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삶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 11:32)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마서 15:31)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언약을 따라서

27강.새 언약(7)

Hebrew 2022. 11. 11. 14:22




27강.


새 언약(7)




오늘은 새 언약의 핵심을 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이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는 자리이기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자리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신명기 21:23절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정말로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 갈라디아 3:13절에는 이렇게 증언 합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저주 받으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속죄이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며
그 안에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과 영원한 기업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십자가는 아랑곳없이 마치 십자가를 부적처럼
도깨비 방망이처럼 알라딘의 램프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유명한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은 이 세상에 필요한 어떤 것도 달라고 하지 못하겠더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한 가지라도
가지고 계신 것이 있었습니까?
속옷 까지 다 벗겨진 주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저주를 받지 않고 모든 복을 받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보이는 것은 성도의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로마서 8:24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런 것들은 사람의 수나 힘이 있으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경은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어서 보암직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성경은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이 치열한 이유는 탐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탐심을 마치 소망처럼 속이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 완성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기억하고 전해야 할 내용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찬식 때만 듣는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찬식은 일 년에 한 두 번만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여서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날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개신교도 주일마다 성찬식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찬식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이 전하여지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전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만이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는 자리이며 또한 자기 백성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3:6-18절입니다.)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죽이는 옛 언약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시대에만 수건이 가려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구약을 읽으면서 수건이 가려져 있다면
주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란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새 언약을 봅니다.
 
히브리서 8:8절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브리서 8:13절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2:24절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시면 주인의 아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 주인이 무엇으로 분노하며 진멸하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기준이 그 아들의 피, 새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10:26~29)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밝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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