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김성수 목사/산상수훈

47강 .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쌓는 보물

Hebrew 2023. 5. 20. 22:36
산상수훈 47번 말씀
제목 :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쌓는 보물
본문 : 마 6:19-26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아멘.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그런 내용이죠? 그죠? 땅에다 보물 쌓지 말고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라. 어떻게 하늘에다 어떻게? 짊어지고 올라가죠? 방법이 있다. 교회에다가 헌금을 하면 그게 하늘에 쌓이는 거다! 끝. 그죠? ㅎㅎㅎㅎ.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이 본문은 교회의 그 십일조나 헌금을 독려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는 그런 본문입니다. 땅에다가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도둑도 염려가 되고 좀과 동록도 염려가 되지만 그 재물을 교회에 헌금으로 내게 되면 그 즉시 그 재물은 하늘 위에 그 사람의 사유재산으로 쌓이게 되고 그가 천국에 갔을 때 그가 쌓은 만큼의 하늘 보화를 상급으로 받게 된다는, 이제 그런 식의 이야기죠.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 목사들이 회중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제가 심지어 아주 새파란 햇병아리 전도사 때도 아, 이거는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던 그런 구절인데요. 그러나 그건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상급과 더 많은 보화를 쟁취해서 하늘에서조차 승자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런 회중들의 그 더러운 욕망이 자초한 것이기도 해요. 그게 사실은 앉아서 듣는 회중들의 원함이거든요.


정말 그렇다면 먹거리조차 마련하기가 힘들어서 헌금은 생각도 못하다가 죽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은, 극빈자들은 천국에 가서도 똑같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건가요? 뭐 쌓은 게 없잖아요? 천국에다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천국에서도 자기가 획득하고 성취하고 쌓은 것을 근거로 해서 부자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땅의 부자들인 거예요. 그들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일 그러한 심보로 교회에 헌금을 열심히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게 아니라 지옥의 노자 돈을 열심히 저축한 겁니다. 우린 이 보물의 이야기가 6장 1절에 그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의를 전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의 앞에서, 뭐 이렇게 번역을 해놨는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의를 전해서는 안 된다, 라는 그 대 주제 속에 포함된 이야기임을 놓쳐서는 안 돼요.


그것은 말씀의 표피적 이해, 그 땅 적 이해를 가지고 진리를 전하는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잖아요? 5장 마지막까지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이거를 완료해서 사랑으로 네가 갖고 이걸 사랑으로 흘려줘. 그리고 이걸 온전이라고 그래. 그럼 이걸 어떻게 흘려줄 건지 주의하라! 로 6장 1절이 시작되죠? 주의하라! 에요. 첫 단어가. 주의하라, 어떻게? 그걸 흘려줄 때 눈에 보이는 아래 것으로 보이는 모형으로 그대로 주면 안 돼. 표피적으로 그걸 그냥 주면 안 돼! 이걸 경고하는 그 맥락에 들어 있는 거란 말에요. 지금 이게.


사랑으로 완성된 계명을 전할 때 그 내용이 아닌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것으로 전하게 되면 큰일 나는 것이다, 라는 그런 경고에요.
그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문제로 계속, 똑같은 내용입니다, 계속 설명해오고 계신 주님이 보물의 문제로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설명을 해주시는 거예요. 따라서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은 그 말씀의 땅 적 이해와 하늘 적 이해의 대조로 보아야 되는 거지 뭐 이 땅에다가 보물을 쌓아놓은 사람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사야서로 가서 성도가 쌓아야 할 보물이 무엇인지 한 번 보죠.


사 33: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희 보배니라


‘오짜르’, 히브리어로 이게 보물이에요. 보물이 뭡니까? 여호와의 구원 지혜 지식 경외의 풍성. 여호와의 그 경외함, 여호와를 그 경외함, 이것이 보물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 진리를 올바로 알게 돼서 그 여호와를 내가 경외하게 되었다면 그 안에 보물이 있다, 이런 말입니다.


잠 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금과 진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말씀의 상징물들입니다]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오짜르’. 보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진짜 보물은 금과 진주,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로 진리의 말씀이다, 라는 거예요. 그게 너희들의 보물이다.
고후 4:6-7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이 프로소폰 이라는 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그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겉으로 드러난, 나타난 것을 프로소폰, 파님이라고 한다고 그랬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표피적인 그 모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그것을] 우리가 이 보배를 [보물이라고, 데사오로스 똑같은 단어에요. 우리가 그 보물을]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피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그 영광의 빛을 아는 것, 그것이 보물이다, 그래요. 데사오로스. 근데 무엇이 그 보물을 담고 있어요? 질그릇이 담고 있습니다. 오르트라키노스 스퀴오스 인데 스키오스는 성경에서, 성전에서 쓰는 기명들이라 그랬죠? 로마서에서 바울이 그걸 그릇이라고 인제 우리 개역성경은 번역했는데 그 그릇은 바로 우리다! 그러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흙으로 만든 그릇, 그게 바로 우리란 말에요. 근데 흙으로 만든 그 그릇, 그 땅의 그릇은 보배를 담고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는 보배를 하늘에 쌓아라! 그랬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그게 질그릇 안에 들어 있다, 그래요. 흙으로 만든 그릇, 근데 그게 우리라 그래요, 바울은. 스퀴오스. 그러면 우리가 그 보배를 담고 있으면 질그릇인 내가 뭐가 된다는 이야깁니까? 하늘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 질그릇이 보물을 품게 되면 거기가 하늘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그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선행되어야 될 것은 내가 하늘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 하늘이 된다는 게 뭐 굉장히 엄청난 그런 이야기인 거 같은데 그냥 땅에서 나오면 하늘로 함몰 되는 거예요. 거기가 하늘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좀 더 명확하게 보물의 정체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골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 같은 겁니다]
3 그 안에는 [어디?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데사오로스, 보물이] 감취어 있느니라


그러죠? 어디에?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뭐에요? 진리의 영, 진리잖아요. 진리 안에, 말씀 안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자, 이제 주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대충 감이 잡히시죠? 교회에 내는 헌금 그런 거 아닙디가, 여러분.
주님은 그 보물을 쌓는 일을 이렇게도 설명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 12:33-37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35절에 쌓은 선이라는 말이 ‘아가또스 데사오로스’에요. 직역을 하면 선이라는 보물이에요. 보물이란 말이 개역성경에는 생략돼 있죠, 그죠? 똑같은 단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단 말이에요. 선이라는 보물. 그렇게 선이라는 보물을 안에 가진 사람은 아가또스, 선을 내고 악이라는 보물, 이라고 써 있거든요. 선이라는 보물에 대한 대조적, 비교적 표현이겠죠? 악이라는 보물을 쌓은 사람은 악한 것을 낸다, 라 그래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 있는가에 의해서 그 마음이 선이라는 보물로 가득 찰 수도 있고 악이라는 보물로 가득 찰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근데 주님이 그 극단적인 두 보물을 ‘말’이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말씀, 어떤 말을 내 안에 갖고 있느냐에 의해 그게 선한, 아가또스 데사오로스가 될 수도 있고 악한 보물이 될 수 있다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처음에 우리에게 율법으로 주어지죠? 이 아래의 말로 주어지니까. 율법으로 받아서 진리로 먹어야 보물이 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보물을 새것과 옛것이라고도 표현을 하셨습니다. 한번 보세요.


마 13: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 새것과 옛것, 카이노스, 팔라이오스 우리 배웠죠? 그죠? 카이노스와 팔라이노스, 새것과 옛것이라는 어구 앞에 데사오로스, 보물이란 단어가 있어요. 직역을 하면 그 보물 안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다, 이런 말이에요. 바꾸어 말해볼게요. 옛것과 새것이 함께 보물이다.이런 말이에요. 온고이지신이란 말 알죠? 옛것 안에서 새것을 깨달아 알면 그게 보물이라는 말이에요. 천국의 서기관, 즉 말씀으로 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는 그란마투스, 성경기록자.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되고 그냥 성경, 이렇게 이야기해도 돼요. 서기관 뭐 그러니까 자꾸 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들을 우리가 떠올리는데 그냥 성경이에요. 기록자에요, 기록. Grammar 알죠? 그란마에서 나온 거예요, 거기에서.


그 옛것 안에서 새것을 깨달아서 보물로 던져줄 수 있는 자가 천국의 제자 된 그란마투스, 서기관이다. 이런 말에요. 두 개를 같이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왜냐면 이 둘은 같은 거거든요. 수없이 찾아봤잖아요. 그런데 이 옛것을 새것으로 던져줄 수 있는 사람. 그걸 보물이라고 그래요. 주님은 그 보물을 밭에 감춰져 있는 보물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마 13:44 [이거 다 같은 말이에요, 같은 단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서 천국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헤 바실레이아 토 우라논’ 인데 직역을 하면 그 하늘들이 소유하고 있는 나라, 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은 공간적으로 저기 어디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이 하늘들이 그 안에 소유하고 있는 나라, 바실레이아, 그거는 섬김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하는 게 훨씬 적확합니다. 그러니까 그 하늘들 안에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의 섬김이 있다면, 그분은 말씀으로 섬기시니까. 그가 하나님 나라라는 거예요.


그 섬김이 하늘들 안에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가리켜서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연히 밭은 우리의 육신을 포함한 아래의 모형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너는 땅을, 밭을 갈아서 땀을 흘려 먹어야 된다, 라는 게 뭐냐면 아래의 성전 안에서 그 진리를 깨달아 살아야 된다, 는 뜻이에요. 밭 갈아서 거기에다 꼭 땀을 흘려야 네가 먹고 살 거야, 이런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을 포함한 아래의 모형들, 그것이 성전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라면 보물은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보물, 그걸 깨달아 안 사람은 그걸 남들이 못 보게 숨겨두고, 가 아니라 어차피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인단 말에요. 그래서 두고, 그게 그냥 숨겨둔 거예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다니까요 여전히. 가서 중요한 게 뭐냐면, 초점이 뭐냐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걸 사더라는 거죠. 남들은 못 갖게 몰래 숨겨두고 얼른 가갖고 확 사서 그 보물을 캐간 게 아니라 그게 너무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데 다른 이들은 몰라요. 그래서 두고 가서 내 소유를 다 팔아,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노동이라는 것의 상대적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돈이라는 건요, 여러분, 경제학에서도 그렇지만 그 지폐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거는 화폐개혁이나 뭐 일어나면 금방 쓰레기 되는 거예요, 그건요. 근데 그것이 어떤 것과 이렇게, 가치 있는 것과 바꾸어질 때 그게 가치를 발휘하는 거죠? 근데 무엇과 바꾸어지느냐면 거의 다 우리의 생각이나 노동의 대가로 바꾸어지는 거예요. 그걸 이 땅의 재물이라 그래요. 맘모나스가 그런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행위와 노력과 땀과 그런 생각을 어떤 이 땅의 재화로 이렇게 환원해놓은 거, 축약해놓은 게 돈이란 말이죠.그러니까 그런 것들, 우리의 어떤 행위로 어떤 가치를 만들고 쌓아놓은 이걸 이건 아니구나! 하고 그 진리와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이게 ‘소유를 다 팔아‘ 에요. 그 소유를 그대로 갖고 있는 자들을 부자라고 하는 거고.


자, 그러면 그 보물을 담고 있는 하늘은 어디다? 이 천국이라는 단어를요, 원문을 보면 ‘에스틴’ 이라는 삼인칭 그 현재형 동사와 같이 쓰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천국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라고 이렇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중에 저기에서 우리가 만날 어떤 공간이 아니라. 우리는 그 하늘들이, 호우라노스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주기도문에서 익히 배웠습니다. 하늘은 유한의 존재가 무한의 그 하늘을 발견했을 때 그들에게 허락되는 그 하늘로의 동참, 거기에서 창조되는 그 새로운 피조물 있죠?
유한의 존재가 무한의 하늘을 발견을 해서 그 하늘로, 땅에서 나와 그 하늘로 동참을 하게 되었을 때 그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단 말에요. 카이노스라고. 고러한, 그 새로운 피조물, 땅 적 존재에서 하늘 적 존재로 이제 천화 되어버린 그런 성도들의 상태를 호우라노스, 하늘이라고 한단 말에요. 하늘들.


그렇다면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그런 말은 무슨 말이겠느냐고요? 하나님의 보물인 진리의 말씀을 땅이라는, 우리 창세기에서 배웠죠? 땅은 반드시 하늘로 이해되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땅은 나쁜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땅에 사는 우리는 그 땅 적인 것들밖에 볼 수 없어요. 그것밖에 가지고 있는 게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나쁘면 어떻게 돼요? 거기다가 하나님은 진리를 담아줬다는데. 근데 그걸 악하다고 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신 당신을 담아둔 그걸 어떤 이들이 악하다, 해버리면 하나님을 악하다, 라고 하는 거라니까요. 구약의 논리에요, 그것이요. 그게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에 있는 저주받을 죄인들의 실존이란 말입니다, 그것이요.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땅이라는 그 표피적 개념, 율법으로 이해를 해서 땅인 우리 안에 쌓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늘이 되지 못한 그 땅이 땅 적인 것들을 끌어들여서 이 안에 율법으로 계속 쌓아버리면 그것이 땅의 땅 적 보물로 쌓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여러분만 먹을라고 그냥 창고에다가 금은보화 가득 채워놓고 이런 거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저 엘에이 가면 무슨 마켓 사장이 은행에다 돈 넣으면 무슨 세금 문다고 방에다가 백 불짜리를 차곡차곡 쌓았는데 그게 한 방에 꽉 찼다는데 근데도 불쌍한 게 뭐냐면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이 세상에서 또 인색하게 살아. 먹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고. 난 그런 사람이 제일 불쌍해요. 차라리 누리기나 하지. 구두쇠처럼 그냥 덜덜덜덜 떨면서 나중에 어떻게 죽을까? 그거. 여기 집에 돈 쌓아놓은 분들 그냥 펑펑 쓰다가 가세요. 차라리. 남으면 교회에 헌금도 좀 하고.


반드시 그 진리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깨달아서 그러면 이미 그는 하늘이죠? 그러면 그가 바로 그 하늘 아래 보물을 쌓는 자란 말입니다. 무슨 성령이, 아니, 예수님이 유치하게 야, 니네 땅에서 니들만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면 절대 안 돼! 교회에 헌금 많이 해야 돼. 이런 말 했겠냐고요? 그 유한의 실존에 사로잡힌 그 땅 적 존재가 무한의 보물을 선물 받아서 우주적 생명에 참여하는 그런 어떤 강렬한 생명의 몰입, 그것이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거예요. 땅은 단순히 하늘과 대치되는 이 아래의 세상, 욕망으로서의 그 땅 이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땅이라는 건.


땅은 그러한 세속 욕망의 중심을 사로잡는 그 땅의 언어를 말해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성경은 온 세상 천지만물을 말씀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죠? 그 어느 것 하나 말씀으로 창조되지 않은 게 없다고 그러잖아요? 그 말은 말씀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란 말이에요. 그러면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말’이에요, 말. 모든 것은 말을 담고 있어요. 인간은 잘못 곡해된 그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로 습득을 함으로 해서 욕망이라는 것을 같게 된단 말에요. 그래서 애기들이 말을, 엄마, 아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맘마, 까까하면서 그 때부터 꼭 필요하지 않은 어떤 것을 위해 아이들이 울지 시작한다니까요. 그게 말이에요. 말이 말이지 그 말은 눈에 보이는 어떤 이 세상 것들을 하나, 하나 아이들이 이제 잘못된, 표피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단 뜻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은 항상 디자이어[Desire],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말이, 니 눈에 보이는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이 따로 있다, 라는 걸 가르쳐야 그들이 갖고 있는, 그들이 보는, 처음으로 그들이 붙든 그 말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깨질 거 아닙니까? 그걸 땅에서 풀려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비 진리에서 나온다, 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근데 눈에 보이는 그걸로 그냥 받은 걸 뭐라 그래요? 그걸 율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세상을 그 유한적 존재의 한계 때문에 그 진리로 보아낼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없어요. 유한적 존재들의 인식과 판단은 항상 모든 걸 노미조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건 반드시 두 마음으로 에피뚜미아,욕망을 생산해내게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아래의 말에 붙들려 있게 되면 그 욕망이 그를 사망으로 끌고 가게 돼요. 물론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그 욕망에서 금방 자유롭게 풀려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여기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그런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애씀을 우리 안에서 찾게 된다니까요, 여러분. 여러분 안에서 그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그게 아래 세상에서 금방 완성된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그 진리를 담고 오신 주님께서도 육신이라는 외투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가 바로 진리다! 내가 알레떼이아야, 라고 아이 엠 에고 에이미, 이건 신이 자기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거든요. 나는 진리야! 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그 인간 언어라는 인간 아래의 말이라는 외투를 입으시고 그 진리를 흘려주셨죠? 뭘로? 아래의 말로요. 분명 그 안에는 하늘의 말인 진리가 담겨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진리로 받지 못했죠? 자, 인간들의, 유한적 존재들의 한계가 폭로된 겁니다. 바울은 그 상태를 질그릇이라는 아주 적절한 예를 설명을 해준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바로 그러한 상태로 역사에 존재를 해요. 보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보물을 볼 수 있는,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존재가 없어요. 그들이 가진 잘못된 말, 비 진리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거예요.그래서 인간들은 엉뚱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 거죠?


그 상태에서 그 질그릇이라는 그 땅의 세상 안에 들어 있는 그 보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보물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질그릇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그 극단적 방법 이외에 달리 해결책이 없어요. 그래서 진리를 품은 그 육신의 예수 있죠? 그 역사 속에서의 ‘그 예수‘, 그 예수가 언약의 기둥 위에서 질그릇으로 깨져버렸다는 거예요. 다시 살아난 건 그 질그릇이 아니라니까요. 그 안에 있는 보물이 드러난 거란 말입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영,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가 율법이라는 나쁜 말이 되어서 언약의 기둥 위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예수가 담고 있던 진리라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반짝 하고 드러난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유한의 존재들의 그 왜곡된 관점 있죠? 무엇이든지 그냥 두 마음으로 갈라버리는 그 에피뚜미아의 그 관점은 철저한 해체와 파괴의 과정을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존재의 부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했던 기독교가 진리의 말이 떨어지면서 이게 해채 되고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 사람은 굉장히 공허함?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이걸? 그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다니까요. 내가 여태까지 믿고 있었던 거가 그럼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욕망으로 상징되는 그 땅의 언어, 즉 선악과 패러다임에 함몰되어 태어나요. 그러한 땅의 언어 그 욕망의 언어 비 진리에 연루된 그 유한 존재의 그 숙명적인 그 고리를 끊어버리는 그런 역정 해체와 또 궁극적인 그 영적 연합의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 텍스트,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그 텍스트의 본질의 의미. 그 생명차원의 참여로써의 그 텍스트를,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 텍스트의 그 땅 적 표현인 뭐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되어라 이런 Doing의 패러다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은 그냥 생명을 읽은 그 박제, 그것들 안에서 그냥 관념으로써의 땅 적 보물을 계속 쌓아가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건 생명이 없는 것들이라고요. 성경은 그러한 위험성을 여기저리에서 경고해줍니다. 대표적인 거 하나 예를 들어드릴 게요.
왕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상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예배함으로, 섬김으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쏟아부어주셨던 하늘양식의 의미도 모르고 우린 그거 싫어요! 그랬거든요. 그게 뭔지도 몰라서 만나라고 지었고 만이 What is this 니까. 그리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했던 그 이스라엘을 물어버린 불 뱀과 그 불 뱀의 의미를 니들이 알면 산다, 라고 달린 놋 뱀 이거를 내용으로, 텍스트, 그 텍스트의 본질로 알지 못하고 그냥 물질적인 의미의 그 기둥에 달린 놋 뱀 그것이 우리를 예전에 살려줬다, 라는 그런 기억 그런 소문만 가지고 그걸 그냥 섬겨버렸단 말에요. 거기서 소원을 들어주세요, 병이나 고쳐주세요, 이랬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고쳐줬대. 죽음에서 건졌대. 라고 소문으로 듣고 그걸 섬기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니까요. 그냥 소문으로 듣고 그 예수가 이천 년 전에 골고다에 매달려서 인류를 살렸대, 인류의 죄를 대속했대, 라고 소문으로 듣고 그렇다면 우리도 살려주지 않을까? 라고 열심히 섬기면 그게 느후스단이라니까요. 그 불 뱀과 놋 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그 유물론적 관점의 십자가와 그 놋 뱀인 예수를 죽이란 얘기에요. 그걸 파괴하지 못하면 이 느후스단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는. 그것이 의미가 되어 내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그게 하늘 안에 쌓이는 보물이 되는 거예요. 그분이 보물이잖아요. 그리스도가 보물이라면서요? 근데 그 보물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며요? 그럼 내가 하늘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주님이 지금 그렇게 얘기하고 계시잖아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끊임없이 그 역사 적 예수에서 벗어나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 날도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예수를 사랑할 수 있어요?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아니, 그 예수를 사랑하면 안 된다니까요. 근데 이게 무슨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어요?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 십자가는 당장 걷어 치워야 되는 거예요.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텍스트를 길어올려서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가질 수 있을 때 그걸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마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자, 선한 일, 아가또스, 어떤 게 선한 일이고 어떤 선한 일을 해야 내가 영생을 얻습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선한 것, 아가또스는 그 분이지 어떤 일을 하여 완성하는 게 아니야. 거기에 이르는 게 아니야,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테레오’ 는 계명을 하나하나 그냥 그 말씀대로 잘 지켜, 이게 아니라 Keep 하라는 거, 말씀을, 그 계명을 완성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18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를 부자라고 한다, 그랬어요. 자기가 가진 소유가, 자기가 행함으로 자기 안에 쌓은 소유가 너무 많죠? 부자에요, 이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고해주신 나쁜 부자에요. 이건요]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여기 가난한 자들은 푸토코스라고 했죠?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은.]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오늘 본문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의 보물을 쌓는 거라 그래요? 네가 갖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다 팔아 푸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고 와! 울 수 있으면. 그러면 네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랬더니]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 Doing의 문제를 갖고 와서 뭔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Being의 문제로, 하나님만 선해! 그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으면 니들이 무슨 일을 Doing, 한다고 해도 절대 아가또스, 선이 될 수 없어. 그 선이 바로 보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버려야 할 그의 소유에 대해 가르쳐주기 위해 계명을 끌어들이는 거죠? 자, 그 계명을 네가, 그 계명 안에 들어 있는 그 진리라는 보물을 낚아 올려서 네가 사랑으로 완성해라! 이런 말이거든요 이것이. 근데 그 부자청년이 나는 그걸 하나, 하나 다 지켰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다 지켰습니다. 그게 바로 버려야 할 부자의 소유라고요. 그걸 버리고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주님이. 그거 버리고 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와. 왜냐면 내가 말하는 대로 네가 그 계명들을 지켜, 그러니까 테레오, 완성하여 사랑으로 가졌다면 그걸 흘려줄 수 있을 거 아네요? 누구에게? 푸토코스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그러나 네가 다른 것으로 지켜 갖고 있다면 너는 절대 줄 수도 없고 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는 그것을 남들에게 줄 수도 없었고 그리고 줄 마음도 없었어요. 왜? 그게 자기가 쌓아놓은 보물이거든요. 그것에 의해 자기의 상급이 결절되는데 어떻게 남에게 줍니까? 못 주는 거예요. 그러더니 결국 그가 쌓은 그 행위라는 땅의 보물이 그를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만든다고. 여기도 똑같은 단어에요. 데사오로스. 보물.


그렇게 보물을 땅에다가 쌓으면 좀과 동록이 해한다고 그럽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좀과 동록이 그것들을, ‘아파니조’가 밝게 비치지 못하게 흐릿하게 만든다. 불투명하게 만들다. 이런 말이에요. 못 보게 만들다. 좀과 동록이. 동록은 뭐에요? 동에 녹이 스는 건가요? 그런 말 아닙니다. 이사야서로 가면 좀에 의해 파괴되는 이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잘 나타나 있어요.


사 51:7-8
의를 아는 자들아 [이건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죠? 하나님이 의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하나님을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네 밖에 돌비에 율법을 갖고 있으면 안 돼요. 마음에 내 율법을 가진 자들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너희는 나를 듣고 [내 말을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훼방은 항상 말을 깨다, 라는 말입니다.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니


마음에 율법이 있는 자들, 즉 진리를 심비에 새긴 자들의 대척점에서 그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좀에게 먹힐 자라고 하죠? 그들이 율법주의자 아닙니까? 마음에 그 율법을 갖고 있는 자들을 훼방하는 자는 그밖에 돌비로 율법을 갖고 있는 자들일 거 아닙니까?그들은 좀에게 먹힌다, 그래요. 그들의 옷은 의의 겉옷이 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에 불과한 거예요. 그 옷은 반드시 좀에게 먹혀서 파괴되게 되어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벌거벗은 자들인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서 옷을 해 입기는 했는데 좀이 먹어 그들의 부끄러움이 하나도 가려지지가 않아. 해 입긴 해 입었는데. 엉터리 옷입니다.


여러분 재밌는 건 좀이라는 게, 여러분 집에 좀 약 많이 걸어놓으시죠? 좀이라는 게요 자기 집을 뭘로 짓는지 아십니까? 자기 배설물로 짓습니다. 자기가 살 집을 자기 배설물로 지어요. 여러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시죠?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열심을 부려 행한 그 모든 것을 바울이 뭐라 그래요?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바리새, 파리사이오스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라쉬를 그대로 옮겨놓은 건데 이게 분리하다 흩어버리다, 이런 뜻이에요. 뭐든지 주면 분리해. 둘로 나눠. 뭐든지 주면 흩어버려요. 우리는 하나로 받아야 되는데. 그죠? 그게 이 세상의 본능적인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에너지를 만들 때 핵분열을 하죠? 그러면 핵폐기가 뭐에요? 쓰레기가 쌓입니다. 배설물이에요. 근데요 태양은요 에너지를 어떻게 만드냐면 핵융합을 하죠? 거기는 쓰레기가 생기는 게 아니라 태양이 일주일에 400만 톤씩 없어지거든요. 죽어요. 근데 핵융합은 쓰레기가 생기는 게 아니라 커져요, 그만큼. 그래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태양으로 먹어버려요. 먹어서 쓰레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태양으로 만들어버린다니까요. 어떻게? 죽어가면서. 죽어지는데 더 커져요. 이게 하나가 되는 융합이라는 거예요. 연합이라는 거예요. 이것이요. 근데 세상은 항상 분열을 하면 그 분열은 늘 배설물과 쓰레기를 배출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태양이 점점 커지면 수 금 지, 세 번째네요? 우리가? 점점 먹어 들어와서 곧, 과학자들이 그러더라고요. 지금 열두시가 끝이라면, 우주의 끝이라면 지금이 열한 시 삼십육 분 정도 돼있대요. 이제 그것이 수성 금성 먹고 우리한테 조금 더 가까이 오면 여기는 불바다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불로 심판 받는 게 맞대니까요.


그렇게 뭐든지 분열해버리는 걸 파라쉬, 바리새라 그래요. 바리새인. 근데 거기에 모음만, 히브리어는 뭐 모음은 아무 의미 없잖아요? 모음만 패레쉬로 바꾸면 그게 배설물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괜히 ‘배설물’ 이라고 얘기 한 거 아니에요. 자기가 율법주의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행한 그것들은 모든 걸 이렇게 분리하고 흩어버리는 배설물 같은 일이었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열심히 자기가 갈 천국을 성전을 짓고 있었는데 보니까 그게 똥으로 짓고 있던 성전이더라는 거예요. 그 배설물이라는 말이 똥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그러니까 그런 행위들로 자기들의 집을, 자기들의 성전을 열심히 짓고 있는 그들, 그들을 부자라고 한다, 그랬죠? 무슨 부자? 땅의 부자. 다른 말로 ‘똥부자’ 라는 거예요 그게요. 패레쉬. 똥의 성전. 좀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똥으로 성전을 짓는다니까요.


그렇다면 땅에다가 보물을 쌓으면 좀이 먹어서 파괴해버릴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가 무슨 말이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에로의 그 참여라는 그 진리의 텍스트로 보지 못하고 표피적 율법으로 보게 되면 그게 바로 똥으로 자기의 천국을 덕지덕지 건설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라는 그런 말인 거예요. 그들이 부자인 거예요. 야고보사도도 그러한 부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습니다.


약 5: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이런 구절 나오면 박박 지워버리죠. 왜냐면 아무리 봐도 그 예기거든. 부자들아 너희들은 인제 고생하게 될 거야. 울고 통곡해. 그런 말 아닙니다. 여기서 말한 부자는 지금까지 말한 그런 부자 이야기하는 거예요.]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썩은 것이고 너희의 옷은 좀먹은 거다]
3 너희의 금과 은은 [금과 은은 뭐예요? 너희가 만든 성전의 재료들이죠? 금과 은은] 녹이 슨 거고 [여기에서 녹이라는 그 단어는 독이라는 뜻이에요. 녹 슬 때 그 녹이 아니라. 뱀 독, 이런 말이에요, 이게 이온, 뱀 독] 이 독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ㅡ


여기 증거가 되며 에서 증거란 말이 이게 십계명이에요. 마트리온이거든요. 너희들이 지킨다는 그 율법, 그 계명은 너희들에게 독이 되는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좀먹는 거야. 그게 썩은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서운 말이죠. 그리고 동록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부로시스는 그냥 고기, 음식, 먹음. 이런 뜻이에요. 구리에 생기는 녹이 아니라 고기란 뜻이에요. 먹음. 그건 유월절 식사를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으로 먹는 말씀을 상징하는 거죠. 고기죠, 그죠? 그래서 하나님은 고기를 달라고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주시면서 저녁의 양식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아침의 양식이 아니라 저녁의 양식이야, 그래놓고 그게 이사이에 씹히기도 전에 다 죽여 버렸어요. 저녁의 양식은 광야에서는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먹고 나왔으면 무교병, 떡을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율법으로만 보면 그게 부로시스로 먹는 거예요. 그렇게 먹으면 멸망이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나라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는 게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사실은 율법의 세목을 이야기하는 거지만 그것을, 그러한 율법지킴을 먹고 마시는 것, 이렇게 이야기해요. 부로시스라고.


롬 14:14-17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먹는 것으로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이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속된 것이 없다, 그랬죠? ‘우데이스 코이노스’ 라는 건, 우데이스는 ‘하나도 뭣 뭣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하나도 속됨으로 창조된 게 없다는 거예요. 왜? 그 안에 전부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하나도 속되지 않대요. 그런데 뭣 때문에 속돼진다, 그래요? 그걸 속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어떤 이들에게 그게 속된 거라는 거예요. 그들 때문에 얘가 그 안의 내용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있으면 이걸 속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부정하게, 불결하게 보는 이가 있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게 불결하고 부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그걸로 심판 받아요. 그런데 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별을 하여 하나님은 부정한 것으로 정함을 알라고 주었지 그것 자체를 부정한 거라고 준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욥바의 베드로에게 내가 정한 거 알라고 부정한 것으로 줬지 이제 진리가 왔는데 아직도 부정하다고 그러면 어떡하니? 먹어! 그런 거예요. 언제는 먹지 말라고 그랬다가. 내가 그거 먹지 말라고 먹지 말라, 그런 거냐? 그걸 먹고 왜 먹지 말아야 하는 걸 알라고 준 거 아냐? 이렇게 말씀하신 거란 말에요.


그렇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그냥 표피적으로 구별을 해서 형제들에게 줘버리면 그게 형제들에게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식물로 네 형제들에게 짐 지우지 마. 그러는 거예요. 율법의 행위로 짐 지우지 마.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을 그렇게 구별하여 먹음으로, 그게 율법의 행위죠? 이건 정한 거니까 먹고, 부정한 거니까 먹지 말고 이런 거? 그런 저급한 나라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라는 거예요. 심지어 개혁주이 목사님들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안 드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동기 하나가 돼지고기를 안 먹어서 그 친구랑 밥 먹으러 갈 때는 꼭 닭고기 아니면, 그런 집엘 가야 돼요.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돼지고기 집엘 가면 안 들어오고 밖에서 기다려요. 아, 참. 목회 하고 있어요, 지금. 그 교회 교인들은 참 불쌍해요. 그 맛있는 삼겹살을.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지 그까짓 먹고 마시는 거, 이런 걸로 정해지고 부정해지는 거 아니다, 이런 말이에요.


그렇다면 무엇을 먹고 마시던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아 알면 잘 먹고 잘 마시는 거잖아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주께 영광! 이러면서 먹으라는 게 아니라, 그게 돼요? 허겁지겁 먹지. 그게 뭔지 알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란 뜻이에요.


고전 8:1-4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여기 보세요. 자기가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척들 좀 하지 마세요. 게시판 같은데다가. 드럽게 아는 척들을 해ㅎ]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율법적 지식, 즉 표피적 말씀의 이해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금하는 그 율법의 행위에 지금 비유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그러한 지식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지식, 이라고 그래요. 어떤 이가 먹은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 할지라도 그 우상이라는 게 원래 없는 건데 그게 뭔지를 알면 그게 왜 나쁜 거냐? 라는 거죠. 하물며 무엇을 먹은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괜찮은 건데 무엇을 먹은들 너희가 그것으로 부정해지겠느냐는 거예요. 아는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 2:14-23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거 보세요. 먹고 마시는 게 전부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더라는 거예요]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를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보세요. 본 것만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가장하는 게 율법주의 신앙이에요]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누가 한 말이에요? 이것이? 하와가 뱀 앞에서 한 말입니다]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쫓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쫓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제가 요걸 직역을 해드릴 게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세속의 유치한 원리들을 버렸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처럼 이것은 집지 말고 저것은 맛보지 말고 그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따위의 규정에 묶여 있습니까? 이런 것은 모두 한번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릴 것으로서 인간이 명령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규정은 제멋대로의 예배와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 따위로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조금도 힘이 없습니다.


겉만 번드르르 하게 쇼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해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라! 로 그렇게 이해해버리면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율법주의자가 되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죄를 해결하는 데에 조금도 유익함이 없는 헛된 짓이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먹고 마시는 데에만 집착해서 율법의 헛된 양식만 먹고 있는 것이 아담들이라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다가 쌓는 율법주의자들은 그 먹음에 의해 파괴되는 거예요. 안 보이게 되는 거예요. 더 안 보이는 거죠. 그게 좀과 동록이 해한다, 라는 말의 속뜻인 거예요. 그들은 이미 도적들에게 도둑질 당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도적은 두말 할 것 없이 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겠죠.


요 10:8-10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진짜 양식을 주는 이가 그리스도인 거예요]
9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라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보다 먼저 온 게 도적이며 강도라는데 주님보다 먼저 온 게 뭐예요? 성전과 율법이죠? 그거는 강도요 도적인 거예요. 그것을 표피 그대로, Doing의 문제로, 율법으로, 윤리와 도덕 그 수준으로 그냥 가르쳐버리는 율법교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도적, 강도라는 겁니다. 그게 거짓 선지자잖아요. 거짓 교사잖아요. 그들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도적질, ‘카바’ 라는 말은 이렇게 덮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주지 못하고 이렇게 엉터리로 덮어버리는 거,가려버리는 걸 하나님을 도적질 하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도적질 하고 회중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적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엉터리로 그냥 법으로 듣고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도적질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땅에다가 보물 쌓는 자들인 거고. 당연하죠. 땅에다 보물 쌓으면 당연히 그게 도적질 당하는 거니까 도적이 와서 뚫고 도적질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야할 법 정도가 아닌 거예요. 우리는 그걸 먹고 땅에서 죽고 하늘로 연합이 되어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곧 선이죠. 선의 상태잖아요. 그것이. 그리고 그것은 곧 뭐라 그래요? 니들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라는 말은 당연히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가 있지 뭐 어떻게? 이런 말이 아니라, 그게 니 마음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마음으로 심판 받아 죽습니다. 그게 선한 보물이냐, 악한 보물이냐. 선한 말이냐, 악한 말이냐에 의해 심판 받아 죽는다는 말인 거예요. 네가 어떤 보물을 어디에 갖고 있느냐에 의해 그건 네 마음이 되는 거고 너는 그 마음에 의해 심판 받게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럼에도 그 말씀으로 땅의 부자가 되는 것, 그것이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의 목적이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옛날에, 아니 옛날도 아니죠. 불과 뭐 십 칠 세기까지도 유럽의 기독교가 프레스토 존이라는 메시아를 찾아다닌 거 아십니까? 한 400년, 500년 동안. 중세 때에 기독교와 무슬림이 엄청난 전쟁들을 치렀잖아요. 그래서 먹고 먹히고 뭐 어마어마한 피를 흘렸단 말입니다. 근데 그 유럽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는데 동방에 프레스토 존이라는 기독교 국가를 관장하고 있는 어떤 왕이 있다고 소문이 퍼졌어요. 그리고 그가 십만 보병을 거느리고 있고 어마어마한 재물을 소유한 그런 존재라고 해서 교황이요 실지로 그 사람을 찾아오라고, 그래서 무슬림들 박살내자고 사람들을, 배를, 선단을 파견하기도 했어요. 근데 재밌는 건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에도 유럽의 교회들이 그 프레스토 존을 찾으러 다녔어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ㅎ. 근데 기독교가 오백년 동안 그걸 찾아다녔다니까요. 예수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힘을 갖고 있는 어떤 기독교인이 있다는데 그들은 우리를 도와줄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들의 하나님은 ‘그 정도’의 하나님이었던 거예요. 그를 우리의 메시아로 삼겠다고 오백년 동안 찾아다녔다니까요. 종교개혁 이후에도. 그걸 무슨 기독교라고 합니까? 그게 무슨 개혁입니까? 그리고.


기독교는 그렇게 그러한 것으로 이 땅에서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 진리를 내 마음으로 가져서 그냥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라져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을, 진리를 마음으로 갖게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게 말이 없어져야 돼요. 자기 입에서 하릴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말이 이게 혹시 다른 이들에게 그냥 ‘내 말’ 로 들려질까봐 겁이나 말이 없어져야 되는 거라니까요.
침묵은 금이라는 게 그런 의미에서 쓰는 말이에요. 진리는 침묵이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툭 털어서 쏟아내라고 할 때는, 그 때는 폭포수처럼 그냥 쏟아내야죠. 그러나 아무 때나 그렇게 가벼이 흘려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 아래의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그런 이들은 지금 기실 도적질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의 목적이 되고 말았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씀을 착하게 살자, 구별된 삶을 살자, 열심히 일해서 상급받자, 뭐 그냥 그 정도.


모든 종교들이 다 추구하는 거. 그건 진짜 먹는 게 아닙니다. 그게 동록이고 그것이 배설물로 자신의 처소를, 자신의 성전을 짓는 좀의 짓거리인 거예요.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보물인 진리를 씨로 품은 하늘이 되셔야 되고 그 하늘 안에 진리의 말씀을 차곡차곡 쌓으셔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복음을 전파하라, 고 파송하시면서 주머니와 전대를 가져가라 그러신 거예요. 가져가지 말라, 아닙니다, 여러분. 어디서는 가져가지 말라고 그러고 어디서는 가져가라 그러는데 니네 것 그거 가져가지 말고 내가 말하는 그거 가져가 이런 말이에요. 그게 무슨 주머니냐 하면 보배를 담은 주머니에요. 그릇이 되어 가라! 이런 말. 그럼 또 그게 뭔지 알아봐야 되잖아요? 다음 주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이미 이 주머니, 이 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는 하늘들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진리가 하늘 안에서 그렇게 보물로 쌓여가고 있고,
그것은 그 어느 도적도 와서 도적질 해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그것으로 족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행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