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번째 말씀
본문 롬 5: 5-11.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지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확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성경의 첫 단어가 ‘레시트’ 시간의 시작,이라는 단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겁니다. 요한복음의 시작도 ‘레시트’ , 시간의 시작이죠? 그걸 개역성경이 ‘태초에’ 라고 번역을 해 놓은 거죠. 시간의 시작을 태초에 로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온통 그렇게 열린 시간이 하나님께 몰수 당하는 역사의 멸망의 사건으로 가득차 있죠? 역사의 멸망이라는 건 시간의 몰수 잖아요?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는 거, 시간이 몰수 당하는 것.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시간은 객과전 실체가 아니예요. 시간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감지도 불가능하며 계산도 불가능한 모호한 거죠?
세슘원자의 복사주기를 근거로 인간들끼리 합의해 놓은 1초라는 산술적 개념은 시간을 객과적 실체로 만들어 내거나 증명해 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어요. 그건 인간들끼리 합의한 계산 방법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시간을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이렇게 묶어서 그것을 생명으로 둔갑시키죠? 한 살, 두 살, 세 살 시간은 생명입니다. 맞습니까? 그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을 장수한 사람이라고 그러고 그 시간을 조금밖에 못 가진 사람을 요절한 사람이라고 그러죠? 인간들은 그 생명을, 자신들의 시간을 좀 더 풍요롭고 기름지며 길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어요. 그래서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라는 말이 있는 거예요. 길게 사는 걸 복이라고 여겨요 사람들은요. 그게 인간들의 생존본능이라는 거예요. 생존본능이라는 건 인간들의 생명 지키기, 생명 만들기의 본능이란 뜻이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곧 생명이며, 한 살, 두 살, 세 살 이렇게 생명이며, 목적이며 힘이며, 가치 인거죠? 그래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시간은 돈이다 라는 명제를 역사속에 던져 넣었던 거예요. 돈이라는 건 인간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상 모든 재화의 축약이예요.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든거예요. 세상의 힘을. 그 돈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저마다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 돈으로 자신의 가치 즉, 자신의 시간을 보다 풍요롭고 건강하고 길게 만들기 위해서 아담들은 돈을 따라 달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예요. 부정하지 말자구요.
엔드류 리콜 감독의 ‘인 타임’ 이란 영화를 보시면 시간이 화폐가 된 세상이 나와요. 물론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각자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시간을 팔뚝에 새기고 그 시간으로 거래를 해요. 커피 한 잔은 4분, 차 한 대 5개월 뭐 이렇게. 그들은 그 팔뚝시계에 남겨진 시간으로 가치 있는 사람, 가치 없는 사람을 판단해요. 팔뚝에 새겨진 시계가 시간을 다 소진해 버리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요. 7시간을 자버리면 그가 자는 사이에 7시간이라는 돈이, 생명이 날라가는 거예요. 다른 이들이 자기가 자고 있는 시간 동안에 다른 시간을 벌어 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어디를 가도 달려야 되요, 무조건. 시간을 그 생명을 허비할 수가 없으니까 무조건 달려요. 시간이 곧 돈이니까요. 슬슬 걸어다니면서 자기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거예요. 전느 엔드류 리콜 감독이 이 역사와 인생의 표피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들은 시간, 즉 자신의 이 생명을 풍요롭고 길게 만들고자 매일을 사는 거예요. 일상을 살아요. 풍요롭고 긴 시간을 영생이라고 표현을 해도 되요. 물론 인간들 수준에서의 영생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영생은 신적 생명이지 그렇게 길고 풍요로운 삶이 아니예요. 아무튼 인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가 의식을 하던 의식을 하지 못하던 이 제한되고 비루한 자기들의 그 시간, 자기들의 역사와 인생을 풍요롭고 긴 시간, 영생으로 바꾸어 내기 위해 매일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인간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영생, 그 생명이 시간을 모아서 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자기가 달려서, 시간을 모아서 내 생명이 되는 게 아니라 ,( 그게 인간들이 지금 추구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게 아니라, 예수 안에 들어있는 게 영생이에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나오죠?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 그래요.
예수 안이라는 건 창세전 언약, 즉 묵시속 이란 말이예요. 그 말은 이 시간으로 가득찬 이 역사 속에서는 그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그 영생에 도달 하거나 영생을 성취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시간을 모아서 이걸 풍요롭게 하고 길게 하여 영생에 도달할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시간을 열어 주어 본 거예요. 해보라고. 그런데 생명은 여기에 없다는 거예요. 성도는 그걸 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시간이 열리는 것, ‘태초에’ 로 시작을 해서 이 역사가 시간의 몰수인 멸망으로 끝난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라는 걸 여시면서 시간을 주신 목적이 뭐래는 거예요? ‘태초에’ 시간이 왜 시작 되었느냐고요? 영원밖에 없는 그 영역에 왜 시간, 역사라는 게 창조 되었냐구요. 그리고 왜 성경이 ‘태초에’ 로 그 시간의 시작부터 이 역사의 종국까지를 기록을 하고 있죠 왜? 아담들아 열심히 시간을 모으고 쌓아서 너희들 수준의 영생을 만들어 내어보라고 주신 거예요. 이 시간으로는 절대로 생명을 영생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증명 하시겠다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영생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생명은 예수로만 비롯될 수 있다는 걸 이 시간이 증명해내고 있는 거예요. 왜 시간이 우리에게 열렸는지 아시겠죠? 우리는 그 시간을 생명으로 여기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시간이라는 건 그 자체가 객관적 실체로서 모아지거나 쌓아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시간을 모으고 쌓아서 풍요롭고 무한한 영생을 만들겠다는 인간들의 시도는 결국 무얼 말하는 거겠어요? 결국. 시간을 쌓겠다, 시간을 모으겠다. 이 플뚝 시계에 시간을 그냥 영생만큼 모아야지, 한 백만 년 쯤 모아야지 하는 인간들의 시도는 무얼 가리키는 거겠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영위하고 보존해보겠다는 아담의 그 모습, 그 모습이 시간을 모으겠다는 인간들의 시도를 모형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열심히 달려서 팔뚝에 새겨진 시간에 시간을 축적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벨탑이잖아요. 잘 생각해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나라를 모혀아는 에덴에서 성인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그 자체로 완료예요. 늙지도 않아요 에덴에서는. 그 자체로 완료예요. 그 하나님 나라의 완료성, 영원한 현재성을 암시하는 거였어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이다. 애기로 태어나서 성숙하고 자라고 변하는 게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에 의해 그냥 완료가 되는 게 하나님 나라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성인으로 오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발전하고 성숙하고 변화하는 곳이 아니예요.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곳이예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성인으로 탄생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완료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시간이 필요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완료가 되어 있는 세상에선 시간이 필요 없단 말예요. 시간은 엄밀히 말해 인간들의 달음박질이란 말예요. 그런데 완료가 되어 있는 세상에는 인간들의 달음박질, 변화와 성숙을 향한 애씀이 필요가 없어요. 왜? 완료니까. 거기서 더 나은 어떤 존재로 발전이 불가능한 곳이예요. 왜? 완전함인 거니까. 그래서 시간이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담과 하와의 시간, 즉 아담과 하와의 나이가 의미가 있어요? 영원한 그 나라에서 무슨의미가 있어요? 아담과 하와의 나이가. 없단 말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료된 그런 창조물로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숙이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절대의존의 나라예요. 하나님이 다 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시간을 쌓아서 성장과 성숙과 발전을 하며 생명을 쟁취해 내야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시간, 영생을 선물 받아 완성되는 존재라는 거예요. 복음은 아주 심플한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와 인도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 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되면서 부터 우리도 달려서 하나님 처럼 되보겠다 라는 이 하나님 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되면서 부터 인간들이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달리면서 시간을 살게 될 때 늙는 거예요. 나이를 먹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실존이예요 그것이. 그리고 그들은 성숙하게 되었고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달리면서~. 선악과 먹고 달리기 시작했잖아요. 창조의 나라에서 벗어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처럼 살아보겠다고, 다른 말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흉내 내보겠다고 나서면서 인간들이 성숙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성숙과 변화가 늙음과 썩어짐을 동반하더라는 거예요. 시간이. 그리고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성숙의 절정이 사망으로 끝이 나요. 시간을 쌓아서 영생을 얻는 줄 알았는데 시간을 쌓으면서 늙기 시작하더니 결국 시간을 많이 쌓아서 죽음으로 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5장의 모든 인간들이 죽음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장면으로 점철이 되어 있는 거예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계속. 다 죽어. 이게 시간을 모으고 쌓아서 영생에 도달해 보겠다는 아담들의 결국이며 실체임을 증명하는 게 역사의 역할이예요. 이 시간의 역할이라구요 그게.
그러한 가운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시간의 영역밖의 그 묵시를 품고 이 땅에 던져져요. 그들은 이 시간 속에서 시간을 따라 함께 흘러가다 보면 그 시간이 쌓여서 결국 사망이 된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예요. 여러분은 계시를 받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꾸 이 시간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물론 성령으로 오신 믿음에 의해서 그러한 생각도 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시간이 돈 입니다. 가치란 말예요. 그래서 이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아는데 이 육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시간이 좋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께서는 당신 백성의 삶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시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그 시간을 윤택하고 길게 만드는 게 진짜 복된 삶이, 복된 생이 아니라 걸 알게 하신단 말예요. 그게 성도의 인생이예요.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시간을 환란으로 채우기도 하시고 , 질병으로 채우기도 하세요.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 시간이 쌓여서 영생이 된다라는 건 언어도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거란 말예요. 그게 성도의 역사, 이 시간의 존재 의미예요. 그래서 성경이 ‘ 태초에’ 시간의 시작,이라는 단어로 시작 되는 거예요. 시간을 줘볼테니까 그 시간으로 열심히 영생을 만들어 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 입에 물려 ‘시간’으로 던져 버린 거예요. 열심히 달리라구. 너희들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알게 해 주시는 거예요.
시간, 그 역사는 결코 생명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시간의 시작으로 시작된 성경이 진짜 생명이신 예수가 오시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계시록 22장 20절 보세요.
계22:20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시간을 열어 놓고 열심히 생명을 만들어 봐, 생산 해봐 라고 하신 하나님 께서 역사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진짜 생명이 간다! 라고 하고 끝나는 거예요.예수 안의 생명. 시간이라는 가짜생명으로 시작된 성경이 예수라는 진짜생명으로 끝이 나는 거예요. 성도는 주 예수의 은혜로 사는 거지 시간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열심히 달려서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 이것이 성경의 결론이며 대 주제예요. 성경 맨 마지막이, 결론이 ‘ 주 예수의 은혜’ 라니까요. 그 단어로 끝나요. 그런데 이 사실을 성도만 감지하고 수긍하게 되요.
잘 들으세요 여러분. 제가 이 원고를 어저께 낮에까지 써 놨다가 홀랑 다 날라가는 기가막힌 일이 있었어요. 다시 썼는데, 밤을 꼬박 새서 그럴때마다 굉장히 은혜가 풍성히 쏟아 진다고요.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유익할 거라구요. 그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역할이며 중명해 내야할 바라면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나의 생명 즉, 나의 시간을 성숙 시키고 윤택하게 만드는 걸 목적으로 살아야 되요~? 아니면 예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로 살아야 되요? 후자란 말예요. 성도는, 우리는 죄인, 이 역사와 인생,( 시간의 불가능이예요) 우리는 죄인, 플러스 예수님의 은혜, 십자가에서 죽으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 하나님 사랑의 확증. 이게 오늘 본문의 공식이잖아요. 제가 지지난 주에 말씀 드렸죠?
요거를 참으로 설명하는, 이게 참 입니다, 이 공식이 참 입니다를 설명하는 그러한 자들로 사는 거예요. 아니, 우리 힘으로 그렇게 살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게 된다는 말이예요. 믿음이 그렇게 끌고 가요. 다시 한번 신명기로 가서 우리 인생과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인 해 보자구요. 신명기 8장 1절
신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광야는 광야교회예요, 사도행전에서 나오죠? 광야, 성도들이 사는 이 인생 역사란 말예요. 왜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졌냐?)
8:2-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결국은 못 지키네요 로 끝났죠? 광야가, 그래서 다 죽었잖아요. 못 지키네요예요. )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 여기에 동그라미 치세요, 낮추고 줄이게 하는. 요게 우리 인생의 모습인데 왜 그러냐하면)
8:3-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너의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맛나를 네게 먹이신 건
( 말씀을 주는데, 맛나를 주는데 주리고 목마른 경험을 하게 되요, 성도가)
8:4-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구원 받은 자들, 애굽에서 이미 나와서 홍해를 건넌 자들, 구원 받은 자들, 묵시속 백성의 이 인생, 역사속 삶을 비유하는 거죠? 그게 광야 사십 년이예요.거기서 주린단 말예요. 성도가 . 그 인생의 실체가 시험이래요. 그 자체가 시험. 그런데 어떤 시험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보는 시험이예요. 그런데 결론은 못 지킨다, 안 지킨다 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1세대, 즉 옛 사람이 광야에서 다 죽은 거에요. 이게 바로 역사속에서의 성도의 올바른 자인식이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열심히 달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영생에 도달할 능력이 없는 것이구나를 광야에서,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배우는 거예요. 확실히 깨닫는 거란 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다른 말로 인간들의 힘과 지혜를 바탕으로 생명에 이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명이 된다는 걸 증명해내는 게 성도의 인생이다 라는 거란 말이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어 낼 수 없어요. 그런데 온전하지 않은 건 99점도 빵점이예요. 성경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온전하지 않으면 99.999 도 빵점이예요. 따라서 성도는 자기의 힘과 지혜를 바탕으로 생명에 이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냥 창조되는 생명, 그러한 하늘의 생명을 갖는 게 성도라는 걸 이 역사 속에서 증명해 내야되는 거란 말예요. 그게 인생이예요. 창세기 17장 1절 보세요.
창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니면 죽어, 완전하라. 할려면 완전하게 해! 이스마엘 하나 내 놓고 내 말 다 지켰다고 너스레 떨지 말고 할려면 완전하게 해, 이거예요. 이게 창세기 17장이예요. 16장에서 이스마엘이 나오고.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창세기 16장을 율법, 시내산의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할려면 완전히 해! 시편 119편 44절
시119:44-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이렇게 지켜야 되요, 지키려면. 항상, 영영히, 끝없이. 그런데 세상에는 그 요구를 지켜낼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진술해요. 전도서 7장 20절 보세요.
전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할 위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아예 없어요. 하나님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아주 없어요. 그러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냐는 거예요. 이 딜레마를 자각한 성도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당신의 은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라는 성경의 그 결론을 고백으로 내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가 결론으로 결론적 고백으로 내 놓아야 할 게 주 예수의 은혜예요.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요.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니까요.
그런데 성경을 표피적으로만 보게 되면 성경이 인간들의 잠재력 발휘를 고취시키는 책이 되는 거예요. 할 수 있어! 너희들도 할 수 있어! 해 봐. 이렇게 잠재력 발휘를 고취시키는 책으로. 잘 보시면 신명기 8장의 시험의 내용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게 하기 위해 주리게 하셨다는 말이 붙어 있어요. 광야는 우리 성도들이 살아 내야하는 인생과 역사를 말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이야기는 성도, 모든 성도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말이오야 되요. 이게 정말 음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굶주림이라면 성도는 다 똑같이 굶주려야 되야 되는데 아니잖아요. 부자도 있다니까요. 안 굶는 사람도 있어요. 여기서 굶는 사람있어요? 살 빼려고 오히려 지금 고민중이잖아요? 그럼 이 굶주림은 무슨 굶주림이냐는 말예요?
광야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다 주렸대요. 굶주렸대요. 만나가 떨어졌는데도 굶주렸대요. 주리게 했대요. 무슨 굶주림이겠냐구요. 이것이? 아모스서 8장11절 보세요.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요 주림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모든 성도들이 이 역사 속에서 주리게 되는 건 여호와의 말씀이예요. 왜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비밀로 가려놓으셨기 때문이예요. 여러분은 아직도 성경의 십분의 일도 모르죠? 저도 십분의 일도 모르니까. 주린 거예요. 아직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주린다니까요 우리는. 그걸 역사 내내 서서히 열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삶의 경험과 함께. 그런데 그 여호와의 말씀 그 비밀, 무스테리온, 비밀이 그들에게 온전히 이해되기까지 그들은 죄인의 역사속 상태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시간을 윤택하게 하고 길게 하기 위해 이들도 달리게 되어 있어요. 어디서? 교회안에서. 예배당 안에서. 반드시. 주린 거예요. 말씀을 온전히 이해 못하는 그 삶을 반드시 통과하게 되요. 저도 이렇게 은혜를 설명하면서 열심히 또 달린다니까요. 어느 순간 돌아보면. 정말 불가능해요. 은혜, 은혜. 자유, 자유 이야기 하면서도 뭔가 불안하고 두려워서 또 달려요. 주린 거예요. 성도가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만나가 떨어지는 데도 말씀이 진짜 말씀으로 이해되어지기 까지, 말씀은 누구? 예수 ! 예수의 진의가 진짜 이해되어지기 까지 긴 시간 평생이 걸린다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삶속에서 말씀으신 예수를 이해하고 깨닫게 된단 말예요.
아, 예수가 오셔야 되는구나! 그 안에만 생명이 있는 거구나, 이렇게. 그래서 처음에는 말씀이 다 도덕과 윤리등의 바른 생활 지침서, 혹은 영생 만들어내기 메뉴얼로만 보이게 되요. 지금도 우리는 대부분의 성경을 그렇게 봐요. 표피적으로 성경이 그렇게 보이면 그들은 예수를 떡으로 삼아서 말씀을 떡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힘을 얻어 성경이 요구하는 삶을 자기의 힘으로 살아내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요. 고걸 말씀의 초보라 그러죠? 그걸 율법이라그랬잖아요. 고 과정을 겪는다니까요. 성도도 반드시.말씀의 초보예요. 요즘말로 바꾸면 성화주의라는 거예요. 제 말은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예요. 과정이 그렇다는 거예요. 불교에서 그걸 견성이라고 하죠. 바탕을 보았다. 그 견성에서 오도로 가야 되요. 깨닫고, 도,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단계까지 가야되는데 견성, 바탕을 본 단계에선느 전부 신학교 가려고 그러고 전부 단기 선교 가려고 그러고 다 그러는 상태. 초보단계, 견성. 이 한 몸 불살라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요거 견성의 단계. 그런데 오도는 뭐예요? 진짜 길, 예수라는 길을 깨닫게 되면 아니구나, 내가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여기시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거구나, 그 예수라는 길. 그 길로 가야되는 거구나.이렇게. 그게 오도의 단계라구요.
부흥집회 같은 데에서 설교자들이 초청을 하면 눈물 철철 흘리면서 두 손 들고 단 앞으로 나가는 거, 다 요 견성의 단계예요. 복음, 그 예수라는 떡을 에너지 삼아, 내가 받았으니까 내가 달려 보겠다는 거죠. 이게 정석 아닌가? 아닙니다. 절대 아니예요.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되요. 분명 복음을 근거로 헌신을 했는데 나중에 보면 그 일을 해 낸 나에게 모든 칭찬을 돌리는 걸 여러분은 너무 많이 보죠? 대부분이 그래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해보시란 말예요. 그리고 그러한 헌신의 삶 조차도 나의 보람이나 나의 가치로 챙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기근을 통과하는, 굶주림을 통과하는, 만나를 받았음에도 굶주림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 말씀의 진의를 모르고 굶주림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의 삶이란 말예요.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의 인생 속에서도 일차적으로 말씀의 주림을 허락하신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말씀이 예수와 십자가로 온전히 이해가 되지를 않아요.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에 의해 존재하고 살아가며 예수에 의해 완료된 자들임이 쉽게 수긍이 안 간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힘이 있고 지혜가 있는데 왜 예수로만 말씀으로만 살아야 하는지가 이해가 잘 안가요. 말씀으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라 하는 말은 말씀이신 예수를 믿어라 라는 뜻인데 우리는 자꾸 그 말씀을, 내가 예수를 떡으로 삼아 그걸 에너지 삼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자꾸 이해를 하게 된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믿음도 잘 안가요. 진짜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건가? 그럼 ‘예수 믿는 ‘건 또 뭐야? 이렇게.
그래서 예수를 떡으로만 생각을 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한동안 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예수님이 이 세상에 떡을 주러 온 것이다, 라고 이렇게 오해 하는 어떤 무리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예요. 교회의 이야기라니까요 이게. 우리의 이야기란 말예요. 은혜를 알고 난 후에도 우리의 육은 말씀을율법으로 끌어 당길 때가 많아요. 그리고는 그 삶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게 하시고 아, 나는 예수를 떡으로 하여 나의 보람과 가치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창조주이신 예수를 믿고 의존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고백의 자리로 끌고 가는 거예요. 이게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창조의 말씀이잖아요. 가라사대! 하면 그냥 생기는 거예요. 아, 우리는 말씀으로 사는 거지, 창조되는자지, 그걸 떡삼아 우리가 그걸 에너지로 하여 달리는 게 아니구나를 깨닫는 게 광야 시험의 목적이라는 거예요.
이 시험은 성도에게만 유효한 겁니다. 성도만 그걸 알아요. 이 인생과 역사에 보편적 시험을 구체적으로 받아 내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누가복음 4장1절 보세요.
눅 4:1 –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시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 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된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마귀가 전부 구약의 성경을 들고 예수님을 시험하죠? 성령이 충만하게 되신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요 성령 받은 성도가 성령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교회로 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의 시험장이지 여기서 무슨 작은 나라, 작은 세상을 만들어서 행복하게 사는 곳이 아니예요. 마귀새끼는 여기 있다니까요. 절에 안 가 있어요.마귀가 왜 절에 가 있어요? 성경의 수신자는 교회, 성도라니까요. 마귀는 성도에게만 유효한 거예요. 성령과 함께 이 역사라는 광야에 내려오게 되는 성도의 모습을 지금 예수님이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십 일 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거고, 광야 사십 년 예수님이 주리셨다 라는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신명기 8장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오지요? 주리게 하심은,,이렇게. 신명기 8장의 내용, 그것이 여기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은 불합격으로 결론 났죠? 이게 율법의 종국이예요. 그런데 여기는 예수님이 합격, 하신단 말예요.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해요.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건 마귀가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들이대고 있는 거예요. 요건 예수님의 능력을 전제하고 예수님에게만 준 시험이 아니라 우리에게 공히 주어지는 시험이란 말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시험을 우리의 대표로 받아 내시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예요. 돌로 떡을 만드는 게. 가능하냐구요? 그럼 무슨 다른 의미가 있을 거 아니예요.
성경은 예수님을 뜨인 돌, 산 돌, 모퉁이 돌,거치는 돌 이렇게 돌로 묘사를 해요. 그 돌, 반석이신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떡이 되어 죽으셔서 우리에게 떡으로 먹여지는 게 십자가죠? 마귀가 그 십자가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축약해서 성경의 전체를 축약해서, 예수님께 들이대는 거예요. 돌로 떡이 되게 만드는 거. 맞는 이야기잖아요 이거? 근데 누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이게 중요해요. 목적지를 살짝 바꾸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시험이란 말예요. 계시록 2장 17절 보세요.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들 이라고 해요, 여러분이예요, 교회,교회,교회 교회 이렇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췄던 만나를 주어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감추었던 만나, 즉 흰 돌이란 뜻이예요. 그러니까 흰 돌이 감추었던 만나예요. 만나의 진짜 의미가 역사 내내 감추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이 돌이, 흰 돌이신 예수, 감추어졌던 만나. 성도가 마지막 자리에서 그 흰 돌의 의미를 깨닫는단 말예요. 이거였구나! 만나는 감추어져 있었던 거구나! 요렇게. 이 역사라는 광야 교회를 끝까지 견디고 묵시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감추었던 만나, 감추어진 그 떡과 돌이 주어진 다는 말예요. 여기서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이 카이로, 동격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있단 말예요. 따라서 흰 돌은 당연히 감추었던 만나, 예수 그리스도란 말예요.
보시다시피 예수라는 돌은 이 세상에 떡으로, 만나로 내려오게 되는데 감추어진 만나로 내려오게 된다는 말예요. 그 예수라는 돌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떡이 되어 당신의 백성들에게 먹히는 게 복음이잖아요. 십자가란 말예요. 그런데 마귀가 그 말씀, 십자가를 들고 예수를 시험하고 있어요. 어디에서 ? 교회에서요. ‘ 교회들에게’ 그러잖아요. 교회에서. 십자가 예수 이야기 한다고 다 교회 아니란 얘기예요. 그런데 어떻게 시험해요? 그 복음을, 그 말씀을 너를 위해 써라. 너를 위해 써라. 그걸 에너지로 삼아서 네가 달려봐라 예요. 그게 떡이예요. 거기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그건 복음은 사람의 역사 속 생존이나 그들의 영생 만들기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떡으로 제공되는 게 아니라 창조의 말씀인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라는 뜻이예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떡으로 시간을 달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여러번 찾아서 읽은 갈라디아서 2장20절이 바로 그 말씀이예요. 우리는 복음을 에너지 삼아 , 떡 삼아 우리의 업적과 공로와 성숙을 이루어 내는 걸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내고 증명하는 삶,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잖아요.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만나를 우리를 위하여의 도구로 사용한 거에요.그러니까 만족스럽지도 않아요. 늘 애굽의 떡 보다 결국 아닌 걸로 보이죠. WHAT IS THIS? Nothing! 이게 만나의 의미 잖아요. 그래서 다 죽은 거예요.
떡이, 만나가 주어지지 않은 게 아니예요. 주어져요. 복음이, 말씀이 떨어진다니까요. 그런데 이게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간을 위해서 사용될 때 고게 마귀의 시험이예요. 그래서 거짓 선지자, 적 그리스도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기독교가 그리스도교 잖아요. 기독교 자체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요. 두 번째 시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어요. 누가복음에는 마귀에게 절하라는 시험이 두 번째로 나와있지만 그 순서는 뭐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성전에서 땅으로 뛰어 내려왔다라는 걸 알고 있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왜 벌써 오셨나이까?’ 귀신이 이야기 한다니까요. 마귀는 알아요. 하늘의 성전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뛰어 내린 분이 예수라는 걸 마귀는 알아요. 그게 Incanation, 성육신이고 십자가 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수종을 들어서 그의 죽음을 막을 거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신분이 증명 될 거 아니냐? 너를 증명하라죠? 십자가를 갖고 말씀을 갖고 너를 증명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하늘 성전에서 육신을 입고 뛰어내리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냥 죽어버렸어요. 천사가 발을 안 받쳐줬어요.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기 위해 성전에서 밀은 게 아니라 내려가서 떨어져 죽으라고 밀은 거예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신앙생활, 성경지식 이런 걸 갖고도 안되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성전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게 성경의 전체 내용이예요. 성육신, Incanation, 십자가란 말예요. 그런데 마귀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목적지가 달라요. 역사 속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자기의 보람과 자랑을 위해서 자기 실현과 자아확장의 생존본능을 따라 복음을 사용하라죠. 사용하라, 그거를 너를 자랑하는 데에 사용하라 잖아요.그죠?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아니라는 거예요.
세번 째 시험이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넘겨주겠다는 시험이예요. 여기서 절하다,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예배하다, 입맞추다, 연합의 단어예요. 하나가 되다. 그래서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이 아들과 연합되지 않고 하나가 되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예요. 예수께서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놋뱀으로 죽으시는, 마귀가 되어 죽으시는 거예요, 이거는요. 예수님이 마귀라는 게 아니라 마귀인 우리 대신에 마귀가 되셔서 죽으신 거예요. 그걸 마귀가 그대로 읊어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목적을 이 역사 속의 천하 만국의 권세와 영광으로 살짝 바꾸어 내고 있는 거예요. 민속 메시아 사상이잖아요. 역사 속에서의 우리가 좋아하는 나라. 그걸 영생이라 그래요. 인간들은.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다 줄테니까 십자가를 그걸 위해 사용하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귀가 쓴 그 단어를 그대로 인용하셔서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라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말씀안으로들어가는 거지, 우리의 유익, 나의 천국, 나의 구원을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게 아니예요.
잘 보세요. 마귀가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예수를 시험해요.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하와를 미혹하는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니? 이렇게.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한다니까요. 절에 가서 중들 시험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왜 중을 찾아 가냐구요?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지를 살짝만 바꿔요. 그 말씀을 너를위해 써라. 네가 하나님 처럼 되는 데에 사용하라.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광야 인생을 통하여 당신의 신분을 증명하거나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걸 합격이라 그랬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갖고 변화된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느냐구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예요. 왜 그걸 목적으로 삼냐구요. 기독교의 목적이 그게 아니라니까요.
시험에 통과한 예수는 이 세상이 실패자라고 낙인찍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온 세상이 다 칭찬해주는 성도가 되재요. 아무도 예수를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예수를 칭찬하지 않았어요.그냥 돌이 떡이 되어서, 하늘 성전에서 땅으로 뛰어 내려서 십자가에서 놋뱀이 되어 죽었어요. 그게 역사 속 예수의 모습이예요. 그리고 그 가시적 모습으로 역사가 예수를 평가했어요. 실패자!!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관점에서는 예수는 실패자일 뿐이예요.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하나님 아들됨을 증며아지도 못했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돕고 계신다라는 그런 증거도 내놓지 못했으며,(이게 다 마귀의 시험이었어요) 저주의 놋뱀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렸어요. 마귀에게 경배하여 지는 모습이예요, 이거는요. 역사 속에서.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분을 하나님 나라의 왕, 즉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인 그 교회의 원형으로 제시하신 거예요. 예수를 머리로 한 내 백성. 이게 예수예요. 교회라구요. 이것이.
성도가 이 역사 속에서 바로 그 시험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얼마동안 떠났다는 어구가 나오죠? 거기에 쓰인 얼마동안 이라는 단어가 카이로스, 정해진 때까지 일정한 짧은 어느 시간동안. 그러면 얼마동안 떠나면 곧 돌아온다는 얘기죠? 어디로 돌아와요? 십자가 이후에 탄생되는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리고 똑같은 시험을 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요 세가지 시험 밖에 안 받아요. 다른 시험 없어요. 모든 시험이 요 세가지 시험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4장의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에피소드 바로 밑에 귀신 들린 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귀신이 돌아와요. 그리고는 구원받는 어떤 자를 시험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4장 31절 보세요.
눅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인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으며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이렇게 얘기해요. 마귀가. 안다구요)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떤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이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그 이야기를 갖고 베레아 사람들이 귀신 쫒아 내면 넘어뜨리는 거예요. 이건 그 넘어뜨린다는 단어 아니예요. 그 사람들한테 좀 가르쳐 주세요. 막 넘어뜨리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시험을 다 받으시고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세요. 갈릴리는 히브리어 가릴에서 온 단어로, 돌고 돌다 예요. 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다.이런 뜻이예요. 그리고 가버나움은 히브리어 카파르나흠에서 나온 단어인데 카파르가 성전을 가리키고 나흠이 자기자신을 위로하는 이란 뜻이예요. 쉽게 풀어쓰면 자기자신을 위로하는 성전, 그러니까 갈릴리 가버나움은 자기자신을 위로하는 성전, 나를 위한 성전, 구약의 성전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이 쉬지 않고 되풀이 되고 있는 그러한 구약의 성전, 이게 갈리리 가버나움이예요.
이 성경의 일차 수신자인 히브리사람들은 갈리리 가버나움 하면 쉽게 그러한 개념을 떠올렸단 말예요. 거기에다가 그곳은 회당이었어요. 회당은 원 성전에 못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하는 곳이예요. 교회예요, 교회. 그리고 그날은 이스라엘의 안식이었다 그래요. 이걸 다 종합해보면 갈릴리 가버나움의 안식일, 회당은 하나님의 안식을 오해하여, 복음이 주는 하나님의 안식을 오해하여 자신들을 위로할 성전을 추구하며 그 율법의 루틴을 살고 있는 인간세상, 즉 가짜 교회가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마귀가 말씀을 사용하여 오해시키려 했던 내용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걸 당시 회당이 그대로 담고 있었단 말예요. 거기에 귀신들린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죠? 그 장소가 회당이란 말예요. 다른 곳도 아니고. 귀신들린 사람은 회당에 못 들어와요. 아니, 회당 뿐만 아니라 동네 안으로도 못 들어와요. 유대인들이 어
떤 사람들인데 회다에 귀신들린 사람을 들여요? 당시에는 귀신들린 사람은 마을 밖으로 격리되어 살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버젓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당안에 귀신들린 자가 있는 거예요. 말이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히 회당안에 귀신들려 미친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의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는 치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거예요. 거기에서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푸뉴마 아카달토스예요.푸뉴마는 성령입니다. 성령에게 쓰이는 단어가 왜 귀신들린 자에게 쓰였을까요?
푸튜마 아카달토스, 아카달토스는 불결한, 더러운 왜곡된 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왜곡된 성령, 더러운 성령이예요. 그런 성령이 있을 수 있어요? 왜곡된 성령, 더러운 성령이 있을 수 있냐구요? 그렇다면 더럽고 왜곡된 성령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읽었을까요? 요한복음 6장 63절 보세요.
요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로고스) 말이 영이요,(푸튜마)생명이다
그래요. 여기 보면 육과 영이 대조되고 있어요. 성령과 마귀가 대조되는 거죠? 여기서 육은 역사와 인생을 아울러 총칭하는 개념이고 푸뉴마, 영, 이건 성령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령을 로고스, 말씀이라도고 부르시고생명이라고도 부르신단 말예요. 성령을. 그러니까 진짜 성령은 예수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거고 그 예수가 바로 생명이란 뜻이예요. 그렇다면 푸뉴마 아카달토스, 더러운 성령, 왜곡된 성령은 무얼 가리킬까요? 단순히 귀신들린 사람, 으로 그들이 인식했을까요? 아니요. 예수에게로 인도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로 이끌어가는 왜곡된 더러운 말씀. 말씀의 흉내를 내는 더러운 말씀을 푸튜마 아카달토스, 그걸 귀신들린 사람으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안의, 회당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 귀신들린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너희들이 다 그런 사람이더라를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사람들은 그러한 더러운 말, 왜곡된 말을 가진 자를 귀신들린 자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누가가 푸뉴마 아카달토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거예요.
지금 누가는 회당안의 모든 인간들을 다 싸잡아서 푸뉴마 아카달토스라고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광야시험 이후에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 그러니까 이 귀신들린 자의 에피소드 바로 위에 고기도 회당이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사람이예요. 내가 내 백성, 거기서 고향이라고 번역된 그 단어가 나라라는 뜻이예요. 원래가. 자기백성, 자기나라에 갔는데 그들이 그 말씀을 안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그 광야의 시험 그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 바로 뒤에 귀신들린 자, 회당 안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가 젹혀 있단 말예요. 이건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거라구요 이게. 그러니까 이 귀신들린 자의 에피소드 바로 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예수님의 고향사람들, 예수님의 나라 사람들이 등장하고, 고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 마귀다, 마귀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는 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예수님의 시험 바로 다음에 요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두 에피소드를 통해서 귀신들린 자, 마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거예요.
만나가 떨어지는데, 여전히 주리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보게된다는 뜻이예요. 예수님의 광야시험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의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으로 가셔서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나와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갈릴리 가버나움의 회당에는 더럽고 왜곡된 말, 푸뉴마 아카달토스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나사렛의 회당에서는 진짜 말씀,진짜 영, 진짜 예수님께서 푸뉴마를 전한다구요. 진짜 푸뉴마를 전한다구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니까. 이 대조를 잘 보시란 말예요. 한쪽에서는 마귀, 더러운 말,왜곡된 말이 등장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진짜 로고스, 진짜 푸뉴마가 등장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 들어가셔서 묶이고 갇힌 자들이 은혜에 의해서 자유를 얻게 되는 이사야서의 그 희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이게 복음이다!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때가 되면 7년, 완료 거든요. 7이라는 숫자는 언약, 약속의 단어이고 창조의 수 예요. 쉐마, 약속, 언약이라는 단어가 원래 7번 말하다 라는 뜻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언약, 약속에 의해 너희들은 자유롭게 해방되는 거지 너희들이 뭐가 잘 나서가 아니다. 그죠? 종들이 뭘 잘하건 못 하건 희년이면, 때가 이르면 약속에 의해 풀려나는 희년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랬더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세요. 누가복음 4장 23절
눅4: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말씀을 자기들의 역사 속 세상 살이에 유익을 위한 것으로 곡해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걸 위해 기적도 병행하여 보여달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바로 앞의 그 마귀의 시험과 동일한 내용이죠? 복음은 이런 거를 갖다 주는 거야 이렇게. 마귀가 의도했던 반응이 정확하게 사람에게서 나오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반응과 정반대의 반응이 나오고 있단 말예요 여기서. 그래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 바로 밑에 이게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말씀이 떨어지자 그 말씀으로 나를 유익하게 하라 라는 반응이 일어나잖아요. 그때 주님께서 엘리야와 엘이사 이야기를 해주세요. 누가복음 4장25절 보세요.
눅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혀
(세 헤 여섯 달은 삼 년 반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몇 년? 삼 년 반. 한 때,두 때, 반 때, 여자, 하나님의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 받는 시간, 이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한 때, 두 때, 반 때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 삼 년 반. 삼 년 반 하늘이 닫혀 기근이 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말씀이, 만나가 왔는데 기근이 일어나서 그들이 말씀을 못 먹었다니까요. 그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지금. )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과부라는 건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날의 과부와는 달라요 당시의 과부는.)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율법주의, 이스라엘 안에 있는 과부, 문둥이는 단 한 사람도 나음을 못 받아요, 못 먹는다는 뜻이예요. 떡을, 예수를 자기행위 때문에, 제사를 지키기 위해. 그런데 그 이스라엘 예루살렘 밖의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자인지를 알고 ‘떡 주세요’ 그러더라는 거예요. 율법주의 밖에 있는 자들이. 먼저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 돌리고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리는, 화목하게 하는 이란 뜻이예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게 엘리야라 그러죠? 누구예요? 정확하게는? 예수예요. 엘리야는 예수의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삶을 쫓아서 작은 예수로 살게 되는 이들이 다 엘리야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요한 그를 엘리야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 처럼 참수되어 죽어요. 세상왕의 죄됨을 고발하고 죽는 거예요. 예수의 모형이란 말예요. 그것이. 그거는 또 요셉에게서 나타나죠? 다른 형들의 죄를 고발하는 장자로, (이건 또 다음시간에 알려드릴게요).
자, 요 엘리야 시대에, 그러니까 예수의 시대로 라고 하시면 되요. 삼 년 반 동안 닫혀 흉년이 들어요. 기근입니다. 진짜 하늘의 떡이신 예수가 공생에 삼 년 반 동안 이 역사 속에 계셨는데 이 역사가 그 떡을 못알아 볼뿐만이 아니라 먹지도 않아. 기근입니다. 어느누구도 그 떡을 못 알아봤어요. 요한복음1장 10절을 보세요.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이게 선지가가 고향에서 배척받는 다라는 그 이야기 인거예요.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 가면 늘 배척받게 된다라는 요런 보편적 공식이 아니라 그럼 저는 평택 가면 거기서는 말씀도 못 전하는 거예요? 그런 얘기 아니란 말이예요. 여기에 보면 분명 자기 땅, 자기 백성 이란 말이 나와요. 그런데 그들도 세상과 함께 말씀을 못 알아보더라는 거예요. 자기 땅, 자기 백성인데. 이게 아모스서에 나오는 말씀의 기갈, 기근이라는 거예요. 세상은, 이 역사는 절대 말씀을 못 알아봐요. 그리고 자기들이 갖고 있는 율법이라는 왜곡된 말씀으로 진짜 말씀이신 예수를 때려죽이게 되어있어요. 이게 마귀라는 거예요. 진짜 말씀이신 예수를 믿으라고 율법을 주었더니, 예수님 절대 의존의 상태로 돌아오라고 율법을 줬더니 그 율법 자체를 말씀으로 곡해해서 그들의 왜곡된 말씀으로 진짜 말씀을 때려죽이는 게 교회의 일이예요. 그래서 회당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 일이.
이 엘리야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열왕기상 17장.
왕상17:9 -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여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삼 년 반의 기근을 주세요. 다 굶어 죽을 판이예요 이제. 죽는 거예요, 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명령을 하는 거예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 그래요. 히브리어로 시돈은 사람을 낚다 라는 말이고, 사르밧은 제련하다, 연단하다 라는 뜻이예요. 이 어구를 직역하면 시돈을 위하여 사르밧하라 예요. 직역하면, 시돈을 위하여. 그러면 무슨 말이예요? 사람을 낚아 올리기 위해 제련하러 가라 는 뜻이예요. 이게 삼 년 반의 기근 동안에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삼 년 반이란 말이예요. 한 때,두 때, 반 때. 율법주의의 본산인 이스라엘은 지금 기근으로 다 굶어죽을 판이예요. 그런데 자기들이 굶어 죽을 거라는 걸 몰라요 이스라엘이. 진짜 기근이 들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너무 행위에, 무화과 나무 잎사귀가 풍성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들에게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래서 기근인데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율법주의인 이스라엘은 절대로 말씀이신 예수를 못 받아들이게 되어있어요. 창조의 주, 그 분을 못 받아들이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밖에 황폐한 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서 과부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직역을 하면 황폐한 집, 빈 집 이예요.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지는 멸망 당하는 빈 집. 황폐한 집.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과 대조되는 개념인거예요. 화려한 성전, 화려한 집인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진짜 먹을 게 없는 황폐한 집, 빈 집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과부는 결핍이예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기부인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한 줌의 밀가루도 생산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 줌 남은 밀가루로 떡을 해 먹고 죽어야 되겠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라고 스스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나는 이제 죽는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밀가루 한 줌인데 이거는 한 끼 밖에 안되는 거예요. 나는 이제 죽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를 이 여자가 지금 고백하는 거예요. 보세요 열왕기상 17장.
왕상17:11 – 저가 가지러 갈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데 네 속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가져오라 하니 저가 가로되 당신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떢이 없고 다만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가져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사람을 낚으러 온 하나님의 사람이 무얼 요구해요? 마지막 남은 그 밀가루도 갖고 와! 다 뺏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한 기근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 완전한 기근. 갖고 와. 그랬더니 이 집에, 다른 집은 다 삼 년 반 동안 기근인데 이 집은 양식이 끊이지 않는 풍년이. 이 집에는 퍼도 나오고, 퍼도 나오고, 요 대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다 뺏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의 생명, 풍성한 하늘의 생명을 받는 자는 역사 속에서 몽땅 뺏긴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너무 풍성한 자기 것을 갖고 있었어요. 요 여자만 다 뺏겼어요. 요건 야곱, 즉 이스라엘의 때에 그들을 기근으로 굶어 죽게 만들어서 애굽으로 보내어 결국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해내셔서 만나를 풍성히 내리시는 출애굽의 이야기를 다시 작은 에피소드로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예요. 이게요.
성경은 다 구원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밖에 없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굶주림,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시간과 생명을 모으고 쌓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아! 난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이 맞구나 ! 이제 내 에너지로 살던 삶은 밀가루 한 줌 밖에 남지 않은 바닥의 삶입니다. 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요 고백을 하게 하는 고 진짜 굶주림의 삶은 복된 굶주림의 삶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흉년을 그 굶주림을 매가스라는 단어를 써서 큰 흉년이라고 개역 성경은 번역했지만 위대한 흉년이란 뜻이예요. 거룩한 흉년, 위대한 흉년, 위대한 기근, 구원을 위한 흉년, 구원을 위한 굶주림. 아, 나는 아닌 거구나.
이렇게 나는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는 결핍의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이 터지자 과부의 집에 풍년이 들었어요. 퍼내고 퍼내도 밀가루 그릇이 가득차는 기적, 요걸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까지 털어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치지 않는 축복을 허락하리라고 사기치는,,,예수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건. 십자가를 설명하는 걸 갖고 사람들 등 쳐먹는 거니까. 고게 마귀라니까요. 요게 하늘의 양식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보세요,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은 정작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고, 황폐한 집, 빈 집에서 가진 거 다 뺏긴 과부는 영원히 그치지 않는 양식을 받아요.
그런데 그러한 하늘 백성들의 이 역사 속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아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과부가 낳은 육적 자손이 죽어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보낸 그가 생기를 불어 넣은 새 아들이 살아오는 거예요. 이게 모리아 산에서 이삭, 자기가 낳은 육적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그가 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살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내놓는, 떡으로 내 놓는 모든 행위를 부정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하나님이 살려 주는 새로운 후손, 예수로 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다고 말씀 하신 건 이스라엘도 결국 황폐한 집, 빈 집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자인식은 사렙다 과부와 많이 달랐던 거란 말입니다. 그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존속할 힘도 없는 자들이었어요.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자기들의 힘으로 제사와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의 생명, 그 시간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구요. 아니요, 하나님은 그 시간이 낳은 후손을 죽인다니까요.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을 죽여요.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나는 새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말씀이신 예수를 받아 들일 수가 없는 자는 죽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예루살렘 거민으로 살고 계세요, 그 떡으로 에너지 삼아서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라고 그렇게 떡으로, 예루살렘 거민으로 살고 계세요, 아니면 황폐한 집, 빈 집,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오늘이라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과부로 살고 계세요? 여러분의 자인식이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지금. 가능성, 인간의 자존심, 여전히 붙들고 계세요? 그게 마귀예요. 푸뉴마 아카달토스, 가짜 성령. 가짜 말씀.
마찬가지에요. 나아만의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다 그러죠? 이스라엘이 문둥병자다, 는 뜻이예요. 그런데 아무도 안 오더라는 거예요. 왜? 자기가 문둥병자인지 아는 놈이 하나도 없더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잘 하고 있었거든요.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고 있었거든요. 하나도 안 오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밖에 아람이라는 나라에서 이방인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와요. 왜? 나는 문둥병자 맞다! 그러니 나아야 된다라는 인식이 요 사람에게만 있는 거예요. 이가 은혜 받은 자예요. 나아만은 아람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하죠? 그런데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 왕은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죠? 그랬더니 옷을 찢으면서 ‘못 고치는데!’ 그래요. 율법주의를 예수님이 조롱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왕이 문둥병자가 하나 왔는데 ‘우리는 못 고치는데’, 그랬다니까요.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 엘리사가 개입을 하죠? 왕궁 밖의 엘리사가 멀리 서서 말씀을 던져요. 뭐라구? 요단, 흐르다는 뜻이죠? 요단에 들어가 일곱 번 담궈라.일곱 번이 무슨 수? 언약, 약속의 수예요. 너는 말씀에 의해 언약에 의해 깨끗해 질 수 있다라는 걸 이 나아만이 알아 듣는 거예요. 어떻게? 믿음으로 ! 구원 받는 이야기예요. 내가 문둥병자 맞습니다.라는 그 자, 그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 안에서 구원 받는 거. 이게 엘리사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엘리야 이야기, 엘리사 이야기를 이스라엘 회당에서,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붙들고 있는 그들에게 해 버렸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취급했겠냐구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마귀, 더러운, 무뉴마 아카달토스, 가짜 말이 진짜 말, 복음이 떨어지자 어떻게 충돌이 일어나는라를 보여주는 거란 말예요. 자기들은 지금 제사와 율법으로 구원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열심으로 다른 이방 사람들과의 구별과 분리와 차단막을 만들어 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너는 지금 기근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고쳐낼 수 없는 문둥병자들이다, 라고 한 거예요. 그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고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되요? 그러면 나좀 고쳐주세요. 나좀 배부르게 먹여 주세요. 라고 해야 되지요? 어떻게 했어요?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밀어버릴려고. 이게 마귀라는 거예요. 누가복음4장 28절 보세요.
눅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 까지, 이 동네가
( 누가가 지금 얘기하는 거예요) 산 위의 동네다 라고 하죠? 히브리사람에게 있어서 산 위의 동네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래서 등불을 켜서 높이 올리면 산 위에 있는 마을이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라는 말이 빛이신 예수가 확 비취면 살짝 자기를 위장하고 있던 율법주의로 위장하고 있던 예루살렘,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요 산위의 동네가 여기에 나오는 거예요)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루살렘, 율법주의, 그들이 성전이죠? 거기가 성전이 있던 자리잖아요, 구약의 성전. 거기서 밀어버리려고 해요, 나가라는 거예요. 우리 포도원에 너 같은 돌은 필요없어 그리고 계속 하나님이 모퉁이 돌로 준 걸 포도원 밖으로 내보내는 거죠? 히브리 사람들은 선악과를 그려보세요 그러면 포도를 그립니다 여러분. 우린느 복숭아나 사과를 그리지만. 그래서 포도원 밖이라는 건 율법주의 바까으로 계속 던져버리는 거예요. 선악과 밖으로 던져 버리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 포도밭이 그렇게 자주 나오는 거예요. 28절을 보면 회당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이걸 듣고 분이 가득했다 라고 하는데 이건 단순히 화났다는 뜻이 아니예요. 거기에서 ‘이것’이 지칭하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거든요.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에 떨어지자 분이 가득했다는 건데 이 ‘분이 가득’ 했다는 어구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에플레쓰 떼싼 판테스 띠무 거든요. 에플레쓰 테싼은 성취되다, 완성되다 는 뜻이고 띠무는 열정, 욕심이라는 단어예요. 그런데 어떤 열정인가 하면 희생 제사를 지키는 열정이예요.
헬라어 디무쓰가 두씨에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건데 이 두씨에 라는 단어가 희생 제사예요. 분리하다, 희생 제사, 깨다 그러니까 진리를 둘로 깨버리는 것, 이게 희생 제사예요. 진리는 하나란 말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항상 깨죠? 분리를 만들어서 차등, 상급 이런 걸 이야기 하는 게 인간들이란 말예요. 왜?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은 가치 있으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약속인데 그래서 약속을 깨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약속을 깨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 복음이 떨어지게 되면 회개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행위, 즉 희생 제사를 지키고자 하는 아담들의 욕망과 열정이 오히려 확고해지더라 예요. 요걸 분을내다, 라고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희생 제사, 자기들이 율법, 행위를 지키려고 하는 인간들의 열정, 노력이 더욱더 확고해지더라 , 성취되더라, 완성되더라 이런 뜻이예요. 진짜 말씀이 떨어지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저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밀어 떨어트려버리려는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 위의 동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죽는 모습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못 죽여요. 아직 십자가 지실 때가 안됐거든요. 그날이 안식일이었어요. 왜 그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데리고 갔는데 못 죽였을까요?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걸을 수 있는 숫자가 있었어요.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끌고 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밀면 되는데 다온거예요. 인제. 못 죽인거예요.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로 갔다, 그러는데 이게 제 길로 가셨다, 은혜의 길로. 율법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 끝까지 제길로 가시더라. 잘 보세요. 예수라는 참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자들은 살아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회당안의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율법, 희생제사를 지키려는 욕망을 더욱더 확고하게 붙들어 버려요.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나요 그럼?
예수님께서 산 위의 동네,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떠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져요. 그게 성전에서 뛰어내려라의 마귀의 시험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산 위의 동네, 성전에서 뛰어내리신 예수가 자기를 밀어버린 자들을 살려 내는 걸 구원이라고 해요. 나를 위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원수를 위해 떨어지는 게 복음이라구요. 마찬가지예요. 말씀은 여러분을 증명하는 게 아니예요. 다른 이를 살리는 거예요. 그렇게 회당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진짜 말씀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이 귀신들린 자라는 걸 설명하는 게 바로 뒤에 이어지는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 안의 귀신들린 자들인 거예요.
바로 위의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된다는 의미에서 돌고도는 이라는 의미의 갈릴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갈릴리. 돌로도는 그 성전의 이야기, 인간들을 위한 그 빌어먹을 성전의 이야기가 또 반복된다가 갈리리 카퍼르나훔 , 갈리리 가버나움. 제가 조금 전에 귀신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 아카달토스 가 직역을 하면 더러운 말 , 왜곡된 말, 더러운 영, 왜곡된 영이라 그랬어요. 그 더러운 말, 왜곡된 말의 정체가 뭔지 한번 잘 보세요. 누가복음 4장 34절
눅4: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에 마귀가 하는 말이 나와요. 이 마귀의 말이 더러운 말이요, 왜곡된 말입니다. 요게. 요게 푸뉴마 아카달토스예요. 마귀의 말 그 자체가. 마귀가 예수님을 뭐라고 불러요? 나사렛 예수여! 라고 불러요.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나사렛 예수예요. 여러분도 기도할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잘 하시잖아요. 마귀도 나사렛 예수여 . 거기에다가 감탄사까지 붙여요. 아! 나사렛 예수여~. 감탄까지 해요. 개역성경이 그건 또 잘 번역해놨어요. 아! 나사렛 예수여 ~. 아름다운 이여! 자기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래요.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구별된 자 라고 불러요. 여기서 나사렛 예수가 호격으로 씌였어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호격으로 쓰이지 않아요. 항상 일반 명사로 쓰이는 데 호격은 고유명사거든요. 고유명사라는 건 그냥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이름이예요. 진의를 알지 못하는 나사렛 예수, 너서렛 예수는 뭐냐하면, 나사렛이라는 게 나실인이잖아요. 구별된 자, 예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나사렛 예수인데 그걸 모르고 그냥 나사렛 예수라고 호격으로 부르는 게 마귀의 말이라는 거예요.
예수를 불러요.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데 그 진의를 모르고 하는 거, 요게 마귀의 말,,푸뉴마 아카달토스란 말입니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이 마귀가 진짜 알았으면 아이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마귀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이 라면 하나님 잘 오셨어요, 저를 구원해주세요, 그래야 되는데 마귀는 뭐라그래요? 항상 ? 나를 떠나소서 그런단 말예요. 귀신은 백 프로 나를 떠나소서 그래요. 복음서에 나오는 귀신들 보세요. 다 나를 떠나소서 그래요. 왜 나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를 떠나소서. 마치 가인처럼 자신들의 희생 제사를 지키기 위해 하벨, 아벨로 오신 예수를 대척하고 죽이는 그런 모습인 거예요. 나를 떠나세요, 우리 희생 제사 지켜야 되거든요. 이런 이야기 예요. 연결을 해서 이해를 하시란 말예요. 그것이 마귀의 말이란 말예요.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율법주의를 멸하러 온 거예요. 그래서 귀신이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그러는 거예요.
그날이 어떤 날이었어요? 안식일. 안식일은 일을 그만두다, 일을 그치다 라는 뜻이예요. 일을 그치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에 앉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걸 ‘안식’ 이라 그래요. 제자리에 앉아서 존재가 제 역할을 하는 것. 인간들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6일 째 마지막에 만들어지고 안식으로 바로 들어간 거예요. 눈을 떴더니. 고게 안식이란 말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그건 그냥 선물을 풍성히 받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런데 그 안식일에 이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 자기 생명 지키기의 일. 종교행위를 . 그 때 예수님이 안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진짜 안식이 뭔지를 .요게 회당안에서 늘 충돌되는 이야기란 뜻이예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회당안의 그 인간들에게 너희들의 짐을 내려놓고 너희들의 생명 만들기의 프로잭트를 그만 그치고 나를 믿어 안식하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에 반하여 자기들의 희생 제사와 율법을 수호하겠다고 오해려 예수님을 성전에서 밀어버려 버리는 이게 귀신 이예요, 이게 마귀란 말예요. 이게 푸뉴마 아카달토스, 거짓 영, 거짓 말씀인 거예요. 오늘 본문 10절 한번 보세요.
롬5: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묵시속 현실이죠?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묵시의 현실이 실제화, Actuallizing 하여 나타나게 된단 말예요. 그래서 살으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다시 들어오시는 거란 말예요. 그리고 무얼 증명해내겠어요? 성령이? 그 진짜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행위 아니고 제사 아니고 예수, 말씀이야 요걸 증명해내겠지요? 진짜 말씀이. 푸뉴마 아카달토스 말고 진짜 푸뉴마는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찬송하고 말씀에게 영광을 돌릴 거 아니예요. 그 일을 성령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살으심에 의하여 여러분은 반드시 산다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예수를, 예수만 의존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옛 사람이, 역사 속의 내가 부정 되고 부인 되어야 되니까 이게 환란으로 오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걸 분명히 알고 이게 하나님의 저주라고 오해하지 말고 너희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배려라고 알아 먹으라는 게 바로 이 10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가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죠? 그 단어는 아나크라죠 인데 항상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몰라보는 자들이 소리지르는 소리였어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인데 못 알아 보고 유령이다! 이렇게 소리질렀죠? 그때 쓰인 단어가 아나크라죠, 귀신의 소리예요. 이게. 예수님이 계신데 예수님의 진의를 모르는 거. 만나가, 말씀이 떨어지는데 말씀의 진의 를 모르는 거. 예수님을 앞에다 두고 바라바를 살려 주세요! 바라바,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예요, 그를 놓아 주세요 라고 외쳤을 때 그 단어도 아나크라죠. 마귀들의 외침이예요. 죽여라, 죽여라. 예수를 죽여라. 우리의 율법 희생 제사를 지키기 위해 저는 죽어야 한다.
누가는 34절과 35절에서 재미있는 word play를 합니다. 둘 다 로고스, 레고라는 단어로 시작해요. 그런데 한 쪽은 하나님의 로고스, 그리고 한 쪽은 마귀의 로고스,홀로고스, 그러니까 로고스, 말씀이라고 해서 다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푸뉴마 아카달토스, 가짜 로고스가 나오고 진짜 로고스, 말씀이신 푸뉴마, 예수가 등장하여 대조되어 설명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성경말씀을 얼마나 유의하여 조심하여 읽어야 되겠습니까? 양의 모습으로 온다니까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온다니까요.
그렇게 예수님의 꾸중으로 푸뉴마 아카달토스, 귀신이, 말이, 거짓말이 이제 떠나가요. 여기서 넘어뜨렸다 이 단어는 이렇게 내려놨다, 라는 뜻이에요.거짓말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내려놓더라 예요. 안수해서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귀신 쫓아낸다구.내려놓았다. 누가복음 4장 36절 보세요.
눅4:36 –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이뇨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게 말씀이라 그러죠? 그런데 권세와 능력이 있는 말씀이예요. 여기서 권세, 엑소시아는 ‘자유’ 예요. ‘능력’, 자유. 그러니까 권세와 자유, 이게 뭐냐하면 사람들을 자유케하는 능력이 있는 말씀이 ‘진짜 로고스’ 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이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의 말에는 권세가 있다 그랬을 때 이게 ‘엑소시아’예요.‘ 자유가 있네?’ 그것만 예수의 말씀이예요. 그런데 말은 말이예요. 로고스인데 성경말씀인데 요걸 떡으로 삼아서 자기들의 제사,행위 요걸 지키려고 하게 만드는 거 요게 가짜 로고스란 말이예요. ‘가짜 ‘떡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 ‘엑소시아’ 자유케 하는 능력 없는 그냥 말씀이 교회라는 사람에게 떨어지면 어떻게 들리겠어요? 이게.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짐을 얹겠죠? 요것도 해야되고 저것도 해야되고 이렇게 짐을 얹는 거. 요게 마귀의 말이란 뜻이예요.
여러분 마귀를 상징하는 짐승이 뱀 입니다. 그 뱀 이라는 단어가 원래 나하쉬인데 이게 말이 없음이란 뜻이예요. 말이 없대요. 그런데 뱀이 정말 말이 없어요? 뱀은 정말 말 못하죠? 진짜는.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말은 말을 해요. 창세기 3장 4절 보세요.
창3:4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하죠? 그런데 말이 없다, 이 뱀이라는 단어를 왜 마귀의 대표로 썼을까요? 진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왜곡하여 인간들을 위하여 그들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말이 뱀의 말, 마귀의 말이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뱀, 마귀, 나하쉬. 그래서 계시록으로 가면 뱀, 용이, 마귀가 입에서 물을 막 쏟아내요. 가짜 홍수, 가짜 해갈. 계시록 12잘 14절 보세요.
계12:14 – 그 여자가( 여자는 예수를 낳은 교회예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저가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 삼 년 반이죠, 또 나오죠? 여자는, 교회. 광야에 가서, 교회에서) 여자의 뒤에서 그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 (왜? 기근이니까, 먹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가짜 물이예요)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그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
아니라는 거예요. 성도는 그 말로 해갈을 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기근, 여전히 굶주림에 처해지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를 붙들게 되는 거예요. 마귀들은? 요 가짜 말로 해갈을 하여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풍성한 삶, 풍요한 삶을 추구하여 인간의 존재성, 가치성, 존엄성, 자존심 다 챙겨가면서. 성경이 여러분 얼마나 일관성이 있습니까?
계12:17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자 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예수의 증거, 곧 믿음의 증거를 가진 자. 히브리서 11장에서 그들이 다 어떻게 되었다? 죽었다 ! 말예요. 어디서 ? 광야에서. 삼 년 반 동안.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여러분을 계속 시험하게 놔두세요 하나님이. 그리고는 거기에 지게, 당하게 놔둔다니까요. 그리고는 예수께로 가게 해요. 성도는. 역사 전채가 그리로 가요. 그런데 성도만 예수를 붙들고. 마귀는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일뿐이예요. 마귀는 하나님과의 전쟁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가랴서나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마귀가 항상 손을 조아리고 하나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전쟁하는 놈이 거기서 그렇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한시적으로 쓰는 자예요. 하나님 나라에는 없어요. 그래서 마귀가 마지막에 멸망, 불못으로 들어간다라고 하는 거라구요.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거. 그런데 그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여러분안에 일차적으로 있어요. 고걸 멸해가는 게 역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앞에 있으면 항상 그들의 실체가 낱낱이 폭로가 돼죠? 욥에게 마귀가 내려가니까 처음에는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이름만 찬송 받으리라 그랬던 욥이 금방 악악 거리죠? 내가 뭘 잘못했다 그래요? 이렇게. 마귀가 내려가면 그렇게 실체를 폭로해 낸다구요. 스가랴서에 보면은 여호수아 앞에 마귀가 딱 서자마자 그가 더러운 옷을 입고있다 라는 게 폭로가 돼요. 그런데 그 마귀 앞에서 ,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잔치상을 베풀어 버려요. 옷 벗겨, 새 옷 입혀라 ! 이거예요.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우면서 내가 더러운 옷 입고 있는, 똥걸레 입고 있는 죄인 맞습니다, 이거 폭로당하고 가는 거예요. 거기에 열심이 나올 수도 있고, 성숙이 나올 수도 있고, 변화가 나올 수도 있는 거지 그 자체가 기독교인의 목적이 아니란 말예요.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 보세요.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가에서 자해를 하면서 살죠? 마태복음에만 두 사람이예요. 왜?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거니까 율법의 이야기 두 증인, 이건 확실하다, 귀신도 아주 그냥 확실하게 인정해주는, 확증하는 거다, 라는 의미에서 두 귀신이예요. 딴 데는 하나예요. 그런거 같고 시비 걸지 마시라고. 귀신이 무덤가에서,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놈은 죽은 거다, 귀신 들린 자다. 막 자해를 하고 있어요. 살긴 살아요. 열심히 사는데 결국 그게 자기를 옭죄고 자해하는 삶이더라는 거예요. 이게 시간 속에서 인간들의 생명 쌓기의 모습인 거예요. 귀신 들린 자, 그런데 재밌는 건 그 귀신이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우리를 떠나세요~ 그래요. 왜 벌써 왔어요? 떠나세요. 누가복음 4장의 그 귀신하고 똑같은 말을 해요. 그리고 기도도 합니다. 귀신이 뭐라고 기도해요 예수님에게? 우리를 나가게 하여 돼지 떼 에게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마귀의 기도를 예수님이 들어 주세요. 이해가 가세요? 마귀의 기도를 예수가 들어주신다니까요. 왜 들어줘야 되냐구요 그거를?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여러분 돼지 떼는 이스라엘 이 부정한 짐승으로 쳐서 쳐다보지도 않던 짐승이예요. 귀신 들린자, 거라사 광인, 거라사 사람들, 돼지떼 이건 정확하게 같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거예요. 세상의 불의한 재물, 그게 힘이었잖아요, 그들의 힘. 그 재물인 돼지 떼를 힘 삼아 사는 자들. 그건 부정한 돼지들이예요 그게. 그래서 탕자가 돼지들하고 쥐염열매 다툼을 하는 거예요. 돼지들, 그들은 세상의 돼지로 자신의 생존을 영위하려고 하죠? 2 천 마리면 당신에 큰 도시의 인구가 삼 천명 밖에 안됐는데 작은 마을에서 2천 마리 돼지 떼면은 어마어마한 힘이예요 이게. 그러니까 이 돼지 떼를 자기들의 힘을 삼아 자기들의 생존을 영위하려고 하는 거, 그들이 바로 귀신 들린자, 마귀 라는 말이예요. 그런데 자기들이 마귀인 줄 모르죠? 귀신 들린자는 무덤 속에 적이 있는 자라 그래요. 자기들은 아닌 줄 알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폭로를 시켜요. 어떻게? 귀신을 시켜서.
너, 저들이 힘으로, 생명으로 삼고 있는 그거 안에 들어가서 없애버려라! 그렇게 한다구요. 욥기에 나오는 사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욥에게 가서 그가 갖고 있는 돼지 떼를 전부 몰살 시켜버리죠. 그랬더니 그의 실체가 폭로됐잖아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것들이 자기들은 귀신 아니라구, 마귀 아니라구 위장하며 잘 살고 있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것, 결국엔 돼지에 불과한 그거, 그걸 귀신 시켜서 시험하시는 거예요. 싹 몰수 시켜서. 다 물에 빠트려 죽여버렸더니 금방 이들이 뭐라 그래요? 예수님에게. 우리를 떠나소서 그러죠? 뭐라 그래요? 요놈들이 귀신이었단 말예요. 다른 사람 얘기 할 거 없어요. 우리 얘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돼지 뗴를 요만큼이라도 손해 입게 하시면 우리는 금방 하나님, 도데체 나한테 왜 그러세요? 이렇게 나선다는 말예요.
그래서 마귀를 시켜 그 돼지를 물속에 빠트려 죽여야 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부인 이예요. 우리의 인생 속에서 , 성도의 인생 속에서 도 나타나요. 그런데 우리를 죽이면 안되니까 예수님이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으신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예요. 자기의 소유,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가치와 시간과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구축하려고 하는 자들이 사단의 시험을 받아 나도 마귀! 로 폭로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의 시간 속 삶인 거예요. 역사 속 삶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이 역사 속 인생은 내가 뱀 입니다, 라는 폭로와 함께 부정한 돼지로 바다에 빠져 죽는 시험의 장인 거예요. 그러한 고백이 있어야 예수의 도움을 구할 거 아닙니까? 귀신은 믿는 자들에게 보내져서 그들의 실체를, 그들 안에 있는 마귀를 폭로해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마귀 여기에 있었네 ? 그래서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는 거예요. 마귀란 뜻이. I am worst! 내가 마귀입니다. 야고보서로 한번 가보세요. 2장18절.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 아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자, 예수를 믿는 귀신들이 나와요. 그런데 어떤 자들이 귀신들, 믿는 귀신들이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래요. 그러니까 실천을 하지 않는 자들, 그런 자들은 다 귀신이다, 가 아니라 바로 그 위에 보시라구요.
약 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맞죠)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기근이 나오죠? 또 이 기근이 뭐겠어요? 왜 이것만 해야돼요? 그런데 왜 기근을 여기에다가 야고보 사도가 끌어다 쓰겠냐구요.)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들에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이게 무슨 행함이냐하면 기근 속에 들어가 있는 자에게 그의 기근이 해결되려면은 진짜 말씀이 떨어져야 되는데 진짜 말씀이 아닌 엉터리, 그들의 기근이 해결되지 않는 엉터리 말로 그들을 어줍지 않게 위로하려고 하는 거. 이게 푸튜마 아카달토스 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행함이라는 건 진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행함을 얘기하는 거예요.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준다는 건 그가 몸으로.삶으로 , 예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거예요. 그걸 행함이라 그래요. 그게 없는 걸 ‘귀신들의 믿음’ 이란 뜻이지 이 세상에서 뭘 행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다 가짜 믿음이다, 이거 아니라구요.
그러면 그 행함의 종류를 쭉 나열을 해야지 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거주는 것만 이야기 하느냐구요. 지금까지 이 성경의 일관성으로 봤을 때 이거 무슨 말이겠냐구요? 귀신, 말씀, 배고픔,기근, 다 연걸시켜 드렸잖아요. 진짜 예수라는 말씀으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다 귀신이예요. 마귀예요. 그래서요한계시록에 보면 적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를 마귀, 옛 뱀,용,사단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거짓 말씀을 전하는 거, 거짓 말씀을 살아내는 거. 이게 마귀예요. 무섭죠? 오늘날 교회가 마귀의 그 삶을 살아내고 있다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진짜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우리를 위해 우리를 드러내며 살고 싶어합니까? 우리를위해 ,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살죠? 솔직해 지자구요. 우리는 밖에 비만 와도 그 비가 온다라는 현상을 각자 자기에게 맞게 해석을 하는 사람이예요. 농사 짓는 사람은 아이고, 이제 땅이 비옥해 지겠네. 배 타는 사람은 아, 이거 어떻게 하지? 풍랑이 일어나면 어 떻게 하지? 비행기 타는 사람은 비행기 못 뜨면 어떻게 하지? 비 싫어 하는 사람, 비 좋아하는 사람. 보세요. 인간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해요. 성경이 이걸 죄라 그래요.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는 걸 죄라 그런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생각으로도 다 죄를 짓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6장에 가면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생각하는 것, 숨 쉬는 것도 날 위해 숨 쉬지 뭘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숨을 쉬어요? 그러니까 숨 쉬는 것도 죄예요. 그러면 우리가 고백 할 건 뭐겠냐구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폭포 아래로 지금 떠내려 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무슨 나의 명성과 성숙과 변화, 아니요, 살려 주세요!! 그래야지, 살려 주세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 그거~ . 그게 진짜 예수라는 떡을 먹은 자예요. 그런데 그 진짜 예수라는 떡을 먹는 이들은 예수를 진짜 떡이라고 이야기는 하는데 여전히 짱돌에 맞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왜 율법을 어긴 자들을 돌로 때려죽이는 지 아세요? 이사야서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보죠. 8장 14절.
사8: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임은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하여 거칠 것이요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이스라엘, 예루살렘이 율법주의죠? 그죠? 율법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은 예수를 이야기 하면 그 예수를 떡으로 삼아 열심히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기 때문에 그 율법, 돌에게 맞아죽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어긴 자들은 돌에 맞아 죽는 거예요. 칼로 찔러 죽이지 않고 돌로 때려죽이는 거.이게 거치는 돌로 되는 거예요.여러분에게 예수가 거치는 돌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반석 입니까? 반석이어야지요.우리 서머나 교회는 그거 배우자는 거예요.에스겔서는 또 오늘도 못하네. 다움주에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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