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로마서

97.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는가

Hebrew 2023. 6. 5. 17:30
(롬 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논리적 사유에서의 경제성을 내용으로 하는 서양식 고사 성어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 원리는 꼭 필요한 것에 국한해야 한다는 것으로, 어떤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전제나 가정을 끌어들여선 안 되며, 
꼭 필요한 것만으로 최대한 제한하고 억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컴의 면도날은 조금이라도 신비스러운 기미가 있는 보편자 따위의 존재자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립니다. 
그건 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는 유명론입니다.
 인간성, 보편적 이성, 심지어 보편적 인간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것이지 인간 보편이라든지 보편적 인간성이라든지 인간 본성 등의 개념은 
사람들이 이름 붙여 놓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전제를 세울 때는 괜히 추상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식어로 그 뜻을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
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베어버리고 필요한 부분으로 명확하게 단순화하자는 것이지요.


 


이렇게 오컴의 면도날은 본질적으로 추상에 대한 비판인 것이며, 모든 현실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이고, 
이론이란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는 근본 법칙에서 나온 것입니다. 
추상된 모든 인식은, 그 인식이 현실성을 서술해야 한다면, 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다 잘라버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을 했습니다. 
논리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니만큼 그 사유의 면도날을 잘 사용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거든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한다고 그는 웅변을 했습니다.


 


오컴의 그러한 철학이 근대 경험주의의 토대가 되고 근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기독교 신앙에는 아주 나쁜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그 오컴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신학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어지고 논리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리인 것이므로 성경을 너무 신비한 책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도덕관과 윤리관 안에서 잘 이해하고 행하면 된다는 식의 신학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신비한 사건이나 기적 등은 교훈적 내용으로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우리의 롤모델로 삼아 잘 본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의 반 이상은 다 불필요한 추상의 내용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성경 안에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인간 보편이 그 보편적 이성으로 함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게 진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의 사유의 면도날로 성경을 난도질하기 시작하면 감추어진 진리는 전부 절단이 되고 
인간 욕망의 육화라 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것처럼 성도라는 존재들은 다시 살아난(에게이로)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육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입과, 새로운 호흡기관이, 새로운 기능으로 주어집니다. 
한 마디로 육의 옛 머리가 날아가고 새로운 머리가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 진리를 보며,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숨으로 갖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갇혀 있는 세상 논리 밖의 것을 보고, 세상 논리 밖의 것을 들으며, 세상 논리 밖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한 마디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을 논리로, 이성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행하려 하는 이들은 그 성경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장황하게 나열을 합니다.
 그것은 거꾸로 성도 이외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러한 것들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목록들이 두 묶음으로 나뉘어 나오는데 그 첫 번째 목록들이 이러합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다.(두 번째 묶음은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율법을 가리키거나 율법에서 파생되는 현상들입니다.
 환난(들립시스)은 율법 아래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코피 터지게 자기 가치 향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아담들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고,
 곤고(스테노코리아, 좁음)는 자기 앞에 스스로 쌓아놓은 율법의 장애물로 인해 좁아져버린 진리의 문(좁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며, 
핍박(디오그모스)은  ‘데일로스(겁난, 두려운)’와 ‘디아코노스(섬기는 자, 목사, 집사)’의 합성어로
          ‘두려움을 가르치는 자로부터 얻은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건 가르침이 아니라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기근(리모스)은 식량이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율법으로 먹으면 이만 갈릴 뿐입니다. 그건 진짜 식량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헛된 양식을 먹고 굶주려 있는 상태를 ‘리모스’라 합니다.
적신(귐노테스)은 진리의 겉옷을 입지 못해 벌거벗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위험(킨뒤노스)인 것이며, 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칼(마카이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칼’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헤레브’인데 그 단어는 ‘가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진리의 비가 오지 않아 영적 가뭄의 상태가 되면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게 멸망의 ‘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표피적인 법으로만 이해하고, 사유의 논리로만 해석을 하려 할 때,
 말씀은 환난을 주고, 곤고로 길을 막으며, 핍박의 말이 되며,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해 영적 기근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며,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로 엉성하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린 벌거벗은 자가 되게 하고, 가뭄의 칼로 그 사람을 난도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것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멸망시켜가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위험, 적신, 칼인 줄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그 결과 환난과 곤고와 핍박에서 놓여나게 되고, 진리의 참 양식을 마음껏 먹게 되며, 깨끗한 의의 겉옷을 입고 적신을 가리며, 
가뭄의 칼로 오히려 육의 머리를 잘라내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자기 밖의 율법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로 스스로 그리스도와 자신 사이에 커다란 구렁을 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끊으리요’라고 번역이 된 ‘코리조’라는 단어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구렁(카스마)과 한 맥 속에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해하고 행함으로 해서 자기 가치 상승과 자기 가치 향상을 꾀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커다란 구렁을 파고 있는 것이라는 무서운 말입니다.


(눅16:23~26)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비유는 주님께서 율법주의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던진 비유였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이 주님께 말씀을 들으러 나왔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을 영접하셨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식사를 함께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가진 양식을 그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은유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했습니다. 어찌하여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을 영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회개’란 무엇인가에 관해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 주신 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핵심 내용이 뭡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물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땅에 모형으로 허락해 주신 아래의 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그 아래의 것들을 내용으로 잘 이해를 하면 그것으로 상대의 빚을 탕감시켜(용서) 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하늘에서 자신을 영접해 줄 하늘의 친구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고,
 불의한 것에 충성하지 못하면 참된 것(진리)도 너희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릇이며 모형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내용으로 볼 수 있으면 너희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인들과 세리들이 지금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만 이해를 하여 
그것으로 자신들의 가치 향상과 신분 상승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부자’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들 중간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말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거기에서의 돈은 ‘은’을 가리키는데 그 ‘은’은 성경에서 늘 속전을 상징합니다. 
속전은 속전인데 자기들이 마련한 속전, 즉 율법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부자입니다. 
그러한 부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들의 선(너희 좋은 것)’을 살아생전에 챙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반대편 자리로 부름을 받은 거지 나사로는 어떻게 살게 될까요?
이 세상 부자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합의하고 정의한 자기들의 선을 소유로 갖게 되는 동안, 
은혜의 복음을 진리로 받아 사는 자들은 그들로부터 ‘악’하다 정죄를 받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이 ‘나사로는 살아생전에 고난(카코스, 악)을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논리와 사유에 의해 정의된 자기들의 선을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는 세상 부자들은 그렇게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구원의 길로 붙들고 있는 성도들이 오히려 악하게 보입니다. 왜 인간들이 선이라 규정해 놓은 그러한 것들을 그렇게 가치 없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세상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 엄청난 구렁이 있지요?
 율법주의자들과 은혜의 복음 아래의 성도는 그렇게 확연하게 구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구렁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걸 오늘 본문이 ‘끊어짐’이라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부자가 뭐라고 하지요? 죽은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어 진리를 말해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부자의 형제가 ‘다섯’입니다. 모세 오경, 열의 반,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다섯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못하는 다섯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을 말합니다.
 그 구약을 진리로 들으면 구원이지만 그 구약을 율법으로 들어 버리면 그 다섯은 멸망의 다섯이 되어 지옥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눅16:27~31)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다섯(구약, 세상)에게 가는 그림은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모형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나 다섯인 세상에게로 간다고 해도 그 다섯의 율법을 진리로 들어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수준의 십자가 제시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집약하여 땅에 꽂아 버린 것이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이 이야기하는 바를 신약의 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기실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계명의 아래 다섯을 넷으로 다시 풀어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 오경이 사 복음서가 되는 형국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게 되면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커다란 구렁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끊어짐’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을 진리로 받은 아들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말씀이 끊어짐의 구렁을 만드는 율법으로 보일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의 계명을 다섯으로 주시고 주님은 그 다섯을 넷으로 넘겨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아주 쉽게 설명을 해 드릴 테니 잘 들어 보세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 즉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쓰면 ‘싸바’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라는 단어는 ‘일곱 번 말하다, 실컷 먹이다’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일곱’개의 말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창세기 1장을 보면 일곱 개의 약속이 나오는데 그 약속의 완성 지점이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싸바)’은 단순히 아라비아 숫자 ‘7’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즉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안식’으로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의 ‘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제시되는 곳이라면 그 성취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스타우로스)는 언약의 기둥이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 언약의 나무 위에서 일곱의 말(가상칠언)이 다시 떨어지는데 그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창세기의 언어로 그 완성을 표현하면 ‘안식’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인간의 대표로 오신 예수의 육이 언약의 기둥에서 죽는 것으로 성취가 됩니다. 
 
우리가 공부한 로마서 6장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 성도 모두는 그 언약의 기둥에서 예수의 육과 함께 육을 도살당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를 가리켜 도살할 양’이라 부릅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성도의 육이 예수의 육 안에서 도살당하는 그 시점에 안식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일곱’의 언약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 백성의 육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율법을 주어 율법 (선악과) 으로 죽이고 그렇게 진리로 죽으면(무트) 거기에서 영생으로 살려 내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의 실수를 골고다에서 회복하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건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라는 제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지요? 
우리의 육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나아오려 하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생명을 영(말)으로 거저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나라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일곱’의 이야기도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여섯째 날에 그 제물의 진의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육신의 두 마음으로 창세기의 일곱을 읽게 되면 
그건 그냥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어 내신 창조 기사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조명 없이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일곱의 언약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야곱의 열두 아들을 ‘하나’로 묶어서 애굽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칠십’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칠십(쉬브임)’이라는 단어는 ‘쉐바(일곱)’나 ‘싸바(일곱 번 말하다)’와 같은 말입니다.
 ‘일곱’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열둘(아들)’이 택해지고, 그 열둘이 ‘칠십’으로 애굽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 일곱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열(아쉐르)’이라는 계명을 받아 그 ‘열’로 ‘일곱’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칠십’입니다.


(창46:27)


27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보시다시피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이 하나님의 ‘일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 아직 ‘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열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시는데 다시 ‘열둘’로 끌어내십니다. ‘열두 지파’입니다. 
하나님의 당신 아들 만들기에 대한 집착은 이리도 대단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들에게 ‘열’이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이 세상에 문자로 던져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열’로 ‘일곱’을 깨달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이나 열이나 그 개념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도 그 일곱과 열을 완성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로 일곱의 의미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들을 ‘칠십 장로’라 부르는 것입니다.
 ‘장로’라는 것이 어린아이와 반대되는 성숙의 개념으로 쓰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열’을 다섯으로 먼저 주십니다.


(출20:3~17)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 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지니라


14 간음하지 말지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사유나 논리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앞의 다섯에 설명을 달아 주십니다. 
그리고 뒤의 다섯에는 설명을 달아주시지 않으십니다. 구약 시대는 그 뒤의 다섯을 행하는 때가 아님을 암묵적으로 힌트 해 주신 것입니다. 
뒤의 다섯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앉으셔서 산상수훈으로 풀어주시잖아요? 
그러니까 뒤의 다섯은 신약 때에 이루어질 것을 나열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성취해 낼 수 없는 앞의 다섯을 설명과 함께 주시면서 인간들이 열심히 행해서 실패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패를 해야 하나님이 은혜로 일을 시작하실 수 있거든요.


 


십계명의 첫 번째 내용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세요. 
그 문장은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친히 당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다른 신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런 이들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 하나님에 관한 어떤 표식을 문자나 형상으로 만들어 내면 그 모든 것이 전부 우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지 않을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어떻게 섬김의 대상으로 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두 번째 계명입니다.


세 번째가 하나님의 이름(말씀)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이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반드시 망령된 율법으로 읽혀지고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인간들의 생래적 능력으로는 지켜낼 수 없는 계명입니다.


네 번째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지요? 
안식은 열로 일곱을 깨달아 알면 안식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일만 열심히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부(아브, 하나님의 성전)모(엠, 하나님의 말씀)를 공경해야 그것이 생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라고도 하고 어머니라고도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말씀을, 자기를 낳는 부모로 갖는 것이 아니라 드림에 대한 법으로 곡해를 해 버리면 그게 바로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고르반 이야기잖아요? 
말씀을 ‘부모’로 공경하지 못하고 ‘드림’으로 그 부모 공경을 대신하면 그게 바로 저주받은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위의 다섯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물론 신약시대를 살고 있고 그 말씀을 진리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 앞의 다섯을 행하고 있는 자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뒤의 다섯을 해석해 주십니다. 
그 뒤의 다섯을 잘 이해하고 행하면 앞의 다섯이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을 잘 이해하고 행하면 앞의 다섯, 즉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 성취되는 그런 메커니즘인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뒤의 다섯을 ‘넷’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다섯은 즉, 넷이라는 것입니다. 왜 넷일까요? 이 십계명의 이야기를 창세기와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열은 일곱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창세기의 일곱 언약 중 마지막 일곱을 제외한 여섯 중에서 앞의 셋은 우리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열매로 일을 하는 열매 맺는 나무로 씨 맺는 풀싹을 내시겠다는 말씀은
 전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창조의 언약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날부터 여섯 번째 날까지를 그 앞의 셋과 연결을 시켜서, 아래에서 행해져 위의 것을 성취하게 되는 이 땅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은 광명(성전, 세상)으로 큰 광명을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어두움을 빛으로 보게 되는 통일(에하드)의 이야기가 성취가 되는 것이고, 
우글거리는 ‘네페쉬 하이’들과  궁창의 새 (성전)와  큰 물고기 (아래의 말로 주시는 말씀, 큰 뱀) 들로 위의 물(진리)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쉐니(둘째 날, 짝)’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이고, 
땅의 ‘네페쉬 하이’가 땅에서 튕겨져 나와(야짜) 육축(베헤마, 제물)과 기는 것(레메쓰) 밖으로 나와 버리면 
그것이 바로 열매를 가지고 일을 하는 열매나무(율법, 선악과)로 씨를 가진 풀싹이 되는 ‘쉐리쉬(완성)’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칼을 품은 네케바(사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이 되었을 때그 상태를 ‘일곱’, 안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앞의 다섯과 뒤의 다섯으로 나누어져 뒤의 다섯으로 앞의 다섯을 성취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면 
창세기의 일곱은 앞의 셋과 뒤의 셋으로 나누어져 뒤의 셋을 통하여 앞의 셋이 성취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셋의 완성을 넷의 안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명의 다섯을 창세기의 그 셋의 언약과 연결을 시켜 넷으로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1(에하드) -> 4(레비이) -> 살인


2(쉐니) -> 5(하미쉬) -> 간음


3(쉐리쉬) -> 6(쉬쉬) -> 거짓증거


7(쉐비이) -> 사랑


열의 휘장이 다섯으로 찢어지고 그 아래의 다섯이 주님이 말씀하신 살인, 간음, 거짓증거, 사랑의 넷으로 이해되어지면 그게 구원입니다.
 휘장으로 갈라진 둘이 휘장의 찢어짐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성소와 세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휘장이 다섯과 다섯으로 갈라지고 그 다섯이 넷으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열이 다섯으로 그리고 그 다섯이 넷으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그 자리를 안식의 자리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수고에서 벗어나 비로소 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성경의 처음(베레시트, 아르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라 하신 것이고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알파도 주님이시고 오메가도 주님이십니다. 
처음도 주님이시고 나중도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찢기는 휘장을 예수의 육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성도를 둘로 나누고 있는 구렁이 무엇이라는 말이 됩니까? 육신적 예수, 즉 율법의 예수를 말합니다.


 
(히10:20)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의 육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찢어지자 지성소와 세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육적인 예수는 내 밖의 예수를 말하지요? 
그 육적 예수가 찢어지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와야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니까요. 하나님이 사람 밖에서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구렁이 끼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의 계명(말씀)으로 아래의 다섯을 가지고 넷으로 완성하여 사랑으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악한 것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 참 진리를 깨달아 알면 그 열이 아래의 다섯 안에서 보이게 되고
그 아래의 다섯은 넷으로 완성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열둘이 부름을 받고, 그 열둘에게 ‘넷’이 주어지고, 그들은 드디어 ‘칠십’이 되어 그 ‘일곱’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런 연유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세리(텔로네스, 텔로스+오네오마이, 완성을 사다)가 이렇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눅15:1)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가 완성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성경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양식을 제대로 받아먹으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세요.


 
(눅18:10~13)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은 자기의 율법적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지요? 부자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세리가 완성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눅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 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라는 인물이 나오지요? 그 단어는 깨끗한, 순결한’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자카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칼과 네케바’의 ‘자칼’입니다. 
의미는 남성이 되다, 상세히 말하다, 기록하다’ 입니다.
 
‘네케바’가 ‘자칼’을 품으면 ‘아들’이 됩니다. 그 상태를 ‘깨끗하다, 순결하다’라고 합니다. 
그게 ‘삭개오’의 이름이 가진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시지요? 주님이 삭개오의 집(성전)에 그리스도로 들어가시는 그림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깨끗한 자가 되었거든요. 그때 삭개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프토코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삭개오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열을 그냥 열로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리가 거쳐야 할 과정을 다 거쳐서 ‘온전한 깨끗함’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자였던 그의 소유가 무엇이었다고요?  ‘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열의 절반을 ‘프토코스(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답니다. 
열의 절반은 다섯이지요? 그런데 만약 자기가 그 다섯으로 토색한 일이 있으면 충만한 넷으로 넘겨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토색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쉬코판테오’입니다. 그 의미는 ‘거짓으로 고소하다’인데 그 단어는 ‘쉬콘(무화과)’과 ‘화이토(보이다)’의 합성어입니다. ‘무화과로 보여주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섯을 이파리만 풍성한 율법(무화과)으로 전해주어 거짓으로 그 상대방을 고소한 일이 있으면 이제 충만한 넷(테트라플로오스)으로 넘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넷으로 넘겨줄 수 있는 순결한 사랑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삭개오의 에피소드 말미에 이런 말을 하십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그를 구원하러 왔다.’ 
여기에서 ‘잃어버린’이라고 번역이 된 ‘아폴뤼미’는 ‘완전히 파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육을 파괴당한 세리 같은 자들을 찾아서(제테오) 그들을 구원하시는(소조)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에 이른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환난과 기근과 핍박과 곤고와 적신과 위험과 칼로 작용을 하겠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구렁을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말씀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읽느냐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더욱더 진지해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