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6:4-6)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구절은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교회나 신학자들이 자주 인용해서
‘봐라, 구원받은 사람도탈락할 수 있다‘라고 오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도 탈락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라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요10:28)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모순이 되는 구절이 되죠? 히브리서6장의 내용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다가 중도에 배도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이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중도에 타락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일2:19)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예배당 안에서 아무리 경건한 척하고 열심을 부려도 끝까지 그 길을 못 가고 중도에 차를 바꿔 타는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아니었는데
연극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어떤 가면을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4절부터 한번 보지요.
(히6: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여기서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여기서 ‘비추다’라고 번역이 된 ‘프호티조’라는 단어는 ‘가르침으로 지식을 주다, 가르침으로 빛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디모데 후서에 쓰였습니다.
(딤후1: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여기서 복음으로써 드러내셨다 가 바로 ‘프호티조’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히브리서 10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히10:26)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여기서 ‘지식을 받다‘에 쓰인 단어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바른 복음의 내용을 배운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똑같은 경고를 했습니다.
(벧후2:20-21)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복음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해석도 있고 ‘성령’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에서 ‘맛보다’‘규오마이’는 ‘먹다’‘파고’와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요6:50)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27장으로 가면 더 확실하게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27:34)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여기서도 ‘마시다‘’피노‘와 ’맛보다‘’규오마이‘가 대조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맛보다’‘규오마이’는 ‘먹다 혹은 마시다’와 대조가 되는 단어입니다.
음식은 먹고 마셔야 그 다음에 소화를 시키고 영양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라는 것은 하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는 못하고 겉으로 냄새나 맡고 맛이나 본 상태,
즉 돌밭과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13:5-6)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싹도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먹지 못하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겉으로 볼 때 그에게는 싹도 나도 변화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들’도 가짜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참예한’‘메토코스’는 ‘외적인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후서 1장 4절의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코이노노스’와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라는 구절의 의미는 성령으로 난 자들도 아니고 성령께서 그들의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성령의 전이 된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나타남 들의 유익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 곳이 진동했지요? 그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 곳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외적인 성령의 초자연 적인 작용을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 한 사람 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비한 외적 경험 등을 한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 본’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렘29:10)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자들입니다.
(렘15:16)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그런데 여기도 역시 ‘맛보다, 규오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기 때문에 절대 자라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달게 듣기도 합니다.
(막6:20)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말씀을 달게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진짜 신부가 아닙니다.
다섯 번째로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도 역시 가짜 신부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세‘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11:47)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이 설명을 들으시면서 혹 이런 질문이 드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성경의 수신자는 교회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가짜들을 밝혀내어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차피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도 없는데’ 맞습니다. 히브리서의 이 부분은 분명 교회에게 준 경고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목회 적 관점에서 쓰인 서신입니다. 히브리서는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절절한 사랑의 권고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겁을 주기도 하고 아주 달콤하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교회에게 ‘너희들도 가짜일지 모른다.’는 회개의 권고가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권고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올바로 신앙하고 있는 가’를 깊이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고집불통이요 복음에 대해 무지했던 유대인들이 지금 위에 열거한 것처럼 변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기독교 진리를 전해 듣고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나타남‘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작은 싹이 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기술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하고, 그러한 변화된 삶을 살던 사람들 중에서도 중도에 타락을 하여 아예 복음의 외인이 되어 버린 가짜 신부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부분을 읽으시면서 똑같은 회개의 권고를 받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 성도들은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반드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짜 신부들과 우리의 삶이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뭐였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보호를 위해 쌓아놓았던 육신의 습관들이 제거되고, 그렇게 점차 자기가 포기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비워지고 그렇게 자기가 비워짐으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나 때문에 덕을 보고 하나님이 나의 비워짐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옳은 행실이라고 했지요. 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맺어 가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옳은 행실이 맺혀지기 위해서는 자꾸 우리가 포기되고 우리가 비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포기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전히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우리에게 알아지는 것이라 했지요? 노력도 안 해보고 자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우리를 비워 내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늘 실패하고 실수만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비춰 집니다. 난 열심히 사랑해 본 결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포기되니 어느 날 내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나타납니다. 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포기했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용서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나를 바꿔 가시는구나, 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분명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 것은 내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옳은 행실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옳은 행실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자랑과 세상에서의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가 엄청난 체험을 하고 바른 복음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린다 해도 그는 가짜 신부인 것입니다. 지금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목표지점이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진짜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오매불망 기다리시며 스스로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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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ヘブライ 6:4-6)
4 一度光に照らされ、天からの賜物を味わい、聖霊にあずかる身となり、
5 神の素晴らしい御言葉と、来るべき世の力を味わいながら、
6 その後で堕落した者たちを、再び悔い改めに立たせることはできません。彼らは神の子を自分たちの手で再び十字架につけ、公然と恥をかかせているからです。
この一節は、アルミニウス主義を支持する教会や神学者たちがしばしば引用し、「見よ、救われた人も脱落することがある」という誤った解釈に用いられる箇所です。しかし、もしこの箇所が本当に「救われた人も脱落しうる」という警告であるなら、次の御言葉はどうなるのでしょうか。
(ヨハネ 10:28) 私は彼らに永遠の命を与える。彼らは永遠に滅びることがなく、また、私の手から彼らを奪い去る者は誰もいない。
イエス様の御言葉と真っ向から矛盾してしまいますね。ヘブライ人への手紙6章の内容は、イエスを信じると言い、熱心に信仰生活を送るふりをしながら、途中で背教した者たちへの警告です。聖書は彼らを指して「最初は正しく信じていたが、途中で堕落した」とは言っていません。
(ヨハネの手紙一 2:19)
彼らは私たちから出て行きましたが、もともと私たちの仲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もし私たちの仲間であったなら、私たちと一緒に留まっていたはずです。彼らが出て行ったのは、彼らが皆、私たちの仲間ではないことが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した。
礼拝堂の中でいくら敬虔なふりをし、熱心に活動したとしても、最後までその道を歩めず途中で乗り換えてしまう人は、もともと最初から「本物」ではなく、演技をしていたという意味です。彼らがどのような仮面を被ることができるのかを示しているのが、ヘブライ人への手紙6章4節から6節の内容です。
4節から見ていきましょう。
(ヘブライ 6:4) 一度光に照らされ、天からの賜物を味わい、聖霊にあずかる身となり
ここで「一度光に照らされた」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ここで「照らす」と訳された「プホーティゾー」という単語は、「教えによって知識を与える、教えによって光を与える」という意味です。同じ単語がテモテへの手紙二でも使われています。
(テモテ二 1:10) 今や、私たちの救い主キリスト・イエスの現れによって明らかにされました。キリストは死を滅ぼし、福音によって、命と不滅のものとを照らし出された(現された)のです。
ここで「福音によって照らし出された(現された)」というのが、まさに「プホーティゾー」です。つまり、「一度光に照らされた」とは、「福音の教訓によって教えを受けた」という意味です。ヘブライ人への手紙10章にも同様の内容が出てきます。
(ヘブライ 10:26) 私たちが真理の知識を受けた後、あえて罪を犯し続けるなら、もはや罪のためのいけにえは残っていません。
ここで「知識を受けた」に使われている単語も同じ流れのものです。 つまり聖書は、正しい福音の内容を学んだというだけで安心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言いたいのです。ペトロ使徒も同じ警告をしています。
(ペトロ二 2:20-21)
20 もし、主であり救い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によって世の汚れから逃れた後、再びそれに巻き込まれて負けるなら、その後の状態は、最初よりもさらに悪くなります。
21 義の道を知った後、自分たちに伝えられた聖なる戒めを見捨てるよりは、むしろ道を知らなかった方が、彼らにとってはよかったのです。
福音を正しく学んだ人々の中にも、「偽りの花嫁」がいる可能性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二つ目は「天からの賜物を味わい」です。 ここで「天からの賜物」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与えられる救い」という解釈もあれば、「聖霊」を指すという解釈もあります。いずれにせよ、その「賜物を味わった」の「味わう(ギュオーマイ)」は、「食べる(パゴー)」と対照的な単語です。
(ヨハネ 6:50) 50 これは天から降ってきたパンであり、それを食べる者は死なな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27章に行くと、その意味がより明確になります。
(マタイ 27:34) 苦いものを混ぜたぶどう酒をイエスに飲ませようとしたが、イエスはそれを味わった(ギュオーマイ)だけで、飲もうとはされなかった。
ここでも「飲む(ピノー)」と「味わう(ギュオーマイ)」が対照的に使われています。 食べ物は、食べて飲み込んでこそ、消化され栄養となります。「天からの賜物を味わった」というのは、天のパン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食べることなく、外側で匂いを嗅いだり味見をしたりしただけの状態、すなわち「石だらけの地」のような状態を指します。
(マタイ 13:5-6)
5 別の種は、土の薄い石だらけの所に落ちた。土が深くなかったので、すぐに芽を出した。
6 しかし、日が昇ると焼けて、根がないために枯れてしまった。
彼らは福音を聞いて芽が出るようにも見えます。しかし、その福音を食べておらず、深く根を下ろせなかった人々です。外見上は変化があるように見えますが、そのような人々の中にも「偽りの花嫁」がいるのです。
三つ目に「聖霊にあずかる(あずかる身となった)」者たちも、偽物である可能性があると言います。ここで使われている「あずかる(メトコス)」は、「外的な同伴者」という意味です。 これは、ペトロの手紙二1章4節の「神の性質にあずかる(コイノーノス)」とは全く異なる単語です。 つまり、「聖霊にあずかる身となった者」という句の意味は、聖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でも、聖霊がその内に働いて聖霊の宮となった人でもありません。単に外的に、聖霊の超自然的な作用や現れによる益に同席したことがある、という意味に過ぎません。
五旬節の聖霊降臨の際、その場所が振動しましたね。そこにいた人々は全員救われていましたか? いいえ、違います。しかし、そこにいた全員が外的な聖霊の超自然的な作用を経験しました。イエス様が10人の重い皮膚病の患者を癒やされましたが、戻ってきて感謝を捧げたのは一人だけでした。それでも、10人全員が聖霊の超自然的な作用を経験したのです。まさにそれと同じです。聖霊の超自然的な奇跡や神秘的な外的経験をしたこと自体は、信仰の内容にはなり得ません。奇跡を経験し、奇跡を起こす人々の中にも、いくらでも「偽りの花嫁」が潜んでいる可能性があるのです。
四つ目に、「神の素晴らしい御言葉を味わった」人々の中にも偽物がいます。 これはエレミヤ書の引用です。
(エレミヤ 29:10) 主はこう言われる。バビロンに70年が満ちる時、私はあなたたちを顧み、私の善い(素晴らしい)約束を果たして、あなたたちをこの場所に戻らせる。
そのように神の善い御言葉に従って神の元に戻る者たちは、神の御言葉を食べて受け入れた者たちです。
(エレミヤ 15:16) 万軍の神、主よ、私はあなたの御名で呼ばれる者です。私はあなたの御言葉を見つけ出し、それを食べました。あなたの御言葉は、私の喜び、心の楽しみとなりました。
ところが、ここ(ヘブライ6:5)でもやはり「味わう(ギュオーマイ)」という単語が使われています。ジョン・オーウェン牧師は「そのような者たちは、神の御言葉を味わうだけで(飲み込まないため)、決して成長しない」と述べています。彼らは神の御言葉を、耳に心地よく聞き入れることもあります。
(マルコ 6:20) ヘロデはヨハネが正しく聖なる人であることを知って、彼を恐れ、保護し、その教えを聞くと非常に悩みながらも、喜んで(甘く)聞いていたからである。
御言葉を喜んで聞くからといって、全員が「真実の花嫁」ではありません。
五つ目に、「来るべき世の力を味わった」人もやはり偽物である可能性があります。 ここで「来るべき世」とは、旧約の預言に従って来られたイスラエルのメシアを通じて到来した新しい時代を指します。 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地に来て、多くの奇跡やしるしを行われるのを経験しました。しかし、多くの人々はその奇跡を見て、むしろイエスを殺そうとしたことを思い出してください。
(ヨハネ 11:47) そこで祭司長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最高法院を招集して言った。「この男は多くのしるしを行っている。どうすればいいのか。」
この説明を聞きながら、「聖書の受取人は教会ではないのか? ならばなぜ、あえて偽物を暴き出し、警告するのか? 彼らはどうせ聖書を読んでも理解できないのに」という疑問を抱く方もいるでしょう。その通りです。ヘブライ人への手紙のこの部分は、明らかに教会に向けられた警告です。ヘブライ書は牧会的な観点から書かれた書簡です。聖徒を想う牧会者の切実な愛の勧告です。ゆえに、時には度を越すほどに怖がらせ、時には非常に甘く愛を表現したりします。ですから、ヘブライ書にはこのように教会に対して「あなたたちも偽物かもしれない」という悔い改めの勧告が何度も登場するのです。ユダヤ教から改宗したヘブライ人たちは、そのような勧告を聞きながら、「私は今、正しく信仰しているか」を深く自問自答したのです。
考えてみてください。あれほど頑固で福音に無知だったユダヤ人たちが、今、上に列挙したように変わったとしたら、どれほど大きな変化でしょうか。キリスト教の真理を聞いて光に照らされ、天の賜物を味わい、聖霊の超自然的な奇跡を直接経験しました。そして彼らの中に小さな芽が出たのです。どれほど素晴らしい変化でしょう。しかし、そのような人々がすべて「新しく造られた者」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のがヘブライ書の記述なのです。
実際に、キリスト教に帰依したと言い、変化したような生活を送っていた人々の中でも、途中で脱落してしまい、完全に福音の外の人となってしまった「偽りの花嫁」が非常に多くいたことを、私たちは聖書を通じて知ることができます。皆さんも、この部分を読みながら同じ悔い改めの勧告を受けるべきです。皆さんは自信がありますか? 神様は間違いなく、私たち聖徒をあの「小羊の婚宴」に必ず立たせてくださいます。だとしたら、そのような偽りの花嫁たちと、私たちの人生に「何か違う点」がなければなら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
それは何でしょうか。本日の御言葉は、それを聖徒たちの「正しい行い」として提示しています。聖徒たちの正しい行いとは何だったでしょうか。 「神を離れた者たちが、生まれながらに自己防衛のために積み上げてきた肉の習慣が取り除かれ、徐々に己を放棄することによって己を空にし、その空になった場所に隣人が恵みを受け、神が栄光を受けられること」でした。その正しい行いは、私たちが作り出すものではなく、神様が私たちの内で結ばせてくださるものです。
しかし、その正しい行いが結ばれるためには、絶えず己を放棄し、己を空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己を放棄するためには、自分がいかに不可能で醜い人間であるか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事実は、私たちが最善を尽くして神の御心にかなう生き方をしようと努める中で、自覚されるものです。努力もせずに、自分が不可能な存在であることなど分かりません。 一生懸命に努力する中で、自分の不可能性を発見し、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陰に隠れるしかない存在であることを自覚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な自覚が己を空にし、私たちの内におられるイエス・キリストを外に現すのです。 「私はいつも失敗してばかりだ」と思っていたのに、ある日、自分の内に「愛」が少し照らし出されます。「自分には到底愛することなどできない」と悟り、己を放棄した時、ある日、愛が少し現れます。絶対に許せない存在だと思って諦めていたのに、ある日、自分の内に「許し」が出てきます。その時、私たちは驚くのです。「イエス様が、このように私を変えてくださっているのだ」と感激するのです。それは確かに自分の努力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が、自分の努力(葛藤)を通じて成し遂げられるものです。
ですから、正しい行いとは、私たちが一生懸命に努力すべきものであると同時に、「神様がすべて成し遂げてくださる」という論理が成立するのです。しかし、そのような正しい行いへの熱望も、神の子としての自覚や反省も全くなく、ただ己の自慢とこの世での成功だけに没頭している人は、たとえどれほど驚くべき体験をし、正しい福音を学び、熱心に活動したとしても、彼は「偽りの花嫁」なのです。今、確認してください。
あなたの目標地点はどこですか? あなたは本当に、あの「小羊の婚宴」を今か今かと待ち望み、自らを整えておられる方々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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