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0번 말씀
본문 –롬 5: 5-11.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지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확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오늘도 다 못 마칠 거 같은데요. 사실 오늘 본문이 제가 에스겔서 17,18,19장을 갖고 히브리서와 연결을 해서 오늘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드리려고 했는데 하다보니까 또 너무 양이 많아져서 그건 다음 주로 미루고 오늘 설명할 수 있는 데 까지 설명을 해드리도록 해드리겠습니다 . 저의 대학후배 중에 장기하 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노래를 썩 잘한다라기 보다는 생각이 깊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 그 친구의 노래를 듣습니다. 가사가 아주 재밌습니다. 그 친구의 노래 중에 별일 없이 산다 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가 이러합니다. 네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줄게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 할 거다 왜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이렇다 할 고민 없다. 네가 들으면 십중 팔 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 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지 못 할 거다. 그게 뭐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 건 네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 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하지만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자기가 공격하여 망하게 하고 싶은 대상이 자신의 맹공에도 별일 없이 사는 것을 볼 때 그 공격자는 약이 올라 죽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별일을 만들어서 공격을 퍼 부었는데 그 상대방이 별일 아닌 것처럼 그냥 살아내는 것을 볼 때 가해자는 미치죠.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만 봐도 미칠 거예요. 그렇게 세상의 공격을 당하면서도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명명을 하죠. 세상이 죽이려고 막 공격을 하는데 감당이 안되는 거예요. 왜? 별일 없이 살아버려요. 그런데 세상적 관점으로볼 땐 그들의 삶이 정말 별일 없는 삶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산중과 광야와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고, 그거 쉽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고 톱질을 당해 죽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 채찍에 맞기도 했습니다. 제가 히브리서 11장 말미를 그냥 읽어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들, 별일 없이 산 사람들 이라고 한단 말예요. 그들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었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세상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이예요.세상이 작심을 하고 별일을 던졌던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별일에 주눅 들지 않고 별일 없이 살았단 말예요. 그래서 세상이 약이 올랐던 거죠. 그게 별일 없이 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이었어요. 우리가 볼 때는 분명 별일 있이 산 사람들인데 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별일 없이 산 사람들,세상이 약이 올라 미쳐버린 사람들이이라고 부를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세상에게 맞아 죽어서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역사 속 역할이며 정도라는 것을 알았기 떄문이예요. 그들은 믿음이라는 것에 장악이 되어서 육의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열심히 끌려 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며 그게 옳은 길임을 알았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닥치는 별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임을 인정하고 수긍했던 사람들 이었어요. 자기가 입고 있는 지긋지긋한 육이 죽어야 자기 안에 사시는 예수가 드러나고 그 예수로 연합되어 하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마지막 자리가 그렇게 완료가 되어 간다라는 것을 그들은 계시로 알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감당치 못했던 거예요. 목 매달아 안 죽더라는 거에요. 감정이, 느낌이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그런 말이 아니예요. 그들도 아팠고 고통스러웠고 힘들었고, 두려웠습니다. 돌로 치는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요? 톱으로 켜는데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있냐구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었어요. 아픈 걸 안 아프게 해주는 간섭이 아니예요. 견디게 죽지 못하게 붙드는 성령의 간섭이예요. 그래서 이내, 거기에 그들은 적응을 하고 수긍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날 좀 건져다오! 이건 이 사망의 몸 좀 죽여다오 라는 뜻이거든요. 이걸 좀 죽여다오. 도데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예수 믿고 이렇게 열심히 노력을 한 결과가 이거냐? 이게 사망의 몸이지 뭐냐? 이렇게 부르짖어야 하는 게 성도의 삶이 맞다면 그러니까 하나님 나 좀 도와주세요, 라고 고백하는 게 성도의 삶이 맞다면 ,그러한 성도의 삶을 올바로 인식하고 정의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부정하고 부인하기 위해 공격을 해오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에 그 상황을 어떻게 인식을 하겠냐는 그런 말이예요. 처음에는 힘이 들고 생경 하겠지만 이내 그는 나의 육은 어서어서 이렇게 부인되고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 티끌로 폭로되는 게 맞다! 라는 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죠?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 점점 그 상황 앞에서 담대해 진단 말이예요. 이게 진짜 변한 거예요.이게 진짜 성화라는 거예요. 이것이. 매 순간 불 같은 환란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마지막 불 한 방으로 완전히 죽여주겠다라는 협박을 받을 때 그게 정말 협박으로만 들리겠냐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아, 차라리 내 인생을 그냥 불질러 버리지, 차라리 내 몸을 그냥 불 질러 버리지, 아니 무관지옥에 있는 야차들 처럼 그냥 껍데기를 차라리 벗기지 어떻게 이 삶을 경험하라고 하지? 이런 경우 많지요? 그 때에 하나님이 그래, 한 방에 불살라서 죽여줄게 그랬을 때 그게 진짜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로만 들리겠냐구요. 변태스러운 이야기 인것 같지만 어떤 이 에겐 그게 복음으로 들릴 수 있다니까요. 그래, 빨리 태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의 백신을 맞는 이들이거든요. 백신이 뭐예요? 몸살의 백신은 몸살 균이라구요. 지옥의 백신은 지옥이라니까요. 여러분이 지옥 가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지옥의 백신을 맞아야 되요. 그게 인생이라구요.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빨리 여기서 나가야 되는데 빨리 이 사망의 몸이 죽어야 되는데,,이게 성도의 자인식이며 역사인식이라면 그래 너 죽여줄게 라고 다가오는 세상의 공격이 정말 그렇게 두렵고 아프기만 하겠느냐구요. 다 그걸 피해서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를 궁리하고 하나님을 거기에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게 무서운 거죠. 영터리 하나님, 엉터리 기독교를 믿고 있으니까. 통점과 신경과 이성과 인격을 고스란히 소유한 채 세상에게 불살라지고 있는 인생이 한 번에 끝날 수 있다는 그 소식, 성도에게는 어쩌면 그게 굳 뉴스, 복음 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몇 명 안되죠? 하나님을 아는 이가 몇 명 없어요. 약속된 나라가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되어 영원속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몰라도 그냥 믿음안에서 약속된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육의 죽음과 육의 부인됨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는 세상의 공격이나 자기부인의 현장이 별일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인식이 되어서 심지어 찬송까지 할 수 있어요. 경험해보니까 그게 됩디다. 하나님이 끌어 가신다면 막을 수 없어요. Let it go! 하고 나니까 찬송이 터지더라구요. 반드시 그건 합력되어 선이 되더라는 것이예요. 이게 믿음에 의해 끌려 가는 성도의 삶이며 성도는 반드시 그 이끌림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영지주의와 십자가복음의 차이인 거예요. 성도는 반드시 성령의 이끌림에 반응하는 삶의 궤적을 갖게 되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환란으로 감지가 된단 말예요. 그게 흔적이 있다는 증거라구요. 그런데 영지주의의 바탕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는 이들이 있어요, 오늘날에도. 이건 초대교회때도 있었는데 오늘날도 있어요. 그들은 이러한 성도의 삶의 흔적도 다 부인해 버려요. 왜? 영지주의가 헬라의 이원론과 흡사한 것이 거든요.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니란 말입니다. 십자가복음은 그거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도 성화주의를 배격은 하긴 하는데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한단 말예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들과 우리가 한 길을 간다고 섣부른 판단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아닙니다. 그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두셔야 할것은 그러한 영지주의적 십자가는 무율법주의가 되어서 그야말로 막 사는 인생을 생산해내는 잘못된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게 진짜 잘못된 방종을 조장해내는 거짓 복음인 거에요. 성도는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긴다는 거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헌금도 안 하고 교회도 안 가고 봉사같은 것도 안 해요. 그런 거 하는 사람을 자기 의 쌓은 사람으로 욕을 해버리니까. 그게 영지주의예요. 이건 십자가복음 아니라니까요. 은혜 위에서 인간 행위의 위선됨과 간사함과 작위성을 고발하는 것과 영지주의 하에서의 인간 행위의 무가치성을 주장하는 건 겉으로는 일견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런데 마치 우리 서머나교회가 그런 영지주의적 가짜복음으로 인간의 행위 자체를 다 무시하는 그런 무리들과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식의 그런 글들이 인터넷 토론방이나 블로그 같은데 올라온 것을 보면 참 그들의 이해의 폭이 너무 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 설교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 없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는 반드시 자기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요.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구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환란이예요.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의도하시는목적지로 우리를 끌고 간단 말입니다. 성도를. 그 자리가 바로 육의 죽음의 자리예요. 로마서 8장 16절 보세요.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뭐 한다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걸 증거한다 그래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17절 보세요. 롬8:17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란 뜻 이예요, 함께 한 후사라는 뜻이.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 이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집합적 교회의 모습인 거예요. 그리스도와 우리가 공동 상속자예요. 하나님나라의 공동 상속자. 롬 8:18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우리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걸 증거하는데 무얼로 나타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겪는 것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들어와서 여러분 안에서 하는 일은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아프게 환란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는 거예요. 그 삶의 궤적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나타난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성령은 여러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의 삶을 탄식의 삶이라고 표현해요. 로마서 8장 22절 보세요.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 우리도, 성령의 처음 익은 첫 열매를 받은 우리도) ,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구원받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탄식하면서 뭘 기다린다고 그래요? 몸의 구속을. 왜? 도데체가 믿겨지지가 않는 거예요. 도데체 어떻게 구원 받고도 이 모양으로 사냐? 빨리 구원이 완성되어야 되는데 ,,이걸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그래요. 누가? 성도가.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이게 뭐예요? 소망이죠? ) 참음으로 기다릴지니 (뭐예요? 인내예요. )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자, 성령이 우리안에 들어와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어떤 연약함이라 그래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모른다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안에 들어 왔는데도 우리는 육의 생존을 위해서만 기도하죠.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이거 해결 해주세요, 이게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요 연약함을 돕는대요. 어떻게 돕겠어요? 하나님, 요거 들어주지 마세요, 조거 들어주지 마세요, 얘 죽이세요. 요게 연약함을 돕는 거예요. 죽여서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달아 죽여서 예수 안에서 살리는 게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는 육의 생존을 위해 달리더라는 거예요. 성령 받고도. 그래서 성령이 들어 와서 뭘 하느나하면 요 연약함을 도와 죽여내더라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롬33절 이하를 보면 그러한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서 성도의 삶이 어떻게 되어가는지가 잘 나타나 있어요. 보세요.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이게 지난 주에 공부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의 결론이죠 그죠? 그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 한 거예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절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니아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로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게 뭐라 그래요? 환란 핍박, 곤고 기근, 적신 위험, 칼. 이게 성령이 가입한 사람의 인생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걸 겪으면서 성도가 어떻게 자기의 인생을 감지하고 정의를 한다구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고 있구나, 라고 자기 인생을 인식한다는 거예요. 이거 예수를 위하여 죽기 위해 태어난 게 나네? 나는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할 양처럼 계속 죽임을 당하고 있네 ! 이게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우리 인생의 실체란 말예요. 본질이란 말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면 너희들의 삶 속에서 그런것들을 그렇게 나타낼텐데, 경험하게 할텐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너희들을 끊을 거라고 생각해? 오해 하지마 그것들은 너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하는 일이란다 라는 걸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8장이요. 그래서 우리가 말 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거예요, 피조물과 함께. 빨리 완성되어야 되는데,,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되는데,,.이렇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니까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도살 당하는 양,부품에 불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하는 게 나예요. 주를 위하여, 주를 비롯되어,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게 성도라며요? 성경이 그러잖아요.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하는 거예요. 그게 나라니까요. 나를 위해 주가 죽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분이 존재하는 거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가 선 게 아니예요. 그 순서를 정확히 이해하세요. 그걸 아는 이들은 비록 느낌과 감정에 이 육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죽고 부인당하는 게 맞는 것이니까 어서어서 더 확실하게 죽여달라 라는 소원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감당이 안되는 거예요. 별일 없이 사는 이들이 되는 거예요. 아픕니다, 싫어요 그게. 그런데 이게 맞는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내 안에 믿음이 들어와서. 그래서 그냥 별일 없이 살아요. 믿음은 그렇게 성도에게 들어가는 순간 그를 이리저리 몰아서 육의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가요. 성도는 그러한 성도의 삶의 실체를 말씀으로 조명 받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낯설어도 이내 적응이 되고 잘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그렇게 육이 죽어가면서 진짜헌금이 나오고 진짜구제가 나오고 진짜봉사가 나온단 말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믿음이 가입되기 전에는 나만을 신 삼아, 내 배를 신 삼아 살던 자들이 믿음에 의해서 육의 죽음을 조금씩 경험하면서 나만을 향했던 관심과 사랑이 외부로 나누어지는 거예요. 그게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예요. 그렇게 나만을 향했던 사랑과 관심과 신뢰가 점점 끊어져 가는 삶을 이 사망의 몸의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성도의 신실함이예요. 그건 인간 스스로의 지혜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끄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성화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라고 말씀 드리는 거지 성도의 삻에 그 어떤 흔적이나 변화도 발견 될수 없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란 말예요. 잘 이해하시란 말예요. 신천지나 이런 엉터리 같은 놈들이 메일 몇 개 돌리면 그냥 혹 하고 넘어가는, 모르니까. 걔네들이 어떻게 더 공부를 열심히 하냐구요? 그렇게 믿음에 의해서 죽으의 자리로 끌려간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이 히브리서 11장이예요. 그래서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 별일 없이 맞아 죽었던 거예요. 스데반,사도바울.홀리 캅 등등 수많은 순교자들이 바로 그러한 성령의 이끄심에 장악되었던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그들의 말도 안되는 연약함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이런 놈들인데 성령이 가입하여 십자가로 끌고 가니까 이렇게 죽더라! 성경은 그러한 이들을 영웅으로 올려 놓고 본 받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을 영웅으로 올려 놓고 그들을 본 받으려고 한다니까요. 홀리 캅 처럼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지자, 사도바울 처럼 돌로 치는데도 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러 가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자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이들의 행휘를 본 받을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들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을 배우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열심을 보라는 거예요. 사실 예수님 당시에 고대시대 사람들, 그 당시의 사람들 수명이 50이 안됐어요. 그래서 예수님 보고 50도 안된 놈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봤다 그러냐? 이런 거예요. 어떤 큰 교회목사님이 예수님은 고생을 많이 해서 30살이 50살 처럼 보였다고 설교 하시던데 그 얘기가 아니라, 50이면 죽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야, 너 아직 살아있잖아. 50 도 안된 놈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봤다고 그래? 이 이야기 라구요. 그렇게 따지면 제자들이 오래 산 거죠? 사도요한 90살 이상 살았어요. 홀리 캅 80살 이상 살았습니다. 그러면은 죽을 때 된거예요. 그 때, 빨리 불질러 ! 이게 뭘 존경할만한 일이냐구요? 남 두 배 정도 살았는데. 하나님에게 집중하시란 말예요. 사람 존경하려고 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보세요. 히브리서 11장이 믿음 장이라는 걸 여러분은 잘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히브리서 11장이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어절로 시작이 되죠? 여기서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역사의 눈과 귀로 인식할 수 없는 묵시와 묵시의 일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게 그 묵시의 실상이요 증거라고 해요. 그리고는 그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장악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되었는 지가 설명 되는 게 히브리서 11장 이잖아요? 그러면 이 묵시의 세계를 이 땅에서 실상으로 설명해내는 게 믿음이라면 믿음을 선물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되요?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나라죠? 묵시는 하나님이 왕인 나라예요. 하나님만 왕! 이땅은? 모든 존재가 왕이 되고 싶어 사는 나라고. 그러면 묵시가, 보이지 않는 게 증거로, 실상으로 나타나는 게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의 삶이라면 하나님에 의해 장악 당하고 하나님에 의해 존재성과 주체성, 모든 걸 다 차압당하는 삶을 사는 게 믿음이라는 증거와 실상을 받은 자의 삶이란 말예요. 그래서 그 믿음이라는 증거와 실상을 받은 자들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어떻게 결론이 나느냐? 다 죽었더라 ! 로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자기들이 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의 행간에 심어 놓은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니까요 성경이. 그들의 인생을 기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는 걸 그냥 그려놓고 간 사람들이란 뜻이예요.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고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그 창조의 나라의 삶을 사는데 그게 뭐냐면 그 왕이신 하나님에 의해 온전히 장악되어 티끌로 폭로 되어지는 삶을 사는 거예요. 사람 때려 죽이고 도망간 모세의 삶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부하고 예수님과 함께 곤욕을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좋아하는 삶으로 바꿔치기 되어 기록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대아우르를 떠났고 믿음으로 자식을 얻었다고 해요. 거짓말이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그들의 행위를 지우개로 벅벅 지우더니 차변란에다가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의 행간에 심어 놓은 이야기를 기록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게 네 거다! 라고 여겨주는 게 구원이라구요. 보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이 , 우리의 삶이, 우리의 행위가 어떤 가치가 있느냐구요. 그것으로 상을 받으러 가겠다라는 자체가 복음의 비읍 자도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니예요. 구원은 노기조마이, 여겨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차변란에 그냥 하나님이 하신 걸 기록해 주는 거란 말예요. 하나님은 대제사장에게 멸시를 당하며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묵시 속에서의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시죠? 어린양은 누가 잡아서 죽여야, 대속죄일에 어린양은 누가 잡아서 죽여야 이스라엘이 속죄가 되요? 대제사장. 그래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죽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 대제사장이 두 놈이나 서 있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도 구원을 그려낸다니까요 하나님은. 그러니까 이 역사는, 인생은 하나님의 캔버스예요. 묵시와 예수, 하나님을 그려내는 캔버스라니까요. 그걸 인정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그렇게 역사와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그려내는 소품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묵시속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묵시의 실상이요 묵시의 증거라는 믿음이 성도에게 가입이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캔버스로 ,티끌로 드러나는 거예요. 창조의 나라, 묵시의 나라는 하나님 홀로 창조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마지막에 창조되어 눈 뜨니까 그냥 안식이었잖아요. 이게 창조의 나라, 묵시의 나라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묵시의 증거요 실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가 바로 그걸 인정하게 되고 그 삶을 그려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자의 가치는 하나도 못 챙겨 갖는 거예요. 뭘 대단한 일을 해도 그건 하나님이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것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걸 갖고 상을 받으러 가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도데체가. 이게 이해가 안됩니까?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그냥 부정 당하는 거예요. 부인 당하는 거예요. 그걸 순교라고 해요.주체성과 존재성을 하나님에 의해 차압 당하는 거. 요걸 순교라고 해요. 순교는 자신의 열심과 의지를 발동하고 발휘해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순종의 절정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예요. 다 순교하러 갑시다! 그런 죽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죽어요. 저는 학교다니는 7년 동안 친구들 8명 제 눈 앞에서 죽는 거 봤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예요. 민주화, 등록금인하 이런 걸로도 죽더라니까요. 그건 순교 아니예요. 그건 죽는 거 아니예요. 그건 자기의 보람과 가치를 챙겨 갖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야단 맞을 일이예요 그거는. 그런 거 순교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순교는 마치 그런 게 순교인 거처럼 오도 되고 있는 거예요. 순교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결국 육의 죽음을 맞게 되는 모든 성도의 삶을 총칭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모든 삶을 다 순교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계시록 6장 9절 보세요. 계6장 9절 다섯 째 인을 떼실 때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사진 증거를 인하여 (증거를 가졌더니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9절-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증거를 가지면 죽임을 당하게 되어있어요.) 10절-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 그래요.하나도 빠짐없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 !! 성도는 역사 속에서 다 죽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 맞다면 여러분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그런 놈들이나 아니면 세상의 그 어떤 환경이나 여러분의 일상이 대단한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별일 없이 사세요. 그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예요. 저 정도면 죽을만도 한데? 왜 목을 안 매달지? 그런데 믿음이 내 안에 있어요. 이게 맞는 삶인데 뭐 이러면?. 얼마나 약 오르겠어요? 오히려 불쌍하죠. 그들은 그걸 모르니까. 성도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자아를 부인당하는 삶,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체휼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별일이 안되는 이유는 나는 그렇게 죽어 마땅한 자, 라는 올바른 자인식이 믿음에 의해 공급되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우리 서머나 교회가 바로 그런 올바른 자인식의 자리로 올라 가기를 원해요. 그래서 설교 때마다 우리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더럽고 추악한 죄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손수 준비하셔서 선물해주신 예수라는 의에 대하여, 종국에 심판을 면하게 하시기 위해 성도에게 감내하라고 주시는 백신으로서의 역사속 심판, 지옥에 대하여 강조하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이야기 한다 라고 하는 게 그거 였으니까. 그 예수 이야기 이외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런데 이 맨 앞에 부분을 오늘날 교회가 생략하고 있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들으면 아파요. 기분 나빠하니까 그건 생략하고엉뚱하게 해야할 일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이게 불교와 다를 바가 없어진 거예요. 기독교가. 질병으로 가난으로 우리가 죽음에 봉착했을 때,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신의 저주로 밖에 여겨지지 않겠죠? 그러나 우리의 처음자리와 묵시속 창조의 현실을 계시로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우리의 육과 역사가 죽는 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올바른 자리 라는 별일 없이의 삶이 가능한 거예요. 모함이나 누명으로 속이 상할 때,세상은 신을 원망할지 모르지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인식하면서 그래,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나는 그런 것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더럽게 살 수 있는 존재란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그나마 이렇게 사는 거야 라는 요 인식이 있을 때에 괜찮은 거예요. 칼빈이 이야기 한 것처럼 마귀야 아직 나를 그 정도 밖에 못 봤니? 나 더 공부해야 되겠다, 너 나에 대해서 아직 그것 밖에 몰라? 나 더 나쁜 놈이야~ 존 칼빈이 그랬다구요. 나 뱀새낀데 넌 아직까지도 나를 그냥 지렁이 정도로 봐주고 있네, 아냐 더 공부해~~이게 우리의 올바른 자인식이라면 그들의 모함이나 누명이 뭐 그렇게 대단히 별일이 도겠냐구요? 맞는데.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그 자리로 안 간것 뿐이지 나는 맞아요. 그런 사람이. 그게 별일 없이 사는 거예요. 오늘 걔 노래 아주 그냥 많이 홍보해주네ㅎㅎ. 오죽하면 성경이 성도에게 닥치는 모든 게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재료라고 이야기 했겠어요? 모든 게 다! 모든 게 합력하여 예요. 좋은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성도는 매 순간 수지 맞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신약에서 그러한 순교자의 삶을 보장 받은 그 교회의 원시 모형, 최초의 순교자가 어디에서 나타났어요? 세례요한은 아니예요. 십자가 전에 죽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실 때 살아있던 놈 하나 있었어요. 강도, 걔네들보다 예수님이 조금 먼저 돌아가셨죠? 예수님이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무릎을 꺽지 않았는데 얘들은 살아 있었어요. 그러나 조금 이따 죽었거든요. 그런데 고 둘 중의 하나가 구원받았거든요. 십자가 이후의 최초의 순교자는 강도입니다. 강도예요. 믿음으로 죽은 거예요. 그래서 그 강도 안에 우리의 교회를 넣어 이해를 하면 딱 맞아요. 세상은 그렇게 두 종류의 강도로 나뉘어져요. 강도가 뭐예요? 그때 당시에,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 달았던 사람들은 로마에 대한 반역자들 밖에 없었어요. 강도, 살인자? 십자가에 안 달았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 달린 강도, 그들이 등장을 할까요?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반역을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한,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 전 인류를 모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는 강도예요. 그들은 전부가 다 하나님 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강도 예요. 그러나 십자가를 져야하는 악마들이라구요 둘 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마귀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역사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게 구원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이스라엘이 교회 잖아요. 그 이스라엘의 이름이 야곱, 강도 인거예요. 그 강도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낸 게 하나님의 구원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거저~. 그 강도가 십자가에서 한 게 뭐있냐구요? 아니,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오체가 다 박혔는데. 요게 구원의 조건인 거예요 여러분. 갈라디아서 5장 24절 보세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이예요. 여기서 못 박았다, 스타우로느 라는 단어가 헬라어의 직설법 과거 시제예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요. 어디에서? 강도 안에서.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열에 달리셨죠? 바로 강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거예요. 예수님이 이 강도가 되어서 죽으신 거라니까요. 그래서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거예요.하나님의 교회와 그 머리이신 예수가.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거예요. 그 강도 안에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저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는 그리하여 나를 신 삼아 살고자 했던 아담 맞습니다 라는, 저, 강도 맞습니다 라는 이 고백을 반드시 해야 되요. 성도는. 그게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라구요. 그게 구원 받은 강도가 반드시 토해내야 할 신앙 고백이란 말입니다. 저는 무슨 선해 보이는 일을 통해서도 반드시 저기엔 가치와 명성과 보람과 인기를 위해 하는 자입니다, 하는 요 진심어린 자각과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 믿음의 역할 이란 말예요. 그 강도는 자기가 죽어 마땅한 자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자기 옆에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이가 보여요. 그런데 믿음이 가입해요 갑자기. 그랬더니 이 사람의 눈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이는 거예요. 뭘 열심히 공부해서도 아니예요. 뭔 얘가 십자가 위에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겠어요, 뭘 했겠어요? 믿음이 가입하니까 그 분이 하나님 나라 왕이라는 게 보여요. 그런데 그 왕이 내가 되서 죽고 있어요 옆에서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구요? 내가 이렇게 죽어야 되는 거 맞습니다. 저는 아무 할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어떻게 하나님이 하늘의 왕이라는 게, 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게 나에게 어떻게 알려졌죠? 그 비밀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됐죠? 그리고 당신이 내가 되어서 죽으면 내가 살 수 있다라는 이 믿음은 도데체 어디서 온 겁니까? 하나님 그게 사실이라면 난 면목 없지만 하나님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좀 생각해주세요. 안 해도 상관 없는데 하나님, 내 안에 믿음이 들어와서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 나를 좀 생각해주세요. 요게 바로 성도가 마지막에 고백하눈 말이어야 되요. 그 때 하나님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고백이 바로 십자가 위, 우리가 맨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는 거잖아요~ 이렇게 밀리고 밀리고 밀리다가 . 약속의 땅 바로 앞에서 성도가 최종적으로 해야 할 고백이 바로 그 고백인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의 바로 그 고백.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오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케 해주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뭔가 열심히 노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으로 뭔가 해낼 수 있다 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분멸히 지난 주에 제가 성도의 삶에 신실함이나 성실함, 노력이 없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걸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을 가치와 자격과 조건으로 쌓아서 상을 받으러 가겠다구요? 모슨 복음이예요 그게 불교지. 그 강도가, 조금 전까지 그 옆에 있는 강도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욕했던 그 강도가 갑자기 ‘당신의 나라’ 라는 말을 해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어떤 나라, 저 분의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그가 알더라는 겁니다. 그는 이 세상 속에서 나에게 세상 것으로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 해주지도 않지만 그분이 나에게 진짜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게 있다라는 걸 알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살아난 게 아니라 똑같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었다니까요. 이게 역사 속 삶이예요 우리의. 그런데 우리는 이땅에서 육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잖아요, 지금 계속해서. 하나님은 죽이겠다 라고 하는데. 우리의 마지막 자리는 그 십자가인데 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잖아요. 기독교는 없다고 보시면 되요. 예수 믿는 사람은 그냥 없다고 보시면 되요. 그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숨어서 사는 거예요. 그 강도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어요. 저는 평생 저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저를 위해 남을 해치는 강도짓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저의 모습이 되어서 그렇게 죽으시는 겁니까? 혹 저에게도 살길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내 안에 그런 믿음이 생기는 건 무슨 이유입니까? 주님, 면목 없지만 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저도 좀 생각해 주세요.이게 성도의 최종 고백이예요. 그런데 예배당 안에 이렇게 잘 난 인간들이 많아서 자기의 업적과 공로를 들고 다른 이들을 오히려 너는 왜 그 정도 밖에 안되냐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어요. 보시다시피 이게 성도의 마지막 자리인데 성도는 인생과 역사 속에서 날마다 그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자기가 못 박혔다 라고 해 놓고, 못 박히면 죽은 거죠. 그런데 또 날마다 죽는다고 그래요. 그러죠?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단 얘기예요. 그러면 날마다 무슨 고백한다? 하나님 나는 강도 맞습니다. 나 뱀새끼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옆에서 놋 뱀으로 죽으신 거 맞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당신이 날 기억 해주지 않는다면 생각 해주지 않으면 난 절대 천국 못 갑니다. 날마다 죽는 거예요. 이게 육의 죽음이라니까요. 그래서 그 십자가를 우리는 날마다 진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연단은 증거라고 했죠 도끼메, )증거를 낳고, 연단이 소망을 낳는다 라고 이야기를 한 거란 말예요. 그게 4절이죠? 우리가 이땅에서 이 육의 죽음을 경험하는 게 환란이잖아요.그게 인내, 인내가 뭐예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안 죽여요.못 죽게 붙든다니까요.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되요. 이것을 인내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인내가 연단, 예수라는 증거, 묵시의 증거, 믿음의 증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그 증거를 나타내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잖아요. 그 증거.그 증거가 소망, 묵시를 바라보게 하는 거란 말예요. 그래, 그렇게 완성이 되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그냥 환란이예요. 인내, 연단, 소망 다 같은 이야기예요. 그래놓고 본문 5절에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래요. 인제 서론했으니 큰일 났네. 본문 5절 보세요.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 부끄럽게 아니함, 이라고 번역된 어구가 정확히 번역하면 모욕하지 않는다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예요. 소망은 우리를 모욕하는 게 아니다, 소망은 우리를 수치당하게 하는 게 아니야, 이런 뜻이예요. 사도가 환란에서 시작된 결과로서의 소망을 이야기 한 후에 굳이 그 소망의 가시적 현상을 설명하는 거예요. 환란을 통하여 우리가소망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게 세상이 보기에는 , 저건 뭐야? 저거 수치 당하고 있는 거 아냐? 저거 모욕 당하고 있는 거 아냐? 이렇게 보인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아니란다. 그건, 뭐라 그래요? 그 뒤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되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까 오해 하지마란 뜻이예요. 이 말은 뭘 애둘러 표현 한 거냐 하면 우리가 소망을 바라보게 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건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스치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고 우리를 모욕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뭐라 그래요? 나를 미말에 둔 것처럼, 마치 죽이려고 작정한 분 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하시네 ? 그런 거예요. 그런데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거 아냐.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창피를 주려고, 모욕 주려고, 수치스럽게 하려고 그렇게 일을 하는 게 아니냐.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하는 일이야. 이게 로마서 8장 이었잖아요. 성령이 들어오더니 죽여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여내는 모습들이 환란, 핍박, 칼, 적신 이런 건데 그런 것이 절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를 끊어 내는 게 아니니까 걱정 하지마 가 8장 이잖아요.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한 번 더 하는 거란 말입니다. 힘들지만 그건 소망이 일을 하는 거니까, 성령이 일을 하는 거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일을 하는 거니까 견뎌내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위로를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성도의 삶은 녹록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뭘 붙이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연약할 때,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원수였을 때 예수가 죽었다.그걸 붙여요. 그러면 환란의 내용이 뭐라는 거예요? 내가 경건하지 않고 내가 죄인이고 내가 연약하고 내가 원수라는 걸 깨닫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게 환란의 역할이고 이게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데에, 바로 그걸 자각하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자각하게 하는데에 바로 그 환란이 사용된다는 뜻이란 말예요. 이게 오늘 본문의 개괄적 내용이라구요. 그러면 성령이 내 안에서 일을 하면 첫 번째 자각해야 되는 게 뭐예요? 내가 죄인 맞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 맞습니다. 왜 원수예요?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한 십자가 진 뱀이니까. 뱀이 그랬잖아요. 마귀가, 너 왜 하나님의 말만 들으려고 해? 너도 할 수 있잖아, 하나님처럼 살아~. 이게 반역이란 말예요. 그래서 십자가가 등장 하는 거예요. 만약 그때 당시에 그런 반역자들을 단두대에 죽였으면 단두대가 등장할 거예요. 그러면 좀 힘들뻔했죠. 그죠? 목걸이에 단두대 달고 다니면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그것 자체가 무슨 힘이 있고 중요한 게 아니란 말예요.하나님 은혜와 사랑 그거 알아 먹으라는 거예요.그러니까 성도의 환란은 경건치 않은 자를 경건하게 만들고 연약한 자를 강건하게 만들며 원수를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경건하지 않고 여전히 연약하며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로 사는 우리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인식하라고 주어지는 게 환란이란 말예요. 그런데 성도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아픈 거예요.아, 내가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정말 더러워서 같이 못 살겠다. 이 사망의 몸과. 이게 아픔이예요.이걸 고백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게 환란이고 아프다구요, 고통스럽단 말예요.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를 아프게 하기 위해 온 거지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뜻과 비젼을 성취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능력이나 뭐 그런게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요즘 신사도 운동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 쓰러트리고 다니는 어떤 장로들 이런 사람들 있죠? 사기예요, 다.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저주하며 욕 했던 그 구원받은 강도가 성령의 간섭을 받자마자 내뱉은 말이 뭐였어요? 보고 갈까요? 마태복음 27장 44절 보세요.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 하더라 저주 했어요, 둘 다, 분명히 그죠? 십자가 위에서. 달기 전도 아니예요. 달려서.같이 저주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얘가 미쳤나봐. 누가복음 23장 39절 보세요. 눅 23:39 달린 행악자들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가 우리를 구원하라 이게 민속 메시아 사상이죠? 메시아, 구원자는 나를 위하여 존재해야 된다, 요게 민속 메시아 사상이예요.요게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의 구원자관 이었잖아요. 고기에 달린 한 강도가 요렇게 이야기 하더라니까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니까 나를 구원해라! 그래요~. 그 때 갑자기 헷가닥 한 사람이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십자가에 달린 저 분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요 사람이 지금 예수님이 왜 거기에 달렸는지를 아는 거예요.갑자기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너 때문에 저분이 죽는 건데) 하나님이 두렵지 않냐 그래요.갑자기 하나님이 두려워진 거예요. 왜? 이대로 죽으면 저주의 뱀이 되어 죽으면 영원한 멸망 속으로 들어가는 걸 알아 버린 거예요. 너 어디에 대고 저 죄없는 하늘의 왕에게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그러더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 우리는 우리의 죄 떄문에 이렇게 뱀이 되어 죽는 거야! 그러는 거예요. 내 죄 때문에 죽는거야.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성령을 받자마자 이걸 알아 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자신의 실체를 자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거예요.여러분 그 하나님이 두렵냐구요? ‘경외’ 스럽습니까? 그 사람에 의해서 진심어린 구조요청이 터져나오게 된 거예요. 당신의 나라에 임할때 면목 없지만 나를 좀 생각해주세요. 안해줘도 상관 없는데, 난 이렇게 죽어 마땅한 자라고 이미 얘기 했으니까. 나를 좀 생각해 주세요. 이게 바로 십자가 위에서 내뱉는 성도의 고백이란 말예요.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거지요? 그럼 날마다 무슨 고백 하는 거예요? 나 강도 맞습니다. ‘나 뱀 맞습니다. 면목 없지만 하나님, 당신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좀 생각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니요, 생각 안 해주셔도 상관 없는데 생각 안 해주시면 전 큰일 납니다. 이미 알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부탁 드리는데 저를 좀 생각해주실 수 있으세요? ‘ 탕자처럼 아버지 집에서 종살이라도 좀 할 수 있을까요? 다 털리고 난 다음에, 다 털리고난 다음에 아버지 집에서 종살이라도 좀 ,,,,이거 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세요.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더욱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되죠? 여러분. 그러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헤서 못 박힌 거예요. 강도처럼.) -그런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할 자가 맞아요. 그러니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 분을 믿고 의지 하는 길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뭐예요? 이 분이 나를 살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는 거예요. 고린도 전서 15장 31절 보세요.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 하노니 나는 날마다죽노라 세상에 자랑할 게 없어서 날마다 죽는 걸 자랑해요? 자기가 자랑할 게 하나밖에 없대요. 뭐? 그랬더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 세상이 뭐라 그러겠어요? ‘자랑이다~인마’ 그런데 성도는 그걸 자랑해요. 또 뭘 자랑했어요? ‘ 나의 약함을 자랑 하노니 ‘ 또 이러죠? 약함, 내가 날마다 죽는 거예요. 그렇게 연약한 자로 밀려 내려 가는 걸 자랑해요. 이 사람은. 왜? 그래야 나를 살리신 예수가 드러나니까. 날마다 죽는대요. 그런데 이 날마다 죽는 건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 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9장 23절.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날마다 십자가 지래요. 요걸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었다 그래요. 날마다 십자가 졌다는 얘기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강도, 하나님의 교회가 무어라고 고백해요? 약속의 땅 앞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들어갈 것이다 라고 한 그 앞에서, 나는 자격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날마다 죽는 거예요. 그렇게 밀려 내려가는데에 사용되는 게 환란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별일 없이 사는 거예요. 이게 맞아! 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살아 있으면 돼요.견디라고도 말 못하겠어요. 그냥 살아 있으세요. 밥 맛 없으면 물에 말아서라도 먹고 살아있으세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 죽음이 뭔지를 자세히 설명해요.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임에 넘기움은 우리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 진다 그래요. 여기서 항상이 날마다예요. 여걸 제가 헬라어 원어에 맞게 좀 이해하기 쉽게 직역을 해드릴게요.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매일 십자가 진다는 뜻이예요. 매일, 날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맨날 죽는데 내가 살아 있어. 그럼 뭐가 살아있는 거예요? 예수가 사는 거예요. 예수가 살려 놓는 거예요. 그게 성도예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을 겪고 있습니다. 이게 성도의 인생의 실체라니까요. 예수를 위하여 소품으로 죽는 거예요. 여러분은요.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니 ,, 왜 이런 것은 그렇게 간과해버리고 엉뚱한 것들만 붙들고서 이게 신앙이니 뭐니 이러고들 있을까요? 아니, 심지어 자기의 앞 날, 미래 삶을 위해 하나님을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기독교입니까? 예수님 곁의 구원 받은 강도는 자기가 죽어 마땅한 강도라는 올바른 자인식을 했어요. 그게 십자가 위에서의 고백 이었어요. 그럼 날마나 십자가를 지는 우리는 정확히 그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날마나, 날마다. 정확히 그 고백을 하면서 자기가 상 받을 거는 또 요기에다가 요렇게 쌓아가는 게 이게 이해가 되요? 전부새빨간 거짓말들이예요. 성도의 자기부인의 삶은 어느 때 한 번 화끈하게 일어나고 마는 게 아니예요. 죽는 날까지 진행 되는 거예요. 그게 날마나 십자가 지는 거란 말예요.날마다 죽는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이 강도의 이야기 바로 앞에 기대치 않게 죽음을 모면하는 한 인물이 등장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23장 18절 보세요. 눅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은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요게 바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죄예요)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니 그러니까 요 바라바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사람이예요. 그런데 요 사람을 놓아주고 예수가 이 사람 집자가에 달린 거예요. 요 이야기 다음에 그 강도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건 두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란 뜻이에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어떤 이가 나오고 그게 지금 구체화 되어 설명 되어지는 게 어떻게 이가 살아났는가를 보여 주는 게 강도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요 바라바는 민란,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를 모형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형인 거예요. 그래서 이름이 바라바 예요. 아버지의 아들이예요. 그런데 십자가 지고 죽어야 할 자로 이 땅에 오는 거죠.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단 말입니까? 이런 유치한 건 물어보지 마시란 말예요. 성경은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수만 이야기 한다구요, 십자가만 이야기 한다구요. 아버지의 아들이 십자가 지고 죽어야 할 자로 오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갑자기 나가래요~ 내가 뭘 했다고 나가라 그래요? 몰라, 나가! 너 때문에 대신 죽어야 할 네 십자가를 질 사람이 하나 왔으니까 네가 질 십자가는 없어 나가~. 그런데 이 놈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자예요. 강도란 말이예요, 얘가~. 이 바라바가, 아버지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그 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저 살아나는 거예요. 이 바라바가 그 뒤로 십자가만 보면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아, 저기에 내가 달려 죽었어야 되는건데 도데체 내가 뭘 했다고 그 분이 내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 요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최종 고백인 거예요. 그래서 바, 아바! 아바 아버지의 아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볼 때마다 맞습니다, 저기에 내가 달려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아달을 저기에다 달았습니다. 요 고백을 진심으로 하는 자가 날마나 죽는 그거를 에베소서 1장 3절이 정확하게 요약해서 기록해요. 보세요.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 묵시 속에서, 영원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과거죠? 묵시 속에서 완료된 일이라는 거예요, 이게. 이미 완료된 일이예요. 창세전에 아들들이 되게 하셨어요. 누구로? 예수의 피로. 요 이야기를 바라바와 그 강도가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거예요.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캔버스예요. 역사와 인생은 다. 요 이야기라니까요. 그 깊으신 뜻대로 얘정하사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바라바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저건 내가 달려야 되는 건데 왜 예수가? 아무런 일도 한 일이 없는 나를 위해 저기에 달렸을까? 아, 정말 감사하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이걸 찬송이라고 해요. 여러분이 그 찬송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영원히. 역사 속 지역 로컬 처치에서 그런 거 배우고 오라 그랬더니 이 되먹지 않은 것들이 전부 선악과 따 먹고 누가 더 하나님 처럼 훌륭하게 살아냈냐 를 경쟁하고 앉았어요. 예배당에서. 누가 더 선악과 따 먹은 자 처럼 자격있게 사는가 ? 이걸 지금 경쟁 하는 게 성화 아닙니까? 왜곡된 성화 ?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며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하고 되새기는 삶을 살게 되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성도의 옛 사람을다른 단어로 표현 해놓은 게 있는데 골로새서 2장 13절 보세요.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도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게 뭐예요? 의문에 쓴 증서, 율법이죠? 이건 채권문서 예요. 채권자가 갖고 있는 채권문서. 안 갚으면 죽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란 말예요.요걸 십자가에 못 박았대요. 그럼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라는 것과 율법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라는 것은 정확히 같은 말인데 그럼 우리의 옛 사람 중에 어떤 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거예요? 율법주의요. 인본주의, 선악과 따 먹고 내가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걸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나는 하나님 앞에 무력한 자로 하나님이 창조하셔야 존재가 될 수 있는 자로 서게 되는 거! 이게 역사속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잘 보시면 그 의문에 쓴 증서, 그걸 십자가에 못 박아 도말해 버렸다, 제하여 버렸다고 해놓고 그 위에서는 이걸 죄라고 해요. 그게 죄란 말이예요. 그걸 죽여 가는 거예요. 날마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도 뭔가 기여할 수 있어, 이걸 십자가에 못 박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무력한 자로 판정을 받고 이 세상에서 바보들 되는 거예요. 그게 세상속 죽음이란 말예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성취해 보겠다고 움직이는 족족 죄, 즉 사망만 뿜어내는 존재인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그러죠? 우리의 모든 게 나를 위한 욕심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나를 위해 숨 쉬고 나를 위해 밥 먹고, 나를 위해 자식 사랑하고 나를 위해 아내 남편 사랑하는 거. 아닌데요, 자신을 희생해서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아니요! 그건 내 보람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역시, 고걸 죄라 그런다니까요, 성경이. 인간은 절대 선악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어요. 그게 뱀의 유혹 이었잖아요.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어 네가 선하다고 정해 놓은 걸 하고, 악이라고 정해 놓은 걸 하지말아라가 율법주의 잖아요. 요게 율법이죠? 요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건, 요게 뱀의 유혹이었기 때문에 요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이 되어, 뱀이 되어 죽으시는 거고, 그게 바로 우리의 옛 사람안에서 죽어야 할 죄란 말입니다. 삼단논법만 알아도 이해하는 건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이게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란 말예요.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신실함이라든가 열심이라든가, 애씀 같은 것들이 사용 되는 것인데. 제가 지난 주에도 사진 보여드렸죠? 그 A 지점, 그 위쪽으로 올라가야 묵시인데 요 B 지점, 포물선으로 제가 그려왔던 거. 거기에서 열심히 헤엄쳐 A 지점까지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끝까지 올라 갔다고 쳐요 그런데 묵시 속으로는 못 들어 가잖아요? 육을 갖고 있으니까. 이걸 야고보가 모든 걸 다 지키다가 하나 어긴 자,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올라간 사람을. 그런데 그도 빵점하고 똑같아! 그래요.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기면. 그러니까 결국 인간이 최고로 노력해서 가장 큰 선을 이루어 내면 뭐예요? 맨 밑이라는 거예요. ! 그것도. 그걸 이사야가 더러운 걸레,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전부, 모든 인간은 다 이자리로 내려가요. ‘B’의 자리로. 거기에서 성도만 하나님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좀 생각해 주세요. 라고 가는 거고, 남들은 ? 다른 이들은? 요거 요거 내가 이만큼 해 놨는데 내가 한 삼십 센티 올라 갔는데, 이거 상 받을 만한 건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걔가 똑 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은 심플하다구요. 그런 애씀과 신실함은 기독교의 목적지가 아니예요. 그건 하나님이 예수를 붙들으라고 주는 하나님의 배려란 말예요. 그걸로 나의 가치를 증명한단 말예요? 내 자격과 조건을 설명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잘 설명해놓은 게 하박국서 입니다. 하박국서에서 나오는 요절이 뭐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건 로마서의 대주제죠? 하박국서를 잘 이해하면 로마서를 완변하게 이해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박국서가 뭡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이 유대가 곧 망해요.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갑니다. 어떻게 저렇게 착한 사람이 저렇게 악한 놈들한테 당하면서 사는 걸 그냥 보고 계세요? 하나님이 그래요. 착한 놈이건 악한 놈이건 내가 이제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들어서 니네 다 죽여 버릴거야. 그랬더니 하박국이 또 항의하죠? 그 놈들은 더 나쁜 놈들인데 어떻게 그 놈들을 들어서 우리를 치려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거야. 너희들이 무슨 자격이 있다구? 뭐 어떤 자격 이야기 하는 거냐? 하나님이 물으시는 거예요.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거야’ 너희들이 이스라엘이라구? 선민이라구? 그래서 지금 자격 운운 하는 거니?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거야. 그리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까. 누가 누구를 치고 누가 누구에게 당하고 이걸로 어떻게 네가 나에게 와 갖고 나를 가르치려 들어?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거라니까’ 왜 눈에 보이는 걸로 나를 가르치려 들어? 이 말도 같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거라니까. 하박국이 그걸 이해하죠? 주여, 아. 이러한 율법주의, 이러한 인본주의를 부수기 위해 하나님이 갈대아를 들어 쓰는 거군요? 하나님 그렇다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 하야! ! 란 단어가 소생케 한다는 뜻이예요. Revive 이거는 사람이 많아 진다거나 교회가 커진다는 뜻이 아니라, 죽어서 살다 란 뜻이예요.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는 빨리 와서 죽이세요! 란 뜻이예요. 부흥회 이런 말 함부로 쓰지 마세요, 그러니까.부흥회 하면 죽는 거예요. 목사가 가서 부흥회 하면 거기에 반드시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부흥회하면 교회가 반드시 깨져.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못된건 짤라 내소서. 그리고는 결론으로 하박국이 이렇게 얘기 합니다. 하박국 3장 16절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가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이게 환란이예요. 환란을 당하는 성도의 모습이예요. 무서워요, 아프다니까요. 덜덜덜덜 떨려요.) 3:16 -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란날을 기다리노라 (왜? 왜 기다려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는 반드시 성취될 일이기 때문에 포기가 안되요 그러니까 기다려야 되요. 하박국은.)기다리는데 3:16 - 기다리므로 내 뼈의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왜?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3:17-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면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인간이 당시에 힘으로 여기고 있던 모든 걸 다 쳐버린다는 뜻이에요. 부흥이. 요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덜덜덜덜 떨은 거예요.그럼에두 불구하고 3:18- 나는 구원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찬송하고 기뻐하리라. 이게 성도의 고백이라는 뜻이예요. 로마서는 정확히 이 이갸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찾아 가셔서 반드시 이렇게 털어냅니다. 우리가 힘으로 가치로 하나님 앞에 조금 자랑 할거라고 여기고 있는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다구요. 그런데 그게 구원이래요. 하박국이. 그게 구원이래요. 그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찬송하리로다~ 그런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걸 얻어 내겠다라는 게 오늘날의 기독교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보람과 가치를 챙기겠다는 게 기독교 아니예요? 아닙니다. 성경은 선악과를 입에 문 채로 이 역사 속으로 투입이 된 성도들에게 회개 즉, 은혜로의 돌이킴 이것을 외치는 책인 거지, 선악과의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처럼의 경지를 이뤄내라고 독려하는 책이 아니예요. 그러한 성도의 역사와 인생의 과정과 실체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란 말예요.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고거를 아주 잘 요약하여 설명하는데 7장 9절 보세요. 고후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라 (근심은 고통, 환란이란 단어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하므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7: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환란)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만 가서 회개하라 라고 했죠? 왜 그랬어요?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와 인번주의의 모형이었잖아요.거기에 그들에게 가서 회개하라라고 한 건, 인간들은 그렇게 해서 구원 못 받아, 그렇게 해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해 를 이야기 한 거예요. 회개는 유턴이예요. 메타노니아. 그 길과 반대 방향으로 가란 뜻이란 말이예요. 그게 회개하라 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환란은 에수께서 돌이켜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오체가 십자가에 박히는 게 맞는 거네요. 하나님 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겠습니다. 요거를 이뤄내기 위해 환란이,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거란 말이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여러분이 십자가와 예수를 붙들고 있다면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밥에 물 말아서 살으세요. 여러분 회개가 뭐였어요? 우리 비유 시간에 배웠지요? 비유강해 시간에.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서 자기의 힘으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그게 회개예요? 그래서 회개 ‘하라’ 예요? 예수님이, 그리고 선지자들이 와서 회개하라 라고 외쳤어요. 그리고는 회개를 설명해준 거는 딱 한군데 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비유, 하나님이 직접 설명해 준 거니까 그게 맞겠죠? 회개를 어디서 설명 해줬어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세개를 묶어서 ‘회개’ 를 설명하세요. 탕자를 설명하게 위해 드라크마와 잃어버린 양을 앞에다가 붙여 놓은 거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양은 누가 찾아가요? 주인이 찾아 오는 거예요. 그래놓고 회개를 설명한다니까요.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보다 이렇게 회개한 하나로 기뻐한다 그러죠? 회개 할것 없는 아흔 아홉은 우리는 괜찮아 라고 하는 바리새인이예요. 그 비유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세리 창녀한테 준 거니까. 그러나 회개할 자는? 세리, 창기.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쓰레기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가서 그를 그렇게 발견해 내는 거예요. 요걸 ‘회개’ 라 그래요. 그래놓고 탕자의 비유를 붙이는 거예요. 그걸 왜 붙여요? 탕자가 지가 뭘 뉘우치고 돌아온 게 아니라 아버지가 홀딱 벗겨서 아버지가 아버지의 집으로 끌고 온 거를 설명해 주기 위해 회개, 회개, 회개 로 연결해 놓고 요렇게 세 개를 붙이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회개는 이 사람이 다 털려 보니까 어, 이게 여기가 돼지우리였네? 내가 열심히 내 가치, 내 힘의 근거로 쌓았던 게 이게 다 주염열매였네? 돼지가 먹는! 요걸 깨달아서 돌아간 게 아니라 아버지가 그거 교훈하기 위해서 걔를 홀딱 벗기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준 거예요. 안 줘도 되요.안 주고 동네사람들한테 맡겨서 때려 죽여라! 이게 율법 이었어요, 그때. 그래도 되는데 아버지가 굳이 주어서 내 보내요. 그리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예요? 얘 다 털리고 분명히 돌아온다를 알고 있었던 거에요. 깔끔하게 털리자 아버지 생각이 난 거예요. 그리고는 아버지 나 집에서 종으로라도 좀 써주세요. 고걸 구원이라고 해요. 아버지가 그 탕자에게 가락지 끼워주죠? 이게 인감도장이예요.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요탕자가 무르는 거예요. 장자권이 탕자에게, 차자에게 가는 거예요. 이걸 제가 창세기랑 연결시켜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밤 샐것 같아서 다음주에 해드릴게요. 가락지가 야곱에게 간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간 것처럼. 탕자에게 간 것처럼. 그런데 그 집에 아주 착하게 산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아버지 말 잘 듣고 나가지 마, 그럼 안 나가고. 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걔를 더 이뻐하는 거 같애요. 그러니까 금방 자기가 한 착한 일을 갖고 아버지를 가르치려고 하죠? 아버지를 탄핵하는 거예요. 요걸 ‘ 자기 의 ‘라고 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도 설명 안 해주고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다 큰 아들이 되자는 거예요. 착한 큰 아들이 되자. 아버지 탄핵하는 큰 아들. 아버지 가르치려고 하는 큰 아들 되자 ! 기독교의 목적지는 그게 아니란 말예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사랑, 선행, 용서, 섬김 이런 게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얼마전에 중학교 3학년 짜리가 하나 투신자살 했어요.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죽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다구요. 그런데 그 아이가 유서를 썼어요. 유서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아버지 엄마 미안해요도 아니고, 친구들아 미안해도 아니고 나를 유일하게 사랑해 주었던, 내 이야기를 유일하게 들어 주었던 아이팟을 나와 함께 묻어 주세요. 걔의 유일한 친구는 아이팟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부모의 변이 더 우리를 슬프게 하죠. 우리처럼 우리 아이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 이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맞벌이에 나섰다.모든 걸 다 이 아이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하루에 네, 다섯 개 과외까지 시켜주었고 모든 걸 다 해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아이가 그걸 사랑으로 감지하지 못했을까요? 인간의 사랑은 다 자아실현, 자아확장에서 기인한 거라 그래요. 자기를 위해 하는 거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를 사랑할 수 없는 게 인간이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그렇게 외로워 했던 거예요. 아이팟만 내 친구예요. 아이팟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줬어요. 아이팟을 나와 함께 묻어주세요. 이게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기도 전에 왜 우리 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라는 어프리케이숀을 해주지 않느냐는 등, 왜 성화를 강조하지 않느냐는 등,,,아니, 사세요. 그렇게 사세요. 제가 그렇게 살라 그러면 살거예요. 진짜로? 그래요 말씀드릴게요. 사세요. 그러니까 다음 주에 다 집 팔아서 헌금 갖고 오세요. 하실겁니까? 열심좀 내보시라니까요. 우리 다음 주에 전부 집 팔아서 선교 갑시다. 러시아로. 할 거냐구요? 하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예요.도데체가? 예수와 십자가 배우랬더니 끝까지 성경을 가지고도 자기의 자존심과 보람을 챙기겠다는 거죠? 예수를 믿으세요. 사랑의 실체이신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여러분 안에서 진짜 사랑이 나와요, 진짜 섬김이 터져 나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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