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복음 나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행 4:32)

Hebrew 2024. 12. 17. 19:36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2)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고 말씀하신 교회다. 따라서 교회의 교회 됨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생각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실태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회 개혁을 외친다. 이들은 교회가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고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바른 교회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발생하는 교회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는 초기 공동체 이야기는 현대 교회가 당연히 본받아야 할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여 요구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성경적으로는 교회가 보여야 할 믿음의 옳은 모습으로 인정은 되면서도 현실의 삶에서 실천할 수 없음을 알기에 개인의 실천 사항으로 강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지켜야 할 자기 것이 많은 목사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신앙 공동체의 뛰어난 수준의 삶을 무시할 수 없기에 개인의 실천이 아니라 교회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한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나누는 초기 교회를 본받아 교회는 돈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구제에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상관없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왜곡된 교회관이다. 

 

교회는 곧 성도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성도가 교회라는 점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성도를 의로운 자로 여김받게 한 십자가의 의가 존재 근원이기에 성도는 그의 행함과 무관하게 피의 은혜 안에서 이미 의로운 자다. 

 

그렇다면 성도는 개혁되고 성화 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성도, 즉 교회를 개혁하여 교회답게 만들자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피로 이루신 은혜의 일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죄인 됨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함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믿는 자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삶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것을 성령의 역사, 참된 순종,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강조하면서 현대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삶을 비슷하게라도 흉내 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러한 생각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이 인간 내부에 이길 수 없는 권세로 작용하는 죄가 있음을 의미한다. 십자가보다는 교회가 인정받고 자랑이 되고, 그 결과로 교회가 부흥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 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행 2장에서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단지 내 것 네 것이 없이 서로 통용하고 나눠주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 생활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사람이 그러한 뜻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시작한다 해도 결국 자기 것을 주장하는 죄의 권세에 끌려가게 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교회관으로 요구되는 내용이 아니다. 

 

본문을 보면서 이상적인 교회를 이루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이야기 다음에 자기 것에 집착함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무리가 큰 은혜를 받으므로 나타난 것이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고 은혜다. 부활의 세계에 속한 성도에게는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모습은 인간의 믿음으로 행한 실천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므로 나타난 결과다. 하지만 은혜를 받았다면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령과 같은 은혜를 받은 성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의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부활은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 부활의 은혜는 가졌다 가지지 못했다는 기준을 무너뜨린다. 가졌다는 것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죽은 자가 십자가의 의로 생명을 얻고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는 없다. 부활의 능력에 의해 죄에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함께 할 뿐이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 준다 해도 자기 것을 베푸는 행함이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면 이들은 주가 베푼 주의 것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서로 통용하고 나눈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는 믿음이든 재물이든 나의 것이 되어 나의 자랑이 되는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지체로 함께 하여 주의 것을 서로 통용하고 나눠줄 뿐이다. 이처럼 믿는 무리를 한마음과 한뜻의 교회가 되게 하여 나타내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