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로마서 9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Hebrew 2023. 6. 5. 17:28

로마서 9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제가 신학교의 한국 학생회에서 매년 한국의 유명한 목회자 (큰 교회의 목사라고 생각하십시오.)를 한 분씩 초청을 해서 일주일간 그 분들의 목회 노하우를 배우는 프로그램을 운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초청된 목사님들은 오셔서 저녁때에 잠깐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때에 큰 교회 만들기의 기술과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교인 관리의 방법, 예배당 빨리 건축하기, 교인들의 스스로 조직을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조직을 편성하여 목사가 없어도 교회가 운영이 되는 교회 만들기(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로들을 장악하여 목회를 쉽게 하는 방법 등등의 목회의 기술과 방법에 대해서 열변을 토합니다. 

 

큰 교회의 목사의 가장 유치하고 교활한 노하우는 교인들의 종교심을 부축이면서 그들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성숙한 성도 상을 만들어서 제시해 주고 거기에 못 미치는 이들이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게,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주면 목회가 쉬워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교인들의 종교행위의 열심에 대한 강조와 질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성도가 십일조를 떼어 먹을 수 있는가? 어떻게 특별 새벽기도 기간에 결석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도의 인내심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어떻게 성도가 그런 더러운 말을 하는가? 어떻게 성도가 그런 짓을 하는가? 그러고도 당신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등등 의 질책과 권면을 매주 던져주고는 그러한 당신들과 다르게 나는 이러이러하다는 예를 한 가지 정도 만 들어주면 회중들은 강대상에 선 목회자와 자신들 사이의 갭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들 보다 더 성숙하고 더 정결하며 더 열심히 있는 자리에 서있다고 생각되는 설교자의 말에 복종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심지어 장로들이나 안수 집사들에게 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업무를 맡겨서, 완수하지 못할 때에 그 일을 맡긴 목사에게 미안함으로 그 목사의 말을 잘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목양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하나님입니다. 목사가 목회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이고 그 머리에 의해서 지체들이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그 목회라는 것이 주님의 주권 아래에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것을 매주 말씀 속에서 회중들에게 대언해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경영 논리, 운영의 기술, 행정, 방법론이  교회 안에 왜 필요합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 정치까지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은 말씀은 관심이 없고 훌륭한 경영인, CEO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특징은 그들은 목사를 안 해도 사업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속한 조직을 탄탄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훌륭한 경영인을 찾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세상이 칭찬하고 칭송하는 그런 집단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거룩한 지도자를 찾을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속에서 착하고 순결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성인군자를 찾을까? 고민을 합니다. 행정 능력, 경영 능력,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붙들어 둘 수 있는 능력, 이런 CEO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벌 좋고, 인품 좋고, 사람들을 많이 모은 경험이 있고, 경영 능력이 탁월한 목회자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흥신소 직원처럼 자기들이 모실 목사들을 뒷조사를 하고 다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구미에 맞는 그런 사람을 찾아야합니다.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짧고 간결하게 해 주면 좋아합니다. 생명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쉽고 간단하게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목회자 상을 미리 이렇게 경고를 해 놓은 것입니다.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허탄한 이야기를 해 주면 회중들은 좋아합니다. 바른 교훈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욕을 채워주고 자신의 가려운 것을 잘 긁어주는 그런 허탄한 스승을 많이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허탄한 스승들이 강조하는 것은 (진리가 인간은 없음, noting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 인간이 전부고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주는 분이다, 라고 합니다. 인간 보편의 자존심, 인간이면, 성도라면, 적어도 우리 교회 교인이라면 이런 그럴 듯한 목표지점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에 대해서 살짝 흘려주면 사람들은 시원해 합니다. 그것이 아담들의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 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이 그 마음의 실체이며, 정체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숙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그런 말씀을 전해 준 그 허탄한 스승들을 칭찬해 줍니다. 그 설교자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긁어주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심지어 불교인들 까지 칭찬을 해줍니다. 

 

 6:26 모든 사람이(보편적 인간 군상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세상 일간지 까지 칭찬을 해주면, 그리고 존경해맞이 않는 목회를 하는 사람을 올바른 교회의 상이다, 올바른 교회의 상이다, 라고 세상 일간지 까지 칭찬을 해주는 그런 교회와 사람은 사실 거짓 선지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회, 진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모두에게 칭찬 받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라는 뜻은 여러분이 칭찬하는데 세상도 칭찬하면 그것이 ‘모두에게’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한 비수를 던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진짜 설교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수십 년 간에의 자신의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부정해 버리는 못된 사랑으로 설 수 있습니다. 보편적 아담들이 원하는 것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아담들이 원치 않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 만, 그들은 하나님처럼의 삶만 살려하고 있는데 아니라고 자꾸 내려가라고 하고 죽으라고 하니까 인간들의 자존심이 건드려집니다. 심지어 사회 정의나 도덕, 윤리, 이런 것은 사회, 세상 보편적 가치 아닙니까? 공평, 평등과 정의, 도덕, 율법, 윤리까지도 인간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세상이 같이 칭찬을 해 줍니까? 어떻게 그러한 이들을 온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보편적 인간의 지향성과 방향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여 주는 말 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성숙한 지경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의 자격, 성도의 열심, 성도의 헌신 등등 성도가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되는 사람들에게 야단과 격려의 채찍과 당근을 교대로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드시 동반 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송사와 정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목표지점을 제시 받으면 즉시 자기를 정죄하고 송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친 나와 내가 아는 내가 있는데, 나에게 나는 절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시된 목표지점이 이 세상이 온통 합일해 놓은 거룩하고 정의롭고 성숙하다고 하는 목표지점일 때에는 그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정죄와 송사가 더욱 심해지고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에 행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난 뭐야 도대체, 넌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넌 정말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인 거야, 그 모양으로 사는데도? 넌 왜 맨날 제자리야’ 그러면서 그 때 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기이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허탄한 율법으로 받게 되면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의 그 선물을 쓰레기 취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것은 온통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다시 나에게 몰입을 하게 됩니다. ‘넌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왜 아직도 새벽 기도를 매일 못나가? 왜 남들은 금식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금식 한번 못해? 밥이 그렇게 중요하냐? 이 돼지 같은 놈아’ 자기를 향해서 그럽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고 찬송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의 시선은 그 사랑으로 향하여 있어야지 자신의 육을 향해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 만 죽었다고 하지 전부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 예수도 그 사람에게는 안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너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볼 거야,’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예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로 칭송을 받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육을 자신 스스로 바라보면 송사와 정죄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자리에 있는 인간일지라도 자기를 바라보면 늘 부족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즉시 송사와 정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성숙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그 사람들을 존경할 만 한 사람으로 본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내 탓이오, 라고 그래, 아직도 내 탓이래’ 라고 하며 존경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죄를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울고불고하면서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헌신 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기독교는 죄와 무관한 자가 되는 것이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그 자리에 머물러서, 그러니까 내가 이 모양으로 살면 안 되겠죠? 하며 자기의 몸을 불태워버리면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거기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데 뭡니까?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 온 것이 아닙니까? 

 

 아직 까지도 자기의 죄를 그렇게 민감하게 인식하는 수준에 머문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의 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분별을 하십시오. 저를 그 사람들하고 묶지 마십시오. 아닌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무서운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그러한 송사와 정죄의 율법은 절대로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8장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죄와 사망의 법이 똑같은 것입니다. 말씀입니다. 성령, 성경 말씀,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내용으로 깨달아져서 생명의 법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죄가 웬 말이냐? 그럽니다. 

 

2절을 보다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 찔리죠?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 줬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게는 윤리로 이해되어졌다, 라고 합니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정죄하겠느냐? 십일조 좀 못한다고 정죄를 받아야 되냐? 교회 봉사 좀 게을리 한다고 새벽기도 안 한다고, 교회 좀 몇 주 빠졌다고 마귀 새끼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빠지라는 이야기의 뜻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해방이 된 자들을 도대체 무엇이 다시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런 것으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정도를 판단을 하려고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일만의 스승은 있지만, 스승은 교훈을 가르쳐 주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살아, 저렇게 살아 그러면 사람들이 칭찬해 줄 거야, 그래야 인간다운 것이야’, 얼마나 많은 스승들이 있는지? 다들 멘토라고 합니다. 

 

일만 스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는 없다고 합니다.

 

 아비는 그에게 생명을 주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살아, 저렇게 살아, 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은데 생명을 줄 수 있는 아비가 없습니다. 

 

도덕 강연이나 윤리 강론을 잘 들어보면 인간 보편의 부족함을 송사하고 정죄해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살아’, 이런 것들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말씀을 인간의 교훈으로 주는 것은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해주면 다들 짜릿해합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 대해서 아주 단호합니다. 너희를 의롭다고 하신 이는 하나님이야.

 

법을 설명하고 도덕을 논하는 인간들이 설정하고 상정해 놓은 의의 기준에 재어서 의인되는 것 아니다, 라고 합니다. 너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야, 그런데 무엇으로 너희를 정죄 하냐?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그 사랑을 그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렇게 의롭게 하셨는데 또 다시 너희들을 무엇으로 정죄하려고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 그 사랑을 내가 염두에도 안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성도에게 있어서의 그 모든 것은 선의 재료이고 선물인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정죄의 대상이 될 것이며, 송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로마서 8장의 맥락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그런 즉 의롭게 된 자들을 무엇이 정죄하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겪는 환란이나 고통이나 이런 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벌주기 위해서 준 것이냐? 이런 말입니다. 그것은 다 선물이잖아,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이잖아,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동성애로 고민을 하는 어떤 분이 메일로 상담을 하셨는데, 그런 비정상적인 성 정체성을 가진 자신을 죽이고 싶다고, 죽이고 싶을 만큼 자신이 밉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기 시작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상담을 한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그것으로 정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못 고치면 천국을 못 갑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고쳐야 할 모든 것을 고친 이후에 천국에 가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 모든 것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 내용을 알면 그릇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 안에 담겨있는 진짜 내용을 알게 되면 표피적 모형은 그 즉시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피조물에 의해 창조 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 안에서 벗어나서  우발적으로 생겨 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악 까지도 그렇습니다.

 

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나는 진리의 띠로 너를 동여서 반드시 내 아들을 만들거야, 네가 나를 몰랐다고 할지라도 입니다. 네가 나를 알아서 구원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이 살아났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알더라는 것이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만이 신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이역사의 존재 목적입니다)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환란, 라아, 악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십니다. 

 

선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악도 하나님이 창조 하신 것, 그러면 선악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며 창조의 이유는 그것으로 생명이 무엇인지 알라고요.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동성애라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동성애라는 것을 모형으로 던져 주신 것일까요? 

 

성경에 항상 남자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여자는 땅에 존재들인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땅에 이름들이 전부 여성형인 것입니다. 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존재들인 여성들이 여자가, 신부가 그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 땅에 것들을 심지어 그 하나님, 그 남자를 이 땅에 존재인 율법, 여자로 받아들여 사랑해버리면 그것을 동성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결혼을 통해 그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왜 주셨는지 알았으면 그 동성애라는 그 현상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저분하게 어떻게 같은 성 끼리 사랑을 합니까? 그렇다면 이성끼리의 사랑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결하며 동성끼리의 사랑은 지저분하고 더럽습니까? 어차피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내 만족의 그 상대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라고 하면 단번에 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깨끗합니까? 

 

물론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러한 것들로 아파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성도가 맞습니다. 당연히 나를 죽이고 싶어야합니다. 그런데 죄가 그것 하나입니까? 왜 다른 이들은 성경이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이다 그랬습니다. 살인으로 간주할 거야, 가 아닙니다. 그것 살인이다. 이웃에게 생명의 말씀을 흘려 그를 살리지 못하면 그를 죽이는 것이니까 그것이 살인입니다. 그러면 동성애가 살인 보다 더 더러운 죄입니까? 우리는 매일 같이 살인을 하면서 몇 가지 죄들을 죄라고 규정을 해놓고, 이 세상에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을 그리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깨끗해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이 라는 것은 지독하게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만 선택을 하고 행위를 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동성애도 그것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세상이 합의한 그 더럽고 추악한 죄라는 것 만 안 지으면 자기들은 정정 당당하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영적 한센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지려고 모세를 내려 보낼 때에 왜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걸리게 하고 그것을 고쳐주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내 백성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고쳐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 보세요. 한센병이 통점이 사라지는 병입니다. 코가 날라 가는데 아프지를 않습니다. 손가락이 떨어지는데 아프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은혜로 영적인 그 한센병을 고쳐버렸습니다. 그럼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이 아픔, 고통입니다. 당연히 아파야할 그 자리에서 아파하지 못하고 몇 명의 죄인들을 이렇게 내 밖에 만들어 놓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느라 자기가 어떤 고통에 있는지 모르는 그들에게 정작 아픈 것은 나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 영적 한센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지면서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너는 네 유익을 위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것들을 짓고 살아’, 라고 하는 그가 더 하나님 앞에 성숙한 자입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깨끗해’, 라고 사는 우리가 더 성숙한 자입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다른 이들의 나타난 현상을 보고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 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도대체 네가 뭘로 너희 자신과 네 이웃을 송사할 것이야? 라고 합니다. 뭐가 송사거리가 돼요?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고쳐주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왔다는데요. 

 

성도의 육이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 영 안에서 부활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진리로 살아난 자들에게 있어서의 그 육의 자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 밖에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육의 자격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관심거리 밖의 것입니다. 다만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에게는 다른 삶이 있는데 그것이 누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이나 조건과는 무관한 삶입니다. 세상과 성도의 차별된 삶이라는 것은 세상도 충분히 분별해 낼 수 있는 그들도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차별된 삶이 아니라, 묶여있었던 그 세상과 법이라는 사슬에서의 벗어난 자의 자유와 성숙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주 엄청난 진술을 해버립니다. 너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도 너희가 성도라면 그것도 하나님이 너희를 정죄할 거리가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살아나서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런 말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섬겨주는 그런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 구절은 누가 정죄를 하겠는가? 라고 시작을 합니다. 너희가 죽인 그리스도 예수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누가 정죄를 하겠니? 그러나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죽였다, 그 그리스도 예수는 너희를 정죄하겠는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분은 죽으셨다, 아포디네스코, 디네스코의 명사형이 다나토스입니다. 그 분은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에게이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 분이 넥시오스, 하나님의 우편(하나님에게는 우편 밖에 없습니다.)이라고 했는데 그 넥시오스가 영접하다, 받다라는 뜻입니다. 넥시오스가 right side가 아닙니다. right이지  오른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의 반대적 개념으로 염소들이 왼편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 오른편, 왼편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 하나님의 쪽을 말하며, 거기가 성도를 말합니다. 성도들 보고 성경에서 계속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그 하나님의 편이다, 라고 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가 우편에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다시 에게이로, 살아나서 너희도 나처럼 되라고 간구합니다. 그 성령이 너희도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라, 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육으로 죽는 너희 육이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그것이 어떻게 정죄꺼리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이 말씀의 완성으로 다나토스, 무트로 죽은 것은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 신의 자기 계시는 피조물에게 자기 계시는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과 피조물이 삶에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기 계시, 그렇게 낮아짐, 잉카네이션, 그 죽음 밖에 없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 하나님이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육도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산다’, 라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구나, 라고 아는 것이 그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내 안에 그리스도가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육이 죽는데, 육이 부정이 되는데 왜 그것이 송사꺼리며 정죄꺼리가 됩니까? 그냥 그것으로 너희의 육이 장렬히 전사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 싫으니까 그 육을 어떻게 해서든지 개발하여 하나님 앞에 기쁜 존재로 나아가고  싶으니까 그것이 정죄꺼리가 되는 것입니다. 너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 이렇게요. 살고 싶으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죽이겠다고 하는데 이 육을 개발하여, 하나님도 육으로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남편이 되셨는데 너희들이 뭔데 개발하여 하나님 앞에 가져가겠다고 하느냐?, 는 말입니다. 그 말은 죽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너희 스스로도 송사, 정죄하고 남들도 그렇게 쉽게 송사, 정죄하는 것 아니니? 하십니다. 너희를 의롭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지, 세상의 그런 시선과 판단 기준이 너희를 의롭게 하는 것이냐? 아니잖아 , 너희들이 여전히 송사와 정죄 안에 있다면 너희들은 진리를,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니들이 진짜로 죽은 자들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에게이로라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단어를 개역 성경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번역을 했는데 그 단어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어있던 기능이 존재가 되어 조합이 되다, 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보면 뼈다귀들이 골짜기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먼지가 풀풀난다, 고 합니다. 사람을 죽여서 실온에다가 놓아두면 뼈가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죠? 아닙니다. 힘줄이 끊어지고 이것이 썩으면 관절이 썩으면 탕탕 튕겨져 나가서 다 흩어집니다. 그러면 산자들의 그 기능들은 전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냄새를 맡을 수도, 만질 수도, 먹을 수도 없는 모든 기능이 상실이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네크로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네크로스를 육의 죽음이라고 하는데 살아있는 네피쉬, 존재들인데, 진짜 들어야할 그 소리를 못 듣고 진짜 호라호 해야 할 그것을 보지 못하면 그 존재를 육의 죽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그것을 못보고 못 듣고 죽으면 그 자들을 그냥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에도 죽은 자고 숨이 멈춘 후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 중에 ‘오 내가 들어야 할 것이 이것이 아니구나, 내가 진짜 보아야 할 것이 그것이 아니 구나’ , 를 어떻게 알게 되었으면 그것이 에게이로입니다. 진짜 기능들이 조합이 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도 번역을 하고, 다시 살아났다고도 번역을 하는데 이 상태를 다나토스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완성으로 죽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면 내가 죽은 자 맞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어 진짜 들어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들을 아나시스타스, 부활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열심히 하면 나중에 어느 날 이렇게 살아나는 그것을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하고, 산자의 부활은 지금 이 땅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진리를 가진 그 사람을 성경이 살았다, 라고 합니다. 아나시스타스가 아나가 위로이고, 타시스가 스테미, 똑바로 서다, 위로 똑바로 선 그 사람을 부활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첫 번째 부활, 두 번째 부활 이런 것이 나오는 것이 이런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어떠한 이들이 나타난 현상과 현실이라는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진짜 보고 듣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풀려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것이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현실들이 감사한 것들로 보이기도 하고 그들을 묶어 놓고 수치스럽게 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다른 것을 보는 것이고 내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용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 기쁨, 수치, 자랑, 겸손, 교만 이러한 것들이 그냥 하나로 보이고 들리면 됩니다. 그렇지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지 알면 됩니다.

 

 모든 현상과 현실과 사건과 감정 이 모든 것들이 그 하나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파스, 모든 것으로 보여지고, 들려지면 그들에게 있어서 죄가, 악이, 의가, 선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밑에 나옵니다. 심지어 생명은 뭐냐? 라고 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생명 그것으로 그 진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내가 생명을 이야기 했는데 생명을 안자들아 생명은 뭐냐? 생명을 알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그 생명이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에게 좌는 무엇이고 우는 무엇입니까? 진리가 깨달아 지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야단들인데 우리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침묵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상은 나에 대해 침묵을 합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못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릇이 되는 만큼 듣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능력, 그릇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 보다 큰 소리인데 담지를 못하는데,  자기의 그릇의 한계 때문입니다. 내 그릇에 안 담깁니다. 뭐가 성공이고 뭐가 실패입니까? 성공하는 방법, 실패를 줄이는 방법, 아닙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실패해야 그것이 성공입니다. 실패를 많이 하면 성공할 거야가 아닙니다. 

 

내가 내 육으로 실패해야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듣지 마셔야하고 그것이 안 들려야 합니다. 그렇게 에게이로 한 이들을 위로 똑바로 선자들, 아나시스타스라고 합니다.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서 그 세상에 묶이지 않고 그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좌도 없고 우도 없는 어둠도 없고 밝음과도 무관하게 똑바로 선 그 존재들의 상태를 아나시스타스,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 이스테미에서 십자가, 스타우르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기둥이(십자가) 그렇게 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이 어둠의 세상 속에서  그 어둠의 내용을 빛으로 볼 줄 아는 에게이로의 그 부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산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죽은 육신을 열심히 채찍질 하면서 그 육신의 열매를 근거로 해서 먼 훗날의 부활을 막연히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과연 살까?, 어떤 모습으로 살까? 아니 못 살지도 몰라?’ 이러고 있는 이들을 산자라고 합니까? 

 

주님은 그러한 이들을 향해서 네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들이야, 라고 합니다. 주님이 ‘너희는 성경도 모르는 자들이야,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자들이야, 성경책을 이마와 격문으로 차고 다니면 무슨 소용 있니?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그것 크게 만들면 뭐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그러십니다.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2: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부활은 그런 식의 시집 장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네 안에 남편으로 받아들여 그 남편과 하나 되는 것이 부활이야, 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형사 취수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에게 그 형수가 시집을 가야합니다. 또 죽으면 또 밑에 , 또 죽어 그러면 또 밑에 그래서 일곱 형제가 다 죽었습니다. 결국에는 그 여자도 죽었네요. ‘나중에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로 살게 됩니까? 

 

 

결혼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 혼인이라는 것을 준 것은 하나님이라는 그 남편과 교회라는 그 신부의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니?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찾아가서 네 남편 데리고 와봐? 그러자 다섯 남편이 있었는데요, 라고 하자 주님이 그 남편은 그 남편 아니다. 율법으로서의 남편은 너의 남편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내 밖에 법이니까 내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심비에 어떻게 새겨집니까? 그러면서 지금 있는 그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 라는 것은 주님 자신을(율법으로 오신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그 남편을 소개하려 오셨지만 그 예수가 그 육으로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남편은 어떤 남편으로 와야 합니까? 죽고 일곱 번째에 영으로 그녀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일곱으로 완성이 된 일곱 번째 남편인 것입니다. 주님이 칠 형제를 예로 이 우문을 하는, 이 사람들의 말을 빌려 그래 내가 진짜 남편을 설명해 줄게 그리고는 일곱으로 온 그 남편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를 살았다, 라고 합니다. 나중에 너희들이 부활을 해서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산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은 이미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로부터 따져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산자라고 합니다. 육은 죽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그 생명력으로 살아나는 것이 구원이다,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삶이었기 때문에 성경이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것이 요셉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넷의 삶, 

 

그래서 요셉이 섭섭하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삶으로는 아브람의 뜻은 위대한 아버지,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위대한 아버지, 위대한 하나님은 내 밖에 섬김의 대상인 그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것이 열국의 아버지, 모든 이들의 아버지가 되려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인생 자체가 이삭은 하나님의 자손은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탄생을 하는 것이야, 를 보여주는 것이고 야곱은 그렇게 하여 그 하나님이 없이는 그 은혜 그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홀로 설 수도 없는 존재 그 하나님의 사랑을 지팡이로 집고 지팡이가 한 몸이 되어 걸어가야 그것이 존재이다, 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사의 일이니까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구나 그럽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의 외모, 그들의 자격이나, 됨됨이나 행위 됨을 가지고 그들의 아들 됨이나 성도됨의 잣대를 통해서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송사하는 것이 어찌 가당한 일이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진짜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주님이 이 에피소드로 설명을 해주십니다.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8: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아포쿠오, 듣네. 자연이 이사람의 말을 듣네 이런 말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립네,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립네는 불과 유황 불못을 가리킵니다. 

 

실로암 못 여기서 쓰인 단어는 다릅니다. 거기에 빠지면 죽는 것입니다. 반드시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들어 있는 상태(네크로스) 죽어있는 상태로는 못 건너간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메라포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는 압핍노우라고 쓰여있는데 그 단어는 영적 무감각, 영적 무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어가 다릅니다. 마태, 마가는 카디도라는 씁니다. 이 단어는 진짜 자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메라포하는 것이고, 압핍노우는 영적 무능력을 죽음이다, 라고 보여줍니다. 이들의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 그 내용을 듣고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죽음의 립네를 건너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히브리라고 하고 건너 간자라고 합니다.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다를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광풍이 인다고 합니다. 아네모스, 미친바람인데 이 단어는 세상의 풍조, 사조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사조, 풍조로 세상 사람들이 합의하여 그리로 끌려가는 풍조, 사조를 아네모스 라고 합니다.

 

 미친바람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불어 닥치면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왜요? 이 세상에 그 기대에 부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에 못 미치면 다 실패자입니다. 그래서 전부 성공한 자리( 대 기업에 취직하는 것, 판사, 의사되는 것)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전부 찍어 내는 벽돌들입니다. 그것은 없어도 됩니다. 다른 벽돌을 또 찍으면 되니까요. 하나님은 그런 벽돌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하나가 내 아들입니다. 그렇게 죽어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합니까? 에게이로 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쓰인 단어가 제자들이 주님을 에게이로 했다고 합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제자들이 살아나야 하는데, 성경이 일부러 그 단어를 주님에게 씁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세상의 풍조와 바다를 무서워합니다. 

 

 

바다는 창세기 1장에서 아랫물을 바다라고 하자, 얌이라고 썼습니다. 그 얌을 파자하면 진리를 주다, 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진리를 받으면 됩니다. 그 바다, 그리고 그 광풍, 그 아네모스, 이 세상의 풍조, 사조, 세상의 기대, 잣대 그것이 우리에게 무서움 두려움의 상태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 내용을 봐야하니까 에게이로 해야 됩니다. 새로운 진짜 기능이 합의가 되어 진짜 존재가 되어 주님이 무서워하는 그들 앞에 에게이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 말입니다. 주님이 아포 듀네스코, 다나토스로 죽고 에게이로 하셔서 너희 안에 계신데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시는데 무엇으로 너희를, 너희 이웃을 정죄하고 송사하겠느냐가 오늘 본문의 이야깁니다. 그 주님이 에게이로 했습니다. 일어나서는 이것이 믿음 없는 거야, 진리는 이 세상 풍조를 진리로 누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진리를 가진 이들은 세상이 그 진리 앞에 그 진리를 들어야지 너희들이 그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어나시더니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잔잔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진짜 가치인 줄 알고 그것에 못 미치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아니 당연히 바다는 풍랑이 일어야 하고 바람이 일어나야 여러분이 탄 배를 밀 수 있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다에서 풍랑이 없고 파도가 치지 않으면 그 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게 됩니다. 그러면 바다에 속하여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이 세상은 그렇게 풍랑이 일고 무시무시한 곳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내용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아 이것이, 이 육의 세상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난 여기서 나가야 하는 것이 구나를 내가 알면 그 바다는 풍랑이 이는 바다지만 나를 밀어  가나안으로 밀고 가는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말을 듣고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그 바다가 나에게 있어서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내 삶에 풍랑이 없습니까?  전부 풍랑이고 어쩔 때는 꿈에서도 풍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 내가 이것으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지 알면 그것은 나에게 더 이상 풍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내 말로 짓눌러 밟아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똑같은 그 바다를 딛고 서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돼지, 뭘 몇 가지씩 정해 놓고 그것을 정죄하고 송사하면서 나는 안 그렇다는 것을 꼭 그렇게 자랑을 해야 합니까? 뭐가 그렇게 깨끗하다고요. 

 

그 바람과 그 바다는 여러분에게 위법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무서움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딛고 그냥 일어서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 에 따라 여러분은 평생을 정죄와 송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음의 삶을 사느냐, 정죄와 송사로 산자의 삶을 사느냐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 나쁜 놈이 잘못 가르쳐서 그랬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진리가 들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듣는 것을 말하게 해 주십니다.

 

 20년 전의 조디 포스터가 나오는 넬리라는 영화에서 노스 케롤라이나 숲 속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명인 들이 발견했더니 이상한 말을 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발견이 된 줄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했냐면 안면 마비인 엄마와 태어나면서부터 의사소통한 말이 안면 마비된 그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듣는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에 의해 네가 심판 받을 거야 그랬습니다. 여러분 어떤 말을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정죄하고 송사하는 말, 아니면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