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복음 나눔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마21:19)

Hebrew 2024. 9. 24. 16:55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19)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하고,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는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니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자기 믿음에 대한 불안감으로 행함에 시선이 향한다. 

 

그리고 산 믿음을 증명하는 행함이라면 일반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경건성과 도덕성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준 높은 행함에 열심을 낸다. 이것을 믿음의 열매로 알고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믿음의 상식이자 틀이다. 

 

문제는 이러한 믿음은 이미 유대 사회에서 누구도 추월할 수 없을 정도로 실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유대인 속에 참된 믿음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이 자랑하는 믿음이 믿음 아님을 폭로하신다. 이 모든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우리의 거짓된 믿음을 지적하신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이것이 무화과를 저주하신 이야기의 내막이다. 

 

무화과 사건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일을 우리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생각이 다르고 또한 다른 길에 있다는 뜻이 되기에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생각이 다른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이 예수님과 단절되어 있다고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예수님은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며 그들의 출생에 대해 말씀한다. 이 또한 유대인의 믿음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부하는 유대인에게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폭언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힘쓴 시간과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단절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신의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런 망상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지적하신 것으로 보게 한다. 열매 없는 것이 당연한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가 원하실 때 드리는 주의 때를 살아야 한다는 그럴듯한 말도 만들어 낸다.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묻는다. 제자들은 생생하던 나무가 곧 말라버린 신기한 현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의 일을 이상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야 할 큰 잘못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자기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행함을 살핀다.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없으면 믿음은 정당해지고 하나님께로 연결되어 기도에도 응답하신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그런데 별문제가 없는 자신이 나쁜 사건을 겪게 되면 그것을 이해할 사람은 없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제자들의 시각이고 유대인의 시각이며 욥의 시각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각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각이 악하다는 것을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으로 보이신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무화과나무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무화과나무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만약 열매를 맺을 때인데도 열매가 없고 잎만 있었다면 나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열매가 있을 때가 아니니 이상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시각과 판단을 무시하고 나무를 저주하고 마르게 하신다. 우리는 문제없다고 보는 것을 예수님은 저주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없다. ‘때가 되면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무화과나무의 입장, 즉 인간의 관점에서 자신을 옹호하려는 악한 속성임을 눈치채야 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을 수 없는 나무의 운명은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전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데 저주를 받아 맺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본래 저주받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악한 것으로 심판받는다는 것이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로 증거되는 믿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저주받아 열매 맺을 수 없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우리에게 행함이라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인간의 자리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참된 믿음을 믿음으로 알아보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종교성과 상식에 맞는 믿음이 이미 굳건히 자리한다. 이러한 인간의 믿음을 부수고 나 자신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운명에 일치시킴으로 ‘나는 저주받은 자로 예수님이 찾으시는 열매를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의 능력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보는 것이 무화과나무에 된 일을 하는 것이고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되는 세상에 없는 기적의 사건, 즉 믿음의 영역으로 말씀하신 것이다(21절).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22절)는 말씀에서의 믿음도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나를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처지로 보게 하는 참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는 구한 것을 다 받은 자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열매로서의 성도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