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제11장성령(Ⅱ), 성령세례<요16:7-11>

Hebrew 2022. 11. 10. 11:53


제11장
성령(Ⅱ), 성령세례












<요16:7-11>
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마귀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공격하여 그들을 괴롭힐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천사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묘사될 만큼 커다란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오죽하면 그가 하나님하고 대결해 보겠다고 반란을 일으켰겠습니까?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단 칼에 전멸시킨 것이 천사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천사들의 장(長)이 마귀입니다. 그 마귀가 수천 년 동안 고민하고 있는 게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인가 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렇게 어리석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할까요?
일본에서처럼 예수님의 사진을 밟게 하는 ‘후미에’를 시켜서 듣지 않으면 감옥에 쳐 넣어버린다든지, 북한에서처럼 예수 믿는 자들을 수용소에 격리 감금한다든지, 로마에서처럼 사자 밥으로 던져버린다든지 하는 그런 방법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떤 전략과 전술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겠습니까? 너무 쉽습니다. 계속 예수를 믿도록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거짓 예수와 거짓 복음에 광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열심을 부리게 놔둡니다. 헌금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이나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도,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도 같은 것들은 무시하게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열심히 믿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기독교를 좇아 평생 열심을 낸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는 줄 착각하면서 마귀의 전략대로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마7:21-23>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지경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제대로 잘 믿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열심으로 위장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행위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종 이단들이나 이교에서도 그런 열심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열심이 구원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러한 마귀의 소행으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행하던 행위가 버젓이 교회에 들어와서 섞여 버렸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비빔밥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 맛도 아니고 저 맛도 아니고 도대체가 미뢰(味蕾)를 혼란시키는 그런 잡교가 된 것 같습니다.
엘리야와 겨루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소원을 바알에게 빌면서 했던 행위를 보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이교적인 것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상18:26-29>
26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그들은 바알을 경배하며 춤을 춥니다.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 흥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한 때 한국 교회를 강타했던 열린 예배입니다. 아니 지금도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전 세계 교회의 예배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열린 예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 믿지 않는 자들을 예배당으로 모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예배에는 드라마와 댄스, 간증, 연주 오페라 등이 가미가 됩니다. 사람들이 흥겨워하고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극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예배당에서도 연출을 해 주어 그들을 예배당으로 불러 모으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 복음을 설명하면 정말 창세전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도 구원의 문으로 들어 올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드라마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 정말 하나님께서도 놀랄 만큼 전도에 효과가 있을까요?
무엇이 예배입니까?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예배입니까? 예배란 구원 얻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며 그 분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분 앞에 엎드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천국잔치가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린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즐겁게 하고 흥분케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다 이교에서 슬며시 들어온 것들입니다. 계속해서 27, 28절을 보십시오.


27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그들은 또 소리쳐 신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귀가 막히셨습니까? 왜들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까? 요즈음의 주여 삼창, 통성기도가 생각납니다. 물론 너무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 소리가 크게 나올 수 있습니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애절한 간구가 있을 때 누구나 소리를 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 ‘주여’를 외치거나 목이 쉬도록 소리쳐 기도를 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연유에 기인합니다. 그 한 가지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목소리가 커야 거룩한 신앙인처럼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소리로 기도하면 왠지 정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데도 하나님이 외면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큰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더 큰 복을 받아야겠는데 다른 이가 나보다 더 간절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아닙니까?
그리고 이교도들의 특징이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보시면 피가 흐를 때가지 창과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이나 힌두교인들이 구도의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 쓰는 것이 고행입니다. 자기 몸을 자해하는 것입니다. 소지공양, 소신공양, 오체투지를 보십시오. 자해를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신념이 그러한 것을 배태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그런 것들이 들어 왔습니다. 금식기도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는 곡기(穀氣)를 끊고 ‘하나님 저는 이 땅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저의 힘으로 삼아 이 세상을 살겠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이렇게 굶어가면서까지 기도를 하는데 안 들어 줄 거야?’라는 공갈협박이 금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금식이 어떻게 쓰여 지고 있습니까? 새벽기도나 천일기도, 철야기도 다 좋습니다만 그것을 자신을 자해하여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공갈협박으로 쓰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29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그들이 무얼 합니까? 미친듯이 예언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 좋아하시지요? 이게 다 뭡니까? 우리가 예배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다가 참수되어 죽은 자들과 똑같은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이 좋은 신앙의 표본이라고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속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으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13:1-18>
1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본문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이 용에게 권세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짐승이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납니다.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그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나온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들을 행하면서 바다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이건 또 누구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까? 성령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을 정확하게 흉내를 내지 못하니까 고작 기적을 동원해서 성령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수가 666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탄과 그 세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흉내를 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복이나 받고, 신비적인 체험이나 하고,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어서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탄과 그 무리들을, 믿지 않는 자들을 포함한 그 전체 마귀의 세력들을 666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통합 ID카드도 아니고 바코드나 베리칩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두운 세력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성령의 사역에 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성령하나님은 기적이나 체험을 하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불이나 내리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왜 또 필요합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시체가 살아나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감지하게 되었는데 그 큰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병이나 고치고 은 이빨이 금이로 변하는 그런 유치한 장난 앞에서 합장할 수 있겠냐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믿음이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게 된 자들을 믿음이 있는 자,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물질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적이나 신비를 자꾸 보고 싶어 합니까? ‘난 믿음이 없으니 뭘 좀 보여 주세요’라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믿음이 없는 자, 불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사역을 하나하나 짚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시고 가신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고 깨닫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빛을 증거하기 위해 광야에서 그토록 애절하게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빛은 증거하고 설명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아 저게 빛이구나.’ 이렇게 우리는 빛을 보기만 해도 빛인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빛을 증거 하도록 누군가를 보내셨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모두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세상은 예수님을 못 알아봤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6-11>
6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 지 아니하였으나


이처럼 모든 인간들이 그 빛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빛이 누구이시며 왜 오셨는지 그리고 그 분이 오신 결과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알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요14:26>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5:26>
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16:13>
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정확하지요? 이처럼 성령께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 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히 이해시키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엄청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가 무엇이며 우리가 받았어야 할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16:7-11>
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완전히 복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영광의 복귀를 하셨다는 것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해 내시고 올라가셨다는 말입니다. 그 구속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이해가 가게 해주시는 분으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8절에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는 두 가지 의미로 이 단어를 씁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했고 다른 한 가지는 원래 그 세상 속에 속해 있었으나 그 세상에서 건짐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가리켜 세상이라 칭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절대 성령을 인식하지 못 하니까요.


<요14:17>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고 여기서 ‘책망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엘렝코’는 ‘꾸짖다’는 의미와 함께 ‘깨닫게 하다’의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가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뚫고 들어오셔서 죄가 무엇인지,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떤 지경으로 가야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는지, 또 세상 권세 잡은 자, 사탄과 그 무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우리도 원래 그 심판의 대상이었다는 것 등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행2:33>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세상은 예수님을 심판해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 분을 오른 손으로 높이셨습니다. 그 말은 세상의 심판은 오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엉뚱하게 심판하여 잡아 죽인 세상은 이제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었다고 복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함께 돌을 들어 예수를 찍었던 우리는 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종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받은 세상에 자꾸 성을 쌓으려고 노력하면 어쩌자는 말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 이 땅이 끝이 나며 심판이 일어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겁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말세의 징조로 “처처에 기근이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나고 홍수가 일어나며 지진이 일어나며 나라와 나라가 싸우며 민족과 민족이 싸우리라.” 기근, 지진, 전쟁, 홍수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고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세의 진의가 뭡니까? “이 땅은 곧 끝나버릴, 재 하나도 남김없이 불 타버릴 그런 곳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라.” 그게 바로 말세를 사는 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요 세상을 사는 자세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고 지진이 일어날 때 나의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모두 불타버릴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매일 세 번씩 지진이 일어나고, 풀과 나무가 심기만 하면 말라죽고, 이상하게 그 집에만 들어가면 싸움이 일어나고 한다면 그 집에서 살고 싶겠습니까? 당장 집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지구를 그렇게 흔들고 계십니다. “나의 백성들아 너희는 저 하늘로 완전히 이사 가게 될 자들이다. 여기에 정주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즉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령이 오셔서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불의 혀 같은 성령을 받고 방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적어도 열다섯 개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각기 자기의 태어난 곳 언어로 그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는 많이 잊었지만 오랜 포로 기간을 거쳐 헬라어와 아람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뭔가를 전달하고 싶으셨다면 당연히 제자들의 입에서 헬라어나 아람어가 나오게 하셨겠지요? 그랬으면 그들이 모두 이해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태어난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의 말이 들리게 하셨을까요? 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 사건은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지고 패역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겠다고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갈갈이 찢으셨습니다. 언어가 갈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증거라 했습니다. 그 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저주가 풀린, 다시 하나가 된 한 무리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그들이 각기 난 곳 언어로 들을 수 있도록 언어가 소통이 된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가 되어 다 통하더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그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26>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성령이 임하시면 이처럼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걱정하며 사랑하며 때로는 옳지 못한 행실을 사랑으로 꾸짖으며 한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자 그 곳에 있는 교회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그들의 기도를 이해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려난 ‘하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 안에서 굶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는 불쌍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팔이 부러지면 잘라버리지 않고 잘 싸매서 목에다 걸듯이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어떤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 어느 한 분이라도 우리의 구원의 사역에서 빠지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을 홀대하지 마십시오. 그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지 마십시오. 성령하나님께 오라 가라 명령하지 마십시오. 그건 성령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아무 때나 램프를 문지르면 나와서 나의 필요를 채우고, 나에게 깜짝 쇼를 보여주고 돌아가는 그런 저급한 요술쟁이가 아닌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성령 충만’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성령 충만’이라 합니까? 얼굴 빨개져 가지고 몸을 벌벌 떨면서 입에 거품 무는 것, 확률 50%도 안 되는 어줍지 않은 예언,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방언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합니까? 다음 장에서 성경에 근거해 밝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