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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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묵상

나는 스스로 하는 자가 아니다 - 동행 2

Hebrew 2023. 6. 15. 19:07
나는 스스로 하는 자가 아니다 - 동행 2 

 

“그 날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 즉”(눅2:43-46a) 



왜 예수가 동행치 않았는데도 알지 못했는가? 

우리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초점을 둘 때 그곳에 주님이 있는지 없는지 안보인다. 

오로지 지금 내가 무얼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은 항상 그분의 이름이고 그분의 앞에서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사역을 하고…” 

그의 삶은 온통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과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 말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집중하므로 

정작 그분의 임재를 놓칠 수 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가느냐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집중해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에 잘못한 것은 없는가? 

내가 사람들을 잘 섬기고 있는가? 덜 베푼 것은 아닌가? 

이렇게  “내가”에 집중하는 사이에 주님의 임재를 놓치는 것이다. 

내가 맞추어야 할 초점에서 어긋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내 눈에 눈꼽이 낀 것은 아닌가, 옷은 제대로 입었나?  

내 몸가짐, 나의 자세는 바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어난 첫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 그분께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 하루의 모든 출발에 앞서 먼저 그분을 향하는 것이다. 

주님을 알기를 원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원하고 그분을 만나서 교제하기 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놓치지 않는다. 

예수의 부모도 예수에게 집중했다면 예수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야 할 자신의  스케줄에 집중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나쁜 이유로 주님을 놓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집중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집중하느냐 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어떠냐는 것은 그분이 하실 일이지 나의 소관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바깥에서 한껏 때를 묻히고 올 때 보면 

그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어린아이 자신이 아니라 그 부모이다. 

부모가 아이를 씻기고 단장시킨다. 

그가 부모에게 달려 오니까 그 일을 할 수 있다. 

일어나자 마자 ‘엄마’하고 달려 오니까 

엄마가 그를 씻기고 옷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러야 할 자가 누구이고 의지해야 할 자가 누구인가? 

내가 달려갈 자가 누구인가  

그를 향할 때 나를 깨끗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다. 

그렇게 그분을 향하는 사이 내 눈에 눈꼽도 뗴어지고 

흉허물도 지워지고 더렵혀진 때도 지워진다. 


나는 스스로 하는 자가 아니다. 그분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