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66.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Hebrew 2023. 6. 1. 09:38
로마서 66번 말씀
제목
본문 롬 6 : 12 - 14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은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아멘.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에 의해서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말씀이 없는 껍데기 기독교였습니다.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을 했고 설교 말씀도 교황청에서 일괄 작성해서 각 교회로 보내주던 때였습니다. 그때 목회자는 참 편했겠어요. 설교 원고를 다 보내줬으니까. 그걸 그냥 라틴어로 줄줄 읽어주면 회중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앉아있었어요. 그게 예배였습니다. 자기나라 말로 된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성례에 참석해서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일상생활에서 내 탓이요.
를 외치면서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데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말씀을 알 길이 없으니 행위라도 내어놓아야 마음이 좀 편할 거 아닙니까? 당시 교회가 인간들의 행함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했는가 하면 인간들의 행함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질 만큼의 가치를 부여했어요. 심지어 그것으로 지옥에 가 있는 조상도 빼낼 수 있을 만큼의 인간의 행위는 가치 있게 취급됐습니다. 그게 면죄부 아닙니까? 그런데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보게 됐습니다. 그는 성경교사였으니까요. 그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는 의인은 그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난 겁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믿어야 성도인거지 선행을 행하고 종교행위에 열심을 부린다고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 사람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공제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오늘날 루터교는 아직도 공제설을 주장합니다) 화체설과 거의 흡사해요. 그거는 아니지만. 그냥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가 된다는 게 화체설 아닙니까?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그거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잖아요. 그리고 침례교인들을 무수하게 핍박했죠? 너희들 물 그렇게 좋아하면 물에서 죽어라. 그래서 천명 이상의 침례교인들을 수장시켜 버렸어요. 맷돌을 목에 걸어서. 장로교인들이요. 장로들이 주일날 순찰을 돌아 예배에 참속하지 않은 이들을 감옥에 처넣기도 했어요. 그걸 은혜라고 합니까?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500년 동안 기독교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루터와 칼빈은 예수를 대신하는 이들이 되었고, 성경을 곡해하고 오도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로 못하는 이들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이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성경 보다 기독교강요가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열리지만 칼빈이 쓴 책들은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그려진 그리스도 예수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말씀을 비판하고 진리를, 교리를 수정해가요.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라는 건 누구든지 다 알죠? 오늘날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한 번만이라도 읽어보면 다 아는 거 그까짓 거. 한 번 보자고요. 에베소서 2장 8-9.
엡 2 : 8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 9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명쾌하죠? 또 로마서 1장 17절.
롬 1 :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뭐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 건 뭡니까? 그냥 막연히 이 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예수라는 분이 내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내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새기고 이 뇌리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 놓으면 그게 믿는 겁니까? 어떻게 믿어야 돼요? 얘기 좀 해주세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왔는데도 왜 온 세상이 단 한 사람도 안 믿었을까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성경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고 부활했다고도 해요.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믿어야 하느냐는 거예요. 정말 여러분 그게 믿어지세요? 믿습니까? ㅎㅎ
칼빈이 이야기 했고, 루터가 이야기 했으니까 그냥 관념으로라도 그렇게 우기고 있으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주님은 분명히 복 있는 자는 애통할 것이다, 라고 했어요. 그죠? 애통이란 단어가 펜때오,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써요. 그리고 위로를 받다, 이게 파라칼레요가 초청받다 예요. 그러니까 유월절로 초청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예요. 그 말은 네가 유월절로 초청이 되어 양처럼 죽어야 복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 말은 유월절에 죽은 예수가 되어 봐야, 내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제물로 죽은 예수가 되어 봐야 그가 복 있는 자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에요. 그게 성도에게 위로래요. 성경이.
그렇다면 어린 양의 유월절은 우리가 관념으로 믿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가 그 유월절로 초청이 되어, 파라칼레요, 초청이 되어 도륙당해 죽어야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믿는다. 그래요. 그렇게 되면 다시는 내 삶 속에서 또 다른 희생 제사가 없어도 되죠? 나에게서 그게 확실히 체휼됐으니까. 이제는 또 다른 희생제사가 없어도 된단 말에요. 그런데 그건 세상 적으로 볼 때. 저주이지 복이 아니잖아요. 내가 제물이 돼서 죽는 게. 신약성경이 복이라고 번역을 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여러분이 잘 아는 히브리어 바라크를 번역한 거예요. 히브리의 복 바라크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가리키는 거예요.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 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리심 산에서 축복이 선언되고 에발산에서 저주가 선언이 되죠? 반씩 나누어서 이스라엘에게 그걸 외치라고 하는 게 이게 복이에요. 그 자체가. 그런데 그걸 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복이지만 그게 무슨 복이야? 라는 이들에게는 저주예요. 그래서 아까 우리 기도하신 집사님이 법은 하나인데 생명의 법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법이 되는 거예요. 법은 하나라니까요. 다른 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의 법이 되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생명의 법이 돼요.
아, 이 안에 예수가 있네? 진짜 희생제사가 여기에 들어있네? 이걸 알게 되는 거니까.
그게 복이에요. 바라크라는 단어가 그 전체를 함유하고 있어요. 그 바라크를 파자하면 베잍 로시 카프 거든요. 이게 알지 못하는 복이라는 단어에요. 아무도 못 알아 봐요. 그 복을.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알아져요. 이해가 돼요. 그 사람에게만 복이에요. 그걸 바라크라고 해요.
그런데 그 복의 실체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게 복이 돼요. 저주가 무엇인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아는 게 생명이라 그랬죠? 그걸 알면 다시는 선악과 안 먹을 거 아녜요? 그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거예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나무가 계속 단수예요. 단수, 단수, 단수.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악과가 먼저 주어졌던 거예요. 죽어서 사는 거. 따라서 복을 받은 이들은 저주의 현실부터 경험하여 복의 현실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라는 말을 들으시고 외우신다 해도 그게 여러분의 일이 되어 지지 않을 때 그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해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는 내 죽음의 인식에서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어요. 나에게 나의 죽음이 인식될 때 아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되는 거고 그 때, 예수와 내가 하나로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걸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부활이에요.
나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그 어떤 종류의 행위, 사유, 시도, 열정 등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멸할 것 중의 좋은 것, 지난 주 수요일에 살펴봤죠? 우리가 드리는 모든 좋은 건 다 마땅히 멸할 것 중의 어떤 것이었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옷, 이사야는 그걸 더러운 옷 그러죠? Filthy rack, 더러운 옷. 똥 걸레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거 보다 더 더러운 표현이에요. 그거는요. 우리 최선의 의가. 그렇대요. 그렇게 우리와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이 인식될 때, ‘나’가 죽는 거예요. 그게. ‘ 아니네?’ 그렇게 나가 죽게 될 때, 아, 그래서 이런 무력한 나 때문에, 이런 더러운 나 때문에 예수가 죽은 거구나, 라고 그게 사실로 와 닿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십자가가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 이해가 곧 살아나는 거고 그걸 믿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서의 나의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를 진리로 밝혀내는 거예요. 내가. 내가 이 땅에서 진리로 그걸 밝혀내지 않으면 내 삶속에서 그 삶이 일어나지 않고 나에 대한 용서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내가 그것과 아무상관 없는 자로 사는데 어떻게 그게 참이며 진리입니까? 그의 영향을 받아 내가 이 세상에서 어, 진짜 죽은 거네, 아니네, 라고 알아야 아, 그게 진짜구나 라고 알게 되는 거 아녜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그 진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예요. 이 자연이 전부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 진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이 다 거짓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이 자연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 하는 거예요. 왜? 내가 진리를 품고 있는데 이 인간들이 못 알아보니까. 진리가 나타나야 내가 진리가 되거든요. 이 자연이요. 하나님은 복음을 알아듣는 이들에 의해 ‘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너희들 왜 나를 자꾸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니? 라고 그렇게 외친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니까 그러한 이해도 설명도 없이 무조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문구를 외치고 다니거나 붙이고 다니는 건 자칫 잘못하면 아, 그렇게 해서 그 예수를 그냥 믿으면 되는 거야? 섬기면 복 주는 거야? 그걸 보고 어떤 이가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죽이는 거지 전도한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차에다가 함부로 그딴 소리 좀 붙이고 다니지 말아요.~. 그리고 아무나 보고 예수 믿으세요. 이딴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요. 그걸 다 설명해주세요. 그럴 거면. 예수 믿는 게 뭐냐고요. 도대체. 그러니까 그런 되지도 않은 인간들이 스님들이 지하철에서 시주하고 있으면 머리에다가 손 얹고 안수 하고 지랄들을 떠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그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냐고.
그 사람도 지금 나름대로 진리를 찾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불교는 구약이 끝이기 때문에 그게 안타까울 뿐이라고요. 그런데 거기에다 대 놓고 지가 뭘 안다고 안수를 하고 있냐고요? 심지어 명동에 나가면 십자가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보니까. 그리고 마이크는 어디서 구했는지 하나씩 다 들고 다니면서 뭐라고 얘기를 하는 건지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요. 그걸 전도라고 합니까? 사도 바울이 주 예수를 믿어! 그래야 구원을 얻어, 라고 이야기를 한 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을 해줄게 의 제목이었어요. 사도행전 16장 31절 보세요.
행 16 : 31 - 가로되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여기서 네 집도 성전이에요 너희 가족들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여기까지 설명을 해줘야 그게 믿는 거예요? 라고 그가 죽어요. 거기서. 그런데 달랑 주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희생제사 하세요, 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말씀을 전하자 로고스에 담아 레마를 전하자 그 간수가 목숨을 그냥 내 놔요. 자기가 지키던 죄수들이 도망갔는지 알고 자결하려고 그런다고 했죠? 그거는 그 사람들 놓치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 죄를 다 합쳐서 간수가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이 말씀을 듣더니 이 사람들을 씻겨서 집에 가서 밥까지 대접했어요.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거지요. 그리고는 기쁘게 보내줬다니까요. 육의 죽음이 일어나야 돼요.
그렇게 믿음이라는 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라는 존재에게서 먼저 경험이 되어져야 내거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십자가도 ‘진리’가 되는 거예요. ‘사실’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건요. 그냥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목수가 하나 그냥 와서 죽은 거. 그거 이상의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냥 관념일 뿐이에요. 믿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불안해서 마냥 섬기기만 하는 것입니다. 뭐라도 갔다 바쳐야 안심이 되고 자기 몸을 혹사시키기라도 해야 마음이 놓여요. 죽어라고 해요. 그걸 오늘 본문이 몸의 사욕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몸의 사욕, 그거 쫓아가지 마. 그 사욕이라는 단어가 에페뚜미아 라고 그랬어요. 에피뚜미아가 뚜미아, 두시아 희생제사예요. 거기에다가 에피라는 강세를 붙인 거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라는 어구에서의 순종하다, 라는 그 단어 히파포도 듣다, 라는 단어에요. 몸의 사욕을 좇아, 그러니까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건 인간들,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본능이에요. 하나님과 떨어졌기 때문에 뭐라고 해야 된다니까요. 인간은요. 스스로 하나님이 돼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율법적인 말로 듣지 말고 그걸 들어서 엉뚱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걸 들어 엉뚱하게 행하지 말아라. 이게 몸의 사욕을 듣지 말고, 순종하지 말고의 뜻이란 말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면 일단 모든 인간들이 자기 안의 마음, 선, 악으로 받아들여서 해야 돼? 말아야 돼? 이렇게 먼저 생각한다니까요. 그게 몸의 사욕을 좇지 말라, 에요 그것이요.
그리고는 이어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예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그 어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하면 너희의 그 지체, 그건 히브리어로 ‘제라’예요. 창세기에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 가 ‘제라’거든요. 남자의 측면, 한 쪽 부분, 부분. 지체 이런 뜻이죠. 그 너희의 지체를, 한 쪽을 불의의 갑옷으로 성립하게 하여 죄를 짓지 말고 의의 갑옷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 에요. 여기서 병기라고 번역이 된 호플론은 전쟁용 무기 중에 특히 갑옷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 호플론에다가 파스라는 단어를 붙이면 그게 모든, 전부 이런 뜻이거든요. 전신갑주라는 단어가 되는 거예요. 이 병기, 호플론에다가.
파노플라노가 에베소서 6장에 쓰인 전신갑주에요. 그러니까 옷이라는 거예요. 옷. 그러니까 엉뚱한 옷 입지 말고 진짜 옷 입어.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만든 더러운 그 에피뚜미아, 몸의 사욕, 더러운 옷, 그걸 죄로 성립시키지 말고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병기, 의의 갑옷을 입고 하나님께 병기로 드려라 이거는 옆에 서다, 라는 뜻이란 말에요. 의의 갑옷을 입고 하나님 우측에 서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완전무장이라는 거예요 절대 죄가 들어 올 틈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로 설명이 되는 거란 말에요. 파노플리아로. 그러니까 진리를 모르고는 절대 의의 갑옷, 의의 병기, 의의 옷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수시로 희생제사, 에피뚜미아, 몸의 사역으로 돌아가게 된단 말에요.
잘 보세요. 전신갑주의 가장 처음이 뭐예요? 처음에 나오는 거. 에베소서 6장에서. 진리의 띠죠? 성경들 좀 읽으라니까. 에베소서 6장 13절 보세요.
엡 6 : 13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이게 호플론에다가 파스를 붙인 거예요)
취하라 (입으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게 히스테미예요. 오늘 드려라와 같은 단어란 말에요. 거기에다가 파라, 옆에 라는 단어가 붙어갖고 그 단어가 된 거예요. 이게 히스테미에요.
-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 즉 서서,
똑 같은 단어에요. 드리라, 히스테미, 진리로 너의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이거 다 같은 말이에요. 여러분. 여기에서 띠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페리좀 인데요. 이 단어의 명사형이 페리데씨스에요. 이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파고르라는 단어거든요. 그 단어가 띠라는 단어에요. 띠. 그런데 그 띠라는 의미 보다는 갑옷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써요. 그러니까 이 전신갑주 파노폴리온, 갑옷은 그 진리의 띠라는 게 이렇게 함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맨 앞에 나오는 거예요.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가장 중요한 걸 항상 맨 앞에 두거든요. 그 띠, 진리의 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뭐 이런 게 다 진리에 관한 거잖아요. 복음의 이야기. 말의 이야기란 말에요. 의의 흉배 뭐 이런 거 다. 그런데 그 진리의 띠를, 이 띠를, 그 옷을 인간의 행함으로 바꿔버리면 이게 저주의 띠, 저주의 옷이 되어버려요. 창세기의 그 진리의 띠와 반대되는 저주의 띠가 나오는데 파고르가 어디에 나오는지 한 번 보잔 말에요. 창세기 3장 6절.
창 3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다, 에서 치마가 띠예요. 파고르. 여러분 아마존이나 이런 데 가면은 사람들이 밑에는 안 입어도요 띠는 다 하나씩 하고 있죠? 신기하지 않아요? 그것도 열두 개를 합니다. 기가 막히죠. 그래서 그 열두 개가 안 되면 부끄러운 거라고 해요. 아래는 다 벗었는데 띠 하나 모자라면 부끄럽다고 해요. 그 사람들은요. 띠에요. 띠. 엉터리 갑옷, 엉터리 옷 이라는 뜻이에요. 자신들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씨도 없는 가짜 열매, 무화과나무 안에 들어있는 열매 그거는 씨 아니라고 했어요. 수술 머리에요. 그거. 꽃이에요. 그거. 그런데 열매인척 하는 거. 그래서 성경이 그걸 갖가 쓴 거예요.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는데 열매인척 하는 걸 갖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게 인간의 행위잖아요. 고 이파리를 엮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진리의 띠를 해 입었어요. 하나님이 그것 찢어발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가죽으로 입히죠? 부끄러움을 가린단 말에요. 그 가죽이 뭘 상징하는 거예요? 성전을 덮은 게 가죽이란 말에요. 참 성전으로 입혀버리는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걸 이 아담과 하와가 입은 더러운 옷, 이걸 이사야가 말 그대로 더러운 옷, 그런 거예요. 그리고 스가랴서에도 더러운 옷 입은 자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 벗겨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스가랴서에 보면 그 더러운 옷 입은 자가 대제사장, 대제사장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입은 옷은 항상 에봇이 있으니까 제사를 지내면 소를 죽여서 피 반은 바닥에 뿌리고 반은 가지고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우슬초에다가 묻혀서 에봇에다가 반드시 발라야 돼요. 그런데 제사를 한두 번 드리느냐고. 피 범벅이 된 옷이 바로 그 옷이에요. 제사장의 옷. 예수님이 그걸 입고 있다, 라는 건 바로 그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그 대제사장이 되어 죽으러 왔다, 라는 의미에서 계시록에서 계속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의 왕으로써 그분이 나타날 땐 흰 옷을 입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은 그걸 벗겨버리세요. 그리고는 진짜 성전, 가죽으로 갈아입힌단 말에요. 그걸 세마포라고도 해요. 자신의 노력으로 입은 게 아니기 때문에 세마포에요. 에스겔서에 보면 그 제사장의 복식을 설명하는데 세마포로 짜라고 해요. 왜? 이유도 나오죠? 너희들 땀나면 안 되니까. 인간들이 땀을 흘려 하나님께 뭘 바치는 걸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거부하시는 거예요. 양털 옷으로 만들지 마. 왜? 땀나니까. 나는 너희들의 땀 냄새 맡기 싫어. 그랬다고요. 하나님이 입혀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세마포라고도 하는 거라고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전신갑주. 파노플리아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건 바로 창세기의 그 가짜 띠, 파고르 가짜 갑옷 고걸 겨냥한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이 불의의 병기, 의의 병기 이렇게 표현하는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다 같은 말이에요. 몸의 사욕, 불의의 병기.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 다. 율법. 다 하나를 가리키는 거예요. 비 진리.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옷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창세기에서의 그 무화과 잎사귀 옷과 가죽옷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가 또 옷 이야기예요.
여러분 히브리어로 ‘셋’ 이라는 게 옷 입다, 예요. 아벨과 셋의 이야기 나오잖아요. 가인과 아벨과 셋. 아담의 아들들이잖아요. 셋이라는 단어가 수트 알죠? 여러분. 영어의 Suit. 그 단어가 세트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옷을 입다, 그것도 정식으로 차려 입다. 어떻게? 아벨이라는 자는 이름이 그 자체가 하벨, 공허에요. 죽음이에요. 없음이에요. Nothingness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죽으러 온 자란 뜻이거든요. 이름 자체가. 그러니까 죽어야 돼요. 마땅히. 가인은? 고걸 죽여야 되는 자고. 아담의 대역이거든요. 그런데 가인이 만약에 고걸 죽이고 아,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사는 거야, 라고 진리로 알면 셋으로 옷 입고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걸 모르면 그냥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옷 입는 이야기예요. 역시 이것도.
그래서 성경에 보면 셋이란 이름을 뭐라고 설명을 하느냐 하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준 자라고 해요. 아벨의 옷을 입고 살아난 자. 라고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벨이 죽은 걸 전혀 슬퍼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너 왜 사람 죽였어? 라고 물어보지도 않으세요. 그냥 네 아우 어디 있니? 라고 물어보세요. 그 의미는 지금 네가 아벨이라는 죽으러 온 어떤 자를 죽였는데 네가 그 한 일을 그 내용이 뭔가를 아니? 라고 물은 거예요. 만약에 가인이 그 때, 아, 이게 그런 거였습니까? 아 저는 죽어 마땅한 자가 맞네요. 라고 나왔으면 그건 진리를 안 자가 되고 셋으로 살아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그런데 내가 동생 지키는 놈입니까? 라고 이야기한 건 몰랐다는 걸 상징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가인이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되는 거예요.
가인이 자기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죽였잖아요? 그게 살인이다, 를 설명해주기 위해, 희생제사 계속 가치 있게 드리려고 하는 그게 살인이다. 산상수훈 들었으면 이제 알잖아요? 고게 살인이다, 를 설명하기 위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그림을 성경에다 기록해 놓은 거란 말에요.
생각해 보십쇼. 예수는 아담들 때문에 죽은 거예요. 우리 때문에 죽은 거죠?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자들은 예수를 죽인 자들이 맞죠? 내가 예수 죽인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 예수를 죽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고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 죽인 거 자체를 하나님이 벌을 하신다면 누구도 구원하면 안 돼요. 누구도 구원하면 안 된다니까. 다 아들 죽인 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 행위를 보는 게 아니라 네가 한 그 일이 내가 뭘 설명하려고 했는지 알아? 이걸 물으신다니까요. 그래서 그걸 아는 걸 믿는다, 라고 하고 모르는 걸 살인이라고 한단 말에요. 포네요, 희생제사 계속 드리는 거. 도륙하는 거.
그러니까 그걸 모르면 계속 뭐 하겠어요? 계속 선악구조 아래에서 계속 희생제사 드리겠죠. 그게 살인이라고요. 가인이 한 일이란 말입니다. 가인이 쫓겨나서 제사 안 드렸는지 아세요? 더 열심히 제사지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가인의 후손들이 제사 안 지내요? 더 열심히 드린다니까요. 하나님이 그런데 그거 안 받으세요. 쉬운 말로 우리는 모두 다 가인이에요. 아벨을 죽인 가인. 그러나 내가 아벨 죽인 자 맞습니다. 하는 가인은 셋으로 살게 되지만 내가 언제 아벨 죽였습니까? 내가 그 아벨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 가인으로 죽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세요.
8 : 44 ‘저는 처음부터 살인 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다.’ 그래요. 갑자기 진리이야기로 이야기를 하신다니까요.
그게 살인이다. 이런다니까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자신의 제사만 의지하는 거예요. 자신을 위해 드려진 영단번의 제사를 알지 못하니까. 그게 율법주의에요. 그게 선악과 따 먹은 아담들의 본능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저 오지의 있는 사람들의 종교에서도 전부 희생제사가 있어요. 전부 제물을 죽여서 피를 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생래적으로 율법이 새겨져 있더란 거예요. 선악과 먹은 거예요. 그게. 그래서 바울도 이야기하잖아요.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마음이 율법이다! 다 희생제사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거 하지 마. 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그러니까 다 죽어야 된다니까요. 계속 도륙하고 있으니까. 아니, 생각해보세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전부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어요. 다 율법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그러니까 아담들은 그 율법에 의해 죽는 거예요.
그렇게 성도는 선악과, 옛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에 먼저 던져져요. 그걸 세상이라고도 하고 옛 사람, 옛 성전. 뭐 이렇게도 이야기 하지만 호 코스모스라고도 해요. 성경이 그걸 속옷 이라고 해요. 속옷. 그런데 그 속옷, 즉 선악과 옛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속옷이 진리의 겉옷, 전신갑주, 호풀론, 의의 병기가 되는 형국으로 진리가 설명이 되어져요. 성경에서. 지금부터 제가 그 의의 병기, 호풀론, 전신갑주, 파노플리아를 읽는 비결을 알려 드릴게요. 잘 오신 거예요. 어렵지 않아요. 잘 들어보세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옷이 항상 등장해요. 속옷, 더러운 옷과 그렇잖아요? 속옷은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늘 갈아입는 거예요. 그리고 겉옷, 호풀론, 밖의 것을 막아주는 호풀론, 병기로서의 옷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도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겉옷을 함께 주라, 라고 이야기했죠? 율법을 달라고 하는, 그걸 가르쳐달라고 하는, 로고스를 들으러 오는 자들이 있거든 겉옷으로 함께 줘야지 그것만 주면 소용없어. 라는 뜻이에요.
두 종류의 옷이에요. 그런데 속옷이 먼저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겉옷과 속옷을 다 입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속옷은 호지 않은 속옷이라고 적혀있죠? 구약에서는 그걸 반포속옷이라고 해요. 호지 않았다는 건 통짜로 하나라는 뜻이에요. 그건 제사장들이 입었던 옷이에요. 그리고 당시에 중상류 이상의 귀족들만 입었던 속옷을 예수님이 입고 계셨어요. 무슨 청빈, 청렴 이 따위 소리들 좀 하지 말아요. 기독교는 그런 거와 상관없다니까요. 가난하면 다 무슨 거룩한 줄 알아. 돈 벌어서 잘 사세요. 예수님도 귀족들 속옷 입고 있었다니까요. 호지 않은 제사장 속옷. 이음새가 없이 머리 위서부터 발끝 까지 전부 가린다, 고 하는 의미에서 호지 않은 속옷이에요. 제사장들은 겉옷 입지 않고 그 호지 않은 속옷만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만 겉옷을 그 위에 챙겨 입고 들어가서 죄 사함, 전체의 죄 사함 을 끌어낸 거예요. 그래서 속옷은 제사장들의 옷이에요. 출애굽기 28장 39절 보세요.
출 28 : 39 -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
이렇게 반포 속옷은 제사장들과 옛 성전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두 벌 옷 가져가지 마. 그런 거예요. 거기서 쓰인 말이 듀오 키토나스 두 벌 속옷 이예요. 옷 두벌 갖고 가지말로 한 벌만 갖고 가, 이런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내가 진리를 전하라고 보내는데 속옷만 두 개 갖고 가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겉옷도 갖고 가야지라는 의미에서 두 벌 속옷 가져가지 마. 그런 거지 옷 두 벌 갖고 가지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속옷을 두 벌 갖고 가게 되면 수퍼맨 옷차림 같은 거. 그러니까 스판 내복에 위에다가 팬티를 입은 그게 속옷 두 벌이에요. 그럼 바보죠 그거는. 그렇게 입고 가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속옷과 겉옷이 누구에게 어떤 모양으로 주어지는지 한 번 보세요. 요한복음 19장 23절.
요 19 : 23 -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옷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함을 응하려 함이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시편 22편에서 고대로 예언 된 거예요. 이거. 예수님의 겉옷. 히마티오는 예수 죽인 자들이 나누어 가져요. 네 조각으로.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섯 계명을 네 개로만 설명해주세요. 그리고 4 복음서 네 개이고 그리고 구약에도 4 복음서가 있어요. 창세기 빼고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가 복음을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요걸 원문에 맞게 설명을 하면 그의 겉옷을 취하여, 진리를 취하여 그 십자가가 뭔지를 진리로 취하여 그 네 부분으로 그들 안에 각각의 지체로 되게 했다. 이런 뜻이에요. 행간의 의미가. 단순히 옷을 나누어 가졌다 이런 뜻이 아니라. 거기 뭐 분깃이란 단어도 나오고 되게 했다, 성립 시켰다 요런 단어도 나오고 하는데 그냥 그거를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국어 학자들이 요렇게 그냥 감수해 놓은 거예요. 이건 하나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이고 있는 고 진리를, 성경에 보면 네 부분이란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 네 부분으로 예수 죽이는 자들이 취하니, 겉옷을 취하니 그 넷이 그들 안에서 각각의 분깃, 이게 각각 나눠가졌다. 이렇게 번역이 됐는데 각각의 분깃으로 성취되었다. 성취되더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율법인 속옷이 그들에게 어떻게 돼야 돼요? 찢어지고 나누어진 책들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야 되죠? 사랑으로. 아, 그게 그거였구나. 그래서 그 속옷은 나누지 않고 통째로 하나로 가져가는 거예요. 겉옷은 네 조각으로 찢어버린 다니까요. 그냥. 그런데 그게 그들 안에서 지체로 부분으로 그게 성립이 되니까. 성취가 되니까. 그들의 겉옷이 되니까. 속옷이 하나로 보이는 거예요. 아, 사랑. 아가페, 하나님. 이렇게 보이더라는 거죠. 나중에는 이해가 가실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이 입은 옷. 흰 옷도 전부 히바티오, 겉옷이에요. 신기하지 않아요? 겉옷이라고 씌여 있어요. 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도 겉옷.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다고 그러죠? 그것도 옷 가가 아니라 겉옷이란 뜻이에요. 겉옷. 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옷 술을 만졌다. 이것도 겉옷. 이란 뜻이에요. 옷 술이 아니라. 진리를 만지면, 진리와 접촉하면 다 살아나요. 겉옷.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눈이 부신 휘황찬란한 옷을 입으시죠? 그 옷도 겉옷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마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도 겉옷이에요. 그거 지키라는 거예요. 진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법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겉옷 뺏기면 속옷도 있는데 왜 겉옷 뺏기면 벌거벗는다고 이야기 할까요? 겉옷을 입었다는 건 이미 그 속옷이, 율법이 진리로 겉옷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건 벗겨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게 벗겨지면 벌거벗게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 보세요.
고후 5 : 1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5 : 2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요기서는 입다, 벗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사도 바울이 성전으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성막으로 이야기 하고 있단 말에요. 그 옷을)
5 : 3 -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게 계시록에서 너희들 옷 지켜, 겉옷 지켜 안 그러면 벌거벗은 자 된다. 그 단어랑 똑같은 단어에요. 이렇게 우리가 그 성전으로, 하늘의 성전, 새 성전으로, 새 처소로 입게 되는 건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5 : 4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그 율법이 진리로 이해되면 그걸 겉옷으로 입는다고 하는 거예요.
죽을 것이 (율법이) 생명에게 (속옷이) 삼킨바 되더라
이 그림 이해가 가세요? 이게 속옷과 겉옷의 이야기에요. 어떻게 더 선명하게 설명을 해? 이거를.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겉옷이 속옷을 덮어버리면 속옷이 안 보여요. 그래서 덧입는다고 하는 거예요. 덧입는다. 그러나 율법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이거는 아니니까, 폐해져야 되니까 어떤 곳에서는 벗으라고 또 이야기 하는 거라고요. 그러나 이거를 벗어서 딴 게 오는 게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진리가 이해되면 요게 겉옷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덧입으라고도 또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사야서 61장 10절 보세요.
사 61 : 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신랑신부의 혼인 잔치를 겉옷을 신랑이 입히시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의의 겉옷. 구원의 겉옷. 이게 호플론이에요. 전신갑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의 병기예요. 호플론.
입어라, 입고 하나님(신랑) 옆에 서라!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거예요. 옆에 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의 속옷을 갖고, 성경을 갖고 성경을 이야기 하고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그것도 다 지켜내지 못하고 진리도 발견해내지 못할 때 어떻게 되죠? 그들에게 준 그것도 뺏기게 돼요. 그렇잖아요? 줬어요. 일단. 속옷을 줬단 말에요. 그것으로 예수라는 진리를, 겉옷을 이해하라고 줬는데 그걸로 진리로 가지 못하면? 고걸 뺏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있는 것도. 준 것도 뺏겠다. 고 하는 말이 그 말이란 말에요. 마가복음 14장 48절 보세요.
막 14 : 48 - 예수께서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14 : 49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14 : 50 -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4 : 51 -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14 : 52 - 베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붙들리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칠 때 너희는 나를 붙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검과 몽치로 붙들러 오네? 정작 성전에서 진리로 나를 붙들라고 가르쳤더니 그 때는 안 붙들더니 지금 검과 몽치로 나를 죽이려고 붙들러 오네? 여기서 이 붙들다, ‘크라테오’ 가 붙들다, 지니다, 취하다 이런 뜻이에요. 진리를 붙들 때도 쓰고 어떤 사람을 해를 가하기 위해 붙들 때도 쓰는 단어란 말에요. 인간들이 진리로 예수를 붙들지 않고 검과 몽치로 죽이려고 붙들러 온 거예요.
율법은 진리를 박살내기 위해 붙들죠. 진리가 되기 위해 붙들지 않아요.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하는데 진리를 박살내기 위해 붙든다니까요. 오늘날 우리교회를 가장 공격하는 이들은 교회예요. 스님들은 좋아하더라고요. 오히려. 무슨 뜻인지 알고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떤 스님이 듣더니 어, 이 사람 진리 전하는 사람이네! 그러더래요. 이걸 좋아해야 할 일인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도망갔다. 그래요.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부정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던 거예요. 그러니까 도망간 거예요. 제자들조차. 그들도 예수를 검과 몽치로 잡으러 온 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를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그 무리 속에 한 청년이 등장하죠? 그 청년이라는 단어와 무리라는 단어는 네아니스커스 라는 단어로 같은 단어예요. 한 쪽에서는 그걸 그냥 단수로 쓰고 무리는 그걸 복수로 쓴 거거든요. 같은 놈들이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요 청년의 이야기로 그게 뭔지 설명해 줄게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같은 단어예요. 네아니스커스.
이게 뭐 마가라느니, 누구라느니. 그건 몰라도 돼요? 누구면 어때요? 벌거벗고 도망간 게. 잘 보시면 그 청년이 뭘 두르고 있는데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 그러죠? 요게 ‘신돈’이에요. 제사장의 옷. 속옷을 만드는 고운 삼베를 이야기한단 말에요. 베. 쉽게 말해서 속옷이란 말에요. 그리고 ‘벗은’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후서 5장의 우리가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에서 고 단어와 똑같은 단어에요. 그런데 어떤 놈이 지금 벗은 자로 도망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똑같은 단어인데. 뭘 벗겼겠느냐고요?
예수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준 그것도 벗겨버린다는 거예요. 그래? 도망 가. 가려면 가. 그러면 너희들에게 준 이것도 필요 없어. 벗겨버리는 거예요. 계시록 16장 15절 보세요.
계 16 : 15 -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한 자가 복이 있도다
이거 창세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벌거벗었으므로 숨었습니다. 그래서 가렸습니다. 뭘로?
가짜 진리의 띠로.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로. 하나님이 그거 벗기고 진리의 띠로 전신갑주 입어! 그런 거잖아요? 계시록에서 이거 똑같이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그 옷 입었지? 벌거벗고 도망가지 않도록 그거 지켜! 이게 성도의 모습이에요. 진리의 말씀에 끝까지 묶여서 사는 자들. 그들은 목숨위해 그 진리의, 목숨 걸고 그 진리의 겉옷을 지켜요. 그런데 여기 지금 여러분들 고개 끄덕끄덕 하면서 다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여태까지 제 등에 비수를 꽂고 도망간 사람들은 전부 그런 사람들이에요. 어디서 이런 말씀을 또 듣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다. 그런데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못 들어요. 중도에 이건 뭐야? 난 못 죽어. 이러고 대부분 도망갔어요. 그러나 끝까지 그 옷을 지키는 이를 오래 참음. 인내. 라고 해요. 그거를. 다른 거 아니에요. 뭐 고난이 왔는데 그걸 꼭 참았다. 그거는 뭐 딴 사람들도 할 수 있어요.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할 수 있다니까요. 그거는.
그 겉옷은 속옷이 무엇인지를 알 때, 그 속옷 위에 덧입게 되는 거예요. 그 때 그는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3장 14절 보세요.
롬 13 : 14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 이게 에피뚜미아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몸의 사욕. 음욕, 이렇게 번역이 된 단어, 희생제사 )
-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율법주의 안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좀 도모하지 마. 그 말이에요. 로마서 13장 14절이.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겉옷이에요. 우리가 지켜야 할, 목숨 걸로 지켜야 할 겉옷이란 말입니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에피뚜미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게 된다. 라는 말이에요. 여기도 역시 희생제사라는 단어가 쓰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의 예수님이 입으신 세마포와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만들어 입힌 세마포가 다른 것으로 나와요. 개역성경은 똑같이 세마포로 번역을 했지만. 계시록 15장 6절 보세요.
계 15 : 6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 이거는 예수님 이야기하는 거예요)
-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단어, 진리의 띠. 그 분이 진리의 금띠를 띠고 세마포를 입고 계시는데 여기에서는 그 세마포가 ‘신돈’이 아니라 린넨이란 단어가 나오죠? ‘리논’ 이에요. ‘리논’ 이건 겉옷을 만들 때 쓰는 삼베에요. ‘리논’은. ‘신돈’은 속옷을 만들 때 쓰는 삼베에요. 성경에서 그 법을 은혜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 속옷이 겉옷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이 가진 것 마저 빼앗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돼요. 마가복음 4장 21절.
막 4 : 21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등불이라는 건 성전 안에, 성소 안에 등대있죠? 거기에 등경, 거기에 대접을 하나씩 놓는다고요. 계시록에서 나중에 내가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이 대접 쏟아 버릴 거야 할 때 그 대접이 그 대접이에요. 쏟으면 어떻게 돼요? 불이, 빛이 없어져 버려요. 그럼 끝나는 거예요. 그 때는.
그럼 이거 하나하나 쏟아 부을 때 불이 하나하나 꺼져가죠?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때는?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자가 마지막으로 구원받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 때가. 그런데 그걸 누가 말 아래에다 두겠니? 라고 이야기해요.
막 4 : 22 -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어둠이라는 거는, 그리고 호 코스모스로 준 이 세상이라는 건, 모형이라는 것, 율법, 성경이라는 거는 그걸 감추어 두고 죽이려고 둔 게 아니라 요걸 빛으로 이렇게 드러내어서 그들을 살리려고 준 거야. 이런 말이에요. 지금 이게.
막 4 :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무엇을 듣는가, 빛으로 말씀으로 오신 예수가 뭔가 이야기를 할 텐데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니, 아니면 껍데기를 듣고 있니? 이 말이에요. 그러면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게 뭔지 모른다는 뜻이에요)
막 4 : 23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 5 : 24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이해한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것으로 겉옷을 입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왜? 밝혀주고 들려줬는데 무얼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엉뚱한 거 듣고 있다가 고거 까지 뺏긴다. 그 들은 거 까지. 여러분, 빛이라는 건 어두움을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면 빛은 뭐예요? 어둠을 드러내는 거면 어둠이잖아요. 그러나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만 보는 자들이 죽는 거고 그 어두움을 빛을 통하여 아, 이게 사실은 빛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구나, 라고 아는 그 자들이 사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빛과 어둠은? 하나라니까요. 이게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연합이라는 의미란 말에요. 다른 게 아니라. 여기에 무슨 선악이 있고 어둡고 밝음이 있어요? 그건 다 진리 안에서 그냥 하나라니까요.
율법은 그 자체로는 어둠이지만 그 어둠의 정체를 빛을 통해 보게 되면 그게 곧 빛이잖아요. 달은 통하여 아 해가 저렇게 비치고 있는 거구나, 라고 알면 그 달이 곧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월( 달) 에서 시작해서 일(해) 로 끝나는 거예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월에서 시작해서, 이게 뭐야? 화 수 목 금 토 오행이거든요. 이걸 통하여 아, 이게 해야? 그래서 일요일이 그렇게 기쁜 거예요. ㅎㅎ 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모든 건 다 진리를 담고 있어요. 진리가 되면 모든 게 다 나를 통하여 진리가 돼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기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자, 보세요. 그러면 그게 벌거벗음이고 그렇게 말씀이 없는 게 굶주림이라면 구제가 뭐예요 진짜 구제가 뭐예요? 벌거벗은,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이는 게 구제죠? 그럼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진짜 구제가 뭐겠어요? 진짜 구제가 뭐겠어요?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진리를 전하여 그들에게 겉옷을 입혀주고 하늘의 생명 말씀을 그들에게 주어 먹이는 거 이걸 성경이 구제라 그래요. 성경에서 불쌍한 이들, 구제의 대상을 뭐라 그래요? 고아와 과부라고 그러죠? 고아는 뭐? 아버지가 없는 자. 과부는? 신랑이 없는 자. 그들에게 아버지와 신랑을 소개해 주는 게 구제예요. 그걸 섬김이라 그래요. 그래서 고아와 과부가 대표로 나오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들이 뭐 그 사람들 밖에 없어요? 성경은 전부 진리만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다니까요. 야고보서에서 계시록에 나오는 그 벌거벗음의 상태. 너희들 벌거벗지 않게 옷 잘 지켜, 에서 그 벌거벗음이란 단어가 야고보서에서 나오거든요. 한 번 볼게요. 야고보서 2장 15절.
약 2 : 15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벌거벗고 겉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일용할 양식은, 주기도문에서 배웠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뭘 주라는 거예요? 말씀을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안 주고 엉뚱한 얘기 하면서 평안해요, 배부를 거예요. 잘 될 거예요. 그러면 뭐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믿음이냐? 가 이 이야기인 거예요.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그러고 그냥 자기만 혼자 처먹고 살이나 뒤룩뒤룩 찌고 이런 거 경고하는 말이 아니라 야, 어떻게 진짜 벗은 사람, 진짜 배고파서 죽을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에서 의 그 단어는 상대적 굶주림이 아니라고 했죠? 이거 없으면 죽는 절대적 굶주림이란 말에요. 그런데 그가 진짜 살고 그가 진짜 입을 겉옷을, 그걸 주지도 않고 엉뚱하게 감정적으로 위로해주면서 두 주먹 불끈 쥐게 밖에 나가서 또 열심히 희생 제사하게 만들어 놓고 잘 될 거야, 평안할 거야, 배부를 거야, 열심히 해봐. 그럼 하나님이 복 줄 거야. 응답해줄 거야, 이러면 이게 무슨 믿음이냐? 그런 거예요.
그러면 행함이 있는 믿음은 뭐겠어요? 그 말씀을 흘려주라는 얘기예요. 엉뚱하게 십자가 들고 나가갖고 괜히 사람들한테 피해주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아니, 생각해보세요. 어떤 바보가 그걸 보고 예수를 믿겠느냐고요?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거 안 하면은 손발 떨려서 못 산다니까요. 불안해서. 그거라도 안 하면은 어떻게 버티느냐고요? 희생 제사를 해야지. 당분간 명동에는 또 못 나가겠네. 그래서 구제와 봉사와 섬김의 직분으로 뽑힌 집사들이, 일곱 집사죠? 집사들이 구제하고 섬김은 하는데 전부 말씀을 전하다가 죽은 거예요. 성경 어디에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한테 밥 퍼주고 쌀 갖다 주고 그랬단 말이 있어요?
일곱 집사의 대표가 누구예요? 스테반, 빌립이요? 두 사람 밖에 안 나와요. 스테반은 뭐한 사람이죠? 구약을 설명했어요. 스테반이 한 설교 읽어보세요. 집에서 전부 구약의 이야기예요. 그러나 그 속에 진리를 담아 설명하고 죽어요. 구약은 모세로 죽는 거예요. 스테반은.
그런데 빌립은 이사야서 구약을 신약, 이게 누군지 알아? 라고 신약으로 설명해주고 그가 자유롭게 풀려나요. 이방인이. 그 이방인이 누구예요? 이디오피아 사람이에요. 3천 킬로 밖에서 절기를 지킨다고 희생 제사 드리러 온 거예요.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답답해서 보낸 거예요. 가서 그게 뭔지 얘기 해줘. 야, 3천 킬로를 제물을 갖고 쟤가 여길 찾아온다, 세상에. 빌립이 얘기해줬어요. 기뻐 갔다 그래요. 그가 그 다음해에 또 유월절 지키러 왔을까요?
안 옵니다. 그걸 끝내버리는 게 집사. 일곱이라는 말이 쉠, 브엘쉐바에서 그 쉠이 일곱 번 말 하다잖아요? 일곱 번 말하는 건 언약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교회의 일을 담당하는 이들을 장로라고 하고 그들 중에 말씀을 전하는 그, 그걸로 진짜 구제하고 섬기는 이들을 집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칼빈의 말만 듣고 집사는 교회행정하고 장로는 무슨 영적인 거, 영적인 거 개뿔이나 뭘 하느냐고요? 장로들이. 사고나 치지 교회에서. 뭐 잘하는 거 봤어요? 장로들이? 그런거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무슨 직분이 뭐 어쩌고저쩌고. 그런 데에 가세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Deacon 이라는 건 말씀으로 입히고 말씀으로 먹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스테반과 빌립이 집사의 역할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주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구제예요. 돈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밥 퍼주고 그런 거 하세요. 하지 말라는 거 아녜요. 그러면 마음도 편하고 따듯해지고 애들한테 교훈도 되고 좋아요, 그러나 이걸 신앙이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자고요. 그런 거 하지 말자는 거 아녜요.
아니 누가 복음을 알았다고 원효대사처럼 의상이랑 저기 당나라인가? 어디예요? 그런 거 관심도 없지만, 중국으로 불법 배우러 가다가, 유학 가다가 무덤에서 아주 달디단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해골이야. 통일신라시대 때는 무덤을 그렇게 썼다고요. 히브리 사람들처럼 계속 굴에다가 엄마 시체, 아버지 시체 갖다 넣었다고요. 그래서 잘 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의상대사와 같이 가서, 친구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해골바가지 물이네? 다 토했어요. 다 토하고 일체유심조 다, 모든 건 마음먹기 달렸으니까. 의상아 너는 유학 가, 나는 안 할래. 의상은 유학 가갖고 잘 골부해서 어디의 교조가 되고 원효는? 파계하고 문열왕 딸이랑 결혼해갖고 설총을 낳은 거예요. 중이 그럼 돼요? 창기 집을 들락날락 했대요. 진리를 알았다고 이제. 모든 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니까 이런 거에 자유롭다. 진짜 진리를 알면 그렇게 안 된다니까요. 그건 진짜 방종이죠? 일체유심조 라는 걸 알았다고 창기 집에 가서 술 처먹는 게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런 거 얘기하는 거 아녜요. 제가요. 내가 원하는 한 가지. 나를 이렇게 하나님처럼 대우해주는 그 아버지에게 기쁜 자가 되는 거라는 지향성이 왜 안 생기겠느냐고요? 진리를 진짜 안다면.
여러분, 우리의 가능성과 자원이 다 멸해져서 우리가 살아야 그 때에야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믿는 거예요. 덮어놓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그 예수는 또 다른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믿으라. 그러면 그게 또 다른 우상이 되는 거에요. 지금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가 바로 그 예수예요. 소. 그 예수를 죽여야 돼요. 내가 아벨을 죽여야 셋으로 부활할 수 있어요. 그 말은 나를 죽어야 되는 거예요. 진리로. 그리고 그게 뭔지 알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진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서 살아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분과 제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걸 동양학에서는 환갑이라고 해요. 십간십이지 있죠? 천간지지라고 해요. 하늘의 열을 땅의 열둘이 깨달아 짝을 맞추면 하늘의 갑으로 완성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육십이 환갑이죠? 그래서 환갑이 되면 아, 진리를 담고 있는 거니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하여튼 그렇게 진리를 담아준다니까요. 그러면 환갑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 열둘, 땅의 열둘은 이 열을 이해하여, 천간, 십간, 열을 이해하여 땅의 것이 죽고 하늘의 갑으로 사는 거구나, 하고 땅이 죽는 거잖아요. 그래서 환갑 때에 그 환갑을 맞은 분이 제사상 뒤로 가는 거예요. 환갑상을 그런 거 생각도 안 했겠지만,
동양학에서 환갑상을 어떻게 차리라고 그러느냐 하면 제사상하고 똑같이 차리라고 해요. 왜?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금 자손들이 환갑 맞은 이에게 절을 하는 건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있는 이는 그 죽음이 뭔지 아니? 라고 몸으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이걸 환갑. 베레시트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보이는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게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에요. 베레시트. 태초에. 그게 갑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갑으로 시작해서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열두 개로 설명을 해요. 땅엣 것. 짐승으로. 설명해서 이게 짝이 짝짝 맞아갖고 육십 개가 되면 전부 짝이 한 번씩 되면 아, 이런 거야? 라고 했을 때 죽고 환갑. 하늘의 것으로 완성되는 거란 말에요.
그러면 그는 당연히 죽어야 되는 거지요.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장이 항상 이 편에서 여기를 보고 제사를 지냈단 말에요. 성막에서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 제사는 안 받아. 네가 진짜 이 제사를 중보하는 중보자가 되려면 이리로 넘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게 무엇인지 여기에다가 얘기해 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맞는 거예요. 이게 제사예요. 진짜 제사.
그러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죽어서 산다, 라는 게 모든 철학이나 종교나, 고등종교 하등종교 구별 없이 모든 게 다 이야기 하고 있다면 한 번 생각을 해보시란 말에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로 결론짓지 못하고 있고 계속 헤매고 있지만 우리는 신약이 있잖아요. 그게 이거구나! 라고 신약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전부 그걸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걸 못 알아먹고 윷놀이도 도, 개, 걸, 윷, 모를 경리에요. 왜 문자가 없었을 때니까. 던져서 이게 뭔지 알아? 도, 이게 이런 거야. 라고 진리를 설명하던 거였는데 그걸로 놀이를 하고 않았네. 내기 하고. 윷판도 음양오행의 북두칠성의 일년주기를 그려놓은 거 아녜요? 그걸로 진리를 설명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걸로 판을 놓고. 건곤감리도 마찬가지에요. 그걸로 문자가 없던 때니까 흔들어서 그림 그려놓고 나오면 뽑아 뽑으면 이게 건이란다. 이게 어떤 건지 알아? 그렇게 진리를 설명하던 용인데 점을 치고 앉았네? 이걸로 이제.
그러니 성경은 어떻게 쓰겠느냐고요? 그 도구들을 전부 그따위로 쓰고 있는 이 아담들이 성경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생각 좀 해보란 말이에요. 무조건 예배당에 앉아 있고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 하면 다 기독교라? 이런 생각 버리시라고요.
여러분, 기독교는 여기에서 진리를 깨달아 여기에서 죽고 여기에서 살아야 돼요. 일단. 그래야 여러분은 영원으로 가요. 영원히 아니에요. 영원히는 시간이 길게 늘어진 걸 영원히 그러죠? 그거는 끝이 있는 영원이에요. 그래서 영원히, 아니에요. 영원으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움직임이 없는 진리 그것으로 존재할 때 영원으로 라고 하는 거지 성경에는 영원히 라는 개념 없어요. 영원이라는 건 움직임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걸로 그대로 사는 거. 영원으로 사는 거. 그걸 천국이라 그래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부디 그 진리가 여러분 귀에 들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여전히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가짜 띠, 가짜 갑옷
금방 말라 없어질 그것으로 나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그렇게 갑옷 만들어 입고
너스레를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 진리가 이해되어 참 진리의 갑옷이 성도들의 몸에 입혀지게 하여주옵소서.
그것이 참 복이라는 것도 아울러 깨달아 알 수 있게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