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존재여서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세례의 능력이다(갈 3:27). 즉 그리스도의 세례를 믿는 믿음에 개인은 없고 ‘우리’라는 하나의 관계가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다. 이처럼 세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 성향이든 특성이든 의미가 없다. 개인이 드러나고 자랑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자랑 되는 것이 세례로 한 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 몸의 관계가 우리의 죄를 자기 피로 속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사랑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개인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일하신다. 그러므로 성경도 믿음도 구원도 각자 개인이 아니라 한 몸의 관계인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위한 나로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자기를 지키거나 소유를 확장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것으로 간주 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을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은 것으로 연결하여 말한다.
교회가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정의 달’ ‘가정 주일’의 단골 본문으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세상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패륜을 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문은 자기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잘 돌보는 것이 바른 믿음이고 사랑이라는 뜻으로 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가족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믿지 않는 가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설교를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문자적인 뜻으로 받아들이면 바울의 말과는 분명 충돌된다는 점에서 우리를 곤란하게 한다. 그런데도 상반되는 것 같은 말씀에 담긴 일관성을 생각하지 않기에 문자적 의미에 치우쳐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하면서 성경의 일관성이 사라지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버리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가족을 버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영생의 문제를 가장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적당히 해석하고 넘어간다.
예수 안에서는 세례로 하나 된 관계만 인정된다. 영생은 이 관계에 속한 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가족이라는 세상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 세상의 가족 관계에서 성이 다르고 부모가 다른 사람은 타인이지만 사랑의 공동체인 하나의 관계에서 타인, 즉 이방인은 육체적 관계와 조건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가족 관계를 인정한다거나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참된 믿음의 행함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가르치는 인간이 행할 도리, 유교 사상의 수준일 뿐이다.
먼저 주지해야 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이 과부에 관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과부는 의지하던 남편을 잃어버린 자라는 점에서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데 과부가 나의 친족, 특히 가족이라면 내가 돌봐야 한다는 책임과 부담을 피할 수 없다.
부모나 형제가 세상에서 돈과 권세, 즉 힘을 가졌다면 그러한 가족은 가까이하려고 애를 쓴다.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부가 가족이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도와줘야 할 부담이 되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족 안에 가족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과부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임을 가르치기 위해 있게 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무능한 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믿음을 배반한 것이다. 믿음은 성도를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생존이 가능한 무능한 자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합당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멸시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로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랑의 공동체는 십자가의 피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가는 힘 있는 자는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과부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서로가 과부로 만나고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형편과 소유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더 많이 가진 자신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가족을 돌보지 않은 믿음을 배반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무시하는 믿음을 배반한 자로 드러난다.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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