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67.모든 것이 가짜이고 모든 것이 진짜이다

Hebrew 2023. 6. 1. 09:39

로마서 67번 말씀

제목 : 모든 것이 가짜이고 모든 것이 진짜이다

본문 롬- 6장 11 : 14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면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아멘.

자, 우린 지난 시간에 몸의 67.모든 것이 가짜이고 모든 것이 진짜이다 사욕을 순종하는 게 뭔가. 에피뚜미아라는 단어. 희생제사라는 그 두메오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했죠? 그 몸의 사욕을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부했고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것이 무엇이며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성경에 나오는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렸는데 다들 기억나시나요? 그 병기라는 단어가 에베소서에 나오는 전신갑주와 상통하는 단어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거기에다가 파스라는 전체라는 단어만 딱 접두어로 붙여놓으면 그게 전신갑주가 된단 말에요. 그러니까 병기 이러니까 뭐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자 그런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옷을 입으라는 이야기예요.

오늘은 이렇게 먼저 주어진 속옷, 율법이라고 그랬습니다. 속옷이 나중에 은혜의 겉옷으로 바뀌게 되는 구원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라도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전체를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사람도 요한계시록 같은 거 못 보고 죽었습니다. 책이 요한복음 하나만 있다고 할지라도, 아니 한 장만 있어도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발견해요. 설교 한 편으로 확 뒤집어져서 진리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8년에서 10년을 들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녜요. 평생 66 권 어떻게 다 강해를 하려고 이렇게 늦게 하느냐고,, 다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알면 그 다음 설교는 안 들어도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호지 아니한 세마포 속옷을 입고 계셨다 그랬습니다. 그 호지 아니한 속옷은 반포속옷이라고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반포속옷. 이음새가 없는 그냥 통짜로 된 반포속옷. 그건 당시 제사장들이 입고 있던 옷이라 그랬죠? 제사장들이 상류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옷을 아주 극 상류층 사람들만 입고 있었어요. 당시 그 속옷은, 반포속옷은요 금값보다 훨씬 비쌌어요. 그걸 예수님이 입고 계셨다니까요. 요즘 제일 비싼 속옷이 뭐예요? 빅토리아 시크릿인가요? 뭐예요? 루이비똥인가? 하여튼 그거 보다 백 배 비싼 거요. 그렇게 비싼 거를 예수님이 입고 있었는데 그거로는 아무도 시비 안 걸었어요. 그 하찮은 바리새인들도 그런 거 갖고는 시비 안 걸었다니까요. 야, 메시야가 그렇게 좋은 거 입어도 돼? 이런 거 안 했다고요. 유치하게 그런 짓들 하지 마세요. 복음은 그런 것과 아무상관 없어요. 아무 상관없어요.

그렇게 그 세마포 옷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화려한 겉치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이었으며 그들의 유적지향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준 거였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호지 않은 세마포 속옷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건 ‘부’예요. ‘부’. 그들의 지향성이란 다름 아닌 부유함이었어요. 그 부유함은 단순히 돈이 많거나 땅이 많거나, 자식이 많은 정도의 유치한 유물적 부유함이 아니에요. 물론 그러한 것들이 포함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는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에요. 성경이 금하는 부, 부자는 안 된다, 그러잖아요. 왜 자주. 그러니까 부자들이 돈 없는 것처럼 그냥 가면 쓰고 와서 교회에서 나 돈 없어, 막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예전에는 진짜로. 그 부자가 아닌데 혹시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봐.

성경이 말하는 부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상승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사유와 행동 그리고 거기에 소용되는 자원과 재력 등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그것을 행하는 자도 부자고 그것을 행하기 위해 땅의 것을 의존하는 자도 부자예요. 성경은 그러한 부자들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와 그들의 축약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다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 전체를 ‘부자’라고 해요. 그들은 굉장히 금욕적인 사람들이었고 청빈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해서 그 돈으로 남을 도와주던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부자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모두 금으로 덮여있었던 거예요. 상징이에요. 성전의 모든 기명들도 다 금으로 덮여있었어요. 성경은 율법주의 = 맴몬이라는 그런 공식을 그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들의 실체는 기실 모두 쓸모없는 조각 목들이었잖아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 조각 목을 가지고 성전을 지으라. 그래요. 조각 목은 가시나무예요. 그건 땔감으로도 못 쓰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금을 입혀서 성전을 만들라고 하셨단 말에요. 그런데 그러한 것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금도금을 한 헛것, 이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물론 그건 역으로 쓸모없는 조각 목에 말씀의 금, 말씀의 기름. 그 금과 기름은 같이 또 혼용해서 쓴다고 했습니다. 왜? 올리브기름이 짜서 놔두면 노랗게 금처럼 변했거든요. 기름. 금. 그게 덮여서 참 성전이 되는 그 은혜의 복음이야기도 아울러 함의 하고 있단 말에요. 그거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율법주의, 그 ‘부자’ 성경이 금하는 부자. 그러니까 그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남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어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거 자체가 부자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율법주의를 맘몬과 이렇게 동일시하여 사용한단 말에요. 성경은. 그런데 그 율법주의의 시조가 누구예요? 아담과 하와지 누구예요? 선악과 따먹고 율법주의자, 최초의 율법주의자들이 거기서 나왔잖아요. 선악의 주체가 되어 내가 이제 선악판단을 할거야가 율법주의에요. 아담과 하와죠? 그런데 모든 인류는 그 씨에서 나왔단 말에요. 그러면 그 씨에서 나온 모든 인류가 다 뭐다? ‘부자’. ‘부자’, 여러분 다 부자예요. 당당하게 사세요. 당당할 일도 아니지만. 다 부자예요.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할 부자들 인거예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실과를 막아버리면서 뭐라 그러죠? 이들이 손을 들어 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까봐, 라 그래요. 그죠? 그들이 손을 뻗어 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까봐.

사라 야드 라카흐, 이게 탐심이라는 뜻이에요. 부자 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이 그 단어를 거기에다가 쓰신다니까요.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이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탐심을 갖더라는 거예요. 단순히 그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그때 무슨 돈에 대한 개념이 있겠어요? 남들보다 더 부자로 살아야지, 달랑 인간은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는데. 그런 부가 아니란 말에요. 그런데 거기에 사라 야드 라카흐, 탐심이란 단어가 나온단 말에요. 그렇게 자기의 선악의 구조 속에 빠진 자가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바탕으로 자기의 손을 뻗어 생명을, 자기의 생명, 가치를 쟁취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탐심인 거고 그러한 탐심으로 자기의 생명을 쌓고 성숙시키고 완성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이 다 ‘부자’예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쫓겠다고 찾아온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들을 한 번 잘 떠올려 보세요. 그 부자청년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행위로 접근하는 거예요. 무엇을 해야, 어떤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선한 분은 하나님이다. 선문답 같죠? 뭐예요? 무슨 이야기예요? 이게? 그거는 나도 선한존재가 아니야. 하나님만 선해. 라는 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라. 야, 무엇을 ‘해서’, 어떤 선한 일을 ‘해서’ 구원에, 영생에 이르는 게 아니라 선한존재에 의해 영생은 주어지는 거야를 설명하는 거예요. 선한 분은 하나님인데 너 어떻게 선한 ‘행위’를 나에게 물어봐? 그러는 거예요. 그 청년이 뭐라 그래요? 자기는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 그래요. 그러면서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부터 쭉 이야기를 해요. 다 했어요. 그래요. 다 했어요. 그걸 뭐라 그런다고 했죠? 율법을 지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걸? ‘부자’. 그래서 부자청년이에요. 그 사람이. 다 지켰어요. 그랬어요. 다 지켰어요.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이야기를 해요. 그럼 네가 가진 걸 다 팔아서 남을 줘봐! 그랬어요. 단순히 네 재산 다 팔아서 다 나눠주고 와! 그럼 내가 인정해줄게 이런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그래서 재산 다 팔아갖고 패가망신한 사람 많아요. 그리고 후회하고. 그런 얘기 아니에요. 네가 어려서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그럼 너 ‘부자’네. 그러면 네가 갖고 있는 그거. 네가 쌓은 그거를 남한테 한 번 줘봐. 어떻게 되나? 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줘요. 왜? 율법주의라는 게 뭐냐 하면 내가 그걸 열심히 지켜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나의 안에 쌓아 놓은 거기 때문에 이건 내거예요. 못 줘요. 절대. 아담들의 본능이에요. 이거는. 못 줘요. 그래서 그 ‘부자’가 자기 것 팔아서 다른 사람 안 줬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제가 다음 시간에 가난하다, 또 금식은 무엇인가 이런 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 텐데 그런,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전적 개념의 그런 이야기가 아녜요. 성경은.

네가 부자잖아. 그러면 네가 가진 거 한 번 줘봐, 라고 했더니 못 줘. 그죠? 줄 수가 없어요. 율법은 모두 그 아가페의 사랑, 그 하나로 수렴되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율법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와 똑같은 게 뭐냐 하면 이웃 사랑이야. 그랬잖아요. 그 다음은 아니에요. 여러분. 그 둘은 똑같은 거야. 그랬어요. 그래서 십계명의 1 계명부터 5 계명까지 계명은 6번째부터 10번 째 까지 할 수 있으면 이건 자연스럽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1부터 5까지만 사람들한테 이야기 하고 설명하고 6번째부터는 예수님이 오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재목만 다 달아놓은 거고 예수님이 오셔서 산상수훈에서 설명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여야 돼요. 율법은 하나란 말에요. 사랑이란 말에요. 사랑.

그러면 그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 진의를 알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라는 그 사람은 사랑을 가진 거지요? 그러면 그 사랑을 흘릴 수 있다, 없다? 있어요. 그런데 그는 율법의 진의인 사랑으로 율법을 지킨 게 아니라 엉터리로 그 율법을 세목으로 지켰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왜? 그건 ‘내거’거든요. 내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내가 쌓은 거기 때문에 남을 주면 안 되지. 그걸 어떻게 줘요? 못 주는 거예요. 여러분, 진리라는 건 하나여야 진리에요. 그리고 변하면 안 돼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 하나는 한 분이신 그 영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그 분의 아가페, 사랑밖에 없어요. 그게 율법이란 말에요. 여러분. 그 율법을 진짜 그 진의를 알고 지켰으면 그는 당연히 그걸 흘려주게 돼있어요. 이게 진리에요. 이게 말씀이랍니다. 이게 예수랍니다. 라고 흘리게 돼있다니까요. 그런데 율법으로 지키면 어떻게 돼요? 요걸로 내 가치를 상대적으로 상승시켜 남을 구분하고, 구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써요.

넌 왜 아직도 성경을 그거밖에 몰라? 넌 왜 자꾸 교회를 빼먹어? 넌 아직도 헌금을 그것밖에 못해? 이런 식. 그게 땅의 보좌들의 딜레마에요. 그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어요. 주님은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럼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단 말에요? 라고 걱정하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 19장 23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듣고 놀라 건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명쾌하게 얘기해주셨잖아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잖아요. 그 부자청년도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떠나갔고 제자들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의미를 몰라요. 지금. 그러니까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왜? 제자들은 알았어요. 화장실 갈 때 보니까 예수님이 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있어. ㅎ 부자예요. 부자였어요. 여러분.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불림을 받을 때 아버지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거기에 삯꾼이 있었어요. 여러분 그 고대시대 때 삯꾼을 부릴 수 있는 큰 배를 가질 수 있는 이들은 동네에서 지주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들이 그 배를 어디에다 감춰놨다가 도로 꺼내서 고기를 잡으러 갔다니까요. 부자였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럼 부자가 천국 가는 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면 당신도 안 되고. 루이비똥보다 백 배 비싼 거 입고 있으니까, 우리도 안 되는데 그러면 누가 갑니까? 누가 갑니까?

여러분 이 바늘귀라는 건 진짜 우리가 바느질하는 고 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당시 성전에는 12개의 문이 있었죠? 요한계시록에도 그걸 인용해서 쓰는데. 12은 아들의 수라 그랬어요.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나온거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이 뭐예요? 벤허, 쥬다 벤허? 훌의 자손 유다가 쥬다 벤 허잖아요. 그러니까 벤의 아들이죠? 르우벤. 깨달아라, 이게 아들이야. 막내는? 벤야민이죠? 오른 손의 아들. 자, 이게 아들이야. 완성은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면서 열둘을 쭉 연결하면? 제가 옛날에 한 번 설명해드렸는데. 아들이에요. 그게 아들의 이야기란 말에요. 어떻게 아들이 되는가?

그러니까 이 열두 문이 성전에 나 있는데 첫 번째 문이 양문이죠? 제물,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에요. 거기는 뚫려있어요. 제물만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맨 마지막 문이 한립간 문이라고 했어요. 느헤미야서에 나오죠? 딱 한번 나오는데 그건 심판의 문이에요. 그런데 그 열두 문중에 바늘귀 문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 바늘귀 문은 밤에 살짝 열려 있어요. 모든 문이 다 잠겨 있고 양의 문만, 요렇게,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니까 닫을 수가 없죠? 그리고 그 바늘귀 문만 열려있는데 사람만 요렇게 한 명 들어갈 수 있어요. 밤에. 낙타는? 못 들어가요. 예수님이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그 문으로 낙타 들어갈 수 있어? 없어? 못 들어가죠. 당연히.

그래 너희들도 못 들어가. 아무도 못 들어가. 사람은 아무도 못 들어가. 그러는 거예요. 밤의 세상에서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낙타 같은 부자들은 절대 못 들어간다는 상징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과, 남편과 연합된 신부. 그게 뭐예요? 창세기에서? ‘사람’ 이라고 그러잖아요. 사람. 그 사람만 하나님이 그를 품어 안아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방불한 자가 된 그들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는 낙타는 못 들어가는 거예요. 부자는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의 것으로는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갖출 수 없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의해서만 가능한 거야. 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한 마디로 왜곡된 율법을 완전히 묵사발 내버리신 사건이란 말에요. 고게 ‘부자’예요. 계시록 3 장 17절 보세요.

계 3: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보세요. 나는 부자예요. 율법주의자. 나는 부자예요. 라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너는 속옷도 못 입고 있는 벌거벗은 자다. 제가 그 속옷을 입고 있다가 벌거벗겨지고 도망간 그 청년의 이야기 해드렸잖아요. 넌 벌거벗은 자야, 그래요.

3: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이게 의의 병기예요. 이게)

3:18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제발 좀 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제발 좀 봐! 이 말씀이 도대체 뭔지. 이 율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제발 좀 똑똑히 봐! 그러는 거예요. 말씀 드렸다시피 그러한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 혹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게 되어있어요. 그러한 땅의 부자들에게 은혜나 용서 같은 게 받아들여질까요? 여러분? 은혜나 용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가 선물로 받는 거예요. 그들에게만 그거는 감사한 일이 되죠. 내 거가 있는데 내가 왜 은혜를 받아야 돼요? 자존심 상하게. 이게 선악과 먹은 아담들의 자존심이라니까요. 절대로 그들은 그 은혜나 용서 같은 것은 원하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건 자기 게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나 통용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해 버린단 말에요. 거기에서의 가난은 상대적 가난 정도가 아니라고 했죠? 절대적 가난, 그거 없으면 죽는 사람. 그렇게 가난한 자. 그들이 복 있는 자들이에요. 반면에 부자들은 그거 없어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열심과 노력과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완성 시킬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이란 말에요. 그걸 부자라고 해요. 그게 율법주의잖아요. 오늘날 개혁주의는 여기에 가까운 거예요. 여기에 가까워요.

그렇게 말씀을 사랑이라는 온전한 하늘의 떡으로 먹는 게 아니라 잘게 부스러진 부스러기로 먹는 것이 율법주의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생명의 책은 단수, 한 권으로 나오죠? 단수로 나오지만 행위의 책은 책들,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요. 성경을 사랑, 아가페, 예수, 진리로 못 보는 사람은( 그건 한 권이거든요) 그 책을 여러 세목이 적힌 여러 권의 책으로 보게 되요. 요 책에서는 요런 걸 강조하고 요 책에서는 요런 걸 교훈으로 주고 있고. 요러한 식으로. 보게 된단 말에요. 그걸 부스러기라 그래요.

말씀은 하나예요. 은혜라는 떡이란 말에요. 하늘의 떡. 그런데 그것이 행위의 세목이 되면 그때부터 저주와 사망의 책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누가 가장 감동적인 반성의 모습을 보였습니까? 누가 가장 감동적인 반성의 모습을 보였죠? 다른 말로 누가 가장 부자였어요? 유다예요. 제일 멋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열두 명이 다 도망갔다니까요. 베드로는, 수제자 베드로는 욕하면서 저주하면서 부인했어요. 가룟 유다는 욕은 안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떻게 했어요? 몰래 감춰둔 배 싹 끄집어 내갖고 고기 잡으러 갔어요. 생업에 열중했다고요.

유다는? 그 서슬이 퍼렇던 성전으로 돌아가서 제사장들에게 돈을 집어 던지면서 저이는 무죄다! 고 외쳤어요. 저이는 무죄다. 그리고 내가 무죄한 자를 팔았으니 벌 받아 마땅하다, 그러고 자기에게 스스로 벌을 줬어요. 멋지잖아요. 이게 율법주의예요. 멋있지 않아요? 성경은 그걸 부자라고 해요. 그런데요. 재밌는 건 예수님께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 때,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좀 그렇지만. 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죠? 그런데요 성경이 유다에게 예수님께서 떼어 준 고거는 부스러기라고 해요. 나머지 제자들에게 준 건 떡이에요. 그런데 유다에게 준 것만 푸소미온이에요. 성경에도 푸소미온이란 단어가 딱 세 번 나오는데 유다에게만 써요. 유다에게만 가루로 줬다. 그래요. 부스러기로 줬다. 그래요.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알토스를 클라우, 떡을 뜯어서 부시키온, 조각으로 줬다.

그렇게 주님이 떼어주신 빵 조각을 먹은 자들은 그들의 뻔뻔스러운 행동에도 생명을 얻는 반면에 주님이 주시는 빵을 푸소미온, 부스러기로 먹는 자들은 아무리 멋진 행동을 내어놓아도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더라는 거예요. 보세요.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말씀을 부스러기로 먹은 자가 훨씬 멋있어 보이고 떡으로 먹은 자들이 훨씬 못나 보여요. 그러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교는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데요.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예요.

눅 16: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기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자, 부자가 나오죠? 19절에. 부자. 지옥 간 부자예요. 이 부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대요. 이게 누구 옷 이예요? 제사장 옷이에요. 제사장 옷이요. 율법주의 전체를 통틀어 지금 예수님이 두들겨 패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 한글 개역성경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 그러는데 이 말은 날마다 잔치만 벌였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의 모든 날들을, 헤매라, 모든 날들을 깨끗하고 훌륭하게 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었다, 라는 뜻이에요.

날마다 잔치를 했다는 뜻 아녜요. 그 부자는 모든 날들을 깨끗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잔치는 자기잔치죠. 아담들의 잔치에요.

바로 이 모습이 율법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세상 아담들의 시선이며 평가이며 실체예요. 그것이. 그죠? 사람들은 그런 잔치를 벌이기를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행복해하죠.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해주면 진짜 개뿔도 가진 게 없어도요 사람들이 존경해주고 칭찬해주잖아요? 안 먹어도 배불러요. 저도 해봤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도 죄라 그래요. 그런데 그러한 부자와 대조가 되어 나오는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 이름이 나사로예요. 이거는 엘 아자르라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거거든요.

하나님은 돕는 자이시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도우시니까 어떻게 됐다? 거지 되더라. 그 거지라는 단어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러니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에서의 푸투코스, 똑같은 단어에요. 그걸 그냥 거지라고 번역한 거예요. 가난한 자가 되더라. 뭐가 없으면 죽는 자에요. 그 거지. 하나님이 도우시니까 거지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없으면, 하늘의 떡이 없으면 사망이라는 것을 아는 어떤 자의 대표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 나사로가 부자와 대조되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사로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있다, 그러죠? 그 대문이라는, 펠른이라는 이 단어는 요한계시록에 많이 등장하는데 성전 문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의 문 밖에 있다는 건 율법주의의 대문 밖에 있는 거지예요. 마음이 가난한 놈이에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는 자들은 사람취급도 못 받던 때였어요. 부정한 문둥병자들이나 죄인들이 쫓겨나 있던 곳이 문 밖이에요. 그들은 부정한 자, 개, 돼지로 불렸단 말에요. 그래서 거기에 그 나사로와 개가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 22절 보세요.

눅 16: 22-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하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여기 보시면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조각, 푸시키온을 부스러기라고 번역해 놨지만 그거는 푸소미온이고 푸시키온은 조각이에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떼어 준 조각. 자 율법주의의 대문 밖에서, 성전, 옛 성전 밖에서 그 성전에서 떨어지는, 율법이 떨어지겠죠? 그런데 그걸 떡으로 조각으로 받아먹는 어떤 이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지, 개 취급을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볼 땐 거지. 개라는 거예요. 야, 우리처럼 좀 살아봐. 이렇게 멋지게 재산도 다 기증하고 착한 일도 좀 하고 일요일마다 그냥 밥 퍼주러 다니면서, 우리처럼 좀 멋지게 한 번 살아봐! 이 개들아. 이런 취급 받는다니까요. 율법주의에게.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께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부탁하던 가나안 여자에게 개라고 그런 거 아시죠? 내 자녀에게 줄 걸 개한테 안 줘. 그 여자가 뭐라 그래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단어예요. 그 때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그래 그게 믿음이라는 거야. 그 여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게 믿음의 내용이란다. 하는 뜻이에요. 똑같은 이야기란 말에요. 그게. 거기도 푸시키온이에요. 조각. 그렇게 거지 나사로와 개들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개 취급을 받는 어떤 자들이 부자, 율법주의, 옛 성전, 그 부자의 상, 제단에서 떨어지는 그걸 조각, 떡으로 받아먹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그러나 그걸 그냥 부스러기, 푸소미온으로 먹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유다의 부스러기를 먹는 이들이란 말에요. 율법으로 보는 것, 법으로 보는 거, 표피적으로 보는 거. 그렇게 모래 같은 광야의 부스러기를 먹는 자들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부스러기. 물이요. 그래서 가롯 유다가 푸소미온, 부스러기를 받고 나갈 때 성경이 일부러 가롯 유다 앞에다 뭘 쓰느냐하면 시몬의 아들이라고 해요. 그걸 뭐 하러 거기에다 쓰냐고요? 한 번도 안 쓰다가. 시몬이란 말이 뭐라 그랬어요? 물이 없음. 광야. 사막. 모래. 시몬의 아들 유다가 부스러기를 받고 밤으로 나가더라, 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에게 필요한 게 정작 뭐였어요? 물! 정결한 물. 그런데 포도주는 그가 나간 다음에 주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떡만 먹고 부스러기로 나가버렸다니/가요.

그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요. 그 음부라는 말은 하대스. 하가 부정접두이고 대스는 말하다, 에서 나온 거니까 하대스는 말이 없는 것, 진리가 온전치 않게 회자되는 곳을 하대스라 그래요. 이 세상이 그래서 지옥인거예요. 여러분. 음부에 떨어졌어요. 하대스. 그러면 물이 없는 곳. 말이 없는 곳에서 그가 원하는 게 뭐겠어요? 물! 이제 알았어. 내게 필요한 건 물 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럼 뭘 달라 그래요? 물 주세요, 그래야 돼요. 그 다음절 누가복음 16장 24절 보겠습니다.

눅 16: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러요.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아브라함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믿음의 조상 그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이 어떤 무리의 아버지란 뜻이잖아요? 그런 일반 명사로. 그러니까 어떤 무리, 교회의 아버지, 하나님. 비유에요. 이거 비유. 실지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 아버지. 어떤 무리의 그 아버지. 제가 언제 그 하나님을 아버지, 어머니.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에게 간다. 그럴 때 그게 부모를 으로 해석해도 되지만 ‘부모로 떠나‘ 이거든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하나님을 어머니라고도 해요. 제가 나중에 설명을 해드릴 날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그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잔 말에요.

부자가 하늘의 아버지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해요. 그러면서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해요. 말이 없는 메마른 혀. 그래서 성경에 벙어리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벙어리는 여러분, 벙어리란 병은 없어요. 다 귀머거리가 벙어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벙어리도 소리는 내는데 듣지 못해서 말을 만들지 못하는 겁니다. 그 말이 없는 메마른 혀. 엉뚱한 말로 오그라든 그 혀. 거기에 말씀의 물을 적셔서 그 혀를 살아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그 부스러기 같은 말, 그 모래 같은 말. 그걸 적실 수 있는 물이 뭔지 먼저 조명을 해보고 가야 되겠죠? 이 땅의 부자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그런 물, 그게 뭘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물은 진리의 말씀이에요. 성경에는 항상 위엣 물과 아랫물이 등장하는데 아래의 물은 바다로 표기가 되어서 저주의 물, 왜냐면 위의 물의 모형인데 이 이게 진짜인 줄 알면 이건 저주의 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위에 물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슬, 비. 이런 거. 이른 비, 늦은 비. 이런 거 다 은혜를 상징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참이슬만 먹는 거 괜찮아요.ㅎ 그런데 우박이 떨어지면 큰일 나는 거죠.

창세기 1장 1절 보세요.

창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당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늘과 땅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시작 하셨어요. 그러나 여기에서의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여러분. 엘로힘 으로서의 하나님이에요. 엘로힘은, 알레프가 하나님인데 그거의 복수가 엘로힘 이거든요. 하나님들이란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들. 그래서 뭐 어줍지 않게 뭐 삼위일체, 알지도 못하면서 그딴 얘기들 하는데 그런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들. 인간들에게 설명이 가능한 그런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것도 그런데 하나님의 실체는 아니에요. 그 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거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하나님이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래서 복수로 쓰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설명을 해 가시는가 하면 땅으로 하늘을 설명해 가셔요.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정말 하늘이 존재합니까? 파란 하늘, 뭉게구름 떠있는 하얀 하늘. 노을 빛 물든 누런 하늘. 그러니까 형이상학 적인 그 하늘 말고 형이하학 적인 그 하늘. 그 하늘도 진짜 있어요? 로켓트 타고 열심히 올라가면 거기에 닿을 수 있나요? 하늘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늘이 있는 것처럼 살죠? 그렇게 생각해요. 하늘을 그려놓고 그냥 하늘이라고 불러요. 죽어라고 올라가 봐야 그건 없다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하늘을 상정을 하고 추론을 허느냐 하면 바다를 보고 하늘을 그려요. 땅의 것을 갖고 하늘을 그린단 말입니다. 마찬가지에요. 성경은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을 설명하는데 땅의 것에서 하늘을 읽어냈을 때 그 땅의 것을 하늘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요 하늘의 진리를 이해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하늘들‘이라고 해요. 헬라어 원어로 보면요 ’하늘들‘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그 단어는 전부 교회를 가리켜요. 하늘이라고 그래요. 예를 들어볼게요. 헬라어로 하늘이 우라노스거든요. 그 우라노스라는 단어는 호로스라는 단어에서 왔어요. 호로스는 산이란 뜻이에요. 산. 그런데 그 호로스라는 단어에서 호르니스가 나오는데 그 단어는 또 새에요. 그러니까 이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우라노스, 호로스, 호르니스 이런 단어들이 나오면 금방 그 연관성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단어들이 전부 다른 단어들이기 때문에 이게 도대체 뭐야? 이렇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 사람들은 호로스, 산이란 단어 앞에 관사를 붙이면 그건 반드시 성전이라고 읽었어요. 왜?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이렇게 평지위에 산하나 덜렁 있는데 바로 거기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와? 산에서 와,라고 할 때, 그게 성전이에요. 그걸 우라노스라고 하고 그 앞에다가 또 관사를 붙이면 호우라노스도 성전으로 금방 이해를 했어요. 그 사람들은요 그러니까 성전, 옛 성전을 갖고 진짜 참 성전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럼 그 성전을 가죽으로 덮고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뭘 새기라고 했어요? 새! 이게 다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라고 했을 때 그건 새 지나가는데 쳐다보라는 게 아니라 성전을 보라는 거예요. 들에 피는 백합화를 봐라, 백합화 보면 뭐? 알러지만 생기지. 들이 뭐에요? 광야. 광야라는 단어에요.

광야는 뭐에요? 교회. 백합화는 뭐에요? 성소 안에 들어 있는 등경에 모양이 백합화였어요. 다 성전을 가리키는 거란 말에요. 성전을 봐! 아래 거를 봐, 땅의 것을 봐. 그리고 그걸로 곡해하지 말고 거기서 하늘을 읽어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새의 날개,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고 그들을 건져냈다. 라고도 하고 또 내가 날개 아래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 이런 말도 하고 그러셨던 거예요. 그런데 이 땅의 옛 성전은 율법주의의 대명사잖아요? 그죠? 그 옛 성전은. 그게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한 새의 날개가 될 수 있으며 하늘이 될 수 있는가 왜? 호호라니스, 호로느니스, 호우라노스를 같이 쓴단 말에요. 성경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느냔 말에요.

땅의 것에서, 이 모형에서 하늘의 것, 진리를 읽어내면 그걸 곧 하늘이라고 부른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우라노스, 하늘들 이란 다어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하늘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헬라어는 히브리어세서 이렇게 왔으니까, 솨마임이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쉠이라는 단어와 마임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에요. 쉠은 ‘거기’, 마임은 ‘물’. 그래서 하늘은 뭐냐 하면 거기에 물이 있다. 는 뜻이에요. 그걸 하늘이라 그래요. 히브리 사람들은. 쉐마임. 거기에 물이 있는 거. 물이 있는 거.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서 생명의 실과를 맺히게 하는 곳. 그곳이 하늘이에요. 그래서 에덴에도 굳이 네 줄기의 강이 흐르는 거예요.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수의 강이 흘러요. 그래서 전 세계에도 항상 뭐, 우리나라도 사대 강 유역 개발, 전 세계에서도 사대 강 문명, 사대 강 유역의 문명, 이렇게 왜 그 어마어마한 강들이 많은데 왜 꼭 사대 강이라고 이야기를 할까요. 여러분?

물이 있는 곳,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진리의 물이 있는 곳을 솨마임, 하늘이라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 안에 그 진리의 물,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실과를 맺히게 할 수 있는 그 물이 있으면 여러분이 뭐예요? 솨마임, 하늘이란 말에요. 하늘.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렸을 때 동화책 속에서 읽었던 그런 개념들을 다 버리라니까요. 어디 저기 천사가 아니, 선녀가 두레박 타고 내려오는 그런 하늘이 성경에 적혀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맨 동화책처럼 성경을 읽으니까 전부 그런 하늘을 기다리고 천국도 어디 저 우주 저편에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줄 아는 거예요. 아니란 말에요.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 물이 있으면, 진리가 있으면 여러분이 ‘하늘’이 돼요.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물에’, ‘파님’, 거기 파님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이렇게 나타난 걸

‘파님’이라 그래요. 그걸 또 얼굴이라고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나이다. 이랬을 때 그거는 하나님의 얼굴을 진짜 뵌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파님’이 뭐예요? 말씀으로 나타나니까 아, 말씀이 뭔지 알았다는 뜻이에요. 성경에서 얼굴을 뵈었다는 거. 그게 ‘파님’이거든요. 그 물에 ‘파님’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파님’. 나타난 걸,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나타난 걸 그 물에 ‘파님’, 나타난 걸 하나님의 신, ‘영’이라 하자. 이런 말이에요. 그걸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 그러죠?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땅의 부스러기를 먹는 자들. 이 세상의 부자들은 물이 없어서 결국 모래로 죽는 거예요. 부스러기로 죽는 거예요. 거기에 반드시 물, 말씀, 호흡, 생기, 르와흐가 부어져야 더스트가 아니에요. 그때는 생령이 된단 말에요. 하이네피시 하야가 되는데 그게 빠지면 부스러기라니까요. 그들은 그 영, 말, 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 말을 전부 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선악과 먹은 자니까 그게. 그래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그 말씀만 하고 있다니까요 창세기 1장 1절부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진리와 대적하기 위해 항상 무얼 밟고 서요? 바다 모래. 그러죠?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도 바다와 땅의 경계, 바닷가,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죠? 그게 뭐예요? 모래지 뭐예요. 모래.

마태복음에서도 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멸망의 때에 전부 무너지게 된다, 그러고 반석위에 지으면 든든하게 선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여기 건축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진짜 단단하게 움직이지 않게 집을 지으려면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요 굉장히 견고하대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녜요. 예수님이 지금 건축기술 가르쳐주는 거 아니라니까요. 반석은 뭐예요? ‘추루’. 그 단어 자체가 물을 내다, 라는 뜻이에요. 돌이라는 의미보다 반석, ‘추루’ 라는 단어 자체가 물을 내다는 뜻이에요. 모래위에 너희들이 성전, 집을 지으면 그게 옛 성전이 되는 거고, 물을 내는 그 반석위에 집을 지으면 그게 참 성전이 되는 거다, 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물이 있어야 돼요. 진리의 말씀인 물. 거기에 물이 있는 거예요. 하늘, 그 물, 그렇게 이 땅의 부자들은 말씀을 부스러기고 먹고 물이 없어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음부, 하대스의 부자가 제발 물 좀 찍어서 혀에 대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하늘 아버지가 뭐라 그래요? 누가복음 16장 25절에.

눅 16 :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너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여기서 고생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생했으니까 여기서 좀 위로받아야 되지 않겠어? 그런 말 아니에요. 그건 해방신학자들이 하는 말이고.

여기에 쓰인 단어가 ‘아가또스’와 카카‘라는 단어거든요. 부자는 이 세상에서 네 좋은 것을 받았다. 이게 아가또스인데 그게 뭐냐면 선하다는 뜻이에요. 부자는 세상에서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난이라도 번역된 단어가 카카,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카카라는 말이. 너는 세상에서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어. 왜? 날마다 연락했잖아요. 열심히 깨끗하게 살아서 행복을 쟁취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 아가또스,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나사로는? 그 율법주의 밖에서 진리만 받아먹고 있었으니 무가치한, 이 세상은 그를 무가치하게 평가한단 말에요. 진리가 밥 먹여 주냐? 진짜 사는 건 그길 밖에 없는데 세상은 그런다니까요. 진리가 밥 먹여 주냐? 그저 웃지요 뭐. ㅎㅎ 그래서 그 부자는 말이 없는 곳, 그 하대스에서 못 나간다. 못 나간다. 그랬더니 부자가 뭐라 그래요? 나에게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비유예요. 예수님이 지금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섯 하면 생각나는 게 뭘까요? 왜 예수님이 여섯도 아니고 열도 아니고 일곱도 아니고 다섯이라고 했을까요? 율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 오경. 율법. 율법주의 전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내려가서 그들에게 이야기 좀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믿을 겁니다. 율법을 부스러기가 아닌 떡으로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요. 27절 보세요.

눅 16ㅣ 27

가로되 그러므로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는 누구예요? 구약이에요. 율법. 구약 성경이 있어. 그런데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너와 똑같이 이곳에 와야 돼. 이러는 거예요.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니까 그런다니까요. 단 그 율법을 부스러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속에서 생명의 떡인 예수를 읽어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거기를 모면할 수 있어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제사장, 율법주의 상에서 떨어지는 율법을 ‘푸소미온’이 아니라, 부스러기가 아니라, ‘푸시키온’ 조각으로 받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얘기에요. 모세와 선지자를 예수, 떡으로 받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에요. 누가복음 24장 44절 보세요.

눅2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에요)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모세와 율법을 갖고 예수님이 나, 예수를 설명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니까 깨달음이 와요. ‘호라오’가 일어나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났는데 못 알아봐요. 그 때 예수님이 말씀을 설명해주시자 그들이 뜨거워지고 예수를 알아보자 가버리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떡 떼어주고 가죠? ‘푸시키온’이에요. 괜히 떡이나 하나 먹어라 그러고 가신 게 아니라, 말씀이야기 하는 거예요. 진리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늘 아버지가 ‘하대스’에 있는 부자에게 바로 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율법 속에서 진리이신 예수를 들을 수 있어. 분명 들을 수 있어. 은혜가 가입하면. 그랬더니 부자가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눅 19 : 30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 하리라 하신지라

그렇지 않대요. 모세와 선지자, 즉 율법에서 진리를 못 듣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저희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겁니다. 그래요. 이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가면 그들이 신기해갖고 어떻게 죽었는데 살았지? 이래갖고 믿을 겁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았다는 건 예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그거면 구약과 상관없이 그렇게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라 그래요? 우리의 아버지가 뭐라 그래요? 안 돼! 그래요. 그들이 말씀 속에서 진리와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 이야기를 똑같이 해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 네가 있는 곳에서 못 벗어난다 그 말이에요. 하대스에서 못 벗어난다.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십자가 얘기하고 부활얘기 한다고 다 기독교 아닌 거예요.

그게 뭔데요? 진짜로. 여러분 그게 어떻게 믿겨지세요? 고민을 해보시라니까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니까. 십자가는 뭐고, 부활은 뭐냐고요? 그게 여러분과 진짜 관계가 있어요? 어떻게 관계가 있는 겁니까? 말씀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서 복음을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못 듣고 법으로 듣는 이들은 예수님이 실지로 이 세0상에서 계실 때 설교를 많이 하셨는데 그걸 다 진리로 못 받아들였잖아요. 살아난 분이 얘기를 하면 뭐라고 받아들이느냐 하면 아, 그래 저걸 교훈 삼아서 저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인다고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가 와서 설교를 해도. 그러니까 그건 예수님이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절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그냥 그 예수를 보고 야, 저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대. 아니, 저분이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대. 그러니까 저분을 열심히 섬기자. 이게 여러분의 영생과 무슨 상관있냐고요? 잘 생각해보세요. 이거를 건강한 신앙이라고 착각들 한다니까요. 그리고 내가 예수를 섬기고 있고 믿고 있다고 얘기를 해요. 저분이 내 죄를 대속하셨대. 그러니까 저분을 열심히 섬기자. 그게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냐고요. 예? 그게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냐고요. 그분을 섬겨서.

그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고 그 살아남이 곧 나의 살아남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거예요.아, 저분은 그렇게 죽어야 되는 거였구나. 그리고 거기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향유 옥함 깨가지고 예수님에게 부은 그 여자가 ‘빨리 죽으세요.’ 하고 부은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죽어야 일곱 귀신 들렸던 내가 사니까.

성경말씀을 표피적으로만 해석을 해서 부스러기로, 율법의 조항으로만 보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칭 성도들이 다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해요. 축하도 하고 기념도 하고 금식도 하고 통곡도 하고 별거 다 합니다. 그럼에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을 그냥 율법으로만 보게 되면 그건 부스러기, 물 없는 빵, 모래가 되어 그를 죽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석이 ‘추루’, 생수를 내다는 단어임에 반해서 부정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라에서 그 돌은 ‘에벤‘이에요. 그건 하나님의, 벤이 뭐라 그랬어요? 아들! 이란 뜻이에요. 그 돌이라는 단어가요. 하나님의 아들로 때려죽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들에게 진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거 맞고 죽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누구에게는 그게 거치는 돌이 된다. 예수 때문에 죽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맞아 죽는 이들이 부자예요.

여러분, 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늘의 모형이라고 히브리서가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담겨있다. 그래요. 그릇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만물, 그리고 그 만물들을 붙들고 있는 어떤 법칙과 현상들 까지도 다 하늘의 것을 모형하고 있는 거지요? 그건 진짜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진짜가 있는데 모형이 있으면 이게 뭐예요? ‘가짜’라 그래요. 이거를요. 그리고 참이 있는데 그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가짜 그릇은 뭐예요? ‘거짓’이에요. 이게. 그렇다고 이 가짜와 거짓이 나빠요? 이걸 통해 여러분이 그 진리를 알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그 아가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그게 하늘이에요. 그 땅의 것으로 하늘을 설명하는 게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땅의 것 중에는 성전도 들어가 있지만 성경도 들어가 있고 여러분의 육신도 들어가 있어요. 그걸 통해서 하늘을 배우면 그 육신도 하늘이 되는 거예요. 물론 나중에 바꿔주겠지만 그래서 이건 아주 쓸모없는 게 아니에요. 사랑해주세요. 이것도요. 성경 마찬가지에요. 그 성경에서 예수, 진리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가짜예요. 그게 거짓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거짓을 그대로 계속 설교하면서 착하게 잘 사세요, 그러면 복 줄 거예요. 하늘에서 상이 커요. 면류관 줄 거예요. 그걸 ‘거짓말’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거짓 선지자라 그래요.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세상이 나쁜 게 아니라 그 세상만을 진짜요, 참이라 보는 이들이 미련하고 둔한 세대인 거예요. 그게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껍데기를 참으로, 진리로 곡해해서 그걸 열심히 지키고 추구하려하는 그런 이들이 바보인 거예요. 하여튼 인간들의 손만 가면 모든 게 다 망가져요. 그리고 재주들도 좋아요, 또.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 내. 아니, 하얀 양을 주고 얼룩덜룩한 양, 점이 있고 흠이 있는 거 그건 너 줄게 그랬더니 기필코 그걸 만들어 내더라니까. 누가? 야곱이. 발목 잡는 자, 넘어트리는 자, 실족시키는 자가 하얀 양을 주고 점 있고 흠 있는 거 만들어 그거 다 너 줄게 그랬더니 만들어 내더라니 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참 재주도 좋다, 어떻게 그걸 기필코 만들어 내니?’ 인간들의 세상 보세요. 인간들은 기필코 만들어요. 좀 있으면 복제고 뭐고 이제 막 되어서 새로운 종이 생길 거예요. 아마. 귀 이따만하고, 그런데 서서히 생겨서 나중엔 여러분이 다 그냥 인정하며 살게 될 거라니까요. 그렇게 망가져 가는 거예요. 여기는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호 코스모스 속에서 진리, 세상 속에서 진리를 읽어낸단 말에요.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거짓 속에서 참을 보며 가짜 속에서 진짜를 봐요. 요셉처럼 왕의 꿈을, 그 왕도 자기 꿈이 뭔 줄 모르는데 왕의 꿈을, 꿈이 뭐예요? 이 세상이잖아요. 한시적인 거. 꿈이라는 건 항상 깨기 때문에 꿈이잖아요. 안 깨면 꿈이 아니죠. 그게. 왕의 꿈을 세상에서 왕 되고 싶은 자들의 꿈을 하나님의 뜻으로 읽어내는 이들이 반드시 있는 거예요. 세상 속에서, 이 꿈 같은 세상에서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내는 이들이 반드시 있단 말입니다.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무엇을 보고 믿는 게 아니라, 그 에이돈, 봄, 에이돈 속에서 호라오,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껍데기에 묶여서 성경을 무서운 율법 책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사랑을 읽어내면서 자유의 함성을 외치는 이들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짜 살아계신 예수를 보고서도 율법에 묶여서 그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처럼 예수를 본 적도 없는데 말씀을 통하여 그 예수를 보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말씀을 통하여. 전자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저 모형이요, 가짜일 뿐이죠.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왔는데 사람으로 왔어요. 진리를 담고 왔어요. 그런데 진리로 못 알아먹어. 그러면 그 예수는 가짜예요.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예수는 거짓말쟁이라니까요. 예수님이 진리를 담고 왔잖아요. 내가 진리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그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으면 그 예수는 필요 없어요. 이제요. 아, 이거였어요? 해야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단 말에요. 지금도. 우리는 그 진리의 그릇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인 진리를 깨달아야지 그 예수라는 껍데기를 숭앙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진리를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와 십자가는 ‘파팀’ 쇼 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가치 없다는 게 아니에요. 그게 진리가 될 때, 그게 가치가 있는 거지 나와 아무상관이 없을 때 그건 그냥 쇼라니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처음 하신일이 뭐예요? 설교에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랬지요? 그거는 예수님이 야, 이제 내가 살아났으니까 안심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거기에 적어 놓은 게 아녜요. 예수님의 설교를 또 적기가 뭐하니까 성경기자들이 ‘평강이다!’ ‘에이레네’, ‘피민’, 너희들은 평강이다! 이렇게 한 어구로 어떤 걸 축약해서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평강, 에이레네가 뭐라 그랬어요? 소가 멍에를 두 마리가 항상 맨다. 그랬어요. 히브리 소는. 멍에를 소 두 마리가 함께 매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걸 형상화시켜서 그려놓은 걸 에이레네라는 단어에요. 요걸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래서 소예요. 그러니까 평강이다! 그러면 예전에 제가 한 번 설명해드렸는데 열왕기상 9장에서, 성전 짓기가 완료된 거를 성경이 한 단어로 ‘샤롬’, 샬롬이라 그래요. 평강이라 그래요. 진짜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그걸 평강이다, 그래요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 완성 되었을 때. 야, 이제 이게 진리가 완성됐구나, 하나님의 뜻이, 언약이 완료가 됐다, 그랬을 때 그거를 평강이다, 그래요. 그때 그 평강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게 교회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부활하셔서 이제 일이 끝난 거예요. 너희가 평강이다! 그러는 거예요. 에이레네 피민. 설교를 하신 거예요. 그랬더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먹죠? 평강이다, 그러니까 알아먹었어요. 처음엔 못 알아먹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어요. 잠깐 화장실을 갔는지 어딜 갔는지 하여튼 그것 때문에 이 사람은 지금까지도 의심 많은 도마로 낙인이 찍혀가지고. 아니, 뭐가 의심 많은 도마예요? 나라도 안 믿겠네. 나는 못 봤는데 나머지 제자들이 봤다는 거예요. 그럼 나한테도 보여줘. 그럼 나도 믿을게. 당연히 그래야죠. 그 제자들, 불과 며칠 전까지 누가 높으냐고 서로 싸우던 제자들을 어떻게 믿느냐고요? 네? 예수님 잡혀가는 그날 까지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지 싸우던 고놈들을 어떻게 믿느냐고요? 아, 당연히 난 너희들 못 믿어. 나는 보면 믿을 거야. 그랬단 말에요. 아니 그러면 진짜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 넣어보고 손에다가 이렇게 넣어보고 아, 진짜네? 그랬으면 그걸 진짜 믿음이라 그래요? 성경이? 아니에요.

그러면 성경자체에서 충돌이 일어나요. 저도 예전에 그 원문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냥 당연히, 번역본들만 읽으니까 ‘야, 참 의심도 많은 놈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믿느냐?’ 그리고 ‘어떻게 옆구리 손까지 넣어봐?’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손을 넣어봤다는 대목은 안 나와요. 그냥 우리가 막연히 추측하는 거야. 왜? 나는 그럴 거거든. 그죠? 성경 어디에 도마가 거기 넣어봤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정의를 성경이 다시 내려야 돼요.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게 되면 그게 율법주의가 된다니까요. 아니에요. 거기서 ‘호라오’, 깨달아지는 거를 내가 신앙하는 거예요. 진리를 신앙하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도마가 거기에다가 손을 넣어봤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원문을 찬찬히 보니까 안 넣었어요. 그리고 ‘평강이다!’ ‘휘민’, 이 말씀을 듣자마자 도마가 ‘호라오’ 했다. 그래요. 찾아볼게요. 요한복음 20장 25절 보세요.

요 20: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팔일 째에, 팔에. 팔은? 새로운 시작이죠? 안식 후 첫날이니까 일부러 이런 숫자를 여기에다가 넣는 거죠?)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하고 라는 말은 없어요. 원래)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넣어봤다는 말 없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자 금방 도마가 ‘오! 호 큐리어스! 하나님이네! 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오해를 하게 만드는 구절이 29절이란 말에요.)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본고로 나를 믿느냐

(너는 본고로 나를 믿느냐? 이 나쁜 놈아. 이렇게 보이잖아요? 여기에 의문문이 없어요. 완료 직설법 능동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호라오’하네, 그리고 믿네!‘ 이런 뜻이에요. 너는 어떻게 ‘에이돈’이란 단어가 아니에요. ‘에이돈’는 보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거. 그런데 ‘호라오’라는 단어가 뭐라 그랬어요?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깨닫는 걸 ‘호라오’라 그래요. 그런데 여기에 그 단어가 쓰였어요.

예수께서 ‘너는 나를 호라오 하네, 어떻게 안 만져보고 내 말을 듣고 나를 호라오하지?’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호라오하고 나를 어떻게 믿어?’ 그랬어요. 그리고는 ‘그래, 그렇게 보지 않고 - 여기서는 또 에이돈이예요,- 네 눈으로 보는 걸 믿는 게 아닌,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호라오하고 믿는 그들이 복된 거야. 너는 이제부터 그들의 표상이 되는 거야.’ 이 이야기예요. 이거는요. 그래서 도마가 거기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진짜 믿음이 뭔지를 도마를 통해 설명해주는 거예요. 아니, 보이는 거 그까짓 거 손가락 넣어보고 믿는 거 이게 무슨 믿음이냐고요.

그거는요 조금 있으면 또 금방 싫증나고 또 금방 의심해요. 그렇게 인식하여 믿은 거는. 그런데 내가 진리가 되어 내 마음 안에 그 법을 갖게 되면 그까짓 거 안 봐도 돼요. 저는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서 ‘한 번 넣어봐‘ 그럼 되게 귀찮아 할 거 같아요. 안 넣어 봐도 믿는데 왜 그걸 넣어보냐고요. 그거를.

여러분 믿음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눈에 보이는 거. 신비주의자들 한 번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게 말씀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하니까 미친 짓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 그냥 호 코스모스, 세상이라는 걸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예수를 향한 열심을 내 놓는 그것도 역시 ‘보고 믿겠다. 라는 거예요.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대로 행하겠다. 이거. 아니에요. 그 안에서 진리를 보셔야 돼요. 그리고 그 진리가 되셔서 여러분이 하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도 그러잖아요. 우리가 거룩한 ’나라‘. 네가 천국이야. 네가 하늘이야. 그러잖아요. 그게 내 안에 진리로 사랑으로 딱 간직되어 있어보세요. 

물론 우리 육이 늘 방해를 하고 우리를 계속해서 넘어트리지만 뭐 부러운 게 있어요? 그거? 뭐 대단하게 부끄러운 게 있냐고요. 이 까짓 몸뚱이에 일어난 일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상처로 갖고 있고, 또 이 까짓 몸뚱이에 두른 금테가 뭐 그렇게 자랑스럽냐고요. 내 안의 그 진리가 진짜인데. 그게 진짜 생명인데. 다른 데에 눈 두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그냥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뭐 교회에 와서 꼭 무슨 교제를 하고 이래야 돼요? 구역을 만들어 달라는데 그거 꼭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서 뭐하려고? 쌈질이나 하지. 그냥 편안하게 맘이 맞는 사람들끼리 그냥 교제하세요. 그런 거 하면 또 그 담당하는 목사 Hire(고용) 하고 이래야 되는데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 그렇게 교인들 관리하는 거 아녜요. 뭘 관리해서 왜 잡아 놓으려고 해? 이거를. 자리도 없는데. 이해 안 되는 사람은 빨리빨리 다른 데로 가야지. 그러면요 혼자 있어도 행복해요. 괜찮아요. 뭐가 외로워요? 그리고 그 하늘이 된 내가 한 없이 사랑스러워 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주신 내 주변의 작은 것들, 내 가족들 다 그냥 귀하고 가치 있고 사랑스러워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뭐 별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하늘이라 불러주십니까? 땅의 것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고 더럽고 유일하게 하나님을 거슬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그런 존재인 나를 어떻게 하늘들이라 부르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 안에 이렇게 진리를 심으셨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우리 하나님, 그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그날 기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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