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아브라함 언약(4)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이스마엘 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사람의 행위를 보태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께 쫓겨나야 하는 언약 밖의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아브람 86세입니다. 이때로부터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아브람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3년이 지난 뒤 이스마엘은 13세, 아브람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1-5절입니다. 1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이미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 못한 자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전능하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고 완벽하게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기는 하지만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소원과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나의 만족과 유익을 채워주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들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갖 충성과 정성을 바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빙자한 우상이라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나의 언약을 내가 완벽하게 이루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2-3절을 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로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삼으시는데 왜 아브람을 택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시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일부러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택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생식능력이 있었지만 사라는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이런 부부를 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홀로 이루어내심을 보이시려고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심을 보이시려고 이런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도 이름을 사라라고 바꾸게 하시면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주실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나이가 100세이고 사래가 90세인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웃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었습니다. 사라는 이미 생리가 끊어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불신을 배경으로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이루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할례는 단지 포경수술의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의 생식능력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이미 사라는 폐경의 여인입니다. 이런 부부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웃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웃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니 하루에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겠습니까?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비웃었는데 하나님은 약속대로 나의 웃음이 되는 이삭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신앙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도 믿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3년 동안 합숙하며 제자훈련을 받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에 대하여 말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의 일이 곧 사탄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26절입니다.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를 비교하면서 율법과 약속,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시내산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행위로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능성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마치 믿음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과 꿈을 설정하여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이루어내려는 인본주의입니다. 세상의 성공신화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입니다.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과 연결하여 말씀을 보겠습니다. 로마서4: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된 믿음입니다. |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 > 언약을 따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강.모세언약(1) (0) | 2022.11.10 |
---|---|
12강.아브라함 언약(5) (0) | 2022.11.10 |
10강. 아브라함 언약(3) (0) | 2022.11.08 |
9강. 아브라함 언약(2) (0) | 2022.11.08 |
8강. 아브라함 언약(1) (0) | 2022.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