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32번 말씀
제목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하는 기도
본문 마 6: 5-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으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멘.
자, 우린 지난주에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그 ‘프로스’ 라는 단어가 향하다, 라는 단어죠? 우리를 향하여 원하시는 가지고 계시는 그 뜻, 그 마음을 올바로 알아서 기도라는 단어 자체가 어디, 어디를 향하여 원하다, 구하다 이런 뜻이니까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우리를 향하여 어떤 원함을 갖고 계시겠죠? 그 원함을 제대로 알아서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아, 그거? 그거 원하는 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빨리 주세요. 그게 아이테오라 그랬죠? 빚진 거, 빨리 나에게 갚으세요, 라는 그런 의미. 그렇게 강한 의미라 그랬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것 이것을 프로슈코마이라고 한다 그랬죠? 기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은 그 프로슈코마이라는 단어를 신앙고백하다, 중보하다, 중재하다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의 많은 학파와 종파들이 전부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도문이 그 학파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그 학파가 지향하고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자기들의 그 진리, 자기들만의 진리를 요약한 게 그들의 기도문이었단 말에요. 그러니까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우리의 육의 어떤 필요를 구하고 얻어내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거의 대두분의 사람들이 그런 걸 이제 기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이, 그 뜻이 나의 원함이 되어서 하나님의 원함이 나로부터 다시 흘러나오는 거 그것을 기도라고 해요.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그런 연유에서 프로세코, 주의하라, 로 시작되는 이 6장의 서두에 이 기도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 기도라는 걸 할 때 어떻게 주의해서 해야 하는지를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시해주셨는지 우리가 한절, 한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절을 보시면, 오늘은 제가 5절만 할 거예요.
너희는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아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씀은 그 위의 구제, 엘레모수네, 그 구제에서 주의사항을 주실 때 고 때도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잖아요? 너희들은 구제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그건 외식하는 자들이 그렇게 하는 거다. 그러잖아요? 똑같이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아라, 라고 얘기한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외식하는 자, 휘포크리테스는 연기자라는 의미라고 그랬습니다. 자기가 아닌데 남이 되어서 그 남의 말을 그냥 대사로 읊조리는 거죠. 내 것이 아닌데 그 표피적인 어떤 소리를 가지고 그 소리를 전하는 거. 이거를 휘포크리테스, 외식이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아라, 의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그 진의도 모른 채 연기자의 대사처럼 소리로 전하고 그런 거 하지 마.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하면 영 안에서 가난한 자, 구제라는 게 어떤 가난한 자를 건져내는 거잖아요? 근데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에서 그 가난한 자는 푸토코스였죠? 페네스가 아니었어요. 페네스는 진짜 돈이 없어서 먹을 게 없는 그런 가난한 사람을 상대적 가난이에요, 그거는요. 그런 거는 페네스라고 하지만 달라요, 단어가. 헬라어에서는. 푸토코스는 그거가 없으면 그냥 존재도 아닌 거. 죽어버리는 그 상태. 그걸 푸토코스의 가난이라고 해요. 절대적 가난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의 그 ‘심령’은 또 호푸뉴마란 말에요. 관사가 붙은 푸뉴마. 그러니까 말씀, 혹은 진리의 성령, 진리의 말씀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마음, 심령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역격이란 말에요, 그게. 그러니까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 말씀 안에서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푸토코스들이 있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을 떠 올리면서 그래 그것만 있으면 살 수 있지, 이것만 해결되면 살 수 있지, 라고 많이 하는데 푸토코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거는 날 살릴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나를 살릴 수 있는 ‘그거’, 그거 없으면 나는 죽어요, 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들을 포토코스라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그들이 진짜 살아나는 데에 필요한 그걸 주는 거는 우리가 구제라고 한단 말에요, 엘레모수네. 그 엘레모수네라는 단어 자체가 에이레네랑 어근이 같다고 그랬습니다. 에이레네가 뭐예요? 평강, 평화. 그 엘레모수네가 되어서 그 푸토코스의 가난한 그에게 그가 원하는 그 진리의 말씀이 주어져서 그가 이제 살아났어요. 살아나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뜻, 그 뜻대로 한 방향을 향하여 하나님과 한 멍에를 지고 가면 그걸 에이레네라고 한단 말입니다.
요즘 설교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이런 게 어렵다는 거예요? 아니면 뭐가 어렵다는 거예요?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그걸 안 할 거 아니에요? 이런 말씀을 듣는 게 어렵습니까? 여러분이 이걸 자꾸 들으셔야 그래야 여러분이 나중에 여러분이 혼자 성경을 읽으실 때, 제가 언제까지 여러분 곁에 있겠어요? 여러분이 혼자 그렇게 성경을 읽으실 때 그 틀 안에서 여러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그릇이 마련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번 이야기해드릴 때 자꾸 들으셔서 여러 분 걸로 이렇게 만들어놓으셔야 돼요.
자, 엘레모수네, 구제라는 건 푸토코스의 상태,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 성령 안에서 그 말씀에 갈급한 그 자에게 그 말씀을 주어 그를 구제해내는 게 엘레모수네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한 방향으로 가니까 그걸 에이레네, 평강이란 말에요. 이게 하나님과 반해서 다른 방향으로 가면 이게 전쟁이라니까요. 그걸 하나님이 대적한다, 라고 표현한단 말에요. 그러니까 그 에이레네를 이루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게 엘레모수네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엘레모수네 그거를 그들이 필요한 그 진리가 아닌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표피적인 어떤 것으로 전해주면 그들을 먹이는 게 아니라 그거는 그들에게 완전히 독을 주는 거예요. 독극물을 주는 거라고요. 그래서 주긴 주는데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니까요.
그렇게 진의도 담지 못한, 소리, 그냥 소리로 주게 되면 그게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니? 그러니까 주의하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제나 푸로슈코마이, 기도나 같은 거예요. 기도, 프로슈코마이도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그 뜻, 사랑이잖아요? 아가페. 이걸 받아서 아, 그거요? 하나님 그거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다는 게 이거예요 라고 흘리고 또 나에게 그렇지, 하나님이 주시는 게 그거지. 이게 시편기자들의 기도였잖아요? 이 기도라니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다른 모든 종교인들, 아니 신이 뭔지도 모르는 어떤 이가 정한수 떠놓고 비는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이 다 하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에게도 기도하잖아요? 그걸 자기암시라 그래요. 긍정의 힘, 이런 게 기도에요. 누구에게? 나에게 기도하는 거라니까요. 모든 인간이 다 기도한다고요. 하나님은 그런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요. 근데 워낙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개념이 바로 그거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전달을 해주면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이게. 그럼 그동안 내가 그토록 열심히 했던 걸 다 부정하는 거란 말야? 네! 다 부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이 빠질 수밖에 없죠. 그 뭐 로마에 가서 에베소에 가가지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죽은 게 개죽음이다, 그랬더니 그날 하필 선교사님들이 많이 오셔가지고 ㅎㅎㅎ, 뭐 저런 게 다 있냐고 그러고 갔다는데.
그러니까 그런 거, 제가 사실 그런 원색적인 것들을 마구 터트리려고 한국에 온 거거든요. 왜냐면 거기에 익숙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거를 더 한 단계 높여서 이제 깊이 들어갈 때 굉장히 제약이 많아요. 이제 제가 결론부분에 온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못 할 말이 없어요. 다 하고 장력하게 끝낼 거예요. ㅎㅎㅎ.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들으세요. 무슨 유익이 있다고 제가 이런 얘기를 여러분에게 하겠습니까? 그런 거 저런 거, 원색적인 거 몇 개만 제가 피해서 줄여버리면 여기에서 사람들이 말씀 듣겠다고 온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뒷문을 다 막을 수 있어요. 근데 그렇게 막아서 붙잡아두면 뭐하냐고요? 오히려 자꾸 걸러지는 게 맞는 거예요.
자, 이렇게 생각해보십쇼.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 그 심령이 가난한 자. 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가 천국을 자기 것으로 갖는다, 라고 그러죠? 거기서 천국이라는 게 바실리오, 그 바실리오라는 건 하늘의 통치,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이 호 코스모스로 준 성경, 그리고 뭐 세상, 인간, 예수 다 마찬가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진리, 그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준 거 그걸 호 코스모스, 세상이라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걸 통하여 그게 뭔지 알았을 때 그거를 하늘이라 그런단 말에요. 그래서 성전도 하늘이라고 부를 때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늘의 통치, 하늘의 섬김, 바실리오는 섬김이에요. 통치라고 우리가 번역을 하지만. 그 하늘의 통치 그 하늘이 진리로 섬기고 있는 어떤 이들은 반드시 마음이 가난해지게 돼 있다, 라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그거 없으면 난 안 돼! 의 상태로 끌려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거 없으면 안 돼’ 의 상태로 끌려간다, 그러면 다른, 그거 이외의 다른 것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을 몸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게 힘들다, 라는 거예요. 그거 부정하는 게 많이 힘들다니까요. 거기에는 재산이라든지 무슨 자기의 명예라든지 이런 것도 있지만 자식, 손자, 며느리, 부모 할아버지 다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근데 이건 다 나의 힘이었고 나였다니까요. 근데 이게 나의 힘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건 그 진리, 알레떼이아, 그거 밖에 없다는 것을 그 푸토코스의 상태로 하나님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이거를 하나님이 나에게서 칼로, 칼로 오신 말씀이라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그것도 좌우에 양날 선 검. 이걸로 끊어내는 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장소란 말에요 그것이. 그게 천국의 통치를 받는 이들에요. 하늘의 통치, 하늘의 섬김.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모든 성도가 신앙생활이라는 일을 하죠. 그런데 그들에게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는 양식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가 썩는 양식이고 하나가 썩지 않는 생명에 이르는 양식이에요. 근데 썩는 양식이라고 여기서 번역이 된 이 말은 아폴로미인데요 완전하게 멸망하게 하는 양식이라는 뜻이에요. 단순히 썩어서 없어지는 양식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폴로미는 완전하게 멸망시키는 양식이라는 거예요. 그건 독이라는 말이에요, 독. 그러면 멸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구제와 기도의 그 양식이 뭐라는 말일까요?
요 6: 48-50,5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양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 보셔야 돼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여러분 만나가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 그랬습니다. 근데 만나를 먹었는데 왜 죽었을까요? 만나가 뭐예요? 그 이름은 누가 붙여준 거죠? 인간이 붙인 거예요. 만나라는 말이 What is this? 이거 뭐야? 하늘에서 떡이 양식이 내리는데 그 진의를 모르고 이거 뭐야? 내가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에요.]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근데 죽었단 말이에요. 그걸 하늘로 내려오는 양식으로 먹으면 살아요. 그런데 ‘What is this?’, 만나로 먹으면 죽어요]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여기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진리의 양식, 진리의 음료에요. 알레떼이아. 내 피는, 내가 너희에게 피와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너희는 엉뚱하게 그걸 떡이라고 하면서 그거를 떡 삼아 말씀을 받아서 그걸 떡 삼아 그걸 에너지 화하여 그걸로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한단 말에요. 그러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 내가 말하는 살리는 양식, 떡과 그 살과 피라는 건 진리의 살, 진리의 피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내용이 있다, 라는 거예요. 근데 그걸 모르고 그냥 이게 나를 살리는 거래요, 예배에 참석하면 산대요. 말씀 들으면 산대요, 라고 하면서 그걸 들어요, 참석해요. 그리고는 그걸 힘 삼아 나가서 뭔가 하려고 하는 이게 죽는 거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 안 섬겼습니까? 성막 만들으라고 하면 성막 만들었고요 서라고 하면 섰고 가라고 하면 갔어요. 근데 왜 다 죽이냐고요? 제사 지내라고 했을 때 제사 지냈다니까요. 아이 그들이 뭐 대단하게 먹을 게 많았겠어요? 애굽에서 갖고 온 거 그게 다였다니까요. 광야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았고. 그런데 매일 같이 자기들의 양식을 잡아서 다 태워버렸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뭘 안 했어요? 무슨 말을 안 들었냐고요? 근데 하나님은 그 일을 하는 걸 말을 안 들었다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말씀은 우리에게 떡으로 주는 게 아니에요. 아니, 떡으로 주는 게 맞아요. 근데 그 떡은 진리라는 내용이 있는 떡이라니까요. 근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할 때 뭐라고 해요? 돌로 떡 만들어 먹으라고 그러죠? 돌은 뭐예요? 예수님을 산돌,구약에서. 뜨인 돌, 모퉁이 돌. 예수님을 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돌이 우리에게 떡으로 먹히러 오는 게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니까요. 맞아요, 마귀가 그 진리를 이야기한 거예요. 돌이 떡이 돼야 사는 거지. 근데 예수님이 그러죠? 근데 그 떡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야.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근데 너는 떡까지는 아는데 그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진리라는 것까지는 모르는구나? 그러면 그 떡 먹고 죽는 거야. 만나 먹고 죽는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근데 오늘날 교회는 떡에서 다 멈춰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갸롯 유다가 그 떡 가지고 나가는 거예요. 떡까지는 갸롯 유다. 하나님은 그를 사단이라고 그랬어요. 이놈 마귀다, 그랬단 말입니다. 마귀는 떡까지 안다니까요. 근데 그 마귀가 떡 받아서 나가자 자, 그래 이제 그놈 나갔으니까 내가 얘기할 게 하고 다락방 강화를 하신단 말에요. 그 떡까지만 아는 이들은 그 말을, 그 진리의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말씀을 만나로 먹느냐 진리로 받느냐에 의해서 생명과 죽음이 갈려지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 말은 예수, 율법, 호 코스모스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진리로 깨달아 마음으로 갖게 되느냐 그거에 의해서 생명과 죽음이 갈리게 된다는 말과 같은 거예요. 근데 당시 예수를 쫓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 표적 그분의 기능과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건 예수님의 기능과 능력에 반한 거지 그 예수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쫓은 게 아니었단 말에요. 오늘날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어떤 이들 보세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 한다고 하는 그런 이들. 목적이 뭐예요? 자기구원이란 말에요. 왜? 그분은 나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라고 믿는 거예요. 맞아요, 능력이 있는데 그가 관심이 있는 건 그 능력을 가진, 아니 그 능력으로 뭔가를 설명해주신 그분을 아는 게 아니라 그분의 능력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완전히 다른 거라니까요.
그럼 만약에 그분이 그런 능력과 기능이 없다면 어떡할 거예요? 안 믿을 겁니까? 우리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구원해주시는 주님, 나의 필요를 해결해주시는 주님.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인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의 기능과 능력만을 붙들고 있는 가짜에요. 가짜 믿음. 그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능력 그런 예수님의 어떤 기능들은 구원이 뭐고 영생이 뭐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들이 하면 안 돼요.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 사도들이 한 거, 거기까지만 유효한 거예요.
그러나 정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나타나면 안 돼요. 왜냐면 그게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오셔서 마음으로 그걸 깨닫게 해주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이가 그거 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오늘날 신유집회니 뭐니 하고 돌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가짜에요, 전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능과 능력만 바라본다면 그 기능과 능력이 사라진 예수는 반드시 죽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 이렇게 매달려 있으니까 너 한번 내려 와봐, 하나님 아들이라며? 확 내려왔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또 와~ 했을 거예요. 우리의 왕이 돼주세요. 안 내려오니까 죽여라! 그랬다니까요. 그게 인간들의 신앙이라는 거예요. 아, 떡 줄때는 찾아와가지고 왕 돼달라고 얼마나 졸랐어요? 근데 그 기능 발휘 못하니까 죽여라, 그랬다니까요. 그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거 안 주면 여러분도 그럴 거냐고요?
아니요, 그분을 알게 되면 그분이 그런 거 나에게 안 해줘도 그분만 있으면 돼요. 그게 내 마음이면 된다니까요. 우리가 누굴 진짜 사랑하면 그가 뭘 가졌든, 아니 비가 오는 판잣집에서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니에요? 대궐 같은 집에서 진짜 원수같은 인간이랑 평생 살으라고 하면 그게 천국이냐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십니다.
요 6: 62-63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나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께서 이전에 있던 곳, 하늘이죠? 그분은 하늘을 설명하러 하늘에서 오신 거예요. 하늘로 올라갈 것 같으면, 아나바이노에요. 에피라는 단어와 아나는 다른 단어라고 했습니다. 에피는 공간적 위, 아나는 탈공간적 위란 말에요. 위에서 나다, 위로 나다, 라고 할 때.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그 말을 쓴다고요. 아나바이노. 내가 그 위로 올라가버리면 그럼 니들이 지금 눈에 보이는 그거는 없어지는 거야. 니네 눈에서. 그럼 어떡할래? 니들 지금 나의 기능과 나의 능력, 그거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과 피를 이야기하니까 그래? 조거 잡아먹으면 내가 사는 거야?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육이 어떻게 너희를 살리니?
카톨릭에서 요즘 그 성찬식 하면서 그 떡이 우리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살이 되고 그게 뭐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피가 된다고 화채설을 주장하잖아요? 그래서 말씀은 안 전해도 그건 꼭 해요. 그거 꼭 받아먹어야 된다고. 아니, 예수님이 그랬다니까요. 내가 그런 보이는 것이 아닌 이전에 있던 곳으로, 진리로 올라가버리면 어떡할 거야? 그러면 니들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신앙하던 그건 다 날아라가 버리는 건데 그럼 어떡할래? 그러면서 뭐라 그러세요? 살리는 것은 영이지! 여기서도 푸뉴마에요. 영이지. 야,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이지. 살리는 건. 그 육, 껍데기는 무익한 거라니까. 그리고 성찬식 이것도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알면 그 다음부턴 안 하는 거예요. 사실은. 진리가 됐는데 그 짓을 왜 하고 있냐고? 그게 뭔 줄 확실히 알았는데 내가 마음으로요. 근데 대부분 잘 모르니까 그냥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계속 해주는 거예요. 뭔지 아냐고 물어보는 거라니까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게 로고스에요,] 말이 그게 영이야, 그리고 그게 생명이야.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럼 이걸 알아먹어야 될 거 아냐? 내가 지금 말하는 거. 이 내용을 알아먹어야 될 거 아냐? 그게 영이고 그들을 살리는 거고 그게 생명인데 왜 나에게 엉뚱한 거 요구해? 나는 너희가 진짜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거 나는 관심 없어. 왜? 나는 진짜 생명이 뭔지를 알거든. 나는 진짜 그 하늘의 생명, 하늘의 풍요를 너희에게 주러 온 거야. 그래서 너희가 원하는 그거는 안 줄 거야. 왜? 그걸 줘버리면 너희들이 그걸로 죽을 거거든. 그런데 내가 만일 너희들이 원하는 그걸 안 준다고 해도 너희들이 날 왕 삼으려고 할까? 묻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시겠느냐고요? 여러분을 절대 도와주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나랑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절대적 타자로 존재하는 그런 매몰찬 분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나에게 여겨, 느껴지는 그분. 그래도 그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입니까? 거기까지 몰로 가는 거예요. 나에게 잘 해주는 어떤 분? 누가 못 사랑합니까? 그런 분을? 나에게 못 해주면 어떻게 돼요? 애증이 돼버리죠? 사랑한 만큼 미워한다니까요. 그걸 무슨 사랑이라 그래요?
주님은 살리는 건 예수의 능력과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 영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걸 보지 못하고 무조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건 멸망에 이르는 양식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근데 어렵죠? 차라리 목숨 걸어서 날 위해 니 목숨 걸어 나를 섬겨라 그러면 그건 해볼 수 있는 거 같애요. 그리고 쉬워요, 사실 그거는. 근데 그렇게 죽으라고 하지 않고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으라고 그러니까 이건 완전히 내가 무시되는 거거든요. 어렵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진리가 전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바로 밑에 보세요.
요 6: 60-61, 66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아, 어렵다. 누가 그 말을 알아들어? 이 말이에요, 이게. 어렵다 누가 그 말을 알아들어? 진리? 영? 그게 뭐야? 그냥 열심히 하라고 하면 할게! 근데 진리를 뭐고 영은 뭐야? 그게 살리는 거야? 그게 생명이야? 제자들이 아, 어렵다. 그걸 누가 알아들어? 그러더니]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니까 진리가 전해지면 일단 걸림돌이 된다니까요 그게. 넘어지라고 주는 거예요. 근데 그들이 넘어지면서 그냥 넘어지는 게 아니라 장돌을 하나씩 집어들고 그분을 찍으면서 넘어지는 거예요. 왜 날 넘어트리느냐고? 잘 하고 있었는데]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
여기에 쓰인 단어가 ‘우케티’에요. Never! 그 다음부턴 Never! 절대 그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눴다는 얘기에요. ‘우케티’. 뭐 저런 말을 하냐고. 이게 맞대니까요. 이런 증상이 일어나야 돼요. 뭐 구름 떼처럼 벌떼처럼 꾸역꾸역 모여드는 게 무슨 부흥인줄 아세요? 부흥이라는 단어 자체, Revival 이라는 단어 자체가요 그러한 것들 우수리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부흥이라 그래요. 근데 우리는 잘못 알고 있죠? 수년 내에 우리를 부흥케하소서! 란 말은 하나님 빨리 오셔서 하나님이 보기에 나쁜 것들은 쳐주세요, 란 뜻이라니까요. 빨리 오셔서. 어떻게 그게 되는지 몰라요. 몇 만 명씩 모이고 이러는 게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무슨 말을 하기에?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당연히 진리의 말씀으로만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여전히 육의 가치의 향상과 육의 확장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말이 안 들려요. 걸림돌이 되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법이 훨씬 좋아요. 쉽거든요. 하나님이 안 도와줘도 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할 수 있어요. 그게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들 수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부분까지는 인간이 진짜 목숨 걸고 한다니까요. 사람들이. 심지어 자기 몸에 신나 붓고 불을 붙이는 게 인간이에요. 자기의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서는. 말씀을 법으로 받아서 육의 열심으로 육의 열매를 맺어가며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거 재밌습니다. 재밌어요. 저도 해봤어요, 재밌습니다. 내 거를 많이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그러죠? 내가 내 것만 막 챙겨갖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거나 인기와 명예를 축적하는 거 보다 그렇게 내걸 많이 희생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몇 며 안 돼도 좋아요. 진짜 존경 받잖아요? 그걸로 평생 삽니다. 여러분 그건 인간의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복주의나 신비주의나 율법주의는 성화주의, 마찬가지 다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돌비에 새긴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고 했어요. 무슨 말이겠어요? 돌비에 새긴 말이 뭐예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처음 주셨을 때 돌에다 새겨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이에요, 돌비에 새긴 건. 근데 그걸 심비에 새기라는 건 뭡니까? 그게 돌비에 새긴 내 밖의 것이 되면 항상 나에게 지켜야 할 어떤 것을 강요하는 법이 되지만 그게 아, 이게 그거였어? 라고 내 마음이 되면 그게 내 마음에 법을 새긴 게 되는 거예요. 그걸 법을 마음으로 가진 자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가 진짜 산자다, 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먹으로 쓴 건 성경이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내가 말씀으로 너희에게 가르쳤지만 그 말씀을 너희는 진리의 영으로 받았잖아? 그래서 니들을 편지라고 하는 거야,라는 거예요.]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자, 이렇게 말씀을 돌비에 쓴 것만으로 가지고 있으면 법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그를 멸망으로 밀어버리는 거예요. 따라서 말씀을 표피적인 수준으로만 전해버리면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 저거 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세요, 요렇게 사세요, 이렇게 적용하세요,이렇게 가버리면 그것이 곧 외식하는 자의 말이고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을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살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마, 라고 주의를 주시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건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서 엉뚱한 말을 전하는 거, 그게 진짜 사람을 죽이는 거라니까요. 그 다음 내용을 보시면 좀 더 확실하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의 유형을 회당과 큰 거리에 서서 기도 하는 자, 라고 하셨어요.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말씀을 나누던 곳이었죠?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선 그걸 사단의 회장이라고 그래요. 같은 단어에요, 시내고그. 사단의 회. 그 회당 거기에서 기도하는 거, 거기에서 말씀을 흘리는 거 무슨 말씀을 흘렸을까요? 진리가, 성령이 오시기 전에? 당연히 율법적 말씀이 회자됐겠죠? 거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프로슈코아미할 때. 그리고 그들은 눈에 보이기 위해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한다고 해요. 이건 단순히 그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난 이렇게 기도한다. 니네는 기도 안하지? 이런 걸 보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기도했다, 라는 그런 말 아니에요.
여러분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굉장히 점잖은 사람들이었고 인간적 겸손과 겸양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남이 모르게 구제했고, 왜? 그게 율법이라고 여겼어요, 그들은요. 남이 모르게 구제를 했고요 남들이 모르게 선한 일에 힘썼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전부 제각각 큰 거리에 나와서 다 기도했을까요? 지금 보편적 어떤 무리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안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은요. 남들이 알아볼까봐 몰래 금식했고 몰래 구제했고 몰래 기도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럼 큰 거리에 서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거, 그거 하지 말아라, 라고 했을 때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 큰 길, 큰길가는 ‘플라테이아’ 광장이라는 말이에요. 아고라, 라는 말이 있죠? 그것도 광장이란 뜻인데 둘 다 성전 마당이란 뜻이에요.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있죠? 거기에다가 ‘카타’ 라는 단어를 붙이면 다 헬라업니다. 카테고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카타고리가 뭐냐 하면 성전 마당에 불과한 그러한 제한된 울타리 속에서의 인간들의 제한 된 한계가 지어진 사고, 그들의 정의 이런 게 카타고리에요. 그래서 성경에도 카테고리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 카테고리로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니? 이렇게. 그 아고라, 그 아고라라는 곳에서 토론되어지는 것도 전부 율법주의 세상 속에서의 내용들이잖아요? 거기서 무슨 진리가 논해집니까? 기독교보고 개독교라고나 그러고 그러지 다, 그렇죠? 아고라, 그런 데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래 똑같은 단어란 말에요, 이것이요. 성전 마당. 플라테이아, 플레이트 다 거기서 나온 단어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이 죽는 곳. 큰 성 길가라고 그러죠? 똑같은 단어에요. 플라테이아. 주일날 배웠잖아요? 어디서 죽었습니까? 큰 성 길가. 바벨론이라 그랬어요,거기는. 계시록이 설명해줘요. 그런데 거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루샬라임이고 애굽이고 소돔이라 그래요. 성전이잖아요? 거기가? 그렇죠? 옛 성전. 율법으로 가르쳐지고 율법으로 행하는 옛 성전. 그게 플라테이아란 말에요. 그 성전의 마당, 거기서는 늘 희생 제사가 드려지죠? 그런데 산상수훈 앞에서 희생 제사 드리지 마, 라고 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미 도륙되어 희생 제사로 드려졌잖아? 살인하지 마, 가 희생 제사 드리지 마니까.
그런데 그 성전 마당에서 예수님이 죽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두 증인도 죽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들은 그 성전 마당에서 죽음으로 드려진단 뜻이에요. 호코스모스의 세상, 율법주의의 세상에서 죽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이 아들로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근데 펄펄 살아서 거기서 계속 하고 있네? 이 인간들이. 구약 내내 그죠? 구약 내내가 아니라 역사 내내. 그거 하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성전 마당에서 그 성전 마당 적 의미로 말씀을 흘려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된다, 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큰길가에 서서, 이렇게 번역이 된 거란 말에요.
성전은 그 가운데의 그 지성소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할 건데 너 기도할 때 골방으로 들어가, 라고 한건 마당에 서서 그 마당 적인 거, 전하지 말고 지성소, 그리고 성전 안에는 골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뭐했느냐 하면 뭐 떡 상에 놓은 떡도 만들고 분향 단에서 올릴 분향, 향단의 향도 만들고 그 내용을 그 안에서 만들던 곳이었는데 그것도 못 들어가 보고 지성소가 뭔지도 모르고 골방에도 안 들어가 보고 성전 마당에 길가에 서서 네가 무슨 말을 흘리니? 이런 말이라니까요. 골방에 숨어서 아무도 안 보게 기도해라, 이런 말이 아니란 말에요. 어디서 하면 어떠냐고요? 기도를? 이왕이면 사람 많은 곳에서 들려줘야지. 골방이 그 골방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성전은 지성소, 골방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란 말에요. 그 내용. 그런데 그 성전이 그 가운데 핵심이 아닌 모퉁이, 그러니까 성전 어귀라고 그러죠? 큰길가 어귀. 그게 모퉁이에요. 모퉁이 것으로, 그게 성전 마당에 불과한 거예요., 그건요. 핵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가운데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운데는 지성소니까. 길가에 서서 그 모퉁이 것으로 전해주면 그가 살지 못해. 그거 구제 아냐. 그거 기도 아냐. 그러니까 주의해. 그러는 거예요. 말씀을 내용으로 주지 못하는 거예요.
거기에 ‘서서’ 라고 번역이 된 게 큰길가에 서서, 앉아서 하면 안 보일까봐 서서 기도했다는 게 아니라 이스테미라는 단어에요. 뭐라고 했어요? 그게? 똑바로 세우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로 똑바로 서서 두 마음이 한 마음이 되면 이걸 언약의 성취라고 해서 이 이스테미에서 스타오로스, 십자가란 단어가 나온 거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호코스모스, 진리의 차서로 이렇게 티데미, 하나, 하나 횡적으로 세워준 게 세상이잖아요? 이걸로 잘 알아서 아, 그거군요? 라고 똑바로 알면 이게 똑바로 서는 걸 이스테미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 이스테미, 너희가 성전 마당 귀퉁이 걸로 뭘 똑바로 세우겠다고 지금 하는데 그게 똑바로 세워지겠니? 주의해, 그런 말이란 말에요. 큰길가에 서서 기도하지 마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 안했어요. 그런 유치한 사람들이 아니라니까요, 바리새인들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이는 것으로 주신 모든 걸 통해 하늘의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게 똑바로 선거예요. 그래서 그 단어가 신약성경에 무지하게 많이 나와요. 똑바로 서다, 똑바로 서다.
눅 13:23-27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진짜 거의 없습니까? 물은 거예요. 적으니이까가 ‘홀리고스’에요. 거의 없습니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다음 주에는 문도 나와요. 문 닫어, 그러죠? 골바에 들어가서 문도 열어놓지마, 이런 말이 아니란 말에요. 좁은 문, 이 문이란 말에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러니까 문은 우리가 닫는 거 아닙니다. 집 주인이 닫는 거예요. 그 어리석은 다섯 처녀, 주인이 문 닫는 거예요. 닫아버리면 못열어요.]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뭘? 예수의 살과 피. 떡과 포도주 마셨습니다. 먹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여기 길거리가 플라테이아에요.]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아니, 우리가 당신이 먹으라고 하는 살과 피 먹고 마셨다니까요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이 플라테이아 큰길가, 성전 마당에서 우리에게 가르쳤잖아요? 예수님이 꼭 성전 마당 아니면 회당에서 복음 전하셨습니다. 왜? 그게 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래요. 저 희생 제사가 뭔지 알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 심판 대 앞에서 선 이들이 아니, 그 플라테이아에서 우리 가르쳤잖아요? 이들은?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 성전 마당 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단 뜻이에요. 거기서 가르쳤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래, 너희가 뭐 먹었다고 그러고 마셨다고 그러는데 그게 뭐야? 악이야! 그래요. 악이래, 행악 하는 자, 그러죠? 그게 악을 행한 거야, 그런다니까요. 신앙생활이라고 죽도록 한 다음에 악만 실컷 행하다가 지옥 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주님과 함께 식사했다는 말 아니에요. 그분이 먹고 마시라는 거 그거 먹었다는 뜻이에요. 근데 떡의 수준에서 멈춰버린 거죠. 그걸로 에너지 삼아 무얼 한 거예요. 주여, 주여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요것도 하고 요것도 했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면 전부 그건 떡으로 먹은 거예요. 진리로 먹은 게 아니라. 그러면 그걸 하나님이 악, 그런다니까요. 악.
계 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지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여기서 길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역시 플라테이아에요. 그 성의 길, 큰 성 길가, 뭐 이렇게 얘기하는데 성의 길. 근데 그 성전 마당, 그 성전이 여기선 뭐라고 그러죠? 유리 같은 정금이라 그래요. 맑은 유리 같은 정금. 이게 ‘휘아루스’라는 단어인데요. 이건 유리라기보다는 비처럼 투명한 거. 이런 뜻이에요. 은혜의 말씀, 이렇게 번역하면 정확해요. 비처럼 투명한 거예요. 비. 이게 히브리어 ‘자쿠키트’를 그대로 옮긴 말이거든요. 근데 자쿠키트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욥기에 나옵니다. 유리라는 말이. 욥기는 창세기 시대의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쯤 인물이란 말에요.
그때 유리가 있었을까요? 없었어요. 그럼 무슨 말이냐고요? 그 자쿠키트가? 욥기에 나오는데. 무죄한, 맑은, 수정, 이런 말이에요. 하늘에 있는 진짜 그 성전은 무죄하고 순결한 섞이지 않은 맑은 그것, 뭐, 정금이라고 그래요. 금은 뭐라 그랬어요? 금과 기름은 같은 단어로 쓴다고 그랬습니다. 진리라고 그랬어요. 기름을 바르다, 금으로 싸다, 같은 말이란 말에요, 이게. 그 플라테이아는 바로 그 진리의 말씀, 진리의 성전, 하늘의 그 성전을 이야기하는 건데 땅의 성전은 어때요? 율법의 성전이라고요. 그거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리바다,그럼 뭐겠어요? 유리로 된 바다겠어요? 태풍 오면 테이프로 찍찍 붙여놓는 그 유리? ㅎ
바다, 이 땅의 바다가 뭐예요? 샤마임, 하늘이란 단어 자체가 파자를 하면 거기에 물이 있다죠? ‘그 물’은 진리입니다. 진짜 물이 아니라. 그걸 이 땅에 모형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게 바다라는 개념이에요. 창세기 1장을 보면. 그러면 이 바다를 그 하늘의 것을 알았으면 그걸 유리바다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것을.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 땅에, 호코스모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그 바다는 필요 없죠?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겠고, 에서는 아래의 바다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왜? 무죄한, 순수한 그 하늘의 진짜 그 바다, 진리가 거기서 이미 완성이 돼 있기 때문에 이 아래의 바라는 필요 없는 거예요 거기는. 그런 이야기란 말이죠.
그러면 자, 팔(8)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팔의 날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강을 설교하실 때는 어떻게 프로슈코마이 하시는지 한 번 보세요.
요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이건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닫은 게, 무서워서 닫은 게 아니라 철커덕 닫혀버린 거예요. 누군가에 의해]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모퉁이 아니죠? 다 의미가 있는 거란 말에요. 가운데 걸로, 서서도 이스테미에요. 똑바로 세우시더라라는 뜻이에요. 가운데, 정 가운데 이렇게 서서 말씀을 전했다는 게 아니라 가운데 것으로 똑바로 세우시면서 가라사대, 뭐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는 거예요. 가운데 것으로 똑바로 세우셨다. 뭐에 대해서? 평강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진리의 말씀, 복음을 충분히 설명해주셨다는 말. 가운데 걸로. 지성소의 그 내용으로. 그러면 그게 진짜 프로슈코마이가 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엘레모수네가 되는 거예요. 구제가 기도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사랑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인 말씀을 엉뚱한 것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전하겠다고 목숨까지 걸죠?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그러잖아요. 누가? 바리새인들이. 무슨 유익이 있다고? 바리새인들은 자지가 제자를 삼잖아요?먹여 살렸어요. 아들로 삼았다니까요.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제자들을 제자라고 안 부르고 아들로 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아들이라는 말을 일부러 사용해서 쓰시는 거예요. 니들이 말하는 아들이 ‘이 아들’ 얘기하는 거니? 이렇게. 그거 아냐. 아들로 삼았다니까요. 자기 걸 털어서 쏟아부어주는 거. 그 아들. 그런데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아들을 찾으러 다녀서 전도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지도 빠지고 그네들도 빠트린다고 그래요. 예수님께서. 소경이기 때문에.
요 1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낮 열두시란 말인가요?]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 하느니라
밤에 다니지 마, 될 수 있으면 낮에 다녀. 그런 말이에요? ㅎ. 이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 고치러 갈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주님 조금 아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돌로 치려고 해서 이리로 도망 왔는데 다시 그리 가려고 하면 어떡합니까? 제자들이 그랬단 말에요. 그랬더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가자, 나사로가 잠잔다. 그랬단 말에요. 깨우러 가자 그랬다고요.
낮이 열두시다, 이 말은 낮, 날, 빛. 창세기 1장에서 이걸 같은 단어로 씁니다. 근데 여기서 도요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이 말은 빛으로 와계신, 그 뒤에 빛이라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빛으로 와계신 주님이 있을 때 그 빛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그 기간. 그 ‘헤메라’를 낮이라 그래요. 근데 그 낮은 열두시라 그랬는데 열두시가 아니에요. 열두시가 아니라 그 낮의 기간이 열두시간이다. 열두시간이라는 건 아들을 만드는 시간이란 뜻이에요. 열둘이라는 숫자 자체가. 낮은 열두시간이다. 근데 아무도 그 빛을 못 알아보네? 못 알아봐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내가 밖의 빛으로 왔을 땐 니들이 나를 못 알아보기 때문에 내가 떠나 ‘아나바이노’ 떠나서 니들 안으로 빛으로 들어올게. 근데 그 때는 내가 밖에서 비추는 빛이었기 때문에 안에 그 빛을 갖고 있지 않은 자는 전부 걸려 넘어질 거야.이런 말이에요. 그 빛이 뭐예요? 성령이잖아요. 우리 안에 들어온 진리잖아요. 그게 없으면 다 걸려 넘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빛은 내 마음에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내 밖에서 자꾸 뭔가를 찾아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행하려고 하는 그것 자체가 내 안에 빛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 실족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밖에 있는 빛으로 못 살아나요. 그 성경 말씀, 아무리 여러분이 뭐 베고 자고 뜯어먹고 그래도 그것이 여러분을 못 살려요. 아무리 자동차 뒤에다가 그거 올려놓고 다녀봐야 껍데기만 돌돌 말리지 그게 여러분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니까요. 주일날 한 번씩 꺼내는 거. 그거, 네? 다 알아요, 그거. 색깔 바랜 거. 차 뒤에다가 일주일 내내 넣고 다니다가 주일날 주차장에서 꺼내오는 거 그건 여러분을 절대 못 살려요. 그것이 여러분 안에 마음으로 들어와 있으면 그거 버려도 돼요. 아, 성경을 어떻게? 그래서 땅에 묻고 막 그러는 사람들 있는데 괜찮아요. 땔감으로 써도 돼요. 그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요. 아, 심지어 석가모니도 그랬을라고. 제자들이 책을 보고 있으니까 야, 아직도 뭘 보고 있니? 예, 경전을 봅니다. 니네 아직도 멀었구나? 그건 종이에 먹물 칠해놓은 거야, 이놈들아. 니들 마음에 새겨야지. 석가모니도 그랬다니까요, 심비에 새기라고. ㅎㅎ, 그러면 그 경전이 왜 필요해? 언젠가 너희들이 그게 필요 없는 날이 올 거야. 근데 그게 무슨 대단히 성스러운 건줄 알고 말에요. 그거 베고 잤다고 그걸로 패갖고 애를 입 돌아간 애 있어요. 제 아는 사람이. 아니, 그게 뭔데 그거 베고 못, 높아서 좋잖아요? ㅎㅎ. 자기들도 보면서 맨날 자면서, ㅎㅎ. 애가 그거 베고 잤다고 그걸로, 그 두꺼운 거로 애를 패갖고 입을 돌아가게 하느냐고. 그런 거에서 좀 벗어나세요, 이제.
그러니까 성경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몰라도 돼요. 거기에서 여러분이 아, 그거? 하고 진리를 알았으면 사실 그 이외의 것은 하나도 몰라도 돼요, 왜? 똑같은 얘기거든요. 똑같은 얘기에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성경전체가 그냥 쫙 흘러내려가기 때문에 다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뭐 성경 많이 안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고 그거 외워서 뭐할 건데요? 뭐 어디서 시험 봅니까? 아, 생활 속에서 적용해야죠. ㅎㅎ. 누가 그 성경을 생활 속에서 적용하라고 줬습니까? 그게 QT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엄청난 오류에요. 성경은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하라고 준책이 아닙니다.
자, 빛이신 주님께서 이제 어둠의 굴로 가시는 거예요. 이 말씀을 하시고. 어둠의 굴이 뭐라 그랬어요? 굴혈, 시랑의 굴혈, 도적의 굴혈. 옛 성전이에요. 굴속에 죽은 자가 들어가 있어요. 뭐에 꽁꽁 묶여서. 율법이에요.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란 뜻이라고 그랬죠? ‘엘에에자르’가. 거기에 빛이신 예수님이 가세요. 그리고는 말을 던지세요. 뭐라고? ‘거기서 나와’! 예수님이 양우리 앞에 가서 얘들아 거기서 나와, 그랬을 때 그 목소리 아는, 알아듣는 양들만 쫄쫄쫄쫄 나왔다고 그랬죠? 그 이야기 그대로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사로야 거기서 나와. 라고 말을 던졌어요. 거기서 무슨 뭐 주술 행위를 하고 수리수리 마수리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사로야 내가 말을 줄게 거기서 나와, 라고 했더니 굴속에 있는 죽은 자가 꽁꽁 묶여서 나오는데 얼굴에 수건까지 가려져 있네? 아무것도 못 보는 율법주의 세상, 주님이 그래요 놓아서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 자유에요.
빛, 말씀, 이것이 율법주의의 굴속에 들어있는 죽은 자, 잠든 자를 불러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란 말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산다니까요.
요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와라, 나와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게 사는 거예요. 자, 이때까지 나사로는 뭘 했어요? 언제 불러주나? 기다렸습니까? 아니면 주님 어서 와주세요, 라고 부르짖었나요? 그냥 죽어있었어요. 근데 빛이 가서 뚫고 들어가 버린 거예요. 진리로, 그랬더니 그냥 나왔어요. 그 후로 나사로가 착하게 잘 살았더라,이런 말은 안 나옵니다.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그런 도덕과 윤리적인 것이 신앙의 문제라면 하나님은 나중에 심판하기 굉장히 곤란하실 걸요. 민족마다, 도시마다, 나라마다 도덕과 윤리는 다 달라요. 아프리카나 에스키모들 중에
손님이 오면 그 소님 따듯하게 자라고 아내를 내줍니다. 우리의 도덕 윤리로는? 그건 안 되는 거죠? 죄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거 안 하면 죕니다. 그게 그들의 도덕이라니까요. 그럼 하나님은 뭘 근거로 심판해야 돼요? 그걸? 신앙생활이라는 건 그런 걸 어떻게 갈고 닦아 주위사람들이 칭찬해주는 그런 사람으로 되어지는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는 거예요.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마 6: 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뭐겠어요? 말씀을 보는 눈이라는 거예요. 세상을 보는 눈, 그 눈. 나중에 계시록에 가면 이 눈을 영이라고 그러죠? 말씀이에요. 내가 가진 세계관. 말씀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는 그 눈. 하나님은 나에게 진리의 눈을 주셨으면 진리의 눈일 것이고 아니면 율법의 눈일 겁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어두움을 보고도 그걸 빛으로 착각하여 그걸 꼭 붙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뭐라 그래요? 주님이? 네게 있는 그 빛,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빛이라는 게 어두움이면 너 어떡할 거냐? 그러는 거예요. 너 지금 빛이라고 뭘 갖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네 눈이 성하지가 않아. 그래서 엉뚱한 걸 너 지금 빛이라고 갖고 있거든. 그 빛이 어두움이면 어떡할 거냐? 물어보시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신앙생활이라고 해 온 거 그리고 진리라고 붙들고 있었던 게 어두움이면 어떡할 거예요? 그럼 어두움의 굴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이 없어. 큰일 나는 거예요. 그래서 깨어서 근신하라, 그러는 거예요. 똑바로 살어! 이런 말 아니에요.
살전 5: 5-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아들이란 말이 나오죠?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아들의 시간 그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이 잊네 됐네요.]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나사로가 자고 있다고 그랬어요. 어디에서? 율법의 굴혈에서.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지라
[이게 뭐냐면 금주하다, 술 취하지 않다, 라는 말이에요. 이건 무슨 말이라고 했습니까? 술이라는 건 항상 뭘 섞은 거를 취하는 걸 술 취함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여기에 반대는 항상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성령이 늘 대조되어 나온다고 그랬습니다. 깨어라, 그리고 취하지 마. 섞은 거에 취하지 마. 누룩이 들어가서 뭔가가 섞이면 술이 되니까 그래서 누룩이 되라고 하는 거예요. 섞은 거에 취하지 마.]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이제는 거기에 안 취할 수 있잖아요. 진리가 뭔지 알았으니까]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게 옷 입자, 에요. 다. 믿음, 피스티스와 사랑, 아가페로 옷 입자. 옷 입어라. 그런 말이에요. 너희는 이제 어둠 속에서 빛을 봤으니까. 엉뚱한 말에, 섞은 말에 속지 마, 그런단 말에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빛이 날이고 날이 낮이에요. 그리고 그 빛은 어두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어진 거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뭔지를 깨달아 알면 빛이네요? 어두움이 뭔지를 나타내는 게 빛이라고 했으니까. 논리가, 성경에서. 어두움이 뭔지를 알아 그걸 깨달아 알면 아, 빛이네! 그게. 그러면 이 어두움이 왜 나빠요? 우리에게 허락된 그 어두움이라는 게 그렇게 천인공노할 일입니까? 만약에 그걸 나쁘다, 라고 하면 하나님 마저도 악한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왜? 이사야서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창조했다는 거예요] 어두움도 창조하며 [아싸] 나는 평안도 {샬롬도 }짓고 환난도 [라아가 악이에요, 악 라아, 악도 ]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악을 창조한 게 하나님이라네요? 무슨 말일까요? 이게요? 그게 뭔지를 알면 그건 더 이상 우리에게 악이 아닌 거예요. 창조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라고 했을 때 그 창조는 천지창조의 그 천지 안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베레시트바라 엘로힘 에트 솨마임 에트 에레츠 라고 1절에서 써놓고 내가 성전에서 시작한다, 너희들에게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줄게 파자하면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바라’ 라는 단어 자체가 베잍이 성전이니까 내가 시작한다,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것을 주기 시작할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에레츠도 내가 땅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가 그물로 잡기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다 같은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이 땅에 그런 천지 솨마임 에레츠 엘로힘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걸 통하여 하늘의 것을 알면 우리는 빛이고 근데 그 아랫것에서 머물러서 이게 다인가? 그리고 거기에 묶이면 그걸 악이라고 한단 말에요. 성경은. 그래서 이걸 밝히는 빛을 진리라고 그러고 이게 밝혀지면 그게 왜 나쁜 거냐고요? 위의 걸 설명하기 위해 준 아랫것인데. 그러니까 도덕과 윤리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러분은 성경을 단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은 그것과 무관하다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역할로 오신 성령의 이름이 엘로힘 르와흐에요. 그 르와흐가 파자를 하면 래쉬하고 해드인데 해드는 죄란 뜻이고요 래쉬가 시작하다, 는 뜻이에요. 그게 르와흐에요, 이게. 모음 다 빼버리면요. 모음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아니, 르와흐, 엘로힘 르와흐 성령이란 뜻인데 하나님께서 뭘 하러 이 땅에 오셨느냐 하면 죄로 시작, 이게 성령이에요. 죄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넘겨주시는데 아랫것으로, 소리로 주신다, 라는 뜻이에요. 이게 엘로힘 르와흐가 가진 단어의 뜻이에요. 왜 죄로 시작해요? 그래서 세상이 흑암부터 시작된다니까요. 그리고 저녁이 먼저 오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면 그게 날이야. 빛이야. 낮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욤’이라고. 그러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 어둠과 빛을 우리의 선악의 마음으로 갈라놓고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것을 딱 정한 다음에 지들 마음대로 그거 한다니까요. 성경이 그걸 악이라고 그래요. 행악.
그러니 여태까지 우리가 이 천년 기독교 역사 동안 배워온 정말 그 진리의 라인이 아닌 대다수, 대다수가 비 진리의 라인이거든요. 그들이 만들어놓은 교회력 교회사라는 것에 의해 우리가 배워왔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을 전하면은 이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거예요. 근데 할 수 없어요,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저에게 얻어지는 유익, 제가 원하는 어떤 가치나 이런 것이 있다면 해보겠는데 큰 교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야, 저 사람 큰 교회 하는 성공한 목사라는 말은 죽어도 듣기 싫고 사람 많이 모아가지고 뭐 교회 재산을 불려서 큰 빌딩 같은 거를 뭐 매입을 해서 저 교회는 재산도 저렇게 많네! 그런 것도 별로고. 그러니까 몇 명이 남더라도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 병이 난다할지라도, 그래서 못 온다는 사람이 몇 분 계시던데? 허리를 삐끗해 갖고. 할 말은 이거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별로 이제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부득불 하는 거예요. 억지로, 부득불. 사명감에 불타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어두움, 죄로 시작하셔서 빛과 의를 설명해내시는 게 르와흐에요. 성령이에요, 엘로힘 르와흐, 그걸 악하게 사용하면 엘로힘 르와흐 라아 라고 해서 악령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의 것을 통해서 하늘의 것들을 깨달아 마음으로 가지면 돼요. 그러면 땅의 것에 안 묶일 수 있어요. 내용을 알았으면 껍데기는 버려야죠. 내가 건너가야 할 목적지가 있고 거기에 약속의 땅이 있어요. 그래서 건너왔습니다. 뭘 타고? 호코스모스, 예수를 타고 성경말씀을 나고 건너왔으면 그 배는 더 이상 필요 없다니까요. 예수를 죽이라는 말은 그 말이란 말에요. 밑도 끝도 없이 남편한테 가서 니네 목사님이 뭐라고 그런다고 그렇게 빠졌어? 그랬더니 우리 목사님이 예수를 죽이래. 그랬다는 거 아니에요? 그래갖고 거 봐, 너 이단에 빠졌구나? 예수를 이천 년 기독교 역사가 꼭 붙들고 있는데. 그렇게 얘기하려면 앞뒤를 다 얘기해주시던가. 진리로 넘어갔으면 필요 없다, 라는 의미이지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니까요. 뭘 어떻게 더 설명을 해드려야 돼요? 애기처럼 그냥 사실은 그게 아니라 뭐 이렇게 해줘야 돼요?
그렇게 해서 엉뚱한 것으로, 표피적인 것으로만 전달을 하면 너희는 이미 너희 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죠? 그 말은, 상은 뭐라 그랬어요? 고린도서에서 봤잖아요? 우리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알아 가감 없이 올바로 전하는 게 내 상이다, 그랬습니다. 바울이. 근데 성전 모퉁이의 것으로 엉뚱한 표피적인 율법으로 내가 전하면 내가 만든 그 상을 내가 받은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네 상을 네가 받았다, 그러는 거예요. 그게 5절입니다. 6절은 다음 중에. ㅎㅎ,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다.
그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내 안에 들어와 빛이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계속해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이렇게 흘려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에 더 이상 매이지 않게 하시고 그 세상이 우리를 묶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그 일갈,
나와라! 그 굴에서 나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라는 그 말씀,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며 자유를 이루게 하시고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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