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본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준다. 물론 성경의 어떤 본문이라도 깔끔하게 의문이 해소될 수 있도록 해석할 수 있는 본문은 없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만큼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어떤 목사나 선생이든 완벽하게 성경을 풀어 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경 해석을 하였다면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해석이나 설교, 강론을 성경을 해석한 완전체로 박제하여 성경 해석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까지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의문,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는가? 말씀이나 하나님에 대해 말끔히 다 이해되었는가? 많은 의문이 있지만 그것이 해소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시고 성경 말씀이니까 우리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제까지 교회 생활 해 온 것인가? 이런 모든 생각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제까지 종교 생활을 해 왔다는 것에 있다. 종교 생활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하니까 자신이 찾는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대하기 전에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하나 던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선악과가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나쁜 것이라고 하기에는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보는 것 같고 또 반대로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좋은 것에 의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결론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선악의 나무를 취한 자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선악 기준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선악과가 좋은 것이다’ 혹은 ‘나쁜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내 믿음으로는 선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선악과를 주셨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매여 버렸다. 그래서 이것을 ‘행위언약’으로 규정하고 성경에도 없는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표현까지 도입된 것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이론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 나무 실과를 먹었으면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원죄’가 있고 그 원죄로 인해 오늘날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범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하나이다.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해서 말씀하지 않는다. 신학이 만들어 낸 용어들에 사로잡혀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인 양 오해되었었다. 이런 모든 이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종교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 종교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우리의 본심은 에덴 동산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고 내 구원의 관점에서 ‘내가 구원받아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누차 말씀드렸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해 드러내셨고 그 언약의 핵심, 실체,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15절)라고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엘로힘’으로 나타내셨던 하나님께서 ‘창조의 톨레도트’를 통해 언약의 하나님을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표현이다. “이끌어”(히, 라카흐)라는 말은 ‘취하다, 붙잡다, 허락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아담)을 이끌어 에덴에 두셨다는 것은 에덴이라는 성전 울타리 안에 아담을 제사장으로 취하셔서 세우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도 “경작”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드’인데 ‘일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으로 이미 2:5 말씀을 통해 생각했었다.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르’이다. ‘지키다, 보존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 두신 이유가 에덴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의 뜻을 품고 새겨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것이다. 9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라고 말씀하였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라는 말씀에서 나무라는 말의 복수 ‘에츠임’은 없고 단수 ‘에츠’로만 되어 있다. 즉 한 나무인데 이 말씀은 ‘생명 나무가 선악의 지식 나무로 있더라’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두셨다는 것은 그 생명의 원칙을 이제 나무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다.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7-20) 세례자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라고 이미 선포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나무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나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일차 독자의 입장에서 성막을 생각하자면 성막 뜰에서 제물을 잡아 지성소에 이르는 과정에서 성소를 만나게 된다. 그 성소는 왼쪽에 등잔대와 오른쪽의 떡상을 통해 오실 메시아를 기억하게 한다. 즉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무로 바뀔 때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16절)라는 말씀에서 “각종 나무”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모든 나무’라는 말이고 이 나무는 단수로 쓰였다. 즉 ‘한 나무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단수로 쓰였다는 것은 동산의 모든 나무를 하나의 나무에 어떤 목적을 담아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열매”라는 말은 없고,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하였는데 “임의로”라는 말도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맡기시되 그 동산 모든 나무를 (하나로) 먹고 먹으라’라고 먹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즉 나무를 양식으로 취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7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번역하였는데 형용사 ‘알게 하는’이 아니라 ‘지식’(히, ‘다아트’)이라는 명사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선악의 지식 나무’라는 말이다. 여기서도 우리 성경에는 “열매”라는 말을 의역하여 집어넣었다.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한 말씀은 히브리어로 ‘모트 타무트’라는 말인데 직역하면 ‘죽고 죽는다, 죽음으로 죽는다’라는 뜻이다. 죽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우리 성경에서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밈멘누’라는 단어인데 3인칭 단수로 ‘그것으로부터’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직역하면 ‘선악의 지식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나무로부터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이다.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우리 성경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도 빠진 표현이 3인칭 단수 ‘밈멘누’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하나가 되었다’라는 말로 선악의 지식 나무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나무를 주심으로 먹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드셨고 그것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하심으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담에게 선악의 지식 나무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 자체로만 먹으면 죽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선악의 나무는 아담만 먹어 그 죄가 전가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선악의 지식 나무를 먹지 말라,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나무를 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울 사도가 선악의 지식 나무가 율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은혜가 왕 노릇 하기 위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는 말 때문에 무조건 좋지 않은 의미로 이해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이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 놓았다고 선언한다. 즉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이루실 계획을 하나님은 이미 세워놓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나무를 율법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한다.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8-1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결국 하나님은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생명을 주시는 은혜,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 나무가 되는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계 2:7, 22:1,14). 그러므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주신 것에 대해 원망하고 불만을 품을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와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202209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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