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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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8)

Hebrew 2024. 6. 26. 20:13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8) 

 

이스라엘의 종교적 우월성은 그들만의 고유한 역사에서 나온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조상들의 이야기와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그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들의 역사 속에 오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자신들의 역사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고귀한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하여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존재하지만 그 역사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역사 가치가 무시되고 손상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으로 역사를 지킨 것이다. 

 

바울도 이스라엘에 대한 투철한 역사관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였다. 그런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이스라엘에 대한 시각이 역사에서 언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역사가 아닌 언약의 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만의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수립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가 아닌 언약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이고, 만약 역사 시각으로 보게 되면 성경으로 성경을 부인하는 결과가 필히 발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서 기록 연대를 따지면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 진정성을 두고 그 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와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성경을 참고한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마가복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참고했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은 마태와 누가의 개인적 주장이며 거짓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내용이 없이 처음부터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방 나라인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말하는 마태의 이야기는 문제가 있다고도 말한다.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김용옥의 마가복음 해석 내용). 이것이 성경으로 성경을 부인하고 난도질하는 괴변 중의 괴변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구약의 완성, 즉 언약의 완성을 담고 있으며 이 완성을 구원의 근거로 증거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언약의 완성이 없는 해석에서는 십자가 복음이 나올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서 나사렛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을 두고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라고 말하는 의미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말씀한다. 부활하신 후의 단순한 행적을 미리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보게 되지만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구원의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소홀히 넘길 내용이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가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보다 먼저 가신다는 것은 제자들 모두 갈릴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 것으로 드러나는 구원 사건은 무엇인가? 이 모든 물음은 역사로는 절대 풀 수 없다. 

 

갈릴리로 가신다는 말씀 앞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말씀이 있고, 뒤에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라는 베드로의 자신감 넘치는 장담이 있다. 다시 말해서 ‘다 나를 버린다’라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신뢰하는 제자들 속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간다’라는 말씀이 개입하는 것이다. 

 

사 9:1절에 보면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한다.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아가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말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지칭하는 것을 단순히 나사렛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 시각이지만, 언약의 시각에서는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시는 언약의 완성으로 해석된다.

 

사 9:2절에 의하면 이방 갈릴리는 사망의 그늘진 땅, 즉 어둠이다. 그리고 이 땅에 빛이 비친 것이 영화이고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빛을 보고 빛에 속한 자 되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구원의 완성이다. 빛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흑암에 행하던 자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바울은 이들을 ‘빛의 자녀’로 말한다(엡 5:8).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둠을 향해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들어가신다. 이렇게 빛이 어둠을 비춤으로 어둠의 속성이 드러난다. 아무것도 아닌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들 유대 역사에 고고히 흐르고 있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예수를 제거한 것이 어둠의 속성이다. 

 

요 1장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이방 갈릴리를 어둠으로 보는 유대인 시각이다. 하지만 언약의 시각에서는 자신을 빛으로 평가하는 그들이 흑암에 행하는 이방 갈릴리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누가 유대인인가?’에 대해서도 필히 변동이 발생한다. 빛이 비침으로 자신을 흑암에 행하는 어둠으로 보게 되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참된 유대인이다. 빛의 자녀인 성도가 참된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께 속한 유대인으로 언약적 존재로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 자랑한다.

 

따라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말씀에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라고 답하는 제자들이 어둠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난 후에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은 어둠을 영화롭게 하는 빛의 세계는 제자들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언약의 사건과 이야기를 역사 시각으로 해석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훼방이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