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53.잘 살고 못 산 것의 차이는...롬5;10,11

Hebrew 2023. 5. 31. 21:48

로마서 53번 말씀

[잘살고 못사는 것의 차이는]

본문 롬 5장 10-11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아멘.

이렇게 또 한 해가 갑니다. 작년 송구영신 예배드린 게 진짜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세월은 더 빨라지는 것 같아요. 눈 깜짝했는데 또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매년 이맘때쭘이면 사람들은 한 해를 반추해보면서 스스로 결산을 해보곤 하지요? 올 한 해는 얼마만큼 열심히 살았는지, 또 얼마만큼의 소득을 냈는지, 얼마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등등 저마다 자신의 부가가치나 감가상각의 양을 계산을 해서 환호를 하기도 하고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한 해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어떤 정치인의 말처럼 살림살이좀 나아지셨나요? 아니면 심히 고단한 한 해를 보내셨습니까? 바라던 것들을 다 이루고 행복해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갖고 있던 것도 다 털리고 허탈해하고 계십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공식은 없어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성도의 삶의 성공과 실패가 세상 사람들의 그 부가가치나 감사상각 계산에 의한 그 성패판단과 같을 수 있나요? 우리도 똑같은 것을 갖고 거기에 일희일비해야 맞아요? 성도도? 성도의 성공과 세상 사람들의 성공이 정말 같은 것일까?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고 자기자신의 성패를 판단하는 그런 우를 범해요. 성경은 오히려 인간자신의 가치쌓기와 힘 늘리기의 삶을 가리켜서 저주 받은 삶, 이라고 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은 흙에서 나온 사람과 흙 즉, 땅을 저주해버렸어요. 따라서 흙이 만들어 낸 이 흙에서의, 땅에서의 모든 결과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저주의 산물, 가시와 엉겅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이 저주 받은 땅에서 저주 받은 인간들이 상정해 놓은 가치라는 것과 힘이라는 것에 그 다소와 유무에따라 성공과 실패, 진보와 퇴보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리에서 자진 하차한 후에 (선악과 사건 이후에 그렇게 됐죠?), 자진 하차한 후에 스스로를 의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내고 발전 시키는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게 뭔줄 아세요? 그것이 연합, 우리가 하나되어, 힘을 합하여, 바벨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죠? 힘을 합하여, 연합하여 우리의 수를 늘이고 성공과 번영과 부흥을 꾀하자. 양적팽창. 쉬운 말로 생육과 번성입니다. 제가 전에 설명해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요구하신 생육과 번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창조사역, 그게 ‘파라’ 라는 단어거든요. ‘생육’ , 그게 결실이란 뜻이예요. 열매 맺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역에 그 완료, 이게 ’번성’ 이예요. ‘라바’가 완료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육과 번성을 해야하는 인간들이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생육과 번성에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게 이 역사 인거예요. 인간들은 아무리 서로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이 걸리게 되면요 너무나 쉽게 연합해버려요. 쉽게 보시죠? 여러분 주변에서 그리고 그 연합된 세력을 키우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요. 그리고 많은, 다수가 가는 길을 정의, 옳은 것, 참,이렇게 판단을 하죠. 민주주의나 뭐 이러게 다 그런 거 아니예요. 다수결의 원칙이나 뭐 이런 게. 인간들의 선행체계나 지식체계는요 전부 그러한 연합과 성장을 성공의 지표로 제시를 해요. 하나가 되자, 서로 사랑하자,성공하자, 번영하자 등등. 인간들의 가치향상에 노력과 번성의 열매맺기가 이 역사의 유일한 목적이예요.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까지도 한 해를 결산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근거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피조물들의 그 저주속 몸부림에 불과한 거예요. 이렇게 연합하여 흥왕하겠다는 이 역사 속 아담들. 그 죄인들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가 ‘다그’ 라는 단어예요. ‘다그’ 이 ‘다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다가’와 ’다아그’ 이 두단어가 조합되어서 생성된 단어인데요 그 의미는 물고기 라는 단어 입니다. 물고기. 그러니까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물고기, ‘다그’ 라는 단어는 ‘다가’와 ‘다아그’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가 되어진단 말예요. 그러니까 히브리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을 때와 우리가 성경을 읽었을 때 많이 그 이해의 폭이 다르겠죠, 그죠? 그래서 이제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제가.

히브리어 ‘다가’는 알을 낳다, 수가 많아지다, 그러니까 알을 낳아서 새끼를 번식하는 것들은 한 번에 왕창 낳죠? 그죠? 그러니까 ‘다가’는 알을 낳다, 수가 많아지다, 다산하다 이런 뜻이예요. 물고기 안에 이런 뜻이 들어 있단 말예요. 물고기들도 굉장히 많이 알을 낳죠? 여러분. 그 인본의 시각에서 의 생육과 번성이죠? ‘다가’란 단어 자체가. 그리고 ‘다아그’는 두려워하다 , 근심하다, 슬퍼하다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고기 ‘다그’는 두려움,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산하여 수를 늘이다, 이런 뜻이 있어요. 물고기란 단어 자체 안에요.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은 물고기처럼 알을 낳는 란태생을, 알을 낳아 후손을 번식 시키는 걸 란태생이라 그러죠? 알 란자 예요. 그 란태생을 저주 받은 출생이라고 여기고 부정한 것이라고 그래요. 성경에도 나오죠. 그죠? 알에서 나오는 건.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동,생물은 전부 알에서 낳는다는 거 아세요? 포유류는 새끼를 낳는데요?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뱃속에서 그들이 양수 안에 들어가 있죠? 여러분 그게 알이예요. 그걸 란이라고 그래요. 그 양수가, 알이 터지면서 그 새끼가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구상의 모든 동,생물은 다 란태생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걸 부정하다, 그래요. 란태생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죠? 알로 낳은 걸 다시 태어나게 해야, 그걸 재창조라 해요. 다시 태어나게 해야 부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단 말예요. 그럼 이걸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세요. 알, 닭이 알을 낳죠? 부정한 거예요. 그 자체도 살아있는 겁니다. 죽은 거 아니죠? 그런데 암탉이 ‘라하프’ 품어 안아서 다시 한번 생명을 창조해 내죠? 요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모든 란태생은 다 부정하기 때문에 다시 낳아야 돼요. 어떻게 ? 날개에 품겨져서. 여러분 이 작은 예 하나에 구원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부정한 이스라엘, 어둠인 이스라엘에게, 그 란태생에게 이스라엘아 ! 내가 너희를 암탉이 새끼를 품에 품듯이 모으려고 한 게 한 두번이냐? 그렇게 그런거예요. 왜? 품어서, 부정한 자들을 예수가 날개로 품어서 새롭게 창조해야 구원에 이르거든요. 그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 보세요.

눅13:43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죠? 예수님이 품어 안아야 새롭게 창조 되는데 원치 않는 거예요. 나는 이미 존재인데 왜 내가 거듭 나야 돼? 이렇게. 나비를 생각해보세요. 애벌레가 고치, 알 속으로 들어가죠? 그런데 그 고치 자체는 애벌레 입장에서 보면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고치, 알이 깨지면서 나비로 부활하는 게 애벌레, 고치, 나비의 상관관계 잖아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이예요. 우리 인생 속에서 이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이예요. 암탉이 자기 새끼를 품으면 부화가 돼요. 그 단어가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에서의 그 ‘운행하다’ , ‘라하프’ 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뭐가 일어났어요? 창조가 일어났죠? 첫 째날, 이렇게. 그러니까 그 이야기예요. 부정한 거, 혼돈 공허 어둠, 수면 저주의 바다가 성령의 품에 이렇게 품겨지니까 ‘라하프’, 품겨지니까 창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게 알에서 나오는 그 부정한, 수가 많은 그 증가가 되는, 이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그런 부정한 이 역사 속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다시 품어져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되는 게 역사 속에서의 구원의 모습이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하나님이 날개로 덮어서 날개 위에 얹어서 구원해 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날개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옷자락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라고 그랬죠? 그런데 성경에서 옷자락으로 무어를 덮다, 그러면 뭐라 그랬어요? 신랑이 옷자락으로 신부를 덮으면 혼인이예요, 그게. 그죠? 그래서 룻기에 보면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그러죠? 결혼해주세요.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에요.

이 역사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은혜의 옷으로 신부에게 덮어서 그 부정한 신부를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끌어올리는가를 보여주는 거. 그게 이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물고기가 대비되구요 그 물고기가 상반되는 배와 그물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은 2011년에는 성경을 조금 더 깊이 보라고 제가 조금 깊은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그중 제가 하나만 보고 갈게요. 누가복음5장 1절 보세요.

눅5:1 –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씼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한즉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계속 두 배가 나와요)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아래 엎으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역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이에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이야기죠? 설교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죠? 이거 갖고. 물고기를 잡던 시몬에게 앞으로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고 물고기와 구원받는 사람을 대비하고 있어요. 네? 대조시키고 있단 말예요. 사람을 낚는다는 건 저주의 바다 속에서 자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그 물고기의 삶, 자기가치의 확장, 물고기, ‘다가’ 라는 단어 자체가 확장, 다수, 많아짐, 번성, 이런 뜻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물고기를, 물고기의 사람을 살고 있는 자를 건져 올려서 낚아 올리는 건 뭐예요? 물속에서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자를 낚아 올리는 건 뭐죠? 물고기 낚아 올리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죽여서 살리겠다는 뜻이예요. 산 자인척 하는 자를 낚아 올려서, 죽여서 반드시 살려내게 하겠다는 뜻이예요. 누구에게? 베드로에게.

성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거기서 시몬의 배가 나와요. 여러분, 시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시므온이란 단어에서 나온 건데, 시몬, 이 시몬은 광야, 사막이란 뜻이예요. 제가 전 시간에 성도에게 닥치는 기근, 기갈, 굶주림 이런 거에 대해서 설명해드렸죠? 그죠? 삼 년 반의 기근, 하늘이 닫힘, 이런거요. 거기에 생수이신 예수가 부어져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이런 설명을 해드렸잖아요. 그런데 시몬이란 이름 자체가 사막 광야란 말예요. 베드로는? 잘 아시죠? 페트라, 반석. 반석에선 뭐가 나와요? 생수가 나온단 말예요. 그러면 시몬 베드로라는 거 자체가 뭐예요? 광야, 사막이었던 자를, 광야 사막인 자들은 물이 없는 자,말씀이 없는 자들은 뭘 건져 올리는데 무얼 건져 올리느냐 하면 그 말씀, 하늘에서 떨어지느 만나로 엉터리,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확장과 자기 증명, 자아 실현, 이런 것들을 끌어 모으는 거예요. 열매로 맺는 거예요. 광야는, 시몬은. 그런데 베드로는 어때요? 생수가 쏟아지게 되면? 사람, 구원받는 자가 올라오는 거예요. 요 대조를 하는 거예요.

그 시몬이 밤새 물고리를 잡다가 한 마리도 못 잡고 그물을 씼고 있었어요. 이게 원래의, 원래의 이 세상 사람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엉터리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결론이예요 이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지막에는 벅벅 그물만 닦고 있는 거. 아무 소득도 없는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을 그대로 삶으로 다시 살고 갔다 라는 건 아시죠 그죠? 예수님은 구약을 부정하러 오신 게 아니라, 구약의 율법으로 예수를 설명해놨는데 못 알아 먹으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을 삶으로 살고 가신 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신약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소품들은 전부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유기적으로 봐야 된다라고 제가 말씀 드린 거예요. 그게 성경신학이란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따로 떨어트려 놓고 보면 안된단 말예요.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그 배라는 소품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설명이 완료가 돼죠?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어디에서 그 배라는 소품이 설명이 완료가 돼요? 요한계시록에 어떤 배가 나오잖아요. 계시록 18장 15절로 가보세요.

계 18: 15 –바벨론은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거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곳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에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여기에서 이 장사하는 배예요. 그런데 이거는 바벨론이라는 걸 여러분은 아시죠 그죠? 바벨론을 배라 그래요. 그리고는 이 배가 장사하는 배라 그러죠?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계시록에 보면) 사람의 영혼이 거래됐다는 걸 여러분이 아시죠? 영혼이 거래가 됐어요. 그들의 거래품목에 사람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니까요. 뭐겠어요? 역사 속에 던져진 가짜교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냥 세상만 이야기 하는 거 아니예요. 성경은 항상 성도와 성도인 척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세상사람들이 성경을 왜 봐요? 안 본다니까요. 성도인 척 하지만 말씀을 제대로 못 받아들이는 가짜들과 그 진의를 아는 자들에게 준 게 성경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 배는 뭐냐하면 사람의 영혼이 거래되는 그러나 장사하는 배, 예수님이 뭐라 그러죠? 옛 성전을 ? 너희는 여기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구나 ? 그러잖아요.

그러면 뭐겠어요? 구약의, 인본주의, 율법주의를, 그 깃발을 높이 든 구약의 옛 성전, 구약, 율법주의, 이것을 이 바벨론 이 장사하는 배, 이게 지금 함축하여 상징하고 있다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수 있겠죠? 장사라는 건 인간들이 자기의 노력과 수고를 들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거죠? 성전이 왜 ‘ 장사’하면 안되느냐 하면 성전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화 낸 거에요. 왜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냐구. 바로 이 바벨론이라는 인간들의 가치와 유익을 위한 그 배가 하나 등장하구요 성경에는. 그리고 노아의 방주가 상징하는 예수라는 두 배가 등장해요. 잘 이해하세요. 이 배가 시편에도 나와요. 시48편 7절보세요.

시48: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트리시도다 우리가 들은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

다시스의 배라는 게 나와요. 다시스의 배를 동풍으로 부순다 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동풍이라고 번역이 된 ‘ 카딤 르와흐’ 가, ‘르와흐’ 는 뭐예요? 성령이죠? 그런데 반대쪽의 영 이예요. ‘카딤 르와흐’, 그걸 동풍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제가 지난 시간에 이 영이라는 거 왜곡된 영, 더러운 영,반면에 참 된 영.이게 대조 된다고 그랬죠 성경에서? 그런데 왜곡된 영, 더러운 영은 때떼로 성경에서 귀신 마귀, 이렇게 번역이 된다고 그랬잖아요. 요한복음 6장 33절 보세요.

요6:3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자, 말씀이, 성령 푸뉴마, 르와흐예요, 프뉴마이고 생명,’조에’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오신 예수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라고 선언한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지금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거예요. 그렇다면 무익한 육은 뭐겠어요? 무익한 육, 살리는, 살려주는 그 말씀, 영과 반대되는 무익한 육, 말씀을 표피로만 육의 영역의 안목으로만 바라보는 거 그건 육이란 말예요. 육의 안목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모든 게 도덕과 윤리가 돼요. 그리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면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처세술로 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건 무익하다는 거예요. 살리는 건 진짜 말씀이라는 거예요. 영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이 영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거예요. 말씀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거란 말예요. 영이 곧 말씀이요 생명이라 그랬잖아요? 따라서 말씀은 예수로만 결론이 나야돼죠?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고 예수가 말씀이니까.

그러면 모든 말씀을 읽을 때 여러분이 거기에서 예수를 끄집어 낸다면 그게 뭐겠어요? 그리고 삶을 살면서 모든 게 다 아, 예수의 십자가 아니면 나는 존재도 아니야 하는 이 예수로 여러분의 삶이 결론이 난다면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이 말씀을 갖고 여러분이 뭐를 낳는 거에요? 예수를 낳는 거예요 그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통하여 도덕과 윤리나 아니면 여러분에게 강요된 어떤 규범, 아니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까에 대한 처세술 이런 거로 읽게 되면 그건 무익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생명이신 예수에 관해서만 기록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들이 성경에서 영생이 있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는데 나에게는 안 오는구나, 왜? 성경이 나에대해서 기록한 것인데 도데체 거기서 영생을 찾는다고 공부는 하는데 그리고 영생을 가졌다고 하는데 왜 나한테는 안 오냐라고 하는 거예요.이게 육의 안목으로 말씀을 보는 자들에게 하는 일갈인 거예요. 이거요. 다시 시편 48편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스의 배, 다시스의 배라는 뜻이 장사하는 배라는 뜻이에요. 그건 지명이 아니라. 장사하는 배예요, 다시스가. 그런데 재밌는게요 다시스의 배와 하나님의 성이 대조되고 있죠? 다시스의 배와 하나님의 성이 대조되고 있단 말예요. 하나님의 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가 그 하나님의 성, 그 성 안에 들어가서만 우리는 안전한 거거든요. 쉽게 말해서 새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라구요. 장사하는 배, 장사하는 성전, 즉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배는 반드시 멸망할 거고 하나님의 은혜의 배,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만이 저주의 바다 위에 오롯하게 뜨게 될 것이다 라는 그런 말이예요. 예수님께서 옛 성전에 들어가서 너희는 이곳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놨다 가 ‘다시스의 배’ 예요. 바벨론의 배. 그게 구약이란 말예요. 그게 계시록에 가서 멸망하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게 아니예요. 교회안에 다른 모양으로 있는 가짜를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멸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단순히 세상과 성도의 이야기를 그려 놓은 게 아니라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 기록을 해 놓은 거라고 보시면 돼요. 아무튼 성경에 등장하는 두 배는 구약과 신약을 상징한다고 보시면 돼요. 구약 안에 갇혀서 그 배 타면 죽어요. 예수라는 방주, 신약, 그 안에 은혜 안에 들어가야 산다는 보여주는 거란 말예요. 그걸 극명하게 대조해낸 게 요나서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구원의 말씀, 즉 복음을 갖고 구원의 말씀이예요, 살려내라고 말씀을 갖고 가라 그랬어요. 그러나 요나가 타고가는 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 제대로된 말씀이 실린 구원의 배여야 되는거예요. 그래야 가서 구원해 낼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해요? 저런 자격없는 자들을 왜 구원해요? 이게 뭐예요? 구약이죠? 그리고는 뭘 타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요. 그게 뭐예요? 장사하는 배 예요.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유익과 인간의 존재확장, 이런 거에 촛점을 둔 다시의 배 이걸 타는 거예요. 이거는 풍랑 맞아 망해야 되는거죠?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럼 다른 배, 말씀을 가진 진짜 살리는 배가 또 나와야 되잖아요. 요나가 그 배를 타고 등장하는 거예요. 어떻게 ? 하나님이 요나를 물 속에 집어 넣어서 스올에 빠트려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스올, 지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요나의 표적이라고 그러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요나가 죽으으로 말미암아 사흘 밤 낮을 스올, 지옥 속에 있다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도데체 구원 받을 이유가 없는 니느웨, 앗수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혓 바닥을 철사로 뚫어서 개구리처럼 질질 끌고 갔던 사람들이라고 그랬죠? 그 사람들과 풍랑에 파선해야 할 자들이 요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거예요.

이게 뭘 상징하는 거예요? 방주요. 노아의 방주. 제가 창세기때 설명해드렸잖아요. 너무오래돼서 잊어버리셨죠? 노아의 방주 요 두 배가 등장하는 거예요. 한 배는 다시스의 배, 장사하는 배, 저 놈들을 아무자격 없어요. 이거. 이게 맞는 거 같잖아요 세상에서 보면. 그런데 하난미이 아니라고그래요. 굳이 그를 빼서 죽여버리고 그가 자격없다 한 자들을 그 품에 넣어서 방주처럼, 그들을 살려내요. 그래서 니느웨가 회개하는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그걸 뭐 니느우가 그럼 다 구원받았나? 이런 걸 우리가 미루어 추측할 필요는 없어요. 하나님은 교회, 성도에게 그냥 뭔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일뿐이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어요? 요 두 배의 이야기에요, 요나서가그래서.

그러니까 인본의 배, 구약의 배는 사람을 죽이는 배고 은혜의 배, 구원의 배, 방주는 자격없는 사람을 그냥 은혜로 거저 살려내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랑인 거예요. 그래서 노아의 방주사건이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로 시작하는 거예요. 은혜의 방주예요. 노아가 자격이 있어서 탄 게 아니라. 두 배, 다시 누가복음으로 갑니다. 예수님 앞에 두 배가 놓여있어요.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 시몬의 배는 뭐라 그랬어요? 광야의 배, 사막의 배예요. 시몬의 배, 기갈의 배, 가뭄의 배에 올라 가십니다. 생수가 가뭄의 배에 올라가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시몬베드로에게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그래요. 물고기 잡아오라는 거겠죠? 그때 베드로가 뭐라 그러죠?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는데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요. 거기서 밤이 맞도록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모든 밤동안, 밤의 때에 이런 뜻이예요. 모든 밤, 단순히 하룻 밤의 얘기가 아니예요. ‘모~ 든밤’ 어두움의 시간,밤의 때에 수고 했다 그러죠? 그 수고라는 단어도, 부여된 수고, 부여된 노동이예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여된 수고 부여된 노동이 뭐죠? 율법이에요. 그래서 ‘코피아오’ 란 단어는 율법적 수고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밤의 때에 광야, 사막인 말씀이 없는 시몬이란 존재가 ‘코피아오’ 율법적 열심을 내놓았더니 아무것도 소득이 없더라는 뜻이예요. 아무것도소득이 없더라. 여러분 이건 단순히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해도 예수님이 명령하신 걸 그대로 순종하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는대, 이 얘기가 아니예요. 성경은 다 예수의 이야기라고 그랬잖아요. 그 상태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던지세요. 인간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가르쳐주기 위함이예요. 그 때는 아직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오시기 전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든 이해가 가면 안돼요. 그래서 제자들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 때 시몬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나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뭔가를 성공적으로 성취해내면 안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항상 말씀으로 오세요. 그리고 말씀을 하세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내면 안된다니까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아온 건 성령이 오시기 전에 베드로가고기를 많이 잡아 온건 우리보고 이렇게 해라 라고 교훈을 주기 위한 모델이 아니란 말이예요. 성령을 받기 전에 인간들이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어떤 실수를 해내는지 보라는 거예요. 오히려요.

여러분, 성경이 어려워요. 쉽지 않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린다니까요. 여러분 그럴거예요. 왜 그렇게 어렵게 하겠어? 누구나 다 읽어서 이해하게 하겠지.네가 틀린거야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외의 그 누구도 못알아 먹게 막았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이외에는 이해가 안가게 그냥 막아버려, 감춰버렸어요. 무스테리온으로 막아버렸다니까요. 절대로 누구나 다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안썼어요. 생명나무 실과는 화염검으로 막혀 있다니까요. 성도만 이해한단 말예요.

자,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데에 던져서 무엇을 건져올리라고 해요? 깊은 데라는 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곳이예요. 그런데 물고기가 그물 가득 올라오지요. 게다가 그물도 찢어져요. 조금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물고기, 그 ‘다그’ 는 연합과 다산과 증대로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고 가치를 자랑하려고 하는 율법 아래에서의 아담들을 상징한다 그랬어요. 이게 세상이예요. 요 물고기와 나중에 예수님이 넌 이거 말고 사람을 낚게 할거야 라고 사람, 구원받는 사람과 대조하는 걸 잊지 마시란 말예요. 이게 율법 아래에서의 아담들이란 말예요. 그 물고기가. ‘다그’가. 시몬은? 베드로, 물을 내는 반석이 되어서 사람을 살려야 되는데 시몬인 상태에서는 말씀을 가지고도 물고기만 낚아 올리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성경이 이상한 표현을 써요. 

개역성경이 시몬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졌다 그랬는데 그 ‘디알흐레소’라는 단어는 조각조각나서 깨지다 란 뜻이예요. 그물은 깨지지 않죠? 조각조각 부수어지다.하나가 아니고 조각조각 부수어지다.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성경이 온전히 예수로 이해되지 않고 조각조각 부수어져서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고 행동 강령이 되고 이래버리면 그게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거에요. 그물이 찢어졌다 라는 건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냥 그물이 터져버렸다는 뜻이 아니예요. 원어를 보면요. 조각조각, 그게 성경을 율법으로 보는 거예요. 성경, 율법은요 예수 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규례, 명령으로 만 보면 이게 신명기 28장이죠? ‘ 이 명령과 규례를,, ‘그러잖아요.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명령과 규례로 보면 율법은 조각 조각 조각 세분화 되는 거에요.그걸로는 물고기 밖에 건져 올릴 수 없어요. 아담 아래, 율법아래에서의 아담들. 잠언 12장 13절 보세요.

잠12:13- -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란에서 벗어나느니라

입술의 허물이 뭐예요? 잘못된 말이예요. 말, 잘못된 말씀, 그 말씀에 대한 이해는 인간들을 그물에 걸리게 한단 얘기예요.인간의 행위, 도덕과 윤리와 성숙의 강요로 축약되는 구약의 오도된 말씀, 그걸 떠올리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면 바로 그러한 그물에 걸리게 된단 말예요. 이사야서 19장 8절 보세요.

사 19: 8 – 어부들은 탄식하며 무릇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는 슬퍼하며 물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임이라

무의미한 수고로 그물을 던지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고기 하나도 못잡은 시몬의 모습. 그물을 계속 던지는데 아무것도 못잡는 거예요. 피곤할 것이라

전 9: 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역시 물고기와 그물이 등장하죠? 그런데 하나님이 던지신 그물도 있죠? 비유 공부할 때 살펴봤잖아요 .

마13: 47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여기에서 그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사게네’ 라는 단어는요, 장비하다, 장비를 갖추다,가구 란 뜻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이 성전에 비치되는 그 가구를 가리킬 때 ‘세게네’란 단어를 썼어요. 여러분, 성전의 그 가구, 성전의 기구들은 모두가 다 뭐였어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거였죠? 떡상,촛대,번제단 모든 게 다, 그죠? 그러니까 그건 눈에 보이는 복음, 말씀이란 말예요. 그 말씀, ‘세게네’ 에 걸려요. 걸리는데 좋은 고기, 나쁜 고기가 한꺼번에 걸려요. 그런데 나중에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말씀에 걸린 걸 요건 좋은고기, 요건 나쁜고기 이렇게 골라낸다 그랬어요. 자, 여기에 한 울타리에 같은 말씀을 듣는 이들이 이렇게 있어요. 그런데 이중에 가라지가 있고 알곡이 있다구요. 같이 걸리는데 하나님께서 나중에 골라내요. 어떤 자를 골라낼까요? 같은 설교를 듣고도, 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걸 인간들의 행위, 윤리,규범,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말씀을 나는 붙들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결국 가라지, 나쁜고기로 골라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저주의 그물에 걸린 거예요 이것이요.

왜? 하나님의 말씀은 똑같애요. 말씀은 던지는데 그물이예요. 그런데 엉뚱한 그물에 걸리는 자가 있다는 말이예요. 율법의 그물. 이게 나쁜고기란 말예요. 여러분. 그게 바로 조각난 그물, 찢어진 그물, 거기에 걸린 물고기란 말예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그물에 걸린 성도이고. 성도와 물고기가 대조가 되고 있는 거란 말예요. 율법 아래의 아담들. 다산과연합과 확장과 번영만을 꿈꾸는 자들. 이게 ‘다그’ 라고 그랬잖아요. 물고기. 잠언 18장7절 보세요.

잠18: 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에 그물이 되느니라

잠18: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미련한 자의 말, 엉터리 말을 갖고 있는 자도 어디로 들어가는데 그건 그물에 걸리는 거고,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견고한 망대로 달려가는 거예요. 견고한 망대. 참 성전인 예수 안. 망대, 예수 안. 보세요, 이렇게 그물과 진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말씀이 대조되고 있고, 엉터리 배, 노아의 방주인 예수라는 배 이렇게 대조되는 거예요. 하박국 1장 14절 보세요.

합1: 14—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물고기죠)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느니라

인간들은 모두, 성도도 이 세상에 올 때는 다 물고기로 오는 거예요 . 그죠? 선악과 입에 물고 오니까. 누구도 다. 우린 다 아담들로 오는 거 아니에요? 물고기로 오는 거예요. 그걸 그물로 잡는다는 뜻이예요. 그리고는 나쁜고기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버리고 거기에 걸려진 좋은고기만 하나님 나라로 끌고 올라간다는 그런 뜻이란 말예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5장의 그 시몬, 아직 베드로라는 이름도 받지 못한 시몬이 그 시몬의 배, 기근의 배, 갈증의 배로 잡은 물고기는 축복의 물고기예요, 저주의 물고기예요? 저주의 물고기란 말예요. 그래서 그 저주의 배가 바다에 빠지는 걸로 끝나는 거에요.누가복음 5장 7절 보세요.

눅5: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물이 조각조각 났어요. 어 이거 아니네? 왜 안 걸리지? 조각조각 나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을 하신 예수께 도와주세요 해야 되는데 또 다른 배, 장사하는 배죠 역시 그것도? 또 다른 배에 있는 동무에게 도움을 청해요. 이게 이스라엘의 역사였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일부러 바벨론에 종으로, 애굽에 종으로 보내면 이들은 꼭 다른 나라에 가서 원국을 청하죠?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보겠다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 보겠다는 거예요. 고건 안되는 거죠? 지금 시몬이 그걸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두 배가 모두 물에 잠겼다 라고 하는데 그건 고기가 너무 많아서 만선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그 ‘뿌띠조’ 라는 단어는 빠져서 갈아앉아 버렸다라는 뜻이거든요. 그 배가 바다에 빠져버리면 빠져서 갈아앉아 버리면 그건 끝이예요. 멸망이예요. 시몬은 고기 한 마리 못 건지고 그냥 나온 거예요.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뭐라 그래요 엎드려서? 내가 죄인입니다. 이게 끝이예요.

죄인의 결국이 그거인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똑같은 일이 있는데 그 때는 같이 있어요. 그리고 그 때는 이제 베드로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요. 내가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요. 베드로가 뭐가 어떻게 바뀐 게 아니라 십자가가 그를 그 Being의 문제 , Doing 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바꿔버린 거예요. 빠져버린 거예요. 잡긴 잡았어요.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빠져버렸어요. 멸망이예요.

이렇게 시몬에서 베드로로 환골탈태를 해가는 과정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예요. 시몬의 열매는 고작 물고기, 인본주의, 율법주의의 세상적 열매일 뿐이며 그것은 곧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사망의 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시작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는 엉터리 물고기나 잡는 시몬입니다 라는 고백에서 시작 되는 거예요. 거기서 시몬이 부름을 받는 거니까. 아, 나는 이런 놈이네요 ! 거기서 부터 시작되는 거란 뜻이예요. 거기서 부터 복을 받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물고기 왕창 잡게 해줬더니 야, 나에게 이런 복을 주는 분이야? 하고 따라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엉터리 물고기나 잡는 시몬, 광야, 사막이구나 그걸 알아야 생수이신 예수를 쫓게 되는 거예요. 우리 서머나 교회는 그거 하자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누가복음 5장 10절 보세요.

눅5: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보세요, 이 에피소드는 고기를 많이 잡은 게 복이다 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결론을 메세지로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추구를 부수어 내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게 아닌 예수를 전하게 하는 사람을 낚는 자로 만들어 내는 거, 그게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다 를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 해를 결산 하시면서 여러분의 재산이나 명성이나 보람등을 손익계산서 위에 올려 놓지 마세요. 화만 나요. 성도의 삶은 그런 존재의 부가가치를 향하여 매진 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아요. 성도는 오히려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삶에서 끌려 나와서 예수만을 의지하고 예수의 십자가만을 의존하는 망하는 자리, 부인되는 자리로 끌려 가는 삶인 거에요.

그래서 시몬이 가족과 그물을 다 차압 당하고, 거기서 고기 몇 마리 갖고 쫓아 갔어요? 아니, 배가 갈아 앉고 알몸으로 나왔다니까요. 모든 거 다 뺏기고 예수만 쫓아가요. 그게 올바른 성도의 삶이란 말예요. 그게 복이예요. 여러분은 올해 성공한 삶을 사셨어요, 실패한 삶을 사셨어요? 겉으로 보기엔 실패한 것 같죠? 살림살이가 안 나아졌단 말예요. 그러나 빼앗기고 털리고고난을 통과하는 삶을 사신 여러분이 성공한 거예요. 그게 진짜 성공이예요. 성도의 삶은 매 순간이 성공의 삶이예요. 매 순간이 승리의 삶이예요. 우리는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고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예요.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승리와 성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주어지게 된 것인지를 삶으로 확인하는 곳이 바로 이 인생이라는 광야란 말예요.

왜, 오병이어, 하늘의 만나를 설명하는 오병이어에 보리떡과 물고기가 등장하는지 이게 완결이 된 거예요 그죠? 보리떡은 뭐였죠? 간음한 여자, 부정한 여자가 제물로 드린 떡이에요. 그건 짐승이 먹던 거라고 그랬죠? 하나님 제가 짐승 맞습니다. 하나님 떠나 다른 남자와 간음한 그런 여자 맞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 맞습니다, 라고 드리는 게 보리떡이라구 그랬어요. 물고기는? 풍요와 다산과 자아 확장과 자아실현 만을 꿈꾸는 율법 아래의 아담들이 물고기라 그랬죠?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짐승이 먹는 더러운, 부정한, 간음한 자, 보리떡이 되시고 율법 아래의 아담 그 뱀이 되셔서 우리에게 먹힌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죽어서 우리에게 먹힌 거예요.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기독교는.

떡과 물고기를 얻어 내는 게 기독교가 아니라 그건 다 멸망되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보리떡과 물고기가 되어서 그걸 전부 죽여버리고, 여러분의 자아를 확장시키고 발전 시키고 성숙 시켜서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예수가 죽여야 사는 거예요, 여러분은요. 여러분이 고치 속에 들어가 죽어야 나비로 부활한다니까요. 애벌레가 아이고, 나 죽었네 ! 하는 순간 나비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공한 사람이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내셨어요? 성공한 거예요. 이 중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 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제일 성공하신 분들이예요.

힘들고 어려운 삶, 하나님께서 괜히 허락하신 거 아니란 말입니다. 절대로 그런 세상사람들이 성패의 근거로 붙들고 있는 그런 걸로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마세요. 그리고그걸로 슬퍼하거나 그걸로 좌절하거나 그까짖거 조금 얻어냈다고 기뻐 펄펄 뛰지 마세요. 우리는 얼마만큼 내가 예수를 의존하는 자가 되었는가, 나는 진짜 예수 없으면 안되는 자다, 라는 이 고백을 얼마나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는가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모세가 이 인생을 어떻게 정리했어요? 인생은 어떤 거다? 마지막으로 그것만 보죠. 시편 90편9절 보세요.

시 90: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모세가 정의한 성도의 인생이예요. 우리의 모든 날은 주의 분노, 뭐예요? 지옥의 백신. 지옥의 백신은 지옥이예요. 그러나 완전한 지옥이 아니라 조그만 지옥, 주의 분노라 그래요. 왜? 이렇게 살면 죽어 ! 이게 주의 분노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지옥이 오는 거예요. 인생은 그런 지옥의 백신, 주의 분노로 감지가 되어져야 맞아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수고과 슬픔으로 신속히 지나가는 게 맞아요. 아무리 기쁘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도 며칠 안 가잖아요. 그리고는 또 다른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또 닥치고 그렇게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이예요. 야곱의 고백 처럼.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내가 심히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그러니까 빨리 하나님께 가야지. 그 하나님과 함께 해야지.이 고백 하는 거예요. 그렇게 수고와 술픔뿐인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예수가 보이고 십자가가 보여요. 그들에게만 예수의 피가 소중하게만 느껴진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주판알 튕기면서 한 해를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성공했느니, 실패했느니 그러지 마세요. 보리떡에 부정한 물고기에 불과한 그 광야의 시몬들을 이렇게 말씀을 잘 이해하는 반석인 베드로로, 생수를 뿜어내는 베드로로,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한 것자체가 그 말씀의 전이자로 선 거예요 이미요. 그래서 사람을 낚는거예요. 그것이요. 그렇게 불러내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시면 돼요. 다른 거 없어요. 여러분은 성공하신 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