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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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눔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Hebrew 2024. 7. 27. 19:24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현대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생각과 지식과 욕망을 성경에 막무가내로 연결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 결과로 성경이 증거하는 의미와 목적은 상실되고 인간의 뜻이 복음이라는 옷을 입고 진리인 척 행세한다. 여기에 자기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믿음으로 강조되는 현실이다. 이 열심 또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성도에게는 열심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종교적 열심과는 다르다.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인간으로 행할 수 없는 열심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에게 있는 열심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성령의 행함으로 믿는다. 자신의 열심이 아니기에 당연히 믿음의 증거로 자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믿음이든 행함이든 그것을 자기 자랑을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면 그는 성도가 아니다. 그러면 성도의 열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유월절이 가까운 날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이 성전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팔고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고 한 성경 말씀을 기억한다. 

 

시 69:9절에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한 것이다. 그 말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예수님의 일을 시편의 이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했다는 뜻이 된다. 

 

제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시편의 말씀을 기억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과 ‘나를 삼키리라’라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무엇이며 그 열심에 삼켜지는 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의 집은 곧 성전을 말하는 것인데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주의 집을 위하는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주의 뜰에 들어올 수 없는 자를 주의 뜰에 있게 하신 주의 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인간, 즉 다윗의 열성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성일까? 다윗은 언약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다윗 자신의 힘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주의 뜰에 살게 되는 복 또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의 뜰에 거하게 된 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드러난 성전의 아름다움이 만족이 된다.

 

따라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다윗이 행하는 열성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열성으로 인해 원수들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받는 자신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하나님의 열성이 다윗을 삼켰다는 뜻이 되고 이 일이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주의 집을 위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킨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주의 전, 즉 성전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을 뿐 인간의 열심은 없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의 성전을 향한 열심은 참된 성전을 알지 못한 인간의 잘못된 열심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인간의 성전을 위한 열심, 성도의 열심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열심을 나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열심을 믿음으로 알고 자기 열심의 정도로 믿음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 열심이 결국 교회를 위한 열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성전 열심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저주를 홀로 받으신 사건이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에 거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날수록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가 강하게 부각 되고 증거된다. 이것이 성전의 아름다움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언약의 완성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으신 것은 장사로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해서 성전을 성전답게 만들고자 하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참된 성전으로 오셨기에 성전 정화, 성전 개혁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어차피 참된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사하는 일을 돕는 열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열심으로 성전 되는 것이 아님을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내신 것으로 보이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반발과 함께 고난받으실 것을 생각한 제자들이 시편의 말씀을 기억한 것이다. 

 

바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성전 된 성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취된 십자가의 용서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열심과 선함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의 열심에 삼켜진 것이 성전 된 성도다.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죽이시고 그 자리에서 주의 용서만 드러나게 하신다. 따라서 성도의 열심은 죽음의 자리에서 주의 용서로 감사하고 주의 의만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신윤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