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복음 나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시 81:10)

Hebrew 2024. 7. 24. 19:36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시 81:10)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보였다는 것 자체가 사탄의 뜻에 합류되어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으로서의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욕망에서 벗어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성은 자기를 위해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대항하는 존재로 말하는 것이 옳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욕망이 작용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입을 크게 열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신다’라며 입을 크게 여는 것을 믿음으로 말하기도 한다.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면 입을 크게 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입을 크게 열 것인가?’에 대해서 기도의 입, 감사의 입을 크게 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이 작용한 해석의 실체다. 

 

이러한 해석을 들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며 입을 크게 열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원하지도 않았다고 한다(시 81:11). 이러한 반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워주신다는 소위 축복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의 이유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인도받을 때는 애굽보다 나은 새로운 삶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믿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돕고 보호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불신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고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경험한다. 이것을 입을 크게 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이유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신들이 믿고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것부터 그들의 뜻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애굽 땅에 살면서 그곳의 삶에 익숙해진 상태다. 나름대로 평온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모세의 등장으로 평온이 깨어진다. 애굽에서 나온 후의 삶 또한 이스라엘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죽음의 위기와 고통의 연속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니’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감사하고 찬송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들 또한 욕망하는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분리해 내신 작업이다. 애굽이 죽음의 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에서 분리되어 구출 받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며 이 작업에 어린양의 죽음이 동원된다. 

 

어린양의 죽음이 동원되는 것은 이스라엘 또한 죽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 것이 그들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는 것에 애굽과 다르다는 차별성을 둔 것이다. 만약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애굽과 다른 인간으로 인정하셨다면 출애굽 사건에 어린양의 죽음은 없어도 된다. 

 

죽음의 존재인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구원의 효력은 어린양의 피에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홍해라는 죽음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다는 증거다.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지 않기에 죽음의 위기 앞에서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겪는 일들도 부당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를 동원하여 죽음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지 못한 무지의 증거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인도받으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적이 없다. 오히려 괴로운 길로 인도하면서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것을 채우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원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아무리 크게 연다 해도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험한 것이다. 

 

애굽에서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애굽 밖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채우리라’라는 말씀은 애굽에는 없는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뜻이 된다. 즉 죽음의 땅에는 없는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을 크게 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것에 눈이 열린 자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 입을 크게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을 크게 열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신자로 만들기 위해 하시는 일이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의 뜻이 무너짐을 경험하는 자가 신자다.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은 감히 우리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입을 크게 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용서의 은혜고 사랑이다. 이것이 애굽에 없는 것을 주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우리를 이 축복에 있게 하려고 우리의 욕망에서 나오는 죄를 보게 하신다. 인간은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저주받을 것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 죽음에서의 구원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