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2번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마: 5: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아멘.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TV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친구가 출연한다고 하는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봤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더군요. 그 옛날의 치기와 당당함도 많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인터넷 뉴스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프로그램의 성격을 대충은 감 잡고 있었지만 실제로 한편을 다 보고 나니까 참 여러모로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나는 가수다>, 라는 제목에 걸맞게 ‘나는 가수다’, 라고 자부할 수 있는 라이브 가수 일곱 명을 뽑아서 순위를 매기고는 맨 마지막 순위에 걸린 사람은 탈락시켜 가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어요. 젊지 않은 나이에 그런 프로그램에 나와서 어린 후배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그런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 프로그램 안에서 인간 역사의 실체와 성도의 신앙 여정이 읽혀지는 듯해서 나름 재밌게 봤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가수들이 있어요. 그들은 저마다 나는 가수다,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챙겨 갖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가수다, 라는 울타리 하나를 만들고는 일곱 명을 택해서 그 울타리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 밖에 수많은 자칭 가수들을 ‘가수 아님’으로 규정해버리죠. 나는 가수다, 라는 울타리가 정해짐으로 그 울타리 밖은 가수라고 우기기는 하지만 립싱크를 하면서 가수 흉내나 내고 있는 사이비들의 장이 돼버리는 거예요. 당연히 그 울타리 속 가수들은 기고만장하게 되죠. 마치 자기들안에 가수라는 능력이 사유 화 되어서 자신들이 가수로 인정이 되는 것처럼 자기가 자랑스러울 겁니다. 그래서 그 자기자랑의 장에서는 저마다 품고 있던 전가의 보도를 필살기로 꺼내들었죠. 그리고는 그것을 휘둘러서 나머지 상대들을 전부 다 기암 시켜버릴 기세로 결연한 투지를 불사릅니다. 근데 문제가 발생해요. 나는 그렇게 자신의 가수 됨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외부의 평가단이 자신의 가수 됨의 여부를 결정짓는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내가 가진 것이 마냥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외부의 평가단이 나와는 다른 평가기준을 가지고 나의 가수 됨을 결정짓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 가순데 외부의 평가단이 너 탈락, 하면 그 사람은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졸지에 ‘나는 가수다’에서 ‘나는 가수 아니다’의 자리로
위치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 나온 가수들의 인터뷰를 다 들어봤는데 여추일구로 나는 그동안 내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절대 나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아, 나의 가수됨은 나를 가수로 인정해주는 어떤 타자의 뜻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가수를 가수 되게 하는 건 관객과 청중과 대중의 기호에 의한 것이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우기는 자기의 실력이나 내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가수 됨에 자신이 있는데 대중이 너 가수 아냐! 라고 하면 그 사람은 가수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가수의 명찰은 대중이 달아주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본질이에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저마다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구원을 받아야 된다. 내가 세상의 왕이니까. 나는 하나님처럼 된 존재니까. 이렇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극히 소수만이 구원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초청을 받아요. 그리고는 그 울타리 속에서 전쟁이 벌어지죠?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을 더욱 높이고 드러내기 위한 ‘나 예수 믿었어.’ 의 전쟁이에요. ‘나 믿었어,’나 자격 있어, 의 전쟁이 울타리 안, 교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니까요.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은 내가 개발하고 투쟁하고 쌓아서 빛이 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 밖의 어떤 분에 의해서 결정되고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신상생활을 통해서 점점 발전하고 계발되고 성숙되는 자신을 감지하기 이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도 아닌 것이구나, 를 먼저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수없는 탈락의 경험이 그에게 닥치게 되는 거예요. 그 때마다 성도는 아, 이게 다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거구나, 이런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전부 기고만장하여 내가 가수야, 내가 일등이야, 하고 왔던 그들이 대중에 의해, 타자에 의해 너 탈락! 그러면 어, 나 가수 아닌 거야, 그럼? 이걸 경험하면서 그 기고만장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그 탈락의 경험을 교회 안에서 나 예수 믿었어, 의 전쟁, 그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각자가 다 경험해야 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나 아니구나!
그 믿음이라는 것. 나의 신앙인 됨, 성도됨은 나에게 사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거구나. 믿음이라는 거, 신앙이라는 건 내가 이렇게 품어서 저수지처럼 내가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언제든지 꺼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수돗물처럼 하늘에서 쏟아 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끊기면 끝나는 거지 여러분의 저수지처럼 여러분이 믿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믿음을 사유하여 나는 성도될 자격이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지면 거기서 쓰레기 되는 거예요. 설교자? 마찬가지에요. 성도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자꾸 우리는 사람에게서 자격을 찾으려고 해요.
저 사람 목사 자격 있나? 저 사람 장로 자격 있나? 저 사람 성도 자격 있나? 이런 자격을 찾아내려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자기가 설정해놓은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저 사람 아냐. 라고 자기가 판단을 해버려요. 그거는 크게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이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나의 영적 가난함을 감지하고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을 이야기해요. 내 안에서는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 그걸 심령의 가난함, 마음의 가난함이라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자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가장먼저 복 있는 자여! 복 있는 자여, 그대는 심령이 가난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건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나오는 거예요.
복 받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밀려가게 되는 목적지가 바로 심령의 가난이라는 목적지라는 거예요. 그건 육적인 인간의 죽음이라는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심령의 가난을 겸양의 미덕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욕심을 버린 겸손한 마음, 뭐 이 정도로 이해를 해요. 그런 것들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하여서 익히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열심히 추구하고 수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지로 그걸 수련을 통하여 성취해내기도 한다니까요.
불교의 공사상 같은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게 다 공허한 것이므로 물의 세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웃을 선대하며 욕심을 다스려 해탈에 이르라는 게 불교의 공사상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것이 그런 것일까요? 그러한 공사상 류의 겸양과 심령의 가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세상의 겸양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칭찬을 받아요.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인간의 행위의 표준으로 삼으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열심을 부려서 성취해낸 것이기 때문에 그걸 표준으로 삼을 수 있고 여기에 미달하는 것을 내가 정죄할 수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러한 것을 열매로 맺지 못한 사람들의 게으름을 함부로 나무라죠? 하지만 심령의 가난은 자신이 자신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는 것이고 외부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비교우위의 우월감을 챙겨가질 수도 없고 더욱이 그러한 것을 인간 삶의 표준으로 제시하거나 심지어 생각할 수조차 없는 거예요.
심령의 가난은 심령을 가난하게 해야지 하고 결단을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심령의 가난은 자기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 나는 이런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는 이 자각. 이게 심령의 가난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존재들의 그 제한성과 한계와 불가능함을 직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심령의 가난은 곧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부르짖음으로 연결이 되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겸양이나 겸손, 공사상 등은 인간 육신에서 나오는 거지만 심령의 가난은 성령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전자는 하나님 없이도 될 수 있어요.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길로써 제시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거는요. 겸손해야 돼. 욕심을 버려야 돼. 이런 건 인간의 육신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거고 수련해서도 나올 수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심령의 가난은 오히려 그러한 인간의 선한 행위와 노력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로 카운트 될 수 없다, 라는 걸아는 거예요. 따라서 심령의 가난은 자아의 무너짐이요 자아의 부정이며 육적 인간성의 붕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거예요. 그러한 자아의 무너짐과 부정 없이 그냥 나는 죄인 중의 괴숩니다, 이건 연극입니다.
이사야서로 가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자인지가 잘 묘사가 되어 있어요.
사 41:17-20
가련하고 빈핍한 (빈핍한 자가 가난한 자예요)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18.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여기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갈증이 나고 혀가 마르고 배가 고파서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신대요. 왜 그렇게 하신다고요? 20절이 답이에요. 그들이 여호와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지어진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완료된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가난하게 한다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에게 응답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내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겠다는 뜻이거든요. 가난한 자들만 찾아가서 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 백성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 백성은 이 역사 속에 보내서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자, 목마른 자로 만들어내겠단 뜻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여정을 통해서 아, 나는 내 힘과 능력과 공로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라 외부의 평가단에 의해서 성도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피동적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알고 그 외부의 주권자와 평가자의 능력과 영광을 인정하고 그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라고 마음을 가난하게 빈핍하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은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모든 성도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내 의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선물해주신 의로 사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밀고 내려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가득차야 된다는 건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라는 고백이잖아요?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그게 가난이란 말입니다. 심령의 가난.
사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도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고 그러죠? 아름다운 소식이 뭐예요? 굳 뉴스! 복음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근데 이유가 뭐예요? 3절에 그들에게 의의 나무, 여호와가 심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여호와가 심으신 그 의의 나무, 그의 영광을 여호와의 열심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 내려 보내셔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만드시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만을 찬송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가난한 심령의 자리로 끝없이 밀려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 그러죠? 그러니까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아무것도 기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한 군데만 더 보죠.
사 66: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누가? 여호와가. 창조의 시작이며 끝이란 뜻이에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여기에도 마음이 가난한 자와 제사를 열심히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어요. 근데 제사를 하나님이 이렇게 평가를 하세요. 그 형편없고 더러운 것,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시작이 되어서 완료가 된다는 걸 인정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고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렇게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을 제가 예로 하나 들어드릴 게요.
시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게 누구의 시편 같으세요.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이 시편을 썼을 때도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근데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가난하다 궁핍하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의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을 가리키는 거죠? 다윗이 자기는 마음이 가난한 자다, 그러면서 뭐라 부르짖어요? 나를 도와주세고 나를 건져주세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어디서 건져달라는 거예요? 죄에서 건져달라는 거예요.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부르짖음을 토해내게 되었습니까? 시편 51편으로 가면 다윗의 심령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가난하고 빈핍하게 되었는지 잘 나와 있어요.
시51:1-3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 죄, 죄, 죄. 계속 죄가 나오죠?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해서 아이를 낳은 후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고 있었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버렸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게 되고 자각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그런 시편이에요. 1절부터 3절 사이에 ‘하타’와 ‘페솨’ 라는 단어가 번갈아 쓰이는데 다 죄예요. 죄인데 ‘하타’는 복수고 ‘페솨’는 단수에요. 그는 그 다음에도 ‘헤트’나 ‘아본’ 같은 단어들이 죄라는 단어로 번갈아가며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단어들도 단수로 쓰였다가 복수로 쓰였다가 정신이 없어요. 다윗은 지금 사건 화되어서 밖으로 터진 죄를, 죄의 증상들이에요. 죄들과 그 죄들, 그 죄들의 뿌리인 본질적인 죄, 단수죠. 그 죄를 따로 구별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죽인 죄들, 그 죄들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고 있지만 자신의 본질과 속성을 채우고 있는 근본적인 그 죄를 직시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거예요.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이 죄의 생산 공장이었구나, 를 알게 됐어요.자기가 지은 죄들로 말미암아. 2절을 보시면 다윗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해 달라’ 고 읍소를 하는데 거기에 쓰인 죄라는 단어들이 전부 단수에요. 그리고 3절의 죄과는 복수고 내가 항상 죄 앞에 있습니다, 에서의 죄는 또 단수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지금 다윗은 자기의 삶 속에서 사건 화되어 터진 죄들을 통해서, 그건 우리가 죄라고 합의해놓고 정의해놓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죄들을 통해서 자신의 근본적이며 속성적인 그 죄, 즉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그 본질을 직시 하게 되었고 그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 해 달라고 부르짖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다윗의 범죄가 도구로 쓰인단 말에요. 4절을 보시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 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쓰인 단어도 단수에요. 그건 이런 의미예요. 우리에게서 사건 화되어서 밖으로 나오는 그런 죄의 증상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이 되는 거죠. 우리가 죄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되는 것들을 죄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이기 때문에 핑계를 대거나 사과를 하거나 반성을 함으로 해서 해결방법 모색이 가능해요.그건요. 그 ‘죄들’은.
실제로 다윗이 우리아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암몬 자손의 칼이 우리아를 죽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언제 죽였어? 하면 끝나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는요. 밧세바의 목욕사건도 얼마든지 밧세바의 실수로 몰아붙일 수 있는 거예요. 야, 왜 건장한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그래? 그러면 밧세바가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그도 저도 아니면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과하고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주거나 아니면 자기가 응분의 죄 값을 치르면 돼요. 그러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죄들은 해결이 돼요. 불가능 할 거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본질적 죄라는 게 있어요. 그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죄라 그래요. 그 죄, 그 죄, 그 뿌리 같은 그 죄에서 죄들이 나오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에게서 나오는 죄들을 직시하게 하셔서 그 죄의 본질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들, 즉 죄의 증상들, 죄의 세목들을 직시하면서 근본적인 죄의 실체를 알게 되는 거고 바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 죄들은 제가 어떻게 해결을 해보겠는데 이 죄들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그 죄는 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네요. 그러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게 심령의 가난. 죄들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이 죄. 이 앞에서의 인간의 불가능함을 완전히 인정하고 항복하는 걸 심령의 가난이라고 한단 말에요. 겸손이나 겸양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타종교인들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는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기본이에요. 다윗은 그러한 죄들 보다 더 무서운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고 자신이 그 죄의 생산 공장이요 죄의 자판기요 죄라는 원소로 지어진 추악한 존재요 자신의 재질 자체가 죄라는 걸 고백하면서 그러한 죄라는 대상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러니까 이 밧세바와의 이 죄가 아니었으면, 이 죄들, 이것이 아니었으면 나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줄 알고 살 뻔했네요. 하나님. 그런데 이 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교훈하신 것을 보니 내가 모태부터 죄인이었네요. 나는 그냥 죄 덩어리며 죄 나무네요. 이게 심령의 가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세요. 다른 말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자리로 밀어내세요. 반드시. 시편 51편 6절 보세요. 다윗이 뜬금없이 주께서 원하시는 게 진실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사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여기서 진실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메트’가 Truth, Faith.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에게 요구하는 게 전 죄인입니다, 라는 진실어린 고백과 그 고백에 근거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다윗에게 그 범죄의 해결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니가 저질렀으니까 니가 해결 해. 이게 아녜요. 너 백 대만 맞어! 이게 아니라니까요. 팔 한 짝 내놔(?) 이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예요. 그게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밑에 유월절 어린 양이 등장하는 거예요.
51:7-8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자신의 죄를 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슬초밖에 없대요. 근데 그 우슬초가 어디에 쓰이던 거죠? 어디서 처음 나왔어요? 출애굽 유월절에 나왔잖아요. 출애굽기 12장 22-23 보세요.
출 12:22-23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우슬초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물건이에요. 그러니까 우슬초가 나를 정결케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우슬초는 출애굽 이후에도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던 솔 같은 거였어요. 다윗은 바로 그 우슬초를 이야기하는 거고 성경의 독자인 우리는 그 우슬초를 어린 양 예수까지 연결시킬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주께서 꺾으신 뼈로 자기를 즐겁게 해달라고 그러죠? 거기서 꺾으신 뼈는 우리대신 꺾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물론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꺾여야 할 자리에서 죽으셨으므로 그걸 꺾였다고 하는 거고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기 위해 다리뼈가 안 꺾인 거예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들을 직시하게 되어서 처절한 죄책감과 자괴감에 부르짖는 성도의 꺾인 모습이기도 한 거예요. 다윗처럼 야, 어떻게 내가 이런 죄인이었지? 근데 그걸 어떻게 표현하냐면 하나님이 꺾으신 뼈. 그런다니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넘겨줬다, 그러잖아요. 로마서에서. 그 말인 거예요. 하나님이 꺾어버리는 거예요. 죄로 밀어 넣어버리는 거죠. 뭐 알으라고? 죄 알으라고. 네 죄들을 통하여 죄가 뭔지 알으라고. 그리고 내 앞으로 돌아와 항복하라고. 심령이 가난해지라고. 그래야 거기에다 부을 거 아니에요?
그러한 통한의 자백이 오히려 성도를 즐겁게 만드는, 구원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그런 것을 암시하는 거죠. 구원의 길에 반드시 성도의 육적 자아의 꺾임이 수반된다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와 그 범죄의 폭로 그리고 그로인한 다윗의 고통과 자괴 그 모든 것들을 다윗의 구원에 사용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맞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하게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어요. 이 역사는 종말을 품고 창조가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게알더스 보스가 한 말이 아니에요. 게알더스 보스가 ‘에스칼톨러스 프로시스 소테리얼러지’ 그랬죠?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그건 게알더스 보스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이사야서로 가보세요.
사 46: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처음부터’ 가 레시트예요. 레시트가 뭐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에서 태초에) 레시트. 레시트가 종말, End를 품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말 마지막에 이미 완료된 묵시가 있어요. 그런데 ,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하늘들과 땅을 창조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2절부터 보면 하늘이 어디로 숨어버리고 땅의 일만 나오죠? 그건 하늘은 이미 묵시에서 완성이 되어 있고 그것이 이 땅에 지, 땅에 그림으로 지금 펼쳐진단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이지 않는 것, 묵시가 옛적부터 이미 알려졌다는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같이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이미 묵시 속의 하늘이 완료가 되어 있다는 거고 그 완료된 묵시를 세상에 펼쳐서 왜 인간은 그 완료에 조금도 기여가 안 되는가를 보이시는 거란 말에요. 우리는 이 역사를 살면서 나는 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만 행복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거예요. 그걸 심령의 가난이라고 그래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이거 배우는 거. 거기에 우리의 죄가 쓰이고 실수가 사용되며 추악함이나 모자람도 은혜의 이해에 기여를 하게 된단 말에요.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막아서 하나님 백성다움에 흠이 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게 아니라 다윗의 범죄를 용인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긍휼을 구하도록 만드신 거예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죄들을 안 짓게 만들기 위해 역사 속에 보낸 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 이를 악 물고 허벅지를 찔러가며 노력하여 니들이 저지르는 죄의 횟수를 좀 줄여갖고 와! 이게 아니라 우리는 그 죄의 뿌리인 그 죄안에서 낳았고 거기서 자라고 거기서 죽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큰일 난다. 이거 배우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렇게 부르짖으며 오라고 이 땅에 보낸 거란 말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의 재산 분할 요구를 들어준 후에 불 보듯 뻔한 탕자의 말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버지는 탕자의 요구를 거절해서 탕자의 범죄를 막을 수도 있었어요. 그건 율법으로도 가능했어요. 안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줬다니까요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한 죄들의 다소에 산술적 의미를 두지 않으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궁극적으로 고쳐내시고자 하는 건 탕자의 아버지 대접이었단 말이에요.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자신의 현실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게 아버지의 진짜 목적이었던 거지 탕자의 불효나 음탕한 행위나 사치스러움 등의 죄들을 막는 게 아버지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닌 거란 말이에요. 혹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통전적 신앙이라 해서 마치 기독교의 핵심이 성도의 성화인 것처럼 주장을 하는데 만일 기독교의 성화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탕자의 아버지는 직무유기를 한 게 되는 거예요. 아들의 죄를 막을 수도 있었음에도 방관한 거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성화를 이루어서 통전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수나 범죄를 통해서라도 너의 처음자리를 확실하게 확인하여 아버지만을 의존하는 자가 되어 이제 다시는 선악과 먹지 마! 그러면 안 먹는 자가 돼서 오라고 역사 속에 보낸 거란 말입니다. 그게 기독교라니까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다윗이 그러한 범죄의 유혹에 직면했을 때 이를 악물고 이겨냈어야 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다움이 지켜지는 거 아니냐는 거죠? 다윗이 자기가 아니라고 해요.
시편 51편 16절 보세요.
시편 51편 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따로 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그래요. 이게 깨어진 마음, 가난한 마음, 빈핍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하고 통회한다, 라고 어구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 ‘사바르 타카’가 파열되고 부수어져 비어진 상태에요. 그리고 심령이라고 번역된 ‘레브’라는 단어도 의지 지성 정서를 모두 포함한 총체적 자아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아가 깨지고 부수어져서 생성된 빈핍하고 가난한 심령을 말하는 거예요.따라서 가난한 심령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시는 심령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사가 뭡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전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제사예요. 부정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뵙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그러한 인간의 죽음 대신에 점 없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 이게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잖아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제사란 하나님 앞에서의 그 나라는 존재의 죽음,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게 제사예요. 그러니까 제사를 올바로 드리는 자는 이 제사라는 행위 자체에서도 떨어져 있어야 돼요. 내가 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어야 되는 거죠. 그게 제사를 올바로 드리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존재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자기존재 부인의 당위성 고백이 제사의 참 의미를 아는 자의 자세인 거예요. 자신의 죽음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제사의 진의란 말입니다. 하나님, 난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난 죽은 흙이 맞습니다. 이거 들고 나가는 걸 제사라고 해요. 이렇게 제사의 전제는 나는 죽어 마땅한 자라는 처음자리 고백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제사라는 행위가 자신들의 죄를 없애준다고 믿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죄를 없애기 위해 기특한 노력들, 제사들 행위들을 열심히 한 거예요. 반성도 하고 노력도 하고 허벅지도 가르고 자해를 하며 내가 이런 자니 날 용서해달라고 그런데 그것조차도 그들의 행위였다니까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제사란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한 인간 측에서의 기특한 행위였던 거예요. 그러한 제사라는 행위 안에는 도덕과 윤리와 율법을 지켜서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신의 더러움을 상쇄 해보려하는 인간들의 거룩한 노력도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제사예요. 또 하나 알려드릴까요? 뭐가 또 행윈지, 제산지?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요거, 행위에요. 여전히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거거든요. 내가 하고 내가 안 할 수 있다, 라는 요 사고 자체가 행위, 제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 뭣도 모르는 시로도 들이 서머나 교회 설교를 듣고 그럼 우린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야? 걔네들은 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그것 자체가 행위라니까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가행위에요. 제사.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거예요.
그러한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러한 노력이 없는 게 이상한 거예요. 그러나 은혜의 이해에 앞선 인간 측에서의 행위는 반드시 자신을 향한 칭찬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는 거예요. 누가복음으로 가면 이 산상수훈의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데 맨 마지막 구절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자, 볼까요?
눅 6:20-26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여기에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나오죠? 그런데 선지자는 아주 우스꽝스런 모습이에요. 맨날 울고 가난하고 미움을 받고 전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죠? 근데 거짓 선지자들은 배부르고 부유하고 온통 세상의 칭찬을 받아요. 그런데 주님은 화 있을진저! 지옥이 너희 것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이 쭉 나열되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 복 있는 자들과 대조되고 있는 자들이 부유한 자, 배부른 자예요. 이것도 역시 단순히 돈이 많고 밥을 많이 먹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의 부유함이란 인간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기고 그들이 힘으로 삼아 살고 있는 이 세상 힘과 가치들을 의지하는 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잖아요. 여러분들 교회 안에서 돈 많이 벌고 일이 잘 되고 근사한 명예를 얻은 사람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소유한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시죠?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의 인간들의 선악구조잖아요? 판단의 근거라니까요. 안 그래요? 그냥 똑같은 사람인데 뭐 신앙은 비스무리 한 거 같은데 이왕이면 잘 되고 부자고 큰 명예를 갖고 있는 사람. 오히려 칭찬하시잖아요? 뒤에서는 시기 질투하지만.부러워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가난하고 애통한 삶을 살고 핍박을 받는 삶을 살면 사람들이 안 그런 거 같지만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우습게 여겨요. 교회 안에서도 그래요.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들의 삶 자체를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래놓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도해주자’, 지들이 기도 받아야 될 사람들인데. 기도해주자. 근데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이라 그래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겸양이나 겸손을 떨면서도 칭찬을 못 받는 자들이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착각하지 마세요. 착하게 살고 겸손하게 살아서 세상에게 칭찬 받는, 그런 성화를 이루는 게 기독교인의 목적지 아니라니까요. 제발 좀 알아먹으세요.
여러분 아이들이 설날 세배를 하러 왔는데 할아버지가 새해 첫 날 덕담을 해주는데, 덕담은 ‘복 받아라’ 고 해주는 게 덕담이잖아요? ‘너는 한 해 동안 애통하고 가난하며 핍박을 받거라!’ 그러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성경은 그걸 복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근데 성경은 그걸 복이라 그래요. 그걸 빌어줄 수 있는 자가 실력잔데 그런 실력자는 이 세상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통하고 핍박 받고 빈핍한 그런 자리로 밀고 내려가는 거예요. 가난한 심령의 자리로 밀고 내려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시로 그렇게 아휴, 내가 이러고도 예수 믿는 놈 맞나? 고민하는 거예요.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져가는 거예요. 그게요. 옛날엔 아니었잖아요? 나는 가수다! 나는 성도다! 였잖아요? 근데 살다 보니까 계속 탈락이야, 계속 7등. 아니네? 그건 내가 사유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내 성도됨을 챙길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이걸 계속 배우는 거예요. 그 가난한 마음이라는 게 어떤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시편 40편으로 가면 더 잘 알 수 있어요.
시 40: 6-7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시편 51편에서는 요 말 다음에 뭐가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그랬죠? 여기에는 뭐가 나오는지 보세요)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상한 심령의 자리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어떤 이가 나와서 ‘내가 왔다!’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럼 이 상한 심령이 뭔지가 이제부터 풀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4절을 보면 요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주 명쾌하게 풀어줘요. 보세요.
히 10: 4-10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지금 상한 심령의 자리에 뭐가 들어가는지 추적해보란 말에요. 똑같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 내용이. 51편에서 41편으로 히브리서 10장으로)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율법이죠, 구약)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신약, 새 성전)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준비된 한 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한 몸. 그게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여기에서. 그럼 상한 심령은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이렇게도 표현을 합니다. 한번 보세요.
시51: 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
다윗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고 찬송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상한 심령은 내가 드리는 행위의 제사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고 참 제사인 예수의 십자가 제사를 꼭 붙드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우슬초와 하나님의 어린 양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된 동기가 뭐냔 말에요. 자기의 죄 때문이잖아요. 하나님은 죄를 사용하시는 분이라니까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죄를 없애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죄들을 사용하여 진짜 죄가 뭔지를 가르치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바울이 이렇게 펼쳐냅니다.
롬 4:2-8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그 뒤로 죄를 안 지었나요? 천만의 말씀. 그 뒤로도 개차반 같이 살았어요. 솔로몬? 마지막까지 아주 이거는 나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안 하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우스운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훌륭한 자로 바꾸어 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자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던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러는 거예요.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하심을 받고 그냥 그 죄를 하나님이 이렇게 가려주면 어, 하나님의 은혜로 가려 주셨구나, 하고 그렇게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이 ‘너 그거 죄 아냐’, 라고 그냥 인정해 주실 때 네, 감사합니다. 라고 면목 없이 그냥 그 은혜를 덥석 붙드는 거 이게 하나님이 다윗에게 요구하시는 거였다니까요. 6절에서 일한 것이 없이, 라고 번역된 ‘코리스 에르곤’이 행위와 상관없이, 라는 뜻이에요. 행위와 상관없이 의가 주어지는. 바울은 6절에서 그 사람을 가리켜 행복한 사람이라 그러죠? 그게 복 있는 자예요. 복 있는 자는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선물 받은 자이다. 이게 정확한 번역이에요. 그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이요 상한 심령이에요.
그리고는 7절과 8절에 다시 다윗의 시편이 인용이 되는 거예요. 이게 시편 32편에서 인용이 된 건데 다시 한 번 볼까요?
시32:1, 3-6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복 있는 자여, 나오죠? 그리고는 허물의 사람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고. 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거)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 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 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지금 여기서 다윗이 한 게 뭐가 있어요? 자백하고 토설한 거밖에 없어요. 뭘 고치고 뭘 했다, 라는 말이 없잖아요? 자백하고 토설했더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찬송이 터져 나와요. 어떤 홍수가 와도 나를 범람치 못 하리로다. 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니까. 그런 뜻이에요.그게 복음을 아는 자들의 당당함이에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감추고 토설치 아니했을 때에는 종일 신음을 하고 뼈가 쇠하도록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폭로시키시고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자백하게 하세요. 이 시편이 밧세바와의 그 범죄를 일으킨 후에 쓴 거예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시를 썼을까요? 근데도 회개 안 했다니까요. 인간은 회개할 수 없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드러내버리시는 거죠. 이게 너야! 그랬더니 맞네요! 라고 토설을 했더니 그 때 찬송이 터지더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들어 쓰신다니까요.
다윗은요 밧세바를 범할 때도 경수가 끝났는지 확인한 사람이에요. 그건 부정한 자, 그 부정한 상태가 아닌지를 점검했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지킨 거예요. 죄를 지을 때도. 나의 가치와 영광은 끝까지 챙기는 거예요. 죄를 지으면서도. 그 상황에서 금식하면서 기도도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낱낱이 그의 실체를 확 폭로시키시자 하나님,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해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해주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고백하는 거죠. 하나님 살려주세요, 예요.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언약만 의지합니다, 라는 그 가난한 마음이 우리 구원의 증거가 되는지 한번 보잔 말에요.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원래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은 우리 거였죠? 누가 가져가셨다고 그래요? 그거를? 예수님이 가져가셨다니까요. 여러분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걸 인정하는 가난한 마음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서 용서를 받는 게 아니에요. 죄인 중의 괴수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이 고백 했다고 살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래, 그럼 너 죽어. 이게 맞는 거예요. 원래가. 근데 그 고백을 하는 자의 가난함만 가져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리고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예수의 부요를 부으시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구원의 메카니즘이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시고 우리의 가난함을 가져가시는 거고 그러면은 내가 어떠한 가난함에 들어 있는 자인지를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야 그분이 주시는 부요 그 구원을 받을 거 아니에요? 감사하게. 근데 나는 그렇게 가난하진 않아요. 조금 가난한 거 같긴 한데 그렇게 가난하진 않거든요. 그러면 예수의 풍성함이 온전하게 나에게 못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진짜로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이 누구였다는 거죠? 예수님이요. 잘 생각해보세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랬죠?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자꾸 인성, 신성 이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성경에는 인성, 신성 이런 말 한 마디도 안 나와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신학에서 그걸 나누어서 자꾸 인성이 어디까지고 신성이 어디까지고 이런 걸 물어봐요? 성경 어디에 인성, 신성이란 말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에요. 끝!
인성은 뭐고 신성은 뭐예요?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왜 못 내려와요?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였기 때문에 나는 무력한 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영원 동안 한 번도 헤어져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떨어진 거죠. 거기에서 예수의 심령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거예요. 이게 상한 심령입니다.
왜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제사의 제물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의 모형이잖아요. 근데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 했냐면 제사의 제물로 모형 되었던 예수를 원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개가 대조되는 거예요. 그 예수의 상한 심령 되심. 그렇게 예수의 심령이 깨져버리고, 마음이 깨져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을 내가 믿고 거저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송하는 그가 상한 심령인 거예요. 또.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부인이 우리의 자기부인을 끌어내는 형국이란 말입니다. 그걸 상한 심령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된다, 욕심을 버려야 된다. 예수 안 믿고도 욕심 없이 사는 사람 많아요.
저 지리산에 가니까 웬 거지 떼들이 거기서 욕심 없이 잘 살고 있더구만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걔네들은 자포자기한 거예요. 어차피 안 될 거 아니까. 예수 안 믿고도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왜 나무를 하지 않아? 야,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을 왜 가을에 걱정 해? 아이고 참 나, 게을러서 그런 거예요. 대단하게 뭐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건 그런 종류의 가난이 아니에요.
다윗이 이야기한 상한 심령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상한 심령이라기보다 십자가 위에서 갈가리 찢긴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와 상한 심령이 대조가 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의 십자가만을 진짜 제사로 받으시는 분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계2: 9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 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서머나 교회와 대조하여 책망하는 게 뭐죠? 유대인이에요. 그리고는 그걸 사단의 회라고 이야기하세요. 유대인을 왜 사단의 회라고 그럴까요? 유대인들은 율법 열심히 지키고 제사 열심히 지내고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사람들이죠? 요게 부유함이에요. 그걸 예수님이 사단의 회라고 한다니까요. 그들이 너희 괴롭히는 거 알아. 여러분 초대교회 때요 서머나 교회를 비롯해서 초대교회 때 가장 골치 아팠던 게 그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였어요.
왜냐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갖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고 자긴 죽으면 사흘 만에 부활한다, 그러는데 부활을 해서 사람들한테 나타나버렸어요. 근데 아무리 핍박을 해도 이들이 수그러들지를 않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리고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을 파송하는 거예요. 유대교에서 그래갖고 은혜 + 행위= 구원의 공식을 만들어서 심어주는 거예요. 다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랬더니 사도바울이 그러죠? 갈라디아서에서. 야, 속지 마. 다른 복음이야. 그거. 거짓 선지자야. 속지 마. 그걸 갈라디안 식 신앙이라 그러잖아요. 그런 건 아니에요. 여러분. 그거는 복음 비스 무리한 가짜예요.
그렇게 멋지게 인간들의 행위와 세상적 가치를 교회의 힘 삼아 살던 그런 교회가 라오디기아 교회예요.
계 3: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돈도 많고 교인도 많고 선한 행위도 풍성하게 넘치던 라오디기아 교회에게 너희는 가난한 자들이다, 그러세요. 내가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진짜 가난한 자들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괜찮아. 율법 지키고 있어. 착하게 잘 살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만큼 예수의 은혜가 뭐 완전히 백 프로 나에게 임하지 않아도 나는 그래도 살 수 있을 거 같아. 요게 부요한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죄인 중의 괴수여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에서 구원의 현실을, 천국의 현실을 요렇게 모형으로 한번 보여주시는 거예요. 14장 한번 보세요.
눅 14: 2-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럽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상 받기 위해서 갚을 거 없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주라는 말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갚을 것 없는 너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는 거예요. 니들이 바로 갚을 것 없는 가난한 자들이요 병신들이요 저는 자들이요 소경이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내가 니들에게 부요를, 니들의 그 가난한 그 질병을 다 가지고온 거고 내 부요를 너희들에게 쏟아 부은 거야.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라고 그랬어요.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게. 모든 존재,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거든요. 창조의 목적. 갚을 게 없는 자들이 구원을 받아야 맞아요.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맡긴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지향성을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성화는 노력해서 이루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 자신의 힘과 노력과 의지를 근거로 성화를 해내겠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어 있어요. 요한서신에 그런 사람 하나 나오죠? 요한 3서, 마지막으로 볼까요?
요삼1 9:10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나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교회 안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 내가 너보다 성화 더 많이 됐지? 내가 너보다 복 더 많이 받았지? 요런 자들. 요런 자들은 반드시 요러한 추악한 일들을 저질러요.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바로 자신의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보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른 이들이 자기들보다 더 나은 평가를 얻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해요. 자기사람을 남에게 뺏기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빼앗아간 자를 완전히 난도질을 하죠. 자주 경험해봤어, 저는. 그러한 자들은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 적인 죄들은 남들보다 조금 덜 지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진짜 죄는 그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임이 분명해요.
하나님은 죄들을 통해서 죄의 문제들을 해결해내시는 분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함부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근본적 죄의 자각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저놈은 저렇게 살다가 뒤지겠다, 가 아니라 다윗의 행사를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드디어 타락하여 저건 죽었구나! 그렇게 평가했을 거 아닙니까? 우리가 다, 누구나 다. 근데 그게 다윗의 살길이었다니까요. 마찬가지에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고 함부로 그렇게 평가하지 마세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강력하게 임한 증거일 수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성화를 완전히 이룬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유치원 수준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도 마세요. 죄를 안 짓는 게 죄를 짓는 거 보다 더 힘들다고요? 죄가 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우리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내세우면서 주먹을 불끈 쥐는 그런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진짜 죄인들인지 모르는 거예요. 죄들과 죄를 여러분은 반드시 구별하셔야 돼요.
자신의 힘으로 죄들을 해결하겠다고 죄 짓지 마시고 오히려 죄들을 통해 죄를 직시하고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진짜 복 받은 자의 삶을 잘 사시기 바랍니다. 집에 가서 다시 잘 들으세요. 죄와 죄들을 분별하여 들으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얼마큼 살아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거 안 된다고 예수 이 땅에 보내서 죽이셨는데 우리는 예수와 버금가는 삶을 내어 놓아 보겠다고 예수를 닮겠다고 합니다.
예수는 믿으라고 주신 건데 온 세상은 예수를 닮겠다고 나섭니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당신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심비에 금강석 철필로 새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수 목사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6.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0) | 2022.11.14 |
---|---|
5.진짜 배부름이란 (0) | 2022.11.13 |
4.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는 땅 (0) | 2022.11.13 |
3.애통하는 자에게만 약속된 위로 (0) | 2022.11.13 |
1.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0) | 2022.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