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1 번째 말씀
제목 : 누구 옆에 설 것인가?
본문 롬 6 : 15 - 18절.
15- 그런 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의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리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화두처럼 안고 사는 질문이 이겁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며 주위와 비교를 하죠? 그래서 나를 구축해가요. 그리고는 그 주위와 비교해서 비교 우위라는 판단이 설 때, 기뻐하고 으쓱해하며 비교 하위라고 판단이 되면 울적해 하죠? 실망합니다. 그 비교의 내용은 소유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됨됨이 일수도 있어요. 종교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수시로 꺼내서 확인해 보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를 평가해요. Who I am, 그
내가‘ 누구인가? 의 그 나를 구축하고 적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What I do?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하나하나 세어서 쌓죠? 그러나 성경은 Who am I를 묻지 않습니다. 사실은.
Who's am I를 확인하도록 종용해요. 넌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 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What you did 아니고 심지어 Who you are도 아니에요. Who's you are, 너 누구 거야? 예요.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어요. 죄의 종과 의의 종. 이렇게 딱 두 부류입니다. 중간은 없어요. 제발 미리 추측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기존에 배웠던 것처럼 죄의 종은 죄만 짓고 의의 종은 선한 일만하는 하는 이들일 거라는 그런 선입견부터 부수시고 오늘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두 종류의 종이 나오죠? 죄의 종과 의의 종.
그 종이라는 단어가 둘로스에요. 둘로스. 둘로스 선교단, 둘로스 찬양 단, 뭐 많죠?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순종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휘파코스 에요. 그 두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해 갈 건데 그 두 단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그냥 얼핏 보면 이제 의의 종이 되었으니까 그 의에 절대 순종해서 의의 종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권고처럼 보이잖아요? 그렇죠? 금방 잊어버리셨어요? 같이 읽었잖아요? 그렇게 보이잖아요.너희는 의의 종이잖아 그러니까
죄에게 너희를 드리지 말고 의의 종다운 삶을 살아. 이렇게처럼 보인단 인단 말이죠.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와 순종이라는 단어를 그런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그러한 종류의 내용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이라는 말부터 이해를 하고 가야겠어요. 그 히파코스라는 단어를 헬라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우리말로 순종이라는 의미는 없고 경청, 응납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전에도. 경청, 응납. 그 단어는 히파코흐라는 단어의 명사형이다, 라고 친절하게 거기 쓰여 있는데 그 휘코흐라는 단어를 이제 찾아가 보면 그 단어는 주의 깊게 듣다. 라고 쓰여 있어요. 그 단어를 분석하면 전치사 휘포와 아쿠오란 동사의 합성어거든요. 아쿠오는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배웠죠? 너희가 들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다. 이렇게 들었다 할 때 그 단어에요. 들었다. 아쿠오. 휘포는? 아래. 그러니까 아래에서 들었다. 잘 들었다. 아래에서 듣는 건 윗사람이 얘기할 때 잘 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게 경쳥 이에요 그걸 이제 순종이라고 번역을 한 거죠.
그러니까 경계 아래에서 들어서 경계 위의 사람이 되는 것. 요게 순종이에요. 그러니까 경계
가 있고요 요걸 하늘이라고 해보자고요. 경계가 있고 그 아래 사람 인 자가 있는 게 뭐죠? 아래 하자에요. 그것이. 경계 위에 사람 인 자가 있으면? 윗 상자 란 말에요. 그러니까. 경계를 중심으로 아랫사람이 아래에서 들어 위의 것으로 이해하여 윗사람이 되는 거. 이게 순종이란 말에요. 이게.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그 순종이라는 단어는 먼저 들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듣다, 이 들음을 전제하는 거예요. 아쿠오. 그리고 그 들음에, 내가 들은 그 들음의 내용대로 호에오, 되어지는 것. 그게 순종이에요. 완전한 순종이에요. 그게. 내가 들은 것대로 내가 되어지는 것.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예를 들어 진리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성경이 구구절절이 다 진리로 보이면 그 사람이 순종의 상태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들려주려 한 구구절절이 다 진리라고 했잖아요? 성경은. 그러한 성경이 들려주려 한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말씀을 그것으로 이제 간직한 이가 된 거잖아요. 그 말은 그의 눈에는 이제 모든 게 내용인 진리로 보이게 되었다는 거죠? 그 말은 그가 그 진리가 되게 하고자 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잖아요. 고걸 순종이라 그래요. 성경이 한 말을 여러분의 행위로 다 지켜내는 걸 순종이라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순종이라는 건 자기 마음까지 자발적이 되었을 때 그럴 때 순종이라고 하는데 우린 대부분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는 순종이라 그런다니까요. 성경은 그걸 순종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벼른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 존재보다 힘이 세면 언제든지 내가 죽일 거 이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순종이라니까요. 이렇게 순종은 내가 들은 걸 내 방식 내 마음으로 깨달아서 그것으로 간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귀가 잘못 되면 엉뚱한 순종을 하게 되고 그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종은 뭔가? 둘로스. 헬라어 둘로스라는 단어는 영어의 그 써번트라는 개념이 아니라 슬레이브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돼요. 우리말로 적당한 단어가 없는데 굳이 한 단어를 찾으라면 노예라고 번역을 하면 돼요. 노예. 그러나 엄밀히 말해 둘로스는 노예 정도가 아니라 그 주인의 부속품이란 뜻이에요. 부속품. 한 부분. 부속품. 짜칼과 네케바처럼 이렇게 하나로 묶여 있어서 주인과 하나로 존재하는 것. 떨어질 수 없는 것. 이게 둘로스에요. 사실은.
고대의 수중전에는요 배 밑의 함정에서 항상 노를 젓는 노예들이 있었죠? 그 노예들은 벤허 같은 영화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쇠사슬로 배에다가 딱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배가 침몰할 때 그거 안 풀어줘요. 왜? 그 노예는 그 배의 부속품이거든요. 그런데 배가 침몰하는데 부속품이 도망가면 안 된다고 해서 안 풀어준단 말에요. 그걸 노예라 그래요. 둘로스라고 해요. 그걸. 그렇게 하나로 묶여 부속품이 되어버린 상태.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온 그 죄의 종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죄가 시키는 대로 죄만 짓는 사람이이라는 의미 보다는 그러면 죄한테 자꾸 책임전가 시킨단 말에요. 쟤가 시켰대요. 이렇게. 그게 아니라 그냥 죄, 이 자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죄와 연합이 되어서 죄의 한 부분. 죄로 존재하는 것을 죄의 종. 둘로스라 그래요.
우리가 그냥 죄의 종 그러면 죄라는 아주 나쁜 놈이 있고 그 나쁜ㄴ놈이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덜 나쁜 나! ㅋㅋ 요렇게 이해를 한단 말에요. 죄의 종을. 그게 아니라고요. 그 부분, 그거에요. 종이라는 건. 그러니까 그 모든 행위와 사유는 다 죄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죄의 종이니까. 죄의 부분이니까. 그러니까 그는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 자기소유를 다 팔아 세상을 구제하고 재산을 수백억을 기부해서 기부 왕이 된다거나, 아침마다 나와서 밥을 퍼준다거나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을 해도 죄의 둘로스인 상태에서 그걸 하면 그 자체가 다 죄에요.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그게 전부 죄라니까요.
반면에 주의 종은 주인이신 하나님과 주는 항상 그리스도로 번역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큐리오스는 아도나이의 번역이니까. 주는 하나님이란 말에요. 그 중의 종이라는 건 주님과, 하나님과 하나 된 부속품이잖아요. 이렇게 하나된 것. 그래서 그 둘로스는 아들이라고 읽어야 되는 거예요. 그 둘로스가 그런 단어라니까요. 종은 종인데 그게 의의 종. 주의 종이 될 때는 아들이 되고 죄의 종이 될 때는 죄 자체가 되는 거예요. 죄의 부속품, 부분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죄의 종이 된다 그래요? 오늘 본문을 잘 보면? 너희 자신을 드려 종이 된다, 그러죠? 너희 자신을 드려. 이 어구도 잘 못하면 내가 나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을 발동을 해서 죄와 의 그 어느 편에든지 나를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죠? 지금? 그러니까 어느 편에게 드려, 라는 말을 하잖아요. 한국말로.
그러면 너희가 선택한 그 선택에 의해 죄의 종도 될 수 있고 의의 종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보인단 말에요.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우리가 의의 종도 될 수 있고 죄의 종에 머물 수도 있고 그런 거예요? 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기의 주권을 상실한 단어란 말에요. 종은 주인에 의해 이리 와 그럼 끌려가야 되고 또 이리 와 그럼 저리고 끌려가야 돼요. 자기의 선택은 없어요. 결정도 없어요. 여기에서 ‘드려’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우리가 바로 위에서 공부했잖아요? 의의 병기로 너희를 드려라, 너희 몸을 드려라 할 때 그 단어에요. ‘파리스테미’, ‘파라’. 옆에 곧게, 굳게 서다. 똑바로 서라. 라는 말이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이 ‘이스테미’에서 ‘스타오로스’ 라는 단어가 나온 거예요. 스타오로스가 뭐예요? 십자가. 굳게 선 것. 언약. 기둥. 이렇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원래의 뜻은 세워진 것. 언약 이라고 했어요. 기둥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가 아닌 이렇게 박혔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렇게 그 이스테미라는 단어와 함께 세우다, 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는 게 ‘티데미’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세우다, 라는 단어인데 이렇게 횡으로 차례대로 세우는 걸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성전. 호 코스모스가 뭐라 그랬어요? 차례와 차서를 가지고 질서를 가지고 차례, 차례 설명을 하여 그 지성소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게 호 코스모스, 이걸 세상이라고 하다 그랬잖아요. 그렇게 차례, 차례 설명을 하는 그걸 티데미 라 그러고. 요렇게 세워서 설명하려고 하는 걸 내가 다 이해를 하여 깨달았을 때 이렇게 위로 세우는 거, 종으로 세우는 거를 ‘이스테미’ 라 그래요. 그 언약이 이거라니까요. 십자가가 이거라고요.
이 세상에 이 우주 만물 인간, 성전, 성경 이런 호 코스모스, 차례대로 티데미하여, 세워 놓아 설명하려고 한 걸 누군가가 깨달아서 굳게 세우면 그가 바로 십자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굳게 선 기둥, 십자가 이 언약이 바로 이 티데미를 다 설명하고 있는 거란 말에요. 이 설명하고 있는 게 이 십자가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란 뜻이에요. 그래서 티데미를 다 이해해서 아, 이거? 했을 때 굳게 서는 걸 ‘이스테미’, ‘스타오로스’. 십자가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늘, ‘호 오라노스‘, 성전이라고 했죠? 그러는. 성전을 주세요. 그런데 그 성전을 통하여 아, 이게 뭍이구나, 이게 하늘이구나! 이게 진리로구나, 라고 이해를 했을 때 그가 언약이 되는 거예요. 언약의 주인공이 되는 거죠. 그 때 그 십자가가 그의 것이 되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그렇게 그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을 ’아나스타시스‘, 부활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단어도 ’아나‘와 ’이스테미‘의 합성어거든요. ’아나‘는 뭐예요? ’에피‘가 공간적 위이고 ’아나‘는 존재적 위의 것이에요. 위에서 나다. 어딘지 몰라요. 공간적 위, 그럴 땐 ’에피‘인데 ’아나‘는 그 존재 적 위. 위의 것으로 굳게 서는 걸 성경이 아나스타시스, 부활이라 그래요. 그 단어가 오늘 분문의 그 ’드려‘에 쓰이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드리는 건 내가 드리는 거예요? 아니에요. 언약에 의해 내가 되어지는 거란 말에요. 따라서 그 ‘드려’, ‘파리스테미’란 말은 우리의 의지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속에 들어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진리의 눈과 귀를 선물 받아서 땅의 것 속에서 깨닫고 살아나서 위의 존재로 우뚝 서는 것. 이 모든 걸 함의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드려라’, ‘파리스테미‘도 그가 드리는 게 아니라 드려짐이 되러라, 라는 뜻이에요. 네가 드려짐이 되어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반복하여 ’휘파쿠오‘, ’휘파쿠스‘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라 그랬어요? ’아쿠오‘? 듣다, 들음. 그런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듣고 되어짐. 이게 순종이란 말에요. 그걸 순종이라고 번역을 한 거예요. 듣고 되어짐을요. 하나님께서 아래의 말로 위의 것을 설명해주세요. 그게 성경이고 자연이고 사람이고 자연의 법칙이고 다 그런 거죠? 다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아래의 수준으로 보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래에 속한 거예요. 그냥 그것대로 보고 그것대로 이해를 하면 그걸 아래에 속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을 아래에서 났다, 라고 한단 말에요. 그걸 아래의 종, 죄의 종이라 그래요. 율법의 종. 옛 성전의 종. 그 부분이니까. 그 지체니까. 그렇게 아래의 것으로 보고 들은 걸 그것 그대로 내가 갖게 되면 그것 자체가 순종이라 그랬죠? 아쿠오가 경청이니까. 듣다, 라는 말이니까. 아래의 것으로 듣다. 근데 나쁜 순종이란 말에요. 그거는. 나쁘게 되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아래의 것을 아래의 것으로 듣고 아래로 이해를 하여 그 아래 화 되는 거예요. 그럼 그냥 흙이에요. 그냥 그거는. 그냥 더스트라 그래요.
그런데 그 아래의 것을 가지고 위의 것을 듣고 보는 이들이 있어요.예를 들어서 희생제사 드려! 레위기에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율법입니다. 희생제사 드려! 아래의 말이죠? 분명히. 희생제사 드려! 율법. 옛 성전의 말이란 말에요. 이 말을 갖고 희생제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시는 그 스타오로스, 언약의 영단번의 제사야!를 위의 것으로 이렇게 알아듣게 되면 고게 순종이란 말에요. 고 내용이 뭐예요? 그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디카이오스’. 의!,잖아요. 그래서 그를 의의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위의 것으로 알아듣는 이를. 의의 종이라 하는 거란 말에요.
자, 이상의 내용을 갖고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해석해 보세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종이 뭐라 그랬어요? 둘로스. 부분으로 드려 세우라. 옆에 세우라. 어디에? 누구에게든지 양쪽이 있어요. 어느 양쪽? 죄와 의. 너희들은 이제 드려짐이 될 거야. 드려짐이 되는데 그래서 양쪽에 서게 되는데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들은바 대로 그 들은 것이 되어 어느 편이건 설 텐데 그러면 너희는 그 편이 되는 거야. 라는 말이에요. 지금.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이는 죄로 들어서 사망이 되고. 어떤 이는 의로 잘 듣는다. 거긴 뭐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는데 그 단어들은 없어요. 그냥.
너희는 어떤 이는 죄로 들어. 그 들음을 죄로 들어 사망이 되고 그리고, ‘카이’ 어떤 이는 잘 듣는다, 에요. 의로 듣는다. 로마서 6장 17절 보세요. 바로 그 다음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그럼 지금 이걸 듣는 이들은 의의 종들이죠?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의는 ‘디카이오수네’인데 그 헬라어 맨 뒤에 ‘수네’가 붙으면 무조건 그것이 된 존재란 뜻이에요. 존재. 그러니까 ‘디카이오수네’는 ‘디카이오스’ 하나님의 그 의가 된 자예요. 그 의가 된 자. 의가 된 사람. 거룩하게 구별된 이들. 그들에게 지금 이 말을 주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들이 원래 죄의 종이었다. 그래요. 너희가 본래는 죄의 종이더니 그런데 어떻게 의의 종이 되었다 그래요? 자기가 그들에게 넘겨 준 교훈의 본을 잘 들어서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죠? 잘 들어서. 16절의 그 순종은 ‘휘파코’ 주의 깊게 듣다, 에요. ‘휘파코스’도 아니에요. 거기는. 그냥 듣다, 라니까요. 잘 들어서.
그러니까 진리의 본이라는 건 도장. 이렇게 도장을 새겨서 이렇게 도장을 푹 찍으면 똑같은 게 이렇게 찍히잖아요? 그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를 어떤 거에 담아서 주는데 그건 아닌 거. 그거를 교훈의 본을 어떻게 너희는 그렇게 잘 들어서? 그런 말이에요. 너희들은 어떻게 잘 들어서 그 교훈의 진의인 진리로 깨달아 의가 되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너희가 의의 종이 됐어? 원래 죄의 종이었잖아?
아, 그런데 내가 보니까 너희가, 내가 그 교훈의 본, 그 아래의 말로 이렇게 설명해 준걸 그거를 너희들이 어떻게 진리로 잘 들어 의의 종, 의의 한 부분이 되었네!
‘디카이오수네’, 의가 되었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들었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랬는데 그건 ‘에크카르디아’ 거든요. 마음, 너희의 마음, 두 마음이잖아요. 우리의 마음은.
‘에크’가 뭐예요? ‘에크레시아’? 밖으로, 너희의 마음 밖으로 들어. 이런 뜻이에요. 마음으로 순종하므로가.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으로 들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두 마음으로 들으면 이거 다 율법이 된다니까요. 그런데 ‘에크카르디아’ 너희들은 어떻게 도대체 그 마음 그 밖으로 그걸 들었어? 그리고는 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요. 그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래요. 중간 정리를 하자면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 백성들을 택하세요. 그리고 그들에게만 ‘르아흐’, 당신의 숨. 호흡, 생기, 성령을 불어 넣으시기로 합니다. 그걸 진리라고도 할 수 있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아요. 왜냐하면 성령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그가 곧 진리다, 라고 서신서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자, 쉽게 말해서 없음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그런 하늘을 인간수준에 맞게 제시해주신 그 본, 그게 본이란 말에요. 그게. 그 ‘티포스’, 그 본을, 인간수준에 맞게 제시해주신 그 본을 진리로 깨달아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걸 호흡, 성령, 생기, 숨, 생명, 진리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게 영생이에요. 그게 살아있는 거란 말이죠. 하나님은 그 하늘의 숨을, ‘르와흐’ 호흡을 아담에게 제일 먼저 불어 넣으셨죠? 사람 만든 다음에 그 ‘네페쉬’ 에다가 생기를 불어 넣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생령이 됐다, 그러잖아요? 아담은 흙, 아파르, 아래의 것, 먼지 티끌. 그 아래의 것이었는데 그가 그 아래의 것으로 뭐로? 선악과로. 아래의 것이라는 그 선악과라는 그 죄를 가지고 생명에 도달하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는 생명나무, 선악과 이렇게 따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경엔 항상 단수로 나온다고 그랬어요. 동산위의 나무는. 계속 단수에요. 나무, 나무. 영어 성경에도 Trees 라고 되어 있는데 잘 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가 하나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서는 선악과라 그러고 어디서는 생명나무라 그런단 말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늘의 그 생명은 네페쉬에게,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거잖아요. 그들이. 먼지니까.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니까. 뭘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원래 가져 보지도 못했고 그게 뭔지도 몰라. 담을 그릇이 없어요.
그 때 그에게 그 생명을 뭐로 가르쳐 주겠느냐고? 선악과라는 걸 통해서 그 죄라는 걸 통해서 이게 뭔지를 가르치면 그거 안 할 거 아녜요? 고걸 생명이라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 진리를, 복음을 설명하는 메카니즘이 항상 이래요. 그래서 이 땅에 율법을 주시고는 그 율법이 뭔지를 가르쳐서 진리를 가르쳐요. 성전을 주시고는 진짜 성전을 가르치신단 말에요. 왜? 그거는 우리가 못 알아먹는 거니까.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자, 아담은 바로 그 진리를 갖고 하나님이 바로 그 아담에게 불어 넣어준 그 진리를 갖고 이 진리는 물이라고 상징이 되잖아요? 이걸 계속 아래로 흘려낸단 말에요. 그래서 셋에게 그걸 주고 그걸 흘려 받은 셋이 진리가 되어 또 그 물을 또 흘려주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족보가 하 아담, 하 벤, 인자의 족보라 그랬죠? 그걸 신약에서는 호 후유스, 호 안드로 포스. 그러잖아요. 인자에요. 역시 인자. 그게 인자의 족보란 말에요. 말씀으로 낳는 거예요. 계속해서.
물론, 맨 위에는 하나님인데 누가복음에서 봤잖아요. 아담, 하 아담의 위는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다 소유격이라 하나님의 하 아담, 하 아담의 셋, 셋의 누구.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 예수님에서 끝나잖아요. 그 족보가. 그런데 하나님 그 분은 소리도 없고 나타남도 없단 말에요.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한자의 무자는 있을 유의 반대말이 아니라니까요. 그 無 있는 건데 아랫것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감지할 수 없는 걸 무라 그래요. 그래서 영원을 무급(?)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은 뭐가 필요해요? 소리가 필요하잖아요. 나타남이 필요하다니까요.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 자체가 뭐라 그랬어요? 파자를 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좀 쓰자, 가 여호와라니까요.
그것도 그 하나님은 아니란 말에요. 진짜 그 하나님은. 왜냐하면 우리가 못 알아먹으니까. 우리의 수준에 맞게. 내 말을 네 말로 좀 쓰자. 가 여호와란 말에요. 그러니까 소리가 필요해요. 그리고 나타나는 게 필요해서 성전을 준 거예요. 그것 봐! 보고 이해하라고.
그러니까 보세요. 그렇게 해서 그거를 알아듣는 이들이 내가 진리의 물을 담아 아래로 흘려요. 그래서 족보가 계속 되요. 그러니까 신랑과 신부, 자칼과 레케바가 하나가 되어서 이게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사람의 족보라는 뜻이란 말에요. 이게. 혈통으로 나는 족보가 아니라. 그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족보. 그걸 완성하는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런 육적 족보는 예수님에게서 이게 끝나요. 물론 그것도 진짜 육적 족보는 아닌데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그런데 그 자손 중에 하나씩을 끌어당기잖아요. 그건 어떤 의미에서 육적 족보인데 그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졌는지 왜? 나머지 아들들은 다 빠져버렸는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설명해주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 인자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 성령으로 잉태된다니까요. 그러면 부종모혈로 잉태되어 탄생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라인이 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안에서 진리로 태어나는 우리를 거기서 설명하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그게. 우리도 진리로 낳아지는 거지. 부정모혈로 나아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저 육적 이스라엘,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마세요. 그거는 혈통으로 낳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리고 원래 그 사람들은 그렇게 저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처럼 원래 그렇게 안 생겼었다니까요. 오사마 빈라덴 같이 생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수천 년 동안 섞여 갖고 그게 무슨 이스라엘이냐고요?
피의 몇 프로가 이스라엘이어야 이스라엘 이예요? 그 사람들은 30%라고 얘기하는데 그걸 어떻게 잴 거냐고요? 농도를? 왜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냐고요?
비 진리는 항상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것들을 세운다니까요 끊임없이. 그 이스라엘이 지금 비리비리한 어떤 우간다나 이런 나라가 되었다고 봐요. 거기에다 관심 갖겠어요? 세계경제를 주름 잡고 있으니까 그들을 떠 받들고 있는 거야. 온 세상이. 그거 아주 사악한 인간들의 악마성이라니까요. 그게. 그래놓고 무슨 회복이니 뭐니 이 따위 이야기들 하고 앉아서.
자, 그렇게 하나님은 그 인자의 족보가 은혜로 선물로만 이어지게 되는 것을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공생애를 통하여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 진리이신 주님이 말씀을 담고 내가 진리다. 그랬잖아요. 오죽하면 그분이. 내가 그걸 담고 온 자야. 이렇게. 아버지를 내가 담고 왔어. 설명하러 왔어. 말로 왔어. 내가. 우리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말을 던지려고 해도 너희들이 못 담으니까 내가 말씀으로 왔다. 그거 던지러 왔다, 라고 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도 못 담는다니까요. 그러면, 아무도 못 담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 일을 성취하셔야 되느냐고요. 하나님의 말씀 언약으로 밖에 성취할 수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언약이 뭐라 그랬어요? 기둥! ‘스타오로스’! 그래서 이 땅에다가, 역사에다가 내가 언약으로만 너희들을 내 백성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이렇게 보여줄게 하고 ‘스타오로스’ 기둥, 하나님이 굳게 세워버린 그 기둥을, 진리를 땅에다가 박아 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내 언약을 이 땅에 이렇게 박아 너희들을 산 자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 언약에 의해 진리를 무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마음에 꽃아 놓으신 거예요. 그 땅, 골고다가 우리라니까. 우리 가슴팍. 거기에다가 언약을 꽂아 세워 버리는 거예요.
그러한 언약의 기둥, 그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의의 종, 의를 듣는 자, 의에 순종하는 자라고 부르는 거고. 그 표를 표로만 인식을 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말씀을 듣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기를 뭐라고 불러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그래요. 그 단어란 말에요. 이게.
그리스도 예수의 종. ‘파울로스 둘로스 헤수스 크리스토스’ 내가 바로 그 ‘크리스토스 헤수스, 그리스도의 부분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내가 말씀이다. 이제 그 인자의 족보 라인에 내가 들어갔다는 거. 내가 흘려 받았다는 거. 그분으로부터. 다메섹에서. 그러니까 흘려 보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부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 아들이다, 그리스도의 아들.
보세요. 사울은 베냐민 지파죠? 원래 이름이 사울이잖아요. 그런데 베냐민 지파에 사울이란 사람이 있었잖아요. 왜 베냐민 지파사람들이 사울이란 이름을 그렇게 많이 썼는지 아세요? 그 왕처럼 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 모든 아담들의 동일한 욕심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자기를 ‘파울로스’, 작은 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그 사울? 그거 아니었어. 이렇게. 이 세상에서 왕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돈이 많거나 권력을 갖거나 그런 방법도 있지만 나를 계발하고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는 자로 만들어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왕이 될 수도 있다니까요. 그 보세요. 만델라 같은 사람. 감옥에서 몇 십 년 있다가 나왔더니 왕 삼아 주잖아요. 뭐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 사람이 돈이 있었습니까? 권세가 있었습니까?
그거 보세요. 인간들의 사울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욕구. 이게 죄예요. 그런데 사울이 그걸 포기하고 자기를 파울로스, 작은 자, 그 자리 로 내려가 버린 거란 말에요. 그러나 하늘의 큰 자가 되는 거란 말에요. 이 땅에서의 종은 작은 자이지만 그 종은 주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진짜 큰 자라는 걸 바울이 안 거예요. 그리고는 자기를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 부분이다.
자, 제가 이렇게 설명해드릴게요.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죠? 그 때의 그 하늘이 하늘들이라고 했어요. 그 하늘들은 물론 이 우리가 보는 하늘, 또 그 위에 대기권의 하늘, 그리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하늘. 그렇게 이해를 해도 돼요. 하늘들. 그 단어를. 그러나 이렇게 이해를 한 번 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진리, 즉 진짜 그 하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 주신 게 뭐냐 하면 세상이에요. 천지죠? 천지. 그걸 축약하면 뭐예요? 성전이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을 뭐라고 부른다. 그랬어요? ‘호 오라노스’ 하늘이라고 부른다고 했죠? 성경이. 그러니까 첫 번 째 하늘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첫 번 째 하늘로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게 뭐죠? 첫 번 째 성전이에요. 그건 눈에 보이는 이 호 코스모스, 세상이기도 해요. 그래서 호코스모스, 호오라노스, 이걸 다 하늘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성전이라고도 하고. 첫 번째 성전을 주었는데 이 성전이 말을 안 하네. 말을 안 해요. 그죠?
그 성전이 진리를 담고는 있는데 말을 못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 성전을 벙어리라 그래요. 말을 못해요. 못 알아먹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미루어 추측하여 그 안에서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면서 이건가? 하고 있었단 말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두 번째 말을 하는 성전을 보내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뭐라 그랬어요? 성전이다. 그랬어요. 요한복음에서. 내가 성전이다. 이 성전 헐어라. 내가 세 번째 것으로 세우리라, 그랬단 말에요.
자, 두 번째 하늘, 말을 하는 하늘이 왔어요. 말을 하는 성전이 와서 설명을 하는데 이 인간들은 그것도 담을 능력이 없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이것도 사라져야 돼요. 그래서 첫 번째 성전 사라지고 두 번째 성전 십자가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너희 안에 내 말을 담을까? 내 진리를 담을까? 언약! 내가 할 거야. 마음 바꿔 줄 거야. 네 마음 판에 새길 거야. 어떻게? 르와흐, 생기 불어넣어서.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이게. 에스겔서 하고 예레미야서에 나온 새 언약의 내용이 그거잖아요.
내가 할 거야. 그래놓고 그 두 번째 말하는 성전까지도 역시 그게 율법을 담고 있었으니까 말하는 성전까지도 이 땅에서 죽여 버리고. 없애버리고 거기서 언약을 세워 버려요. 스타오로스. 기둥을 이스테미 한다니까. 굳게 세워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에 의해 오늘 길이 누구예요? 성령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우리를 뭐라 그래요? 성전이라 그래요. 그런데 무슨 성전? 무얼 담은 성전? 성령의 전 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안에 성령이 계신 거 몰라? 이게 무슨 성전이에요? 그러면? 세 번째 성전이죠? 그러면 성령이 와서 내가 아, 첫 번째 성전, 두 번째 성전, 이게 뭔지. 첫 째 하늘, 둘 째 하늘이 뭔지를 알았어요.
그러면 그 세 번째 온 하늘이, 그 성전이 뭐예요? 그 셋 째 하늘이란 말에요. 진리의 진의.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셋 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 라는 말은 그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는 못 간다니까요, 검을 현!! 하늘 천 따지 검은 현. 못 가요. 거기는 요. 꿈속에서도 못 간다고요. 세 째 하늘에 갔다 왔다. 라고 이야기 한 건 내가 주님으로부터 그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거라고요.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진리를 전해 듣고 그것대로, 아, 그럼 그게 그 이야기예요? 하고 그 식양대로 성전을 지었잖아요. 그러니까 모세가 전달받은 본 어떤 건 바로 그 성전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세는 알았다니까요. 그거를.
사도 요한 마찬가지에요. 계시, 묵시라는 게 뭐예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진리. 그걸 하나님이 그에게 설명해줬어요. 어떤 방식이로든. 그런데 알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아, 내가 겪은 거나 내가 알고 있는 이거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상이 전부 진리네? 그거를 적어 놓은 게 요한계시록이란 말에요.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게 아니라 그건 사도 요한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란 말에요. 그게. 그런데 무슨 민족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고 앉아있냐고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진짜 이스라엘이 나잖아요? 잘못된 말을 갖고 남을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던 내가 이스라엘, 하나님과 함께 승리가 된 자. 우리의 이김은 이것이니 곧, 뭐? 믿음! 이라고 하니까. 그 믿음에 의해 승리가 된 이스라엘은 나지 저 사람들 아니라니까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있다고 하는데 뭐 거기에 크리스찬들이 나타나고 있다며요? 조금씩. 그런데 그분들이 믿는 예수도 제가 보기엔 잘못된 예수예요. 목숨 걸고 무얼 믿고 있는데 잘못된 예수를 믿고 있다니까요. 그걸 왜 회복이라 그래야 돼요? 우리가? 오히려 더 위험한 거예요.
여러분,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나 귀머거리를 고치실 때는 꼭 침을 뱉죠? 침이 뭐예요? 여러분? 진리인 그분 안에서 나오는 유일한 물이 뭐예요?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물이? 침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침이 더럽게 나오는 거란 말에요.
그 침이 눈에 발라지고, 그 진리가. 귀에 발라지면 항상 그게 열려요. 그게 흐르는 물의 의미예요. 그걸 ‘레마’라고 해요. 흐르다. 요단강을 건너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죠? 그 요단이란 뜻이? 흐르는 물! 그래서 레위기에서도 정결의식 때는 흐르는 물로 씻으라고 해요. 고여 있는 물로 씻으라고 그러지 않는다니까요. 그 말씀, 진리를 이야기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 진리는 사람의 말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어디서 와서 누가 뭘 좀 가르쳐 달라 그래도 아이구 그 짧은 시간에 뭐를 가르치겠어? 그래서 만날 가면은 이 복에 환장한 그리스도인들아 이거나 하고 오는 거야. 가서. 복에 환장한 그리스도인, 욕이나 하고 오는 거지. 뭘 설명하느냐고요? 한 시간 동안에. 그리고 뭐 누가 야, 네가 가르친 게 맞아? 야, 질문이 이거야? 이렇게 토론이 일어나면 그냥 이거 확 가르쳐? 이게 아니라 ‘저 먼저 갈게요.’ 하고 가요. 목사들이나 강도사들이 막 이렇게 토론하잖아요? 뭐 말한다고 알아듣겠느냐고요. 못 알아들어요. 구체적으로 내 입에서 이게 나와 버리면 또 이거는 왜곡되어 들리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내가 부득불 전한다. 나는 알았어. 내가 가지고 있어. 그런데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듣는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억지로, 그러잖아요. 억지로. 이사야도 그랬어요. 하나님이 불렀어요. ‘성전에 가서 너 네가 들은 이거 전해!’ 이사야가 가서 전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 다시 와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걸로 다시 주세요. 하나님이 ‘저들이 듣던지 아니 듣던지 그냥 너는 그 이야기만 해’ 듣던지 안 듣던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들려줄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에요. 뭘 목적으로 삼아요?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한 누군가가 있었는데! 심판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사야가 그 얘기 하다니까요. 하나님이 그래요. 그 때 그 이야기를 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럴 거라고. 그런데 너희들이 안 들었잖아.
그렇게 세상은 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성전. 세 번째 하늘을 삼층 천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을 알아듣는 여러분들은 삼층 천에 갔다 온 거예요. 무슨 천국에 어디를 갔다 와요? 그런 소리 좀 하지도 마세요. 꿈 꾼 거 갖고 꼭 그냥 실제처럼 그냥,, 그런 게 삼층 천 아니라니까요. 진리를 깨닫고 나니까 그 진리를 깨닫도록 주어진 육신과 그 육신을 살아내야 하는 일상이 다르게 보이더라는 거예요. 아 이건, 그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그게 일상과 이 육, 세상이 진리로 함몰 되어지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내가 그걸 가치로 삼았을 때, 그게 안 되었을 때 내가 절망하고 실망하는데 그거 아니었네? 진리였네? 라고 할 때 그게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게 부정되는 거란 말에요. 내가.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자 세상에서 없어졌다, 라는 기록이 있는 거라 그랬죠? ‘아인’이란 단어가 없어지다, 예요. 동행해서 하늘로 그냥 뿅 하고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라는 존재자체가 이 세상과 이제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왜? 진리를 깨닫도록 그 진리의 껍데기로 또 몸까지 주어서 이 땅에 왔는데 얘가 알아 버렸네요. 그거를. 그래서 엘로힘 화가 되니까 이 몸과도 상관이 없고 세상과도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가, 에녹이 하나님께 바쳐져 없어지는 거예요. 에녹이 그렇게 없어지는 거예요. 껍데기의 가치는 사라지고 내용의 가치가 느껴지는 거. 그렇다고 뭐 우리가 아무런 성숙도 없이 어차피 이 육은 몸은 사라질 거니까,,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베드로와 바울이 누가 먼저 복음을 들었어요? 누가 먼저 진리가 됐습니까? 베드로가 먼저 됐어요. 바울은 한참 후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베드로가 바울한테 직싸게 욕먹습니다. 이런 수준이 있다니까요. 베드로는 율법주의에서 한동안 못 벗어났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올 때, 이방인들하고 밥 먹다가 도망갔다니까요.
그러니까 바울이 네가 진리냐? 이놈아, 그러고도 네가 진리를 전하는 놈이야? 사도였는데. 이런 성숙의 정도가 분명히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우리의 어떤 도덕, 윤리적인 됨됨이의 성숙이 아니라 그런 진리를 이해하는 정도의 성숙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로 말미암아 그런 행동이 나온다니까요. 행동양식이. 사도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안 도망갔었을 거 아니에요?
이런 종류의 것들을 말하는 거예요. 진리를 안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이, 세상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미련도 없어, 사실은. 언제 불러도 갈 수 있어요.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는 게 좋지. 그런 사도 바울도 진리를 보게 되자 자신이 몸 밖에 있는 것인지 몸 안에 있는 것인지 자신 상관없었다. 그러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면 이 몸이 전부거든요. 이것만큼 확실한 진실이 어디 있어요? 만질 수도 있는 건데. 이것만큼 확실한 실체가 어디 있느냐고요? 그 진리를 알고 나니까 이것도 아무, 자기에게는 가치가 없어지는 거예요. 자기는 이제 자기 몸에 갇혀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던 거예요. 거기 한 번 보고 가지요. 고린도후서 12장이요.
고후 12 : 1- 6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내가 이제 그 계시의 진의를 알았다는 거예요. 그 묵시, 그 계시가 뭔지 알아? 사도 바울도 이야기해요. 내가 계시록 쓴다. 계시)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 자기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건 뭐예요? 한 부분이 됐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의의 종, 그리스도의 종.)
십 사년 전에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이끌리어 갔다, 그래요. 그러니까 하늘은 자기가 가는 게 아니에요. 노력으로 열심히 가는 게 아니라 끌려 간 거예요. 쭉 빨려 들어갔다는 뜻이죠?)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또 그래요)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이건 비몽사몽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몸의 안과 밖과 상관없이 알게 되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 이게 레마예요. 사람의 말로, 아드로코스가 있어요. 사람의 말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들었대요. 어디서? 셋 째 하늘, 삼층 천에서. 그러니까 삼층 천은 그 하늘이 아니라니까요. 진리의 말, 레마를 얘기하는 거라니까요.)
-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랄레오’, 나불거리지 못하는 말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감히 나불거리지 못하는 레마더라, 라는 말이에요.)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 내 안에 그 사람이 있는 게 그건 내가 자랑하겠다는 거예요. 그건 내 자랑이라는 거죠.)
-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 또 나가 있어. 뭐예요? 이 세상 속에서 육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인 나, 그런데 그 나는 자랑할 만한,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세 째 하늘에 갔다 온 난데. 이 나는 자랑하려고 보니까 약한 것밖에 없어. 뭐예요? 세상과 무관한 자가 됐으니까 별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세상 것으로 자랑할 거는 약한 거밖에 없는 거예요. 그건 내가 자랑할 수 있다는 거죠.)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참말을 함이라가 ‘알레떼이아’, 진리를 말하다 에요. 내가 그거 자랑해도 너희들이 나를 어리석다고 할 수 없는 건 그게 진리거든. 그런 얘기에요.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말한다고요? 너, 어리석어. 너 어리석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너 어리석어)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내가 말하는 말을 그 진의대로 이해할 사람이 별로 없을 거 같으니까 그만 둔다. 나는 분명히 셋 째 하늘 알았어. 봤어. 그런데 너희들이 듣고 분명히 나를 어리석다고 할 거니까 그만 둘래. 그만 둘래.
보세요. 하늘을 본 사람들이 진짜 하늘의 이야기를 하면 땅의 사람들은 절대 이해를 못하고 그를 어리석다고 질타할 거라는 거예요. 아래 사람들은 상 선 벌 악, 인과응보. 이걸 공식으로 정의로 붙들고 있죠? 착한 일 한만큼 상 받아야 되고 악한 일 한만큼 벌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원인을 제공한 그대로 결과를 받아야 되는 게 이 세상 속 정의잖아요. 그걸 진리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데 진리라는 건 그것을 깨달아 가진 자들의 육을 그 즉시 삭제 해버려요.
왜? 그 육이라는 건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육은 진리를 아는 순간 즉시 삭제된다니까요. 그러면 상 받고 벌 받을 나가 없는데 누가 살을 받느냐고요? 그 자체가 껍데기로 삭제되는데. 사라지는데. 진리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데 누가 상을 받고 누가 벌을 받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셨어요? 의인으로 오셨어요? 죄인으로 오셨잖아요. 그리고 바울이 이야기 하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요. 그럼 죄가 있어요? 없어요? 죄 있죠. 담당시켰잖아요? 줬잖아요. 우리 거 다 가져갔잖아요. 우리 하나님이 모든 백성들에게 안수하셨다니까요. 그 제물에. 내 죄 가져가라고. 그리고 빨리 죽으라고. 그럼 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는 죄인으로 왔으나 죄는 없으시니라. 그래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분은 우리 죄를 다 가져가셨고, 뱀이 되어 죽으셨어요. 놋 뱀이 되어서. 그럼 죄인으로 죽었잖아요. 죄 있는 거라고요. 그런데 왜 성경이 죄는 없다, 그러느냐 고요?
그분이 진리가 되는 순간, 언약의 십자가, 스타오로스에서 진리가 되는 순간 그 죄를 가진 육이 삭제되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없어지는 거라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그 언약 안에서 그 진리가 되면 그 진리 안에서 여러분의 죄가 없어지는 거예요. 삭제되는 거라고요. 그걸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인간의 자존심이 그걸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몸 안이나 몸 밖이나 아무 상관없다니까요. 이제. 그건 이미 삭제됐는데.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죄의 종이었어요. 죄 자체였단 말에요. 그런데 진리의 말씀이 들려 왔어요. 그래서 들었습니다. 아쿠오 했어요.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서 진리가 됐습니다. 우리 능력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의의 종이 됐어요.
그러면 그는 이미 죄 없는 자가 된 거예요. 그 존재가 삭제된 거란 말에요. 에녹처럼 없어졌다니까요. 바울처럼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상관없는 자가 되어버렸다니까요. 없어졌단 말에요. 그건 변할 수 없는 원칙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 진리를 담은 이들은 그렇게 언약으로 굳게 서서 아미스테미, 부활한 자로 사는 거예요. 다시 산자. 위엣 것으로 산 자가 되는 거란 말에요.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아멘을 하신 분들이 그 순간 천국을 경험하시는 거예요. 그게 현재 천국이라 그래요. 그런데 지속되지 않죠? 이게 현재 천국의 한계에요. 이 땅에 와 있는 현재 천국.
성경에 보면 천국이 왔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어디 와 있는 거야? 이게 뭐 도대체, 네 안에 있다. 뭐 이러기도 하고. 그러죠? 그게 현재 천국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갈 그 천국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의 어떤 모형, 그것의 축약, 그것의 핵심을 우리가 이 땅에서 순간, 순간 잠깐, 잠깐 경험할 때 그걸 하나님 나라라 그래요.
그 나라라는 단어
바실레이아‘는 원래 통치하다, 라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치라는 건 섬김이라는 단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섬기다, 라는 것은 말씀으로 섬기는 거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통치하셔서 우리를 섬겨주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세상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이게 진짜 무시무시한 그리고 고단하고 힘든 섬김이 된단 말에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되는 거. 그러나 그분의 섬김을 말씀으로 받을 때, 거기가 진짜 천국이 되는 거라니까요. 자유예요. 그게 아멘 하면서 그렇지! 했을 때, 요 순간. 그게 하나님 나라라니까요. 그렇게 접촉점이 말씀하고, 진리하고 접촉점이 만들어졌을 때. 그러나 금방 잊어버리잖아요. 또.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라니까요.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걸 이야기 해줄 때마다 맞아! 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잊어버리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면 거기가 천국이 되는 거예요. 진짜 자유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천국이야. 그랬어요. 내가 하나님 나라야. 뭐가 천국이에요? 그게? 구유에 와서 직싸게 고생하고 친척들이 벼랑에다 밀려고 해. 고향사람들이 떨어트려 죽이려고 해. 제자들은 하나도 못 알아들어. 다 배신하고 도망 가. 아, 동생들이 와서 우리 형 미쳤나봐? 이게 무슨 천국이에요?
천국은 하나님이 그를 말씀으로 통치하여 그 하나님이 모든 걸 책임져 주시는 게 천국이에요. 하나님 나라예요. 너희들이 이렇게 될 거야,를 가르치시러 온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님이 자기보고 내가 천국이야. 그런 거예요. 내가 하나님 나라야, 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건 이 땅에서 잠깐 보여주는 현재천국이란 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시켜 우리 보고 너희들이 천국이야, 라고 쓰라고 주신 거예요. 우리보고 거룩한 나라라고 그러잖아요. 베드로가. 천국이란 말에요. 하나님 나라라는 뜻인 거거든요.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야. 어떻게 하나님 나라냐고요? 우리가? 그 말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그 말씀대로 지금 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아니 되게 이미 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네가 하늘나라야. 네가 섬김 받는 자야. 네가 통치 받는 자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말로, 자기가 된 진리로 그걸 흘려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걸 Deacon 집사라고 한다 그랬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장로보다 집사가 높은 거예요. 그건 같은 거예요. 원래가. 그런데 그렇게 같이 교회의 리더로 뽑아서 그가 말씀을 전하여 고아와 과부를 섬길 수준이 됐을 때, 그걸 디아코노스, 집사라고 해요. 그래서 일곱 집사, 일곱 번 말하다. 말씀을 전하는 일곱 집사를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사의 대표가 하나는 구약 설교하다가 죽고, 하나는 신약으로 완성하고 집사들은 사라져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말을 주시고 그 하늘의 자리를 텅 비워두셨어요. 검게 비워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려고 올라가면 우리는 그 하늘을 찾을 수가 없어요. 끝까지 검어요. 잡히지 않아요. 그렇다고 하늘이 없는 건가요? 그러면 뭐하러 우리 예수 믿어요? 있어요. 그 하늘은 있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그 하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텅 비워두었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의 수준으로 엘로힘으로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데 그 하나님을 우리가 몰라요. 감지가 안 돼. 그렇게 있는데 없는 거야. 없어요. 이 세상에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 없다. 이거 불가지론자들하고, 무신론자들하고 싸울 필요도 없어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해요.
그렇게 있는데, 진짜 있는데 우리 눈과 귀가 어두워서 감지가 안 되는 걸 ‘무’라고 한다 그랬죠? 그런데 그걸 진리로 깨달아 알아서 아, 그거? 하고 알았을 때, 그걸 소유한 걸 뭐라 그래요? 노자에서? ‘무소유’ 라 그래요. 그 어떤 스님이 이야기한 무소유는 노자에서 끌어다가 썼지만 그 ‘무소유’ 아니에요. 노자를 잘 못 이해하신 거예요. 무소유라는 건 아무것도 안 갖는 게 무소유가 아니에요. 이 몸뚱이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무소유라 그래요? 그냥 열심히 노력하자, 추구하자 이거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노자가 이야기한 무소유는, 노자의 핵심은 위, 무위죠? 하지 않는 걸 하는 게 노자의 핵심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진짜 있는 거를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나 진리의 도를 아는 그들은 그 진짜 있는 그걸, ‘무’를 알아 마음에 갖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걸 무소유라 그래요. 그러니까 진짜 무소유인 이들은 진리를 가진 여러분이 무소유예요. 평생을 그 무소유하고 싸웠다는 건 죽을 때까지 소유욕과 싸웠다는 뜻이에요. 진짜 무를 소유하게 되면 내가 뭐를 많이 갖고, 못 갖고, 그리고 남이 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못 가지고 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왜 남한테 야, 너 너무 많이 가졌어. 너 그것 좀 나눠줘. 이걸 뭐 하러 얘기 하느냐고요? 내가. 내가 이미 ‘무소유’가 됐는데. ‘무’를 내가 소유했는데 왜 그거, 없음인 ‘그걸’ 갖고 남한테 너, 너무 많이 가졌어. 너, 조금 가진 사람한테 나누어 줘. 아, 나는 왜 이렇게 없어? 나는 왜 이렇게 부자야? 이게 왜 우리에게 문제가 되야 되느냐고요.
전부 그 ‘무소유’까지도 소유하려고 하니까. 무소유해야 돼. 청렴하게 살아야 돼. 청빈해야 돼.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상 줄까봐. 그건 자학이라 그래요. 수도원에 가서 자기를 채찍으로 때리는 거랑 똑같다니까. 이렇게 가난하게 고통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했으니 쟤 보다는 나를 좀 낫게 여려주세요. 이거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세요. 네? 그러고 했는데도 그냥 그 수준 밖에 안 되면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뭐 우리가 진짜 굶어 죽고 이런 거는 없잖아요. 아니, 정말 밥이 없어서 굶어 죽으시게 되면 저한테 얘기하라니까요. 내가 그 정도는 안 되게 도와드릴 테니까요.
어디 지금 무슨? 아, 다리품만 조금 팔면 공짜로 밥 주는 데 부지기수예요. 그것도 골라먹는다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가 지금 걱정하느냐 하면 우리는 그 진리 안에서 이 세상을 깨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호 코스모스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런단 말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되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이 있어요. 그냥 알았으니까 이렇게 살다 가도 되나? 이걸 영지주의라 그래요. 천만의 말씀. 지식으로 갖고 있다, 고 해서 진리가 된 게 아니라니까요. ‘들었으면 됨으로’ 가야 돼요.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일부러 율법 이야기를 꺼낸 다고요. 부자청년이 나, 다 지켰습니다. 그러죠?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그 가난한 자가 산상수훈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 말씀이 없어 곧 죽는 자. 그 단어란 말에요. 가난한 자에게 네가 지금 가지고 있다, 라는 그 소유, 어려서부터 열심히 지켰던 거. 네 재산뿐만이 아니라 네가 하여튼 너의 가치로 챙기고 있는 그것 한 번 나눠주고 와 봐. 그래요. 주고 오라 그래요. 그 청년이 못 줘요. 왜? 일차 적으로 진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흘려 내려 줄 진리가 없고, 정말 율법주의자들은요 자기가 행한 행위들을 하나하나 쌓아서 상으로 가져가야 되기 때문에 이걸 못 나누어 줘요. 못 준다니까. 아까워서. 그 둘을 다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 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네 스스로 노력해서 획득했다고 나한테 얘기 했잖아? 그러면 금방 버려져야 할 게 있는데 너는 근데 그거는 못 버리고 있네? 그러니까 네가 낙타야. 바늘귀 구멍으로 절대 못 들어가는 네가 낙타야. 라고 한 거란 말에요.
진주 장사가 진짜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무얼 판다 그래요? 자기소유를 다 팔아. 다 팔아. 행위와 진리를 바꾸는 거라니까요.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면 가진 소유를 다 팔아! 라니까요. 일부만 팔아, 가 아니라 다 팔아!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세요. 일부만 팔아 요게 내 신앙생활이에요. 라고 자랑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죽이잖아요. 그거는 안 받아, 그랬다고요. 그렇다고 뭐 다 팔아서 내라는 건 아니고. 당시에 열다섯 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오순절에 와갖고 진리를 들었다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집에를 안 가네. 디아스포라로 퍼져있던 사람들이 불같은 성령, 진리의 말씀을 베드로로부터 듣고 가기가 싫은 거예요. 계속 있었어요.
그게 초대교회였어요. 그 사람들이. 그러니까 노자는 유월절부터 오순절까지의 노자돈만 갖고 왔을 거 아니에요? 이 백만 명이. 그런데 그 중에 진리를 들은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사람들이 집에 안 가고 있으면 먹여 살려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중에, 예루살렘 사람 중에 부동산이 있던 사람들이 그걸 팔아 그 사람들을 먹인 게 유무상통이에요. 여러분은 안 그러겠느냐고요? 교회는 뭐 재산 다 내 놓고 그렇게 해야 돼? 이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흩으니까 각자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교회 세운 거예요. 열다섯 명 스무 명 이렇게. 사도 바울이 거기 돌아다닌 거라니까요. 가보니까 도 개판이야. 또 금방. 그래서 쓴 게 서신서 들이에요. 몇 명 안됐다니까요. 그 때도.
그렇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의 행위를 버리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처럼( 바울?) 그냥 한 번에 그렇게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차근차근, 차근차근. 거기에 묶여 있었던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풀려난다고요. 그래서 거기서 자유를 느끼게 된단 말에요. 그게 셋 째 하늘이에요. 그런데 이 호 코스모스, 성경, 성전 이거를 그냥 그 수준으로만 보고 그 첫 번째 하늘 그걸 그냥 섬겨버리면 그 검은 하늘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지옥이라 그래요. 그 검은 하늘. 첫 번째 하늘. 그리고 그 검은 하늘에서 섬기는 이를 마귀라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이렇게 줄어들 거예요. 지금 다 알아듣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도 이제 많이 털릴 거라고 요. 이렇게 줄어든다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는 내 신부야, 라고 찍은 사람은 반드시 그리로 끌고 가세요. 그게 하나님의 원칙이에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면서 하나의 원칙을 세우셨는데 뭐냐 하면 사람이 독처하는 건 좋지 못하다, 했는데 그걸 악하다고 하거든요. 악이라는 걸 거기서 처음 말씀하셨어요. 악이 뭐냐 하면 홀로 독처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제일 먼저 걸리는 분이 누구에요?
홀로 독처하는 분은 하나님이라고요.
그러면 사람들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셔야 될 일이 뭐예요? 얘에게 르와흐, 생기를 넣어 빨리 진리로 만들어 내 신부 삼는 걸 하나님이 먼저 하셔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하나님이 악에 안 걸려요. 왜? 하나님은 악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게 그 말이란 말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여러분을 택했다면 반드시 여러분은 그리로 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걸 원칙으로 세우셨기 때문에요.
진리는 하나에요. 그걸 깨서 율법으로 갖게 되면 여러분은 복수의 책, 심판의 책, 저주의 책을 갖게 되는 거예요.
하나에요. 그래서 말은 자꾸 하나로 수렴이 되어야 돼요. 뭐로? 아가페. 은혜, 하나님, 진리. 이렇게 수렴이 되어야 돼요. 하여튼 짐승들 중에 말이 제일 많은 게 사람이에요. 오죽하면 사전이 다 필요하겠어요? 짐승들 중에 사전 갖고 있는 것들 봤어요? 왜 이렇게 말이 많이 필요하죠? 삶이 복잡해서 그래요. 되고 싶은 뭐가, 목표가 너무 많으니까 뭐를 많이 만들어 내고 발전시켜야 돼요.
개들한테 의복, 신발, 티브이, 도덕, 윤리 이런 말 필요해요? 안 해요? 필요 없어요. 걔네들은 단순하거든요. 멍멍 밥 먹자. 멍, 멍, 멍. 누구야? 뭐 이런 거 몇 개만 있으면 산다니까 걔네는. 그래서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라고요. 그게. 그런데 우리 보세요. 사전을 둬야할 만큼. 점점 늘어나요. 또 이게. 그렇게 말이 많은데 이렇게 힘들어요. 맨 자살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고단하고 힘들다니까요. 그 많은 말을 갖고 그 진리 못 알아먹고 가면 그게 개 보다 못한 인간이에요. 주님이 그랬잖아요. 너는 나지 않았으면 좋은 뻔하였다. 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거예요. 나지 않은 게 제일 좋은 거예요. 그런데 났는데 어떻게 해요. 이걸?
진리라도 알고 가야지. 개만도 못하게 갈 수 있다니까요. 우리가. 그 많은 말을 갖고.
그걸 율법이라 그래요. 말을 깨어서 부스러기로 갖고 있으면 그게 율법이에요. 성경을 깨서 이렇게 부스러기로 갖고 있으면 그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인터뷰 하는 걸 봤어요. 그분이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그런 분인데. 굉장히 책도 많이 팔고 지금은 뭐 인기 작가니까. 그리고 석좌교수님이시니까. 돈도 많고 명예도 얻었죠. 상도 많이 받았고. 그런데 이 분이 인터뷰를 하는데 그러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자기는 네 번의 자살시도를 했대요. 네 번의 자살시도를 했는데 두 번은 고등학교 이 학년 때. 우리 둘째 나인데.
엄마 아버지가 사이가 너무 안 좋아가지고 만날 싸웠다는 거죠. 그리고 누나들도 엄마랑 만날 싸우고. 집에 들어가면 엄마는 만날 싸움질하느라고 밥도 안 주고 뭐 지저분하고 그러니까 들어가기가 싫었던 거라.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늘 집 굴뚝 앞에 앉아있었대요. 거기가 따듯하거든요. 그럼 해가 뉘엿뉘엿 진대요. 추운데 들어가기는 싫은 거예요. 거긴 더 차가우니까. 냉랭하거든. 그럼 해가 뉘엿뉘엿 지면 집에 불이 켜지는데 창호지 밖으로 실루엣이 이렇게 나왔다는 거예요.
자기 같은 반 친구에요. 친군데 자기 엄마 아빠랑 같이 다정하게 밥을 먹는 거예요. 학교 이야기도 하고 집 이야기도 하면서 도란도란. 자기는 그게 너무 부러웠대요. 손을 뻗으면 닿는 곳인데 왜 나한테는 허락이 안 된 거야. 그게. 그게 너무, 보면서도 그리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돌아보면 여긴 불 꺼지고 너무 냉랭하고 차갑고 큰 소리만 나고 그러니까 못 들어 간 거죠. 그러다가 자살을 한 거예요. 두 번이나 또 그렇게 살아났어요. 나중에 세 번째는 세 애가, 자기애들이 있었는데 그 때 또 자살시도를 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눈시울이 뜨거워 진 건 그분이 이제 돈을 벌만큼 돈을 벌었잖아요. 아니, 그리고 이제는 누가 뭐라 그래도 자기는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어려서 그런 트라우마가 있다고 할지라도, 에? 그러니까 애들 있는데서 싸우지 마세요. 요즘 그러잖아요. 애들이 자살을 하는 건 엄마 아버지가 패서도 아니고 욕해서도 아니고 부부싸움이 가장 큰 폭력이래요. 그러니까 왕따 당해서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요 왕따 당해서 집에 돌아와서 안길 그 따듯한 품이 없어서 그 때 애들이 죽는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지금 칠순이 다 되어서 원고가 어느 날 하도 안 써져갖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자기가 그렇게 그리움으로 갖고 있던 그 친구 집. 그리고 내 뒤에 썰렁함으로 갖고 있던 내 엄마 아버지 집. 그 담벼락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자기가 깨달아 알았대요. 그런 많은 재산이 있었고 그렇게 자기는 인기 있는 작가고 존경받는 교순데 자기는 여전히 거기에 있더라는 거예요. 돌아갈 곳도 없고 그리움으로 붙들려 했던 건 그만큼 또 물러나 있더라는 거죠.
인생사는 것으로는 그게 안 채워지더라는 거죠. 무엇으로 그걸 채울 수 있어요? 진리로만 채워진다는 거예요. 거기에 힘을 쓰셔야 돼요. 그걸 아는 것에. 다른 건 없어요. 세상에서 뭐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캘리포니아에서도 거기는 일 년 삼 백 육십오일 중에 삼백일 이상이 청명해요. 구름 한 점이 없어요. 진짜. 하늘이. 그래서 캘리포니아에서는 선그라스를 안 쓰면 눈이 버려요. 백내장 걸려요. 그래서 멋으로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써야 되거든요. 그만큼. 그런데 난 거기에서 단 한 번도 그 세상이 회색이 아닌 적이 없었어요. 눈을 뜨면 늘 회색이에요. 그런데 사실 세상은 그래요. 여기에서 뭐 대단하게 밝은 광명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하나 놓아가는 그 삶을 경주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렇게 세상은 알아들을 수 없는
도저히 이해할 수조차 없는 그 무의 세계를 이해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것이 우리가 붙들고 있는 그 육, 하나님께서 육은 무익한,
살리는 것은 영, 말이다. 라고 말씀하신 거기에서의 무익한 그 육.
그것에만 묶이지 말게 하시고
살리는 말씀, 영. 그 진리에 더욱더 몰두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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