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73.사망이 선물이고 선물이 영생이다

Hebrew 2023. 6. 1. 19:06


본문 롬- 6 : 23- 7:7


6 :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7 : 1-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아멘.


원래 이 내용을 두 주간에 걸쳐서 나누어서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나누기가 뭐해서 그냥 오늘 좀 줄여가지고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때보다 조금 길지도 모르는데 아, 그렇게 생각을 하세요. 여러분. 진리를 배울 선생이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데 하나라도 더 들어야지 이런 마음으로 들으시면 왜 이렇게 길어 그런 마음이 안 들것 아닙니까? 그죠? 하나라도 더 듣고 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좀 들어주시면 제가 미안한 마음이 좀 덜하겠습니다. ㅎㅎ 아니, 죽어라고 준비해 갖고 와가지고 왜 이렇게 미안해해야 되는지 난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우리 교회 카페 게시판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올라 왔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죽을 수 있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니까 잠시 당신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신 건가요? 그러면 십자가는 장난이죠? 그죠? 어차피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우리에게 그냥 show up 한 거잖아요. 그건 우리가 가진 말의 정의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진리의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예요. 우매한 질문이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 죽음, 죄, 생명, 의, 선 뭐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가진 국어사전의 개념과 많이 달라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가 죽는 그 죽음을 죽으시겠습니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건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이라 그랬잖아요? 아기의 탄생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결혼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육신의 죽음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죽음이라는 게 정말 끝입니까? 그럼 그건 정말 나쁜 건가요? 그건 정말 더럽고 무서운 겁니까? 그걸 누가 결정한 거죠? 그러니까 이미 그런 결정이 내려져 있으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죽습니까? 라고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악하고 더러운 거니까. 그걸 누가 그렇게 결정해 놓은 거냐는 말이에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금방 우리의 선악 체계로 돌아가서 이건 나쁜 것, 이건 좋은 것,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요. 그래서 우린 그리스도가 아니면 쓰레기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고 있어도 항상 그리로 돌아간다니까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형으로 주신 세상 속 죽음이라는 건 진리와 분리된 그 피조물의 상태와 결국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영원의 나라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찰나에 불과한 역사 이면의 죽음, 그리고 나가는 죽음이 시작이라니까요. 그렇잖아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삽니다. 지옥에서 천국에서. 그러니 차라리 나지 않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났으면 진리를 알고 가야 되는 거거든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사는데 역사는 찰나란 말이에요. 그럼 그 죽음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시작이에요. 문이란 말에요.
그런데 인간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끝처럼 보일 뿐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나쁜 거, 무서운 거, 더러운 거. 이렇게 자기들이 결정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는 에녹과 엘리야를 부러워하는 거죠? 안 죽었다고. 그들이 죽었다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달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리고 여러분이 보는 그 죽음과 다르단 말입니다.
육의 죽음이라는 건 
영의 생명인 그 진리라는 호흡. 그래서 르와흐라고 하는 거예요. 생기를. 그게 호흡이잖아요. 그게 성령이라고도 하잖아요? 영의 생명인 그 호흡. 호흡이 딱 끊어지게 되면 진리가 끊어지게 되면 인간의 상태가 그저 썩어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건. 시청각 교재란 말이에요. 
그 죽음에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죽음은 무엇보다 가치 있고 선한 거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죽음마저도 선악의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우리 육이 죽는 건 나쁜 것이라고 결정을 해버리는 거예요.그 마음 안에, 복음.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한 죽음을 죽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죽음이 뭔데요?


죽음이라는 건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성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어요. 모든 것의 끝은 영원으로의 완성이에요. 역사에서의 끝은. 
어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리로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비 진리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 둘이 다 완성이 된 존재로 영원을 살아요. 편의상 그렇게 이야기하자고요. 영원을 살아요. 영원이란 말이 그건 아니지만
한 쪽을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자의 죽음을 ‘종’(終) 이라고 해요. 여기서 종이라는 건 완성하다, 마치다, 예요. 
그래서 임종이에요.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은 ‘사’라고 해요. 그냥 죽음이에요. 후자의 죽음은 사라니까요. 종이 아니라.


보세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선과악의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해요. 죽음은 나쁜 거, 악, 더러운 거. 사는 건? 좋은 거, 선, 깨끗한 거. 그러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 승이 낫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도 죄의 삯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삯의 정체가 사망으로 나와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카리스마, 선물이에요. 은혜라는 말과 그 은혜의 선물이 영생이라는 그러한 진술이 연이어 등장을 합니다. 
우린 먼저 죄라는 것의 개념부터 다시 정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돼요.
여러분이 오늘 설교 내용을 잘 이해하시면 그 전 설교나 그 다음 설교들이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다음 주에 오시는 분에 한 하여 설교원고를 나누어 드릴 테니까 잘 좀 보세요. 제발. 몇 번씩.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해도 또 똑같은 거 물어보고 그러지 마시고. 뭐 발전하는 게 있어야 설교하는 사람이 신이 날 거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는 하마르티아 라는 단어에요. 사전적 의미는 과녁을 벗어난다죠? 과녁 적. 목적, 
과녁을 보는 눈이 없으니까 호라호 하는 눈이 없으니까 과녁을 잘 못보고 그리고 쏴버리는 거. 그걸 하마르티아라고 해요. 
그건 ‘하’라는 부정접두와 ‘마르투스’ 혹은 ‘메루스’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되는 게 하마르티아인데 그 마르투스는 여러분이 잘 아는 마르투스, 증인, 증거라는 말과 그게 말티온이라는 말에서 나온 건데 말티온이 역시 증인 증거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법궤 안의 십계명이라는 말로 쓰이는 거예요.
그럼 하 말티온 하면 뭐겠어요? 그 계명이 아닌 것, 그 계명의 진의가 아닌 것. 그게 죄예요. 그걸 잘못 보고 그냥 법으로 알고 붙들어 버리면 하마르티온, 하 마르티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잘못 율법을 내 남편으로 붙들어 버리면 내 한 쪽 부분이 뭐라 그랬어요? ‘메로스’라 그랬죠? 
그 한쪽 부분이 엉뚱한 남편으로 붙어버리는 거잖아요? 나한테. 그래서 하 메로스, 하 마르티아가 죄 인거예요. 그걸 죄라 그래요. 
엉뚱한 남편이 내 옆에 붙어버리는 거.


그렇다면 반대로 진리는 뭐겠어요? 진리, 진리 하니까, 뭐 대단한 거 같죠? 법을 깨고 선악의 법에서 벗어나는 게 진리에요. 다른 게 아니라니까요. 
법이 뭐예요? 율법이? 호코스모스, 세상에서 벗어나는 거. 눈에 보이는 이것. 여기에 갇혀서 엉뚱한 하나님 섬기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야말로 그 자유,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그걸 진리라고 해요. 다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율법이라는 짝으로 곡해해서 붙들어 버리면 거기에서는 그 남편과 생산하는 게 뭐예요? 
행위라는 죄만 나오는 거예요. 율법으로 붙들어 버리면. 
그러나 그 말씀을 진리로 붙들면? 거기에서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구구절절이 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그 아브라함이 우리의 대표죠? 하갈이라는 율법을 만나면 이스마엘이라는 죄를 낳는 거고 사라라는 은혜의 아내를 만나면 그게 하늘의 어머니라. 그러잖아요. 성경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가 아니라 부모로 떠나, 거든 요. 부모로 떠나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우리를 낳는 분이 하늘의 어머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우리를 낳는 그 어머니, 그 남편, 다 같은 말이에요. 
그걸 은혜로 만나게 되면 거기에선 생명만 나온다니까요. 찬송만 나온단 말에요. 거기서는.
잘 생각해보세요. 죄의 원래의 이름이 뭐예요? 선악과잖아요. 죄의 원래 이름이. 기본도 안되어 있으니까 이거 어디서부터 나와야 될지 모르겠네요.


하나님께서 주신 나무의 열매를 보기에 좋은 선악과로 보게 되면 그것을 선악의 법으로 먹고 죄만 출산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출산된 열매들이 어떻게 보이겠어요? 선악의 열매로 먹고 선악과만 낳아. 계속. 선악의 세상에서, 율법의 세상에서 그 선한 율법의 모습, 그 행위를 낳는데 어떻게 보이겠느냐고요? 멋지게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 죄를 더럽고 추악하게 그렇게 상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의 죄는 이 아담들의 율법세계에서의 죄는 그렇게 멋지게 보인다니까요. 
깨끗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해 보인다니까요. 왜? 율법을 먹고 율법과 결혼해서 율법과 낳는 행위라는 자손이 뭐겠어요? 그 열매가 뭐 겠느냐고요? 인간들이 좋아하는 그 열매란 말입니다.
물론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죄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리고 
인간세상이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상식을 갖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건 죄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예요. 
그게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래적 마음인 선악구조 속에서 선하다고 선택한 것이나 악하다고 택한 것, 그래서 안 하는 거. 이게 전부 죄예요.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공부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들을 때 우리의 이 두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옳게 듣던 그르게 듣던 
그 들은 것으로 듣는 족족 죄로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어요.
산상수훈이 전부 어떻게 시작해요? 아쿠오로 시작해요. 너희가 들었지? 그렇게 들었지? 어디에서? 
에아르케. 태초에 내가 한 이야기를 너희는 그렇게 들었잖아?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뭐라 그래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라고 내가 말했을 때, 너희는 어떻게 들었다는 거예요? 율법에서 뭐라 그래요? 
희생제사 드려, 로 듣잖아요. 우리는. 그리고는 열심히 희생제사 드려서 죄 짓죠? 그럼 간음하지 마! 라고 하면? 어떻게 들어요? 간음하지 마! 로 들어요. 그거는 또. 그래놓고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세상과 간음하죠? 살인과 간음 배웠잖아요? 그럼 이제 척 알아먹어야지요, 그러잖아요?


보세요. 하나님이 법을 줘요. 율법을 준다고. 계명을 주는데 그걸 하나님이 의도하는 대로 들어도 죄를 짓고 그렇게 반대로 들어서 또 죄를 지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들이 두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선하다고 판단된 걸 열심히 해도 죄고, 악하다고 생각해서 안 해도 죄예요. 
그 두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한. 그래서 새 마음 준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근성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피조물이 신의 말을 우리가 감히 상상도 안 되고 감지도 안 되는 그 신의 말을, 진의를 어떻게 알아들어요? 그건 오만입니다. 여러분. 못 알아들어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을 인간이 알아들으면 안 돼요. 못 알아듣는 게 정산이에요. 피조물은 신의 말을 못 알아듣고 피조물 수준의 일을 해야 정상이에요.
어떤 농부가 자기소를 남의 밭에다가, 배추 밭에다가 묶어 놓고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 그리고 가서 한 삼일 있다가 왔는데 진짜 그 소가 안 먹고 있었어. 거기서. 그건 아픈 소 아니면 미친 소예요. 소는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라는 주인의 말도 못 알아들어야 되고 나는 이거 먹고 싶다, 라는 자기의 본능을 억제할 수도 없어야 소예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야 돼.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하나님, 쟤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세요. 그랬더니 그냥 가서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전해. 그러신 거예요. 
자연스럽다, 라는 건 그렇게 되는 게 맞다, 라는 거예요. 스스로 자, 그럴 연. 그렇게 해 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데 하나님이 피조물이 그런 수준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그럼 그게 무슨 하나님입니까? 그게 무슨 옴니셔스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피조물이 당연히 그 수준이라는 걸 알면서 너 왜 내 수준으로 못 올라와? 너 왜 하나님답지 않아? 이렇게 화내는 게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니까요. 왜? 선악과 따 먹고 자지가 하나님처럼 됐다고 믿고 있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그 수준에서 맞장을 뜨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과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리고 그 잘못 알아들은 말로 열심히 율법과 합방하여 행위의 자손을 낳고 그것으로 자신을 중명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그러니 선악과 주자마자 날름 따 먹은 거예요. 그게 피조물의 한계라니까요. 그러한 인간의 욕구와 본능 있죠? 
운명처럼 타고나는 생래적 본능을 ‘에피뚜미아’ 라 그래요. 그걸 성경이, 오늘 본문이 탐심이라고 번역 해놓은 거예요.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물론 나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어떤 목적 하에 주어진 거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란 말에요. 우리는 그런 단어를 대할 때 얼른 놀부나 스쿠르지 영감을 떠올리죠? 탐심 그러면. 그들이 가진 거. 그거는 나쁜 거. 그런단 말에요. 그러니까 욕심 부리면 그게 죄를 낳고 거기서 이제 죽는 거야. 뭐 이 정도 수준으로 알고 있는 거죠.


성경이 말하는 에피뚜미아, 탐심은 어떤 존재의 생래적 성향을 가리켜요. 마치 호흡처럼 붙어 있는 그 존재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에피뚜미아 예요. 
그런데 우리 개혁성경이 가진 그 단어가, 탐심, 우리말이 가진 그 단어가 탐심이라는 단어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만 그 수준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자, 자연스럽게 호흡처럼 갖고 있는 성향, 그 성향이 에피뚜미아 인데 우리처럼 두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걸 선악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선택하여 그걸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는 그런 우리, 그런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인 성향이잖아요. 어떻게든 그걸 둘로 나누어서 하나를 택하여 나의 유익을 위해 쓰잖아요. 그게 나의 보람이던지 나의 가치던지. 뭐 그런 거. 그래서 그 성향을, 그 탐심을, 에피뚜미아를 나쁘다고 하는 거지 내 마음이 하나이면? 그 에피뚜미아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 돼요.
예수님이, 내가 제자들 너희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했다. 그 말은 뭐죠? 내가 나를 주기를 원했다. 유월절이 예수를 고기로 주는 거니까. 원하고 원했다, 가 에피뚜미아, 탐심이에요. 그러면 예수님도 탐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똑같은 단언데
그분은 독생자, 모노게네스, 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그 에피뚜미아는 선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보세요.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 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들어보세요. 여기에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뚜미아 예요. 탐심. 우리가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그 성향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게 나쁜 거 아니에요. 그거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 존재에게서 발생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 
그것이 율법으로 작용할 때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에피뚜미아, 인간들이 원하는 바, 그 에피뚜미아를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는 바, 에피뚜미아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한 두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자, 율법을 하나님이 줬습니다. 받자마자 그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요건 해야 될 것, 말아야 될 것. 정한 거. 부정한 거. 깨끗한 거, 더러운 거. 즉시 둘로 나누죠? 그래서 율법은 둘이에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면 그들의 성향이, 에피뚜미아가 둘이기 때문에, 두 마음이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그 진리를 둘로 나누어 버린다니까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자기들의 유익에 합당하다는 것을 택해서 그걸 해버리는 거. 하나님은 그걸 죄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죄라 그래요. 하나님은. 
그러니까 율법은 뭐를 드러내기 위한 거예요. 그들의 두 마음이 무언지를 드러내기 위해 준 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내가 내 율법을 주면 금방 드러나. 한 번 줘볼까? 줬더니 금방 둘로 나누어서 희생제사 드리고 율법 지키고 이건 해야 돼. 이건 하지 말아야 돼. 자기들이 다 나누어 놨어. 마치 아브라함처럼. 세 번 째 그 제물 드려, 그랬더니 똑 쪼개 놨어요. ‘바탈’, 양쪽으로 쪼개 놨잖아요.
자기를 중심으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자기가 율법의 진의를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거니까. 그런데 진리를 알고 보니까 그 자연스러운 것이 호흡, 에피뚜미아, 탐심.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게 죄였다는 걸 바울이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는 거예요. 율법이 그 자연스러운 걸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탐심으로 알았겠느냐? 이 말이에요. 이 자연스러운 게 나는 의라고 생각해서 열심을 부렸었다.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진리를 알고 나니까 아니, 그게 탐심이었다고 율법이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걸 나는 계속 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어떻게 그 탐심을 죄로 알아들었겠어? 바울이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울에게 해가 된 겁니까? 바울에게 유익한 거였어요. 그게. 그럼 죄가 뭐 그렇게 나빠요?


바로 그게 말하는 성전으로, 말하는 율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하신 일이에요. 똑같은 일이에요. 옛 성전은 말하지 못하는 성전이었고 말하지 못하는 율법이었잖아요. 소리가 없는 율법. 문자로만 줬거든요. 그런데 그 율법이 와서 말을 하네요. 그건 이런 거였어, 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단 한 사람도.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 옛 성전과 함께 내가,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야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 번째 성전으로 서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바울이. 너희들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잖아. 성령은 뭐?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내가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 되어, 질그릇이 되어서 나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거니까. 그 때는 지금처럼 유약 발라서 이렇게 한 게 아니라 초벌구이 해 놓은 거니까 툭 치면 깨진단 말에요. 질그릇이.


내가 그 그리스도를 담아 자칼과 네케바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세 번째 성전이라고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한 진리와 체계와 차서, 이게 성전. 번제 단부터 착, 착, 착, 체계와 차서. 이게 ‘티데미’라 그랬죠? 요렇게 서 있는 걸 아, 그게 그거야? 하고 알게 되면 위로 서는 건 똑바로 서다, ‘이스테미’, 스타오로스‘. 십자가라고 그랬어요. 그것이. 그게 언약이란 말에요. 그 진리의 체계와 차서는 절대로 너희들은 법에 묶이면 안 돼, 이 보이는 세상에 묶이면 안 돼.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여기에 묶이면 안 돼. 그렇게 법에서의 해방을 가르치시려는 그 하나님의 학습방법이었어요. 그게.
그걸 헬라어로 ‘도키마조’ 라 그래요. 그 ‘페이라조’ 가 실패하게 하기 위해 던지는 시험이에요. 세상에 던지는 시험이죠? 그거는. 
그거와 달리 도키마조, 하나님이 던지는 시험은 전부 시험실에 들어가서 백번 실험을 했을 때 아, 이거 뭐 다 결과가 같네! 그러니까 이건 진리야, 
라고 할 때, 그 시험 있죠? 그게 도키마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릴 죽이려고 하는 시험이 아닌 거.
그런데 하나님의 그 은혜 밖의 아담들은 하나님의 그 도키마조를 페이라조로 받아 멸망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 보세요.


롬 7 : 14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내가 죄를 지으면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에요? 이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율법이 죄냐? 이렇게 물어요. 여태까지는 그게 죄야, 그것만 죄야, 그래놓고 갑자기, 
야 율법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면 그게 죄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래놓고는 율법이 신령한 것이다, 그래요.
푸뉴마티코스, 푸뉴마가 영이잖아요? 성령, 옳은 말, 깨끗한 말. 푸뉴마티코스. 깨끗한 말이 된 거. 신령한 거예요. 
율법은 원래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율법은. 
신령한 거라는 거죠. 그런데 율법을 육신에게 주면 육신들은 그걸 사용하여 죄만 낳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낳는 것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도 못해요. 이게 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낳는 걸. 지금 그 말 하는 거예요. 바울이. 알지도 못하더라. 자기들이 행하는 일을 알지도 못 하더라.


분명 자기 안에 원하는 바가 있어요.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래, 모든 건 선악을 판단하면 안 돼. 그래 모든 건 다 그렇게 용서되는 거지, 하는데,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금방 죽음은 나쁜 거지? 어느 샌가 나는 선악의 틀 안에 또 들어가 있다니까요. 
나의 육신은 나의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행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해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거, 그 죄를 행하는 것이 율법이 선하다는 걸, 율법이 행하고자 하는 일을 완료한, 완수한 결과라는 뜻이에요. 내가 이렇게 되는 게 맞다, 라는 거예요. 율법이 그거 하라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럼 율법이 도대체 무엇 하러 왔기에 그게 율법이 선한 거라는 걸 증거하는 거야.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여기서 죄는 도덕적 윤리적 그런 죄 아니에요. 제발 그 수준에서는 이제 벗어나세요. 내가 설명 안 해도 되게.
그 죄를 짓는 것이, 선악체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것이 율법이 와서 자기의 일을 완수한 결과라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라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장 20절 보세요.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7장 12절,
12.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


하도 자기가 하는 일들, 자기들이 하는 일들을 죄 아니라고 하니까 계명이 와서 그것도 사실은 죄야, 하고 드러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받은 내가 진리가 뭔지를 알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어느 틈엔가 그리고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아, 율법이 바로 이걸, 나의 처음 자리를 이렇게 드러내려고 온 게 맞는 거구나 하면 율법이 선한 거죠? 잘 한 거잖아요? 그 일을. 그 말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일차적으로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이 뭐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나는 그거 잘 지켰어요, 가 아니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죄 덩어리라. 나는 그냥 뭐를 주기만 하면 그냥 바로 선악으로 갈라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그 죄를 짓는 자다. 에피뚜미아가 나고, 내가 죄잖아요. 보면. 나는 그냥 죄 덩어리네? 그걸 알았으면, 내가 한 그것이 다 죄라는 걸 알았으면 이제 그거 안 하면 되잖아요. 아, 희생제사 드리는 게 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하나님한테 칭찬 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죄라네. 그럼 희생제사 안 드리면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올 때 소 한 마리씩 안 가져 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 그거 알았기 때문에.
진리는, 생명은 땅의 것이 아니에요. 그쵸? 그런데 어떻게 땅에다가 생명나무를 심어요? 못 심습니다. 성경이 그래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안에만 생명이 있더라. 그래요. 그러면 이 땅에다가는 그 생명 못 심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거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안 열려 있는 게 맞는 거라니까요. 땅에는 그게 안 열려요.
아니, 땅에 온통 죄와 어둠 밖에 없어요. 그게 피조세계의 한계란 말에요.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온통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라 그러는 거예요. 혼돈은 뭐? There is no structure, Structure 가없어요. 그릇이 없어.
공허는? Emptiness, Contents가 없어. 내용도 없고 틀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땅이라는 게 실체가 그렇다니까요.


이 호 코스모스, 세상, 우리 육체 이건 그냥 없는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린 다 원자로 되어있다. 모든 물질이 다. 그런데 원자라는 게 뭐예요? 
원자라는 게 보이지도 않지만 하여튼 이 방만하다고 해요. 그 원자라는 게요. 그 원자 핵.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막 돌아서 원자잖아요? 
그런데 이 방이 원자라고 한다면 원자핵은 보이지도 않아요. 전자도 안 보여요. 그런데 전기력의 법칙이라는 어떤 것이 주어지니까 이게 있는 거처럼 보이는 것뿐이에요. 오 이게 원자야? 이렇게. 그런데 그 말, 법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돼요? 없는 거예요. 원자는요. 그래서 여러분을 그 전기력의 법칙을 확 뺀 다음에 확 줄여보면 먼지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데 이렇게 어떻게 보이게 되냐고요. 그리고 어떻게 성질도 있냐고요 다? 
그 법이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 법이 빠져버리면 여러분은 허깨비라니까요. 이 세상 전체가 다! 전부 진공이에요. 원자는.
그러니까 없는 게 맞는 거예요. 헛거라는 게 맞는 거예요. 혼돈과 공허라는 게 맞는 거라고요. 
그런데 거기에 말이 떨어지니까, 있어라, 라고 말이 떨어지니까 뭔가가 생긴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냥 낫띵 ( Nothing), 그래도 맞는 거예요. 없는 거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낫띵 들이 뭘 자꾸 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너희들이 무슨 존재냐? 선악과,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것을 알려 주려면 그냥 흑암과 죄, 피조물의 그 없음 들의 한계, 그걸로 이게 뭔지를 가르쳐 줘서 이게 아닌 어떤 것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어요. 왜? 그거는 직접 못 담는다니까 이 그릇에. 그러면 선악과를 통하여 생명을 가르치고 죄를 통하여 의를 가르치고 어둠을 통하여 빛을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다며 그게 왜 나쁘냐고? 그렇게 해서 하나로 돼야 자유롭다니까요.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은 그 죄가 뭔지 어둠이 뭔지 알아먹으라고 율법을 계명을, 말씀을 줬더니 얘네들이 그걸 알아먹으려고 하지 않고 그걸 지키려고 하네? 그러면서 죄를 지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고 하지 말라 그랬더니. 그걸 자꾸 지켜. 자존심이 있지 이건 내가 해버린다. 이러면서. 없음 들이. 꾹 누르면 먼지도 아닌 것들이.


오늘 율법, 율법 하니까 자꾸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계명들만을 떠올리는 거 같은데 율법은 선악과 먹지 마! 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서 십계명으로 주어지고 모세 오경으로 주어지고 성경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총칭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계명이에요.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이 가진, 아니, 인간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그 생래적 본성인 에피뚜미아, 그 탐심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선한 것‘ 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묶이면 그게 악한 것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도구가 호 코스모스요 말씀이란 말에요.
하나님을 직접 설명을 못하니까. 문자에, 소리에 갇힐 수 없는 그분을 어떻게 설명해요. 인간이 뭔지를 설명해서 그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린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죄 짓지 마! 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죄가 뭔지 알았어? 이걸 물어보시고 싶은 거예요. ‘나’= ‘탐심’= '죄‘. 이 공식 잊지 마세요. 그거 알아먹으라는 거예요. 그걸 확실히 깨닫고 ’나‘와는 다른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거. 이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야 진짜 완성품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를 품은 ’나‘.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그 진짜 ’사람‘. 그걸 그리스도인 이라 그래요. 이 그릇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품은 거. 그게 우리의 목적지에요. 창세기 1장에서 자칼과 네케바의 이야기가 나오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사람‘이 되는 거. 자칼이 남편, 하나님의 역할이고 네케바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연합하여 사람이 되더라! 그런 거예요. 이게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여기서부터 나온 거예요. 너희들은 그 자칼, 그 자칼을 신랑으로 담아 그 진리를 이 안에 담아야 사람 되는 거야.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야. 그 남편을 기다려야 돼. 이게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나온 거고 그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으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말하니까.


메시아는 창세기, 태초부터 계시 된 거예요. 그런데 엉뚱한 메시야를 자꾸 기다리니까. 메시야를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내 마음에 품는 거 그게 이 역사의 목적지다, 를 가르쳐 준 것, 창세기 1장부터 계속 나온 거란 말에요. 그런데 이 인간들이 엉뚱한 메시아를 자꾸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이 포로 된 이 자리에서 구해 줄 메시아, 가난에서 구해 줄 메시아,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니까요.
기름, 말씀, 진리.
그러니까 그 진리를 안 사람이 그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해 내게 이해되어진 그 진리를 안 사람이,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뭐? 
메시아를 만난 거지 그게 되지 않은 사람은 이 천년 전에 죽은 그 예수가 메시아 아니에요. 뭘 관계가 있어야 메시아지 그게. 그러니까 여태 메시아 기다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은요. 오늘 날 기독교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까요.


그러니까 율법은 나라는 존재의 구성 원소가 원소 자체가 모두, 전부 죄더라, 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는 역할로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죄라고 하기도 하는 거고. 그것을 탐심으로 부르기도 하는 거예요. 그게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그게 나라니까요. 그 율법이 오자마자 거울로 나를 딱 비춰주는 거예요. 전부 죄만 지어 그걸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에피뚜미아, 탐심이라는 게 애초 없었다면 죄라는 게 성립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그럼 죄가 없으면 하늘의 의를 설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해요. 그러면 그 죄가 나쁜 거냐고요? 하나님이 절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어떤 존재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생긴 게 그거란 말에요? 그러면?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을 설명하느냐고요. 피조물들에게.


아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죄. 짓지 마세요. 그러면 경찰이 와요. 그러니까 그런 거는 하지 말라니까요. 그런 거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 난 이제 막 살아야지! 그러면 잡아 가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렇게 사세요. 세상에서 세상의 것, 가이사의 것 주면서 사시라니까. 그런데 그걸 진리로 끌어들여오지 말란 말에요.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고작 고 수준에서 성경은 경찰이야? 검사야? 뭐 이렇게만 보는 거죠. 하지 말라 그래, 이건 하라 그래, 아니면 잡아 간대. 지옥 보낸대. 이렇게.
하나님은 피조물의 한계인 두 마음, 하나님일 수 없는 그 마음을 율법을 통하여 밝히 보여주시고 그것을 죄라 이름 하여 그 잘못된 과녁을 진리로, 은혜로 바로 잡으심으로 해서 당신과 한 방향으로 가는 그게 에이레네라 그랬죠? 둘이 멍에 같이 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거 그렇게 한 방향으로 가는 벗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존재의 목적이에요. 그 전체 과정을 그 진리의 차서, 체계를 ‘피스티스’라 그래요.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그게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미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럴 때 그게 ‘피스티스’예요. 그 말은 하나님은 믿음이란 얘기잖아요? 무슨 말이겠어요? 하나님은 믿음이다?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믿음이 되어라. 그랬잖아요. 그러한 진리의 차서, 체계로 우리를 가르쳐서 아, 이게 그거예요? 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믿음. 그리고 나를 그리로 끌고 가는 하나님의 열심을 피스티스, 믿음! 나는? 피스토스, 믿음이 된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단어가 달라요. 거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피스티스라는 그 열심 속에 죄가 사용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짜 무서워하시는 그 죄. 거기에 쓰이는 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죄 아니에요.
모든 종교에서 죄라고 하는, 심지어 하무라비 법전에서 죄라고 하는 그거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그들과 똑같이 그냥 막 우리에게 써서 주셨겠느냐고요? 예?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그런 죄 관이 아예 없으세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의 처음 자리를 호라호, 직시하게 하고, 진짜 영의 눈으로 보게 하고 거기에 절망하게 만들고 마침내 그 죄인의 자리에서 장렬하게 아! 나는 아니구나, 진짜 나는 허깨비네! 맞네. 이거 먼지 맞네! 그렇게 장렬하게 사망, 죽음에 이르게 하여 새롭게 살게 만드는, 그게 사는 거거든요. 그게 생명이거든요. 그렇게 하게 하기위해 하나님이 쓰는 도구란 말에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국교회가 쫓아내면 갈 거예요. 뉴질랜드로 갈래 그럼. ㅎㅎ 마음대로 하라 그래.
그래서 어거스틴도 오! 거룩한 죄여! 그랬다니까요. 오! 복된 죄여! 그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죄가 그렇게 좋은 거야. 16살에 사생아 낳고 막, 자기가 그런 걸 통하여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되니까 그 죄가 너무 좋은 거예요. 자기에게. 오! 복된 죄여! 그랬다니까요. 어거스틴, 칼빈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런 이면의 내용은 다 그냥 삭제하고 엉뚱한 것만 붙잡고 그냥...
그 죄가 없었다면 나를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거예요. 내가 나를 모르고 어떻게 신을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그 신도 나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죄라는 것을 육의 세상과 다르게 보는 걸 성경이 뭐라 그런다고 했어요?
‘메타노이아’ 회개, 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오, 저게 사실이야? 아, 그렇게 파르르 떨게 아니었구나! 하고 바르게 보는 거.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걸 그렇게 보는 순간 죄라는 게 삭제되죠? 그러한 죄의 삭제가 용서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죄 없음! 이렇게.
그걸 못 보니까 계속 거기에 묶여서 여기 와서도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아닙니까? 울고불고의 신앙.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데 보면 다 울어. 왜냐 하면 거기서 못 벗어났거든. 자기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시어머니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남편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그러니까 오면 설움만 북받쳐서 다 울어.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는데.


아! 그게 사실은 나를 선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이었구나, 라고 알면 왜 울고불고만 해야 되느냐고요? 물론 육을 입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게 완전히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기쁨이 되면 범사가 감사할 거 아니에요? 범사는 모든 일이거든요. 그게 안 되면 범사가 감사가 안 돼요. 사람 죽이고도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거 감사하라 그래요. 그게 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거라면 너는 그것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 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하타’예요. 그 하타라는 단어가 빗나가다, 죄 짓다, 타락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똑같이 하마르티아와. 그런데 하타라는 단어는 회개하다, 정결케 하다, 화해하다, 용서하다. 이런 뜻이 같이 있어요. 이게 뭐예요? 말이 돼요? 죄라는 단어 속에 죄 사함, 용서, 의, 회개 이게 같이 들어있다니까요.
그 죄로 용서에 이르라는 거예요. 그거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알아, 죄가 뭔지를 올바로 알아 이제 그거는 아니구나, 라는 걸 알아먹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그거는. 죄라는 걸 여러분이 올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신앙생활 하면서 계속 뭔가에 묶여서 여러분 소화도 안 돼요. 이제.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게 여러분을 더 묶는다니까요. 점, 점, 점, 점.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죄가 뭔지를 아는 게 선이에요. 죄가 뭔지를 모르고 사람의 열심히 (으로) 행하는 게 죄예요. 잘 구분하셔야 돼요. 그렇게 죄가 무엇인지 점점 알아 가다가 아, 이게 죄구나, 아, 이게 바로 나구나 이게 바로 내 안에서 긁어(?) 낼 수 없는 두 마음, 에피뚜미아, 탐심이라는 거구나.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말씀이 없었으면 그걸 어떻게 알았겠느냐고요? 바울이. 그리고 우리도. 아, 이게 그거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걸 죄의 완성이라 그래요. 성경이요. 죄의 완성. 이상한 말 많이 나오죠? 죄가 죄의 역할을 완수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면, 그리고 아, 이게 하나님이 원치 않는 거였네, 라고 내가 인식을 하게 되면 그게 바로 율법의 선함이 시인되는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율법의 역기능이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키는 나를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바리새인이었잖아요. 그게 율법의 역기능이라니까요. 그건 순기능이 아니었단 말에요. 그 말을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


약 1 : 13 -
사람이 시험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페이라조 안 한다는 거예요.)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 욕심이 에피뚜미아에요. 하나님은 도키마조 하는데 그거를 올바로 못 알아먹고 페이라조 해갖고 다 멸망한다는 거예요.)
15- 욕심이 잉태한즉 (에피뚜미아가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자 이게, 이 장성하다, 이 단어가 완전히 성취하다, 완전하게 완성시키다, 라는 뜻이에요. 죄가 완전히 성취가 되면사망이 된대요. 그런데 무슨 말일까요? 이 사망은 뭐예요. 그러면? 여기서 사망이 다나토스에요. 신양성경에서 사망이라고 번역을 한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여러분이 지금 본 이 사망이에요. 이 ‘다나토스’. 그리고 다른 단어가 ‘네크로스’ 인데. 다나토스는 아까 종, 말씀드렸죠? 완성의 의미로써의 죽음이에요. 점, 점, 점, 점 죽어가다가 확 죽어서 뭔가를 완성이 되는 게 다나토스에요.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을 때 그 죽노라가 다나토스에요. 날마다 죽어서 어떻게 되죠?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네, 라고 완성되는 거예요. 요걸 다나토스, 사망이라 그래요. 이건 나쁜 게 아니란 말에요. 네크로스는 그냥 우리 네페쉬가 숨이 뚝 끊어져서 죽는 거. 시체. 고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이 다나토스의 죽음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무트’라고 했죠? 무트 타무트.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너희는 정녕 죽을 거야. 그랬잖아요. 이거 먹으면 죽여 버릴 거야. 무트 타무트. 죽고 죽으리라. 그랬죠? 그런데 그 무트가 뭐라 그랬어요? 파자하면? 말씀으로 완성되다, 라는 뜻이에요.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너 선악과 먹고 너희들이 죄를 낳게 되면 그 죄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죽게 될거야. 어떻게? 말씀의 완성으로. 무트 타무트로 죽어야 구원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그 선한 죽음이 있단 말이에요.


주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다, 그래요. 완성하러 왔다. 그래요.
그러면 그 분이 그 아버지의 뜻을, 말씀을 완성하면 어떤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고 죽는 거예요. 그 죽음이 왜 나쁘냐고요?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죽다가 죽고 죽다가, 날마다 죽다가 결국은 그렇게 언약의 십자가에서 아니네요! 난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라고 죽는 게 구원의 차서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가 그렇게 죽은 거예요. 근데 그게 왜 나쁘냐고요? 그걸 보고 하나님이 죽을 수 있어요? 이렇게 물어봐야 되느냐고요?


여러분,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갖고 오신 분이다. 라고들 말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의 신성이 죽은 겁니까? 예수님의 인성이 죽은 겁니까? 이렇게들 물으시는데 성경 어디에 신성이라는 말과 인성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건 조직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지식의 수준에서 만들어낸 말이에요. 그 분은 하나님으로 오신 사람이에요. 신성은 뭐고 인성은 뭐예요? 아세요? 모르는 말 좀 쓰지 마세요. 제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분은. 그러나 성경에 주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그 하나님은 아니에요. 왜? 그 하나님은 세상이 듣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엘로힘으로, 그 주어로도 나오지 않는 그 하나님이 ‘아마르’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엘로힘으로 너희들에게 맞는 하나님을, 그 수준에 맞는 하나님을 제시해 줄게. 하나님이에요. 그거 하나님.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우리가 그 분이라고도 말 할 수 없는 그 분은 아니라고. 왜?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위격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One substance Three persons 는 뭐냐고요? 위격이 뭔지는 아느냐고요?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는데 그게 뭔지는 아느냐고요? 위격이 뭐예요? 그런데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고 자꾸 그런 얘기들을 한다니까. 그냥 성경말씀 그대로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거’ 라고 갖고 있으면 돼요.


삼위일체가 있느냐는 등. 없냐는 등 그딴 소리를 뭐 하려 하느냐고요? 아무 관심 없어요. 난 거기에. 그 우리가 담을 수 없는 피조세계, 호 코스모르는 도저히 감지도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우리 수준에 맞는 하나님이 오셔서 제시해주시는 건데 그 큰 하나님은 아니란 말에요. 그걸 굳이 하자면 위격이 다르다고 하잔 말이에요. 그리고 이 하나님도 못 알아먹었기 때문에 이제 진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되셔서 들어오시는 걸 그래, 또 다른 위라도 하자고요. 그러면 삼위일체가 뭐가 어려워요? 난 신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 교수가 세계의 진짜 석학이었는데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계속 물어봤더니 나중에는 야, 그게 논리로 따지는 거냐? 그냥 믿어야지. 그래요. 그러면 왜 가르쳐? 자기도 그냥 믿어요, 그러고 말지. 설명도 못 해줄 거를. 혼만 났네. 그냥. 뭐 그런 데에 갇혀 있어요? 그런 신학의 틀에. 저도 뭐 굳이 설명해 달래니까 뭐 페리코레시스 해가지고 뭐 셋이서,, 솔직히 그게 이해가 가던가요?
어렵지 않아도. 진리가 되면 그런 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누구와 논쟁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예수님의 죽음. 그건 당연한 거예요. 마땅한 거예요. 호코스모스는 그렇게 죽어야 돼요. 왜? 진리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 기고만장한가 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내려와서 나를 위해 죽어야, 죽어 줘야 된다고 우기는 게 인간들이라니까요. 이 Nothing 들이. 하나님의 법, 그 말만 쑥 빼버리면 그냥 허깨비인 것들이 그 하나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와서 나를 위해 죽어줘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그게 마치 기독교인양.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을 살게 될 성도들의 역사 속 대표이신 거예요.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왜 율법으로 오셨겠어요?
그거는 말 못하는 율법, 그저 서 있는 옛 성전. 아무도 못 알아먹어. 자연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냥 말 못하는 이 호 코스모스, 그 역할을 하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돼요


단지 그 옛 성전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옛 성전의 진의를 설명하시고 간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하는 율법이었어요. 율법이 뭐예요? 말씀이 뭐라 그래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이다. 그러죠? 그 말씀이 어디에 적혀 있어요? 성경에. 그러면 여러분 성경을 보고 아이고 하나님! 이래요? 그거 하나님이라 며요? 성경이 말하는 바잖아요? 그거 하나님이라면서?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적혔다고 아이고 하나님 하면서 들어가면서 나오면서 절하고 그러나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성경이 쓰레기인 것처럼 그 사람에게도 예수는 쓰레기라니까요. 진리를 못 알아먹으면.
창기들하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먹기를 탐한 그냥 목수의 아들. 그것일 뿐이에요.


예수님은 성도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직접 보여주시는 분이에요. 말씀이시란 말에요.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어서 마귀들이 살아난다? 마귀에 불과한 우리들이 살아나는 거. 이런 저급한 공식을 역사에 새기러 온 게 아니라 호코스모스의 세상. 그 율법이 죽어야 그리스도라는 영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피조 세계의 그 한계를 밝히러 몸소 오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주어진 여호와, 엘로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렇게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만을 추억해요. 아니, 그게 나와 상관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그걸 알아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하여 ’나‘가 누구인지를 밝혀주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늘의 아들들이 어떤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추억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만큼 나에게 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분을 섬기게 된단 말에요.


그 분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죽어야 되는데 그분을 죽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여전히 살려두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희생제사 드려야 되는 거예요. 왜? 영단 번에 드려진 그 제사가 이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날도 계속 율법을 지켜야 돼요. 율법, 율법 그러니까 무슨 뭐 레위기의 그 율법? 아니요! 자기의 행위만을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율법 지키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앞으로 우리 건물이 생겨도 새벽기도 이런 거 잘 안 하려고요. 이제. 고걸 법으로 생각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남편 밥도 안 해주고.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서 계속 지켜요. 심지어 절기도 지켜요. 아니, 어떻게 초막절도 지키고 유월절도 지키고. 아직도 교회에서. 아니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 놓으면 헌금이 많이 들어온다는 걸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이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예수님 안에 그 아버지를 봐야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묶여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여러분. 그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일이었단 말에요.


우리는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나를 절망하고 미래의 나를 소망하면서 현재를 불안하게 살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 미래에 여러분이 가야할 그곳은 뭔지는 알기는 아세요? 그거는 여러분이 소망할 것이 아니에요. 사실은. 오늘날 그게 진리로 내 것이 되어야 비로소 소망이라는 게 생기는 거지. 막연히 미래에 어디 가야할 그곳, 확실하지도 않은 그것. 그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세요.


롬 7 :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죽었어요. 그런데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방법이 나오는데 ‘호소마’, ‘호 크리스토스’예요. ‘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이런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뭘까요? 그리스도의 몸이 뭐예요? 예수예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 그랬잖아요. 적어도 그 예수는 아닐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는 영이죠? 그리스도는 그러면, 영은 반드시 그릇이 필요하죠? 자칼과 네케바처럼. 그 그릇이 뭐예요? 여러분이 그릇이라 며요? 보배 담은 질그릇. ‘나’ 란 말에요. ‘나’. 내가 그 진리를 담은 질그릇이 되어버리면 그리고 나는 질그릇에 불과한 자라는 걸 알아버면 그 때, 그 법이 나에게서 죽는다, 라는 말이에요. ‘호소마’, ‘호크리스토스’가. 그 그리스도를 담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아. 메시아를 만난 자.


과거의 그 예수님, 그 분의 하신 일을 추억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뭔지를 내가 알아서 그것이 진리를 담고 온 어떤 모형이었다면, 내가 그것이 담고 있는 걸 알았으면 그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약속의 후손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준 건데 아브라함이 그걸 알아버렸잖아요? 더 이상 그 아들은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고 남편이 사는 게 출애급기 4장의 피 남편이야기였잖아요? 그게 구원이다. 예수는? 그 아들의 모형이었으니까. 이삭의 모형. 예수의 모형이 이삭이었으니까. 내가 그 진리를 알면 내가 그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진리를 택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그 역사 속 예수를 계속 섬기는 게 아니라. 그분은 죽었다니까요. 그 세상은 죽어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다른 것으로 왔잖아요.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왔잖아요. 그러니까 그 예수를 추억하면 안 된다고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하나님. ‘나’를 위해 그 수모를 당한 그 하나님. 여전히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단 말이에요. ‘나’가 뭔데? 도대체 ‘나’가?
진리를 담은 예수님은 당연히 죽으셔야 했던 분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6장 7절 보세요.


요 16 :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 한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없어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야


왜?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예수가 떠나가지 않으면 진리인, 그리스도,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낸다고 그랬는데 ‘나를 그로 보낼게’ 내가 가서 왜? 내 얘기는 못 알아먹잖아. 너희가. 나와 함께 먹고 자고 다니면서 화장실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내가 얘기해 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잖아. 그러면 옛 성전은 당연히 없어져야지. 가야지! 어디로? 문 밖으로. 라고 쓰여 있어요. 문 밖으로. 내가 가야 그 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너희들에게 올 거 아냐? 왜? 내가 간다는 건 이 호 코스모스의 대표가 되어 간다는 건 너희들 전체를 지금 부정해버리는 거니까. 그게 부정이 안 되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가 너희에게 와? 어떻게 그게 너희 것이 되겠어? 그러니 내가 가는 게 유익 아니야? 그래요. 그리고는 내가 그로 올 거야. 그랬어요. 내가 그로 올 거야.


그가 와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뭐해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 그래요. 우리를 책망하는 거예요. 왜? 세상 죄가 되어 죽었으므로. 호 코스모르를 책망하는 거예요. 어떻게? 죄에 대하여, 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가 뭐라는 거죠? 예수가, 옛 성전이 와서 율법으로 말을 했는데 그것의 진의를 못 알아먹고 계속 희생제사 지내드리면서, 율법 지키면서 이 진리인 그분을 죽였잖아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야.
너희들이 내 말이 뭔지 알아먹었으면 안 죽지 그런데 그런 안 되는 거거든. 그게 죄야.
의에 대하여도 책망할 거야,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이건 아버지로 가니 예요. 아버지께 로가 아닙니다. 원어로 보면. 내가 아버지로 가니,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아브, 하나님의 집. 내가 성전이 되면, 그리스도 성령을 담은 성전이 되면 내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 되죠?
그때 이걸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야기한 거예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라고 이야기 한 거란 말입니다.


자, 내가 아버지로 가면 그러면 그 전의 역사 속의 그 예수가 필요 있어요? 없어요? 진리를 설명해주는데 직접. 아버지로 가서. 너희가 더 이상 이 예수, 나를 보지 못하는 게 의야! 그러는 거예요. 나를 보지 못해야 의야. 나를 자꾸 살려내려고 하지 마! 그건 사탄이라 그랬잖아요. 왜 나를 못 죽게 해? 왜 자꾸 나를 추억하면서 나를 살려 내어서 나를 섬기려고 해? 그게 베드로였잖아요. 야, 사탄아 뒤로 물러가거라, 그랬다니까요. 나를 못 봐야 그게 의야! 그랬어요.
심판에 대하여, 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으니 그래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왜? 아직 내가 아버지로 안 왔으니까. 말을 하다가 그만 하자. 어차피 못 알아들을 거. 그러신 거예요. 왜? 아버지로 오셔서 다 알려 줄 거거든요. 그런데 심판에 대하여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그래요.


자, 세상 임금. 이 임금이라는 말이 첫 째, 대표라는 거예요. 세상은 뭐? 호코스모르. 예수님이 뭐를 지러 왔다 그래요? 세상 죄를 지러 왔다 그러죠? 그러면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의 대표가 누구예요? 이 세상에 죄인 중의 괴수로 온 분이 누구예요? 그 세상 죄 다 짊어지고 갔으니까. 예수! 여기서 세상 임금이 누구? 마귀예요?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심판에 대하여, 라 함은 이 세상 임금으로 내가 심판 받을 게.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 임금으로 심판을 받은 그 사실을 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심판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걸 내가 알았어요. 이미.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 못해요. 그걸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 임금. 그게 사실은 나죠? 죄인 중의 괴수가 나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나는 자격 없어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심판 받았잖아요. 라는 걸아는 나를 그 하나님이 심판 할 수 있느냐고요? 없어요.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2장 31절 보세요.
요 12 : 31 -
31.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여기에 ‘엑소’, 문밖,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죠? 히브리서에서. 문밖으로 나가는 거. ‘엑소’. 이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던져지리라. 그래요. 포도원 농부들이 아들이 왔더니 울타리 밖으로 던져 버렸죠?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옛 성전 문밖으로 던져지리라. 라 그래요.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 자, 그 세상 임금으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던져질 텐데 내가 땅에서 그렇게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수 있어, 왜? 그게 씨 심는 죽음이니까)
33.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자 세상 임금이 누구? 자기란 말에요. 지금.)
34.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 야, 율법은 그리스도가 영원하대. 그러니까 넌 죽으면 안 되는 거잖아?)


-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러는 거예요?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봐버리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온 그 하나님으로 보고 그걸 섬기려고 하면 이분은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요 바리새인 같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들이 예수 때려 죽였잖아요. 그리스도는 죽으면 안 된다며? 그러잖아요. 지금? 나는 가서 그리스도로, 아버지로 와야 되는 거지. 지금 내 말을 너희들은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그런데 내가 안 가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계속 남아서 가르친다고 그거 알아듣겠어? 그럼 내가 가야지. 나를 죽여야지. 내가 너희들이 되어, 이 호코스모스 모형이 되어 죽어야 그 진리가 오롯이 밝혀지고 드러날 거 아냐? 그러는 거예요.


마태복음 24장 4절-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대다수예요) 내 이름 (이름이 뭐예요? 말씀, 말씀)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진리의 성령으로 오시는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옛 성전의 역할을 하는 그를 그리스도라 하여 그 예수를 섬기게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하는 그 시대가 올 텐데 그게 마지막 때야. 그게 심판이야. 언제에요? 지금, 지금! 
그런데 대부분이라 그래요. 대부분. 그렇게 죽어야 할 예수를 여전히 섬기고 있으면 계속 해서 희생제사 드릴 수밖에 없어요. 몸이 부서져라 일 년에 5번 씩, 여섯 번씩 단기선교도 가야 되고, 가서 열심히 보람도 챙기고 올 때 사람들이 다 울어 주거든. 어딜 가든. 감사의 인사를 보내주고 편지도 보내주고 일 년 내내 나는 뭔가 했어, 뿌듯하게 사는 거지. 가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진짜 진리를 알고 진짜 가자니까요, 우리가.
그들에게는, 그렇게 예수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예수가 안 죽은 거잖아요. 아니, 호 코스모스는 반드시 날마다 죽어,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어, 이제 그 죽음이 완성이니까 무트니까, 그렇게 해서 진짜 사는 건데 그 죽음을 인정 안 하면?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님이 그렇게 다 이루었다! 하고 죽으셨는데. 완성의 죽음을 죽으셨는데 그거 아니고 살아있는 예수를 자꾸 섬기면 그 사람에게 그 예수가 어떤 예수예요?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예수라니까요. 요한계시록에서 봤죠? 그걸 짐승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선 성경이 마귀의 책이 된다니까요. 그렇잖아요?
그 예수는 죽고 그리스도로, 진리로, 내가 그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이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 예수만 계속 섬기고 앉아 있으면 그럼 예수가 안 죽었으니 영단 번에 드려진 제사도 안 드려진 것이고 제사도 계속 드려야 돼, 율법적 행위도 계속 해야 돼. 그럼 뭐예요? 성경은 죽었다고 그러는데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자잖아요?
그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아닙니까?


예수가 세상임금, 죄인 중의 괴수로 죽어서 ‘나’라는 그 세상, 그 죄인 중의 괴수가 그 임금 안에서 죽고 그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거, 하나님의 성전으로 다시 사는 게 구원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 예수가 그를 죽인단 말에요. 계시록 13장 2절 보세요.
계 13 :2-
2.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여러분이 그 율법에 여전히 묶여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용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예수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보세요, 죄인 중의 괴수. 세상 임금인 ‘내가’ 되어서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었어요. 나에게 세상 임금이 있어요? 없어요? 이제. 그런데 뭘 두려워해요? 왜 여러분에게 마귀라는 게, 사탄이라는 게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돼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며? 그런데 왜 세상 임금의 종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죽었다면서? 안 죽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면서? 성도들에게만 그 세상 임금이 죽었어요. 그래서 자유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임금 아래에서 율법의 종노릇 하게 되어 있어요. 잘 알아듣고 계신 건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니까. 제발 잘 들으세요. 여러분.
그렇게 세상 임금이 ‘내가’ 되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나를 더 이상 심판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죽음은 나랑 아무 상관없는 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피조물의 생래적 한계인 에피뚜미아, 탐심을 올바로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세요. 그리고 그 율법은 그들의 죄를 폭로해냅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근사한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폭격 당하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다나토스의 죽음을 맞게 돼요. 날마다 죽어요. 날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완성이라 그래요. 텔레스타이. 다 이룬 거야. 다 이룬 거야. 말씀이, 율법이 바로 그거 이루려고 한 거야. 다 이룬 거야. 말씀 하세요. 그 죽음이 예수의 텔레스타이의 죽음인 겁니다.


역으로 예수님의 그 다 이루었다, 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된 자는 그러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있는 거잖아요? 난 아니구나! 이렇게. 그거 없었으면,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지 않았으면 난 큰일 날 뻔했네? 둘은 동시에 일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아는 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열심히 허벅지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화내지 말아야지, 용서해야지. 요게 죄 짓는 거예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골로다의 십자가가 한 방에 그러낸 거란 말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서 바로 그걸 깨달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는 이제 내거가 되어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그냥 모형으로 날려 보내도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 안 들고 다녀도 되고. 그런 거예요. 세상의 임금, 짐승, 용 같은 건 뭐 여러분을 괴롭히는 어떤 그런 거 아니에요. 밤에 이상한 거 보는 거 그거 밥 잘 안 먹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그런 거 혹시 나타나면 저한테 보내세요. 예? 우리 목사님한테 먼저 갔다 와. 그렇게. 그런 거 없어요. 네? 없다니까.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모르니까. 모든 게 다 그래. 모르면 당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서기 전에 구약시대에 어떻게 구원 받아요? 그 진리를 깨달아 구원 받아요. 그 진의를 십자가로 설명해준 것뿐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진의 깨닫잖아요. 깨닫고 아 그거, 그 예수, 그 십자가? 모리아 산에서 죽여야지. 그거. 그렇게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실체인 그거는 못 본 거 아녜요? 십자가는. 그러나 증거는 받았잖아요. 하나님의 글로. 히브리서 기자가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로,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가 진짜, 그 하나님이 진짜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거 아니에요?
야, 그 실체가 직접 왔는데 우리가 그게 안 됐는데 걔네들이 그거 헛소리 한 거 아니냐? 이게 히브리서의 논리에요.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온전하지 못 해. 이랬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 인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인이 안 되면. 진리가 안 되면.


그래서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를 봤다, 그러는 거예요. 진리를 봤다, 라는 거예요. 내가 담고 있는 진리를 그가 봤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하 아담’ ‘하 벤’, 그 인자의 라인이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지만 “무트‘로 끝나요. 무트. 그리고 와우 계속 형, 현재 진행형이에요. 아니, 옛날 사람인데 죽었더라, 라고 완료나 과거로 써야지 왜 그들이 죽고 있다, 라고 쓸까요? 죽던데? 이렇게? 그들이 계속 그 다나토스의 무트예요. 지금 말씀으로 완성되는 죽음을 죽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죽으면 결국 사망에 이르면 어떻게 돼요? 다나토스에 이르면? 진짜 사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야. 나는. 그런데 죽었잖아요? 어떻게 죽었어요? 무트 다나토스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짜 산거니까,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죽음을 죽는 거예요. 예수가 바로 그 죽음을 죽은 거라니까요.


아니 그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생명력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는 거예요. 없어지고 하나님이 영광과 능력만 찬송 받아지는 것. 그 죽음이,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가득찬 곳이 천국이라니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죽으시는 분이에요.
자기를 비워서. 그런데 하나님이 왜 죽으시느냐니요? 안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죄가 나고, 내가 죄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그 죄를 밖으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들만 그걸 감지해요. 다른 이들은? 나 잘했죠? 라고 한다니까요. 성도만 그 죄를 낳아요. 그리고서는 아, 이게 죄야? 율법에 탐심이 죄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몰랐을 뻔했네?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구나! 그게 뭐예요? 나의 사망이에요. 다나토스. 그러면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완성되어 사망을 낳고 그게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요. 거기서 사는 거야. 생명이야. 하는 말이 갖고 있는 내용이란 말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어줍잖은 그 얕은 수준에서 갖고 있던 그거는 빨리 깨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이해가 가요. 그거 붙들고 있는 한 자꾸 이걸 튕겨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리를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 왜 율법, 에피뚜미아가 죄를 낳게 하시고 그 죄는 사망을 낳고 그 사망이 곧 우리의 선물이며 영생인지 아시겠죠? 다음 주에 우리 신랑과 남편을 통해서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인간의 귀로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열심히 성실하게 차곡차곡 하나하나 쌓아서 
결국 우리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잘 죽게 하시고 
그리고 진짜 참 생명 하나님의 선물을 온전히 받아 영원으로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