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5번 말씀
제목 :진짜 배부름이란
본문: 마 5: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자 이제 팔복의 네 번째 복에 당도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 주리고 목마름이란 것과 배부름이라는 게 어울립니까? 근데 이 주리고 목마름이라는 것과 배부름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조합을 주님이 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하고 계세요. 주리고 목마른 게 사실 배부름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 산상수훈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 민속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메시아의 지상왕국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놓쳐서는 안 돼요. 주님은 그러한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벗어나는 것, 그걸 메시아왕국의 도래로 인식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애통해하며 가난하며 굶주리고 목마른게 복이다, 라는 파격을 선언하시는 거예요. 그들은 엉뚱한 걸기대하고 있었거든요. 4장에서 주님이 막 병을 고쳐주시는 걸 보고 사람들이 아주 벌떼처럼 모였단 말에요. 거기에다가대서 지금 예수님께서 이 산상수훈을 이야기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니들이 맞아. 그렇게 사는 거 맞는 거야. 거기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원래 복 받은 자들의 삶이야, 라고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란 말에요.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하면 복 있는 자여 그대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바로 배부른 자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는 자리로 방향성을 가지고 밀려가게 된다는 말이죠. 근데 그렇게 밀려가게 되는 자들은 자기의 의를 부정당하게 되어서 자기의 의를 부정당하게 된다는 것은 그의 삶 속에 나오는 모든 행위가 죄로 선고된다는 뜻이에요. 규정이 되어버린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그렇게 밀려가게 되는 자들은 자기의 의를 부정당하게 되어서 이 역사 속에서는 심령의 가난과 애통과 온유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게 진짜 배부름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나에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다. 이게 바로 심령의 가난이죠? 그리고 자신의 죄인 됨의 자각으로 인해서 애통을 가져오게 되고 그런 애통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의 그 겸허함을 그냥 유지하게 되는, 뭐라 그랬어요? 온유라고 그랬어요, 그것이. 온유로 이어지게 되고 그러한 온유는 다시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거예요.이게 다 하나로 이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로마서 강해 때도 살펴봤듯이 이 세상에 스스로의 힘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다시 한 번 보죠.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2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럼 어떡해야 돼요? 인간들 속에서 생산될 수 있는 의의 요소가 단 요만큼도 없어요. 그럼 어떡해야 돼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죠. 그거 나에게 없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부어주세요.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란 말입니다. 내 안에 의의 재료나 원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자들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람다움 등을 근거로 해서 인간 측에서 생산해내는 의를 추구하느라 그들의 전 인생을 걸죠. 그게 자기 자신의 처음자리를 벗어난 인간들의 본성이에요. 주님은 지금 자기 안의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자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다, 라고 단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자기 안에서 내어놓을 것이 너무나 많았잖아요?
그게 어떻게 주리고 목마른 자냐고요? 주리고 목마른 자는 내가 사유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주리고 목마른 거예요. 내가 사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으면 그거 먹으면 되는 거죠. 주워 먹으면 되는데 그게 없을 때 주리고 목마른 거예요.
여기서 주리다, 는 뜻은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셨을 때 그분이 주리셨다, 라고 했을 때 쓴 그 단어와 똑같은 단어가 쓰인 거거든요. 40일을 굶어서 뱃속에 내장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걸 주린다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근데 성도에게 지금 그게 요구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 진짜 너희 안에 그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인정하고 있어?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진짜 배부른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들 안에 뭔가가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자들은 그들이 진짜 배가 부른 게 아니라 그건 헛배 부른 거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공갈 빵 같은 거죠. 자신들이 주리고 목마른 자들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결핍을 하나님께 읍소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내는 자들이 복을 받을 자들이지 자신들 안에서 생산된 뭔가를 내놓으면서 헛배를 두드리는 그런 자들은 절대 하늘의 복과 상관없는 진짜 주린 자들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 역사를 창조했다고 했어요? 이 역사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겁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왜 존재하는 거예요? 왜 묵시 속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굳이 이 역사를 살아야 하는가? 이 역사와 인생이 증명해내야 하는 건, 천지만물이 증명해내야 하는 건 딱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왜 예수가 주이며 그리스도여야 하는가 그거 설명하는 거예요. 그거 설명하는 소품이에요. 인본주의자들은 자존심 상해하죠.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래요. 그런데 왜 창조하셨어요? 멸망시킬라구요. 썩어지고 멸망되어질 것들인데 하나님이 그걸 목적으로 하여 창조하셨다니까요. 그럼 철거할 걸 왜 만드셨냐는 말이에요? 지금 그러잖아요? 태초에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것들은 멸망할 거래요. 그러니까 멸망시킬라고 창조했다는 건데 왜 멸망시킬라고 창조하느냔 말에요. 여기서 멸망시킬 것들과 대조되고 있는 게 뭐예요?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멸망할 것이요, 에 대조되는 게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죠? 거기서 대조되는 게 뭐냐면?멸망할 세상과 대조되는 게 뭐냐면 “영존하시는 주”란 말에요. 그러니까 멸망할 세상은 영존하시는 주를 드러내기 위한 가건물 소품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우주만물과 역사는 오직 주 만이 영존하시는 분이고 참가치고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증명하고 드러내는 소품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천지만물은 오직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만 시작이 되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가건물이라는 거예요. 가건물은 실체가 오면 철거가 불가피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 육체까지도 그냥 가건물인 거예요. 그래서 실체가 오면 철거가 돼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 그리고 우주와 육신은 새 창조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소품이에요. 우린 그러한 소품으로서의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왜 존재는 예수 안에서만 존재일 수 있는가? 왜 존재는 예수로만 살아야 하는가? 왜 예수가 만물의 왕이셔야 하는가를 철저하게 배워야 되는 거예요.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건 첫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새 창조를 묘사하는 대목이기도 해요. 첫 창조 하에서의 하늘의 만물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나신 이건 맏아들 되신, 이란 뜻이죠?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가 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거예요. 첫 창조가 먼저 계셨던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됐다는 건 먼저 맏아들 되신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창조가 된 것을 설명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17절이 만물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예수 안에서만 존재다, 라고 선언을 하는 거예요. 17절 후반부에‘함께 섰느니라.’ 라는 그 어구는요 헬라어 ‘쉬니스타오’를 번역한 건데 그 단어는 ‘Place together’에요. 함께 서다, 함께 존재하다. 그러니까 만물은 예수 안에서만 존재일 수 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밖에 있는 건 다 죽은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거만 존재다. 예수와 함께 서지 않은 것들은 다 죽은 것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건 예수 밖의 모든 만물의 존재성을 전부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건 존재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살아 있는 거 아니다, 란 뜻이에요. 아무리 움직여도, 생각을 해도 관계없어요. 다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만물은 하나님의 생명력을 갈구하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그거 없으면 죽은 거니까. 예수 밖은 다 죽음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가 창조주임을 밝히면서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 라는 말을 한 거예요.
요한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는 ‘레시트’예요. 창세기 1장 1절과 똑같은 말씀이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창세기 1장 1절의 그 태초가 그대로 같이, 똑같이 등장하는데 그 첫 창조는 새 창조를 모형하는 거라 그랬죠? 그 태초라는 창조의 자리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어요. 그분이 모든 걸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그분을 통하지 않고 지어진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래요. 3절과 4절을 원어 그대로 번역을 하면 ㅡ
“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이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말씀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이게 그냥 직역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 그리고 우주만물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주인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며 예수 안이라는 그 거처에 들어가는 방법이외에 존재가 존재로 설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는 걸 증명해내는 역할로 존재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창조를 하셨는데 만물을 창조했는데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가 생명을 붓지 않은 건 생명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거를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고 역사가 이야기하는 거고 우리의 인생이 그걸 드러내는 소품으로 쓰여지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소품으로요. 그리고 이제 그것이 계시되어야 할 어떤 존재들에게 온전히 계시가 되면 철거되는 거예요. 가건물은 철거되는 거예요. 그게 종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신의 신앙여정을 통과하면서 왜 난 예수가 아니면 죽은 자인가? 왜 난 예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없음에 불과할 뿐인가를 잘 배우시면 돼요. 그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음에 필수적 전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의가 없으면 모든 존재는 존재일 수가 없어요. 그 의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열심이며 하나님의 생명력이며 그것 자체가 바라크, 복이에요.
쉽게 말해서 이 역사와 인생과 육신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자기 의를 처절하게 부정당하면서 하나님의 의만을 의존하게 되는 자기부인의 과정을 통과하는 거예요. 역사까지도. 문명까지도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이 역사와 문명은 계속 발전하고 번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멸망해가고 있는 거예요. 눈이 있는 이들은 그걸 봐요. Eraly auditor 중의 한 사람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쓴 그 IT업계의 전설적인 존재 있죠? 니콜라스 카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정보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익사시켜가고 있다. 그래서 자기는 Facebook 이나 트윗터 이런 걸 다 끊었대요. 그게 어떤 그 인터넷 상에서 가상의 어떤 울타리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굉장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 다는 거죠. 마치 여러분이 네비게이션이 나온 이후에 그거 없으면 길 못 찾아가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우린 점점 바보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사고력을 상실하는 거. 그거 멸망하는 겁니다. 여러분. 근데 우리는 그걸 발전이라고 그러죠? 그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사 40: 5-8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5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과 육체가 대조되고 있죠? 그리고 6절부터는 성도가 이 역사 속에 육체를 입고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기술되고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풀 꽃, 이렇게 비유해요. 근데 그 육체 위에 뭐가 덮여요? 지금? 여호와의 기운이 덮이니까 걔네들이 말라가고 시들어가죠? 저절로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육체, 인간이라는, 역사라는 것 위에 여호와의 기운으로 덮어요. 그리고는 그걸 말려 죽이는 거예요. 그랬더니 뭐가 드러나요? 7,8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영영히 서는 거예요. 이게 역사에요. 이게 역사의 존재의 의미라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역사와 인생은 멸망으로 밀려가요. 그걸 하나님의 기운이 주도해간단 말에요. 그러니까 지금 망하고 있는 거예요. 망하고 있는 여러분 잘 가고 계시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야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에요. 그걸 바울이 이렇게 정리해주죠?
갈 2: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갓 잡아 올린 고등어처럼 율법 위에서 이리저리 뛰던 사람이에요.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굳게 믿은 거죠. 그런데 그가 복음을 올바로 알게 되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자신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난 죽은 거구나. 그럼 살아있는 나는 뭐지? 아, 예수 안에서 산 새로운 피조물? 끝. 예수 안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냥 그 안에서 감사함으로 찬송하면 되는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이 안 거죠. 그러면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게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라, 이렇게 확인도장까지 찍어주죠? 나는 율법에 의해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어떤 징검다리나 교두보도 만들어내지 못했어. 하나님이 은혜로 그냥 날 덮었어. 이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죽은 게 맞아.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들의 처음자리를 모르고 기고만장해서 인간 측에서의 의를 끊임없이 준비하죠? 그건 에덴 동상에서부터 있었던 거예요. 지금까지. 종말의 날까지 있을 일이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를 구분합니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인간들이 도덕이나 윤리 사람다움 등을 근거로 생산 해내려하는 모든 의는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하는 거라고요? 힘써 복종치 않는 거래요. 그냥 복종치 않는 것도 아니고 힘써 복종치 않는 거. 애써서 복종치 않는 거래요. 바울은 그러한 자기 의를 율법의 의라고도 불러요.
빌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육체를 신뢰하는 것으로 누군가와 비교를 한다면 나는 자신 있다, 이거죠. 나는 자신 있다.)
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요만큼도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거예요. 착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런데 그 율법에 의한 열심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낳더라는 거예요.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말이에요. 율법의 의가. 그 열심이.
여러분 에덴동산에 율법이 있었나요? 631가지 율법은 모세 때 주어진 거예요. 에덴에는 율법이 없었어도 낙원이었어요. 하나님이 벌거벗겨 놓으시면 벌거벗은 채로 살고 먹으라면 먹고 먹지 말라 그러면 안 먹고 이걸 낙원이라 그래요. 자기의 주체성이나 의지 뜻 비전 야망 하나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만 부어져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경륜되어지고 움직여지는 그곳을 낙원이라고 해요. 근데 거기에 법이 떨어지죠? 선악과 먹지 마, 라는 법이 떨어지니까 그 법이 어떤 역할을 해요? 금방 그 인간이 그 법을 받자마자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가 확 드러나는 거예요. 이걸 단순히 죄를 지었다, 타락을 했다. 이렇게만 이해를 하지 마시고 법이 떨어지면 인간은 항상 자기의 존재를 폭로 당하게 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율법으로 주어진 거고 또 신약에서 여러 가지 명령들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게 떨어지면 우리는 아, 우리는 진짜 죄인인 거 맞구나? 요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죄인이 맞네! 요거를 드러내는 것이죠.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진 게 출애굽해서 홍해 건넌 다음에 주어졌잖아요? 근데 율법 안 지키면 다시 홍해로 빠꾸예요? 그래서 애굽으로 다시 넣어버려요? 못 돌아가요. 그래서 갈라진 홍해를 이스라엘이 다 건너자마자 닫아버린 거예요. 못 돌아간다고요. 그럼 못 돌아가면 그 율법을 왜 줬냐고요? 니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으라는 거예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구했다, 라는 걸 가르치시는 거예요. 그게 광야에요. 광야는 뭐예요? 역사. 인생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1세대를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율법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의 인간의 실존, 이걸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느 지점으로 끌고 가실 것인지를 같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광야에서의 1세대의 몰살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죽은 자에요. 거기에서, 그 율법 앞에서 요만큼의 의도 내놓을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의 최고의 의가 Filthy Rag 이라잖아요. 더러운 옷. 똥 걸레.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바벨 성을 쌓는 거죠. 인간들의 의를 쌓는 거예요.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롬 3:20을 보면 그런 역사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잘 묘사가 되어 있는데요.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법, 말씀을 받아 네, 저 죄인 맞습니다. 저 죽은 자 맞네요. 제 안에서는, 시체 안에서는 살아있음에 기여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나올 수가 없는 거네요. 이거 배우는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역사는 바로 이걸 규명해내는 장인 거예요. 여러분 최근 30년 동안에 하바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가 뭔지 아세요? 마이클 샌델러스의 저스티스 (Justice)에요. 많이 들어보셨죠? 책으로도 나왔고 비디오로도 나왔어요. 굉장히 어려운 책이고 비디오도 굉장히 힘들어요. 보기가 힘들어요. 진이 빠져서.근데 여러분 그 힘든 책이 단 시간 내에 한국에서 백만 권이 팔렸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백만 명 중에 그 책을 Fully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될 걸요. 근데 백만 권이 다 어디가 있는 거예요? Justice, 인간의 옳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심 있는 자기 의 쌓기에 달인들의 책꽂이에 깨끗이 꽂혀있는 거죠. 흐뭇해하는 거예요. Justice. 인간들이 원하는 거 Justice. 인간들은 그렇게 인간, 보편적 인간들의 Justice, 의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증거에요.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고 알아들을 수도 없으면서 갖다가 꽃아 놓는 거죠. 하바드 대학에서 굉장히 유명한 거래.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아는 게 인생과 역사의 존재 의의인 거고 하나님의 의 앞에서의 인간은 그거 죽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임을 배우는 게 인생과 역사에요. 그리고 그것이 적혀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을 인간들이 생산해내야 할 그러한 의에 대한 교훈이 담긴 책정도로 저급하게 해석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겁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 15:7-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하는 지름길이 뭐예요?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이건 이사야 때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교훈으로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의 의를 알아먹으라고 계명을 줬더니, 말씀을 줬더니 전부 그걸 교훈삼아서 예수를 본받겠다는 것이죠. 본받겠다는 것의 그 ‘본’자가 뭐예요? 한문에? 본 자.그건 본질이 같은 때에 비로소 가능한 거예요. 본받는 거. 예수를 본받겠다는 건 예수를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행위인 겁니다.
예수를 어떻게 본받으실 거예요? 우리는 예수의 의가 필요한 자 입니다,를 배우는 거지 예수를 본받는 거 아니에요. 그게 신률 주의에요. 그것이. 그건 이단사상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인가, 라는 기특한 반성과 결단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게 Justice 라는 책의 주제거든요.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인가? 근데 자기도 결론을 못 냈어요. 모르더라구요.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인지.유명한 철학교수거든요. 그런 결단, 그런 반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라는 올바른 자인식이 터져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이요 반석을 부수는 방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주 때려 부숴버리는 거예요.녹여버리는 거. 태워버리는 거.
렘 23:29-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 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이 아니 하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하나님의 말을 도적질 하는 자들이 누구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불로 방망이로 던지지 않고 위로와 격려의 말로 던져요. 그게 하나님의 말을 도적질한다, 는 거예요. 바울은 그러한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는지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볼게요.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말씀을 전하라고 그러면서 그 말씀을 경책이라고 하고 경계하는 거라 그러죠? 그리고 그게 위로면 권고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경책이라고 번역이 된 ‘엘렌코’는 죄를 깨닫게 하다, 꾸짖다 잘못을 지적하다는 뜻이에요. 아주 강력한 뜻이에요. 경계라고 번역이 된 ‘에피뚜마오’는 비난하다, 책망하다 죄를 엄격하게 따지다. 전부 죄를 들쑤셔내는 거예요. 경책, 경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죄가 이렇게 들쑤셔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으면 설교하는 사람도 잘못한 거고 듣는 사람도 잘못들은 거예요. 그런데 도적질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존재성과 정체성과 가치성을 높여주면서 사람들을 엉뚱하게 위로해주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떨어지면 그게 인간에게 욕이 되는 것으로 여겨요. 죄를 지적하니까 야, 우리 인간들을 뭘로 보고 그래? 이렇게 욕이 되는 것으로 여겨서 즐겁지 않게 받아들여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경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니까 저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네요, 로 가게 되는 거예요.
렘 6: 10-11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며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 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왜? 그냥 야단치는 것으로만 아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에게 예수가 필요하다, 이리로 안 가고 왜 저렇게 야단만 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욕으로 여기는 거예요)
11- 그러므로 여호아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어디에? 여호와의 분노에. 그걸 경책으로 받아들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 그걸 인식하는 자리로 가야되는데 그냥 야단만 친다고 생각하고 왜 야단만 쳐? 아이, 듣기 싫어. 이게 여기에 하나님의 분노가 임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로마서 강해 때도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에수의 죽음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어요.
마 3:13-15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죠? 그 말은 난 구원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게 요한의 세례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백을 하는 그게 요한의 세례예요. 그거 받아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나는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요게 요한의 세롄데 예수님이 그 세례를 받으신단 말에요. 예수님이 죄인과 연합된 거죠? 그런데 그 요한의 세례는 내 받을 세례가 있는데 너희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그 세례 있죠? 십자가의 세례? 고걸 상징적으로 예표 하는 거였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어야 할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서 죄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세례 받아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는 그것에서 모든 의가 완성되는 거예요. 90%의 의도 아니에요. 모든 의예요. 모든 의. 거기에 우리의 의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거란 말입니다. 그 의가 거저 전가되는 거예요. 그냥. 전가되어 우리가 의인이 되는 거지 거기다 뭘 보태야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에요. 요게 지금 여러 가지 밭의 비유 있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거기에서 뿌려진 씨란 말이에요. 이게, 예수님이. 예수님이라는 이 밀알이, 씨가 뿌려져서 밭이 옥토가 되는 거지 밭을 우리가 옥토로 만들어서 씨를 결실 맺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요 씨가 떨어져서, 밀알이 떨어져서 죽어서 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건 요 씨의 죽음 요 씨의 공로로 말미암아 요 씨의 의가 다른 것들에게 전가가 돼서 그들이 산 것이 된다는 뜻이죠? 요걸 의라고 한단 말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고요.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러 열매들이 맺히는데 그 열매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나머지 열매들을 천국으로 끌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걸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히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누구예요? 조금아까 찾아봤잖아요? 창조주 예수)
- 많은 아들을 이끌어 (맏아들이 되신 그분에게 지금 하는 말이에요. 맏아들인 그분 첫 열매인 그분이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면)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여기서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라는 건 예수님이 온전하지 않았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됐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이지만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실 일, 메시아의 역할이 완수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분이 고난으로 온전케 되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세례요한의 세례에서 그림으로 보여지는 건데 세례요한의 세례, 예수님이 저주의 풍랑 속에 빠져죽는 거거든요. 그리고 살아나셨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하늘이 열렸다고 그러죠? 그 말은, 왜 굳이 그 말이 거기 들어가 있느냐하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전에는 하늘은 땅에 대하여 닫혀있었던 거라는 뜻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물에 들어가서, 그건 십자가의 할례를 이야기하잖아요. 십자가에서 쪼개지는 거. 그 예수가 십자가에서 쪼개지자 하늘이 찢어지더라는 거예요. 그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휘장으로 표현되죠? 커튼으로. 그러니까 예수가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휘장이신 그분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땅에서 하늘로 가는 길이 생긴 거예요. 근데 그 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 예수에 의해서만 날 수 있는 길이다, 라는 것이죠. 그게 의란 말에요. 다른 의는 없어요. 근데 그 하늘을 찢어보겠다고 쌓은 게 바벨탑이고 그게 역사 전편에 흐르는 인간들의 바벨탑 쌓기인 거예요. 자기 의 쌓기인 것입니다.
하늘은 다른 것으로 절대 찢어지지 않아요.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의 주인이 찢어야 돼요. 그래서 그 의가, 모든 의가 완성이 되는 그 자리에서 하늘이 찢어지는 거예요. 열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Justice니 뭐니 하면서 인간군상들이 자기들이 의를 구축하고 있는 거죠. 예레미야 2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렘 23: 5-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누구요? 예수예요. 위로운 가지를 일으킬 거래요. 누가요? 하나님이요)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Justice, 정의는 우리가 행하는 게 아니라 그 의로운 가지가 행하는 거예요.)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가 누구예요? 예수. 그가 뭐예요? 여호와 우리의 의예요. 그 의 요구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의를 우리가 내어놓겠다, 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여호와 우리의 의, 그 의라니까요. 그러니까 예레미야서 같은 데 보면 너희들은 잿물로 씻어도 그 어떤 비누로 씻어도 절대 씻기지 않는 더러운 존재들이다. 이런 말들이 반복하여 나오는 거예요. 니네들의 의는 Filthy rag, 더러운 옷이야. 이런 말. 시편에도 계속 반복하여 나오죠?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어. 제물로도 용서가 안 돼. 돈으로도 용서가 안 돼. 수 없이 나와요.그럼 뭐로 우리의 의를 삼을 수 있어? 예수 갖고 와! 예수 갖고 와. 그게 기독교에요.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내놓을 수 있는 거 예수라는 제물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인간들을 실존 분석적 접근으로 그들을 선하다, 악하다 이렇게 판단하시면 안 돼요. 야, 굉장히 착해 보이는데? 착해 보이는 악인이 있을 수 있다니까요. 인간이 그래요.
자 그럼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인간들의 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자들 그런 이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정의로운 일을 행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로 살 것인가? 요걸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라고 곡해를 하게 돼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이있다, 라고 믿고 있는 그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라!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 그 의를 행해야지. 정의롭게 살아야지. 요리로 간다고요. 요걸 사람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라고 알아요. 완전히 반대 이야기잖아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그건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게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 가득찬 배를 자랑스럽게 펑펑 두드리는 거예요. 두드리는 거. 여기 있어, 여기. 할 수 있다니까. 이런 뜻이잖아요. 그게 뭐가 배고픈 거예요? 그게 뭐가 목마른 겁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니까요. 성도의 의가 아니에요. 하나님, 여호와의 의라고요.
근데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정의롭게 살 것인가? 우리가 그걸 어떻게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냐고요?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부자’ 라 그래요. 배고프지 않은 자들을 부자라고 해요. 내 안에 뭔가 있어. 나는 뭔가 사유하고 있어. 그래서 그걸 사용하여 뭔가를 행할 수 있어. 그 사람을 성경이 부자라고 해요. 그거는 상징적인 언어에요. 돈이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은 내 안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한 이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의를 순전한 마음으로 붙드는 걸 이야기해요. 이거 없으면 나 목 말라 죽어. 이거 없으면 나 굶어죽어. 그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거예요. 그런데 자기들의 정의로운 삶과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외치는 이들은 그러한 애타는 목마름이 없어요. 내가 뭔가 갖고 있거든요. 내가 내 자신의 성숙과 변화를 위해서 뭔가를 해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내 안에 그러한 의를 만들 수 있는 원소나 재료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게 부자예요. 뭔가를 소유하고 있는 자. 사유하고 있는 자.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쫓겠다고 분연히 나섰던 그 부자청년 있죠?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에요.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물었어요. 어떻게 영생 얻습니까? 그 질문 자체가 말만 하세요. 내가 할게요. 요걸 부자라고 해요.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요걸 부자라고 해요. 근데 돈 많은 부자와 요런 부자가 지향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이 부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라고 그러죠? 그랬더니 그 부자청년이 뭐라 그래요? 다 지켰어요, 그래요. 가지고 있는 거죠? 고걸 부자라고 해요. 다 지켰어요. 예수님이 그래요.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라. 그래요. 그랬더니 그건 안 되겠네요.
그러면 그 부자청년이 자기가 여태까지 율법을 지킨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킨 거라는 거예요? 아니면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지킨 거란 뜻이에요? 그 돈 하나도 못 버려요. 네가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했다, 라고 지금 나에게 이야기하는데 너 고거 하나 버리고 오라는데 그걸 못 버려서 하나님을 못 섬기고 있잖니? 그러면 결국 네가 율법을 지킨 게 무엇 때문에 지킨 거야? 니 이익 챙기려고 지킨 거 아냐? 고걸 부자라고 한단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맴몬, 나죠? 나. 나라는 우상. 그건 동시에 못 섬기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는 결국 무엇에 주리고 목이 말랐던 거예요? 진짜? 자기 의에. 자기 영광에 주리고 목말랐던 거죠. 그걸 부자라고 해요. 그러나 그게 진짜 가난하고 가련한 거예요. 라오디기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잖아요? 니네가 부자라고?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이야.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이렇게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사유하고 있는 힘이나 자원이 있어서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자들을 부자라고 해요. 그러나 그들은 사실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이에요. 그건 사망에 이르는 기갈이고 사망에 이르는 굶주림인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와요. 그 불의한 청기지기의 결론이요 요절이 뭐죠?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건 단순히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게 지금 불의한 청기지의 비유에 결론인데 여러분이 비유강해 때 공부한 것처럼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불의한 자리로 내려오셔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만들어버린 구원의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들이 자신의 불의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인의 긍휼에 나를 맡기는 것. 이걸 지혜라 한다, 이걸 설명하는 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였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여전히 주인의 자리에서 지가 불의를 행하는 그 상태,그걸 그대로 폭로당하면서 주인의 긍휼에 자기를 맡겨버리는 걸 지혜롭다, 라고 칭찬해주잖아요. 그러니까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자가 재물, 즉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의롭고 유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세상의 그 인본주의를 동시에 따를 수 없다는 걸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못 섬긴다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재물이라는 건 단순히 돈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걸 이야기해요. 그게 부자에요. 부자 그것과 어떻게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냐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어떻게 동시에 같이 인정하고 그걸 추구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그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유 끝에 율법주의자들이요 인본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로 표현을 해 놓은 거예요.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지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든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6천 명 정도 됐거든요. 근데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되려면요 일 년 동안 시험을 거쳐요. 그리고 거기에서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 한해 삼 년을 더 교육 받아요. 그러면 비로소 바리새인이 되는 데 산헤드린 공회원 말고 그냥 바리새인 되는 데에요. 그들이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지 아세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부자라고 표현하시는가 하면 돈, 즉 맘몬을 섬기는 자들은 돈으로 자기의 위상을 세우고 사려는 것처럼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로 자기들의 위상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임을 알게 쉽게 설명하게 위해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부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로 밑에 보시면 돈을 좋아하는 그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어절을 예수님이 어떻게 부연하시는지 볼까요? 나와요.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갑자기 돈을 좋아하는 자다, 라고 이야기해놓고 니네들은 사람 앞에서 옳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죠? 요게 부자다. 이런 뜻이에요. 요게 돈을 좋아하는 거다. 그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이야기의 끝에 뜬금없이 율법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바로 그 밑의 절에.
눅 16:16-17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여러분 이게 전부 이렇게 연결이 되세요? 율법, 진짜 부자와 진짜 가난한 게 무엇인지 이것을 이 전체 문맥의 핵심으로 가지고 읽어 내려가지 않으면 하나도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 비유 이야기 나오다가 갑자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또 율법 이야기 나오고 사람들 앞에서 옳다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무슨 이야기냐고요? 이게? 돈을 좋아한다는 건 바로 나는 괜찮은 자이니까, ‘내 안에도 의를 행할 능력이 있으니까 주인이 전적으로 나를 긍휼하게 여기지 않아도 돼요.내가 뭔가 보탤 수 있어요.‘ 요게 부정되는 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잖아요. 그는 끝까지 부정한데 주인이 긍휼을 베풀어서 그걸 알아먹은 그 자를 지혜롭다고 해주는 거지 그가 지혜로운 일을 해서 지혜롭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놓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비유를 싫어하더라,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하는 이 비유를 싫어하더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그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뭐냐면, 그들의 정체가 뭐냐면 자기들이 사람들 앞에서 옳다고 자랑 하는, 자기들이 자기들 안에 갖고 있는 것으로 자랑하는 그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밑에 율법의 시대는 요한에서 끝난 거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져서 그 복음이 너희들을 침공해 들어오는 건데 니들이 그걸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이 바리새인들아,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놓고 그 바리새인들을 부자인,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 밑에 붙이는 비유가 뭐냐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체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의한 청지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문맥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지 못하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엉뚱한 비유가 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그 부자는,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왜 지옥 가야 돼요? 돈 많으면 다 지옥 가야 돼요? 아뇨, 바리새인이라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의 의를, 예수의 의를 전적으로 붙들지 않고 그분의 의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갖고 그 예수의 의에 뭔가 보태려고 했던 부자의,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 니들은 다 지옥 같다. 이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란 말에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그 부자, 그 바리새인은 거지 나사로와 구렁으로 갈라져 있죠? 그 구렁은 건너지 못하는 구렁이에요. 근데 여러분 그 구렁을 누가 만들었어요?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창녀나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저 사람들과 같지 않아서 저는 참 복 받은 자네요. 감사합니다, 라고 했죠? 요 분별과 구별을 구렁이라고 해요. 바리새인이 만들어놓은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지들이 그런 구렁을 만들어놓으면요 묵시 속에서 그 구렁이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구렁이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구렁을 가르는 장면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와요. 9절 보세요.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게 구렁이죠? 자기들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요 자. 이게 지금 거지를 보고 나는 부잔데 너는 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니? 라고 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이란 말에요. 그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란 말입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보세요. 이게 뭐예요?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 거집니다, 란 뜻이잖아요. 이게 거지와 부자 나사로의 비유, 그 네러티브에 연결이 되는 거란 말에요. 나는 가난한 잡니다. 나는 목말라요. 그러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지덕지합니다. 나는 그것만이라도 먹으면,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네요, 가 거지예요. 거지 나사로예요. 이 세상에서 성도는 바로 그렇게 밀려 내려가게 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내 안에서는 끄집어낼 의가 요만큼도 없네요. 하나님 부스러기라도 좀 먹여주세요, 가 거지에요. 그런데 부자는 내가 왜 그런 부스러기를 먹어야 돼요? 나는 가진 게 있어요. 보세요. 나는 저렇게 헌데를 개 핥는 저 지저분한 거지도 내쫓지 않고 내 집 문에서 구걸을 하게 놔두는 착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인 거예요. 그것이. 그런데 천국에 올라갔더니 부자가 목말라요, 하고 있죠?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내 입에 대주세요. 이 땅에서 나는 괜찮아요. 내가 왜 목말라요? 내 안에서도 justice, 의를 행할 수 있는 힘이 있고요 나는 가능성이 있어요. 목마르지 않고 굶주려하지 않았던 자들은 천국에 올라가서, 묵시 세계에 올라가서 물 한 방울만 주세요, 라는 자리로 내려가게 된단 말에요, 란 뜻이에요. 근데 이 역사 속에서 목말라요, 배고파요, 하나님의 의로 저를 채워주세요, 했던 그 거지는 천국의 그 풍요를 다 품어 안고 있어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믿음으로 묵시 속에 올라가서 역사를 봐야 돼요. 이 부자가 묵시 속에 올라갔더니 지가 거지에요. 지가 목마른 자예요. 거기는 물 한 방울도 없네요. 그래서 역사를 내려다 봤더니 형제들이 있어요. 볼 수 있단 뜻 아니에요. 여러분. 비유에요. 이거는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진짜 중요한 게 뭔지는 묵시 속에서는 알아요. 어떻게 하라 그래요. 가서 이 묵시를 증거하여 내 동생들 회개하게 해주세요. 가서 그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않아요. 가서 그들에게 의를 쌓으라고 전해주세요. 이러지 않아요. 제사 열심히 드리라고 전해주세요. 이러지 않아요. 회개하라고 해주세요. 회개가 뭐예요? 내 안에서는 나올 수 있는 의가 조금도 없으니 하나님 나를 찾아와 주세요, 가 회개잖아요? 그죠? 우리 비유시간에 배웠잖아요.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양의 비유, 아버지가, 주인이 찾아가는 걸 회개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그러니까 회개를 하게 해달라는 건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그들을 건지셔야 그들이 여기서 부자가 되는 거네요. 하나님 진짜 중요한 건 이 역사 속에서 인간들에게 진짜 중요한 건 회개인 거군요. 그걸 아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은 믿음으로 묵시 속에서 이 역사를 다시 내려다보면서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건 회개네요. 하나님 아버지의 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네요. 그거 배우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이들과 자기와의 사이에서 구렁을 만들겠냐고요. 그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뭐라 그래요? 부자야 너는 세상 속에서 배불리 먹었으니까 여기서는 가난해야 돼. 그런데 나사로는 세상 속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잖아. 그래서 여기서 대우받는 거야.이렇게 이야기하죠? 고게 이 이야기예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예요. 여러분이 이 역사 속에서 ‘나는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의가 있다니까요’ 이렇게 여러분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는 배부른 자로 살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물 한 방울 못 찍어 먹는 정말 가난하고 가련한 자가 돼요. 그래서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게 배부른 거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아시겠죠? 다른 거 아니에요. 의를 많이 행하라, 착한 일 많이 해라! 그럼 니들 배부를 거야. 이런 뜻 아닙니다.
성도는 그렇게 묵시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명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자들이에요.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고 그들이 진짜 배부른 천국의 백성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배 그렇게 안 불러도 괜찮아요. 배부르다, 라는 건 나에 대해서 만족을 한다는 뜻이거든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만족스러우면 안 돼요. 잘 하고 있어. 많이 발전하고 있어. 으쌰, 으쌰 이거 아니에요. 배가 부른 거예요. 오히려 점점점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나중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건져다오! 라는 완전히, 예수님이 40일 굶고 주리신 상태에서 하신 그런 말씀처럼 그런 신음을 토해내야 돼요. 그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부어지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시편 103편 읽고 마칠게요.
시 103: 8-17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보세요. 우리가 이 땅에서 죄인으로 계속 이렇게 폭로당하는 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인 거라는 거죠?)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뭐라고요? 진토. 진토, 티끌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너희들한테 하나님이 뭘 기대하시겠니? 이런 뜻이에요. 천만의 말씀, 너희들에게 기대하는 거 없어! 그런 뜻이죠?)
15.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뭐, 성경이 거의 똑같은 애기들 하고 있죠?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나 시편이나 다 이 이야기잖아요? 여호와의 의. 그것만이 영원한 것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임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깨닫고 가면 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의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의에 자꾸 뭔가를 보태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분노로 퍼부으시는 악이라고 성경이 이렇게 명명백백히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공로를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합니다.
더 많이 부서지게 하시고 더 많이 잘려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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