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75. Desperado 로마서 7:7-12

Hebrew 2023. 6. 1. 19:11

[출처] 73. 사망이 선물이고 선물이 영생이다 로마서 6:23-7:7|작성자 너를향한마음은

본문 롬 7 : 7- 12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아멘.

의외의 말을 하고 있죠?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계명이라는 거는 하라 하지 말라, 의 명령이에요. 그걸 거룩하다 그래요.

의로우며 선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앞의 부분을 자 이해 못하면 여러분이 이걸 다 엉뚱하게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잘 들어보십쇼.

73년에 발표된 이글수라는 그룹의 데스페라도라는 앨범이 있어요. 거기에 데스페라도라는 노래가 있는데 

제가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듣는 음반이 바로 그 음반이고 그중에서도 데스페라도라는 그 노래는 

제가 진리를 알게 된 이후에 힘들 때 마다 듣는 제게 있어서는 영양제 같은 그런 노래입니다. 

그 어떤 찬송가나 복음성가보다 저는 은혜를 많이 받아요. 

그 노래 가사를 잘 듣고 있으면 마치 훌륭한 스승이 던지는 한편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가사를 소개해드리면.

데스페라도, 자신을 좀 추슬러 보는 게 어떤가?

자네는 오랫동안 아슬아슬하게 살아왔지 않은가?

자네는 냉혹한 사람이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건 알지만

자네를 즐겁게 하려는 일들이 자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네!

다이아몬드 퀸을 뽑지 말게, 친구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자네를 해칠 수 있다네

자네의 테이블 위에는 좋은 것들이 널려 있는 것 같군

자네는 가질 수 없는 것들만 가지려고 하고 있다네.

데스페라도, 자네는 더 이상 젊어지진 않는다네.

고통과 배고픔이 자네를 자네 집으로 인도하게 될 걸세

그리고 자유, 그렇지 자유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고

자네의 감옥은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겠다는 생각일 뿐

겨울엔 발이 시린 걸 느끼지 않는가?

하늘에선 눈이 내리지 않고, 태양도 비치지 않을 거라네

젊을 땐 노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자네는 모든 걸 잃어가고 있다네

그런 감정이 어떻게 사라져 버리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데스페라도, 정신 좀 차리는 게 어떤가?

자네의 담장에서 내려와서 문을 열어보게나.

비가 내릴 걸 세, 무지개가 자네 머리위에 떠있네

누군가 자네를 사랑하도록 해보게나.

너무 늦기 전에 말일세.~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하는 짓이 전부 이 모양인거예요. 나무대로의 유토피아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유토피아로 이르기로 합의 한 후에 그 유토피아가 원래 U + topus 없는 것이거든요. 그게. 원래 이름이. ‘이런 데는 없어‘ 가 유토피아예요. 헬라어란 말이죠. 그런데 그걸 천국이라고들 알고 있는 거죠? 사람들이 그 모양이라니까요. 그 수준이에요. 그걸 유토피아, 있지도 않은 걸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거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거죠. 그런데 결국은 모든 것을 잃는 그런 저주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진리 밖의 모습이 이러한 거예요. 그러니까 외치는 거죠. 데스페라도, 무법자! 법을 모르는 자야.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거예요. 무법자라는 건, 법을 함부로 어기고 악행을 일삼는 그런 악당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에요.

데스페라도, 진짜 무법자는 법이 의미하는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그 법을 지키고 있는 세상 속 아담들 모두를 가리키는 게 무법자에요.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패가 널리는 테이블 위에 보무도 당당히 그 패를 내놓는 거예요. 이게 맞아, 이게 맞아, 라고. 그리고는 그러한 패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좀 봐달라고 한껏 가슴을 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그 자신을 죽이는 패임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 다이아몬드 퀸 그게 최고인줄 알지? 그게 널 죽일 거야. 그거 자꾸 뽑지 마. 그거 의지하지 마. 그러는 거예요. 

사람들은요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섬기며 신을 사랑하고 신이 하라는 걸 열심히 해내는 게 우리 인간이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죠? 그게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경건하고 올바른 신앙의 틀이에요. 

며칠 전에 그 힌두교 축제 때 사진들을 보니까 그 사람들은 그 신이 두려워서 온 몸을 바늘로 막 뚫더라고요. 그래야 뭐 속죄가 된다나. 

그게 종교에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은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내리사랑이죠. 신이 우리를 위해 먼저 일을 하시며 신이 우리를 진리로 섬긴다는 걸, 아는 걸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갚아! 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셨으니 내가 갚아야지, 로 먼저 뛰는 거예요. 앞의 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한 마디로 너 자신을 먼저 알라! 라는 거예요. Know your self 너 자신을 먼저 알라. 

그러면 네가 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걸 아는 게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니까요. 

그렇게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면 자연히 신이라는 존재를 경외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그의 가르침을 하나로 축약하면 ‘너 자신을 알라’ 거든요. 그가 왜 죽었어요? 왜 죽였습니까? 

사람들이, 헬라 사람들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말을 한다 그랬어요. 뭐? 너 자신을 먼저 알아라. 

천국가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 사람이 안 거 같아요. 

그러니까 헬라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죽였다니까요. 

청년들을 미혹하는 말을 했다고 죽였다고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고. 

그렇게 우리 자산이 누구이며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과 연합시켜서 신적존재로 만들어 

영원한 하나님의 벗으로 삼으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게

율법이에요. 그게 계명이에요. 그것이 말씀이라니까요. 그게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지키려는 행위를 뭐라 그랬어요? 죄라 그러잖아요. 바울이. 그걸 죄라 그래요. 

줘놓고 그걸 열심히 자기들 수준에서 지키려고 하면 그걸 죄라 그래요. 과녁을 잘못 잡았다. 하마르티아. 그걸 죄라 그래요.

그리고 그 율법, 그 호 코스모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알게 되는 거 그래서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걸 ‘싸다크’, 의다! 그래요.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처음자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그 영광을 찬송하지 못하고 

그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 그 계명, 내용, 그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계명에만 머물러서 그걸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거. 

힌두교인들처럼 열심히 뚫어보기도 하고 고행해보기도 하고 뭘 해보려고 하는 거 그걸 하마르티아, 죄라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심 속에 들어있는 성도는 절대 그 죄에 머물러 있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되도록 이끄신다고요. 

그들은 반드시 그 죄를 통하여, 죄를 안 짓는다는 게 아니에요. 통과해야 돼요. 그 과정을, 

그 죄를 통하여 반드시 ‘싸다크’ 의, 올바른 관계에 도달하게 되어있어요. 어떤 관계? 하나님은 하나님, 나는 피조물, 그 관계.

그것을 성도의 거룩한 죽음, 다나투스 무트. 라고 했죠? 

죽음은 다 똑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네크로스’의 죽음은 그냥 죽는 거예요. 사, 죽을 사. ‘다나투스’는 종. 완성이라 그랬죠? 완성이에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의 죽음이죠? 이게 종이에요. ‘다나투스’ 완성이라니까요. 이것이. 완전한 자기부인.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살려내시는 건 왜 살려 내세요? 

여러분을. 왜 눈과 귀를 열죠? 죽이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살리시는 건 죽이려고,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죽이려고 살려내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죽으면 그걸 살았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생명이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로마서 7장은 전부가 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사야서 52장 15절 보세요.

사 52 : 15-

15.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이건 여호와의 종의 도래에 관한 것이에요. 이사야서 52장은 그가, 메시아가)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 세상의 왕들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입을 봉하게 되는 거예요. 그거 아니야, 이렇게)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누가 오면?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 여호와의 종이 오면 말씀 속에 감추어져서 전파되지 않은, 왜 전파가 안 돼요? 

선지자들이 그렇게 많이 와서 막 전파를 했는데 전파가 안 돼요. 메시아가 안 오면. 그리스도의 영이 안 오면 그게 우리에게 전파가 안 된다니까요. 그가 오면 전파가 된대요. 비로소. 그 진의가, 그 내용이. 

그러니까 그 말씀 속에서 듣지 못한 진의를 깨달아 듣고 보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메시아가 오면.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을 표피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거예요.

말씀의 진의는 아무에게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오면 그 진리가 전파되어 보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들이 들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못 듣고 못 보는 게 당연한 거예요. 여러분.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 갖고 뭐라고 안 그러신다니까요. 

누가복음 8장 17절 보세요.

눅 8 : 17-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지금 뭐예요? 감추어져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 밑에서 뭐라 그래요?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 어떻게 듣고 있나 한번 삼가서 봐. 그러는 거예요)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그 율법, 계명,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니? 

나는 감춰 놨는데 너희 지금 듣고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걸 열심히 지킨다고 하는데 어떻게 듣고 있는가 스스로 삼가서 봐 그러는 거예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 나는 깨달았는데? 들었는데? 봤는데? 그래서 지켰는데? 그것 다 뺏어간다는 거예요. 

내가 말 한 거,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난 감춰놨는데 어떻게 네가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이런 말인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그 표피 안에 진리라는 내용을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표피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의 해야 할 바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한 절 한 절 해석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은 굉장히 중요한 장이에요. 이 한 장 때문에 로마서 전체의 방향이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게 된단 말에요. 제가 자세하게 한 장 한 장 설명 해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로마서가 여러분 쉬운 책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 7절은 지난 시간에 이미 공부한 내용이에요.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게 맞는다면 어떻게 율법이 죄냐? 7절이었어요. 이게. 어떻게 율법이 죄냐? 

율법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고 나니까 그 율법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바울이 알았어요. 

그 율법은 오히려 바울의 그 열심 있는 율법적 행위를, 로마서 10장에 나오죠? ‘나 열심히 했어. 열심히 했어’ 그런다고요. 

그 율법적 행위를 탐심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죄라는 걸 가르치고 있는 게 율법, 성경이더라는 거예요. 바울이 알고 나니까. 

그런데 자기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러한 율법적 행위가 의로운 행위인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그게 그런 내용이라는 걸 내가 몰랐다면 계속 그거 하지 말라는 에피뚜미아, 탐심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 나 잘했죠? 라고 할 뻔 했다. 이 얘기란 말에요.

그 에피뚜미아, 탐심이라고 번역 된 그 에피와 두모스의 합성어라고 했어요. 그 두모스는 두오라는 단어에서 온 건데 그게 희생제사라는 거예요. 에피는 강조니까. 그러니까 탐심, 에피뚜미아가 뭐예요? 내가 열심히 한 거. 그걸로 열심히 했는데 그걸 죄라 그래요. 그런데 뭐예요? 그게? ‘두’에서 왔다 그랬으니까. 희생제사, 율법적 열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피뚜미아라는 단어 자체가. 그거, 성경말씀을 그렇게만 보고 이 두 마음으로 해석해서 죽어라고 했는데 성경이 ‘그게 죄야!’라고 이야기 하더라는 거예요. 바울이. 탐심이락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율법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열심히 희생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 그거를 오히려 하지 말라! 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된 거죠? 그거 알았으면 된 거 아니에요? 

선악과가 뭔지 알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게 되는 거니까. 율법을 통하여 이거 아니네? 를 알았으면 그럼 된 거예요.

그렇다면 그렇게 자신에게 열심 있는 그 율법, 그 율법적 행위를 시켜 놓고 

그게 무엇인지를 가르침으로 해서 자기를 진리에 이르게 한 그 율법이 왜 죄냐? 그러는 거예요. 그게 7절이라니까요. 

그래 그거 죄 맞아.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죄야. 그런데 나는 진리가 됐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나를 여기까지 그게 뭔지를 가르쳐서 여기까지 온 그 율법이 고맙더라는 거예요. 자기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죄인데 내가 진리가 되고 보니까 그게 나에게는 죄가 아닌 거예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 것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그게 왜 죄냐? 오히려 나에겐 너무 소중하고 기특해’ 

구원에 이른 성도, 진리에 이른 성도에게 있어서 거기까지 이르게 한 징검다리를 놓아준 율법과 죄는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것 자체가 삭제되는 거죠? 그 때 그걸 용서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단순히 여러분의 죄 몇 개를 이렇게 ‘야, 이거 없던 걸로 해줄게’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용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그거는 이 땅에서 재판관들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니, 대통령들도 사면해주고 뭐 용서해주고 하잖아요. 그런 정도의 용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말하는 용서는. 아예 죄 없음으로 선언해주는 거라니까요.

너에게는 죄가 없었어, 라고. 그걸 용서라고 해요. 굳이 우리가 갖고 있는 단어로 이야기를 하면. 뭐 몇 가지 잘못한 거 그거 없던 걸로 해 줄게.

가 아니란 말에요. 너희에겐 아예 죄가 없었어. 

그래서 바울이 8절을 이렇게 잇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합니다. 잘 보세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이걸 그동안 어떻게 추측하고 계셨습니까? 이거 한국말로 읽어서 진짜 정확히 한국말로 설명해 주실 분 있으세요?

무슨 뜻인지 이게? 이 구절을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죄가 기회가 되어, 기회를 잡아, 죄가 기회라는 거예요. 지금. 계명을 갖고, 하라, 하지 말라, ‘ 엔 톨래’의 그걸 갖고, 

그러니까 율법, 우리가 말씀을 대하게 되면 일단 계명으로 그렇게 보게 된다니까요.두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게 죄가 기회가 되어 어떤 기회를 만드는 거예요. 계명을 갖고. 내 안에서 모든 탐심을 완성해버렸어요.(카틀가조마이). 

에피뚜미아, 그 탐심을 완성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렇게 법에서 ‘코리스’ 분리가 되자 죄가 ‘네크로스’, 다나투스‘가 아니에요. 

죄가 네크로스, 죽더라! 없어지는 거에요. 죄가 죽더라. 그렇게 내가 법에서 분리가 되자 죄가 죽더라.

자, 바울이 7절에서 나에게 탐심이 죄라고 가르쳐 준 그 율법이 죄냐? 라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 후에 

그 기특한 죄가 내 안에서 행한 일을 8절에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 죄가 한 일이 뭐냐? 죄가 기회를 만들어냈는데 어떤 기회? 살리는 기회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죄가, 그 기특한 죄가.

기회를 잡아, 그 기회, 하라 하지 말라, 들의 그 계명을 통하여, ‘엔톨레’ 계명을 통하여 탐심을 완성했다. 진리로 깨닫게 만들었다. 는 거예요. 

그 에피뚜미아, 이 탐심, 이것만 갖고 있으면 죽는데 이걸 완성해내더라는 거예요. 기필코, 그 죄가. 성도 안에서는.

그러니까 그렇게 진리로 깨닫게 만들어서 내 속에서 카틀가조마이, 그 법을 계명을 진리로, 탐심을 진리로 완성해냈다. 그래요. 

그렇게 하니까 ‘노모스’ 법이, 율법이 내게서 사라지더라는 거예요. 

아, 이게 지키라는 게 아니었구나! 라고 이제 알게 됐어요. 카틀가조마이,에피뚜미아가 이렇게 카틀가조마이고 완성이 되니까 

이 법이 나한테 지키라고 준 게 아니네! 라고 사라지니 분리, ’코리스‘ 되니까 그 죄가 죽더라! 이 말이에요.

없어졌다는 거예요. 자기한테는 이제 죄라는 개념 자체가.

그러니까 그러한 바울에게 있어서 그를 붙들고 있던 그 죄가 뭐 그렇게 대단하게 나쁜 것일 수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도덕적 윤리적 잘못 실수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나세요. 그런 거는 잘 하세요. 

경찰에 안 잡혀가려면. 그런 거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아요. 

죄가 기회가 되어서 계명을 사용하여 율법을 진리로 깨닫게 하고 장렬하게 전사해버리더라는 거예요. 죄가. 나에게 있어서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죄가 죽었어요? 율법이 죽었어요? 맞아요? 자신 없어요? 성경은 이야기하잖아요? 바울이. 

죄가 죽었죠? 율법이 죽었다면서요. 여러분에게. 바울이 그 얘기하는 거예요. 죄가 죽었어요. 

그러니 그 바울에게 있어서 그 죄가 율법이 얼마나 고맙겠느냐고요?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오고 장렬하게 죽다니, 오 소중한 죄여! ㅎ

어거스틴이 그랬다니까요. 오, 거룩 죄여!!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원래 그 죄라는 게 죽어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하늘의 것,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잠시 그 죄라는 걸 율법을 통하여, 계명을 통하여 들어 썼더라는 것이죠. 본문 9절 보세요.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원문에는 깨닫다, 라는 말도 없고 전에, 라는 말도 없어요. 자, 지금 8절을 기억에 두시고 계속 연결을 시키셔야 돼요. 

자, 그렇게 해서 이제 죄가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법이 없어져버렸단 말에요. ‘코리스’ 사라져버렸어요, 나랑 분리가 되어 버렸어요. 이제.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난 법과 분리되어 살았다. 생명을 얻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 있어요. 원문에는. 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이런 말 없다니까요. 나는 그렇게 법이 사라지고 죄가 죽고 난 다음에 나는 생명을 얻었다. 그 법과 분리되어. 이런 말이에요. 앞의 부분이. 당연하죠. 

법이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니까 난 살은 거예요. 이제. 사망이 나랑 아무관계 없어진 거라니까요. 그 말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계명이 진리로 완성이 되니까 그 죄라는 게 살아났다가, ‘아나 자우’, ‘아나’ 가위의 것이죠. 그죠? ‘아노뗀’ 위로, 거듭나다가 위로 나다니까. ‘아나’, 위로. ‘자우’가

생명, 살아나더라. 그 죄가 위의 것으로, 그 진리로 깨달아 지더라는 거예요. 그 법이 그렇게 죽고 나니까. 내게서 죽고 나니까, 

그리고 내가 생명을 얻고 나니까. ‘아나 자우’! 그 죄가 진리로 깨달아지더라는 거예요. 아, 이게 그거였구나! 라고 깨달아지는 거. 

죄가 살았고, 그리고 내가 ‘다나투스’예요. 여기, ‘네크로스’가 아니라. 내가 그 완성적 죽음. 그 완성의 죽음을 죽게 되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성도의 죽음. 그 죽음이 나에게 비로소 오더라, 라는 거.

그렇게 죄와 계명이 나에게 기회, ‘아폴매’ 이게 출발점. 시작. 죄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 먼저 먹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 죄. 그 죄가 나에게 기회가 되어서 계명을 그 진리로 완성해내고 위의 것으로 깨닫게 해주니 내가 완성의 죽음의 자리로 가더라, 가 9절이에요. 이해가 가세요? 로마서 7장의 요부분만 잘 이해하면 로마서 전체가 일관성 있게 쫙 풀려요. 연결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거를 도저히 인간들이 그렇게 못 보는 거예요. 무서워서. 그래서 번역하는 사람들도 ‘아닐 거야,,’ 하면서.

그래서 성경에 적혀있죠? 서기관의 어리석은 붓이 성경을 망친다고. 서기관이 성경 필사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단어는 여기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으니까 자기들이 고쳤다니까요.

자 그렇게 나를 진리로 이끌고 완성하는 데에 그렇게 징검다리를 놓아준 죄와 율법이 왜 나쁘냐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리고 10절을 이렇게 잇습니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내가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계명을 내 안에서 찾았다,’ 에요. 

계명이 내 밖에 있으면 내가 지켜야 할 것이에요. 그게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마음이 되면 뭐예요? 그게 생명이라니까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 이 계명이 밖에 있으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그렇죠? 

그런데 내 안에서 그게 뭔지를 깨달아 내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찾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여 내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예요. 

그러니까 한글만 이렇게 읽어 갖고는요 우리가 막 이야기를 이렇게 추측하고 추론하고 이렇게 만들어 낼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한 번요. 

내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내 안에서 찾았다. 이렇게 하여 내가 그 ‘다나투스’ 의, 완성의 죽음. 무트의 죽음,

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죽음, 죄, 율법, 계명 이런 것들이 여기에서 나쁜 걸로 쓰이고 있습니까? 좋은 걸로 쓰이고 있어요. 지금.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의 그 선악 구조 속에서 그런 단어들을 대할 때, 얼른 나쁜 것, 더러운 것, 불쾌한 것 등으로 판단을 해버린단 말에요. 

그러니까 성경 해석이 이렇게 중구난방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건 나쁜 거. 하고 전제를 하고 이거를 연결시키려니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에요. 완성의 죽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다나투스’의 ‘무트’의 말씀의 완성. “다 이루었어!” ‘테테리스타이’ 그 완성의 죽음을 죽으신 분이 누구예요?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그 다나투스의 죽음이라니까요. 

그것이. 그 사망이 이제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사망이 되는 거란 말에요. 우리가 그렇게 죽게 될 거라니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잔인하게 뭐 매 맞고 죽게 된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그 말씀의 완성, 아 그래. 하나님이 전부, 나는 낫띵(Nothing). 이렇게 내가 다나투스의 죽음을 죽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 사망이 내 사망이 되는 거예요. 이제. 그 예수의 사망이 우리의 사망을 가져오게 된다는 거고. 왜?

그 예수의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을 절대 못 받는다, 가 그것이 갖고 있는 메시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네요? 그걸 죽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사망이 우리에게 그 죽음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십자가가. 그렇게 죽는 자가 진짜 산 자야.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그 현실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고전 15 : 52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성경에서 나팔소리는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말씀선포입니다. 진리의 선포에요. 그래서 나팔소리가 나면 항상 심판과 구원이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일곱 나팔 마찬가지에요. 나팔, 그건 뭐 제가 성경구절 여기저기 찾아 드릴 수 있지만 시간관계상 그냥 그렇게 알고 계세요. 나팔소리 그러면 진리의 선포에요. 그래서 나팔이 불면 여리고가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가 되면 죽은 자들이 이제 다시 살아나는데 나중에 있을 무슨 부활 이런 거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그러면 그 썩을 것, 위에 썩지 않을 것을 입혀준다,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나중에 살아났는데 이거 없애지도 않고 그 위에다가 그걸 입혀주면 뭐냐고요? 그 안에 있는 썩은 거를. 그런 말이 아니란 말에요.

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데, 말씀이 전파되면 은 나팔이 울리면. 살아나는데 어떻게 살아나는가 하면 다르게 만드는, ‘알라쏘’가 다른 차원의 존재. 다르게 만들어진 존재로 이제 살아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존재에요. ‘알라쏘’, 이미 다른 존재가 된 거라니까요. 이제. 살아나는데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느냐 하면 썩을 것 그 호 코스모스, 율법. 그 썩을 것, 우리의 육, 마찬가지, 그 위에 썩지 않을 것을 입어요. 벗는 게 아니라니까요. 덧입어요. 그리고 죽을 것 위에 죽지 아니할 것을 덧입어요. 그 덧입는다는 건 그것 자체가 그것 화되어, 깨달음으로 그것 화되어 버린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벗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 화되어 버리면 옛날 것이 없어진 거니까 그걸 벗었다, 라고도 이야기 하지만 그런 벗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덧입는다, 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갖고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 거지 이걸 없애버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죠? 

성경말씀을 갖고 진리를 깨달아야지 성경말씀은 아니야, 라고 가면 안 되는 거처럼. 그거란 말에요. 덧입는 거예요.

그것이, 이김이 사망을 완전히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아카타피노’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하고 이야기를 해요. 덧입으면 사망이 없어져요. 더 이상 사망이 아닌 거예요. 흡수해버려요. 가차 없이 진리가. 그게 ‘다나투스’야. 사망이야. 좋은 사망이에요. 그러니까. 그래서 여기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약 오르지 매롱, 사망아 너는 이제 나 못 잡지, 이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좋은 거라니까요. 이 사망은. 

다나투스 사망이란 말에요. 그렇게 되면 사망이야. 그 이김의 사망. 그 사망을 예수님이 죽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썩을 것은 원래 썩지 않을 것을 설명하는 거였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거고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니까. 죽을 것은 죽지 아니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죽은 예수는 죽지 아니할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설명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다나투스예요. 그게 사망이란 말에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죽음. 그러나 그 자체에 묶여버리면 썩고 죽는 것이 되는 거고. 그것으로 아, 그게 그거였어! 라고 알면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할 것으로 덧입은 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고린도전서에서 또 뭐라 그래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러잖아요. 진리로 옷 입었느니라. 그걸 부활이라 그래요. 그 고린도전서 15장이 부활장이잖아요. 그걸 부활이라 그런다니까요. 그리고는 그 사망으로 우리를 가르치는데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죠? 그 ‘펜트론’ 쏘다, 라는 말은요 유대학교, 서당 같은 데서나 우리 한국의 학교에서는 몽둥이로 패죠? 요즘은 그것도 안 되지만. 전부 전화기 꺼내든다면서요? 찍어서 확 올린다! 유대사람들은 막대기 있죠?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쿡쿡 찔렀어요. 그건 더 비인간적인 것 같은데 하여튼 저는. 자극을 주는 거예요.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자극을 줄 때 쓰는 쿡쿡 찌르는 막대기를 ‘펜트론’이라 그래요.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 막대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극을 주어 가르치게 하는 지팡이와 막대기. 헬라어 사전 갖고 계신 분 한번 찾아보세요. 스트롱 코드 2759번 찾아보세요. 하나님의 자극이라고 쓰여 있어요. 쏘는 그러니까 뭐 이거 사망이 막 쏘나봐!

하나님의 자극,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이 사망으로 무얼 가르치니? 그런 거예요. 뭘 가르쳐요? 죄!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사망의 쏘는 거, 펜트론, 사망이 가르치는 건 죄요. 우리가 지금 본문에서도 봤잖아요. 로마서에서. 그 죄를 ‘아나자오’ 위의 것으로 이해시켜, 이게 펜트론, 가르치는 거예요. 자극을 줘서. 사망으로. 우리가 그런 죽음을 죽으면서 그 죄를 배우는 거라니까요. 이게 선악과구나, 이게 죄구나. 배우는 거예요. 쿡쿡 찔러서. 그런데 그것이, 그 죄가 무엇을 갖고 우리를 가르쳐요? 죄의 권능은. 죄의 힘. 죄가 갖고 있는 그거, 뭐라 그래요? 율법이라 그러잖아요. 사망아 네가 쏘는 게 어디 있어? 그리고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게, 거기선 사망이 아니라 ‘하데스’라고 되어있어요. 거기는. 그러니까 사망이 아니에요.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음부야? 네가 이기는 거. 네가 정복한 건 뭐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데스’가 뭐냐 하면 ‘하’, ‘데스’ 가 에이돈 이거든요. 보다 듣다, 이걸 못하는 것을 ‘하데스’ 지옥이라 그래요. 그걸. 성경이. 

하데스. 그 하데스가 뭘 정복했어요?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갖다 주는 거라니까요. 

사망아, 다나투스야, 다나투스 네가 가르치는 건 죄야. 

하데스야, 못 알아듣고, 못 말하고 못 보고 한 하데스, 네가 정복한 건 뭐니? 하나님 나라잖아. 

우리가 처음부터 못 알아듣고 못 보고 해서 야, 이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 건가? 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부어 이게 아니구나, 라고 하여 

그렇게 열렬히 뛰던 우리를 죽여 버려요. 다나토스, 죽여 버리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고

그 다나투스의 예수님의 죽음 그 사망이 우리에게 바로 그게 탐심이며 그게 죄라는 걸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가 무엇을 도구로 쓰느냐 하면 율법을 도구로 쓰더라, 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한 건 아무것도 없네? 그래서 뭐라 그래요?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 이게 끝이에요. 감사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니까요.

사망아 약 오르지? 이제는 나 못 만지지? 가 아니란 말에요. 그걸 사도 요한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5장 1절 보세요.

요일 5 :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그 예수가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진리였다, 라는 걸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써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 그의 계명을 Keep, 내 안에 마음으로 간직할 때에요. 하나하나 다 지켜낼 때가 아니라 그 계명들을 마음으로 갖고 있을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쓰여 있네요. 친절하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열심히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니까요. 왜? 그걸 내 마음으로 갖고 있으면 내가 그 사랑을 흘릴 수 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을, 사랑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증거하는 거잖아요. 아니면 그분을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올바로 그분을 사랑으로 전달해주는 걸 그분을 사랑한다, 하고 하는 거예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왜 무겁게 지키려고 해? 마음으로 갖는 거라니까)

4.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호 코스모스, 호 코스모스가 그냥 이런 세상, 마귀들이 사는 이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보이는 것으로 세워준 모든 걸 세상이라고 해요. 

그걸 이기는 게 뭐예요? 진리로 깨달아 믿음으로 갖는 거.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거기에 머물면 안 돼요.)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런데 조금 아까는 뭐라 그랬어요?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김이라는 게 뭐예요? 행위예요? 믿음이에요?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게 세상을 이기는 거라니까요. 정복, 극복하는 거라니까요. 

호 코스모스를. 이거는 눈에 보이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 내용이 있었구나! 이게 세상을 이기는 거예요. 

나가서 뭐 주의 군사로 싸우고 이러는 게 아니라. 어디 가서 누구랑 싸울 거예요? 마귀새끼는 여기 안에 있는데. 

요즘 여름이라고 청년들이 단기선교 여기저기들 많이 가는데 너무 불쌍해요. 이 더운데 세상에 가서 뭐하다가 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 이 진리를 갖고 가서 차근차근 몇 날 며칠을 잘 설명해주고 오는 게 선교죠. 선교라는 말 단어 자체가 설교예요. 그 단어 자체가. 그런데 그게 준비가 안 된 사람이 무슨 선교를 갑니까? 돈 까지 걷어 가, 아주 공개적으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한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이김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 그 역사를 11절이 이제 이렇게 잇습니다. 본문 11절 보세요.

7: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무슨 말인가? 또 죽여요? 계속 죽어 뭐가? 벌써 죽었다며?

자, 죄가 기회가 되어 계명을 갖고 나를 속였어요. 우리가 속잖아요? 그건 인간들의 한계라니까요. 당연히 속아야 돼. 당연히 선악과 먹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렇게 내가 속으면 어떻게 돼요? 누군가가 죽어야죠. 그런데 여기에 ‘나를’ 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삼인칭 단수, ‘그것이 죽었다’ 그러거든요. ‘내가 죽었다’ 가 아니라.

죄가 기회를 갖고 계명으로 나를 속였어요. 왜? 누굴 죽이려고. 누구를? 메시아를 죽이려고요. 그래야 우리가 구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못 알아먹어야 그분이 죽어요. 알면? 한 사람이라도 알아먹으면 그 분을 못 죽여요. 하나님은. 

안 죽어도 아는 이가 있는데 피조물이 있는데 왜 하나님이 죽어?

그런데 이 분이 죽어 우리가 구원되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으면 안 돼요. 아니,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죄가 기회를 갖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는 바람에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그가 죽었다. 뭐가 되어? 율법이 되어. 

그게 11절이에요. 알을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보세요. 

성경을 이해를 못하고 성경을 번역을 하게 되면 자기가 이렇게 첨가를 하고 만들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죽였다, 라고 번역이 된 ‘아포크테이노’는 공공연히 살해당하다, 도살당하다, 제물로 죽다, 이런 말이에요. 

그런 분이 누구냐고요? 딱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가 율법이 되어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그 법이 죽었잖아. 그러면 너희들에게 죄가 해당되니?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십자가에서 완벽한 신의 계시, 그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이잖아요. 

인간은 불가능 하나님이 계시하셔야 인간은 그 하나님을 비로소 알 수 있어! 가 신의 죽음이니까. 

그 십자가는, 스타오로스는 반드시 서야 된다는 거. 

그래서 거기가 말씀의 완성의 자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 그러는 거예요. 

여기가 완성이야. 이게 다나토스야. 이게 종이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신의 죽음의 자리, 그 자리는 반드시 와야 하기 때문에 율법과 그로 말미암게 되는 죄가 먼저 있어야 되는 거란 말에요. 

그게 창세전 언약이었잖아요. 내 아들의 피로 너희를 살릴 거야. 피는 뭐? 물, 물은 뭐? 진리의 성령. 진리의 성령은 뭐요?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러니까, 피 그러니까 뭐 이렇게 선정적이고 신파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러니까 무서운 거야, 십자가가. 피가 철철 흐르고... 말에 관한 이야기란 말에요. 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이런 말이 있는 거예요. 

출 35장 2절 보세요.

출 35 : 2-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이걸 안식일에 일하면 다 죽여라,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실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사람들은 안식일 날, 토요일이에요. 그 사람들한테는. 안식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안식일 날 아무것도 안 해요. 엘리베이터도 안 눌러요. 기다려요. 나는 죽어도 된다는 거예요? 미국에서 진짜 겪었다니까요. 왜 안 누르고 있나 하고 봤더니 자기는 안식일이라 일하면 안 된대. 그럼 나는? 지금도 그래요. 유대인들이 그런다니까요. 이게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일 날 자장면도 안 사먹고 주일 날 영화도 안 보러 가고 이런 사람들 많죠? 재건파나 이런 데선 아직도 그러잖아요. 예전 에는요 토요일 저녁에 왔다가 주일 날 하루 종일 교회에 있다가 월요일 날 집에 갔어요. 버스타면 안 된다고 그래갖고. 실지로 그랬다니까요. 지금도 그런 데 있을 걸요 아마? 일요일 날은 아무것도 안 해요. 심지어 저희 남가주 서머나 교회에서도 주일 날 청년들이 볼링 치러 간다고 광고했더니 어떻게 교회에서 주일 날 볼링 치러 가는데 목사가 말리지도 않느냐고 교인들 왕창 끌고 나간 사람도 있었어요. 이게 그런 말이에요? 주일 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럼 지금 이거는 뭐하는 거예요? 여기서 ‘일 하다’, 엿새 동안 일하다, 에서 그 일이라는 단어로 써진 히브리어가 ‘메라카’거든요.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가리키는 거예요. ‘말아크’에서 온 단어에요. 주의 사자,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말라키, 있죠? 구약의 말라기? 그게 그 단어에요. 하나님의 사자란 뜻이에요. 그 일 엿새 동안 해. 그런데 칠 일째 뭐가 와요? 죽음이 와요. 안식이 되면, 그 창세기의 일곱 째 날이 안식일이잖아요. 칠이 되면 죽음이 와요. 그런데 그 죽음은 무트, 완성이란 말에요. 엿새 동안 말씀을 듣고 배우고 전하면 칠 일 째에는 완성의 죽음이 온다, 라는 말이란 말에요. 이게. 그 무트. 다나투스의 그 죽음. 그게 죽임을 당할 것이야. 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모두 죽여라, 에서 그 모두 라는 단어, 여긴 번역도 안 되었지만 그건 단수에요. 누군가가 죽을 거라는 거예요. 안식일 날 와서 그 일을 하고 누군가가 와서 죽을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꼭 그 일을 하신,, 메시아가 할 일을 안식일에 하신 거예요. 왜? 죽으려고. 여기 이렇게 

그가 와서 칠일 째 일을 하고 죽을 거야. 무슨 일? 말씀 전하는 일 하고 죽을 거야. 그래야 너희들이 살아. 그래야 창조가 완성 돼. 그래서 칠이에요. 죽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살아요? 8에 살아요. 안식 후 첫 날 살아요. 엿 새 동안 열심히 하나님 말씀 전하고 칠 일 째에 그 말씀의 완성으로 죽는 이가 옴으로 해서 너희의 출애굽이 완성이 될 거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6(육)이라고 보자고요. 왜? 십자가에서 창조가 완성 되니까. 

‘다 이루었다’니까. 그죠? 그래서 일부러 예수님이 죽으신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엿 새 동안, 예수님이 와서 일을 하세요. 일을 하시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수제자까지 다 도망 가.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돼요. 

엿 새 동안. 그래야 엿 새 동안, 이 역사 내내 인간들의 무지와 한계가 폭로 되는 거예요? 엿 새 동안.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칠 일 째에 그분이 죽어야 된다니까. 안식일에. 진리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완성이 되는 거라. 이게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인생 내내, 아! 하나님 나는 Nothing, 하나님 전부! 를 알게 되고, 육 일 내내. 엿 새 내내. 

그리고 칠 일 째에 장렬하게 내가 삭제되고 하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인 ‘나’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 후 첫날 부활이 일어나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 내내 이 약속이 적혀 있다니까요. 창세기 1장부터.

안식일에 일하면 그냥 뭐... 그 안식일. 칠 이라는 게 뭐예요? 창세기에 칠이라는 숫자. 1 장에. 

그게 안식의 완성.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숫자잖아요. 칠. 칠 동안에 

십, 계명. 십을 갖고 열둘이 되는 게 성도의 구원의 서정이란 말에요. 그래서 칠, 십, 십이는 성경에 무지하게 많이 나오고 

이것의 배수들은 전부 완성.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칠칠 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이 계속해서 그 계명, 십을 갖고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아들, 십이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칠칠절의 시작에 뭐부터 해요? 밀부터 비벼 먹는 거예요. 뭐? 무교병. 

그거부터 먹고 이 절기가 무엇인지를 시작해서 그 안식, 칠칠절을 완성하고 이제 그분이 완전히 죽어 열둘이 부름을 받아 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안식일에 아버지가 일하니까 나도 일 해. 왜? 죽으려고. 계시하시려고. 자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마땅히, 그 완성의 칠 그날에는? 

내가 하던 일을 멈춰야죠. 우리의 율법적 행위 멈춰야죠. 왜? 하나님이 이루셨다는데 뭘 도와요? 거기에다가. 

그래서 안식일에 그 일하지 말라는 거예요. 신명기 5장 12절 보세요.

신 5 : 12 -

5 : 12.-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 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급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에 일하지 마, 그래요. 그래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애급 이야기를 꺼내요. 애급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애급의 일을 하고 그래?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 완성했잖아. 왜 네가 그 창조에 뭔가 기여하려고 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의 이야기로 또 바꿔요. 출 20장 10절 보세요.

출 20 : 10-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 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내가 완성했는데, 창조는 내가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애급에서 있었을 때의 그 애급적 일, 세상 적 관점의 육적 일. 율법의 일. 그걸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예요. 

그럼 너 안 죽은 거잖아. 너는 엿 새 동안에 열심히 그렇게 하다가 다나투스, 무트의 죽음을 죽어야 돼. 

그래야 내 나라에 들어와서 네 할 일 안 할 거 아냐? 

그런데 지금 칠일에 네가 뭐를 한다는 건 너 안 죽은 거잖아? 안 죽은 자는 안 산자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면서? 

칠 일에 들어왔다면서 그런데 여러분이 여전히 이 말씀을, 계명을 법으로만 보고 거기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 어떻게 된다? 

여러분은 안 죽은 거예요. 그 과정은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알고 가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렇게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이 되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바로 변할 수 없는 진리라면 그걸 성취하기 위해 쓰인 죄와 계명이 그렇게 나쁜 거냐? 얘기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6절 보세요.

고전 2 : 6-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 관원이라는 말은 통치자 왕, 세상의 왕,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처럼 된 자들.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자들의 지혜. 율법이죠? 그거요. 선악구조 선악체계)

7.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놓고 감춘 건 만세전에 당신이 이미 작정해 놓은 거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먹냐고요. 우리가.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하나도 No body 에요. 한 사람 이라도 알았다면)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한 사람도 못 알아먹어야 그 하나님이 죽어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아 봤으면 그 사람 죽였겠니? 이 말이 아니라. 

베드로가 죽지 말라고 했더니 사단이 그랬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안 죽었어야가 아니라니까요. 

너희들이 못 알아먹어. 당연한 거야. 그래서 죽인 거야, 하나님이. 

하나라도 알아먹었으면? 못 안 박지 왜 박아? 못 안 받아도 알아먹는 놈이 있는데 왜 박아?

9.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못 알아먹어요. 생각조차 못한다고요.)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으로. 진리로)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영, 말, 진리)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에게 오기 전에는 몰라야 된다는 거예요.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 려 하심이라(뭐가? 진리의 영이 그걸 알게 하려고)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진리는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령이 오기 전에 모든 인간은 전부 못 알아먹는, 그리고 선악구조 속에서 율법으로 행하는 죄인임이 선언되고 폭로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거기서 부터가 시작이라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쓰이는 죄와 율법이 왜 나쁘냐? 이 얘기 하는 거예요. 7 장에서. 

그래서 8장에서 그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그 진리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래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거야, 라고 1절부터 이어지는 거예요.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언약,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게 

호 코스모스. 성전, 율법, 예수, 성경, 인생, 역사 이런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 자체를 갖고 선하다 악하다, 깨끗하다 더럽다,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왜 거기에 착념하느냐는 거예요. 그걸로 내가 할 말이 있잖아. 그 말을 들어야지. 왜 그걸 갖고 악하다, 선하다, 뭐하다, 뭐하다고 왜 그래? 왜?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12절이 본문 12절이 결론을 이렇게 맺는 겁니다. 12절 보세요.

7 : 12-

이로 보건데, 자, 내가 설명했지? 율법도 거룩하고, ‘하기오스’ 깨끗한, 순결한.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거야.

누구에게? 성도에게. 그러면 그것 자체가 선이라면 여러분이 죄와 관계가 있어요? 없어요? 없단 말에요. 

제발 그 정의의 사도의 자리에서 내려 와 주세요. 베트맨, 스파이더 맨 이런 거 너무 많이 봐갖고 전부 그냥 벹트맨 되려고 해요. 

그것을 깨달은 자들에게 있어서 죄가 삭제되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영광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안식과 자유와 용서를 허락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다나투스의 죽음을 죽어주신 거예요. 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라 그랬으니까. 죄가 뭔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런데 왜 교회가 계속 죄만 짓고 있느냐고요?

세상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과 양심이라는 것으로 스스로 자정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메시아라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율법주위라 그래요. 

그리고 그 패가, 자기들이 가진 패가 가장 좋은 패라고 의기양양하고 있어요. 다이아몬드, 퀸. 하나님은 그들을 데스페라도 라고 부릅니다. 무법자. 법을 모르는 자. 그게 뭔지 모르는 자. 그건 진짜 이김이 아니에요. 허벅지 찔러가며 세상이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 거 이게 성도의 삶이다, 

이게 이기는 거다. 천만에요. 그거 차라리 못하고 나는 예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가 이김이라니까요. 

우리의 이김은 뭐라 그랬어요? 믿음이다, 그러잖아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돼요. 그걸 믿으면 여러분이 진리를 가진 게 되는 거고 여러분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가진 그리스도인 역할을 하는 자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또 여러분이 그 다나투스의 죽음을 이 역사 속에서 또 죽는 겁니다. 계속 해서. 그렇게 무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진리의 씨를 심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역할을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머리와 연합되어 머리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머리와 연합되면 그게 또 머리라니까요.

고린도서에 보면 여자들을 항상 머리에 쓰라 그러죠? 수건을 쓰라 그래요. 그래서 캐톨릭에서는 요즘도 쓰죠? 그 수건이란 단어가 휘장이란 단어거든요. 예수님 죽으셨을 때 찢어진 휘장. 그걸 쓰라는 거예요. 휘장을 쓰라고. 그런데 바울이 뭐라 그러면서 그걸 쓰라 그래요? 너희들의 머리는 남자니까. 그러죠? 이거 남존여비를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너희들의 머리가 남자라는 건 하나님의 백성, 신부들. 여자들아 너희들은 머리 아니잖아. 너희들의 머리가 있잖아. 누구? 예수 그리스도라는 남편이 있잖아. 그거 그 남편이 진짜 내 머리고 나는 머리가 아니다, 라는 걸 증거하고 증언하기 위해 머리에 쓰는 거예요. 그런데 또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남자들아! 너희들은 머리에 쓰면 안 된다. 그래요.

보세요, 그러면 이 휘장이 언제 찢어졌어요? 언제 사라졌죠? 예수님 죽으셨을 때 찢어졌죠? 그리곤 지성소가 확 드러나 버렸다니까요. 

다섯 개, 다섯 개로. 아 이거 다섯 개가 이거였구나! 이렇게. 그래서 다윗이 다섯 개 갖고 가서 율법 죽이는 거예요. 골리앗. 찢어졌단 말에요. 왜? 다윗의 그 주머니, 물매라는 것 자체가 휘장이란 단어에요. 그게.

다섯 개의 휘장, 찢어진 거 그거 갖고 간 거라니까요. 진리로 완성된. 찢어졌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안 쓰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우리가 지금은 안 써도 된다는 건 뭐예요? 지금. 내가 머리라는 거예요.

구약의 율법에 대머리는 부정하다. 그럽니다. 그러죠? 왜 그러죠? 그러니까 대머리들은 큰일 날 뻔 했어요. 구약시대 때 태어났으면. 부정하다, 

그래요. 내 머리위에 누가 있다는 걸 너는 네 신체로 부정, 부인하는 거다. 라고 해서 부정하다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이 쓰신 사람 중에 엘리사, 바울 이런 사람들 다 대머리였습니다. 엘리사가 처음에 겉옷 (?),, 열심히 일하려고 했는데 그냥 애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그래갖고 곰 불러다가 찢어 죽였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야, 대머리, 네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잔데 무슨 네가 선지자냐?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의 신체적인 어떤 결함을 지적한 게 아니라. 야, 대머리. 넌 부정한 자잖아? 네가 그런데 무슨 하나님의 말을 예언해?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들을 쓰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자는 머리이기 때문에 대머리여도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지금, 휘장이 찢어졌다니까요. 수건이 찢어졌다니까요. 왜? 예수의 다나투스의 죽음으로. 그래서 뭐가 되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머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뭘 할 수 있어요? 전할 수 있잖아요. 이제. 그렇게 전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걸 몸으로, 온 몸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이 호락호락 하지 않은 거예요. 행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여러분이 꺼내 든 패가 정말 이것만은 확실하다? 아니에요. 그것부터 누리세요. 그리고 Let somebody love you.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게 좀 가만히 있으라니까요. 아니, 애들을 볼 때도 예쁘다고 내가 좀 뽀뽀하려고 하면 애가 들고 날쳐서 자기가 한다고 그러면은 열 받잖아요. 하나님이 사랑하게 좀 놔두라니까요. 뭐 그렇게 사랑하려고.

아까 그랬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가르쳐 줄게. 그러시고 뭐라 그래요? 계명을 네 안에 간직 해. 마음으로 간직 해. 진리를 네가 Keep 해!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거야. 그러잖아요. 제발 들고 뛰지 말라고요. 모세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는지 좀 보라!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 끌고 가려고 그러다가 버둥대면 끌고 가는 사람이 지쳐서 죽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감동 오는 대로 열심히들 하시되 그게 짐이다 싶으면 스탑 하시라고요. 봉사, 헌금, 선교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 주보에도 십일조 뭐 이렇게 나와 있는데, 십일조라는 말은 없어요. 십의 하나에요. 열 개의 계명이 하나로 이해되어 질 때 그걸 십일조라고 해요.

여러분에게 너희들 내가 열 개 줬으니까 하나는 꼭 내 걸로 나한테 바쳐라, 그렇게 해서 십일조로 준 게 아니라니까요. 열 개를 하나로 이해하면 여러분 자체가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다 이해하고 썼으리라 믿어요, 저는요. 그런 데에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돈 좀 아껴서 가족들하고 휴가도 좀 가고 즐겁게들 사세요. 너무 교회에 갖다가 이렇게 바치고 그러지 말고. 이사도 가야되는데 이거 참. 교회를 해산하겠다는 말인가? ㅎㅎ 필요할 때 있는 사람이 내면 돼요. 정작 그냥 개미들은 다 모아갖고 내는데 있는 사람들은 별로 안 움직이는 게 오늘날,,

그러니까 여러분, 그 안에서 좀 자유롭게 자유하시라니까요. 그 분을 누리시고 그걸 좀 자랑하세요. 아, 맛있다. 시원하다! 이렇게.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너무 묶이지 마세요. 너무 뭘 잘해보려고 하다보면 괜히 다른 사람한테 상처주고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자유하게, 그 말씀이 나를 자유하게 하면 그냥 선포하는 거예요. 온 몸으로. 그럼 됩니다. 오늘부터 좀 짧게 하려고요. 지난주에 어떤 분이 두 시간 차타고 와서 지난주에 설교를 두 시간을 했더구먼요. 두 시간 앉아 있다가 두 시간 차타고 집에 갔더니 허리가 삐끗 해갖고 병원에 입원하셨대요. 진짜로. 그래서 이번 주에 못 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구나. 반으로 줄여야지. 사실은 지난 주, 지지난 주는 제가 너무 중요한 거라 끊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한 거고. 하여튼 열심히 공부하시고 자유롭게, 더운데 살아계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저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자격 있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예쁜 짓을 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의 선은 흠집이 나고 하나님의 작품은 부수어 집니다. 그럼ㅇ도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역사를 통과시키시며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진짜 찬송이 우리 안에서 터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