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유대교 신앙에서 부자는 축복의 증거로 여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에게 부여된 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저주로 의미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자는 구원받은 자로도 인식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니 구원도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것도 하나님께 복 받은 자로써 영생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한 일을 더 하여 자신의 영생을 확고히 다지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 중심의 구원관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으로 단호히 차단한다. 부자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낙타가 본래 ‘밧줄’ ‘갈대’ ‘막대기’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실을 제외하고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로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방식과 일하심에 마음을 두고 감사하고 찬송하면 된다. 이 일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구원 또한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제자들이 들어보지 못한 생소하고 낯선 구원관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는다. 부자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부자보다 못한 자신들의 구원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예상하고 희망을 두는 구원의 방식은 모두 버려져야 할 허구다. 구원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저주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실천에 의한 결과이고 혜택이기 때문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생명의 길이 차단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을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알리신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에서 인간이 개입하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품고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부자 청년처럼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라며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결국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신다’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이 버려지지 않은 인간의 믿음은 십자가를 훼방하며 구원이 아닌 멸망으로 끌어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인간이 믿음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극한의 오해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확신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봉사, 구제, 선교, 희생 등등의 실천이 구원받는 참된 믿음의 실체로 작용함으로써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라는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가 믿음으로 강조되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다’가 현대 교회에서 참된 믿음의 정설로 확고하게 굳어져 결국 거짓된 것에 이끌려 멸망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사탄이 역사하는 현실이다.
인간의 인간 됨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일로 심령에 새겨진 자가 성도다. 누구도 이러한 성도 됨을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행함이 있는 것을 성도 됨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다 버렸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다 버리고 주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가능성은 버리지 않고 지키는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버렸다’라는 자신의 실천으로 ‘사람이 할 수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음을 모른다. 이것이 자기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으로 행하는 것은 예수를 죽인 십자가 사건이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세상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비현실의 사건인 것처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비현실이다. 이처럼 비현실을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만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세상이라는 현실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을 현실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로 들어가심으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의 사건,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절망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비현실을 현실이 되게 하신 예수님의 수고 앞에서 인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으로 돌리게 한다.
인간에게 구원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주로 들어가심으로 비현실이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로 부름을 받은 자가 성도다. 하지만 예수를 죽인 자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한 것일 뿐이다.
성도는 십자가라는 현실에서 날마다 예수를 죽인 원수로 지적받으며 숨겨진 죄까지 낱낱이 드러난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로 예수님이 이루신 은혜의 일이 전부가 된다. 그렇게 하나님은 성도에게서 인간의 모든 일을 빼앗으시고 하나님의 일만 남기신다.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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