란 말입니다.말씀이 가라사대로 떨어져요. 어떤 재료나 적당한 환경이 근거가 된 창조가 아니예요. 그냥 없음이예요.그죠? 그냥 없음에 말씀이 떨어진단 말예요.이거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도의 삶속에서 새창조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거예요.그러니까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말씀과 관계 있는, 예수와 관계 있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과 관계 있는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새창조, 그러니까 성도와만 관계 있는 거예요. 이걸 환란으로 풀어보자는 말이예요.
그 없음의 자리에서 빛이 분리되어 나오지요?원래는 다 없음이었는데 말씀이 가라사대라고 떨어지자 뭔가가 거기에서 분리되어 뚫고 나오는 거예요.뭐가 나왔어요, 처음에? 빛이 나왔단 말예요.그리고 궁창 위의 하늘, 유리 바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예수의 보좌앞에 유리 바다가 펼쳐있죠?천국은 바다가 유리로 되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저주의 바다,땅의 저주의 바다와 비교하여 궁창 위의 바다를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저주의 바다에서, 물에서 궁창 위의 물, 바다가 분리되어 나와요.찢어짐이에요. 분리입니다. 쪼개짐이예요. 그리고 저주의 바다에서 뭍이 분리되어 나오죠?세 째 날이잖아요.
온통 저주의 바다인데 거기에서 뭍이 바다를 찢고 올라와요. 그 뭍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는 처소, 성전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게 창조란 말예요.그리고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 날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속을 담고 있죠?빛이 오셔서 어두움에 맞아 죽음으로 말미암아,어두움의 세상에 왔는데 그 어두움이 빛을 못알아보고 꺼서 죽였다가 십자가잖아요? 요한복음이죠 그것이요? 예수를 약속으로 담고 있어요. 궁창위의 바다, 유리바다가 궁창 아래의 바다 저주의 바다를 덮어서 유리 바다를 만들어 내는데 예수라는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하나로 연합되죠? 십자가가 두 번째 날에도 약속으로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셋 째 날에도 뭍이 하나님의 처소가 , 성전이 바다를 밀어내고 찢어지는 형국인데 이 뭍이 , 성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성전이 저주의 바다에 오히려 빠져 죽으으로 말미암아 뭍이 완성이 되는 이런 모습이예요. 이게 약속이잖아요.
창세기 첫 째날, 둘 째날, 셋 째날은 예수라는 , 십자가라는 약속으로 이미 품고 있단 말입니다.그 안에.이해가 안가면 다음주에 여러번 들으세요.그리고 다음주에 제가 원고를 다 드릴거예요.오늘 이것도 다 못해요.자 그렇게 해서 그 약속에 의해 넷 째날, 다섯 째날 여섯 째 날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채워지는 거고 이게 이제 안식으로 끝나는 게 묵시속의 창조란 말입니다.그런데 거기에 찝찝하게 없음의 영역의 것들이 남아 있단 말예요. 첫 째날, 둘 째날, 셋 째날에 .그런데 이게 왜 그렇게 남아 있냐면 예수로 말미암아 이 창조가 완료된다는 걸 우리에게, 성경의 독자는 성도니까,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요걸 남긴 거예요.왜, 우리는 알잖아요. 요한계시록에 가면 빛만 남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고 궁창 위의 바다, 유리바다만 남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고 저주의 바다,’ 바다가 다시 있지 않겠고’라는 그 하나님 나라가 또 완성이 되어있잖아요.우린 그거 알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어두움의 것들이 찢기고 남아 있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가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역사이며 성경인 거예요.그 관점으로 여러분이 성경을 보지 못하면 성경은 그냥 도덕책이 되는 거예요.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더 행복하게 살까에 관한 처세술 이런 거. 성경은 절대 그런 얘기를 단 한 마디도 안 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없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있음의 영역의 것들이 없음의 영역을 먹어버리는 형국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죠? 계시록으로 가보니까.원래 없음이었던 거, 혼돈과 공허와 흑암 물이 그 안에서 튕겨져 나온 어떤 것에 의해 먹혀서 결국 그 없음의 영역 것들이 다 없어지고 거기서 그걸 뚫고 나온 어떤 것만 남는 게 하나님 나라잖아요.이게 요한 계시록이잖아요.
그렇게 결국에는 있음의 영역의 것들만 남게 되는 그걸 설명하는 게 창세기 1장에 담긴 묵시속 창조라고 그랬죠?그리고 2장 4절부터는 이 역사속에서 그것이 다시 설명되어지는 거라 그랬잖아요.성경이 굳이 그렇게 창조의 과정을 분리로 시작하여 묘사하는 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속에 심기 위함임과 동시에,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십자가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그 속에 심기 위함임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의 새 창조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거예요.창세기 1장만 보면 그리고 우리가 요한계시록으로 보면 우리는 추론 한단 말예요. 있음의 영역의 것들이 없음의 영역의 것들을 공격하여 먹는 방법으로 되는 거구나.이렇게, 창조가 이거구나.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정확하게 그 반대 방향으로 창조가 이루어 진단 말예요.그래서 제가 지난 주에 역창조라는 단어를 쓴거란 말예요.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완벽하게 이해를 시켜드릴테니까.
빛, 하늘, 뭍 이게 있음의 영역의 것들이고, 어두움, 궁창아래, 바다 이게 없음의 영역의 것들이죠.그런데 빛이 어두움을 점령하고 , 궁창 위가 궁창 아래를 점령하며, 뭍이 물을 밀어내는 창조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십자가를 매개로 일어나게 된단 말예요. 그 안에 이미 십자가가 약속으로 들어있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제가 지난 주에.그래서 우리가 믿는 게 기독교란 말예요.기독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한문으로 표기한 거잖아요.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예요.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풀리지 않는 모든 건 다 가짜인 거예요.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건 묵시속 창조가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역사 속에서 펼쳐질 때는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펼쳐지게 되어 있어요. 묵시를 빛으로 쫙 비추면 역사 속에서 이 묵시가 그림자로 역방향으로 펼쳐지는 거란 말예요.그래서 역사와 묵시를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접으면 하나가 된단 말예요.저런 그림 입니다.그림 그리는 것좀 배워야 되는데 저거 하나그리느라고 세 시간 걸렸어요.
보세요, 묵시속 창조는 없음에서, 꼭지점에서 생명으로 진행이 되는 거예요.완성, 이렇게. 묵시속 창조가그렇죠?티끌, 아파르에서, 없음에서 말씀이 떨어지니까 이렇게 완성의 자리로 간단 말예요.그런데 역사속 새 창조는 있음의 상태에서 부수어 버리는 형국으로 진행이 되요. 묵시속에서는 없음인 티끌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남으로 창조가 완성이 되고 안식이 오는데, 역사 속에서는 하늘의 완성된 성도가 내려와서 죄인중의 괴수로 끝나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성도들에게 그 창조의 주체이신 예수가 설명이 되어야 되고 예수만이 오롯이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묵시속에서 완료가 된 것을 이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완료가 된 건지, 그리고 왜 예수의 능력, 예수의 공로, 예수의 십자가 피로만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내기 위해 있음이었던 그들을 이 땅에 선악과 입에 물려 내보내서 부수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래서 죄인중의 괴수가 아파르. 없음이란 말예요, 이래서 나는 내 어떤 노력이나 근거, 자격 이런 걸로 있음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창조 될 수 밖에 없는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있음의 자리에서, 성도에서 죄인중의 괴수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란 말입니다.원래대로 하면은.빛이 이 땅에 오셔서 어두움을 다 덮어서 어두움을 먹어버려야 하는 것이 창세기 첫 날의 성취의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는데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빛을 꺼버렸다 그러죠?이게 십자가예요. 요한복음이란 말입니다. 이 역사속에서는 어두움이 빛을 이긴 것과같은 모양으로 첫 째날의 언약이 성취된단 말예요.어둠의 것들이 이긴다니까요.뿐만아니예요. 궁창 위의 물, 즉 하늘의 유리바다가 궁창 아래의 물, 저주의 바다를 덮어서 하늘의 유리바다로 만드는 데에, 요한계시록에는 유리바다만 남아요.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의 그 바다는 저주의 바다란 말예요.그런데 궁창이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찢긴단 말입니다.그렇게 해서 궁창 위와 궁창 아래가 연합이 되는데 그 모습도 마치 궁창 아래의 땅과 바다가 궁창 위의 것, 하늘의 것을 덮쳐 버리는 것과 같은 형국이잖아요.역사 속에서 보니까.
마지막으로 저주의 바다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할 처소인 뭍이 몰아내는 형국으로 성취가 되는 셋 째날의 언약도 역사 속에서는 저주의 바다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 잖아요.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성도가 만나는 거란 말입니다.성령, 그리스도의 영, 예수 안에서.그 처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건데. 노아의 홍수사건에서 배웠죠? 창세기 때. 노아의 방주가 뭐를 모형하는 거라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 제가 요나서 까지 연결을 해서 다 설명해 드렸잖아요. 예수님이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고 ( 요나서에서 설명이 되는 부분이에요) 빠져 죽고 구원 받아서는 안될 자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니느웨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잡아서 개 처럼, 아니,개구리 처럼 혓바닥을 뜷어서 끌고 갔던 그 사람들이 복음에 의해 살아나는데 어떻게?요나가 저주의 스올 속으로 사흘 밤 낮 들어갔다 나왔더니, 물속에 빠져 죽었더니 그들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시 뭍, 성전, 진짜 성전 에수도 오히려 저주의 바다에 빠져서 뭍이 바다에 빠지는 형국으로 뭍이 드러나는 거예요.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거에요. 이게 셋 째날의 성취란 말입니다. 왜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거꾸로 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어지는가, 왜 역 창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이 모든 게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 사건에서 모형으로 한번 더 보여지죠?불기둥, 빛이 밤에 이스라엘만 비춰요. 애굽을 어두움으로 만들어 내죠? 출애굽기에 나오잖아요.그리고 물이 양쪽 쪼개지요? 똑같은 단어예요. ’할례’라는 단어,쪼개진단 말예요. 둘 째 날이죠? 그리고 모세가 뭍, 마른 땅이란 단어를 두번이나 쓰죠.그들이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을 건너 구원받는 거예요.그러니까 이게 구원의 이야기란 말예요. 창세기의 첫 째날의 이야기도 구원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쪼개짐이 반드시 들어가 있어요.분리가 들어가 있어요. 요게 환란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새창조, 거듭남이죠 새롭게 창조되는 거니까,거듭난 성도가 역사속에서 거듭난 자의 삶을 살때 반드시 이런 쪼개짐을 경험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첫째 날이 분리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분리로. 그게 영원히 남을 거란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 안에 이미 예수의 쪼개짐, 예수 의 할례, 예수의 십자가가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의 언약이 하늘에서 이루어질 때는 당연히 없음이 있음이라는 말씀에 의해 덮힘으로 ‘수면위에 운행하다’가 덮다죠 그죠?성령이 덮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일어나니까.덮음으로, 하늘의 것이없음을 덮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왼료가 되는데 그 하늘의 언약이 역사속에서 펼쳐질때에는 거꾸로 이 역사가 묵시를 덮어서 질식시키는 형국으로 나타난단 말예요.우리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우리에게 뭘 가르치기 위해서. 역사의 실체가 폭로되는 거예요. 역사는 항상 하나님을 질식시켜 죽이려고 한다는 거예요. 은혜를 떠난 역사, 인생은. 그걸 설명하여 예수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십자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그래서 이 역사를 다 합쳐서 꽉 짜면 십자가예요.묵시 자체가 십자가 잖아요.창세전 언약이.내 아들의 피로 너희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게 만들겠다,가 묵시니까.이것 자체를 하나님의 빛으로 확 비쳤을 떼 역사가 그림자로 펼쳐지는 건데 이 역사가 이 십자가를 그림자로 펼쳐낼 때 분리요, 쪼개짐이요, 환란으로 우리에게 감지가 되는 거예요.그것을 있음의 흉내를 내는 역사가 말씀 앞에서 산산히 부수어지는 것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오히려 그것이. 아! 나, 아닌거구나.
성도만 그걸 알게 되요.그래서 죄인중의 괴수로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리고 그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은 창세전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한 재료요 소품인 거지 그 자체에 가치와 목적이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온전한 희생과 수고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만 완료될 수 있음을 확증해내는 게 이 역사와 인생의 존재 목적이란 말예요.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로 비롯되었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나와서 예수로 돌아간다, 예수를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하나님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백성이라고 그러잖아요.이사야서 43장에서.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백성. 그리고 내 영광과 내 찬송은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겠다 그래요, 하나님이 직접.
절대로 이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예요.하나님이십니다.여기에서 진짜 기독교와 가짜 기독교가 갈라지는 거예요.이 기독교의 주인공을 인간으로 삼게 되면 모든 게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요.그러나 이 기독교의 주인공을 하나님으로 붙들게 되면 모든 게 은혜로 풀리게 되어있어요.아무튼 이렇게 창조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가 된 것이라면 새로운 피조물인 하늘의 성도도 자기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증거하는 자로 나타나야 되겠지요?그분이 지혜고, 그분이 창조주예요.이것을 증명하고 증거하려면 나는 원래 없음이 맞네요.이 삶을 반드시 살게 되고 자기가 자각하게 되요.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요걸 교묘히 감추고 있는 거예요.다른 사람들의 평판때문에.그게 무서워서.
이 역사속의 성도안에서 새 창조, 거듭남이 일어나는 모습이 하늘의 것이 땅에게 제약 당하고 먹히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단 말예요.이게 로마서 7장이예요. 말씀 드렸다시피 성도는 역사 속에 성도로 와서 죄인중의 괴수로 끝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물론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예요.점점점점 악해지고 더러워진단 말이 아니라 성도의 자아인식이 그렇게 변한다는 말이예요.그러한 자아인식은 자기 안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죄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식하게 된다라는 그런말이예요.아니, 이것도 죄였어? 이것도 죄였어?그럼 그동안 내가 한 건 뭐야? 이렇게, 그럼 난 죄인중의 괴수 맞네? 이렇게. 부수어진단 뜻이예요.다른 말로 새 창조안에 들어있는 성도의 삶속에서 쪼개짐, 즉 분리가 일어난단 말예요. 난 구원받았어, 할렐루야! 나 이제 예수야!, 그런데 왜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오지 않아야 될것들이 왜 더 많이 나와?이렇게 내 안에서 분리가 일어난단 말예요.성도가 이걸 감지하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이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꾸 나에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러한 자기를 끝까지 사랑해선 안되겠구나, 이 자리로 내려가게 이걸 부수어진다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의 십자가를 꼭붙들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아니면 안된다고. 그 분리는 자기안에 들어있는 땅의 것, 이 어두움에 속한 것, 저주의 바다에 속한 것이 구병이 되어 폭로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그게 원래 성도의 처음자리 였는데, 없음이니까. 처음자리 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처음 것들을 성도안에 집어 넣으셔서 이 땅에 내려보낸단 말예요. 딴 아담들과 똑같이.그리고 그 처음자리를 확인케 하는데 그게 성도에게 환란으로 감지가 된단 말이예요.내가 죄인중의 괴수로 드러난다는 건 나의 부정이요,삭제 잖아요.그래서 환란이예요.그래서 고통이란 말예요.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들어보세요.
창세기 1장에서 없음의 영역에 말씀이 떨어지자 분리가 일어났어요.쪼개짐이예요. 할례입니다. 분리는 아픔이죠? 어두움은 어두운 채 놔두면 아픔을 겪지 않아요.그 자체로는.거기에 빛이 들어와야 고통이 생기는 거죠. 빛이라는 게 그 어두움을 찢어발기고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더라는 거예요. 첫째 날에.아픔이예요, 분리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이 탄생할 때에, 이 역사속에서 창조는 생명이 탄생하는 거잖아요.생명이 탄생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여자,교회에게 허락하는 거예요.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거기에 허락하는 거예요.딴 게 아니라. 역사속 창조의 경험은 바로 이런 고통이며 이런 환란이다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그러니까 여자는 애를 낳으면서 바로 이게 우리의 역사속 인생의 실체구나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남편 욕할 게 아니라.
둘째 날 하늘의 유리 바다와 땅의 바다가 둘로 찢어지죠?셋째 날 저주의 바다 속에서 뭍이 튀어나와서 바다를 찢어 버려요.해산의 고통이 찢어지는 고통이에요.이게 창조이며 분리이며 고통이란 말예요.지금 이 첫 창조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는 말을 제가 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뿐입니까?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란 이름으로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창세기 1장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요.단수에요. 사람을 만들자, 그런데 사람을 만들었더니 남자와 여자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1장에서는. 2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각자의 개체로 존재를 해요. 분리가 일어난단 말예요. 2장에서. 묵시속에서 하나였던, 묵시속에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란 말예요. 남자,여자, 신랑인 그분과 우리가 하나인데 역사속에 내려오니까 남자와 여자로 이렇게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뭔가 경험하는 거예요. 뭔가 가르쳐 주시겠다는 거란 말입니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 완전히 장악된 상태,연합의 상태였어요. 1장에서는. 왜? 우리가 2장에서 보니까 그 여자는 원래 없었던 건데 남자안에서 남자 걸로 만들어 낸 거잖아요.그런데 1장에서는 사람으로 뭉쳐 있으니까 연합 된 거잖아요.남자와 여자라는 내용은 있는데 하나예요. 연합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개체로 분리가 일어나 고 여자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분리예요, 이것이.자기를 있게 한 남자를 다스리고 장악하려고 해요. 명령을 한다니까요,여자가.이게 역사속 새창조의 모습이예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예요.1차적으로요.여자를 있게 한 남자가 원래 없음이었던 여자 때문에 죽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교회를 있게 하실 예수가 교회에게 맞아 죽는 형국으로 새창조가 완료가 되는 걸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오직 예수의 은혜로 너는 사는거야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서는 오직 예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능력만 드러나게 되잖아요.그래서 바울은 여자인 교회에게, 성도를 성경엔 여자라고 하잖아요,신부. 여자인 교회에게 여자의 뜻과 계획과 능력을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고 나맞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예수 말씀 거스려서 율법 제사 같은 걸로 은혜,예수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이게 유대인이었어요),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말씀 앞에 순종하여 배우라 그러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서의 여자 이야기예요.디모데전서 2장 11절 보세요.
딤전 2장 11절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아담과 하와 이 선악과 이야기를 이 여자의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있죠? 여러분이 성경을 피상적으로 껍데기만 보게 되면 이걸 도덕과 윤리로 밖에 못봐요.그래서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면 안된다느니 여자목사는 안수하면 안된다느니 이런 걸로 수십년간 싸우고 앉아 있어요.교회가.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까.이건 그 얘기 아니란 말예요.성경에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처세술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교회아와 질수 있는가 하는 설명이 한 줄도 없다니까요.예수를 설명한단 말예요.은혜를 설명한단 말예요.그 창조를 설명한단 말입니다.성경은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건 예수와 우리의 이야기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에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그래서 내가 ‘예수와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본인이 이야기 해주잖아요, 또. 이 말씀은 여자인 교회, 즉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추구하며 사는 인본주의, 율법주의, 이게 선악과 따먹은, 먼저 따먹은 이와란 말예요.이게, 여자란 말예요.율법주의, 인본주의 그 세상은 자기들의 주장을 거두고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따라,남자를 따라 예수를 믿어야 하는 존재란 말예요.단순히 여자들이 교회에서 날뛰는 걸 경고하는 구절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유대인이라는 ‘여자’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라고 외친 예수라는 ‘남자’를 무시했죠? 왜 무시했어요? ‘여자’가 뭔가를 하고 있었단 말이예요. 자기들이 생각 하기엔 이게 옳아요. 제사와 율법으로 선민다움을 발휘하는 게 맞단 말이예요.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회개하래요.회개하라는 건 너희들 잘못 가고 있으니까 유턴하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배워야 되는데 이 ‘나자’를 ‘여자’가 가르쳐서 죽여버렸다니까요.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여자’들을 그 피로 살려 내더라는 거예요.성경이 어떻게 일관성이 있는지 잘 보세요.
한 몸으로서의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분리가 되면서 죄가 설명이 되지요. 창세기 1장에서는 죄란 말이 안나와요.나오면 안되요. 묵시속 창조.안식으로 끝나는 묵시속 창조를 모형하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있으면 안되요.거기는요. 창세기 2장부터 죄가 나오는데 역사속 창조의 내러티브가 2장 4절부터 시작되는 거예요.그런데 그 시작이 여자가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잖아요. 이게 뭔가 깨달음이 오지 않으세요?그런데 이 남자가 거절하지 않고 여자 때문에 죄인이 되요.거절하지 않아요. 선악과를 받아 먹더라는 겁니다.
왜 남자가 여자를 장악하고 타일러서 여자를 살리는 걸로 설명이 되지 않는가?그렇게 되면 여자에게 일말의 가능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그래요.가르쳐서, 교훈해서, 혼내서 여자가 살아나면 안되요.남자가 여자와 함께 죄인이 되어 죽어 줘야 되요.사망으로 가야 되요.이게 바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는 예수님의 세례예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연합이 되는 게 세례 요한의 세례란 말예요.선악과를 먹어버리는 거예요. 남자가, 죄인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여자와 같이 되어버리는 거예요.남자는 여자때문에 죄인이 되어서 여자와 함께 사망으로 향하게 되는 거예요.여자와 한몸이 되어버려요.그러한 남자의 희생의 결과로 여자가 산 자의 어미,산 자의 대표로 살아나는 거예요.그러니까 산 자, 우리란 말예요. 성도. 산 자는 이 여자와 같은 사람을 살게 되는 거예요.어떻게? 예수 라는 남자를 계속 사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내는 모습을 역사 속에서 자기가 살게 되요. 하와가 역사 속으로 나와서 남자를 그렇게 죽음으로 끌고 갔던 것처럼.우리가 예수 죽였잖아요.아니예요? 내가 예수 죽인 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도 아니예요. 그 이야기를 지금 에덴에서부터 하고 있는 거예요.성경이.
그렇게 아담은 이미 그 안에 예수의 흔적을 품고 있었던 거예요.그는 죄인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예수의 흔적을 이미 품고 있었어요. ‘남자’로. 그래서 마지막 아담, 첫 번째 아담 이름이 같은 거라구요. 예수의 흔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그 모습은 신부인 교회 때문에 죄인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신부를 살려 내는 예수를 미리 힌트하는 거예요.드러내 보이는 거란 말입니다.조금 더 가보자구요. 하나님은 먼저 뱀에게, 마귀죠,죄에게,사람을 먹이로 줘요. 이게 여러분의 역사속실체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은 죄에 가두어서 내려보냈단 말예요, 이 세상에. 창세기 3장 14절 보세요.
창3장 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 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흙에서 왔으니 너희들은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저주,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 바로 다음에 뱀에게 흙이 먹이로 주어져요.흙 먹는 뱀 보셨어요?그럼 이 뱀에게 주어지는 흙이 뭐예요?그 앞에 이야기한 사람이란 말이예요.요걸 사도바울이 요렇게 설명하죠.갈라디아서 3장 22절 보세요.
갈 3장 22절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온 세상이 죄아래 갇혀 있다고 합니다.어디가? 온 세상이요.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생명,구원을,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을 해요?믿음으로, 너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이렇게 하늘의 존재가 된 거야, 이렇게 믿음으로, 우리가 뭘 잘해서, 어떻게 많이 변해서 이런 눈에 보이는 근거로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은혜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모든 이들을,온세상을 죄아래 가두어버렸다고 한단 말예요.하나님이. 로마서 11장 31절 보세요.
롬11장 31절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 두심은 ( 그 모든 사람 안에 우리도 들어가 있단 말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순종한다 이런 소리좀 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보세요, 중요한 거는, 하나님의 관심사는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느냐예요. 긍휼을 아느냐?그렇게 마귀에게 사람을 붙여버리신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의 라인과 뱀의 후손의 라인으로 인류를 갈라 버리죠?분리예요. 이게 창세기 3장 15절이란 말예요.그런데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벌일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데 이게 또 이상한 모양이예요.창세기 3장 15절 보세요.
창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뱀이예요)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제 사람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분리가 되는데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형국으로 이 역사속 새창조가 진행이 될 거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원은 이렇게 일어난다 하고 이야기 하잖아요 지금.이게 새창조란 말예요.이 말은 뱀의 후손이 여자의 피를, 발 뒤꿈치를 통하여 계속 빨아먹게 놓아두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후손이 오히려 살아나는 형국,십자가로 우리가 원래 이 죄에 가두어진 우리가 그렇게 살아나는 거예요.보세요, 그 위에서 우리가 뱀에게 먹이로 주어졌단 말예요.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뱀의 머리를 밟느냐구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역사속에서는 뱀인 세상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마귀 대가리 안 깼다니까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는 맞아 죽었단 말이예요.이게 우리의 모습인 거에요. 역사 속에서는 우리가 이 뱀에게, 죄에게 수시로 지는 거예요.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예수의 발 뒤꿈치를 물고 피를 쭉쭉 빨아 먹는데 예수님이 피를, 물과 피까지 다 내줘버리는 거예요.어디서? 십자가에서.그리고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어떻게? 야, 나는 이 피 없었으면 큰일 날뻔 했구나, 아파르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이게 내 대가리가 깨지는 거란 말입니다.내가 이 세상에서 죽는 거예요. 그것이.그러니까 나는 지금 마귀고, 뱀이고, 가인인 거예요. 내가.내가 여자란 말입니다.그런데 이런 마를 예수가 피를 흘려 나에게 다 당신의 피를 짜서 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산거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이게 새창조의 과정을 사는 성도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 상태에서 여자에게 약속이 떨어져요.여자가 자기를 구원할 여자의 후손, 즉 예수를 낳게 될건데 (여자의 후손은 예수를 모형하는 거니까) 낳게 될 것인데, 이 역사 속에서 잉태의 고통으로 그 해산이 잉태의 고통으로 감지가 될 거라고 말씀을 하세요. 약속을 주세요, 아예. 3장 16절 보세요.
창 3장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여자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후손이 너를 살릴거라고 그랬다구요.그런데 그 후손을 네가 낳을때는 반드시 고통이 온대요. 그런데 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 중에 예수를 모형하는 게 셋이란 말에요.아벨과 셋.아벨은 역사 속에서의 예수, 그리고 셋은 그로 말미암아 완성된, 예수를 머리로한 하늘의 교회를 모형하는 거란 말이예요.교회의 머리는 예수죠? 예수예요. 우리는 요. 우리 이름을 그래서 다 뺏기는 거예요.계시록에 가면 이마에 전부 예수만 써 있다고 그러잖아요. 여자인 성도는 반드시 고통을 통과하여 예수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게 바로우리가 예수를 낳는 거예요.아 ! 이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구나.나 때문에 예수가 오신 거구나.이걸 아는게 예수를 낳는 건데 이게 고통이란 말이예요.잉태의 고통 왜? 내가 삭제 되는 거니까 그거는. 예수가 없었으면 나는 아니구나.존재할 수도 없는 거구나를 아는 거니까. 이게 예수라는 후손을 낳는 거니까.이게 고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남자와여자, 이 여자가 잉태의 고통 해산의 고통을 어떻게 겪느냐하면 또 분리가 일어나죠?아담과 하와가 한 몸, 동침하매라는 단어가 나와요.이게 알다, 야다라는 단어인데, 연합이란 단어에요.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게 동침이란 말과 똑같은 말이라구요.그러니까 대충 알면 안되요.그래서 마태복음에 가면은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요 나 알잖아요?’라고 했더니 예수님이 ‘ 나는 너를 몰라’그러죠? 똑같은 이야기인 거예요. 예수님을 알아야 되요. 그분과 연합이 되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요.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4장 1절이예요. 그 안에서 분리가 일어나죠? 한 몸으로 동침을 했는데 그 안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라인의 분리로 나타나는 거예요. 이걸 아비와 어미가 보는 거예요.이게 잉태이고 또 해산의 고통인 거예요.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예요, 이게.가인과 아벨의 라인이 내 안에 공존하는데 가인이 아벨을 수시로 때려 죽이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7장에서의 바울의 고백이었어요. 도데체 나는 이겨 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죄의 법 아래로 이렇게 내가 수시로 끌려 가느냐는 거예요.아벨이 계속 맞아 죽어요. 맞아 죽고 났더니, 이 과정을 통과하여 셋이 탄생되는 거예요.이걸 다 경험하는 게 우리의 역사속 신앙생활이란 말예요.그래서 아픈 거예요 이게.그래서 바울도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라는 그런 말을 한 거예요.디모데전서 2장 23절 보세요.
딤2장 13절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 사랑 거룩, 다 누구예요? 바울이 다른 데서는 뭐라고 그러죠? 예수가 우리의 믿음이고 예수가 우리의 거룩함이고 예수가 우리의 의이고 예수가 사랑이고, 이건 고린도전서. 예수 안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해산을 통과하게 되고 그가 구원받은 자다 이런 뜻이예요. 애 낳으면 다 구원 받는 게 아니라요. 애도 못낳으신 분이 아멘 그러시네.ㅎ
하나님께서 여자가 고통을 통과해서 약속의 후손을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 해주시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 하세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굉장히 이상적인 부부관계 같죠? 이 말을 히브리 원어에 맞게 정확하게 직역하면 여자는 남편을 다스리고 장악하려 할 거고, 그렇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로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이게 창세기 3장 15절이 그대로 여기서 이뤄지는 거예요.여자가 남편을 장악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거 , 뒤꿈치를 물어버리는 거, 그런데 남자가 피를 다 빨리는 거예요.십자가요. 그 결과 구원 받는 거예요.남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우리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예수의 피를 빨아 먹는 존재라니까요.이것은 역사 속에서의 여자, 즉 성도의 본성과 경향, 거기에 대한 진술임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여 쓰잖아요.안들어주면? 자해라도 하죠, 열흘씩 굶잖아요 막. 그게 피 빨아 먹는거지 뭡니까? 그렇게 성도의 본성과 경향임과 동시에 그 일을 통하여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이 될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진술인 거예요.그러니까 앞으로는 더욱 더 이런 현상이 심화될 거예요.남자들은 전부 그냥 푸르죽죽 다 죽고 여자들이 점점 기가 살아서,,지금 남자들 보세요. 전부 고개 숙이고 앉아있잖아요.여자들만 눈 말똥말똥 뜨고 앉아 있다구요.무슨 얘기 하나 보자 이렇게.남자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졌어요?남말 할일이 아니지만.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 이게 맞다는 거예요.끝까지 그렇게 가게 될 거예요.여자는 끊임없이 이 역사속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게 된다는 말이고 그렇게 예수는 여자에게 맞아죽게 된다는 말이예요. 그 결과 여자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만을 붙들게 되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나는 예수님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때려 죽이는 그런 놈밖에 안되겠구나 !요걸 경험하게 하는 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이예요.그런데 아닌 척 전부 가리고 있는 거예요.위장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연극들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남의 평판이 무서워서.그래서 결국에는 자기한테 자기가 속아요.나는 괜찮아, 저 사람보다는 나아.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실수를 끄집어 내어서, 찾아 내어서 내가 나음을 증명하려고 해요. 그런 인간이예요.
보세요. 계속해서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려고그러고 죽음으로 몰아 넣는 형국으로 역사가 그려지고 있어요.역창조의 모습이죠.창세기 1장부터 계속 이 모습이죠, 그죠?여자, 어둠의 것들이 계속 남자를 먹는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나타나잖아요.창세기 1장 1절부터.그런데 그러한 남자의 죽음에 의해서 여자가 살아나요.안식이 완료된단 말예요. 그 여자 안에는 우리 성도 모두가 들어 있는 거예요.그래서 여자의 이름이 바로 뒤에서 산 자의 어미, ‘하와’라고 지어지는 거예요.여자인 하와가 모든 산 자의 표본이요,대표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인 하와가 남자를 다스리고 장악하려고 하고 남자를 사망으로 몰아부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하와가 따 먹었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아담 나쁜 놈 그러잖아요.왜 그럴까요?여자가 따 먹었잖아요.나 때문에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인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남편,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고, 하와가 그렇게 시작했잖아요. 산 자의 어미인 하와가.그렇게 우리의 실체가 폭로가 된 후에 남자의 피에 의해 여자가 살아나는 구원의 현실을 체휼하게 되는 거예요.예수 잘 믿어야지.예수만, 십자가만 붙들어야지.이렇게.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러한 자기의 처음자리 확인을 건너 뛰고 남자에게 순종하는 나만을 구축하려고 하는 거예요.왜 내가 순종해야만 하는지, 왜 나는 순종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지를 건너 뛰어 버리고 해산의 고통을 건너 뛰어 버리고 자기자신을 직시해야하는 그 분리와 쪼개짐의 아픔을 건너 뛰어 버리고 나는 순종 하는자 맞는데~요걸 구축하려고 하는 거예요.이걸 제가 경고하는 거예요.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그러니까 교회안에서들 온통 자기 자랑만 난무하는 거죠. 하나님은 그걸 먼저 이해시키기 위해서 순종치 못함에 가두어서 이 땅에 내려보내셨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시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순종을 만들어 내고 있는게 이 땅의 가짜교회란 말이예요.은혜와 십자가 예수에 대해서 고민해보지도 않고 배워보지도 않은 이들이 착하게만 살아요.선험해야 할 걸 건너뛴 거예요.그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낸 게 가인과 아벨인 거예요.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역시 한 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 4장 1절 보세요.
창 4장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더라.남자와 여자가 연합되어, 한 몸입니다.여기서 두 개의 갈라짐이 나와요.첫 번째 아이는 가인이예요.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구원자로써의 그 후손이 태어났다고 생각을 해서 가인이라고 이름을 짓고 내가 여호와를 낳았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히브리어 원어로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내가 여호와를 낳았다 예요.혹은 내가 여호와와 함계 아들을 낳았다 예요.여호와가 뭐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죠? 아담과 하와가 생각한 거에요. 창세기3장 15절에서의 그 여인의 후손,이 아이가 그 아이겠지?라고 여호와를 낳았다, 구원자를 낳았다 라고 한 거예요.그런데 키워보니까 아니네. 실망했겠죠? 두 번째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낳아서 보니까 얘는 생긴 것부터가 비리비리 해요.실망! ‘Venity’‘허무’라고 지은 거에요.’아벨’, Nothingness, 가 아벨이란 뜻이예요. 마치 이사야서 53장의 그런 모습의 이름을 지어버린 거지요. ‘허무’ 아무것도 아니네! Nothingness, 얘도 아닐거야. 그런데 얘로 말미암아 셋이 탄생되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므로 죽어서. 그게 예수의 십자가이고 여려분의 인생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가인과 같은 힘을 키우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내 모든 걸 계발해 내어서 자랑삼아 다른 이들에게 보여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고지론 성화론 번영의 신학, 다 그거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여 여호와, 구원자, 그들이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어떤 자를 낳게 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란 말예요. 마치 이스라엘을 동쪽 바벨론으로 쫓아 내시고 쫓아 가면서 내가 그들의 성소가 될거야 라고 하셨던 이 바보같은 하나님의 여기도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동쪽, 에덴 동쪽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를 쫓아가서 그들의 삶에 끝까지 개입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가인을 낳게 하더라니까요.죄 속에 가두어서 우리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싸우는 걸 경험케 하시는 거예요. 가인을 낳게 하시는 거예요.그리고는 결국 예수의 은혜를 알게 하고 그 스스로 완성되게 하시는 거예요.여인의 후손을 낳게 하는 거예요.셋, 예수를 낳게 하는 거란 말입니다.아무튼 그렇게 한 몸이 둘로 갈라지는데 그 한편이 가인이었어요.그런데 그 아이는 구원자가 아니었단 말예요.그래서 아벨이라는, 없음이라는 자가 와서 세상적 관점 세계관, 가치관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아벨이 아닌데 얘가 맞아 죽음으로 여인의 후손이 완료가 되는 이 이야기, 요 가인과 아벨의 이 야기가요 정확하게 아담과 하와의 그 이야기예요.그래서 제가 성경을 잘 보다 보니까 모세가 써놓은 워드 플레이가 보이더라구요.한번 보세요. 창세기 3장 7절 보세요.
창3장 7절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창세기 4장 1절 보세요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자 둘 다 벗었어요.
창세기 3장 16절 보세요. ‘너는 남편을 원하고’
창세기 4장 7절 보세요. ‘죄가 너를 원하나’
창세기 3장 16절 보세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4장 7절 보세요.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3장 9절, ‘네가 어디있느냐?’
창세기 4장 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딨느냐?’
똑같은 단어들이 워드 플레이로 계속 등장하는 거예요.
창세기 3장 17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창세기 4장 11절, ‘땅에서 네가 저주를 받으리니 ‘
창세기 3장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세기 4장 12절, ‘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창세기 3장 24절. ‘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창세기 4장 14절, 주께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창세기 3장 8절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창세기 4장 14절 ‘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창세기 3장 24절 ‘에덴 동산 동쪽에’
창세기 4장 16절,’ 애댄 동쪽’
동쪽으로 쫓겨나고 ,,전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지금 이 이야기가 요 이야기에서 반복되서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라는 걸 모세가 여기에 장치를 심어 놓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가인에게 찾아 가셔서 네 속에 죄가 있어서 죄가 너를 원할 것이나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된다 그러죠?하나님이. 아니, 죄에게 사람을 줘 놓고 무슨 죄를 다스리라 그래요? 죄가 나를 다스리는 게 맞지.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하잖아요.그러면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지금. 아니죠? 가인은 그걸 할 수 없는 존재예요.그러면 뭐예요? ‘네 안에 죄있다,’ 하나님이 이걸 말씀 하시는 거예요. ‘네 안에 죄있다, 너 그걸 이길 수 있어?’너 지금 나에게 근사하게 제사 지내면서 네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살짝 감추고 있는데 네 안에 죄 있다, 내가 네 엄마와 함께 하면서 너를 낳았는데 네가 아니라고, 지금 내 앞에 제사 지내면서 착한 척, 의로운 척 하고 있는데 네 안에 죄 있어.말씀 하신거예요. 그래놓고 하나님이 그 의 죄를 확 휘저어 놓으세요. 어떻게? 제사를 안 받아버려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그의 살인을 조장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잘 이해하셔야 되요.그가 살인할 위인이 아닌데 살인을 시킨 게 아니라 그가 살인할 자인데 감추고 있던 거를 확 펼쳐낸 거죠.제사를 안 받았더니 왜 내 가치있는 예물을 안 받아요?금방 화가 났어요.분이 났다니까요. 생각해보세요.제사를 드린다는 건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부터 제사를 지냈어요.이건, 제사를 안 지내면 이 제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라는 고백이죠? 제사를 지내는 거 자체가.그럼 나는 죄인입니다, 예요. 그죠?믿음이 있는 자는 그걸 고백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가인은? 겉으로는 제사를 지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확 휘저어보니까 죄인은 무슨 죄인이예요? 이 제사를 자기의 가치로 여기고 있드라는 거예요.이거 왜 안 받아? 이렇게 화를 내고 있드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죄인이냐구요? 아닌데 그런 척 하는 인간들이 율법주의 인본주의인 거예요. 이게 교회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벨은? 믿음으로, 이거 아니면 나 죽어요,하고 제사를 드린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사는 거예요.그래서 아벨이 의인이 되는데 그 의인 아벨은 역사 속에서 맞아 죽는다니까요.왜? 근사하게 인간의 행위, 율법, 인본주의를 갖고 인간의 가치를 챙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는 자들은 뭐야 이거? 아벨이란 말이예요.하벨이란 말입니다.이사야서 53장의 예수의 모습, 그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단 말예요.평가받게 된단 말예요.죽는 거예요, 그게. 그 이야기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였단 말예요.여자가 남자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그 이야기.
성경은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요.다 예수의 이야기예요. 전부 십자가의 이야기라니까요.여자는 남편을 다스리려 할거고 그 결과 남편이 여자를 장악하게 될 거라는 약속을 받은 가인이 절대 그 여자를 장악하고 다스릴 수가 없다는 말예요.죄를 다스릴 수가 없어요.그래서 죄가 되는 거예요.죄의 삶을 사는 거예요.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신약에서 그대로 반복이 됩니다.제사와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유대인들이, 선악과 따먹은 하와죠? 자신들을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정복하셔야 할 예수님, 남자가 와서 그거 아냐, 난 그거 안 받아, ‘회개하라’가 ‘안 받아’란 뜻이잖아요. 왜 안 받아? 이 땅의 소산으로 이렇게 가치있는 걸 만들어냈는데 왜 안 받아?, 이게 가인이었단 말이예요.예수님이 계속 말씀 하십니다. ‘안 받아’. 그래? 그럼 넌 죽어야 돼.하나님을 죽여버렸죠? 자기 제사 안 받는다고.제사와 율법 안 받는다고 이거 가치 있는 걸로 안 받아 준다고 하나님을 죽여버린 거잖아요.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게 누구 죽인거예요? 결국.누구? 하나님 죽인 거예요. 그래서 그 가인 안에 내가 들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누구 죽인 자 맞아요? 하나님 죽인 자 맞는 거예요. 내가.지금도 죽이고 있잖아요.똑같이. 내 가치, 내 영광 챙기기 위해 우리 하나님을 내가 죽이고 있다니까요. 왜 이거 안 받아? 왜 이거 갖고 상을 안 줘?
뭐예요? 내가 생산해낸 건 가치가 있는 건데 왜 니가 상을 안 줘? 상달라고 하는 인간들은 다 뭐예요? 가인인 거예요. 어떻게 아벨의 제사를 지내는 이가 , 나는 죄인 맞습니다. 이 제사 없으면 저는 살아날 수 없어요, 이 사람이 무슨 상을 이야기 하느냐구요? 예수의 십자가 제사 없었으면 저는 죽은 자 맞습니다 라는 그 고백을 여러분이 진짜 하는 그 예배를 그 제사를 지금 드리고 있다면 , 아벨의 제사를 지금 드리고 있다면 여러분이 상 얘기를 해야 맞아요? 상급을 준다는 건 영생, 구원을 준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은 십자가를 잘 이해하셔야 되요. 십자가라는 건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우리 역사와 인생의 그 처음자리와, 그들이 처음 자리를 벗어났을 때 발생되는 결과(두 번째예요)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서 건져져 살아나게 되는 유일한 길, 온리 바이 그레이스 이 세 가지가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위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머리속으로 그려보세요.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사고력, 생각의 차부터 삭제예요. 손, 못 박혔죠? 내 행위, 삭제예요, 부정. 다리 못 박혔죠? 내 뜻으로 내가 내 자리 지키지 않고 어디든지 가려고 하는 자리 이탈, 휘브리스, 교만이죠? 기동력 차압당하는 거죠.이게 바로 우리의 원래 처음 자리, 우리의 모습이예요. 이것이.죽은 흙, 아파르의 모습이라구요. 이게. 성도는 자기뜻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하는 자가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살아내는 자란 말이예요, 성도는.자기행위를 창조자에게 보태는 게 아니예요.하나님이 만들어 놓으면 마지막에 만들어져서 안식으로 쑥 들어가는 거예요. 여섯 째날 만들어져서 눈 떴더니 안식일이었잖아요, 칠일 째. 자기 맘대로 자기자리 이탈하면 안되는 거 이게 선악과 사건이란 말입니다.그러니까 손, 다리, 머리 전부 못 박혀야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처음 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걸 제가 하나 발견했어요.자력종교라는 게 있어요.불교, 힌두교,이슬람 이게 다 자력종교예요.기독교만 타력종교 입니다. 하나님이 밖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고, 자력종교는 자기의 열심과 노력, 참선, 고행 이런 거를 통해서 구원의 자리로 가는 게 자력종교예요. 이 자력종교의 순례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나 하는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오체투지라는 거예요.원래 불교에서 발생한 건데 이건 다른 사람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서 섬기고 봉사하고 다른 이를 위해서 살겠다라는, 이걸 것들을 결심하고 다짐하고 그리고 이 희생과 이 헌신으로 인해 그들을 이롭게 하겠다라는 그런 인간들의 자기 챙기기예요. 그게, 오체투지가.내가 무얼 하므로 해서 나에게도 유익이 되고, 나의 열반에도 유익이 되고 다른이들에게도 유익이 된다라고 믿고 오체투지를 몇 천km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오체투지가 뭐가 땅에 닿아야 하느냐하면 땅에 머리, 손,발이 닿는 거예요. 이걸 이용하여 인간들은, 자력종교는 끊임없이 구원에, 하늘에 오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 오체투지, 인간들의 오체투지에 사용되는 오체를 십자가에다 전부 땅땅 못을 박아버린단 말입니다.움직이지 말라구.그게 살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래 그렇게 살아야 되는 우리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한 번 보여준 거예요.그런데 너희들이 이것 다 벗어버리고, 못 다 빼버리고 너희들끼리 행위를 내어놓고 가치를 챙겨 하늘에 올라 보겠다고 바벨탑을 쌓는 거 그게 바로 창조주인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 너희들이 무얼 돕겠다는 건 창조주인 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게 아니냐 그게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거야,해서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또.
그래 너희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너희들이 벗어버린 가시 면류관 내가 쓰고 , 너희들이 뻬버린 그 못 내 손과 발에 박혀 내 피 다 뽑아 주고 살리는 방법 밖에 없어. 내 말씀, 내 창조의 능력, 내 은혜와 긍휼로만 너희들은 살아날 수 있어, 세 번째 십자가예요, 이게.그러니까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의 처음자리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긍휼,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의 방법, 사랑 이게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독사, 영광이라고 하는 거예요.그 십자가를 아느냐구요!! 여러분이요.교회에서 그걸 배웠냐 말이예요.지금까지. 그게 생경하니까 예수 이야기 하고 십자가 이야기 하면 화를 낸다구요.
이렇게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모형하고 있던 것이고 Nothingness가 되어서 죽어야 하는우리 성도의 역사속 죽음을 역시 함께 모형하고 있던 거예요. 히브리서로 가면 그 아벨의 이갸기가 이렇게 나와요.히브리서 11장 4절 보세요.
히11장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의로운 자라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은 우리에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그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 있게 되었다고 그랬어요.그렇죠? 오늘 본문은? 여기서는 뭐라 그래요? 믿음으로 아벨이 의롭게 되었다고 그래요.그리고 믿음으로 아벨이 죽었다고 해요.자,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환란을 받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인내와 연단을 통과하여 소망으로 가게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도 믿음으로 아벨이 의로운 자가 되었는데 그가 세상에게 맞아 죽더라. 끝이예요. 환란이란 말예요.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아담과 하오,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라고 했어요. 그 남자와 여자는 ‘사람’인 우리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아벨, 좋은 사람, 가인 나쁜 놈. 이렇게 가면 안되는 거란 말입니다. 다 내 얘기란 말예요. 내가 성도라면. 성경의 독자는 유일하게 성도밖에 없단 말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이 의롭게 되었는데 역사속 인생이 죽음으로 결과되어져요. 쪼개 지는 거예요. 믿음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게 아니라 믿음이 그를 죽이더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믿음이 너희를 환란으로 끌고 가서 소망으로 데려간다고 해요. 소망으로 데려간다는 게 무슨 말이냐하면 이 세상에서 죽인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소망을 보게 하는 거죠. 이게 에녹의 이야기라구요.
우리는 너무 이 유아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야, 나도 죽지 않고 에녹처럼 하나님 나라로 올라갔으면 ,,바울이 뭐라 그래요. 우리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러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진다는 게 무슨 말이예요? 역사 속에서 죽는 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다른 나라로 옮겨지는 거라니까요. 살아있는 상태로 옮겨져 보세요.이게 산 제사란 말입니다. 이게 더 힘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전부 죽었다,죽었다,죽었다 그러는데 한 사람 산 그사람이 산채로 다른 나라로 끌려가는 거예요.누구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그 믿음이 산채로 죽여내는 거라니까요.역사 속에서.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뭘 이겨요?나를 이기는 거예요.내 안에 있는 믿음이 내게 사유되어 내 밖에 있는 어떤 걸 이기는 게 아니라 믿음이 나를 이겨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으로 아벨은 죽더라! 예요. 여러분 이 믿음이 있냐구요.
그 믿음이 여러분을 도와주지 않아요. 여러분을 죽여낸단 말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환란 당했어요. 그 배경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창세기를 공부했으니까. 왜 그가 가인으로 부터 몰매를 맞아 죽었죠? 제가 때문에 죽었잖아요.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그러니까.더 나은 제사는 better가 아니라 옳은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예요. 가인의 제사는 나쁜 제사. 하나님이 먹고 싶지 않은 걸 자꾸 먹인 거예요. 갖다가 놓고.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 그랬더니 안 먹어? 내가 어떻게 만든건데 안 먹어?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창세기 4장 4절 보면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죠? 첫 새끼와 기름.도데체 그게 뭘까요? 가인은 뭘로 드렸다구요?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 그러죠? 그런데 바로 그 앞에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저주하시면서 너는 근본된 토지를 갈아라 그 토지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올 것이다. 그러죠? 그러면 근본된 토지를 갈라 그러는 건 네가 만들어진 흙이란 뜻이예요. 근본된 토지가.
너는 네가 어디서 나왔는지 보면서 그 흙이 만들어내는 가시와 엉겅퀴, 이걸 내가 받겠냐? 선악과 따먹고 너 지금 흙인 네가 흙을 통하여 나를 돕겠다고 하는데 내가 그걸 받겠니? 이걸 물으시는 거였어요. 그래서 가시와 엉겅퀴가 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거기서 뭐 나게 해서 먹으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거 안 받겠다 라는 거예요. 가치 없다라는 건데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이게 힘인 거라.그런데 아벨의 양은, 아벨의 양, 인간이 육식을 한 건 노아 홍수 이후란 말예요. 그러면 아벨 때에는 이 양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거예요. 고작 사용할 수 있는 건 엄마 아버지가 입었던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그 치마 만드는 거.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그 죄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거예요, 이 양은.그러니까 아무 가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역사가 세상이 그러는 거예요. 야, 너는 그 가치 없는 걸 하나님께 바치냐? 그걸 하나님이 받을 거 같애? 예수 믿는 믿음, 어린 양을 믿는 믿음. 보혈의 피, 십자가 믿는 믿음. 그거 받을 거 같애? 야, 땅의 소산으로 착한 일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이걸 받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걸 받겠니? 그 보잘것 없는 걸. 예물과 제사 때문에 가인으로부터 조롱 당했어요.하나님이 그런데 이거 받으신다니까 얘가 화가 나서 하나님을 때려 죽이고 싶은데 하나님을 죽일 힘이 없으니까 나를 죽이는 거예요.이게 역사 속에서의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왜 나를 무시해? 나 이렇게 변했는데 왜 안 변했다 그래?찾아와서 욕지거리를 하고 말이죠.여러분 레위기로 가면 하나님이 첫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리고 기름은 다 내 것이다 라고 하죠. 그래서 첫 것과 기름은 꼭 하나님께만 드려야 되요.나머지 것은 나눠 먹을 수도 있어요 화목제 같은 건. 첫 것과 기름,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어요.첫 것과 기름은 그러니까 내 것이라 그랬으니까 하나님 것,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준 하나님 것이 뭔지를 알았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찾으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하나님 것이 뭐예요?예수, 예수 믿는 믿음이잖아요.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잖아요.우리에게 줬단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느 제사, 예배 예물은 뭐예요? 믿음이에요. 예수란 말에요, 예수.여러분의 행위 근간 인격, 이게 아니라.예수 그 예수 믿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제 말은요.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찾으세요. 그런데 아벨은 그걸 알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믿음으로.
그래서 믿음이 있는 자들은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 그래요? 아벨이 그렇게 맞아 죽었어요.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아벨을 의롭다 하시면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그랬어요.예물이 뭐였어요? 양의 첫 새끼.기름. 그 예물이 뭐였냐구요.예수 잖아요.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첫 것. 이 예수가 아니면 전 죄인이라 죽습니다.이게 아벨의 제사였어요. 그리고는 도살할 양처럼 내가 세상에게 맞아 죽습니다 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아벨이 도살할 양이 되어 그 예물과 연합된 삶을 산 거예요. 어떻게? 맞아 죽은 거예요.이게 복음이죠? 예수의 삶이었으니까요.그래서 그가 죽었는데 믿음으로 말하더라.이게 히브리서 11장 4절이예요.
그런데 신약으로 가면 이렇게 똑같이 산 사람이 또 있네요. 하나님의 첫 것,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어요.이제 죽으셔야 되요. 그 분이 죽어야 죄인이 살아요.그런데 죄인중의 괴수같은 여자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 하나 들어오더니 기름병을 갖고 왔어요. 깼습니다.첫 것에게 기름을 부었어요. 예수님이 뭐라 그러냐하면 내 장사를 준비하는 거니까 놔둬라.장사를 지내는데 기름은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자가 죽기도 전에 와서 장사 때 뿌리는 기름을 뿌렸어요.마리아들이 예수님 돌아가신 다음에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쫓아가지요? 죽은 다음에 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자에게 예수가 죽어야 내가 산다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어떻게? 믿음으로 예요. 또. 이분이 죽어야 내가 살아요. 이분이 장사 지내게 될거예요. 그런데 이 분이 죽으면 내가 사는데 내가 죄인중의 괴수야.그래서 이 분은 반드시 죽어야 돼.그런데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죽어야 되느냔 말예요.그러니까 이 여자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는 거예요.그리고는 왜 당신이 나 때문에 죽어야 되느냐고 기름을 뿌리면서 고개를 못드는 거예요. 발에다 입 맟추는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는 거예요.또 믿음이 나오는 거예요.첫 것에게 부려진 이 기름, 하나님의 첫 것에게 뿌려진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란 말예요.이 메시아가 나를 구원한다는 설명을 하는게 향유병을 깨트린 여인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여인의 제사란 말예요 그것이.그런데 이 여인이 똑같이 가인에게 세상에게 맞아 죽어요. 어떻게 맞아 죽어요? 유다가 뭐라 그래요? 마귀의 대표, 유다, 가인. 야, 그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하면 착한 일 많이 하고 얼마나 좋으냐?그걸 왜 가치 없이 깨서 예수에게 붓니?가인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잖아요.그렇게 가치 없는 일이 하나님께 열납 될 거 같애? 가치 있는 걸 해야지 이땅에서, 착한 일 해야지.팔아서 가난한 사람 도와야지.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너 크게 잘못 알고 있구나, 이 여자가 한 일이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마다 전해 지리라’ 여러분 복음 전할때 이 여자 얘기 해요?무슨 말이예요? 이 여자의 삶이 복음이다 그런 뜻이예요.가치 없는 자가 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여자가 예수의 삶, 죄인인 하와의 삶을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어떻게 찬송하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이 도살할 양처럼 아벨이 되어 죽어야 되요.가인에게 맞아 죽어야 되요.그 여인이 깨트려버린 그 향유병처럼 가치 없는 일에 쓰이는 그런 모습으로 또 죽어야 되요.세상은 우리를 보고 그럴 거예요.저게 무슨 예수 믿는 거냐구,예수 믿으면 무슨 어떤 눈에 보이는 뭐가 나와야 되는 아니냐구. 아니요. 히브리서가 그랬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가늠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냐구요. 이 예수를 믿으시란 말예요. 이 예수를 이야기 하는 곳에 가시란 말예요. 이 예수를 이야기 하지 않고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 않는 곳은 다 가짜인 거예요.여기가 없어지면 꼭 거기를 찾아 가란 말예요.예수 이야기 하는데 가시라구요.그렇게 여러분이 아벨의 삶, 향유병을 깨트린 여인의 삶을 살면서 너무 힘들어서 , 내 자아가 이렇게 부정되고, 이렇게 폄하되고 모욕당하는 이 삶이 너무 힘들어서 Why me Lord!Why me? 이 기도 할 수 있어요.그러나 그와 동시에 십자가가 우리에게 붙들리는 거예요. 아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이렇게 원망하는 이런 나,도데체 이런 나를 뭐하러 구원하셨어요? 하나님, Why me? 두 번째 이 기도를 또 하게 되는 거예요.Why me? 여러분이 지금 그 삶을 살고 있다면 잘 가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도입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유익이 되요.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 삶을 통과하고 나면, 어린 아이가 아프고 나면 똘똘해지는 것처럼 성경이 한 발더 앞으로 다가오게 되요.그리고 거기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진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그런 힘든 여러분의 삶을 응원한다는 의미에서 이 예배가 자꾸 칙칙해 지는 것 같아서 제가 그 Why me라는 찬양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김성수 목사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49.아직 죄인+그리스도의 죽으심=하나님 사랑의 확증 (0) | 2023.05.31 |
---|---|
48.Why Me Lord 롬 5: 3-5 (0) | 2023.05.31 |
46.내가 꿈인가 꿈이 나인가. (0) | 2023.05.31 |
45.느낌과 약속, 무엇이 진리인가. (0) | 2023.05.31 |
44.금식, 새것으로 먹으라는 말씀 (0) | 2023.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