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74. 짝

Hebrew 2023. 6. 1. 19:11

본문 롬 7 : 1 - 7

 

 1.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ㅊ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우리가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는 이 로마서 7장의 앞부분, 아니 로마서 7장 전체는 로마서를 이해하는 분수령 같은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논란도 많은 부분이기도 하죠. 로이드 존스도 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완전히 다른 길로 빠져 버리고 또 제임스 보이스나 칼 바르트 요 세 사람의 로마서 강의가 신학생들의 로마서 교과서 같은 거죠? 그 중에서도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아, 뭐 어마어마하게 팔린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8장은 다 걷어다가 불태워 버리자,불살라 버리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삐걱거리고 있어요.

 

그게 다 로마서 7장을 잘 못 이해한 그런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 7장은 바울이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기록한 거고 8장은 구원 받은 이후를 설명한 거다, 라는 그런 아주 가난한 해석을 로이드 존스가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후의 신학자들이 전부 그걸 따르고 있단 말에요. 대부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일관성이 없어지는 거예요. 

7장도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를 묘사한 거예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까지 일관성 있게 인간들이 자기들의 의로 내어 놓는 율법과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를 집요하게 대조하여 가르칩니다.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느니데’ 그러나 이제는, 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가 6장까지의 논제예요. ‘느니데’.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의를 준비하실 수밖에 없었다. 로마서 3장 21절 보세요.

 

 

 

롬 3 : 21-

 

21.(그러나 이제는, 개역성경에는 이 ‘그러나’ 라는 중요한 전치사가 빠져있어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진짜 내용이 이거다, 라는 거예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그러니까 차별이 없다, 라는 거예요. 왜? 너희들이 갖고 있는 의로는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잘 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의 구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니까요.그러나 이 의는 차별이 없어요. 왜? 선물이거든요. 거저 주는 거거든요. 

그것이 인간 측에서 준비한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에 미칠 수 없다는 바울의 논제에요. 6장까지의 논제란 말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설명을 들은 로마교회 사람들이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렇게 강력하게 반복하여 설명하는 바울의 이 이야기를 들은 로마교회 사람들이?

 

아, 율법은 악한 거니까 지키지 말아야 되겠구나. 이리로 가겠죠? 그게 뭐예요? 그게 죄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율법을 법으로 받아서 지켜야 하는 계명의 수준에서 잘 지키면 그걸 죄라 그랬어요. 바울이 지금까지. 

아담의 생래적 두 마음, 그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 그 선과악의 두 마음으로 율법을 판단하여 자기들의 마음으로 판단하여 

인간들이 선한 것이라고 합의한 그 한쪽 것을 열심히 해나가는 것을 죄라 그랬잖아요. 

그 진의를 모르고 그 껍데기를 보고 그걸 열심히 행하는 거를 죄라 그랬잖아요?           

똑같아요. 그것이 죄라는 말을 듣고 에이, 그러면 안 하면 되겠네. 하고 안 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죄란 말에요. 

그러면 이건 아무 가치도 없는 거야?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죄라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하여튼 어떻게 하든 그 선악 판단의 주체는 인간이잖아요? 이거 하라는 거였어? 그래서 했는데 아니래, 그럼 이거 하라는 거야? 역시 선악판단의 주체가 인간이라니까요. 고걸 죄라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던 안 하던 그런 거에 관심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워하는 거지. 그것을 행하는 가, 행하지 않는가. 에는 아무 관심이 없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자들이 애 낳고 정결 예식 행하지 않는 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안 하면 부정하다, 그랬다니까요. 

아니 힘들어서 애 낳아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낳았는데 부정한 사람까지 되어야 돼요? 

그래서 갑자기 바울이 율법이 죄냐? 이렇게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 거예요. 율법이 죄야? 

자기는 그 율법으로 자기 안의 운명적으로 심겨져 있는 그 탐심의 에피뚜미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된 거라는 거예요. 자기처럼. 

자기는 그 율법과 그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어요. 그 말은?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말이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표피적이며 문자적인 성경 해석으로 그리고 그 해석에서 나온 행함으로 자기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내어 놓았는데 그걸 죄라 그런단 말에요. 성경이. 그래서 아, 그게 상 받을 근거가 되는 것들이 아니라 배설물이었구나! 하고 알아먹었단 말에요. 사도 바울이. 

그 배설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똥이라는 단어에요. 극단적인 단어를 쓴다니까요. 똥이야 그건. 그렇게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왜 나쁘냐는 거예요. 내가 그걸 알아먹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도가 그거였는데 내가 그 의도에 맞게 그게 뭔지를 알았는데 그게 죄냐?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사실 그게 없었으면 바울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방법도 없어요.

 바울이 행한 그게 아닌 거, 그 율법의 행함이 아닌 거가 뭐예요? 은혜잖아요. 그게 십자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 어떻게 십자가를 이 땅에 꽂아 놓고 그걸 뭐로 설명하느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 아닌 거.

 자, 이 죄만 가득한 땅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네가 한 거 그거 아닌 거. 네가 되고 싶어 하는 그거 아닌 거. 이거잖아요?

 

거기에 사용된 죄라는 게 정말 나쁘기만 한 거냐는 말이에요. 그게 바울의 논제에요.

 

죄는 나쁜 거예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에게 들려서 우리의 선을 이루는데 쓰이면 그건 나쁜 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 머물면 이걸로 사망이에요. 이걸로 멸망이라니까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러한 순서와 차서와 과정을 거쳐서 의를 설명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남편과 아내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게 로마서 7장 앞부분이란 말에요.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본문. 다시 한 번 본문을 잘 보시면 1절에서 바울이 로마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걸 볼 수 있죠? 

그 1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이렇게 돼요. 율법을 안다고 하는 자들, 율법을 안다고 하는 그 무지한 형제들아. 이에요. 

율법을 안다고 하는 무지한 형제들아. 율법을 아는 게 모르는 거다, 라고 이야기해요. 

무지야. 깨달음이 없음, 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율법을 아는 게 그 진의인 진리를 모르는 것이니까 율법을 알면 알수록 무지한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율법을 아는 무식한 형제들아. 

 

형제라는 단어는 친구라는 단어로 완성이 되어야 된다. 그랬습니다. 그렇죠? 

히브리사람들은 그 형제라는 개념을 어떤 어려움에 봉착한 상대방을 자기 것을 털어서 구원해내는 관계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건져 낼 자예요. 헤수스. 그걸 형제라 그래요

산상수훈에서 그러잖아요? 그 형제 미워하면 안 돼! 그러죠? 

형제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건져 내세요? 죽음으로 건져내세요.

 

 

 

그렇게 죽어서, 아니 그 대신에 죽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내어 

그와 내가 하나가 되면 그걸 벗이라 그래요. 친구라 그래요. 

 

우리가, 제자가 아들로 완성이 되어야 되는 개념이잖아요. 

열둘이 아들이라는 숫자니까. 그죠?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나온 숫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전부 열둘, 열둘, 열둘이 새겨져 있는 거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자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안에는 유다도 끼어있었다니까요.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나 그 떡 주러 온 거 아냐. 그랬더니 도망가서 다시는 따르지 않았죠? 그 제자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 훈련이 웬 말입니까? 한국교회는 자꾸 제자를 만들어 내려고 그래요. 

아들을 만들어야 된단 말에요. 진리를 설명해서. 

자꾸 훈련시켜서 교회가 써 먹기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들, 마찬가지에요. 이건, 형제는 친구로 완성이 되어야 돼요.

 이 친구는 도무지 감추는 거 없이 완벽하게 다 드러내어 공유하는 상태. 이게 친구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수시로 그래요. 내가 내 친구 아브라함에게 숨길 게 뭐가 있냐? 이렇게 다 드러내는 거. 서로.

 네가 나를 알고 내가 너를 알아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너 가 되는 상태를 벗, 친구라 그래요. 

 

그래서 데오빌로’, ‘데오’가 뭐예요? 하나님, ‘필로스’, 친구! 하나님의 친구

데오빌로 각하에게, 라고 시작되는 누가복음, 사도행전. 이건 같은 책이에요. 그런데 둘로 나누어 놓은 거예요. 한 책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 예수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설명하고 

뒤에서는 그 성령을 받아, 오순절 날 받아 그 분이 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또 다른 나, 세 번째 성전인 나를 설명하는 거예요.

 아주 가감 없이 다 밝힐게, 그래서 데오빌로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친구란 말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형제라고 불러요. 그것도 이 무식한 형제들아, 라고.

율법을 아는 무식한 형제들아, 하고 이야기 한단 말에요. 

그러면 그건 뭐예요?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여러분, 

십자가! 그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걸 제가 지난 시간에도 설명해드렸지만 너무 신파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그냥 죽어 주셨단 말야? 이런 식으로 그렇게. 

그게 뭔지를 아셔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너무 신파적으로만 보니까 그 죽음을 죽은 예수에게만 시선이 가 있는 거예요. 거기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고 있어요. 

신의 죽음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그 존재는 피조물에게 계시될 수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신이에요. 신! 

피조물에게 포착이 되는 건 신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그 신이 피조물에게 당신을 낱낱이 공개하기로 작정하세요. 

어떻게 공개하세요? 말씀으로 공개하세요. 이걸 Revelations 계시라고 그래요.

 

 

 

하늘이 도저히 그 하늘을 담을 수 없는 땅에게 하늘을 계시하는 거예요. 알려 줄게!

 

물론 피조물이 말씀으로 온 그 하늘을 하나도 못 알아먹어요. 피조물의 한계에요. 그것이.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당신의 영, 즉 진리의 말씀을 넣어서 하늘과 하나님을 그들의 심비에 새겨 버리세요. 물론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내 안에 들어있는 그게 그 하나님은 아니란 말에요. 그걸 어떻게 담아요, 우리가? 그 수준에 맞춰서 계시를 해준다니까요. 

그리고는 그렇게 계시된 당신, 그걸 진리로 주고는 그를 그 진리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그걸 아버지라고 불러 버려요.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이렇게. 그가, 그것이 너희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의 ‘나’라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신을 알아 버린, 포착한, 내 수준에서의 신이지만 

그 신을 포착한 이들에게 있어서도 그 신이 더 이상 신이에요?

 벗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 개념이. 그게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이 절대 타자로서 감추어진 그 상태의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피조물의 수준으로 엘로힘으로 이렇게 나타내, 계시해준 거예요. 그러면 그 자에게 있어서는 이 신은 친구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바로 이 자에게 있어서, 이 친구에게 있어서의 신이 죽고 친구로 연합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걸 십자가가 그리는 거란 말입니다. 

단순히 날 위해 하나님이 내려와서 죽었대! 이렇게만 이해하면 안 돼요. 

그게 내 밖에 있는 예수잖아요. 내 밖에 있는 십자가라니까요. 그거는.

 

그러니까 그게 뭐? 어떻게 날 구원하느냐고요? 그게 무슨 메시아에요?

 

 그리스도, 메시아 같은 말이에요. 

그건 영이라며? 그런데 그 밖에 있는 그 사건이 어떻게 영이냐고요? 그게. 

그게 내 안에 들어와 마음으로 새겨져야 그게 메시아를 만나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너에 대해서 다 알고 너도 나에 대해서 다 아는 그런 사이.

 그 친구사이는 신의 죽음, 신이 그렇게 계시하는 신의 죽음. 자발적 죽음 그것으로만 기인할 수 있잖아. 

아니면 어떻게 네가 날 알아? 이게 십자가란 말에요. 

 

그래서 그 십자가가 서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신을 알게 해주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뭐가 어려워요? 이렇게까지 설명해주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자꾸 추측하고 상상해서 자기수준의 신을 우상처럼 만들고 그걸 섬겨버려요. 

보세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의 신이 전부 인간이 섬겨야 하는 신이에요. 

갖다 바쳐야 되고 고행해야 되고 열심히 빌어야 되고 하는 그 신이죠?모든 종교의 신이. 

기독교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거라니까. 그걸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 그래요. 말씀을 흘리는 게 섬김이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그 우상이 되셔서, 율법이 되셔서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 율법,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신, 가짜 신, 그 율법이 되어서 죽을게. 내가 죽을게. 계시해 줄게. 

그렇게라도 하면 너희들이 신의 죽음으로만 탄생이 될 수 있는 그 벗으로서의 아들, 이게 성도의 실체죠? 그 벗으로써의 아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것이 되어서 죽을게, 율법이 되어서 죽을게. 

그러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신이, 자기를 계시하여 자기를 죽여 

신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벗으로 내려와야만 그게 신과 피조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너희들이 그 사건을 통하여 알아먹을 수 있을까? 가 십자가란 말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란 다른 게 아니에요. 그러한 진리의 현실을 가르쳐 주기위한 시청각 교재란 말이에요. 

구원은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그 십자가와 예수를 또 섬겨 버리네?

 

 그걸로 하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너희들과 하나가 되었는지를 알라고 줬더니 그걸 여기에다가 떡하니 걸어놓고 거기에다가 빌고 앉아 있어요.

 자기의 소원을 또. 아닙니다. 

그렇게 까지 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아가페를 설명하고 계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는 거예요. 

여호와, 내 말을 네 말로 쓰자. 그렇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그 하나님을 알아먹자는 거예요.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구약 때에도 그거 알면 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와 관계있는 자라니까요. 그러면 그걸 만난 자가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가 담고 있는 내용이니까. 진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니까.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 라고 목 놓아 외친 거예요. 

그 예수가 그리스도인데 왜 죽였어? 가 아니라 

그 예수는 그렇게 죽었어야 돼. 왜? 그는 그리스도니까. 그렇게 와야 우리가 사니까.

 

그게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요. 사도들이 이야기 한. 그 예수는 그리스도라니까요. 누가 아니래요?

 십자가 이전의 예수도 그리스도라니까.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그럼 내가 이렇게 여쭤 볼게요.

 

 

 

옛 성전, 그건 메시아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만약에 그 옛 성전이 뭐예요? 호 코스모스가 뭐예요? 성경이 뭡니까? 

예수를 설명한 거라면서요? 율법과 선지자는 나에 대해서 기록한 거야.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호 코스모스, 성전으로 그리스도라는 그 진리를 알아먹었어요. 

아, 희생제사는 이런 거고, 법궤는 그런 거고, 아, 물두멍은 그런 거였어? 그리고 휘장은 그런 거고 이게 둘로 찢어진 건 그런 거고? 

아! 이렇게 그 진리, 그리스도를 그 옛 성전으로 알아먹었으면 그게 메시아라니까요. 

그런데 못 알아먹게 되어 있단 말에요. 그러면? 

그 구약, 율법과 선지자들도 못 알아먹은 그게 나를 설명한 거다, 이 예수를 설명한 거다, 라고 하면 알아먹어야 돼요? 못 알아먹어야 돼요? 

못 알아먹어야 돼요. 십자가 이전에는

 왜? 인간들은 못 알아먹어야, 그래야 거기서 한계가 폭로되고 예수가 죽어, 그러니까 신이 내려와 계시를 해야 너희와 하나가 될 수 있잖아, 라고 

죽어야, 그 계시가 그리스도로 내 안에 들어와 진리가 될 거 아니에요? 순전한 하나님의 열심만으로. 

그래서 그 십자가 이전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열할을 못하는 거예요. 왜? 했어요. 율법을 진리로 설명했어요. 산상수훈에서 이게 다 이거였어. 

이런 이야기였어, 라고 해줬는데도 아무도 못 알아들었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역할을 못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데. 메시아인데. 

그러니까 이분이 죽고 이렇게 해서 신은 너희들에게 계시되어 

네가 나고 내가 너가 되는, 친구가 되는 거야, 벗이 되는 거야. 알려 주신 다음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로 진리로 줬단 말에요. 

그러면 십자가는 이걸 알아먹게 하는 하나의 시청각 교재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여기에다 걸어 놓아야 돼요? 그걸 목에다가 걸고 다녀야 돼요? 그거 조금 힘줬다가 잘 못되면 나찌, 아니면 불교의 만자 됩니다. 

조심해서 걸로 다니세요. 그게 원래 태양신을 섬기던 자들의 표식이라 그랬잖아요.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드라큐라 나타났을 때 이렇게 해보세요, 손가락을 확 꺾어버릴걸? 그게 뭔지 걔는 알아요. 귀신들이 알잖아요. 왜 벌써 왔느냐고. 

차라리 이렇게 하던가. 기둥이니까. 스타오로스. 언약. 

그럼 좀 똑똑한 놈은 알아먹을 거 아네요? 아니, 저놈이 언약을 아네? 히스테미!

 

 

 

그 예수가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거예요. 그걸 마음으로 갖고 있으라니까. 그런 것이 친구의 단계인데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그래요. 그리고는 설명해 주는 거예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로 내가 또 한 번 설명해줄게. 

이미 구약에서도 그렇게 설명이 되었고 예수님도 설명해 준 건데 

너희들은 여전히 무식한 형제니까 내가 다시 한 번 얘기해 줄게. 

 

그리고 그렇게 구약과 또 복음서에 나오는, 많이 등장했던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또 한 번 설명해주는 거예요. 다시 한 번. 

그러니까 여러분 사 복음서를 정확히 알면 서신서는 안 봐도 돼요.

 이걸 제대로 못 이해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계속 왜 그걸 못 알아먹느냐고 책망한 게 서신 서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제대로 알아먹으면 이거는 몰라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서신 서에 목을 매고 여기서 행해진 명령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니까. 

이게 넷이란 말에요. 사 복음서 안에 다 들어있단 말에요.

 

 

 

자,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렇게 말을 이어요.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

 여기에서의 사람은 모든 보편적 아담들 중에 

구원받을 성도를 일컬음과 동시에 그렇게 율법 아래로 오신 첫 남편 예수를 지칭하기도 해요. 

그 첫 남편 예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율법이 그를 주관하게 놔뒀어요. 하나님이. 

그래서 그 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그분을 못 알아봐야 맞는 거예요. 율법의 주관을 받는다니까요. 

예수님이 이 땅의 율법 아래에 오셨어요. 

종의 형체를 가지고 왔다는 건 그 율법의 종으로 오셨다는 말이에요. 겸손하게 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안식일의 그 진의나 아니면 병 고침의 진의나 아니면 성도가 먹어야 하는 양식의 그 진의를 설명하기 위해 

안식일에 병도 고치고 안식일에 밀도 비벼 먹게 하고 그렇게 안식일을 어기는 일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이외의 모든 율법을 다 지켜가셨어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도 받으시고 정결예식도 행하시고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갔다니까요. 

심지어 동생들을 속이고 ‘나 안 올라가,’ 그래놓고 몰래 갔더라니 까요. 그리고는 십일조도 내라 그래요. 

자기가 십일조로 왔는데. 십일조, 이것도 내. 

그리고 그것도 내야지. 그 진의가 뭔지 알면 그것도 함께 내.

 겉옷? 속옷? 함께 내. 율법으로 오셨으니까요. 율법 아래 오셨으니까.

 

 

 

주님은 그렇게 율법 아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약속의 자손들의 대표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 이전에는 당연히 율법의 종처럼 사셔야 돼요. 그리고 그 율법에 의해 죽음을 당하셔야 돼요. 율법에 의해 죽음을 당하셔야 돼요. 

그건 하나님의 각본이었다니까요. 

율법은 반드시 하나님을 살해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살해한다는 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 선물을 모독한다는 거거든요.

 그거 인정 안 한다는 거예요. 왜 내가 하나님에게 그렇게 은혜를 받아야 돼? 선물을 받아야 돼? 

그러면 그 분의 그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고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을 살해하는 거예요. 이게. 

래서 율법은, 피조물은 반드시 신을 살해하게 되어 있어요. 

러한 아담들의 살해는 필연적인 거예요. 하나님 살해는.

 

 인간들의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깨닫는 건 불가능이니까. 

다 우리의 수준으로 그 신을 만들어서 섬기니까. 그래서 고작 소, 소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해하신 것이 당신의 자발적 죽음인 거예요

너희들은 이렇게 나를 못 알아먹고 나를 살해할 수밖에 없잖아. 이게 필연적인 너희들의 수준이야

그러면 내가 나를 너희들에게 계시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발적 죽음. 자기를 계시하시는 것밖에 없잖아요. 그게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는 그래서 율법인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 

하나님을 때려죽인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죽음으로 몰아내시는 것이기도 한 거예요. 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십자가가. 그런데 그걸 섬기라고 준 거냐고요.

 

 

 

고걸 예수님의 성육신이 조금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으로 오셨다고 그러죠? 하나님이 그리고는 죽임을 당하잖아요. 

그리고 어떻게 해요? 진리의 영으로, 내가 그로 가서 너희들에게 죄, 의, 심판에 대해서 가르칠게. 

내가 한 말을, 십자가 이전에 내가 한 말을 그걸 가지고 또 다른 보혜사, 그리스도죠? 

그가 가서 너희들을 가르치리라, 내가 한 말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죠? 

같은 말이라니까요. 그리스도예요. 메시아예요

그런데 못 알아먹고 알아먹고의 그 차이일 뿐이라고요. 

그걸 알아먹어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고 두 가지를 다 설명하는 게 십자가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합니까? 십자가가.

 

 

그렇게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남편으로서의 예수가

율법으로, 율법이 되어 율법의 공격을 받아 죽는 거죠? 

그런데 이분이 논개처럼 그 적장을 품에 안고 같이 죽어요. 그 남편이 죽을 때 그 법도 함께 죽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Free, 다른 남편에게 가도 Free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7장의 이야기에요. 

 

이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자가 된 거예요. 왜? 

그분의 희생으로.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의 자기 계시로. 

인간들에게 오해된 그 우상으로서의 하나님은 거기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세상의 그 첫 째, 그걸 뭐라 그랬어요? 세상 임금이라고 번역했죠? 그 세상 임금, 
그 세상의, 호 코스모스의, 그 율법을 다 품어 안고, 율법의 대표가 되어 세상의 첫 째, 세상 임금이 되어 죽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알았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세상 임금이 있어요? 없어요?율법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복음이라 그래요. 성경이. 세상 임금이 없어요.여러분에게는.

 

 가끔 나타나는 뿔 달린 그런 거? 삼년 전에 죽으신 작은 엄마 이런 거? 헛 거. 

그 예수가 세상 임금으로 죽지 않았으니까, 율법으로 죽지 않았으니까 

그 자들에게는 그 세상 임금이 죽은 거 같았으나 살아난 존재로 여전히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보이는 거예요. 헛것들이. 

죽었다니까요. 그게 여러분 마음에 확실하면 그게 왜 나타나느냐고요. 나타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거는 밥 몇 끼 잘 먹으면 돼요. 곰탕 한 두 그릇 먹고.

 

그 사망, 세상 임금의 사망 안에서 내가 함께 죽는 거예요. 

그런데 주인이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나를 막 때리면서 부려먹을 용도가 있잖아요. 

그런데 죽은 자를 어디를 때리며 어디에다 써 먹느냐고요. 이제 관계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관계가 없으니까.

 

자, 그렇게 그 내용이 무엇이지를 잘 이해하고 깨달아서 진리로 알게 되면 그게 바로 ‘아니스테미’, 부활. ‘아나부스타스’. 

이게 ‘아니스테미’에서 나온 단어거든요. 부활이에요 이게.

 

‘아나’, 위의 것으로 똑바로 서다.

 

호코스모스로 하나님이 이렇게 ‘티데미’, 차서와 순서로 설명해주는 것을 잘 깨달아 아, 이게 그거였어요? 

번 제단, 물두멍, 성수, 향단, 지성소, 법궤. 이게 그거였어요? 성경 말씀이 그거였어요? 라고

 딱 알게 되면 언약 위로 굳게 서는 거. 이걸 부활이라 그래요. 첫 번째 부활. 

그리고 이 육이 완전히 삭제되는 죽음을 맞게 되면 그때 여러분은 영원으로 들어가요. 

그러니까 첫 번째 부활, 진리로 그것이 되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되는 거예요. 꿈꾸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들 상식으로 그려내지 말라는 거. 사도 바울이 경계한 겁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 (? ) 초보야. 뭘 그리고 있니?

 

 

 

솔직히 여러분이 그리고 있는 천국이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것들이 다 구비가 된, 그리고 이런 눈물 고통도 없고. 뭐 이런 거. 내가 편한 곳이죠? 

아니요, 거기는 하나님이 찬송 받는 곳이에요.

 그걸 벗어나지 못하는 걸 진짜 숨겨진 기복신앙이라 그래요

. 여전히 나를 위해 신앙생활 하는 거.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 하면 안 되는 거고 

그 예수와 십자가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깨달아 나의 처음자리로 내려 가 구원 받는 거예요

그 예수가 날 위해 죽었대! 가 아니고. 그게 예수 믿는 거죠?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라니까요.

 아, 그분이 그렇게 진리를 설명하시고 내 안에 들어와서, 그러니까 너희는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야! 를 설명해 준 거. 

이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예수 믿으라고 안 그래요. 

항상, 주는 그리스도시오, 라고 설명해주잖아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라 그러지 예수 믿어라, 안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함부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거 써 갖고 다니면 오히려 여러분이 큰일을 내는 거예요. 그거요. 

다 설명해 줄 수 없으면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로오신 그 예수의 모양. 그것으로 내가 구원에 이르게 될 거다. 라는 걸. 

그 구원의 그 차서, 그 차서를 이제, 그게 ‘피스티스’라 그랬죠? 

그걸 내 믿음. ‘피스토스’로 갖게 될 때 우리가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 4절이 우리 구원의 방법을 ‘디아호소아소마 호크리스토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에서 해방이 되는 방법은

‘호소마 호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의 몸을 ‘디아’, by라는 말이거든요. 통하여, 말미암아 되는 거야. 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영이죠? 그래서 반드시 그릇이 필요해요. 영은 담을 그릇이 없으면 의미가 없어요. 

보이지도 않고 마져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거니까. 그래서 반드시 그릇이 필요해요.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영을 담은 그릇이 예수였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씀이야, 내가 하나님이야 라고 얘기 했잖아요. 

그 예수가 육을 삭제 당하고 진리로 살아나신 그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우리 안으로 진리의 영, 그 푸뉴마가 들어왔단 말에요. 불의 혀처럼. 말로, 혀, Tongue. 들어왔어요. 글로사로 들어왔단 말에요. 

그 사건 자체가 우리의 육을 부인하는 거죠.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건 우리의 육체로는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들의 그 육신의 기능으로는 절대 그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영으로 들어간다, 라는 거예요. 

너희들을 그릇 삼아.

 

 

 

그래서 새 부대, 질그릇, 토기장이의 그릇, 이게 다 같은 말이에요. 

주머니, 그릇, 부대 이게.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 

여기에다가 그냥 새것 담아 버리면 터져 버려요. 이거. 터져 버린다, 그릇 깨져 버린다. 이럴 때. 

그렇게 우리가 ‘호소마 크리스토스’ 의 그 그릇. 육체가 되어서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서 설명하실 수밖에 없다, 라는 건 

우리의 육이 거기서 삭제 당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뭐예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아, 성령이 내 안에 그렇게 들어오실 수밖에 없었던 건 

나는 아니다, 라는 선언이니까 내가 죽은 거예요. 내 육이 거기서. 

그 때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아, 풍이 올 거 같아.ㅎ 뒷골이 너무 당겨가지고. 이해하시는 거죠? ㅎ ㅎ

 

 

 

 

 

우리도 그러한 성령의 강림하심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거예요. 

그걸 인정하고 그 진리의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아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걸 알게 되면 세계관 가치관 행동양식이 당연히 변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윤리적 그런 성숙은 아니지만 그게 영지주의와 다른 거란 말입니다.

 우리 알았으니까 이제 막 살자! 천만의 말씀. 

그 그리스도가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내 안에 진리가 담겨 있잖아요. 

그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미 우리는 인정했고, 

하나님도 선언하셨고.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신 게 이미 난 죽은 거니까. 

그러니까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나,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

 ‘그렇게 되면 이게 뭘 하던 안 하던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겠어? 하고 율법에 대해 죽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호소마 호크리스토스‘가 

너희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는 유일한 방법이야, 라고 제시해 주는 거예요.

 

 

 

이걸 왜 굳이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라고 설명을 해야 되느냐고요. 여전히 성화 론에 묶여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행위를 내어놓아 성화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그걸 배우는 자들 그걸 성경이 적그리스도라 그래요. 적그리스도는 딴 데 있는 거 아니에요.

 

교회에 있어요. 기독교 안에 있어요. 그렇잖아요? 적그리스도가 왜 절에 가 있겠어요? 그리스도는 여기에 있어야지. 

그런데 Anti Christ 라니까요. 뭐? 비슷한 그리스도예요. 

창 들고 그냥 언젠가는 그리스도 죽여 버릴 거야, 라고 어디서 잠복해 있는 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아마겟돈 전쟁 때 보자! 이게 아니라 

 

Type anti type 이 뭐예요? 실체 모형이라니까요.

 

율법, 모형으로서의 율법에 묶여 버리면 그게 Anti Christ 예요. 

그게 Type anti Type이잖아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회들은 다 Anti Christ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담들은 그게 훨씬 좋아요. 그리고 그렇게 말해주면 훨씬 듣기 좋아한다니까요. 

인간의 자존심이 살거든요. 내 자존심이 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Anti Christ적 설교를 하면 흥분하죠. 선동도 돼요. 단결도 됩니다

. 오래가야 한 삼 주 가지만. 단결도 돼요. 하나 되자! 뛰자! 하자! 그런데 자기들도 알아요. 100%는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하는데 까지는 열심히 해보자, 100% 안 된다는 걸 본인들도 알고 성경도 얘기 했으니까. 

백 개 지키다가 하나 안 지키면 꽝이다, 그걸 누가 다 지켜요? 안 된다는 걸 본인들도 알아요.

 그런데 자존심 상, 그래도 해보는데 까지는 해보는 게 신아생황 아니야? 하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 어디에 해 보는데 까지 해 봐! 라고 했습니까? 그러면 고거 계산해서 고만큼씩 상 줄게. 어디서 그랬나요? 

하나님 같이 온전해라. 그랬다니까요. 

지난 주 수요일에 배웠잖아요. 그 단어가 그거예요. 똑같이 온전해라, 에요. 그걸 행위로 온전해라, 라는 말로 하셨겠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내 행위처럼 너희도 똑같이 해야 돼. 이 이야기를 하겠느냐고요. 그건 올무라니까요. 

인간들이 스스로 거는 올무라고요.  

그리고 그거의 종으로 살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그렇잖아요? 

신앙생활이 재밌어야 되는데 기뻐야 되는데 너무 수고하고 무거워. 

그래도 혹시 하나, 고진감래라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시겠지? 

아니면 조금 고급스러운 사람은 이렇게 해야 천국에서 상급이 크대. 이리로 가는 거죠. 그게 바보예요. 그게 맹종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뭐 신문 같은데 보면 말이죠. 어떤 무당이 팔선녀인지 무슨 선녀인지 전화로 뭐 시키니까 뭐 다 하는 거야. 무서워서.아니 세상에 

어디 나주 역에 가갖고 삼 개월 동안 노숙해 그랬더니 딸내미 데리고 거기서 노숙을 하더라니 까요. 이 인간들은. 무서워 가지고. 

아니, 기독교를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뭐 대부분 그래요. 그 하나님 심기 안 건드리려고 꾹 참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리가 안 됐으면 

그냥 율법이라도 최선 다해 지키세요. 아주 완벽하게. 제사도 열심히 지내고. 종교의식도 행하고. 

그런데 이것도 안 하고. 이것도 안 하고. 

아, 그 사람들도 그래요. 율법은 구약의 율법은 이미 다 하나님이 완성 하셨죠.

 그럼 자기들이 갇혀 있는 그건 뭐냐고? 

모양만 조금 다르지 그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 그러려면 제사를 지내라는 거예요 내 말은. 화끈하게. 그런데 왜 그것도 안 하느냐고요?

 

 

인간들은요 너무 쉬운 거를 주면 그걸 가치 없다 여겨버려요. 그리고 그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겨버려요. 

도대체 날 뭐로 보고 그런 가치 없는 걸 던져 주냐는 거예요. 

선악체계 속의 아담들은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자기들의 수준에 맞게 어려운 임무가 주어지면 희열을 느껴요. 다는 못하는데 어차피 자기들도 알아요. 다는 못하지만 나를 이렇게 여겨준단 말야? 하고 희열을 느껴요. 그래서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요 그렇게 사람들을 도에 좀 지나게 확 돌려버리면 사람 늘어나요. 그 때에 사람들이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공통점이에요, 그거는요.여기 오면 멍하니 뭐 할 일이 없어. 뭐 해야 돼? 그러니까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뭐 이런 걸로 알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시킬 일이 없네? ㅎㅎㅎ

 

 

 

율법과 은혜를 두고 하나를 선택하라 그러면 인간들은 반드시 율법을 택해요. 

100%. 은혜는 당연하고 마땅한 거라고 여겨서 가치 없다고 해요. 그래서 버립니다. 

사실은 그 은혜가 당연하고 마땅한, 가치 없어 보이지만 당연하고 마땅한 진리고 

율법이 인간들의 탐심이 만들어 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마땅하고 당연한 건 가치 없다, 라고 하는 속성이 있어요. 왜?

 거기에는 내 가치를 입증할 어떤 틈이 없거든요. 

그냥 되어지는 거야. 이거는. 거기에는 내가 드러날 수 있는 그런 틈이 없어요.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매끼 밥 찾아 먹는 거? 당연한 겁니까? 

비는 당연히 내려줘야 되는 건가요? 

공기는 늘 우리에게 그렇게 공급이 되어야 되는 겁니까?

 땅과 바다는 항상 거기에 그렇게 결계를 정하고 있어야 되나요? 

우리가 뭔데 이 자연과 만물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존재해줘야 돼요? 

지구는 항상 자전을 하면서 공전을 해야 되는 겁니까? 당연하게? 

이 우주는 어떤 법칙에 의해 항상 이렇게 일정하게 끌려가야 되나요? 

우리 때문에?

 

 

 

그런데 보세요. 당연하죠? 

그래서 이거 귀하게 여기는 사람 없어요. 아, 공기 참 감사하다. 물? 참 감사하다. 비, 참 감사하다. 

감사하긴 교회를 3분의 1은 빠져 비만 오면.

 안 그러죠? 그런데 보세요. 마땅하고 당연한 그거 없으면 죽어요. 

그러나 그 마땅하고 당연한 것 위에 세워지는 것들.

 몇 층 빌딩을 세우던지, 얼마나 좋은 옷을 입던지 얼마나 화려한 장신구를 달던지 이거는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같이 있게 여겨. 

우리에게 진짜 가치 있는 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이라는 생명인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나타나고 드러나는 자기들의 행위 그리고 나의 외모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평가를 받는 가에 관심을 둔다니까요. 진짜 가치는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 인데 

우리는 내가 드러나는 어떤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그거 없어도 된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 생명 그 진리가 네 안에 있느냐를 묻는데 

우리는 마땅한 거, 그건 마땅한 거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준다고 하니까 가치 없이 여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걸 자꾸 쌓고 있는 거예요. 어디서? 예배당에서. 기독교가. 

 

여러분 하늘에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한 동, 한 구 하나를 엄지손가락 안에 다 넣을 수 있어요. 비행기 위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거? 

이 안에 다 들어가요. 63빌딩도 들어가고 여의도 방속국도 들어가고 내려오면 그렇게 커 보이네요. 그게. 

저 빌딩 주인은 누굴까? 복도 많네. 난 여전히 월센데. 

그러니까 자꾸 진리 안에서 위에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 때 진짜 내 가치가 뭔지를 알게 되고 부러운 게 점점 줄어들게 되는 거예요. 뭘 부러워요?

 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네, 

그래서 진리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이야기 할 때만 너무 좋아 헤어지면 또 멍하니,,

 

 다 온 세상이 딴 얘기에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 건강하고 건전한 몸으로 문화를 구축해서 너도 나도 그런 행복한 사회, 국가를 만들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생명 없으면 헛것 입니다. 

호 코스모스가 불 탈 때, 모형이 불 탈 때 다 불타는 거예요

그 당연하고 마땅한 거, 그거 없으면 다 헛 거라니까. 생명이 있는데 그게 뭐냐고요? 

 

죽은 시체한테 아무리 좋은 옷 입혀 놔 봐요. 투탄 카메론 왕처럼 그 죽은 시체 미라에다가 아무리 무거운 금관 씌워 놓아 봐야 

그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요.

 

마찬 가지에요. 정작 우리를 살리는 마땅하고 당연한 은혜의 진리는 무가치 하게 여려 버리고 

인간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챙길 수 있는 율법의 행위를 움켜쥐는 거 아담들의 자연스런 성향이에요. 본성이라니까요. 그게.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통하여 자기들이 행복, 구원, 내 가치 향상 이게 인간들이 추구하는 구원이잖아요? 

거기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양식 삼아 살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거 아니라는 거 안다니까요. 그래서 요한사도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일서 4장 1절 보세요.

 

 

 

요일 4 : 1 -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 자,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진리를 흘려주어 사랑이 된 자들이에요. 그래서 너희들도 사랑하지? 야, 사랑하는 자들아! 무식한 형제들아, 가 아니에요)

 

- 영을 다 믿지 말고,(말, 복음이라고 전한다고 다 믿지 말고)

 

-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영, 말, 진리가 하나님께 속한 건지 시험 해봐).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선지자는 어디에 있어요? 절에 없어요. 교회에 있어요. 거짓 선지자가 세상, ‘호 코스모스’에 많이 나와 있는데)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아야 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

 

(거기서 시인하다. 이게 ‘호 몰로게오’ 거든요, 동의하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호 몰로게오’, 시인하는 영이)

 

 -하나님께 속한 거다.

 

(이걸 너무 섣불리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을 시인하는 것. 이걸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예수로 오신 것을 이라고 얘기해야 되는데, 그리스도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이라고 이야기 한단 말에요.그 말이 뭐예요? 

그 예수로 오신 그 그리스도가 이제 십자가를 통보하고 우리 육체로 들어와 나에게 진리를 설명하여 진리로 만들어 주는 이 복음 이거를 시인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어떻게 하겠어요? 그 역사적 예수에게만 묶여 있겠죠. 그 분을 계속 살려 내겠죠. 

왜? 잡아 죽이려고. 율법 지켜서. 

영단 번의 제사가 그에겐 없으니까. 계속 제사 지내야 돼, 희생제사. 율법 지켜야 된다니까요. 내 행위 내 놓아야 된다니까요.

그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육체로 와 있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내가 ‘호 소마’, ‘ 호 크리스토스’ 가 되어 그 법에 대해 죽었다는 걸 ‘호 몰로게오’,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자가 다 뭐라 그래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자, 모두가 공평한 사회 만들자. 열심히 선한 행위 하고 구제하여 성도다운 삶을 살자, 이게 나쁜 게 아닙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 이게 뭐라는 거예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3절 보세요.

 

 

 

요일 4 :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 여기서도 그리스도 예수예요. 개역성경이 그리스도를 빼 먹었죠? 그리스도 예수를 시인하는, ‘호 몰로게오’ 똑같아요. 그리스도 예수, 그 예수가 그리스도 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니니 이것이 곧 Anti Christ, 적그리스도의 영, 적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거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오리라 한 말을 들었지? 이미 와 있어. 초대교회 때도 얼마나 율법주의가 횡행했어요? 사도들 까지도 거기에서 못 벗어났잖아요.와 있어.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 그리스도가) 

세상, ‘호 코스모스’, 그 성전. 그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거 보다 크다는 거예요. 왜? 
이거는 너희들에게 설명을 못 해줬잖아. 아니 해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었잖아. 

이 분은 들어와서 너희들의 눈과 귀를 열어 버린다니까. 그래서 이긴 거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호 코스모스에 속하여 ,호 코스모스로 온 그 예수에 속해버리면, 그 세상에 속한 말을 하게 되고 ,세상은 저희 말을 들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안 들어요.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를 해 줘도 저거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야.  자기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뒤집어엎는단 말이야? 

아뇨, 뒤집어엎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있었다니까요.

 

 

 

제가 요즘 수메르어 아람어 라틴어 공부하면서 보면 그들이 있었는데 안 유명한 거예요. 대다수는 항상 엉터리 기독교로 갔고 안 유명한 그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니까요. 아니잖아. 그건 기독교 아니잖아. 그런데 아무도 안 들어. 알아먹는 말로 좀 주시지.또 얘기 해. 아무도 안 들어. 그런데 내려왔다고요. 이렇게. 지금까지.

 

 

 

-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진리의 말, 미혹의 영, 미혹의 말을 이로써 안다.

 

 이걸 영 분별이라고 해요. 영 분별은 뭐를 분별하는 거예요? 

그가 갖고 있는 말, 그가 갖고 있는 진리. 성경은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 가로, 

아 너는 미혹의 영. 너는 진리의 영. 진리의 말. 미혹의 말. Anti Christ 의 말. 이렇게 분별하라는 거예요. 

 

어떤 능력(?) 있는 권사님들이 갖고 있는 신비한 그런 것이 아니라 영 분별해서 야, 저거 영이 아주 더러운데? 다 사기꾼이에요. 

예? 믿지 마세요. 그거는. 영이 뭔지도 모르면서 영이 혼탁해. 영이 어두워. 이러고 있다니까요.

 

율법주의는 항상 둘로 나누고 분리하는 습성이 있어요. 

이렇게 자기들이 선과 악의 주체가 되어서 모든 것을 나누고 분리하여 판단을 해버리면 그게 곧 하나님과 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브라함처럼 세 번째, 셋 째 제물을 취하라 그랬더니 제물을 그냥 뚝 잘라버려. ‘바탈’. 

인간들의 생래적 본성이라 그랬죠? 이게?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내 선악 구조 안에서 갈라버리는 거예요. 어떤 게 선한 것인지. 그래놓고 이거 했으니까 잘했죠? 이게 가인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넘어가버리죠? 제물 뒤로. 

그래놓고 ‘카라트’의 분리가 생기죠? 이거를 성경이 이혼 증서에 써요. 이 단어를. 

그렇게 되면 너와 나와 이혼이야. 넘어가버린다고요.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걸 깨달아 아, 그거군요. 이렇게 나누면 안 되는 거군요? 

선악과 이렇게 먹어서 우리가 이렇게 선악의주체로 살면 안 되는 거군요. 깨달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네가 넘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죠. 하늘의 열, 계명, 열로, 하늘의 열로 땅의 열둘, 아들로 완성이 되면 

그러면 육십갑자가 열과 열둘로 섞여버리면 환갑이 되어 여기를 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환갑상은 제사상이라고 그랬잖아요. 

나는 죽었네요. 그래서 그 ‘다나코스’의 죽음이 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자가 되는 걸 환갑이라 그래요.

 열로 열둘, 아들로 완성된 거. 

그래서 제사장의 제사도 마찬가지죠. 제사장이 제사를 어디서 드렸겠어요? 

회중이 여기에 있으면 성소가 여기있고 여기서 드렸다니까요. 이렇게. 

제사장은 마땅히 이게 뭔지를 알아 이 성전이 이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예배를 하는 거예요. 지금요. 이게 맞는 거라니까요.

 

여기서 같이 여기를 보고 부르짖으면 안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구약의 옛 성전의 제사란 말입니다. 

 

넘어오는 거예요. 여러분도 넘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선포해주는 거예요. 흘려 주는 거예요. 이걸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 이렇게 자르면 안 되는 거로구나, 자른다는 게 뭐예요? 

내가 선악의 주체니까 내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뭐 하나님이냐는 거예요. 네가 준 걸 내가 받아야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아니, 너하고 나하고는 달라. 난 하나님이고 넌 피조물이잖아. 

그걸 뭐라 그래요?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이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그런 것들이 다 부자유친이나 군신유의나

 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를 했던 거였어요. 옛날에는. 

그런데 이거를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끌어다가 도덕과 윤리로 써먹는 거지. 

부부는 유별한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 그 신랑이 죽어 옆구리가 뚫려 그 아내가 되어 죽는 거예요

그래놓고 그 아내를 아내 안으로 자기가 들어가요. 이렇게 하나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안 자는 아, 하나님 그렇군요. 

저는 아니네요. 제가 무슨 하나님입니까?

 그리고 점점 죽는 거예요. 아들이 되어 가는 거예요. 여자에서.

 

 

 

하나님은? 

그래그래 맞아. 그게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거야. 하고 나에게로 내려오는 거예요. 

이 성전을 사이에 두고. 예수라는 성전에서 그리스도로 이렇게 하나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부로 오지만 

부부유별로 오지만 우리가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쪽으로 내려와 

아들로, 벗으로 연합되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여자는 점 점 점 점 나이가 들수록 남성화 되고

옛날에 꼼짝 못했던 와이프가 지금 아주 그냥 도끼눈을 뜨면서 막. 당연한 거예요. 앞으로 점 점 그렇게 된다니까요. 

여자는 아들이 되어 하나님에게 가는 거고 하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와 그래서 남자들이 이렇게 유약해 지는 거예요. 

눈치보고 아침에 눈만 마주쳐도 딴 데보고 밥 달라는 말은 하지도 못하지. 그냥. 그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사업할 때도 오십 넘으면 여자가 나가서 일하고 남자가 집에서 살림하는 게 나아요. 그렇게 된다니까요. 진짜로.

 

 

 

진리를 잘 알면요 세상에서 세상 적으로 이용해 먹으면 돈도 벌수 있어요. 그렇게 안 하는 것뿐이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거에.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해. 뭐 그거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그거는. 우리가 그렇게 아들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 진리를 담은 몸이 된 이들이 다른 남편을 맞는 사람이에요.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칼, 진리의 남편을 다시 받아 네케바, 그릇이 되어 하나가 되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람. 

거기에는 신의 죽음. 자기계시가 전제 된 거고. 이게 복음이에요. 뭐가 어려워요 이게요. 

 

내 밖의 예수와 나는 연합이 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역사 속에 세워둔 십자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걸 깨달아 아시란 말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해드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새로운 남편에게 가서 뭘 하라 그래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게 성경에 나오는 열매의 이야기예요.

 열매는 어떻게 맺힙니까? 여러분.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면 거기에 뭐가 생겨요? 씨방이 생기죠? 그게 열매가 되는 거예요. 씨를 담은 열매요.

 그러니까 열매가 많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사건이 있어야 되는 거고 

자 그 떨어진 꽃이 씨가 되어, 씨로 와서 제라, 약속의 후손이 되어 그 씨가 담긴 열매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우리가 또 한다니까요. 내가 또 꽃이 되어 떨어지고 그 씨를 심고, 진리를 심고 그 이들이 또 열매가 되어 열매를 맺는 자가 되는 거예요. 열매가 된다니까요. 그걸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벧전 1 :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자, 너희는, 성도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새 남편이에요.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영광을, 자기를, 자기의 것을 계시로 나타내신, 독사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디아’에요. 그 그리스도가 그거 가르쳐 줬잖아. 그게 성도야.) 

 

 -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1 : 22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그 진리를 너희들이 이제 받아 들였어, 그게 맞다, 라고 인정했어.)

 

-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이게 푸뉴마예요. 말이에요. 영,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했으니까 너희의 말이 영이 깨끗해 진거라는 거예요.            섞 인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Anti Christ 가 아니라는 거예요.)

 

- 거짓이 없이 (당연하죠. 이제 거짓말 안 해도 되죠. 거짓 증거 안 해도 되죠. 이게 그거였어! 라고 알았으니까. 뭘 하라 그래요?)

 

-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랑은 뭐? 산상수훈 배웠으니까 팍팍 나와야죠? 말을 이제 제대로 된 걸 전해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 이야기 하라는 거예요)

 

23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어질 씨는 뭐예요? 우리가 심으려고 하는 세상 것. 내 행위들. 이런 것들이죠. 그거, 그걸로 우리가 거듭나는 거 아니야. 

     그럼 뭐로?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거래요. 제라, 이 씨로 된 거, 썩지 아니할 씨가 뭐다? 밑에서 설명 해줘요.)

 

- 하나님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

 

(이게 썩지 않는 씨래요. 이 진리가 그리스도가 씨라는 거예요. 이게 심겨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뭐가 떨어져서? 예수라는 꽃이 떨어져서. 

그런데 그 꽃을 자꾸 아, 이거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거 그리고 그걸 갖다 놓고 여기에다 예배드리면 어떻게 돼요? 조화예요. 그게. 

꽃은 떨어졌는데 그걸 여기에다가 갖다 놓고 안 떨어졌어. 안 죽었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조화, 뭐예요? 우상. ‘에이도론’이라는 말이에요. 그것이.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자, 모든 육체는 풀이래요. 그 풀은 마른대요. 그리고 꽃은? 그 모든 것의 영광이 꽃에 있는데 

그 하나님이 풀들에게 보여준 영광, 하나님의 계시, 진리가 그 꽃에 있는데 그게 떨어진대요.)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그게 씨로 심는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풀, 꽃, 씨 이렇게 연결한단 말에요. 그 씨 가졌느냐는 거예요. 

그 씨 가지면 씨를 가진 존재를 뭐라 그래요? 아들, 남자. 씨가 있는 거. 씨가 없는 거는? 여자. 그렇게 아들이 되는 거란 말에요.여러분.

 아니 성경은 한 얘기 밖에 안 한다니까요. 한 가지 얘기 밖에. 그리고 이렇게 남자, 여자, 부부를 통하여 그거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게 복음이야. 그러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야. 

 

그 풀이라는 단어가요. 사실은 풀이라는 뜻도 있지만 안 뜰. 그리고 씨가 없음이란 뜻이에요. 

안 뜰에서 뭐해요? 성전 안 뜰에서? 번제 단 있잖아요. 희생제사 드리죠? 

정결예식, 물두멍. 손 닦는 거. 자기들의 힘으로. 희생제사 드리고. 율법이죠? 안 뜰. 씨 없음. 이게 풀이라니까요.

 풀, 율법, 행위. 풀은 어떻게 돼요? 말라요. 죽어요. 이건 죽는 거예요. 놔두면 죽어요.

 어떻게 해야 돼요? 꽃을 심으면 돼요. 어디에다가? 그 풀에다가 꽃을 붙여버려. 어떤 능력자가. 어차피 씨가 없기 때문에. 

씨를 심으려면 꽃을 먼저 심어야 된다니까요. 붙여야 된다니까요. 그 씨로. 그 꽃으로 온 분이 누구예요? 

씨가 없는 곳에. 꽃으로 온 게? 예수. 샤론의 꽃. 샤론이 광야. 물 없는 곳 이란 뜻이니까.  

물 없는 곳에 꽃이 붙어버렸네! 그러더니 십자가에서 떨어져버렸어. 

그러더니 진리희 항상 있는 말씀. 그리스도, 진리의 영으로 씨가 되어 심겨져요. 

그 씨를 담은 이들이 열매가 되고 그들이 또 그 씨를 심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해요. 그걸 복음이야. 이렇게 얘기한다니까요. 복음이야. 

 

이건 이사야서 40장 6절에서 8절 말씀을 그대로 갖다가 쓴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도 똑같은 얘기 하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설명 안 해줬으면 그 얘기가 뭔지 모른단 말에요. 

그 풀에 불과한 우리 거기에 예수라는 샤론의 꽃이 붙어서 그가 자기를 계시하고 떨어지므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말씀으로 계시하고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 씨가 심긴 거예요. 

그 씨가 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예수 믿는가? 안 믿는가? 이거는 여러분도 모르고 저도 몰라요. 뭐 어떻게 믿는 게 믿는 거예요? 

그리고 난 믿어요, 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내가 믿어줘야 되느냐고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난 예수 믿어요. 뭘 어떻게 믿는데요?

 

 

 

이 내용을  그 진리를 갖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예수라는 꽃은 반드시 떨어져야 돼요. 

그 씨가 내 속에 심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첫 남편의 죽음과 새 남편의 도래를 예수님께서도 이런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 보세요.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아들들이에요. 아들들이.)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자, 혼인 집에 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해야 되냐? 먹어야지 그 때는, 이런 말이거든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수요일에 공부한 세리 마태, 레위를 부르시고 예수님이 그 안에서 레위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 많은 

바리새인들이 거기에 있었어요. 그리고 왜 죄인들과 밥 먹어? 그랬단 말에요. 

당시에는 죄인들과 겸상을 하는 게 부정한 거였어요. 겸상도 아니에요. 상은 성전에서 떡 놓았던 그 상에서 우리 밥상이 나온 겁니다. 우리 인류가 상을 쓴 게 얼마 안 돼요. 다 바닥에 놓고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밥 먹는 게 부정한 거예요. 

누워서 먹었죠. 이렇게 반쯤 누워서. 그렇게 밥을 먹는 게 부정한 건데, 세리들과 밥을 먹고 있네

그 중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어요. 세례 요한이 왜 등장 하느냐 하면 율법과 선지자들의 때는 세례 요한의 때 까지다, 를 상징하는 거예요.

 

 

 

자, 율법이 물어옵니다.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과 당신 제자들은 왜 금식 안 합니까? 

금식은 뭐죠? 율법이며 장로들의 유전이에요. 

율법에는 속죄일 날 한 번, 대 속죄일에 한 번 금식하라 그랬는데 장로들의 유전으로 일주일에 두 번 해버렸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구제했다니까요. 그래놓고 잘 했죠? 이랬단 말에요. 그 얘기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금식 하는데 당신들은 왜 금식 안 하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죠. 신랑이 와 있다. 아들들에게 신랑이 와 있다. 

이 신랑을 만나면 그들이 진짜 아들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신부가 신랑을 네케바가 자칼을, 그리스도를 맞으면 그들이 아들이 되는 게 구원의 서정이란 말에요. 굳이 따지자면. 

자, 혼인집 아들들이 신랑이 와 있으면 신랑이 주는 걸 먹어야지 

내가 지금, 구약의 그 율법이 너희들이 지금 나 안 먹어요. 라고 금식하면서 그걸 너희들의 영의 양식이라고 착각하고 그걸 먹고 있잖아. 그죠? 

그거 아녜요? 야, 이렇게 금식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준대! 가 율법주의죠? 

그러면 그들이 그 금식을 뭐하고 있는 거예요? 영양식으로 먹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그러면서 우리는 금식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는 거죠? 주님이? 

내가 그게 뭔지 얘기 해 주러 왔잖아. 

내가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담고 있잖아. 그래서 신랑이 왔어. 첫 번째 남편이 왔다

그래서 얘기 해주는데 너희들이 금식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아니, 금식을 먹고 있으면 어떻게? 내가 주는 걸 먹어야지. 

그런데 안 먹어요. 아니, 못 먹습니다. 예수의 말은 못 알아들어야 맞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한 가지 방법을 내놓은 게 뭐예요? 

너희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와. 그래야 먹을 수 있어. 그러는 거예요. 

그 신랑을 빼앗기면 뭐가 와요? 그리스도가 오죠. 씨가 와. 진리가 와요. 

그러면 아, 이게 그렇게 금식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이제 더 이상 이거 안 먹겠죠? 

율법을 안 먹고 행위를 안 먹고, 이게 나의 영의 양식이 아니라는 걸 알면 그게 금식이야. 그러는 거예요. 

네가 신랑을 빼앗기면 그 씨가 올 거니까. 

그 때는 네가 금식할 거야. 지금은 금식 많이 먹어라. 제 말이 아니에요. 이사야서 58장 6절 보세요.

 

 

 

사 58 : 6-

 

6.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스스로 숨지 아니한다는 게 말을, 내가 가진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다 전해주어 

가난한 자를 먹이고 못 입은 자를 입히고 뭐로? 진리의 겉옷으로. 하늘의 양식으로 그리고 그들을 구제해 내는 게, 이게 금식 아니겠니? 

그 말은 그리스도라는 진리, 그 씨가 너희들한테 담기면 너희들에게서 당연히 발생 되는, 격발되는 사랑 아냐? 

그게. 그게 금식이야. 율법 안 먹는 거. 세상 거 안 먹는 거. 이거예요. 

주님이 이렇게 설명 안 해주셨으면 이 금식도 뭔지 모르는 거죠. 그죠? 

너희들이 이사야가 이야기 한 그 금식 하게 될 거야. 어떻게 되면? 예수라는 꽃이 떨어지면. 

그러니까 그 꽃은 떨어져야 된다니까요. 죽어야 돼요.

 

 

 

로마서 9장 29절 보세요.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저게 의야, 라고 쫓아간 이스라엘은 그 법이 이야기하는 그 바, 그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32.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돌은 한 돌입니다.

 그런데 그 돌로 말미암아, 그 계명에 적힌 그 돌로 말미암아, 계명,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게 그거예요. 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먹으면 

그게 진리의 생수를 뿜어내는 반석이 되지만 그냥 율법으로 붙들어버리면 거치는 돌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네 위에 떨어져 가루로 안 남기게 부수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돌은 하나에요. 나무도 하나고 진리도 하나예요. 그걸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 예요. 

두 마음으로 보면 죽음. 한 마음으로 보면? 그거예요?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짝을 지어서 설명을 하세요. 그 짝은 원래 하나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이에요

나쁘고 좋아, 이렇게 우리에게 판단하라고 짝 준 거 아니에요. 하나라니까요. 

그걸 하나로 보는 것이 모노게네스, 하나를 가진 자, 진리를 가진 자예요.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짝 지어 놓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라고 말씀 하신 거예요. 

그거 이혼하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무슨 뭐 하나님이 짝 지어줬어요? 자기들끼리 좋아서 짝 지었지. 그래놓고 꼭 하나님이 짝 지어줬대. 아니에요.

 자기가 좋은 사람하고 짝 짓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짝 지어서 뭔가를 이렇게 설명하려고 한 걸 자기들 맘대로 선, 악으로 구분하여 이건 하고, 이건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하면 

그거 하나님이 용서 안 한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짝 지어놓은 걸 네가 왜 분리 해? 왜 네가 둘로 분리 해? 왜 네가 선악으로 판단해버려? 그런 이야기란 말에요.

 

 

 

그리스도 안의 나, 이렇게 하나가 아닌 나와 예수로 존재하면 그게 죄예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요. 여러분이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니까요. 이게. 주신 자유를 누리는 거란 말이에요. 이것이요.

 

 

아담과 하와, 자칼과 네케바,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구약과 신약,땅과 하늘, 위엣 것 아래 것, 물과 뭍, 예수와 그리스도, 육체와 땅, 영, 첫 남편 두 번째 남편, 거짓과 진리, 밤과 낮, 빛과 어두움,다윗과 솔로몬, 성막 성전, 선 악,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다 짝이에요. 그 하나를 통하여 다른 하나로 완성을 해가시는 방법으로 그 둘을 통해 하나를 설명한단 말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창세기 1장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고 말씀 하신 거예요. 언약이 담겨 있는 거죠.

 

 

 

저녁, ‘에레브’, 저녁이 되고 ‘보케르’, 아침이 되라, 예요. 저녁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그걸 통하여 아침이 되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밖에 없었다니까요. 그 ‘에레브’가 어둠이에요. 어둠. 저녁.  그 어둠. ‘에레브’가 되고 그걸 깨달아 ‘보케르’가 되게 할게. 그럼 그게 뭐야? 욤’이야. 그걸 날이라고 번역했지만 그게 덮음이란 뜻이에요. 덮음. 

그게 엎음의 은혜라는 거야. 자, 밤. 

너희들에게는 선악과부터 내가 설명해줄 수밖에 없어. 먹었어? 밤이야. 

그게 뭔지 알면 그걸 빛이라 그래. 그럼 뭐야? 너희들이 잘 나서 내가 너희들을 내 벗으로 여겨주는 거 아니잖아.

 그걸 덮음의 은혜라고 해. 그게 ‘욤’이에요. 그럼 뭐라 그래요? 그게 연합이잖아요.

 

 

 

그래서 첫째 날, ‘욤 에하드 라고 명명하는 거예요. 

그 때에는 아라바이 숫자가 없었어요. 이거를 일 이 삼 사 오 육으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욤 에하드’, 그게 연합의 덮음이야. 

그게 맨 처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첫째 날 이렇게 번역 해놓은 거죠. 그게 연합의 덮음이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어두움을 밤, 빛을 낮이라 했다, 그러잖아요? 그리고 그 낮을 날이라 그래요. 그리고는 그러는 거야.

 저녁이 돼. 그리고 아침이 돼. 이게 욤 에하드. 연합의 덮음이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밤이 나빠요? 이 밤에서 그 빛, 낮을 알면 되는 거예요. 여기를 낮처럼 살라는 게 아니라니까요. 살수도 없지만.

 

 

두 번 째 창조가 뭡니까? 

휘장, 궁창을 가운데 두고 궁창 위에 물과 아랫물로 나누죠? 

그리고는 이게 두 번 째 욤, ‘욤 쉐니 그래요. 그건 짝이라는 말이에요. 우리 산상수훈에서 배웠잖아요. Duo 이게 짝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아랫물은 위엣 물을 설명하는 거예요. 아랫물을 갖고 위엣 물이 돼. 

자, 호 코스모스, 율법, 성경, 성전을 갖고 진리로 가. 그러면 그게 짝이야. 

성막과 새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이 다릅니다. 성막에는 법궤가 조각 목에다가 금을 씌운 거지만 성전에는 감람나무에다 금을 씌워요. 감람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해요. 항상. 짝이란 말에요. 이게요. 똑같지 않아요.

 자 그 성전으로, 그 아랫것으로 너희들이 위엣 것 알았어? 그게 욤쉐니. 그거 짝이야.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 거야

그래놓고 밤이 돼. 그리고 아침이 돼. 그게 욤쉐니야. 짝의 덮음이야. 

그런데 여기에 무슨 뭐 서수가 있고 기수가 있고 그런 거 없어요. 숫자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니까요, 의미로 준 거잖아요.

 

 

 

그러면 셋 째 날은 뭐예요? 이게 중요해요. 창세기 1장 11절 보세요.

 

창 1 : 11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풀은 뭐? 씨가 없는 거)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자, 씨 가진 나무들과 풀이 지금 대조 되고 있는 거죠? 그대로 됐어요. 땅이에요.)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 ( 열매 맺는 나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많은 열매, 그 열매 얘기 하는 거죠? 그 열매가 뭘 가지고 있어요? 씨를 갖고 있어요. 그게. 두 번째 남편이야기 하는 거예요. 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 째 날이니라

 

( 자, 풀, 너희들은 마른 풀이 되어야 돼. 아니, 마른 풀이야. 씨가 없어. 너희 안에는. 하늘의 것이 없어. 

내가 그래서 꽃을 달 거야. 샤론의 꽃으로 붙여버릴 거야. 

꽃이 떨어지면 너희들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될 거야. 이게 뭐예요? 진리잖아요. 그

래서 그걸 세 째날 이라고 했는데 세 째 날이 아니라 ‘욤쉐르시’, 세 째 층이야.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갔다. 세 째 하늘에 올라갔다 와서 뭐라 그러죠? 

첫 째 하늘은 보이는 성전. ‘호 우라노스’. 

둘 째 하늘은 내가 하나님 나라다 그러죠? 예수. 

세 째 하늘은? 진리.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이제 새 성전이 되잖아요. 세 째 하늘이잖아요. 

 

그 진리를 알았을 때, 바울이 내가 세 째 하늘에 갔다 왔어 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는 뭐라 그러죠?

 

사람의 말로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 그래요. 그래놓고 이게 참말, 이라고.

 ‘바레떼이아’, 진리야. 라고 그런다니까요. 그러면 이 세 째 날이 뭐예요? 이게? 이게 진리란 말에요.

 

 

 

그럼 보세요. 첫 째 날과 넷 째 날이 짝이고 둘 째 날과 다섯 째 날이 짝이죠? 셋 째 날과 여섯 째 날이 짝이죠? 그러면 요게 어떻게 완성이 되어야 돼요? 자칼이 네케바 안으로 들어가서 자칼이 그리스도가 되어 진리가 되어 씨로 들어가야죠?

 그래서 씨 가진 열매가 되어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안 되면? 그냥 풀이에요. 그거 먹으면 죽어요. 열매 못 맺으면. 그러면 여섯 째 날이 뭔지 보세요. 창세기 1장 27절

 

 

 

창 1 : 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 단수에요. 이게 사람이야. 하늘의 사람이야.) 

남자와 여자를 ( ‘이쉬’도 아니고 ‘잇사’도 아니고, 아담도 아니고 하와도 아니에요. 자칼, 네케바, 남편과 아내, 굳이 번역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랑과 신부)창조하시고  ( 그 둘이 하나가 되니까 사람이 됐어요.)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뭐예요? 진리로 네가 자칼을 네케바가 품으면 그게 사람. 아들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온 천지 만물이 그게 다 지리를 설명한다는 걸 알거야. 이게 다스리고 정복함이에요. 다 정복될 거야. 

너희들한테. 꽃이 떨어지는 것도 진리요. 피는 것도 진리요.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진리요. 죽는 것도 진리요. 모든 게 다 너희들에게 정복 될 거야. 이게 진리를 가진 씨를 가진 사람, 아들의 모습이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

이게 뭐예요? 네 양식이야, 에요. 씨 가진 거, 진리.)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새는 뭐예요? 옛 성전)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씨 없는 것. 그거 먹으라고. 어떻게 되라고요? 그리고? 죽으라고

열심히 식량 아닌 거 먹고 죽으라고. 밤 열두시에 라면 세 개 네 개, 계란 다섯 개 넣어서 끓여 먹고 밥 한 공기 넣어서 먹으면 아침에 일어나면 불쾌하죠? 포만감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왜 그랬지? 그러잖아요. 그거 보다 더 한 거예요. 

먹어, 풀 줄게, 씨 없는 거줄게. 땅의 짐승들아 그거 먹어. 그게 완성이야. 각자의 자리에서의 완성. 그러면 일곱 째 날이 돼요.

 

 

 

그러니까 창세기는 1장 1절, 아니 첫 글자, 첫 문자부터 다 이 진리인 복음만 이야기해요. 씨 얘기요. 많은 열매. 

너희는 그걸 먹어야 자칼, 네케바, 사람이야. 

그런데 왜 내가 이야기하는데 금식해? 그거 이야기해주는데 왜 안 먹느냐고? 엉뚱한 얘기나 하면서. 딴 금식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반드시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지고 계셔야 돼요. 행위와 마음. 둘 중에 하나를 가지셔야 돼요. 전자는 멸망이요. 후자가 생명입니다. 

 

생명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이 짝으로 설명하시기 위해 놓아둔 거, 절대 가르지 않아요. 거기에서 용서가, 죄를 악을, 다르게 보는 마음이 생겨 정죄와 판단과 심판을 안 하는 거예요. 그걸 용서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알면 되는 거예요. 그 진리, 아브라함이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예수 봤어. 그러는 거예요. 보긴 언제 봐요. 그 진리 보면 그 십자가 내 거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도 십자가로 구원받는 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았으니까. 나는 아니구나, 아는 거예요. 율법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용서 몇 번씩 해 줘야 돼요? 이렇게 물어보는 제자에게 칠십에 칠을 해. 그러는 거예요. 

일흔 번씩 일곱 번, 칠칠 사십 구, 사백 구십 번 해, 가 아니라 칠십에 칠이 뭐예요? 이레, 하루 이틀,,닷새 엿새 이레, 칠십 이레에 용서는 일어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칠십 이레가 뭐예요? 다니엘서 9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 역사 전체를 칠십 이레로 나누어 주세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69이레예요. 그리고 와서 반을 쓰고 가세요. 삼 년 반. 그럼 나머지가 삼 년 반이죠? 이게 우리의 인생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한 때 두 때, 삼년 반, 마흔 두 달, 처 이백 육십 일이 나오는 거예요. 이 역사를 그렇게 이야기 한다니까요. 

그 말은 육십 구일의 반을 삼년 반에다 넣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난 일이, 

십자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역사 내내 일어나는 거야. 그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삼년 반 동안 일어났던 일이 너희에게 일어날 일이야. 그게. 삼년 반이에요. 그 삼년 반. 이 칠십 이레. 일흔의 칠. 

이 기간 동안에 그 진리를 씨로 받으면, 그리스도로 받으면 용서가 되는 거야. 그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는 십자가 이후인 이 삼년 반의 때에만 구원이 있다고 착각을 해요.

 왜? 그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 나를 위해 발생한 거라는 이걸 지우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그 이전은 어떻게 구원 받아요? 여기에 이게 해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에게 감사하느라 여전히 율법에 묶인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감사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감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걸 털어드리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율법에 묶인 자들이 몇 번 용서해줄까요? 물어보는 거예요. 

율법에는 네 번인가 용서하라고 그러잖아요? 베드로가 일곱 번쯤 하면 돼요? 물어보는 거죠. 

일곱 번쯤 하면 돼요? 그럼 내가 칭찬 받겠죠? 이게 율법주의죠? 그러니 예수님이 거기에 대고 그러는 거예요.

 

 

 

용서는 칠십 이레 동안에 일어나. 그 진리만 알면. 

그런데 뭘 네가 용서를 하니?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네 그 용서야? 칠십 이레의 용서지.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그 용서지. 그러는 거예요. 

사백 구십 한 번째는 가서 죽여도 된다. 가 아니라.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기름이 그리스도잖아요. 메시야죠? 기름이? 

그것 부음을 받았다는 건 내 안에 그리스도를 가진 자. 

그게 모형이죠? 그는 예수의 모형이죠? 그리고 우리의 모형이에요. 

 

기름부음을 받고 다윗이 누구한테 가요? 골리앗에게 가는 거예요. 

아무도 못 죽여. 세상의 임금 사울도 못 죽요. 왜? 같은 편이라. 그게 사울이고 그게 골리앗이에요. 안 죽여요. 못 죽인다니까요. 

그런데 기름부음 받은 꼴 같지 않은 애가 하나 가는 거예요. 

사무엘이 하나님 말을 듣고 갔어요. 기름 부으러. 그런데 아버지가 걔는 안 불렀어요.

 

 보통 아버지가 그렇게 자식 편파적으로 취급 안 하거든요. 그런데 워낙 아니야. 얘는. 그러니까 안 불렀어요. 다른 애들, 

그런데 사무엘이 가는데 아니래, 다. 물어봐요. 다른 애는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하나 있긴 있는데 걔는 아니에요. 여기서 다시 골라 보세요.

 사무엘이 걔 데리고 오세요. 그 꼭 같지 않은 애가 기름 부음을 받아요. 나예요. 나, 질그릇이 진리를 품어 안아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부모도 기대하지 않는. 골리앗에게 가서 돌을 던지는 거예요. 

돌을 던져 그를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자, 기름 부음 받은 자, 열매 맺을 우리 얘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무얼 갖고 가요? 한 번 보세요. 사무엘상 17장 38절.

 

 

 

삼상 17 : 38- 39

 

38.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 세상 왕의 갑옷, 그건 하나님의 전신갑주 아니에요. 그건 행위에요. 율법의 옷이에요. 그거는. 그거 입으면 안 돼요. 

놋 투구, 놋이 뭐예요? 성전 마당을 만들던 기명. 그거 기명을 만들던 게 놋이죠? 섞인 거. 구리와 아연. 구리, 주석 섞으면 놋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 마당 율법을 섞인 것, 이렇게 모형을 해서 놋으로 만드는 거예요. 놋 투구 이게 지성소로 들어가면 금이 되죠? 

섞인 거에서 순수한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성전이란 말이죠. 그 놋 투구는 뭐예요? 구원의 투구 아니에요. 그거는. 벗어야죠?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자, 요 일이 고대로, 요 그림대로 일어난 거 맞아요. 그런데 문자는 그렇게 안 쓰여 있어요.

 다른 문자들을 여기에다 써서 성경이 우리에게 뭐를 가르쳐 주려고 해요. 

기름부음을 받은 바로 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 씨가 이제 율법에게 가는데 아무도 못 이겨. 아무도 못 이겨. 세상 왕도 못 이겨. 가는데 

뭘 가져가요? 막대기에요.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 야곱의 지팡이, 시편 23편의 지팡이와 막대기.

 왜 성경에 지팡이가 그렇게 많이 나와요? 그걸 파자하면 하나님이 아랫것으로 가르치는 위엣 것이란 뜻이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고 나를 지킨다는 건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예를 들어볼게요. 모세, 아론의 지팡이가 애급 안에서 뱀이 되죠? 

그런데 애급 술사들의 지팡이가 역시 뱀이 되는데 모세, 아론의 지팡이가 그 뱀을 잡아먹어 버려요. 

뱀이 말을 하러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에게 못 알아듣는 말로. 우리를 놋 뱀, 불 뱀이 되셔서 덥석 물러 온 게, 

율법이 되어 우리를 물러 온 게 예수가 그랬잖아요. 그래서 내가 뱀이 되어 장대에 달려야 돼. 그랬잖아요?

 

 

 

그 진짜 하늘의, 하늘이 보내신 그 이 땅의 뱀을 먹으라고 보낸 그 뱀, 그 지팡이 그것의 진의가 지팡이에요. 

그게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우리를 인도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출애굽 시작에 그 뱀이 다른 뱀을 먹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준 지팡이가. 

그 지팡이가 우리를 안위하는 거예요.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거란 말에요. 

그 막대기를 그가 가지고 있어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리고 시내에 가서, 그래요. 자, 이 시내라는 게 그냥 그 시내 맞아요. 물, 그러니까 돌이 있는 물. 

그런데 그 시내라는 단어가 유산, 분깃, 몫이라는 단어에서 온 시내라는 단어를 써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산, 분깃, 몫, 생명으로 주실 그 어떤 게 담겨있는 물, 강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단어를 굳이 쓴다니까요. 그리고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가져와요. 매끄러운, 이게 제비뽑기 위한 돌이라는 뜻인데 매끄럽다는 의미는 사실 없어요. 

제비뽑는 건 뭐예요? 

투표는 뭐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투표는? 사람의 뜻을 모아 이게 사람이 합의한 거예요. 가 투표죠? 사람이 뽑은 걸 투표라 그래요.

 

 제비는? 하나님이 결정한 걸 사람이 확인하는 거죠? 

자, 하나님이 결정한 어떤 것을 하러 얘가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분깃으로 줄 어떤 것이 담겨있는 그 물, 강으로 가서 돌을 끄집어내는데 다섯 개. 여러분, 

그 밑에서 다윗이 이 돌을 던지다, 던졌다, 라고 그러죠? 그 단어 카라가 새기다, 라는 뜻도 같이 있어요. 한 번 보세요. 

 

어떤 것이 새겨져서 던져짐으로 도저히 깨질 수 없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깨질 수 없는 어떤 것이 심판을 받은 사건이 뭐예요?

 십계명 사건이에요.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왜 다섯인가? 물매라고 번역이 된 단어 있죠? ‘캐라’거든요. 그게 던지다, 새기다. 요

‘카라’에서 온 단어인데 그 단어 ‘캐라’가 휘장이란 말이에요.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 그 단어에요. 그게. 휘장.

 휘장이 몇 폭으로 되어있는지 아십니까? 열 개로 되어있어요. 열 폭, 그래서 거기에서 열 폭 병풍이 나온 거예요. 

병풍은 반드시 열 폭이어야 진짜예요. 두 폭 세 폭은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원래 병풍은 어떤 것을 가리고 막기 위해 그래서 죽음이 항상 병풍 뒤로 들어가는 거예요. 가리고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열 폭의 어떤 것. 

이게 뭐예요?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거예요. 

자 그 휘장이 열 개, 계명이죠? 그죠? 계명은 진리인 지성소를 막고 있는 어떤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휘장이 뭐라 그래요? 히브리서에서는? 예수의 몸. 그건 막고 있었던 거라니까요. 

그게 찢어졌다! 어떻게 찢어졌을까요? 잘 찢었겠죠. 

반 씩. 다섯 개, 다섯 개. 뭐예요?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을 앞의 다섯 개만 주시고 뒤의 것은 제목만 주세요. 

 

다섯 개는 뭐예요?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 망령되게 일컫지 마, 내 이름을. 부모를 공경해. 이런 거. 이런 거는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뭔지를 모르는데 그 이름이 뭔지는 어떻게 알며? 망령되이 일컫는 게 뭔지는 어떻게 알아서 그걸 안 하느냐고요.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 맞아요? 

하나에다 님 붙인 게 그분의 이름 맞느냐고요? 그럼 하느님은 맞아요?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붙인 이름이에요.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뭐든지 괜찮아요. 그거 갖고 싸우지 마세요. 국어 책에 하느님으로 되어있다고, 아녜요. 모르는 거예요.그건. 

 

그러면 그 모르는 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밑의 거는 우리에게 안 주었어요. 

그리고 그 밑의 거는 예수님이 오셔서 산상수훈에서 설명해 준다고 예수로. 

그리고 마지막을 에스카텔로스 코드라텔러스, 사랑, 아가페로 끝내 버려요. 그

래놓고 서신서 에서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야, 모든 게 다 그 안에 들어있어. 라고 이야기해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뭐죠?

 

이거는 너희들이 못 하는 거잖아. 

그럼 내가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어?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니?

 

 

 

이름이라는 건 곧 말씀인데 

그건 우리가 못 알아먹는 거예요. 그

러면 너희들이 이걸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밑의 다섯 개를 하면 그게 바로 위의 것을 하는 거야. 

뭐예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간음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면 당연히 간음하고 그걸로 거짓증거 하고 엉터리 말을 던져줄 테니까 사랑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뭔지 알아 진리로 깨달으면 아, 이거예요? 

희생제사 드리지 않는 거 그게 하나님을 망령되이,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군요. 

그리고 간음하지 않는 것, 거짓 증거 하지 않는 것,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거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네요.

 그리고 하나님을 부모로 나를 낳아주시는,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나를 낳아주시는 부모로 공경하는 거네요. 라고 알아먹는 거란 말에요. 

이것이. 그럼 다섯 개에요.

 

 

이 열 개는 주의 이 다섯 개로, 찢어진 휘장,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찢어져서 

뒤의 다섯 개로 남아 진리로 우리에게 넷, 코드란테스로 주어진 그걸로 이 율법 열 개가 깨지잖아요. 

그러니까 그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그걸 주머니에 넣어, 그 주머니가 뭐냐 하면 추를 넣는 주머니에요. 그 단어가. 

추가 뭐냐 하면 성경에서 항상 말씀을 상징해요. 

그래서 큰 거, 작은 거 같이 넣지 마, 말씀은 항상 일정해야지. 똑같아야지 그런단 말에요.

 

 

 

거기에 넣어, 추 넣는, 말씀을 넣는 주머니가 뭐예요? 나에요

그리스도,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 내가 그렇게 돼서 가면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그 골리앗이라는 율법이 깨진다는 거예요. 

죽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매, 휘장, 그 휘장이 찢어져 다섯 개로 던져지자 그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십자가에 묶여 있으면 안 된다고요

.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세요? 그래요. 그런데 왜 자꾸 그게 그리스도 아니라고? 그리스도예요. 

그런데 우리는 못 알아먹는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럼 보세요. 다윗이 뭐, 뭐 가져갔어요? 

주머니, 막대기, 돌-계명, 말씀이에요. 돌, 물매-휘장. 

 

예수님이 제자들을 열둘과 칠십으로 보내죠? 

칠십 명이 아니라 칠십으로 보낸 거예요. 완성이에요. 그게 열둘, 아들로 보내는 거예요. 

딱 열두 명 보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열둘로, 칠십으로 보내면서 뭐를 가지고 가라 그래요? 

지팡이, 전대, 은전(돈), 두 벌 옷. ‘메데이스 아이로’ 씌우지 마라 예요. 가지지 말아라가 아니라. 

그거 안 가져가면 안 돼, 거든 요. 원래가. 그런데 사람의 두 마음으로 그 말을 딱 대하면 무슨 마음이 먼저 드느냐 하면, 

그래 그렇게 나는 가난하게, 겸손하게 그렇게 선교를 가야 하나님도 그걸 기뻐하셔, 라고 해석하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메데이스 아이로’를 가지지 마라 는 걸로 보는 거예요.

 

 

 

다윗이 그거 갖고 가서 율법을 부수었는데 그걸 진리로 가져가서 전하는 역할로 지금 부름을 받는 그들이 

그거 안 가져가면 어떻게 해요? 은, 은은 항상 구약에서 속전이잖아요. 가지고 가야죠. 주머니, 가져가야죠. 내가 진리를 담은 그릇인데. 

그 주머니가 그릇이라는 단어에요. 똑같은 단어라고요. 

토기장이가 하나는 천히 쓸 그릇.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 이거 만드는 게 잘못이 아니라 그 그릇이 주머니, 단어가 똑같은 거라고요. 

‘나’. 두벌 옷. 배웠잖아요? 속옷과 겉옷.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들에게 겉옷을 줄 수 있는 짝. 두벌도 아니에요.

 짝으로 옷을 가져가. 가리는 걸 가져 가. 그거예요. 

 

그래 갖고 어디로 가라 그래요? 

유대인의 집으로, 율법주의에게 가서 그거 깨.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그건 제가 자세히 성경구절들을 찾아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자식들 선교 가면서 아, 우리는 자비량 선교예요. 주머니, 전대, 옷 가져가지 말라 그랬잖아요. 성경에서. 그렇다고 진짜 한 벌 갖고 가는 애들 있잖아요. 예? 돈도 안 가져가고. 그거 은이거든요. 은. 속전. 그러고 가서는 쫄쫄 굶고 고생한다고. 아유, 돈 보내주세요. 가서 잘 먹고 진짜 하나님의 진리 잘 전하고 오라고 그러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고생시켜서 선교 보내고 그러지 않아요. 

아, 바울은 뭐 텐트 만들어서, 텐트가 장막이에요. 

성전 짓는 자의 모형으로 그가 불림을 받았기 때문에 텐트 만들었다 그러는 거지. 

그거 안 만들면 못 먹고 살아서 그거 만들었다고 쓰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잖아요. 야, 너희들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 먹일 당연한 의무가 있는 거야! 그런다니까요.

 편하게 가서 선교해도 돼요. 왜 자학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는 와서는 그냥 그 만족감에,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일주일을 버텼다. 그거 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얼마나 미웠을까.

 나를 이 고생시키는 그 영감탱이, 막 그러면서. 성경은 그런 얘기 안 합니다. 그런 것에는 자유로우세요. 제발. 

그리고 그런 거 갖고 딴 사람들 평가하고 막 그러지 마세요. 

누가 뭐 호텔에 가서 선교하고 왔다고 뭐. 이왕이면 돈 있으면 거기 가서 그렇게 하세요. 

제대로 된 진리를 잘 전할 수만 있으면 편하게 가서 하고 오라니까. 뭐 하러 고생하면서 막 그러고 와

. 피부병 걸려 갖고 오고 그러느냐고요. 

쾌적한데서 잘 전해야지. 엉뚱한 봉사활동을 선교라고 착각하니까 그게 그냥 무슨 대단한 선교인 냥 말에요. 아니에요. 여러분.

 

 

 

성경은 절대 그런 얘기 안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하세요.

 

이렇게 우리는 첫 번 째 남편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진리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거고

 율법이라는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를 발견해야 되는 거고,

우리 안에 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한 마음을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게 신의 죽음에 그 은혜를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거 그거 아시면 돼요. 

그러면 당연히 그분을 찬송하게 되죠. 

 

찬송은 여러분이 만날 앉아가지고 그냥 막 되지도 않은 멜로디로, 할머니들 봐요. 멜로디도 똑같고 박자도 똑같고 리듬도 똑같고 가사만 틀려.

그래놓고 우리는 만날 찬송한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 자, 내가 어디 산에 가다가 맛있는 무지 시원하고 너무너무 깨끗한 옹달샘을 발견했어요. 마셨어. 

너무 좋아. 칭찬해주고 싶어. 찬송하고 싶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릇에다 떠 놓고 빌면 돼요? 먹고 다른 이들에게 

아, 시원 해. 그럼 돼요. 그걸 찬송이라 그래요. 그게 진짜 섬김이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거 떠 놓고 거기에다 대고 빌고 있는 거예요. 이걸 우상 섬김이라

 그래요. 여러분이 진리의 복음을 알았으면 아, 좋아! 하면 되는 거예요. 아, 좋아! 

그 진리가 여러분 안에 있으십니까? 그거 확인하시라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거 맛있게 먹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누리라고 우리에게 주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엉뚱한 행위를 낳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선물한 그 자유가 무엇인지를 잘 누리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풍성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내어 놓는 우리 성도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